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하는 글쓰기

― 이승철, 홍일선, 이재무 그대들은 잘 계신가?



  1998년이었지 싶다. 그해에 대학교를 그만두었는데, 동아리에서 늦도록 즐거운 이야기잔치를 누렸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술병을 앞에 놓고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돌아가면서 했다. 숨기려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술잔을 비우기로 하고서 한 사람씩 ‘털어놓기’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아무도 ‘속마음 드러내기’를 못했다. 돌고 돌아 나한테 오기 앞서 다른 이들 모습을 볼 적에 ‘왜 이렇게 다들 속마음을 못 드러내지?’ 싶었으나, 정작 내 몫이 되니 나도 내 속마음을 못 드러냈다. 달이 가고 해가 흘러 2018년에 새삼스레 생각한다. 이제는 굳이 가슴에 묻어둘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지 싶다. 말하지 않으니 서로 모른다. 말하지 않기에 안 달라진다. 이름을 숨기니까 다들 모를 뿐 아니라, 그 이름인 사람도 스스로 달라질 낌새가 없다. 좋은 님한테 “난 네가 좋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겠지. 궂은 이한테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할 테고. 나는 1999년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가면서 ‘책으로만 보던 숱한 작가나 문인’을 ‘얼굴로도 보고 목소리로도 듣고 술자리에서나 일터에서나 으레 마주했’다. 출판사 막내였기에 모든 술자리에 ‘술 따르는 젊은 사내’로 불려갔고, 문단뿐 아니라 책마을 ‘어른’이라 일컫는 이들은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가 따라 주는 술이 아니고는 마실 생각을 안 했다. 더구나 막내인 내가 술자리가 힘들어 그만 집에 가야 한다고, 전철 끊어지니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은 으레 한 마디를 했다. “야 임마, 너희 출판사 사무실에서 자면 되잖아.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자면 되지.” 이러면서 밤을 지나 새벽에 이르도록 붙잡으니 매우 고되었다. 그때에는 몰랐지. 참으로 몰랐지. 왜 나이든 ‘문단 어른·책마을 어른’이라는 이들이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 손이나 허리나 볼이나 허리나 엉덩이나 허벅지를 쓰다듬거나 만지는 줄 까맣게 몰랐지. 그러나 속으로는 되게 더러웠다. 그래서 그때에는 짜증스럽고 싫어서 막술을 마시면서 그런 더러운 손길을 잊으려 했다. 그들은 몰랐으리라. 그들이 더러운 손길로 내 볼을 살살 쓰다듬는 짓이 싫어서 술잔을 한칼에 털어넣은 까닭을. 그들은 그저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젊은 사내인 줄로만 여겼겠지. 이제 나는 그런 짜증스럽고 싫고 더럽던 이들 손길을 잊고자 막술을 마시지 않는다. 맛난 술을 가끔 알맞게 즐기려 한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생각한다. 지난날 어떤 ‘어른들께서’ 어떤 짓을 했는지, 문득문득 떠오르면 ‘그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털어놓을 만하구나 싶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 이야기를 들추는 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1999년 그해부터 2004년까지 보고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참 지저분한 고은 시인이라서 그이 시집은 안 쳐다본다고 하는 ‘책마을 여자 어른’이 많았다. 최영미 시인을 비아냥댄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이는 2004년에 나를 해코지한 사람이다.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나를 해코지할 적에 이녁 곁에 홍일선 시인이 나란히 앉아 이죽거리면서 “야, 왜 너 안 받아 줘? 네가 받아 줘야지? 이 xx가 말이야?” 하면서, 이승철하고 홍일선 이 두 사람은 성추행을 손사래치는 나한테 “문단이나 출판계에서 너 같은 놈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따위를 읊었다. 이 둘 곁에 이재무 시인이 있었고, 이재무 시인은 “난 소주만 있으면 돼.” 하면서 이승철·홍일선 두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는 짓을 흘려넘겼다. 이른바 방관자. 이들이 하는 짓이 참 터무니없기도 했지만, 2004년 이날 뒤로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이라는 분, 또는 작가나 평론가라는 이들을 굳이 만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이 있는 모임이나 자리에 누가 나를 데려가려고 해도 몽땅 손사래쳤다. 그들이 나를 문단이나 책마을에 못 들어오게 막든 말든, 나 스스로 문단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하고, 이들이 권력을 부리는 큰 출판사하고는 등돌리기로 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열 해쯤 먹고살 길이 막혀 굶을 수 있었으나, 이쯤 얼마든지 견디면서 헤쳐나가자고 여겼다. 황해문화 김명인 편집위원이 매체와 만나서 한 말을 기사로 읽어 보는데,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나 방조자’라는 그럴싸한 말은 하되, 그런 짓을 한 사람들 이름은 하나도 안 밝힌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서, 어떤 잘난 문단 어른이 잘난 짓을 하셨는지 하나도 안 밝히고 그대 가슴에만 묻어둔다면,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이자 방조자’ 따위 말은 읊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라면 평론질도 대학교수질도 그만두기를 바란다. 작품을 비평할 적에만 작가 이름을 들지 말 노릇이다. 막짓이나 막말을 일삼은 이들을 나무랄 적에도 그들 이름을 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말하는 글쓰기가 되기를 바란다. 청소 좀 하자. 먼지가 너무 오래 쌓여서 더께가 되었다. 더께를 벗기자니 아주 박박 문질러야 한다. 다들 소매를 걷어붙이자. 지저분한 집을 참말로 말끔히 치우는 글쓰기를 하자. 2018.2.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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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2 아이곁에서 쓰는

글벌레수다 : 철드는 빛을 누리는 길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이곁’에서 쓰면 된다고 들려준다. 어린이한테도 푸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똑같이 말한다. 어린이한테 “아이곁에서 글을 쓰면 돼.” 하고 들려주면 “우리 곁에서 글을 쓰라고요?” 하고 되묻는데, “그래, 어린이 여러분은 어린이 여러분 곁에서 쓰면 됩니다.” 하고 보탠다. 이때에 이미 알아차리는 어린이도 있지만, 미처 못 알아차리는 어린이도 있다. “어린이 여러분이 모든 말을 다 아나요?” “아니요.” “어린이 여러분이 모두 안다면 이렇게 배움터를 다니며 배우지 않겠지요?” “네. 그러네요.”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이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굴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어떻겠어요?” “아!” “어린이 여러분은 어른 흉내를 내면 글이 다 망가져요.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보다 어린 동생을 헤아리며 글을 쓰면 글이 빛나요. 그리고 어린이 여러분이 뭘 조금 알 적에는, 아직 잘 모르는 동무가 있게 마련인데, 아직 잘 모르는 동무한테 맞춰서 부드럽게 사근사근 들려주는 말씨로 글을 쓰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푸름이한테는 조금 다르게 들려준다. “푸름이 여러분은 틀림없이 어린이보다 많이 알고 넓게 알고 깊이 압니다. 그렇지만 스무 살 어른이나 마흔 살 어른이나 예순 살 어른이나 여든 살 어른보다 잘 알거나 많이 알거나 깊이 알까요?” “그럴 때도 있겠지만, 아닐 때도 있겠지요.” “푸름이 여러분은 ‘어른’으로 무르익는 길에 서는 자리요 나이예요. 그래서 어느 낱말보다도 ‘어른’이라는 낱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른이요? 성년 아닌가? 스무 살이면 어른 아닌가?” “몸이 많이 자라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해서 어른으로 여기지 않아요. ‘어른’이란, 얼이 제대로 찬 사람인데, 얼이 제대로 차려면 철이 제대로 들어야 해요. ‘철’이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네 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해를 이루는 네 가지로 다른 철이 어떻게 흐르는지 살필 줄 알고 읽어내어 살림을 지을 수 있기에 ‘철들다·얼차다’라 하고, 네 철을 익히고 안다면 한 해를 이루는 삼백예순닷새라는 다 다른 날을 그야말로 다르게 알아채고 느껴서 살림을 가꾼다는 뜻이에요. 푸름이 여러분이 스스로 어른으로 서는 길을 걸어가는 그대로 글을 쓰면, 푸름이 여러분 글은 언제나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나이가 제법 든 여느 어른한테는 또 다르게 들려준다. “나이를 먹기에 ‘어른’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기만 하면 ‘낡다·늙다’라고 여깁니다. ‘나이만 먹기 = 나이만 늘리기’라서 ‘늘다 = 늙다’로 치닫거든요. 한 해씩 쌓아가는 나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살릴 줄 알기에 어른이라고 여겨요. 요샛말로는 ‘나이’라 하지만 고작 온해(100년) 앞서만 해도 ‘낳’이라 외마디로 가리켰고 ‘낳이’라는 낱말에서 ㅎ이 떨어져서 ‘나이’로 적을 뿐입니다. 곧, 아이를 낳는 ‘낳이’도 있지만, 삶과 살림과 사랑을 낳을 줄 안다는 뜻에서 ‘나이’를 머금는 어른입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살아낸 나날을 돌아보면서,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들려줄 삶씨앗과 살림씨앗과 사랑씨앗을 말씨앗으로 가다듬어서 글씨앗으로 옮기면 되어요.”


  스스로 사람빛을 잊고서 줄거리를 짜맞추면, 이때에는 이야기에 이르지 못 한다. 이야기에 못 이르면 그냥 줄거리로 그친다. 이른바 ‘문학’이라는 탈을 쓴 모습에 그치니 줄거리(소재)에 얽매이고 목소리(주제)에 갇힌다. 우리는 ‘문학’도 ‘에세이’도 ‘논문’도 ‘텍스트’도 아닌 ‘글’을 쓸 노릇이다. 문학이 아닌 이야기를 여밀 적에는 미움씨 아닌 사랑씨를 심지만, 이야기 아닌 문학에 붙들릴 적에는 그만 사랑씨 아닌 미움씨를 심는다.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으려면 ‘이야기’를 담는 ‘손끝’을 ‘철드는’ 숨결로 가다듬어서 ‘어른’으로 일어서는 마음을 옮기면 된다. 아주 쉽다. 누구나 스스로 어른이 되려고 하면 말을 말답게 펴고 글을 글로 나눌 수 있다.


ㅍㄹㄴ


《태양의 집 5》(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4)


송별회는 안 해도 돼

→ 배웅모임 안 해도 돼

→ 배웅자리 안 해도 돼

→ 배웅잔치 안 해도 돼

45쪽


난 오늘 식사당번인데

→ 난 오늘 밥지기인데

→ 난 오늘 밥꾼인데

→ 난 오늘 부엌님인데

→ 난 오늘 부엌지기인데

47쪽


이제 그만 파장하자고

→ 이제 그만하자고

→ 이제 끝내자고

52쪽


성대하게 보내줘야지

→ 북적북적 보내줘야지

→ 넉넉히 보내줘야지

69쪽


철창 신세 안 지게 조심해

→ 사슬살이 안 하게 살펴

→ 고랑 차지 마

77쪽


수면부족으로 자율신경이 망가져서 이상해졌어

→ 졸리니 내 빛줄기가 망가져서 뒤뚱거려

→ 나른하니 내 빛톨이 망가져서 아리송해

→ 지치니 빛톨이 망가져서 어지러워

79쪽


두 사람으로 망상해 버렸어

→ 두 사람으로 꿈꿔 버렸어

→ 두 사람으로 헛꿈 그렸어

123쪽


《태양의 집 7》(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4)


동네사람인데 1박 여행이라니

→ 마을사람인데 하룻밤이라니

→ 마을사람인데 하루 묵다니

32쪽


그건 농담이고∼ 실은 지지부진했겠지―

→ 뭐 놀림말이고, 막상 더뎠겠지!

→ 그냥 빈말이고, 아마 굼떴겠지!

135쪽


《태양의 집 11》(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5)


그동안 전과가 좀 많았어야지

→ 그동안 사달이 좀 많아야지

→ 그동안 말썽이 좀 잦아야지

123쪽


반짝반짝거려. 화이팅

→ 반짝반짝해. 힘내

→ 반짝거려. 잘해 봐

→ 반짝여. 애써 봐

131쪽


《고물 로봇 퐁코 9》(야테라 케이타/조원로 옮김, 소미미디어, 2025)


거짓말 탐지기 기능으로 알 수 있답니다

→ 거짓말찾기로 알 수 있답니다

→ 거짓말읽기로 알 수 있답니다

27쪽


요시오카 씨네 장녀 분이란다

→ 요시오카 씨네 맏딸이란다

→ 요시오카 씨네 맏이란다

34쪽


《아사코의 희곡 2》(와다 후미에/심이슬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3)


고기를 잡아 온 어선에서 직접 들여오는 거라 정말 신선하답니다

→ 고기를 잡아 온 배에서 바로 들여오니 참말 싱싱하답니다

→ 고깃배에서 곧바로 들여오니 아주 깨끗하답니다

20쪽


가끔씩 일을 맡기지 않으시는 거죠?

→ 가끔 일을 안 맡기시지죠?

25쪽


자기들 멋대로 내 인생 계획을 세우고 있어

→ 제멋대로 내 삶길을 세우네

→ 저희 멋대로 내 길을 세우네

37쪽


집중 포화를 당하고 있는 동안 졸음과 싸우는

→ 뭇매를 맞는 동안 졸려서 싸우는

→ 모다깃매 맞는 동안 엄청 졸린

63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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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1 마음을 담는다

글벌레수다 : 날마다 살림하는 글



  누구나 말로 마음을 나타내지만, 선뜻 말꼬를 못 터는 아이와 어른이 있게 마련이다. 뭇사람이 지켜보는 자리가 아닌, 혼자 있는 자리에서조차 혼잣말을 스스럼없이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붓을 쥐고서 종이를 펴면 어쩐지 “하고 싶던 말”을 슥슥 쓰기도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쓸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을 썩 잘하지 않는 사람 누구나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다. 수줍거나 창피하다고 여기는 사람이기에 글을 잘 쓰지 않는다. 수줍어하지 않고 창피한 줄 모르면서 말이 번드레한 사람이 글을 잘 쓰지 않는다. 스스로 밝히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일 적에 ‘글쓰기’를 하고, 이 글쓰기는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 아닌 “오직 마음을 담은 글”이다.


  말을 잘 해야 하거나 글을 잘 써야 하지 않는다. 마음을 말로 담을 노릇이고, 마음을 글로 옮길 일이다. 마음이 없는 채 줄줄줄 흘러나오는 말글이라면 그저 덧없다. 마음을 숨기거나 가린 채 겉으로 치레하는 말글이라면 그냥 부질없다. 제 마음을 밝히는 시늉에 그친다든지, 보기좋게 꾸미려는 마음이라면, “마음을 담은 척하는 글”일 뿐이다.


  처음부터 책을 내려고 노리면서 쓰는 글이라면 으레 알맹이가 없다고 느낀다. 처음부터 남한테 보이려고 쓰는 글월이라면 껍데기를 덧씌우는 글치레에 얽매인다고 느낀다. 서로 마음을 나누려고 쓴 글을 모은 책이라면, 많이 팔리건 적게 팔리건 아름책이다. 저마다 마음을 밝히려고 주고받은 글월을 엮은 책이라면, 글쓴이 이름값이 있건 없건 사랑스럽다.


  집은 어떤 곳인가?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곳인 집이고,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곳인 집이다. 살림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집이고, 느긋이 지내면서 삶을 즐기려는 집이다. 우리집은 나와 네가 저마다 나름대로 가꾸는 손길이 흐르는 터전이다. 이웃집은 나와 다른 누가 스스로 일구는 손빛이 밝은 터전이다. 오늘날에는 다 다른 사람이 저마다 손수 가꾸고 짓고 다듬는 살림집이 거의 사라진다. 오늘날에는 서울이나 시골 모두 ‘잿더미(대규모 아파트단지 또는 오피스텔 또는 빌라)’가 가득하다. 몸소 마음을 담아서 지내는 집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뚝딱뚝딱 똑같이 짜맞춘 잿더미를 ‘부동산’으로 목돈을 들여서 얻어서 몸을 둔다면, 이런 잿더미에서 살아가는 마음이란 무엇이겠는가?


  다 다른 집이 모여서 어느새 이루는 마을이 아닌, 하루아침에 똑같은 잿더미가 잔뜩 쌓인 데에서는 ‘마음’도 ‘손길’도 ‘눈빛’도 없게 마련이다. 이제는 누구나 글쓰기를 누리거나 즐길 수 있는데, 정작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마음을 다 다른 말씨·글씨로 지피는 이야기”는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거나 드물다. 다 다른 마음을 담아내는 말이나 글이라면, 꾸미지 않고 치레하지 않고 덧바르지 않는다. 이따금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릴 수 있되, 어렵거나 뒤트는 옮김말씨나 일본말씨가 안 춤춘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 먼저 무엇을 어떻게 가꿀 노릇인지 헤아릴 노릇이다. 이 삶에서 스스로 마음을 어떻게 가꿀는지 살필 노릇이다. 오늘 이곳에서 어떻게 사랑이라는 씨앗을 말과 글에 얹어서 ‘말씨·글씨’를 이루려 하는지 짚어야겠지. 우리는 아직 말을 말로 못 듣고, 글을 글로 못 읽기 일쑤이다. 제대로 못 보는 ‘닫힌눈’이거나 ‘감은눈’이다. 이제는 봄눈처럼 싹을 틔우고 활짝 열어젖히는 마음빛을 말글에 담을 때이지 않은가.


ㅍㄹ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황효진·윤이나, 세미콜론, 2021)


MBTI로 따지자면 첫 자가 E인 인간이구나

→ 열여섯을 따지자면 처음이 ㅂ이구나

→ 마음을 따지자면 첫글이 ㅂ이구나

→ 밑꽃을 따지자면 첫글씨가 ㅂ이구나

→ 바탕을 따지자면 ㅂ인 사람이구나

10쪽


여러 가지 이유로 그때는 편지를 주고받지도, 결국 책을 만들지도 못했지만요

→ 여러 탓에 그때는 글월을 주고받지도, 끝내 책을 내지도 못했지만요

→ 여러 일이 있어 그때는 글을 주고받지도, 책을 내지도 못했지만요

12쪽


이것이 저를 둘러싼 현실이고 일상이며, 오늘의 삶입니다

→ 저를 둘러싼 삶이 이렇습니다

→ 제가 살아가는 나날이 이러합니다

→ 제 삶은 이렇습니다

→ 저는 오늘을 이렇게 삽니다

36쪽


이제야 다음 챕터로 갈 수 있겠네요

→ 이제야 다음으로 갈 수 있네요

→ 이제야 다음길로 갈 수 있네요

→ 이제 넘어갈 수 있네요

68쪽


내게 품위를 부여하는 일은 비극 속에서도 코미디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이라고 믿는 제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은, 이것이겠지요

→ 나는 서글퍼도 웃음씨를 생각하자고 여기기에 멋스럽겠지요

→ 아프더라도 하하 웃자고 생각하기에 빛나겠지요

→ 괴롭지만 넌덕을 부리자고 생각하니 사람이겠지요

86쪽


몇 가지 형용사로 수식되는 추상적인 노년의 여성이 되고 싶다는 말 대신에, 우리가 이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 몇 가지 그림씨로 가리키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닌, 우리가 이곳에 이름으로 있는 이야기로 낱낱이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 몇 가지 어떻씨로 나타내는 할매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우리가 서로 이름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로 차근차근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102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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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글쓰기 / 숲노래 글꽃


누구나 글꽃

4 풀꽃나무처럼



  사람이 가지치기를 할 적에 나무가 반길까요?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꽃줄기를 꺾으면 꽃이 좋아할까요? 어떻겠습니까? 멀쩡히 있는 풀밭을 마구 밟는다든지 삽차로 까뒤집으면 풀이 기뻐할까요? 우리는 사람이라는 몸을 입었습니다만, “내가 나무라면? 내가 꽃이라면? 내가 풀이라면?”처럼 마음으로 스며들어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적잖은 어른들은 잿집(아파트)을 마련해서 살아가는데, 골목집(구도심·원도심)을 ‘안 깨끗하다’거나 ‘어수선하다·어지럽다’ 같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집 한 채가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넘으면 ‘뒤떨어졌다(낙후)’ 같은 말로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팔만대장경’을 품은 절집은 뒤떨어졌을까요? 빛살(전기)이 없더라도 즈믄해(1000년) 넘게 나무판을 정갈하게 지켜준 ‘나무와 흙과 돌과 짚으로 지은 집’은 얼른 허물어 잿더미(시멘트)로 다시 지어야 할까요?


  숲에는 푸른지붕집(청와대)이 없습니다. 숲에는 싸울아비(군인)가 없고, 싸움날개(전투기)가 없습니다. 숲에는 풀꽃나무가 있고, 풀벌레가 살고, 벌나비가 춤추고, 곰에 범에 토끼에 늑대에 오소리에 숱한 짐승이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어느 숨결도 ‘금(구역)’을 긋지 않아요.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알맞게 누리고 나누면서 어우러집니다. 사람들이 멋모르고 건드리거나 파헤치기에 숲이 죽거나 그만 불타고 말아요. 숲은 사랑이 없이 메마른 사람들이 함부로 망가뜨리려는 탓에 시름시름 앓다가 사라집니다.



 ㄱ. 꽃을 함부로 꺾는다면, 사람으로서는 목을 함부로 자르는 셈입니다. 나뭇가지를 함부로 친다면, 사람으로서는 팔다리를 함부로 자르는 셈입니다. 들풀을 함부로 뽑거나 갈아엎으면, 어린이를 마구 밟거나 때리는 셈입니다.


 ㄴ. 모든 풀꽃나무는 다 다른 풀과 꽃과 나무라는 결을 고스란히 이으면서 숲빛으로 피어나고 어우러질 적에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른 숨결이라는 빛을 고이 건사하면서 즐겁게 펼 적에 사람답고 사랑스럽습니다.


 ㄷ. 남보다 좋아 보이도록 글을 매만진다면, 어느 글이든 글빛이 사라집니다. 남이 쓴 글보다 돋보이도록 글을 꾸민다면, 이런 글은 이미 글결을 잃어 ‘글시늉(겉은 글이되 정작 글이 아닌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ㄹ. 풀을 푸르게 품듯 글 한 줄을 품습니다. 꽃을 곱게 고루 곰곰이 고요히 보듯 글 두 줄을 씁니다. 나무 한 그루를 한 아름 안으며 서로 숨결을 나누듯 글 석 줄을 씁니다.



  풀꽃나무처럼 씁니다. 풀빛으로 쓰고, 꽃빛으로 쓰고, 나무빛으로 씁니다. ‘비유법·은유법·활유법·직유법·의인법·대유법·강조법·변화법’ 같은 꾸밈짓(수사법)은 꾸깃꾸깃 접어서 치울 노릇입니다. 글도 말도 얼굴도 몸매도 땅도 집도 옷도 모든 길도 ‘꾸미면 꾸밀’수록 겉치레로 기웁니다. 꾸미지 말고 가꿀 줄 알 노릇이고, 풀꽃나무 숨결을 그대로 맞아들여 사랑을 노래하는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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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글쓰기 / 숲노래 글꽃


누구나 글꽃

3 글 말고 말을 새로



  요즈음 둘레를 보면 ‘글쓰기 배움(강좌·수업)’이 아주 흔합니다. 나라 곳곳에 ‘글쓰기 배움밭’이 있어,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런데 글쓰기는 따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는 일이에요.


  생각해 볼까요? 말하기를 배우면서 말을 하지 않아요. “말을 더 잘 하기”라든지 “말을 솜씨있게 하기”를 가르치는 자리가 있더군요. ‘스피치법·대화법’을 가르치던데요, ‘스피치법·대화법’은 ‘말하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스피치법·대화법’은 오로지 ‘소리내기를 가르칩’니다.


  소리내기를 배우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다만, 소리내기를 배우시더라도 ‘말하기’부터 배워야지요. 말하기는 안 배우면서 소리내기만 배운다면, 우리는 ‘벙긋쟁이’일 뿐이에요. “소리내기만 배우면 = 남이 하는 말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하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ㄱ. 소리내기(스피치법·대화법)를 배워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하기부터 배웁시다.


 ㄴ. 소리내기만 배우면, 남이 하는 말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하는 버릇이 들기에, 그만 스스로 굴레에 갇힙니다.


 ㄷ. 소리내기를 배우려면, 우리 몸·입·혀·이가 어떻게 다른지 스스로 느낄 노릇이에요. 말더듬이는 말솜씨꾼처럼 소리를 낼 수 없어요. 다 다른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소리를 내는 길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ㄹ. “말하기 = 마음밝히기”입니다. 마음을 누구나 알아듣도록 소리로 옮기기에 ‘말하기’입니다. ‘말하기’를 배우는 길이란, “마음을 밝히는 길”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ㅁ. ‘글쓰기 = 말을 옮기기’이고, ‘말하기 = 마음을 밝히기’라면, ‘마음 = 삶을 느끼고 바라보고 헤아려 담아낸 생각’이요, ‘생각 = 다 다른 우리 넋이 삶을 스스로 겪고 누리고 맛보고 해보면서 깨달은 빛이자 씨앗’입니다. “글쓰기 = 삶쓰기”인데, ‘글 = 말 = 마음 = 생각 = 삶’인 얼거리이거든요. 우리는 저마다 다르면서 빛나는 넋(숨결)이니, 우리 넋(숨결)을 그대로 나타내듯 말을 하면 되고, 이 말을 그대로 옮기는 글을 누리면 됩니다.


 ㅂ. “말하기를 배우기 = 삶을 배우기”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삶·살림·사랑·숲에서 태어났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돌아보고, 숲을 바라보고,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길에, 이 모든 삶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서 나타내던 마음이 ‘말’로 태어났습니다. ‘말하기 = 삶짓기’인 셈이에요.


  쉬운 우리말 ‘하늘’은 왜 ‘하늘’일까요? 쉬운 우리말 ‘집’이나 ‘밥’이나 ‘옷’은 어떤 말밑(어원)일까요? ‘몸·마음’은 어떤 말밑이고, ‘글·그림’은 어떤 말밑일까요? ‘가다·하다·날다·보다·심다’ 같은 쉬운 우리말은 무슨 뜻이고 어떤 말밑이면서 어떤 삶을 그린 말일까요?


  말하기를 배울 노릇이라는 이야기는, 우리말을 처음부터 새롭게 하나씩 배운다는 뜻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쉽고 흔한 여느 우리말을 하나하나 새롭게 짚으면서 서로 엮어서 차근차근 바라본다면, 말이 왜 말이고, 말이 어떤 삶을 담았는가를 스스로 알아차리겠지요.


  오늘날은 거의 서울말(표준말)이지만, 얼마 앞서까지 누구나 사투리(고장말·마을말·시골말)를 썼습니다. 사투리란,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삶을 나타낸 말”입니다. 사투리를 쓰던 아스라히 오랜 옛날 옛적 사람들은 글을 몰랐어요. 글은 모르되 늘 말을 하고, 손수 살림을 지었고, 말도 지었어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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