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외 프린세스 2
아이다 나츠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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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5.

안팎을 잇는 너


《권외 프린세스 2》

 아이다 나츠미

 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2016.8.15.



  나는 너를 달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네가 스스로 달래는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다독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스스로 다독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한테 무엇을 해주는 듯 보일는지 모르나, 정작 어느 누구도 남을 달래거나 다독이지 않습니다. 늘 저마다 스스로 달래거나 다독입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기에 기쁠 까닭이 없어요. 네가 나를 미워하기에 꺼리거나 싫을 까닭이 없어요. 어느 누구도 남을 사랑하지 못 합니다. 좋거나 미운 마음이란 누구나 품을 수 있되, 모름지기 사랑이란 스스로 어떤 숨빛인지 알아보는 길을 가리킵니다. 남을 아끼거나 보살핀다면 ‘아끼다’나 ‘보살피다’라고 합니다. 아끼거나 보살피기에 사랑이지 않아요. 스스로 사랑으로 빛나기에 저절로 이웃을 아끼거나 보살피는 매무새가 피어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기에 즐겁거나 기쁠 수 없어요. 좋아하면 그뿐입니다. 어느 하나를 좋아하기에, 이 하나를 뺀 나머지를 모조리 싫어하거나 안 쳐다보거나 미워하거나 꺼리거나 등돌리곤 합니다.


  온누리를 보면 환하게 드러납니다. 어느 갈래를 좋아한다고 밝히는 사람일수록 “어느 갈래를 뺀 모든 갈래”를 모르거나 등돌리거나 까막눈입니다. 어느 사람을 좋아한다고 외치는 사람일수록 “어느 사람을 뺀 모든 사람”을 아예 안 쳐다보고 얘기를 안 듣고 말조차 안 섞더군요. 좋아하니까 좁아요. 좁으니까 좇아다녀요. 이러다가 이웃을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권외 프린세스》는 어느 아이가 누구보다 스스로 안 좋아하고 스스로 미워하고 스스로 못생기고 못났다고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스스로 갉아먹는가 하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잘생기거나 몸매가 미끈해야 남들이 좋아할 만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나 얼굴이나 몸매는 “어느 사람 숨빛”이 아닌, 그저 살덩이일 뿐입니다. 살덩이를 쳐다보는 마음으로는 아무런 사랑이 안 싹터요.


  서로 눈을 감고 마주볼 적에 비로소 스스로 어떤 숨빛인지 느끼고, 이때에 ‘사랑’이란 늘 ‘나부터’ 날개를 펴는 길인 줄 천천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부터 일어서야 너를 알아보고, 너를 알아보면서 나를 다시 바라보며, 나를 다시 바라보다가 너를 그윽히 지켜보기에, ‘우리’를 이루는 하늘빛으로 반짝반짝 웃고 노래하는 길에 서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울(설득) 수 없습니다. 남한테 “자, 이제 스스로 깨어나 보셔요.” 하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남한테 “자, 이제 스스로 사랑해 보셔요.” 하고 얘기할 수는 있습니다.


  속꽃(무화과)을 먹고 싶으면 속꽃나무 한 그루를 심을 노릇입니다. 배를 먹고 싶으면 배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됩니다. 남이 속꽃이나 배를 사다가 주기를 기다리거나 바랄 까닭이 없어요.


  말을 알고 싶으면 마음을 틔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낱말책을 살펴서 차분히 읽으면서 스스로 낱말풀이를 하면 됩니다. 글을 쓰고 싶으면 그림부터 그릴 노릇입니다. 하루를 그리고, 꿈을 그리고, 사랑을 그리면서, 천천히 살림을 그리노라면, 어느새 누구나 글지기로 일어섭니다.


  너를 바라보는 나는 서로 안팎을 잇습니다. 눈을 감고 바라보다가, 눈을 뜨고 지켜보다가, 다시 서로서로 마음과 눈망울을 마주하면서, 차분히 안팎을 잇는 빛줄기를 느낍니다.


ㅍㄹㄴ


“너도 같은 마음이지? 전시회가 걱정돼서 온 거잖아. 나처럼!” (9쪽)


‘포기하는 건, 역시 불가능해!’ (72쪽)


‘오히려 내 쪽이 아니었을까?’ (110쪽)


“메구치. 잡지도 사람이 만드는 거라,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안 돼. 이 중에서 내가 ‘괜찮다’ 싶은 것만 골라서 참고로 하면 되지 않을까? 사랑도, 화장도, 멋도, 수학 교과서랑 달라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 (147쪽)


‘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떡하는 게 가장 좋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조금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금방 침울해 하는 게 아니라, 나랑 둘이 이 비오는 날, 어떡하면 즐길 수 있는지부터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쿠니마츠, 난 널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냐. 난 너처럼 다정하고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198쪽)


#圈外プリンセス #


+


《권외 프린세스 2》(아이다 나츠미/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2016)


지면이 까마득히 멀어

→ 바닥이 까마득히 멀어

→ 땅이 까마득히 멀어

7쪽


어느 반보다도 월등히 뛰어나니까

→ 어느 곳보다도 뛰어나니까

→ 어느 칸보다도 잘했으니까

22쪽


짧은 치마에 호전적인 자세는 뭐야?

→ 짧은치마에 달려드는 몸짓은 뭐야?

→ 짧은치마에 사나운 매무새는 뭐야?

129쪽


앞머리를 얘처럼 사선으로 해보는 건 어때?

→ 앞머리를 얘처럼 빗살로 해보면 어때?

→ 앞머리를 얘처럼 비스듬히 하면 어때?

147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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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리고 죽어 5
토요다 미노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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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3.

온하루를 바쳐서


《이거 그리고 죽어 5》

 토요다 미노루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12.31.



  《이거 그리고 죽어 5》을 아이들하고 즐겁게 읽습니다. 반갑게 맞이해서 기쁘게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언제쯤 다음걸음이 한글판으로 나오려나 손꼽아 기다리면서, 되읽고 새로읽고 다시읽곤 합니다. 《이거 그리고 죽어 5》에서는 그야말로 온힘을 쏟아부어서 그리는 마음이란 무엇인지 짚습니다. 언뜻 보면 “활활 불태운 붓끝”이기에 이제 한 줌 재가 된 듯싶습니다. 그러나 온힘과 온마음과 온넋을 그러모아서 빚은 그림 한 칸이란, ‘불태우기·불사르기’가 아닌 ‘붓기(쏟아붓기)’입니다. 불이란 불길(분노)이게 마련이라 그만 잿더미로 갑니다만, ‘붓다’일 적에는 여름날 소나기나 봄날 눈녹임비처럼 온누리를 푸르게 적셔요.


  마지막 기운까지 쏟아붓고서 드러눕기에 어느새 기운을 차려서 일어나고, 다시 붓을 쥐면 뜻밖에도 예전에는 느끼지 못 하던 찌릿찌릿 벼락이 온몸으로 퍼지는 줄 알아차리지요. 다 쏟아부었다고 여겼기에, 예전 몸짓을 모두 녹여낸 셈이요, 바야흐로 새몸으로 거듭나서 새그림을 빚을 수 있습니다. 불태움질이 아닌 쏟아붓기일 적에는 풀벌레가 허물벗기를 하듯 ‘낡은 우리 몸을 스스로 벗는’ 길입니다.


  우리말 ‘기쁨(기쁘다)’이란 ‘깊다’하고 밑동이 같습니다. ‘길다’와 ‘길’에다가 ‘기르다’와 맞닿기도 합니다. ‘기쁨’이라고 할 적에는, 깊이 스미면서 차오르는 빛일 뿐 아니라, 길디길게 잇는 길처럼 스스로 나아가는 빛살로 뻗고, 스스로 살리고 살찌우고 북돋우듯 기르면서 ‘기운’을 일으키는 몸짓이자 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기쁠 적에는 굳이 안 웃으면서 차분히 있기도 합니다. 속으로 기운과 빛이 넘쳐오르니 굳이 겉으로 티를 내지 않더라도 둘레를 밝혀요. 이와 달리 ‘즐거움(즐겁다)’일 적에는 즐거운 티가 풀풀 나면서 활짝 웃고 떠듭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즐겁다’는 ‘즈믄(1000·천)’이라는 셈값을 나타내는 낱말하고 밑동이 같고, ‘졸졸·줄줄’이며 ‘줄기·줄기차다·줄거리’에 ‘지며리’처럼 맑고 밝게 흐르는 물빛으로 노래하는 결이거든요. 이리하여 ‘즐겁다’는 ‘짓다·집’으로 잇는 낱말이라서, 맑고 밝게 피어나는 웃음과 이야기로 살림을 짓는 보금자리(집)로 나아가는 마음과 몸짓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꼭 ‘좋은일’에서만 느끼지 않아요. 좋든 안 좋든, 언제나 우리 스스로 이 삶을 배우고 누리고 나누고 베풀고 받아들이고 다시금 주고받는 사이에 피어나는 마음입니다. 가시밭길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꽃길도 즐겁고 기쁩니다. 온하루가 늘 사랑인 줄 알아보는 눈빛이기에 기쁘고 즐겁게 마음을 다스려서 이 삶을 짓고 가꾸면서 길이길이 나아간다고 느낍니다.


  《이거 그리고 죽어》는 기쁜 길이 무엇인지 짚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러면서 즐거운 노래가 무엇일까 하고 곱씹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왼손과 오른손에 놓으면서, 둘 사이를 가만히 오가고 지켜보고 하나로 어우르는 삶을 찾아보려는 매무새라고도 여길 만합니다.


  더 빼어난 붓끝은 없습니다. 더 높거나 낮은 붓질도 없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스스로 차분히 짓는 붓끝입니다. 오늘은 오늘까지 쏟은 땀방울로 눈망울이 빛납니다. 오늘을 실컷 누리기에 오늘부터 맞이할 새날에는 이슬 한 방울과 빗물 한 톨을 두 손에 놓고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ㅍㄹㄴ


“천재란 게 칭찬인가? 내가 아이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엄마가 인기 만화가여서도, 타고난 센스가 있어서도 아니야. 아이의 몇 백 배나 그렸으니까 그런 거지. 자기가 노력 안 하는 것에 대한 변명 아냐?” (14쪽)


‘그리고 싶다. 빛을. 그림자를. 봄 햇살의 따뜻함을. 여름날의 생명력 넘치는 하늘을. 가을날의 차분한 평온함을. 겨울날의 차갑게 맑은 공기를.’ (36∼37쪽)


“난폭해! 무모한 설정을 무모한 설정으로 받아쳤어! 고민하고 있어! 마음 착한 후지모리가 고민하고 있어!” (67쪽)


“그건 테시마 선생님한테 너무 심하게 굴어서.” “날 위해서 그린 겁니까? 그런 부탁 한 적 없습니다만.” “아뇨, 제가 화가 나서.” “그럼 개인적인 분노를 위해 사람을 한 번만 보고 폄하하고 모욕한 겁니까? 만화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일 텐데요.” (107쪽)


“다음번엔 제대로 재미있는 만화로 싸우겠습니다!” (116쪽)


“정마아아알? 《기생수》보다 재미있었냐아아아아∼?” “뭐랑 비교하는 거니. 뻔뻔도 해라!” (177쪽)


“열심히 노력했지만 내가 졌어. 이거 그렸으니까 죽을까?” (195쪽)


#これ描いて死ね #とよ田みのる


+


《이거 그리고 죽어 5》(토요다 미노루/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


내가 원하던 건 바로 이거였어

→ 나는 바로 이 길을 바랐어

→ 난 이렇게 하고 싶었어

141쪽


그렇게 대단한 애가 신입부원이라니

→ 그렇게 대단한 애가 새내기라니

→ 그렇게 대단한데 새사람이라니

142쪽


차분하게 부감해서 생각하자

→ 차분히 내려다보며 생각하자

→ 차분하게 새보기로 생각하자

172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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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샌드백 : 하 - 완결
카오리 오자키 지음, 박소현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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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3.

나이는 나무처럼


《개와 샌드백 下》

 카오리 오자키

 박소현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3.12.30.



  새봄을 맞으면 어느새 나비가 팔랑팔랑 들숲을 날아다닙니다. 언제 고치를 틀었고, 언제 날개돋이를 했고, 언제 어디에서 겨울잠을 마치고 일어난 나비일까 하고 한참 바라봅니다. 겨울에는 찬바람과 누렇지만 부드럽게 시드는 풀포기를 가볍게 쓰다듬고, 봄에는 푸릇푸릇 돋는 풀포기에 내려앉는 산들바람과 나비를 문득 지켜보다가 나무한테 다가가서 “겨우내 애썼구나” 하고 쓰다듬습니다.


  해마다 넷쨋달을 맞이하면, 마녘 시골에서는 마늘밭에 풀죽임물을 오지게 뿌립니다. 마늘밭이 온통 하얗게 풀죽임물잔치를 이루는 모습을 처음 본 해에는 “마늘을 굳이 먹어야 할까?” 하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해를 지나고 다섯 해를 지나고 열 해를 지나고 열다섯 해에 이른 오늘 다시 헤아립니다. 마늘밭이며 논밭 풀죽임물 못지않게 시골과 서울 어디나 부릉부릉 쇳덩이가 매캐한 김을 끝없이 뽑아내요. 풀죽임물만 걱정할 노릇이 아닌, 그저 모든 쇳덩이를 근심할 노릇이더군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읊습니다. “바람아, 하늘아, 우리가 잘못했구나. 그렇지만 늘 새롭게 파랗게 불어 주니 고마워.” 바람은 우리 목소리를 듣고는 어느새 돌개바람을 일으켜 풀죽임물을 훅 날립니다. 하늘은 우리 마음을 듣고는 어느새 굵게 빗방울을 떨굽니다.


  꽃과 나비와 새 곁에, 나무와 풀벌레와 사람이 나란히 서는 봄입니다. 《개와 샌드백》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제법 나이든 순이와 스물 언저리인 돌이가 몸뚱이에 앞서 마음으로 먼저 만나서, 서로 그동안 스스로 어떤 응어리와 멍울을 온몸으로 새기면서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삶을 갉아먹었”는지 말로 주고받으면서 풀어내는 얼거리입니다.


  모든 응어리는 남이 아닌 내가 받아들입니다. 모든 고름은 남이 아닌 내가 내놓습니다. 모든 멍울도 생채기도 우리가 스스로 남깁니다. 햇살이 내리쬐기에 우리 살갗이 다치지 않습니다. 빗방울에 맞기에 우리 몸에 구멍이 나지 않습니다. 누가 옆에서 무어라 쫑알거리든 우리 마음이 다칠 까닭이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한테 “어머니 어릴적 얘기 좀 들려주셔요.” 하고 여쭈면 한 마디도 안 하기 일쑤였습니다. 떠올리기 싫은 일이 가득하기에 차마 말을 하기도 싫을 뿐 아니라, 떠올리기만 해도 욱씬거리기만 한 줄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요즈음 우리 집 아이들이 저한테 “아버지 어릴적에는 어땠어요?” 하고 물으면 빙그레 웃으면서 지나온 일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줄줄이 머릿속에 떠올린다. 낱낱이 짚으면서 그때 겪은 일과 오늘 어떻게 바라보는지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입니다. 오늘과 모레와 어제는 언제나 하나로 흐릅니다. 오늘을 제대로 알려면 어제를 짚을 노릇이고, 어제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면, 머잖아 다가올 모레를 꿈과 사랑으로 그릴 노릇입니다. 어떤 모레를 맞이할는지 알고 싶다면 바로 오늘 즐겁게 살림씨앗을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삶이라는 길을 사랑이라는 숨결과 눈빛으로 가꾸는 살림을 숲빛으로 품는 목숨붙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말로 우리 삶을 그리고, 글로 우리 삶을 그립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글이란, “우리 이야기”이면서 “아이곁 이야기(육아일기)”이기도 합니다. 순이돌이가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떤 어린날을 누렸고 젊은날을 보내면서 어른살이를 짓고 싶은지 이야기할 적에, 비로소 이 나라는 천천히 아름답게 바뀌리라 봅니다.


  우리가 나눌 말이란, 늘 ‘삶·살림·사랑·숲’ 네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이야깃감으로 삼기에 언제나 어깨동무하면서 집과 마을과 나라와 별을 함께 일굴 수 있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든, 둘이 같이 살림을 꾸리든, 아이를 낳든 안 낳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살림·사랑·숲’ 네 가지를 마음으로 담아내어 몸으로 녹아내기에 사람일 뿐입니다.


  말 한 마디란 말씨이고, 글 한 줄이란 글씨입니다. 어떻게 말씨앗과 글씨앗을 남겨서 스스로 돌아보고, 이웃과 아이한테 베풀려 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각하기에 사람이고, 생각을 안 하기에 사람이 아닌 겉껍데기 살가죽입니다.


ㅍㄹㄴ


“이렇게 멋진 여자를 어설프게 사랑해선 안 돼!” (47쪽)


“영혼은 배신하지 않아. 좋아해요, 니치코 씨.” (49쪽)


“저걸 갖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거짓말쟁이라며 그 사람을 탓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 분노가 부족했었나?” (61쪽)


“모모, 유통기한이라는 말을 자기 자신에게 쓰면 안 돼!” (109쪽)


‘이상한 기분이다. 이젠 못 만나는 거지? 아츠무. 당신도 다리였어. 내가 도쿄를 살아내기 위한.’ (192쪽)


#尾崎かおり #犬とサンドバッグ


+


《개와 샌드백 下》(카오리 오자키/박소현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3)


생식 능력이 퇴화한 일개미는

→ 낳지 못하는 일개미는

→ 씨알이 사라진 일개미는

5쪽


매일 먹이를 모으거나 유충을 보살피는 등

→ 늘 먹이를 모으거나 애벌레를 보살피며

5쪽


이 노선은 왜 아직도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지 않는 걸까

→ 이 길은 왜 아직도 겹닫이를 안 놓을까

→ 이쪽은 왜 아직도 덧닫이를 안 둘까

13쪽


주로 클레임에 대응해야 하니까 자존심이 깎여나가요

→ 딴죽질을 마주해야 하니까 마음이 깎여나가요

→ 딴지걸기를 받아야 하니까 속이 깎여나가요

15쪽


처음으로 원나잇을 해버렸네

→ 처음으로 하룻밤을 해버렸네

→ 처음으로 그러안아 버렸네

→ 처음으로 믐을 섞어버렸네

20쪽


중고 거래 앱으로 팔았어야 하는 건데

→ 되팔기 무른모로 팔아야 했는데

→ 다시쓰기 꽃으로 팔아야 했는데

→ 헌살림 모로 팔아야 했는데

62쪽


왜 남자만 여자한테 조공을 바치고도 차여야 돼?

→ 왜 사내만 가시내한테 바치고도 차여야 해?

80쪽


나는 위하수체야! 남의 체질을 갖고 사람을 놀리지 마

→ 나는 속처짐이야! 남을 몸빛으로 놀리지 마

→ 나는 배처짐이야! 남을 몸으로 놀리지 마

114쪽


용천수를 찾아 수풀로

→ 옹달샘을 찾아 수풀로

→ 샘물을 찾아 수풀로

180쪽


석양을 보고 있어

→ 저녁놀을 봐

→ 노을을 봐

184쪽


40견입니다. 노안이 시작됐어요

→ 마흔어깨. 잘 안 보여요

→ 어깨앓이. 눈이 이제 어두워요

189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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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화가 11
이노카와 아케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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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3.

찍어누르니 물감을 찍어서


《누에 화가 11》

 이노카와 아케미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2.12.31.



  옆에 있으면 ‘옆’입니다. 그냥그냥 지나가니 스칩니다. 옆에 있기에 돌아보거나 살피는 사이로 지내기도 하지만, 못 본 척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기도 합니다. 옆이라는 자리에서 마음을 기울이면 ‘곁’입니다. ‘옆’은 ‘옆구리’에도 쓰고, ‘곁’은 ‘겨드랑이’에도 씁니다만, 옆에서 곁으로 옮길 적에는 말씨만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확 따스하게 바뀝니다.


  옆에 있는 옆집인데, 옆집은 사이좋을 수 있고 데면데면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곁집’이라 하면 한지붕이나 한집으로 아우르는 결입니다. 그냥그냥 옆에 있으면 먼먼 남일 수 있되, 곁에 있다는 마음으로 접어들면 비로소 ‘이웃’이라 여깁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옆나라가 있습니다. 서로 어깨를 겯고 나란히 선다면 ‘곁나라’일 수 있고 ‘이웃나라’이기도 하지만, 총칼을 앞세워 윽박지르거나 짓밟으려 한다면, 이웃도 곁도 아닙니다. 그저 옆에서 괴롭히는 남이요 놈입니다.


  《누에 화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면서, 누구보다 “제 나라 일본 수수한 사람들”부터 찍어누르던 무렵에, 붓을 쥐고서 그림을 남기는 사람이 마주한 “그저 수수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나날을 보내었는지 들려줍니다. 나라가 찍어누르는 굴레에 숨도 못 쉬는 사람이 있고, 나라가 찍어누르려는 총칼을 함께 쥐고서 마을사람도 옆사람도 찍어누르는 앞잡이가 있고, 이 서슬퍼런 나라에서 달아날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가난하고 수수한 살림을 겨우겨우 잇는 사람이 있고, 목소리를 내다가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어쩔 길을 모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웃이 아닌 옆에서 총칼을 쥐고 우락부락 힘자랑을 하던 무렵, 일본사람은 얼마나 앞잡이나 꼭두각시나 허수아비 노릇을 했을까요? 이 모든 바보짓하고 등돌리면서 ‘이웃나라’를 살피고 ‘이웃집’을 헤아리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어울리려던 사람은 어느 만큼일까요?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나란히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앞잡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분고분 말을 따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앞잡이를 거스르고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서, 가난하되 곧고 즐겁게 보금자리를 일군 사람이 드문드문 있되 아주 적지는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앞잡이가 많았고, 말없이 고분고분 따른 사람도 많았으나, 의젓하게 거스르면서 가난길을 기꺼이 맞아들인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누가 이웃일까요? 누가 옆집이고 곁사람일까요? 그저 이 나라에서 같은 말을 쓰기에 이웃일까요? 서로 다른 말씨를 쓰지만, 마음으로 어울리면서 아끼고 보살필 수 있는 사이여야 비로소 이웃이지 않을까요?


  예나 이제나 나라(정부)는 힘과 돈과 이름으로 찍어누릅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삶을 사랑으로 가꾸면서 살림을 지으려는 수수한 사람은 붓에 먹물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듯, 마음에 꿈씨앗을 톡톡 심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새봄이기에 호미로 땅을 콕콕 찍어서 씨앗을 심습니다. 봄맞이새는 꽃송이를 콕콕 찍으면서 봄맛을 누립니다. 즐겁고 사랑스러운 하루를 마음으로 찰칵찰칵 찍습니다.


ㅍㄹㄴ


“지금 누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요. 천천히 사자에 대해 말하고, 조용히 추억을 더듬는, 그런 애도가 어려운 시대죠. 앞으로 사람의 목숨을 더욱 거칠게 다루게 될 겁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슬퍼하는 것조차 꺼려지게 되겠지요.” (34쪽)


“사방이 다 화약 냄새 나고, 못마땅하고 불편하지만, 틀어박혀만 있으면 몸 망가져.” (55쪽)


“어차피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 흉내나 내는 거지. 하하하.” “이미 시집도 갔고 애도 낳았습니다. 죽은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딸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인 걸 후회하지도 않고, 남자가 되겠단 생각도 없습니다.” (96쪽)


“벚나무는 꽃의 계절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새잎이 날 때도 멋진데요! 이것 봐요. 그늘도 이렇게 초록색이에요! 잎 사이로 드는 빛이 바람에 움직이는 게 파문 같아요. 잎이 스치는 소리도 기분 좋고. 이러고 있으니까 저도 벚나무 가지가 된 것 같아요.” (108쪽)


“미치코 씨가 변한 건, 제 그림의 힘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려고 행동했기 때문일 겁니다.” (153쪽)


“이제부터 한창 때겠네. 요시노리도 카오루도 청춘의 한가운데야.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하지만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찍어야 할 것도 그려둬야 할 것도 있는지 모르지.” (156쪽)


“그 주방장도 그날 가족을 잃었잖아.” (199쪽)


#猪川朱美


+


《누에 화가 11》(이노카와 아케미/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2)


화풍이 요즘에 안 맞는대

→ 붓끝이 요즘에 안 맞는데

→ 그림이 요즘에 안 맞는데

7쪽


머리모양 바꿨네요. 잘 어울려요

→ 머릿결 바꿨네요. 어울려요

→ 머리카락 바꿨네요. 어울려요

159쪽


평소의 네 그림보다 훨씬 서정적이야

→ 다른 네 그림보다 훨씬 따뜻해

→ 여느 네 그림보다 훨씬 부드러워

163쪽


굉장히 큰 도움이 됐어요

→ 무척 컸어요

→ 크게 도와주셨어요

→ 큰힘이 됐어요

208쪽


피안으로 떠난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는

→ 너머로 떠난 사람들 그림자를 보는

→ 꽃터로 떠난 사람들 그림자를 보는

212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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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로봇 퐁코 6 - S코믹스 S코믹스
야테라 케이타 지음, 조원로 옮김 / ㈜소미미디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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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7.

놀면서 자라고 싶어


《고물 로봇 퐁코 6》

 야테라 케이타

 조원로 옮김

 소미미디어

 2025.2.26.



  읽어 주는 마음이란 언제나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어느 글을 읽건, 스스로 더 바라보고 받아들이면서 바꾸겠다는 뜻입니다. 더 낫거나 나쁜 글이란 없습니다. 모두 다른 자리에 서서 빚은 글이요, 누구나 다른 자리에 서서 맞이하는 글입니다.


  붓을 쥐는 손은 이야기를 새롭게 짓습니다. 때로는 날림붓으로 널뛰기도 하고, 거짓붓으로 헤매기도 하지만, 어린이를 바라보려는 붓으로 거듭날 적에는 여태까지 뒤집어쓴 허물을 말끔히 털어내는 노래붓으로 나아갈 만합니다.


  어린이는 안 서두릅니다. 어린이는 달리고 뛰고 노래하지만 하나도 안 서두릅니다. 어린이는 놀면서 자라려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노래하면서 크려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놀이와 노래로 사랑을 천천히 배우면서 피어나는 사람입니다.  


  《고물 로봇 퐁코 6》을 읽으면 앞선 다섯걸음하고 매한가지로 “놀고 싶은 작은이(로봇)”가 둘레 뭇사람을 나란히 놀이판으로 끌어들이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심부름꾼’으로 부리려고 작은이(로봇)를 만들고서 옆에 두었을 테지만, “스스로 일을 안 하면서 작은이한테 일을 맡기는 사람”으로 바뀔 적에 얼마나 ‘사람빛’을 잊고 잃는지 천천히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중에 이르러서야 ‘심부름꾼 작은이’가 아닌 ‘놀고 노래하는 동무와 이웃’이 있어야 하는 줄 받아들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어떤 모습일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갖가지 틀(기계)을 부리거나 다루면서 일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걸어다니려 하지 않으면서 쇠(자가용)에 자꾸 몸을 싣습니다. 뛰어놀려 하지 않으면서 셈틀을 켜서 셈틀놀이(인터넷게임)에 사로잡힙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지으면서 둘레에 나누려는 마음은 잊어버리면서 자꾸자꾸 보임틀(텔레비전·영화·연속극·유튜브)에 얽매입니다. 이제는 ‘AI’라는 이름을 붙여서 ‘사람빛’을 아예 망가뜨리려고까지 합니다. 그동안 누구나 손수 가꾸고 짓고 빚고 나누던 살림살이와 이야기와 하루를 온통 종(노예)한테 맡기며 거꾸로 사람 스스로 종살이로 갇힙니다.


  남이 해주는 밥이 맛날 수 없습니다. 손수 짓고 차려고 먹은 다음에 손수 치우고 추스르는 밥이 맛나게 마련입니다. 품이 드는 도시락을 손수 싸기에 하루가 든든한데, 이제는 품을 들여서 도시락을 싸기보다는, 모둠밥(급식)을 똑같이 먹고 말아요. “다 다른 몸에 똑같은 밥을 집어넣어서 다 다른 나다움을 스스로 잊고 잃는 굴레”로 치닫기까지 합니다.


  모둠밥(급식)은 몫(인권)이 될 수 없습니다. 예부터 언제 어디에서 모둠밥을 차려서 먹였는가 하고 헤아려 봐야 합니다. 모둠밥은 바로 싸움터에서 싸울아비한테 먹였고, 가둠터에 사람들을 옥죄어 놓으면서 먹였습니다. 일하는 어른과 놀이하는 아이가 모둠밥을 먹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하는 우리는 모둠밥이 아닌 ‘집밥’과 ‘도시락’을 되찾아야 합니다.


  밥솜씨가 떨어지면, 밥짓기를 배워야지요. 처음부터 밥솜씨가 빼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타고난 솜씨로 밥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근차근 익히고 가다듬기에 밥짓기를 해낼 뿐입니다.


  《고물 로봇 퐁코》는 어린이뿐 아니라 할매할배도 모든 일을 손수 맡아서 천천히 할 적에 “안 늙고 안 아프면서 오래오래 즐겁게 살림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대목을 차분히 들려줍니다. 할매할배는 ‘어르신 돌봄터(요양보호시설)’에 갇히면 하루가 다르게 폭삭 늙다가 어느새 죽고 맙니다. 스스로 해볼 일과 살림이 하나도 없이, 주는 밥을 먹어야 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돌봄터에서는 몸도 마음도 빛을 잃으면서 그저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돈을 쓰는 굴레”일 뿐입니다.


  언제나 느긋하게, 조금이라도 힘들면 넉넉히 쉬면서, 천천히 누벼 보기를 바라요. 언제나 손수 하면서,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다시 배우고 새로 익히면서, 하나하나 누려 보기를 바라요. 우리 두다리는 빨리 걷거나 달려야 하는 몸이 아닌, 땅을 느끼며 이웃하고 오가는 몸입니다. 두바퀴(자전거)는 바람을 씽씽 가르는 탈거리가 아닌, 바람맛과 햇볕을 온몸으로 널리 받아들이면서 들길과 숲길을 돌아보는 탈거리입니다.


  바람을 맞아들이는 발과 손과 몸과 눈과 마음입니다. 마음을 담아 함께 잇습니다. 서로 이은 마음이 차곡차곡 풀씨처럼 깃들어서 자라납니다. 예부터 모든 아기는 어버이 곁에서 뒹굴고 기고 구르고 뒤집고 서고 앉다가 신나게 잠들면서 천천히 자랐습니다. 예부터 모든 어른은 아기를 거치고 아이를 지나면서 푸릇푸릇 무르익어서 든든몸으로 일어섰습니다.


  어린이는 걸어다녀야 합니다. 어른도 걸어다녀야 합니다. 어린이와 어른은 같은 골목과 마을을 거닐면서 만나야 합니다. 어린이가 노래하면서 노는 곁에서 일할 줄 알아야 어질며 슬기로운 어른입니다. 손수 땀흘려 일하는 살림살이를 물려주려는 매무새로 하루를 그리면서 가꿀 적에 비로소 어른답습니다.


ㅍㄹㄴ


“무슨 생각이야, 퐁코? 도망쳐 봤자 아무런 소용…….” “전 교환 당하고 싶지 않아요! 유우나 님이 어머님 손에 이끌려 떠나는 것도 싫어요!” (26쪽)


“난 지금껏 엄마 말을 거스르지 못했어! 로봇처럼 엄마 말만 들었어! 하지만! 난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 좀만 더 여기 있을래! 여름방학이 끝나면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돌아갈 테니까!” (33쪽)


“나 있지, 줄곧 퐁코,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제게요?” “처음에 여기서 만났을 때, 로봇한테 이름 따위 필요 없다고 말해 버려서, 미안해!” (63쪽)


“햄버거!! 너, 너희들, 이걸 사러, 옆마을까지 자전거 타고 간 거야?” (134쪽)


#ぽんこつポン子 #矢寺圭太


《고물 로봇 퐁코 6》(야테라 케이타/조원로 옮김, 소미미디어, 2025)


유우나가 불량 학생이 됐어

→ 유우나가 말썽쟁이가 됐어

→ 유우나가 날라리가 됐어

28쪽


대전하자!

→ 겨루자!

→ 붙자!

→ 해보자!

55쪽


오래 쓰면 맛이 가기 마련이니까

→ 오래 쓰면 맛이 가게 마련이니까

→ 오래 쓰면 맛이 가니까

96쪽


가벼운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 가볍게 밥을 차렸습니다

→ 가볍게 밥자리가 있습니다

→ 가볍게 들고서 가십시오

106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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