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불물바람



  불타오르면 뜨겁다. 뜨거우니 활활 타고서 얼핏 겨울을 녹이는 듯싶지만, 이내 사그라들어서 재로 바뀌니 매캐하고 더 춥다. 불질을 하는 사람은 장작(불피울것)을 자꾸자꾸 넣어야 한다. 불길이란, 끝없이 태워서 재가 되는 수렁이다.


  ‘불’이란 ‘화(火)·분노(憤怒)’이다. 불길이란, 태울거리인 미움을 끝없이 끊임없이 들이붓고 몰아세운다. 불길에는 철빛(철드는 빛)이 아예 없다. 불티가 번지면 싹 태워서 죽일 뿐 아니라, 겨울에 눈추위로 들숲메바다를 다스리는 철빛을 확 쓸어버려서 언제까지나 겨울이다.


  불길을 일으키는 사람은 봄을 안 바란다. 봄이 오면 불을 그만 때야 하기에 앞으로도 내내 겨울이기를 빈다. 미워할 놈을 자꾸 미워해야 사람들 눈길이 불타올라서 ‘장작꾼(사이버렉카)’은 장작장사를 쏠쏠히 하며 돈·이름·힘을 혼자 거머쥘 수 있다.


  어떤 겨울도 한때이다. 어떤 겨울도 없애야 하지 않아. 우리는 봄을 그리고 봄을 노래하고 봄에 사랑할 노릇이다. 모든 겨울은 봄에 싹 녹고 풀리면서 저절로 사라진다. 봄은 싸움이나 총칼(전쟁무기)이 아니다. 봄은 아이곁에 있는 씨앗이다. 봄은 아이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사랑하고 파란하늘빛과 파란바다빛으로 철빛을 그리는 살림길이다.


  쟤들이 또 잘못했다면서 우리 스스로 불태우려고 하면 바로 이때부터 우리 누구나 장작꾼한테 휩쓸린다. ‘서울봄’이란 무엇이었는지, 누가 어떻게 봄을 불렀는지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들풀’이자 ‘들꽃’일 노릇이다. 우리는 서로 ‘들숲’이자 ‘들사람’으로서 ‘들사랑’을 하면 된다. 우리는 ‘들불’이 아닌 ‘들바람’이자 ‘들물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아내지 말자. 불지르지 말자. 우리가 자꾸 부아내며 불지르니까, 방귀 뀐 이들이 아주 똥까지 지르려고 한다. 우리는 보아주기(용서)를 숲빛으로 하늘빛으로 철빛으로 어른스럽게 할 노릇이다. 철없이 구는 그들을 똑같이 때리고 몰아세우면,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한테 달려들어 다 죽자고 싸우듯 그만 온나라가 싸움불수렁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철없이 나대는 저들을 어찌해야겠는가?


  자, 잘 헤아리자. 어진 어른은 아직 철없는 아이를 어찌 달래는가? 아이한테 ‘사랑매’를 들어야 하는가? 아이를 마구 꾸짖고 놀리고 비아냥대고 낄낄거리고 내쫓기만 해야 하는가? 매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매’는 허울이자 거짓이다. 아이하고 어른은 사랑으로 마주해야 하는 사이일 뿐이다. 아이어른 둘레에 매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철없는 아이가 철이 들 수 있도록 다가서면 된다. 아이곁으로 사근사근 다가가서 눈높이를 맞추면 된다. 둘이 나란히 앉거나 마주보고 앉아서, 그림책과 동화책을 나긋나긋 읽고 옛날얘기를 그윽히 들려줄 노릇이다.


  철없는 그들한테 그림책을 베풀자. 바바라 쿠니·윌리엄 스타이그·엘사 베스코브·나카가와 치히로·아스트리드 린드그렌·권정생·이오덕·임길택 책을 베풀자. 그들을 꽃뜰과 숲으로 불러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함께 아름책을 읽자. 그저 살림책과 사랑책과 숲책을 읽자. 그들은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외치면서 막 떼쓰고 울고불고 하는데, 떡 하나 더 주고 그림책을 읽고, 동시를 한 자락 사랑으로 써서 건네자. 그들은 회초리질이 아닌 따순 손길을 받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아름책을 곁에 두면서 아이사랑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기’라는 사람길을 배울 노릇이다. 그들은 ‘사랑받기’라는 숲길을 배울 노릇이다. 우리는 ‘살림하기’라는 사람씨를 심을 노릇이다. 그들은 ‘살림배우기’라는 밭일을 할 노릇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서서 이야기꽃을 피우면 된다. 그들은 ‘사람으로’ 함께 만나서 이야기밭을 일구면 된다. 2025.3.1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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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쉬어도 돼요?



  엊저녁에 고흥으로 들아와서 발바닥만 씻고서 일찍 누웠다. 01시에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서 06시까지 일한 뒤에 살짝 새벽잠을 들었다. 08시에 일어나서 비로소 씻으면서 빨래를 한다. 두 아이가 마당에 빨래를 너는 소리를 들으면서 집일을 더 한다. 이윽고 고흥읍 나래터에 글월을 부치려고 마을앞에 나와서 시골버스를 탄다. 아직 한끼도 안 먹었으나 배고플 일은 없다. 그저 느긋이 봄으로 가는 늦겨울볕을 바라본다. 사마귀알집도 슬슬 쓰다듬는다.


  갓 나올 적에는 이래저래 놓치는 그림책과 동화책이 수두룩하다. 요 몇 해 사이에 부산 마을책집 〈책과아이들〉을 마치 옆집처럼 드나들면서 찬찬히 알아보는 그림책과 동홰책이 숱하다. 비록 누리책집과 새책집에서는 판끊긴 책인데, 〈책과아이들〉에는 멀쩡히 있으면서 열다섯 해나 스무 해씩 손길을 기다리는 아름책이 많다.


  우리는 무슨 책을 알아보고 읽고 알려야 어른일까? 우리는 글을 어떻게 쓰고 그림을 어떻게 빚어야 어른일까? 우리는 낱말을 어떻게 가리고 살펴서 마음을 말로 펼쳐야 어른일까? 우리는 밥을 어떻게 짓고 옷을 어떻게 기우며 집을 어떻게 건사해야 어른일까?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을 적에 어른일까?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어른일 수 있을까? 입으로만 외치는 올바른 말이 아닌, 딱히 외치지 않더라도 스스로 보금자리를 일구는 살림길로 어른일 수 있을까?


  길(정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모든 사람마다 길(해법)이 다르다. 우리말이 훌륭하거나 일본말이나 미국말이 못나지 않다. 우리는 그저 우리 살림자리에서 우리 손으로 사랑을 지으면서 어른길을 함께 배우는 이웃이다. ‘우리말’이란 이름은, 나랑 너를 아우르며 서로 아늑히 아름드리로 안아서 푸르게 빛나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라는 이름은, 내가 ‘나’를 알아보고 돌아보고 품을 적에 비로소 ‘너’를 알아보고 돌아보고 품기 때문에, ‘나’하고 ‘너’는 다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다른 빛인 줄 깨달으면서 터뜨리는 소리이다.


  큰아이한테는 “언제나 느긋이 쉬는걸.” 하고 속삭인다. 일할 적에는 일하고, 잘 적에는 자고, 살림할 적에는 살림하고, 놀 적에는 놀고, 읽을 적에는 읽고, 쓸 적에는 쓴다. ‘잘하기’나 ‘못하기’가 아닌, 그저 ‘하기’를 바라본다. 2026.2.9.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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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동반차량



  모처럼 칙폭길을 탄다. 순천서 공주 가는 칸에 빈자리가 없다. 이렇게 많이들 다니는구나. 나는 몇 안 남은 칸 가운데 아이칸(유아동반차량)을 고른다. 여태 칙폭길을 달리며 느낀 바로는 어린이나 아기는 안 시끄럽다. ‘어른답지 않은 이’야말로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거칠고 사납다. 아기나 아이는 옹알옹알 조잘조잘 싱그럽게 노래하는 소리를 터뜨리고 베푼다. 이와 달리, ‘안 어른다운 이’는 시끄럽고 손전화를 크게 틀고 장난이 아니다.


  문득 ‘엄마’는 아기나 아이를 데리고서 멀쩡히 잘 다니는데, ‘아빠’는 어쩐지 아기도 아이도 거의 못 데리고 다닌다고 느낀다. 아들만 셋인데 막내는 아기인 세 아이를 혼자 데리고 마실하는 아빠를 이레 앞서 보았다. 엄마라면 흔한 일이되, 아빠라면 거의 못 하거나 안 한다. 또는 엄마라면 아빠한테 미루기 어렵되, 아빠라면 으레 엄마한테 미루기 일쑤이다. 아니면 엄마라면 그저 받아들이되, 아빠라면 굳이 안 받아들이려 한다.


  아빠가 처음부터 아기나 아이를 못 돌보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저 틈(기회)이 없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아빠한테 ‘아기틈(아기를 사랑으로 돌볼 틈)’과 ‘아이틈(아이랑 신나게 뛰놀 틈)’을 베풀어야지 싶다. 엄마한테는 여느때에 놀고 노래하고 웃고 떠들라 하고서, 슬그머니 나라일(정치·경제·문화·행정·교육)을 맡겨야지 싶다. 잘 놀고 노래하고 쉬고 웃고 떠드는 나날을 누린 어른이어야 어질게 나라일과 온살림을 꾸린다고 본다. 아빠란 자리에 있는 분이 으레 떠넘기고 미룬 ‘살림·집일’을 오롯이 떠맡아야 하던 엄마란 자리란, 좋건 싫건 온일과 온살림을 해온 길이다. 이제 집살림·집안일은 아빠가 도맡으면서 나라일·고을일은 엄마가 꾸려서 이 나라를 아름길로 갈아엎는 곳에서 즐겁게 사랑을 쏟으라고 북돋아야지 싶다.


  여태껏 모든 나라는 엄마가 돌보고 가꾼다. 낳고 먹이고 돌보고 입히고 가르친 몫은 여태 엄마였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여태 엄마한테서 말을 익히면서 마음을 살찌웠다. 아들도 딸도 언제나 엄마가 품고 안고 달래고 이끌어 왔기에, 우리나라도 이웃나라도 이럭저럭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이제부터 아빠는 엄마 곁에서 함께 놀고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아기랑 아이를 맡으면 된다. 이제야말로 아빠는 집안일과 집살림을 웃음춤으로 도맡으면서 나라살림(국가경영)과 고을살림(지역자치)을 어진 어른인 엄마가 품고 안고 달래고 이끌라고 풀어놓아야지 싶다.


  다가오는 2026년 6월부터 ‘모든 사내(아저씨)’는 ‘그만두기(불출마)’를 하고서, 모든 고을지기(지자체장)는 엄마가 맡을 노릇이지 싶다. 다만, 이쪽이나 저쪽이라는 무리(정당)가 아닌, 어느 무리에도 몸담지 않은, 그저 수수한 엄마가 판갈이를 할 때라고 본다. 어린이는 혼자서 놀다가 이따금 동무를 불러서 함께 놀기는 하지만, 어떤 어린이도 무리(정당)를 이루어 담벼락을 세우거나 끼리끼리 노닥거리지 않는다. 우리는 엄마랑 어린이한테서 배우는 오늘이어야 할 노릇이다.


  아름나라(민주공화국)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라면, 나라지기(대통령)와 벼슬아치(국회의원·고위공무원·장관·기관장)부터 밑일삯(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맡는 틀부터 세울 만하다고 본다. ‘밑일삯(최저임금) + 길삯(교통카드) + 두바퀴(자전거)’만 나라지기하고 벼슬아치한테 베풀 때라야, 그리고 나라일을 맡을 적에는 어느 무리에도 몸담지 않아야, 어린이와 푸름이를 돌아보는 새길을 연다고 느낀다. 안 걸어다니고, 두바퀴를 안 달리고, 여느길(대중교통)로 안 다니는 벼슬아치이기에 삶(민생)을 모르는 채 구름에 올라탄 딴나라 딴청 딴짓에 사로잡혀 왔다고 느낀다. 2026.2.1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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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인 얼굴



  흔히 “서구적인 외모”라는 말을 ‘잘생겼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서구적인 외모”만 잘생기고, “아프리카적 외모”라든지 “남미적 외모”라든지 “중국·일본적 외모”라든지 “말레이시아적·동남아시아적 외모”는 못생겼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서구적인 외모”가 아니면, 이른바 “한국적인 외모”조차 ‘못생겼다’는 뜻으로 빗댄다고 느낀다.


  번듯하거나 말끔한 얼굴이나 몸매라면 ‘잘생겼다’고 할 수 있다. 안 번듯하거나 안 말끔한 얼굴이나 몸매라서 ‘못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밝히는 말이나 글은 안 대수롭다. 그렇지만 ‘서구적·한국적’ 같은 일본말씨를 붙이는 마음이나 자리를 살피면, “넌 왜 이렇게 부럽게 잘생겼어?” 하고 시샘을 한다든지, “나 따위는 너무 못생겨서 싫어!” 하고 스스로 갉거나 깎는 빛이 어린다.


  닷새쯤 앞서 부산으로 일을 다녀오는 길에도 “조상 중에 서양에서 오신 분 계시지 않아요? 틀림없이 서양 분이 있어서 서구적인 외모인데요?” 하는 말을 다시금 듣는다. 이 말을 여태 골(10000)이 웃돌 만큼 들었다. 골머리가 아플 만한 골질 같은 말인데, 여러모로 곱씹으면 “넌 튀기(혼혈) 아냐? 그나마 넌 나은(잘생긴) 튀기이네? 잘생겼으니 봐주지?” 하는 속내를 품는다. “넌 우리(한국인)처럼 생긴 얼굴이 아니니까 우리 사이에 끼어줄 수 없어. 그래도 뭐, 보기나쁘지 않으니 봐주지.” 하면서 담을 치는 속마음마저 있다.


  남을 얼굴부터 훑으면서 ‘얼굴말(외모비평)’을 일삼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나는 이미 스무 살부터 “텔레비전 안 들이는 곳”에서 살려는 뜻으로 어버이집을 박차고 나왔다. 어려서부터 거울을 안 보려고 했고, 혼살이를 하던 무렵부터 “집에 텔레비전도 거울도 안 놓는 삶”을 잇는다. 바라보려면 마음을 볼 노릇이다. 얼굴을 안 쳐다봐야 할 까닭은 없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이라면 ‘마음읽기 + 말나누기(이야기) + 생각짓기(미래설계)’라는 세 가지를 살필 노릇이라고 본다.


  텔레비전을 집에서 치우고서 거울을 안 들여다보니, 참말로 이웃이나 동무를 만날 적에 얼굴을 거의·아예 안 본다. 요사이는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며 말하면 버릇없다”고 여기는 분이 많아서, 말을 할 적에 이따금 얼굴을 마주보기는 하지만, 나는 되도록 “얼굴 안 보며 말하기”를 한다. 아니 “겉으로 보이는 얼굴이 아닌, 눈망울을 거쳐서 들여다보는 마음”을 마주하면서 말을 한다. 이런 터라, 자주 만나거나 뜸하게 만나거나 “그분 얼굴이나 생김새”를 하나도 못 떠올려서 못 알아보기 일쑤이다.


  서로 눈망울을 바라보며 말을 나눌 적에는 허튼말이나 속임말이나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 추킴말이나 겉치레말도 아예 안 한다. 부질없는 말치레에 이 하루를 빼앗길 까닭이 없다. 오롯이 눈망울을 마주보면서 말을 나눌 적에는 서로서로 ‘마음읽기 + 말나누기(이야기) + 생각짓기(미래설계)’를 저절로 이룬다. 이 얼거리는 책읽기에서도 똑같다. 우리는 ‘책읽기’라는 길에서 “글쓴이 이름값·펴냄터 이름값·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나 추천도서라는 이름값 따위는 몽땅 걷어낸 채”, 책이라는 꾸러미에 깃든 “이야기라는 숨결”만 말갛게 바라볼 노릇이다.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눈망울을 보는 하루를 지으면, 읽는이(독자)와 지은이(작자) 사이에 그저 마음과 마음이 별빛으로 마주치면서 반짝반짝 빛난다. 다만 우리나라 책마을을 돌아보면, 한참 멀다. 아직 우리는 ‘이야기’가 아닌 ‘이름값’을 쳐다본다. 숱한 지은이(작자·작가)는 옷차림이나 얼굴이나 몸매를 꾸미려고 온힘과 목돈을 쏟아붓는다. 우리가 어른이면서 지은이라면, ‘프로필 사진’ 따위는 안 찍어야 맞다. ‘멋지게 찍는 프로필’이 아닌, 아줌마이면 아줌마 모습으로 찍고, 할머니라면 할머니 모습으로 찍고, 아재라면 아재 모습으로 찍고, 할배라면 할배 모습으로 찍으면 그만이다.


  보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한테 ‘프로필 사진’ 따위는 없다. 그저 ‘이야기 할머니’답게 찍었다. 더 젊거나 더 예쁘거나 더 멋지거나 더 눈부시거나 더 돋보이거나 더 남다르거나 더 잘난 모습으로 꾸며서 ‘프로필 사진’에 힘을 들이붓는 이가 있다면, 그런 이가 쓴 글이나 책은 걸러낼 노릇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온사랑으로 담은 책”을 살피고 장만하고 읽고 새기고 나누고 곁에 둘 노릇이다. 부디 서로서로 “한국적인 외모”라든지 “서구적인 외모”처럼 스스로 갉고 할퀴는 멍청한 말은 걷어치우기를 빈다. 잎샘바람이 누그러들고서 봄맞이비가 가볍게 흩뿌린 하늘을 헤아리면서 “이렇게 바람과 비가 지나간 밤에는 별이 쏟아지면서 반짝반짝 아름다워요!” 같은 이야기를 하자. 2026.2.1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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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는 손등



  어제그제 잎샘바람이 쩌렁쩌렁 휘파람마냥 불어온다. 오늘도 꽃샘바람은 큰소리로 몰아친다. 높녘은 꽤 추울 텐데, 첫봄을 앞두면서 골골샅샅 파랗게 틔우는 길이라고 느낀다. 마녘도 제법 얼지만 늦겨울인걸. 이렇게 휭휭 회오리처럼 바람꽃이 피면 어느 누구도 “포근한 겨울”이라고 걱정하지 않으리라. 여름은 덥다가도 시원한 철이고, 겨울은 춥다가도 포근한 철이다. 모든 바람은 언제나 알맞게 갈마든다.


  벼락바람이 감돌지만 소매를 걷고서 걷는다. 책짐을 이고 들며 걷는다. 손가락이 얼어도 왼손에 책을 쥐고서 걷는다. 곧 시외버스를 타면 더워서 언손이 다 녹으리라 본다. 읽고 쓰려고 두 손을 찬바람에 내놓고 다니느라, 손등이 허옇게 트다가 핏망울이 맺는다. 뜨끔뜨끔 찌릿찌릿 받아들인다. 따끔따끔 찌르르르 맞아들인다.


  붓을 더 쥐기 어려우면 책을 보따리에 넣고서 손을 주머니에 찌른다. 이 겨울에 날아다니는 새를 살피고, 길나무는 어떠한지 들여다본다. 바람 따라 하늘이 맑게 트이는 빛살을 지켜보다가 다시 책을 꺼내어 읽는다. 읽고 쉬고 쓴다. 새삼새삼 읽고 쉬고 쓴다. 또 읽고 쉬고 쓴다.


  사상나루 시외버스 둘레로 비둘기가 종종종 걷는다.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언손을 녹이다가 ‘부산-완도’ 시외버스를 탄다. 순천서 내려 갈아타야지. 오늘은 부산 마을책집 〈책과아이들〉에서 이웃님 그림판을 천천히 자리잡아 놓았다. 어쩐지 ‘책집 이웃일꾼’이 된 듯하다. 마을책집에 처음 눈뜬 1992해부터 여태 ‘책집손님’으로 오래오래 드나들었는데, 문득 새자리를 누리는구나 싶다. ‘책집단골’은 어느 책집을 서른 해 남짓 드나들며 “그곳에서만 사들인 책이 3000자락”이 넘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책집단골’이라는 이름을 지나가면 ‘책집이웃’으로 서는구나 싶다.


  아프기에 스스로 몸을 안고서 고즈넉이 풀고 맺는 숨길을 찾아본다. 앓기에 스스로 마음을 아우르고서 고요히 품고 펴는 숨소리를 돌아본다. 우리 곁에 있는 어른이란, 저마다 아프거나 앓는 곳을 가만히 달래며 부드러이 웃는 분이지 싶다. 우리 둘레에서 뛰노는 아이란, 스스럼없이 자라나며 말꼬를 트고 숨꽃을 틔우는 신바람이지 싶다. 갓 태어나서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서 눈감은 두 어른, 이오덕·권정생 두 분은 내내 앓고 아픈 삶을 지냈다. 내내 앓느라 스스로 알아가야 했고, 내처 아프느라 스스로 아우르고 달래면서 피어나려고 했다고 느낀다.


  나는 나아간다. 너는 날아간다. 우리는 함께 걷는다. 이제 서로 마주본다. 시외버스가 움직이려고 하니 비둘기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내도록 얼며 찌릿찌릿 쓰라린 손등과 팔뚝이 조금조금 녹는다. 이제 손가락을 놀릴 만하니 이틀치 밀린 하루글부터 쓰자. 그런데 손가락이 녹으니 슬슬 졸립네. 그래, 졸리면 좀 눈을 감고서 더 쉬어야지. 제대로 졸고, 실컷 자고 나더라도, 부산에서 순천까지 한참 걸리니, 포근히 꿈길을 가고서 다시 일어나자. 2026.2.8.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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