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11.24.


《농적 삶을 위한 사유》

 서성열 글, 좋은땅, 2021.4.28.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오려는데, 이웃 면소재지를 지날 무렵, 이 마을 어린배움터 아이들이 시끄럽고 자잘한 말소리로 떠든다. 도란도란 이야기가 아니다. 거칠고 막된 말씨가 잔뜩 섞여 시끄럽다. 이 아이들은 이 말씨를 누구한테서 듣고 왜 고스란히 따라할까? 거칠고 막된 말씨를 쓸수록 잘난척이 아닌 갉아먹기가 되는 줄 하나도 모르지 싶다. 아마 배움터 길잡이나 집안 어른 누구도 이 말씨를 다스려 주지 못하지 싶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가? 시골아이뿐 아니라 서울아이도 말이 찌들고 죽는다. 배움터를 다닐수록, 또 일터를 다닐수록, 사람들 말씨는 상냥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미움과 짜증이 가득 담긴 사납말로 흐른다. 나라지기가 되겠다는 이들뿐 아니라, 감투를 쓴 모든 어른이란 이들을 보라. 아름말이 어디에 있는가? 《농적 삶을 위한 사유》를 읽으며 여러모로 한숨이 나왔다. 책이름을 이렇게 붙여서야 누가 읽을까? 배운 티를 내서야 배운 사람일까? 배운 티는 고개숙이는 벼처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은, 배울수록 어린이한테 더 다가서고 시골 할매하고 어깨동무하는 말씨로 간다는 뜻이다. 별이 흐르는 밤에 별빛을 보며 생각을 다스린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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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11.23.


《길》

 주나이다 그림, 비룡소, 2021.9.30.



집에서 조용히 쉰다. 아니, 언제나처럼 집에서 조용히 일한다. 글을 쓰는 삶길을 걷자고 생각한 1994년 1월부터 여태까지 하루를 쉰 적이 없다. 나한테 ‘쉬다’란 오직 “숨을 쉬다”이다. 숨을 쉬니까 ‘늘 쉬’기에, 따로 쉼날을 둘 생각이 아예 없다고 할 만하다. 이 별에 태어난 몸이 코가 몹시 나빠서 아기 적부터 ‘숨쉬기’가 가장 어렵고 힘들며 지치고 고단한 일이었기에, 나로서는 ‘쉬다’를 늘 ‘숨쉬다’로 바라볼밖에 없었다. 팔다리가 부러질 적보다 코로 숨을 쉬기가 어려워서 숨이 막힐 적에 훨씬 아팠으니, 하루 내내 늘 아픈 채 살아온 셈이다. 숨쉬기가 멀쩡한 사람은 ‘쉬다’를 헤아리지 못하리라 느낀다.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참말로 숨쉬기가 뭔지 못 느끼지 않을가? 《길》을 장만해서 읽고 아이들한테 건네는데 어쩐지 시큰둥하다. 굳이 다시 들추거나 더 읽지는 않네. 주나이다 그림책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서울살림(도시문화)’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주나이다 그림에는 ‘쉴’ 틈이 없어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자랄 틈이나 들풀 한 포기가 씨앗을 퍼뜨리며 돋을 틈도 없지 싶다. 서울이란 곳은 안 나쁘다. 다만, 아직 온누리 서울(도시)은 온통 잿빛이 가득해서 숨쉴 구멍이 없을 뿐.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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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11.22.


《책방뎐》

 이지선 글, 오르골, 2021.11.22.



바람을 쐰다. 구름을 본다. 샛노랗게 구름을 물들이며 멧기슭으로 나란히 퍼지는 노을빛을 온몸으로 받는 들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혼자서 누린다. 얼마 앞서까지 작은아이랑 같이 달렸고, 그러께까지 큰아이도 함께 달렸으나, 두 아이가 스스로 자전거를 배우지 않으면 이제는 혼자서 누릴 바람이요 구름이며 노을이다. 이웃님이 누리글집에 남긴 글하고 빛꽃(사진)을 보다가 짤막하게 석줄글을 적어 보았고, 일본글로 옮겨 보았다. 전주 마을책집 〈잘 익은 언어들〉 지기님이 쓴 《책방뎐》을 읽었다. 생각보다 덜 춤스러운, 그러니까 춤사위가 적으면서 얌전한 글이어서 ‘춤사위를 글로 옮길 적에는 다르네’ 하고 생각했다. 글도 춤추듯 신나게 쓴다면, 그리 멀잖은 지난날에 시골아이뿐 아니라 골목아이(도시아이)도 널뛰기를 놀면서 까르르 웃었듯, 홀가분히 목소리를 내는 글이라면 한결 빛났으리라 본다. 나도 널뛰기를 놀았지만, 다들 어디에선가 널을 주워 오고, 받침으로 삼을 돌이 없어도 이래저래 꾸려서 널을 뛰었다. “설도 아닌데 무슨 널뛰기냐?” 하고 나무라는 마을 할배 말을 듣고도 헤헤 웃으면서 잘도 놀며 살았다. 모든 길은 노래하는 놀이로 나아가기에 미움도 창피도 시샘도 없이 환하게 사랑에 살림에 삶으로 피어나지 싶다.


날씨가 흐려도 바깥에서 거닐면

하늘을 느끼고 구름을 보면서

마음이 한결 넓게 자라지 싶습니다


天氣が曇っても外を?いたら

空を感じて雲を見ながら

心がひときわ廣く育ってほしいです。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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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11.20.


《얼룩 고양이와 담배 가게 할머니》

 스기사쿠 글·그림/장지연 옮김, 미우, 2018.5.31.



아침나절에는 햇볕을 쬐며 마당에서 가볍게 춤을 추고, 저녁나절에는 별빛길을 거닐며 느긋이 빙글빙글 돈다. 사름벼리 씨가 달은 왜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느냐고 묻는다. “달은 왜 빛을 내지 않을까? 달한테 물어보았니?”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물으면 스스로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으로 묻는 길을 잊기에 스스로 목소리를 듣는 귀를 잃는다. 아이야, 네 마음을 트렴. 아이야, 네 눈을 뜨렴. 너는 무엇이든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있단다. 《얼룩 고양이와 담배 가게 할머니》를 읽었다. 고양이하고 할머니가 얽힌 삶을 애틋하면서 따사로이 담았다. 아름다운 그림꽃책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이야기에 눈물이 났다. 붓끝에 삶·살림·사랑을 실으면 저절로 아름책으로 피어난다. 멋을 부릴 일이 없다. 삶을 그대로 담으면 우리 이야기는 모두 아름꽃으로 퍼진다. 낮에 등허리를 펴려고 누워서 눈을 감고 달이며 별한테 물었다. “달은 빛을 내지 않아. 만든 돌이거든. 별이 빛을 내. 스스로 태어났거든.” 꿈결에 들은 말을 아이한테 이어준다. 아이는 이 말뜻을 알아차릴까? 이 말에 깃든 이야기를 천천히 새기기를 빈다. 때려박거나 올려세운들 빛이 안 난단다. 가만히 지어 사랑을 담은 숨결이라면 저마다 다르게 빛난단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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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11.21.


《섬 위의 주먹》

 엘리즈 퐁트나유 글·비올레타 로피즈 그림/정원정·박서영 옮김, 오후의소묘, 2019.4.29.



달걀을 장만하러 읍내에 간다. 달걀은 우리도 먹으나, 마을고양이한테 이따금 한 알을 준다. 사냥을 못해 좀 굶었구나 싶을 적에 주고, 기운을 내어 사냥을 하라고 속삭인다. 큰고장이라면 사냥하기가 어려울는지 모르나, 시골에는 고양씨한테 사냥감이 아직 많다. 사람도 고양씨도 스스로 살아갈 만한 터전이 시골이라고 느낀다. 읍내마실을 하며 돌아올 적에 택시를 부를까 했는데 오늘 따라 다들 쉬네. 이웃마을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온다. 들길을 쉬엄쉬엄 걷다가 쉬다가 걷다가 집에 닿는다. 새롭게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든다. 들길을 걸었기에 놀라운 구름춤을 만났다. 《섬 위의 주먹》은 손발이 흙빛이 되어 흙내음이 나는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이야기씨앗을 들려준다. 배움터 길턱을 디딘 적이 없고, 책을 읽은 적이 없으나,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손으로 지을 줄 알았다지. 이제 온누리 아이들은 배움터를 다니고 책을 숱하게 읽는데,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줄 알까? 배움터를 열두 해뿐 아니라 열여섯∼스무 해씩 다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알까? 배움터를 오래 다닐수록, 또 책을 많이 읽을수록, 스스로 할 줄 아는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삶을 읽는 슬기나 눈빛까지 뿌옇게 빛이 바래지는 않을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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