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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꽃―푸르게 읽는 책

《솔로 이야기》 1∼7 / 타니카와 후미코, 대원씨아이, 2012∼2019



푸른목소리 : 사람을 마주하기(인간 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김치하고 빵 이야기부터 할까 싶어요. 한국사람이라면 다들 김치를 잘 먹으리라 여기지요? 빵을 좋아해서 즐기는 푸름이가 많겠지요? 이때에 가만히 생각해 보기로 해요. 김치를 못 먹는 사람이 둘레에 있을까요? 밀가루가 깃든 먹을거리를 몸에 넣으면 끙끙 앓거나 뾰루지가 돋으면서 괴로운 사람을 둘레에서 보았을까요?


  달걀을 먹을 수 없는 몸인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해서 달걀 기운이 섞인 밥이나 국이나 케익이나 빵을 먹었다가는, 그만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괴로운 사람이 있어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든지, 소고기나 닭고기를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어른 가운데에는 술을 못 마시는 몸인 사람, 담배를 못 피우는 몸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 어떤가요? 한국사람이라면 으레 김치를 잘 먹거나 즐긴다고 여길 텐데, 김치라고 하는 ‘삭힌 푸성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라면, 푸름이 여러분은 어떻게 마주하시겠어요? 김치를 먹을 수 없는 동무더러 “넌 한국사람이 아니야!”라든지 “너 한국사람 맞니?” 하고 따지거나 물으실는지 궁금해요. 몸에 받지 않아서 못 먹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냠냠짭짭 맛나게 먹을 수 있을는지도 궁금합니다.


  모든 사람은 달라요.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먹지만 도무지 살이 안 붙어요. 어떤 사람은 적게 먹는데 그만 먹는 대로 살이 붙어요. 어느 사람은 키나 덩치가 크지만 힘이 여리고, 어느 사람은 키나 덩치가 작지만 힘이 세지요. 어느 사람은 다리가 죽죽 뻗지만 달리기를 못하고, 어느 사람은 다리가 그리 안 길어도 달리기를 잘해요.


  얼굴이며 몸매이며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자, 곰곰이 본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몽땅 다 다른 사람인 터라, 서로 사이좋게 어울리거나 지내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더없이 다른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푸름이 여러분이 학교란 곳에 오기까지 만난 적도 말을 섞은 적도 없는 또래를 이 학교라는 곳에서 하루아침에 잔뜩 마주하지요. 더구나 하루 내내 낯선 또래하고 보내야 해요. 학교에서 만나는 어른도 매한가지일 테고요. 처음부터 서글서글해서 누구하고라도 잘 섞이고 말을 하는 동무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낯설거나 서먹서먹할 뿐 아니라,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되도록 서먹서먹하거나 낯선 기운을 못 털어내는 동무도 있어요.


  앞서 김치 얘기를 꺼냈습니다만, 이는 제 얘기입니다. 저는 한국사람이면서 김치라는 곁밥을 거의 못 먹다시피 하는 몸으로 태어났어요. 마흔 몇 해를 살며 하도 김치에 시달리느라 이제는 한두 조각을 몸에 넣을 수는 있지만, 한두 조각으로도 몸이 괴로워하는 줄 느껴요. 저는 김치뿐 아니라 찬국수도 못 먹어요. 찬국수를 빚는 ‘삭힌 국물’을 몸에 넣었다가는 며칠쯤 배앓이를 합니다.


  이런 몸을 타고났는데, 누구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릴 적이던 1980년대에는 ‘김치를 못 먹는다’는 꾸지람과 놀림과 꿀밤만 실컷 먹었습니다. 김치는 못 먹되 갖은 꾸중에 손가락질에 회초리를 먹어야 했어요.


  못 먹는 몸인 사람한테 못 먹는다고 놀리거나 때리기까지 하면, 이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그래도 저는 용케 그 나날을 살아남아서 오늘까지 왔어요. 그래서 푸른벗한테 “사람을 마주하는 일, 인간관계”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고 싶어요.


  우리는 참으로 다른 몸이자 마음이에요. 우리는 서로 다른 동무나 또래가 어떤 마음이거나 생각인지 하나도 못 읽거나 아예 잘못 읽어버릴 수 있어요. 이 대목을 마음에 품어 주셔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나 동무한테는 더없이 깊은 생채기일 수 있어요. 나는 손쉽게 털어내지만 동무로서는 열 해나 스무 해가 넘도록 마음이 다칠 수 있어요. 거꾸로 다른 동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나는 아주 큰 일이 있고, 다른 동무는 가볍게 넘기지만 나는 서른 해 넘게 마음앓이가 되는 일도 있어요.


  어른이라고 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해요. 어른 사이에서도 이 ‘인간관계’가 참 만만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른들은 이를 어떻게 풀까요? 잘 보셔요. 어른들도 서로 즐겁거나 슬기로이 어우러지는 길을 모르는 나머지, 삿대질을 일삼거나 막말을 퍼붓는 분이 있어요. 쉽게 다툰다든지 막짓을 해대는 분도 있지요.


  푸름이 여러분뿐 아니라 어른도 즐겁고 상냥한 사이가 되기를 바라면서 무척 애쓴답니다. 이때에 가장 바탕이 되는 한 가지라면 “내가 나를 사랑하자”라고 할 수 있어요. 푸름이 여러분이 바로 푸름이 여러분부터 깊고 넓게 사랑할 수 있다면, 쉽게 마음이 다치거나 잘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이는 바로 나를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면, 말을 더듬거나 쭈뼛거리거나 어쩐지 서툴거나 엉성한 나를 내가 사랑할 수 있다면, 어렵다 싶은 ‘인간관계’도 살짝살짝 새롭게 푸는 길이 보이리라 느껴요. 힘들면 힘든 대로 있어도 되어요. 조바심을 안 내면 돼요. 끝까지 마음이 안 맞는 동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맞는 동무하고 따사로이 마음을 나누는 길을 가노라면, 어느새 앙금도 실타래도 풀리라 봅니다.


 ......


  다른 사람을 마주하기 어렵다는 푸른벗한테 《솔로 이야기》라는 만화책 꾸러미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 만화책은 2012년부터 한국말로 나옵니다. 2019년에 일곱걸음이 나왔고, 앞으로 더 나오리라 생각해요. 책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둘레에 있는 사람이 저마다 어떤 마음이나 생각일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만화책은 사랑타령을 다루지 않아요. 이 마음은 사랑인가, 아니면 나 혼자 끄달리면서 휘둘리던 모습인가 하고 헤매는 모습을 다루고, 그윽하면서 포근하게 함께하는 고운 사랑을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가꾸는가 하는 살림을 다룹니다. 혼자이기에 쓸쓸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다루면서도, 혼자이기에 홀가분하게 씩씩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나란히 다룹니다.


  마음이 흐르는 결을 찬찬히 짚어 주기에, 또 이 마음을 스스로 곱게 다스리는 결을 넌지시 밝혀 주기에, 《솔로 이야기》라는 만화책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혼자여도 좋다’가 아닙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오늘 내가 스스로 즐거운 길은 어디일까?’를 생각하는 줄거리를 다루지요.


  동무나 또래뿐 아니라 어른이나 동생하고 마주하는 하루가 고단하다면, 그저 조용히 홀로 떨어져서 우리 마음을 읽어 보기로 해요. 그리고 속삭여 봐요. “오늘 하루도 애썼구나. 이제 푹 쉬렴. 사랑하는 나.” 같은 말을. “오늘 하루 힘들었니? 그래 이제 고이 쉬렴. 아름다운 나.” 같은 말을. “오늘 어떻게 보냈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내려놓고 가만히 쉬렴. 상냥한 나.” 같은 말을. 푸름이 여러분이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리 잘못하거나 엉성한 대목을 자주 느끼더라도, 이 모든 모습을 사랑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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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꽃―푸르게 읽는 책

《크리스 조던》 크리스 조던, 인디고서원, 2019.



푸른목소리 : 솔직히 작가가 안정적인 직업인가 생각도 들어서 망설이게 돼요.



  저는 사전을 쓰는 일을 합니다. 이밖에 온갖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하고, 이웃을 만날 적에는 동시를 써서 건네는 일도 합니다. 이제껏 사전이라는 책을 쓰며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는 살림을 건사하면서 배운 삶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일도 하지요.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 나무한테 말을 거는 일이라든지, 나무줄기에 손을 짚거나 볼을 대고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일도 해요. 쑥잎이나 뽕잎이나 감잎을 훑어서 말린 다음에 찻잎이 되도록 덖는 일도 하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갖은 풀벌레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일이라든지, 이 풀벌레를 손등이나 어깨나 팔뚝에 앉혀서 마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도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파랗게 빛나는 바람을 숨 한 줄기로 흐으읍 하고 마시면 제 몸은 어떤 파란빛으로 맑게 거듭나려나 하고 생각하는 일도 합니다. 비가 올 적에는 되도록 가볍고 짧은 차림새로 마당에 서서 빗물을 흠씬 맞으면서 몸씻이도 하고 빗물하고 신나게 노는 일도 해요.


  자, 이런저런 ‘일’, 제가 누리거나 하거나 짓는 일을 몇 가지 적어 보았습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꽤 해요. 다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만히 꼽으면서 ‘일’이라고 했을 뿐, 이를 ‘직업’이나 ‘생계’ 같은 말로는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저를 바라보는 이웃님은 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쏭달쏭하다고 하더군요. 이때에는 그저 제 이름 ‘숲노래’를 불러 주시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나라밖으로 볼일을 보러 가자면 여러 가지 증명서에 제 ‘일’ 또는 ‘직업’을 적어야 합니다. 이때에 저는 “Korean-dictionary writer”라 적습니다. 이름 그대로 저는 “한국말사전을 새롭게 써서 꾸러미로 묶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이러한 돈벌이를 둘레에서는 ‘직업’이라 여깁니다.


  책을 새로 내놓기 무섭에 온갖 신문이며 방송에서 띄워 주고, 출판사에서 목돈을 들여 광고를 실어 많이 팔아 주는 글님(작가)이 있습니다. 이러한 글님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몇 안 됩니다. 척하고 책을 냈더니 10만 권이나 100만 권을 가볍게 팔아치울 수 있는 글님은 적어요. 이런 삶터를 헤아리자면, 푸름이 여러분이 “글을 써서 돈을 꾸준히 넉넉히 벌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딱 잘라서 말씀을 여쭈어야겠습니다.


  한 마디를 보태어, “돈을 꾸준히 넉넉히 버는 일”을 찾고 싶다면 “푸름이 여러분은 글을 안 쓰는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는 다른 곳에서도 매한가지예요. 돈을 꾸준히 넉넉히 벌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작가로뿐 아니라, 청소부로도, 교사로도, 공무원으로도, 편의점 곁일꾼으로도, 가정저부로도, 미용사로도, 여느 회사원으로도, 공장 일꾼으로도,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을 잘 버는 일”이란 그저 돈을 잘 버는 일일 뿐, 우리 삶을 즐겁거나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아니에요. 돈을 잘 벌기에 신나거나 사랑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푸름이 여러분은 “내가 바라는 이 길이 안정적인 직업이 안 될 듯하다”면서 걱정합니다만, “돈을 꾸준히 잘 버느냐 아니냐”는 푸름이 여러분이 어느 일을 어떠한 마음하고 몸짓으로 어느 만큼 오래도록 꾸준히 기쁘고 보람차게 하느냐에 달릴 뿐입니다. 어느 곳에서 어느 일을 하든, 푸름이 여러분이 즐겁고 착하며 참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그 일을 한다면, 어느새 돈을 꾸준히 잘 버는 길을 걷기 마련이에요. 이와 달리 처음부터 “꾸준히 많이 돈이 될 만한가 아닌가”를 따진다면, 바로 이 돈이라는 사슬에 매여서 푸름이 여러분이 바라거나 꿈꾸는 길하고는 아주 동떨어지리라 느껴요.


  한 달 500만 원 벌면 넉넉한가요? 이쯤으로 넉넉하다면 한 달 490만 원은요? 480만 원은요? 470만 원은요? 460만 원은요? 자, 10만 원씩 내려 볼 테니까, 푸름이 여러분이 ‘이 밑으로는 안 된다!’를 잘라 보셔요. 어디에서 자를 만한가요? 그리고 10만 원을 더 주기에 더 나은 일자리가 될는지, 10만 원을 덜 받아도 한결 나은 일자리가 될는지, 푸름이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저는 1994년이라는 해부터, 제 나이 열아홉이던 때부터 한국말사전을 스스로 새롭게 짓는 길을 걸었습니다. 다만,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길을 걷는 줄 알 뿐, 이 길을 걷는 제 삶이 “이 직업”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마음자리에 꿈이라는 씨앗을 심은 삶으로 하루를 맞이하면서 누립니다. 그래서 제 하루는 ‘사전 올림말을 추스르고, 뜻풀이를 가다듬고, 보기글을 새로 쓰고, 이래저래 자료를 갈무리하는 일’로도 쪼개지만, 집안일이나 아이돌보기로도 쪼개고, 나무랑 풀이랑 어울리는 일로도 쪼개며, 풀벌레랑 새하고 노래하는 일로도 쪼개고, 해랑 비랑 바람하고 얼크러지는 일로도 쪼개요.


  어느 쪽이 좋은지 모르겠어서 망설인다면 둘 다 해보기를 바랍니다. 푸름이 여러분은 나이도 몸도 젊어요. 그러니 “돈을 많이 벌 만한 곳”에서도 일해 보시고, “돈을 못 받거나 적게 버는 곳”에서도 일해 보셔요. 꿈하고 닿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몸으로 겪어 보시면 어느새 눈을 번쩍 뜨리라 생각해요.


+ + +


  “안정적인 직업”인가 아닌가로 망설이는 푸른벗한테 살그마니 건네고 싶은 책은 《크리스 조던》입니다. 이분은 영화를 찍는다고 해요. 이분이 찍는 영화에는 사람보다는 새가, 이 가운데 알바트로스라는 바닷새가 돋보인다고 합니다. 입으로 서로 말을 나눌 수 없는 사이인 새일 테지만, 크리스 조던 님은 알바트로스하고 “입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고 해요. 알바트로스를 마주할 적에 “마음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바닷새하고 마주하면서 바닷새 한삶을 영화로 찍는 길이란 얼마나 “아슬아슬하면서 돈이 될랑가 안 될랑가 알 수 없는 일”일까요? 척 보기에도 딱 “돈 안 될 만한”, 이러면서 품도 힘도 잔뜩 써야 하는 일이로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 조던 님은 왜 “더 넉넉하고 꾸준한 돈”이 아닌, “바닷새하고 동무가 되어 이 지구라는 별을 푸르게 가꾸는 길에 징검돌이 되는 일”에 온마음을 기울일까요? 부디 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푸른벗 스스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제 입에서 흘러나올 ‘정답’을 기다리지 마시고, “바닷새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감독” 눈빛을 푸른벗 여러분 마음으로 읽고 느껴 주면 좋겠어요.


  바닷새가 이 지구라는 별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무엇을 먹다가 죽는지, 우리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사람다운 길을 가는지, 모두 고이 마음으로 살펴 주셔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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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꽃―푸르게 읽는 책

《칠색 잉꼬》 1∼7 / 테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 2011∼2012



푸른목소리 : 대학교로 가느냐, 취업을 하느냐, 갈림길에 섰어요.



  하고픈 일, 나아가고 싶은 길, 부딪히고 싶은 꿈, 이런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선뜻 마음으로 붙잡아서 한발을 떼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푸름이 여러분 어버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한다면, 스스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가 하고 돌아보면 좋겠어요.


  우리 앞길을 ‘쉽게’ 생각해도 되느냐고 되물을 만하겠는데, 거꾸로 생각해 봐요. 우리 앞길을 굳이 ‘어렵게’ 생각해야 할까요?


  쉬운 보기부터 생각해요. 자, 오줌이 마려우면 어쩌나요? 말도 안 하고 참나요? 똥이 마려우면 어쩌나요? 입을 꾹 닫고 참나요? 오줌이나 똥이 마려운데 말을 안 하고 참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몸이 힘들고, 나중에는 아프기까지 해요. 똥오줌이 마려운 일은 부끄럽지 않고, 부끄러울 수도 없어요. 그때그때 풀 뿐입니다.


  배고플 적에 어떻게 하나요? 졸릴 적에 어떻게 하나요? 다리가 아프거나 목이 마를 적에 어떻게 하나요? 덥거나 추울 적에는요? 요새는 학교마다 학교옷이 있는데, 봄가을에도 더운 날이 있고, 여름에도 추운 날이 있고, 겨울에도 포근할 때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느 달부터 어느 달까지 ‘이 옷’만 입으라고 시킨다면, 더위나 추위는 안 따지고서 그대로 따라서 입어야 할까요?


  푸름이 여러분, 배고프면 스스로 지어서 먹든, 밖에서 사다가 먹든, 전화를 걸어서 갖다 달라고 하든, 챙겨서 먹을 노릇입니다. 누가 밥을 다 지어서 차려놓은 뒤에 “자, 밥을 먹으렴.” 하고 불러야만, 그때까지 배고파도 꾹 참아야만 하는지 묻고 싶어요. 다리가 아픈데 억지로 참으며 더 걸어야 하는지도 묻고 싶어요. 왜 끝까지 참아야 할까요? 아프거나 힘들면 쉬었다가 가거나 푹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걷는 길이 멀면 택시를 부른다든지, 그냥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요?


  대학교하고 취업이라는 갈림길에 서면 선뜻 어느 하나를 고르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면 둘 다 고르거나 둘 다 고르지 않기로 해봐요. 서두를 일이란 없습니다. 둘 다 해보거나 둘 다 안 해보면 뜻밖에 스스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학교에도 들어가고, 배움삯을 푸름이 여러분이 여러 가지 곁일을 해서 벌어 보기로 해봐요. 이렇게 여러 달 하노라면, 또 여러 해 하노라면 ‘이 둘 가운데 내 마음이나 몸에 걸맞는 길’이 어느 쪽인가를 매우 또렷이 알아챌 수 있습니다. 때로는 푸름이 여러분이 ‘대학교·취업’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도 몸이 버텨내기도 해요. 그때에는 “아, 나는 두 가지를 다 해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씩씩하고 멋지네?” 하고 깨닫겠지요. 푸름이 여러분은 아직 모르기 쉽습니다만, ‘대학교·취업’을 둘 다 하는 젊은이가 제법 많습니다. 이 젊은이는 무척 씩씩하면서도 즐겁게 노래하면서 두 길을 같이 가요. 그리고 서른 살이나 쉰 살이나 일흔 살 나이에도 ‘돈을 버는 길·새로 배우려고 책을 꾸준히 사서 읽고 강의를 틈틈이 챙겨서 듣는 길’을 가는 분도 꽤 많아요.


  그런데 ‘둘 다 안 해보는 길’도 이야기했습니다. 왜 둘 다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어쩌면 두 길 모두 푸름이 여러분한테 안 맞을 수 있거든요. 대학교도 취업도 아닌 새로운 길이 여러분한테 있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냥 ‘우리 집안 가게(자영업)’를 물려받는 길도 있습니다. 시골에서 논밭이나 짐승우리를 돌보는 길, 이른바 농사꾼·축산업자가 되는 길이나, 바다에서 고기잡이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글쓰기·그림그리기(작가)나 가게지기(자영업)나 농사꾼·고기잡이를 두고 ‘취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이런 길도 있답니다. 무엇보다도 대학교·취업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서 반 해나 한 해쯤 여행을 다니거나 조용히 집에 머물면서 지켜보면요, 아주 차분하게 두 길 가운데 한 쪽이 푸름이 여러분 마음에 깊이 꽂힐 수 있어요. 꼭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에 길을 골라야 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이나 스물한 살에 길을 골라도 됩니다. 스물두 살이나 스물다섯 살에 길을 골라도 좋고, 서른 살에 이르러 비로소 길을 골라도 되어요. 어느 길이든 다 같아요.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날 적에 길을 갈 뿐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밝혀 본다면, 저는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대학교를 골랐습니다. 그러나 대학교는 제가 바라던 배움길이 아닌 줄 알아차렸어요. 대학교 강의를 듣는 첫날부터 느꼈고, 한 해 동안 아주 짙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교를 깨끗이 그만두기로 했는데, 이에 앞서 두 학기 동안 신문방송학과 네 해치 강의를 몽땅 들었어요. 네 해치 강의라지만 두 학기로 넉넉하던데, 두 학기 아닌 한 학기나 한 달 만에라도 ‘대학 네 해치 공부’를 스스로 마칠 수 있겠더군요.


  대학 배움길을 스스로 끊었으니 고졸 배움끈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혼자서 제 삶길을 배우기로 했고, 그렇게 혼자 조용히 노래하면서 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새롭게 제 꿈길을 여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렇다고 또래보다 늦게 ‘취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물여섯 나이에 국어사전 편집장 일을 맡았어요. ‘부원’이 아닌 ‘부장’으로 말이지요. 푸름이 여러분, 무엇보다 마음소리에 따라서 새길을 가 보셔요. 이러면서 ‘즐겁게 걸을 길’ 하나만 차분히 바라보셔요.


+ + +


  “대학교로 가느냐, 취업을 하느냐, 이런 갈림길에 선” 푸른벗한테 《칠색 잉꼬》라는 만화책을 읽어 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보석 훔치기를 하는 사람을 다루는 《칠색 잉꼬》인데, 이 만화를 빚은 테즈카 오사무라는 분은 ‘만화 하느님(만화의 신)’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을 무렵, 일본에서 군수공장에 징용을 가야 했대요. 일본사람도 징용에 징병을 갔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군수공장에서 시키는 일을 하기보다는 몰래 뒷간에 숨어서 뒷간 벽에 만화를 그리면서 딴짓을 했대요. 이러다 들통나면 흠씬 얻어맞았다지요.


  일본사람이라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끔찍히 싫어한 이분은 일본이 전쟁에서 진 일을 몹시 반겼고, 그 뒤로 일본 어린이·푸름이한테 ‘전쟁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씨앗으로 심겠다’는 뜻으로 끝없이 새로운 만화를 그렸어요. 《우주소년 아톰》이나 《블랙잭》이나 《불새》나 《밀림의 왕자 레오》나 《리본의 기사》나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만화에서 이런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은 숨을 거두는 날까지 손에 붓을 쥐고서 만화를 그리셨대요. 그런데 이분은 연재만화도 열 몇 가지에, 만화영화까지 그렸는데, 틈을 쪼개어 영화를 새벽부터 밤까지 1분도 안 쉬고서 보았을 뿐 아니라, 이 바쁜 하루를 더 쪼개어 의학박사 논문까지 써내어 학위까지 따냈어요.


  얼핏 ‘너무 대단한 사람’을 얘기하느냐 물을 수 있을 텐데요, 이분이 대단하다면 남 눈치를 안 보고 스스로 하고픈 일만 꿈길로 바라본 대목이라고 느껴요. 우리도 남 눈치 아닌 우리 꿈길만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갈림길에서 씩씩할 수 있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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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꽃―푸르게 읽는 책

《1파운드의 복음》 1∼4 / 타카하시 루미코, 서울미디어코믹스, 2019



푸른목소리 : 내 생채기(상처·트라우마)를 어떻게 씻어야 좋을까요?



  푸름이 여러분한테 제 생채기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푸름이한테는 제가 어린 날 겪은 생채기가 아무것이 아니네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아요. 그러나 생채기는 생채기일 뿐이에요. 더 크거나 더 작은 생채기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푸름이 여러분한테 들려줄 생채기는 제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그러니까 이제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뀐, 여덟 살부터 열세 살까지 겪은 생채기입니다.


  오늘 저는 푸름이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멀쩡히 말을 해요. 더욱이 제법 또박또박 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였어요. 수줍음도 부끄럼도 잘 타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답니다. “뭐야, 저 아저씨, 말을 이렇게 잘하면서, 예전에 말더듬이였다고? 수줍음쟁이에 부끄럼이였다고? 못 믿겠는데? 거짓말 아냐?”


  저는 혀짤배기로서 말을 더듬는 이 몸을 고치려고 죽을힘을 썼는데 참으로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죽을힘을 써도 안 되고 죽고 싶었으나, 죽지도 못했습니다. 뭐, 그때에 죽지 못했으니, 오늘 이렇게 푸름이 여러분 앞에 서서 말을 합니다. 아무튼 날마다 놀림을 받았어요. 요새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담임 교사가 날마다 읽기를 시켜요. 한 반 모든 아이가 국어 교과서를 한두 쪽씩 소리를 내어 읽도록 시키거나 동시를 외우도록 시켰어요.


  으레 첫마디부터 웅얼거리면서 소리가 엉키면서 더듬다 보니, 차가우면서 잔뜩 날이 선 조용하던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는” 같은 첫 대목을 “으, 으이 아라는”이나 “응이 아라는”처럼 더듬었는데요, 한 반 동무들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고 발로 바닥을 구르면서 까르르 깔깔 히히히 해댔고, 담임 교사마저 웃음을 참으려다가 피식피식하더니 출석부로 제 머리를 내리쳐요. 저는 놀림질에다가 주먹질까지 받았지요.


  말을 더듬는다고 얼마나 놀리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는지 몰라요. 저는 이 어릴 적을 떠올릴 적마다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아요. 이 일을 잊으려고 모진 애를 썼지만 안 잊혀요. 그런데 있지요, 6학년이던 열세 살에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어요. 예전에는 가시내를 매우 깔봤고, 가시내는 사내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흐름에 셌는데요, 그래서 가시내가 뭔가 똑부러지게 말하면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여자는 입 다물어!” 같은 윽박질을 참 함부로 했답니다. 자, 이런 판에 어느 아이, 가시내인 아이가 넌지시 조용히 차분히 한 마디 했어요.


  “친구가 말하는데, 웃는 거 아니야.”


  제가 말을 더듬은 소리를 듣고 지난 다섯 해 반처럼 그때에도 반 동무들은 책상을 치고 바닥을 구르며 웃어제끼는데, 딱 한 아이, 더구나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찬밥처럼 내몰린 가시내인 동무 아이가 이런 말을 나즈막하게 한 마디를 했어요. 이 말 한 마디가 교실에 흐르자 쥐 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2분쯤 다들 아무 말을 안 했어요. 이때 외려 저는 더 떨었어요. 차라리 웃고 넘기면 속이 시원할 텐데, 2분이나 모두 아뭇소리 없이 있자니 더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더군요.


  자, 이다음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말더듬을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 안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 되어서야 거의 고쳤습니다. 어떻게 고쳤느냐 하면,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때에 아버지가 새집으로 옮겼어요. 예전 집은 마을 한복판이었고, 새로운 집은 논밭을 밀어 없애고서 올려세운 아파트였는데, 새집하고 학교 사이가 꽤 멀어요. 걸어서 두 시간 길인데요, 오가는 사람 없이 썰렁한 이 두 시간 길을 일부러 날마다 걸어다니면서 큰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길이라 눈치를 안 보고 ‘돼지 멱 따는 소리’일는지도 모르나 세 해 동안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말더듬을 조금씩 고칠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제가 열세 살이던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가시내 동무가 나즈막하게 읊은 “친구가 말하는데, 웃는 거 아니야.”라는 한 마디는 대단히 힘을 냈습니다. 그 뒤로도 제 말더듬은 그대로였는데, 제가 말을 더듬을 적에 이제는 아무도 안 웃었어요. 도리어 기다려 주더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요.


  저는 그때 저를 도와주었다고 할, 또는 동무를 그토록 오래 따돌리고 괴롭히던 한 반 모든 동무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한 마디를 들려준 그 가시내 동무를, 국민학교를 마친 뒤에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동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동무야, 네 한 마디가 나를 수렁에서 어떻게 건져냈는지 아니? 나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아이들을 네가 주먹으로 패준 것도 아니고, 그냥 말 한 마디뿐이었는데,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살렸어. 말더듬이인 나도, 말더듬이를 괴롭히던 철없던 아이들도, 모두 살린 한 마디야. 참 고맙단다. 고맙다는 말을 너한테 꼭 들려주고 싶어.”


+ + +


  “내 생채기(상처·트라우마)를 어떻게 씻어야 좋을까요?” 하고 묻는 푸른벗한테 살며시 건네고 싶은 책은 《1파운드의 복음》이라는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을 여러분한테 건네고 싶습니다. 생뚱맞을까요? 네, 생뚱맞아요. 바로 생뚱맞기에 이 만화책을 건네려 합니다.


  《1파운드의 복음》을 그린 분은 1978년부터 여태까지 꼭 하루조차도 안 쉬고서 만화를 그립니다. 저는 이분을 “살아서 움직이는 만화 하느님”으로 여깁니다. 아마 푸른벗은 《이누야샤》란 만화를 보았을는지 몰라요. 또는 《경계의 린네》나 《란마 1/2》 같은 만화를 알는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만화를 그린 타카하시 루미코란 분이 선보인 《1파운드의 복음》은 바로 ‘생채기’하고 ‘곁에서 돕는 말 한 마디’ 사이를 참으로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보여주어요.


  하나도 안 무겁게, 외려 익살스러운 줄거리로 짜서 보여준답니다. 그런데 이 익살스러운 줄거리로 짠, ‘생채기를 달래는 말 한 마디’를 보여주는 이 만화책을 읽는데, 저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푸름이 여러분, 아프면 그냥 우셔요.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도 좋아요. 누가 여러분을 보고서 “야! 쟤 좀 봐! 운다, 울어! 하하하, 쟤 뭐야?” 하고 놀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 우셔요. 남을 보지 마셔요. 남이 하는 말을 듣지 마셔요. 여러분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만 듣고, 여러분 가슴속에서 흐르는 따뜻한 사랑만 보셔요. 그러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가슴 따뜻한 하느님입니다. 이 만화책은 바로 이 대목을 그지없이 아름답게 그려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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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책넋 돌보기

43.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기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동안 말이랑 글을 가르치려고 그림책을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가 자라서 그림책보다 긴 이야기를 바라면 동화책을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아이는 어느새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기도 합니다. 이제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기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야말로 지치지 않으면서 책을 신나게 읽어 주기도 합니다.


  어버이 무릎에 앉아서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는 아이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알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 어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날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으면서 따스한 숨결을 나누어 주었는가 하는 대목을 마음으로 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가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준다면, 어릴 적부터 이야기밥을 받아먹고 자란 기쁨을 새롭게 가꾸면서 어버이한테 새로 이야기밥을 베푸는 셈이 되리라 느껴요.


  배리 존스버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내 인생의 알파벳》(분홍고래,2015)이 있습니다. 이 책은 어버이하고 아이가 어떤 사이로 지낼 때에 참다운 사랑과 삶과 살림이 되는가 하는 대목을 짚습니다. 세 가지 이야기인데, 첫째는 아이는 사랑을 물려받을 수 있어야 사랑스럽게 산다는 이야기예요. 둘째는, 아이는 어버이가 손수 짓는 삶을 지켜볼 수 있어야 삶을 기쁘게 배운다는 이야기예요. 셋째는, 아이는 어버이가 아이랑 어깨동무하면서 살림을 가꾸려는 숨결을 느껴야 비로소 아름다운 넋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펌프킨 너는 너만의 노래를 부르고 너만의 춤을 춘다는 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봐. 그거 알아? 삼촌은 가끔 우리 모두가 너처럼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44쪽).” 같은 대목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아이는 아이일 뿐 어버이가 아닙니다. 어버이가 낳은 아이한테는 어버이 피가 흐르지만, 아이는 어버이가 시키는 대로 똑같이 할 수 없어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삶을 누린다면, 아이는 아이대로 새로운 삶을 꿈으로 지어서 누립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이답게 ‘아이 노래’를 기쁘게 불러요. 어버이도 어버이답게 ‘어버이 노래’를 기쁘게 부를 노릇이에요. 이러면서 아이하고 어버이는 한집에서 함께 살림을 가꾸는 사람으로서 사이좋게 손을 맞잡는 기쁨을 새롭게 노래로 부를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버이 눈치가 아닌 어버이 사랑을 볼 수 있어야 기쁘게 자랍니다. 어버이 눈치 때문에 쭈뼛거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어버이 사랑을 받으며 넉넉하고 느긋하면서 즐거울 수 있어야 곱게 자라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꾸지람이나 눈치나 핀잔을 줄 노릇이 아니라, 어버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너르면서 따사로운 사랑을 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낳은 까닭은 ‘아이가 어버이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가 아이답게 새롭게 꿈을 지어서 새롭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니까요.


  《내 인생의 알파벳》이라는 책을 읽으면 “오래전 우리 가족이 화목했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버스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요’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곤 했다 … 그 시절의 아빠는 다른 운전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147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는 두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어버이로서 이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든지 아이한테 춤사위를 보여준다든지 아이한테 노래를 가르칠 적에 오직 아이만 바라보면서 이 몸짓이 됩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버지가 아이를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함께 노래하고 놀 적에 오직 이녁 아이만 바라보면서 웃고 노래하듯이, 나도 우리 아이하고 어우러져 놀 적에는 오직 우리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다른 데를 보아야 하지 않아요. 어버이는 아이를 바라보면 됩니다. 아이도 다른 데를 쳐다보아야 하지 않아요. 아이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어버이를 느끼면서 어버이 낯빛하고 마음결을 고이 바라보면 즐거워요.


  그런데 《내 인생의 알파벳》이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집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요. 이 아이뿐 아니라 학교에서 마주하는 여러 동무들도 집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기 일쑤예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런 삶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 아버지가 자동차를 몰며 신나게 노래하고 웃었다고 해요. 그런데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갑작스레 죽고(유아돌연사), 아이 아버지는 큰아버지하고 어떤 다툼이 생겨서 그만 집안에서 웃음도 노래도 춤도 이야기도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마주하는 여러 동무들도 어버이들이 저마다 이런 아픔과 저런 생채기가 있어서 어른 스스로 아픔하고 생채기에 휘둘리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어른으로서 이녁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서 그만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셈이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기다린다고 하는 대목을 미처 느끼지 못한다고 할 만해요. 아이들이 마음이 타면서 괴로워하다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여길 때까지도 어른들은 좀처럼 아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이야기책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는 집에서 사랑도 눈길도 못 받는 나머지 ‘살았어도 죽은 삶과 같다’고 여깁니다.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학교에서 어느 누구하고도 말을 한 마디도 안 섞는다고 해요. 때때로 종이에 글을 적어서 이 글을 보여주기만 할 뿐, 입술을 달싹일 생각도 거의 안 한다고 해요. 이러던 어느 날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하기로 하지요. 아이가 생일잔치를 맞이한 날, 어머니하고 아버지랑 항구를 거닐다가 갑자기 바닷물로 뛰어들어요.



“아빠, 왜 계속 비행기만 쳐다봐야 해요?”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캔디스. 비행기를 보지 않으면 조종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날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그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행기가 괴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185쪽)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이 메마른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를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웃고픈 아이들입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이때에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울고 나서 마음을 달래고픈 아이들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하루를 새롭게 짓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어버이 자리에 선 분들은 아이가 많이 자란 뒤에는 딱히 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혼자서 책을 얼마든지 잘 읽으니까요. 그러면, 때때로 아이를 불러서 ‘나를 도와주렴?’이라든지 ‘나한테 선물을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으면서 책을 함께 읽자고 해 볼 수 있고, 아이가 날마다 조금씩 책을 읽어 달라 해 볼 수 있어요. 생각을 함께 나누고, 따스한 기운을 같이 나누며, 이야기 한 꾸러미를 서로서로 나누는 저녁을 보낼 만합니다.


  무선조종 비행기가 박살이 나지 않게 하려면 무선조종을 하는 동안 비행기를 바라보아야 하듯이, 한 집안이 박살이 나지 않게 하려면 이 보금자리에서 서로서로 따스히 바라보면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선조종 비행기를 걱정하기에 무선조종 비행기를 지킬 수 있고, 아이와 어버이가 서로한테 마음을 쓰기에 서로 살가이 아끼면서 사랑을 따스히 지필 수 있습니다. 4349.1.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청소년과 함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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