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빨리읽기



  아이하고 살아가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본다. 아이랑 눈맞추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에, 아이 발걸음에 나란히 걷고 뛰고 달리는 오늘에, 아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서 느긋느긋 말하는 사랑이 어울리는 노래이지 싶다. 이러면서 늘 아이한테서 배우고 활짝 웃는 살림살이일 테고. 이러다가 이따금 아이를 푸른빛으로 가르치면서 흐뭇이 춤추는 살림자락이겠지.


  아침나절에 부산 마을책집 〈책과아이들〉에 깃들어서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천천히 읽고 누리고 즐긴다. 가까이에 아이랑 나란히 앉은 어느 어머니가 그림책을 몹시 빨리 읽는다. 아이가 얼마나 알아들으려나? 글밥이 많은 그림책이라서 빨리읽기를 하시는 듯하지만, 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어머니 말씨를 따라가려고 하는 듯한데, 그렇더라도 말이 너무 빠르다.


  나는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나는 예전에 곁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말이 빠르냐고, 좀 천천히 뜸도 들이고, 마음을 그득 담아서 말하라 했지. 나는 어려서 말이 느리고 더듬댄다고 놀리는 소리는 숱하게 들었는데, 나는 말이 빠르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는데, 이런 나조차 아이곁에서는 말이 빠를 수 있는 줄 몰랐다. 곁님 꾸지람을 듣고서 말씨를 새삼스레 가다듬었다. 아이 말씨를 더 차분히 귀담아듣는 길을 헤아렸다.


  이제는 아이하고 말할 적에 더 느긋이, 때로는 거듭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느긋거듭말씨’를 몸에 붙이며 산다. 느긋거듭말씨로 스스로 가꾸며 돌아보면, 느긋이 말을 하기에 마음을 새록새록 가다듬는다. 거듭해서 말하는 사이에 생각씨앗을 북돋운다. 빠른말씨는 으레 나너우리 모두한테 강파르다. 느긋말씨는 언제나 서로서로 아늑하다. 거듭말씨는 잔소리하고 다르기에 곰곰이 익히는 맡거름이다. 찬찬말씨는 잔바람과 잔물결처럼 가벼이 흐르는 노랫가락 같기에 한결 아늑히 누리는 하루로 잇는다.


  빨리읽기는 안 나쁘되, 안 즐겁게 마런이다. 줄거리를 빨리 알아채서 뭐가 나을까? ‘셈겨룸(시험문제)’을 멈추어야 ‘생각“이 샘물로 솟아나고 멧새하고 소근소근 속삭이는 가락을 받아들인다고 본다. ‘느릿읽기’ 아닌 ‘느긋읽기’이기에, “글에 담은 마음”과 “마음에 담은 삶”과 “삶에 담은 사랑”으로 피어난다고 본다. 마음과 삶과 사랑을 읽고서 느끼고 누리는 동안에 기쁘게 생각씨를 심으려는 책을 한 자락을 쥐면 넉넉하다고 본다.


  오늘 장만한 책을 오늘부터 읽는다. 차분히 되읽고 가만히 곱읽어서 언제나 눈뜨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려고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놓고서 겨울바람을 쥔다. 붓을 잡은 손을 풀고서 겨울볕을 손바닥에 놓는다. 우리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까닭이 없다. 시외버스가 달리는 길에 조용히 눈을 붙인다. 한참 달려도 한참 남으니, 느긋이 자고 일어나도 느긋이 읽고 쓸 만하다. 순천에서 시외버스를 내리고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시외버스를 갈아탄다. 또 읽고 쓴다. 부산서 순천 오는 길에 잘 잤더니 개운하다. 고흥읍에서 시외버스를 내리자마자 시골버스로 갈아탄다. 마지막으로 옆자락 황산마을에서 내린 뒤에 논두렁을 걷는다.


  해가 멧자락 너머로 갔다. 저기 큰아이가 배웅 오는 모습이 보인다. 누렇게 바뀌는 들숲하늘을 바라보며 마주걷는다. 조금씩 서로 가깝다. 일부러 더 천천히 걷는다. 마주걷는 큰아이를 기쁘게 바라본다. 우리는 짐을 나눠 들고서 집으로 걸어간다. 논두렁에도 겨울들에도 우리만 호젓이 걷는다. 물까치가 이슥한 하늘을 가르며 난다. “물까치는 이제서야 집으로 가네요.” 큰아이 말을 들으며 웃는다. 우리는 두런두런 말을 섞으면서 나란히 걷는다. 2025.1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헌책 헌집 헌옷



  하루가 아닌 한 발짝만 들여도 이미 헌집이다. 아무리 값비싸다고 하더라도, 모든 집은 헌집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짓거나 살던 헌집”을 얻어서 옮겨살 적에 ‘새집’에 간다고 말한다. 우리 발걸음이 닿고 우리 손길로 가꾸는 동안 ‘우리집’으로 바뀌기에, 모든 헌집을 새집으로 돌려놓을 뿐 아니라, 숨결을 새롭게 입히는 살림길이다.


  옷가게에 갓 놓여도 이미 헌옷이다. “손수 짓건 남이 짓건 그냥 헌옷”"이다. 모든 옷은 헌옷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며 마음에 맞아서 몸에 걸치는 때에 어느새 ‘새옷’으로 거듭난다. 누가 입다가 물려주거나 팔기에 헌옷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옷’을 누린다. 손길과 살결이 닿고, 눈길을 모을 뿐 아니라, 손수 빨래하고 해바람에 말리고, 정갈히 개어 건사하기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살림살이라 할 테지.


  책숲(도서관)이나 책마루(서재)에 오늘 들여도 헌책이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돌보고 나누고 깨달으며 철드는 나날에 길동무로 삼으니 ‘새책’이다. 손때를 거칠게 타느라 낡거나 닳는 부스러기(지식·정보)가 넘치는 책이 있으나, 손빛을 가만히 입기에 날갯짓으로 꿈과 사랑을 담고서 너울너울 춤사위인 책이 있다. 몸소 품을 들이고 손수 온넋을 기울여서 한 쪽씩 펼치는 책이 한 자락씩 늘어나니, 모든 책이 온책과 즈믄책과 푸른책과 아름책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헌집·헌옷·헌책은 어떤 손과 눈과 발과 마음과 몸이 딯으며 낡고 부스러질까? 새집·새옷·새책은 어떤 손과 눈과 발과 마음과 몸을 만나면서 나부끼고 부드러울까? 언제나 같은 집과 옷과 책이되, 언제나 우리 숨결과 나란히 나아가는 살림꽃이라고 느낀다.


  숲말을 헤아리기에 숲집에 깃들어 숲밥을 먹고 숲글을 쓰고는 숲이웃하고 숲노래를 나눈다. 숲길을 걸으니 숲마음으로 눈뜨고 숲사랑을 그리면서 숲사람으로서 숲책을 짓고 읽는다. 넌 숲책을 사랑하니? 난 숲책을 사랑해. 넌 푸른책을 곁에 놓니? 난 푸른책을 곁에 놓지. 넌 바람을 담은 파란책을 바라니? 난 파란책을 바라면서 오늘도 쓰고 읽고 걷고 나르고 돌아보고 쉬고 잠들고 일어나서 집안일을 해.


  나무는 ‘헌나무’도 ‘새나무’도 아닌 그저 나무이다. 풀과 꽃도 그냥 풀과 꽃이다. ‘헌풀’과 ‘새풀’이 없고, ‘헌꽃’과 ‘새꽃’이 없다. 노래하며 나는 새가 ‘헌새’이지 않다. 더구나 ‘새새’이지 않다. 헌숲과 새숲이 없다. 헌마을과 새마을이 없다. 헌나라와 새나라가 없고, 헌사람과 새사람이 없다. 헌돈과 새돈이 없고, 헌별과 새별이 없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에 누구나 스스로 사랑으로 싹튼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말은 모두 달콤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모두 반갑다. 겨울에도 해는 포근포근 고맙다. 여름에도 밤은 노래잔치로 즐겁다. 첫겨울 눈밭을 이루어도 시골과 골목에는 쑥부쟁이가 파란꽃을 곱다시 올린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어도 들숲과 마을에는 나뭇잎과 풀잎이 짙푸르기만 하다.


  나는 사랑집에서 살며 사랑옷을 두른다. 사랑책을 곁에 두며 사랑노래를 여민다. 사랑숲에 사랑새가 찾아오고, 사랑나비와 사랑벌레는 이제 겨울잠으로 간다. 나는 너한테 사랑글을 띄우고, 사랑손을 내밀면서 사랑눈으로 마주보려고 한다. 우리는 사랑씨를 맺는 사랑동무요 사랑님이다. 2025.12.5.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아직 안 죽었습니다



  나는 ‘중학교 자퇴’하고 ‘고등학교 자퇴’를 못 한 채 억지로 여섯 해를 버텼다. 게다가 어머니가 들려주신 “십이년이나 학교를 다녔는데 대학교를 안 가면 아깝지 않아?” 하는 말씀에 흔들렸다. ‘열두 해 감옥살이’가 아깝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국민학교만 겨우 마쳤다. 어머니는 가시내라서 눈물을 삼키며 중학교에 못 갔단다. 우리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입주과외’를 하며 다녔고, 요새로 치면 푸른씨 나이에 국만학교 교사 노릇을 했다. 가난한 집안 맏아들이라서, 어려서 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돈벌이를 하여 집안을 먹여살리고 세 남동생을 대학까지 보냈는데, 정작 아버지 이녁은 ‘고졸’도 아닌 ‘사범출신’에다가 대학 구경도 못 한 삶을 언제나 푸념과 하소연과 고래술로 터뜨리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인 ‘대학생’이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감옥이자 지옥인 곳을 더 참아내기로 하면서, 인천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골라서 붙었다.


  대학교에 붙은 종이(합격통지서)를 받은 두 분은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한숨바람이었다.


  처음 보고 겪는 대학교는 애들 장난보다 못해 보였다. 길잡이책도 낱말책(네한사전)도 변변히 없이 이웃말(외국말)을 가르친 지 서른 해가 넘은 듯싶었다. 너털웃음이 나왔다. 한 해를 또 어거지로 버티는데, 이제 안 되겠다. “어머니, 대학교를 들어갔으니 됐죠? 한 해를 버텼으니 됐죠? 이제 그만둘게요.” “뭐? 졸업을 해야지! 어떻게 들어간 대학교인데!” “대학교라는 데는 그냥 허울이고 엉망이에요. 저는 고졸로 살려고 합니다.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면 됐잖아요?” “얘가 무슨 말을 해? 네가 그만두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한지 아니? 너희 아버지는 되게 섭섭해할걸. 맨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으니 더 화를 낼거야. 넌 아버지 화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니?”


  대학교 2학년이던 때에 군대를 갔다. 둘레에서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서울에서 이만한 대학교에 들어갔다면 군면제나 뒤로 빠지는 길이 수두록하다고 여기저기서 알려준다. 장학퀴즈 출신자 어느 윗내기는 “이 바보야. 우리 공장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그러며 알바비도 벌고 공부하며 졸업장을 따야지. 넌 왜 멍청하게 구니?” 하며 타박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더러 군대 가지 말고 아무튼 네 해를 참고 견뎌서 마치면, 나를 장학사로 넣을 수 있고, 장학사 아니어도 교육청에 자리 하나 마련해서 밀어넣으면 군생활 안 해도 된다고 버럭버러 윽박질렀다.


  삶이란 뮐까? 대학교와 졸업장은 뭘까? 그냥 고졸이나 중졸이나 무학자이면 안 되나? 군대는 왜 빼야 하나? 서로 돈주고 돈받기로 어지러운 판이면, 민주나 정의나 교육하고는 다 동떨어진 불바다이지 않나? 온나라 곳곳이, 우리집과 또래와 둘레 모두 “또다른 전두환”이라고 느꼈다.


  아버지하고 크게 두 판쯤 싸우고서 집을 나왔다. 아주 마땅히 대학교를 그만두었다. 1999년까지 새벽일꾼(신문배달부)으로 지냈고, 이해 여름에 펴냄터(출판사)에 책팔이(영업부)로 자리를 얻었다.


  지난 2010년에 낸 작은 혼책(독립출판물)이 있다. 이 혼책은 내가 2007년부터 꾸리는 책마루숲(사전 짓는 책숲)을 돕는 이웃한테만 우편으로 부쳤다. 어러 이웃 가운데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한 분이 있다. 그분은 이제 정년퇴직을 했겠지. 그런데 그분은 그때 ‘함께살기 혼책’을 재단 책꽂이에 남겨두셨나 보다. 2025년에 비정규직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어느 분이 이 혼책을 보았고, 이 혼책을 쓰고 낸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어찌저찌 알아보니, “최종규 씨가 아직 죽지 않았”고, “아직 죽지 않으셔서 만날 수 있어서 놀라워서, 경기 안양에서 부산으로 날아와서, 부산 〈책과 아이들〉에서 하는 수업을 꼭 듣고 싶었다”고 얘기한다.


  빙그레 웃는다. 그렇구나. 나는 안 죽었구나. 안 죽고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새롭게 낱말책(국어사전)을 쓰고, 곁님하고 두 아이랑 시골살림을 짓는구나.


  고등학생 적에 곁일(알바)을 하며 번 돈으로 바지 한 벌을 산 적 있다. 벌써 서른다섯 살 묵은 바지는 낡고 해졌다. 처음에는 긴바지였으나 기장을 잘라서 튿어진 데를 덧대고 손질하노라니 어느새 깡똥바지로 바뀌었다. 바지도 멀쩡하고 사람도 말짱하다. 하루하루 고맙게 삶길을 잇는다. 풀꽃나무를 곁에 두면서, 해바람비를 실컷 마시면서, 늘 파란노래로, 손수 가꾸고 나누면서. 2025.11.10.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오른죽지



  어제하고 오늘 이틀에 걸쳐서 손글씨로 노래꽃을 옮겨적는다. 날마다 쓰는 노래꽃이지만, 몰아서 스물두 꼭지를 종이에 옮겨쓰자니 오른죽지가 결린다. 글자루에 담는다. 읍내 나래터로 나가서 부치기 앞서 살짝 눕는다. 등허리를 펴고 꾹꾹 주무른다. 눈을 스르르 감고, 자칫 14:00 시골버스를 놓칠 뻔한다.


  어제는 읍내길을 걸으며 책을 읽다가 전봇대에 이마를 쿵 찧었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걷는데,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앞을 살핀다. 아무래도 어제는 너무 빨리 걸은 듯싶다. 어제는 14:00 시골버스가 아닌 15:00 시골버스로 읍내에 나온 터라 좀 서둘러야 했다. 안 느긋하면 박거나 부딪히거나 미끄러진다.


  하루 볼일을 모두 마친다. 집으로 돌아갈 시골버스를 타러 걷는다. 읍내 버스나루에 가까울 즈음 우뚝 선다. 손이 가벼운 줄 느끼고는 “아차! 오늘 자루감을 장만하기로 했지!” 읽던 책을 얼른 덮고서 달린다. 아까 보아둔 감집으로 간다. 단감과 주먹감 사이에서 살피다가 주먹감으로 집어든다. 단감은 70알에 1만 원, 주먹감은 50알에 2만 원을 부른다.


  등판은 땀으로 젖는다. 큰고장으로 책마실을 갈 적에도 한겨울은 땀바가지요, 시골에서 저잣마실을 할 적에도 늘 땀빛이다. 이 땀으로 살고, 이 땀으로 씻고, 이 땀으로 쉬고, 이 땀으로 노래한다. 땀냄새를 풍기며 걷고, 땀방울을 마치 씨앗처럼 길바닥에 뿌리면서 걷는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땀사람이자 땅사람이었으나, 요즈음은 땀아이나 땀어른을 스치기 어렵다.


  저녁이 일찍 온다. 밤이 길고 고즈넉하다. 겨우내 고요히 흐를 밤빛일 테고, 별빛만 마당과 지붕과 뒤꼍을 어루만질 테지. 오늘밤도 별내가 하얗게 흐를 듯싶다. 돌아가는 시골버스에 오른다. 등짐과 자루감을 바닥에 놓는다. 숨을 돌리고서 하루글을 손으로 쓴다. 하루글을 맺을 무렵 마을 앞에 다다르려 한다. 마지막 두 줄은 집에 가서 적자. 등짐을 다시 메고, 자루감을 품에 안고서 내린다. 2025.11.20.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쓸모없어, 네 오지랖



  쓸모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쓸모있는 일이 남달리 있을까? 그렇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퍽 많은 분들이 쓸모없는 일에 너무 기울지 싶다. 스스로 사랑하고, 모든 일놀이를 사랑으로 기쁘게 할 수 있을 텐데,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든 곳에서 즐겁게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펴는 분은 뜻밖에 드물지 싶다.


  아니, 사랑하고 사랑받는 온하루를 기쁘게 노래하는 분은 많다고 해야겠지. 많이 배우거나, 많이 쥐거나, 많이 드날리거나, 많이 부리는 이야말로 사랑이 없는 채 움직인다고 느낀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많이’나 ‘적게’가 없다. 남이 보기에는 많거나 적어 보일 테지만, 사랑살림일 적에는 “늘 스스로 즐겁게”일 테니까.


  푸른배움터를 다니던 무렵을 떠올린다. 그때 동무들은 “야, 너 그런 책 왜 읽어? 그 책이 시험(수능)에 나온대?” 하고 묻는다. “아마, 이 책이나 이 책을 쓴 사람이 남긴 다른 글은 시험에 안 나올 듯해.” “그래? 알면서도 읽어? 시간 안 아까워?” “책을 꼭 시험에 나와야만 읽니? 읽어야 할 책이니 읽고, 배워야 할 책이니 배워.” “시험에 안 나오는 책을 뭐 하러 읽어? 정 읽고 싶으면 대학교에 붙고 나서 읽으면 되잖아.” “그래? 오늘 안 읽는 책을 나중에 가서 읽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론 말야, 코앞에 시험이 닥쳤다고 해서 안 읽는 책은 있지, 시험이 끝난 뒤에도 안 읽어. 그래서 나는 오늘 읽을 책을 그저 읽을 뿐이야.” “…….” “너, 생각해 봐.” “뭘?” “내가 ‘시험에 나올 턱도 없는 책’을 읽는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할 시험공부는 스스로 끝냈기 때문에 ‘시험에 나오든 안 나오든’ 스스로 읽어. 그리고 ‘시험에 안 나오는 책’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 삶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길에 이바지하는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들 시험문제를 더 잘 풀지 않을 수 있지만, 거꾸로 이 책을 읽기 때문에 한결 느긋해. 생각을 깊고 넓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시험문제에 안 나오는 책’을 읽으면서 더 ‘시험공부 대비를 잘할’ 수 있어.” “야, 네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응, 그러니까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알고 싶으면 너도 이럴 때에 책 좀 읽어 봐. 추천도서나 권장도서에 아예 들어간 적 없는 책을 읽으면, 너도 ‘생각’을 해볼 수 있어.”


  열일고여덟 살 무렵이던 1991∼92년에 동무하고 나눈 말은 오지랖이었을까? 바보스런 멋이었을까? 얼토당토않은 핑계였을까? 그러나 푸른배움터 여섯 해 내내 ‘중간·기말시험’뿐 아니라, 1993년 9월과 11월에 있던 우리나라 첫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에도 ‘수험서 아닌 책’을 잔뜩 챙겼다. 나는 ‘수능 1교시·2교시’가 끝나고서 숨돌리는 틈뿐 아니라, 도시락을 먹는 낮밥 무렵에도 ‘수험서 아닌 그냥 책’을 펼쳐서 읽으며 마음을 다독이고 다스리면서 이다음에 치를 셈겨룸을 헤아렸다.


  이날 저녁에 만난 또래는 “너 진짜 미쳤구나. 그때에 수험서를 한 쪽이라도 더 보았으면 10점은 더 나오지 않아? 아니 20점도 더 나오겠다.” “아니야. 안 나올 점수는 그때 더 들여다본다고 해서 나오지 않아. 나올 점수는 알아서 나와. 그리고 나는 그때 ‘그냥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기에 시험을 더 잘 치를 수 있었어.”


  ‘오지랖’이란 뭘까? ‘옷자락’을 가리키는 낱말일 텐데, 옷자락이 넓으면, 품이 넓어서 푸근하게 품을 줄 아는 마음이기도 하다. 오지랖이 넓기에 겨울에도 나눌 수 있고, 너른 옷자락을 잘라서 건넬 수 있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닌 ‘끼어들기’를 하는 사람은 다르다. ‘끼어들기’를 하는 사람은 늘 말썽을 일으키고, ‘쑤석거린다’고 할 만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오지랖이 아닌 끼어들기를 하니까. 알지 않기에 뒷말이나 남말이나 쑥덕질을 할 테고.


  오지랖은 쓸모없는 짓일까. 오지랖은 그냥 바보짓이고 귀찮거나 성가시게 구는 짓일까. 오지랖이라고 하는 ‘품’이 넓은 사람이란, 언제나 스스로 넓게 펴고 살림을 짓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오지랖이 없다면 ‘품’이 좁거나 밭은 나머지, 오히려 ‘나(스스로)’부터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르고 바라볼 줄 모르게 마련이라, 이때에는 ‘남’을 헤아릴 그릇이 안 된다고 느낀다. 둘레를 볼 만큼 느긋하고 넉넉하기에 오지랖이요, 둘레를 안 보고 냅다 달려들기에 끼어들기일 테지.


  굳이 ‘쓸모있는’ 뭘 해야 하지 않다. ‘쓸모있는’ 글을 써야 하지 않다. 지난날 ‘쓸모있는’ 글이란, ‘애국·충성·효도·교훈’이었고, 오늘날 ‘쓸모있는’ 글이란, ‘돈·이름·힘’이라고 느낀다. 돈되거나 이름팔거나 힘센 글을 써야 할까? 누구나 스스로 사랑하는 글을 써야 하지 않나? 쓸모있을 글이 아니라, 스스로 이 삶을 사랑하면서 나랑 너를 아우르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글을 쓸 일이지 않나? 글삯이 톡톡해야 글을 쓴다는 이름꾼(유명작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나는 글삯이 0원이어도 기꺼이 쓴다. 나는 나부터 스스로 살리고, 곁님과 아이들과 이웃이 어깨동무하면서 푸르게 피어날 숲길을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2025.2.4.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