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쿠팡체험 군대체험



  찬바람이 가득한 1998년 어느 날, 〈한겨레〉 새내기라고 하는 안수찬 씨를 만난 적 있다. 그무렵 나는 〈한겨레〉를 나르는 일꾼(신문배달부)이었는데, 안수찬 씨는 ‘신문배달부 석 달 경험’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고 밝히더라.  요새는 사라졌을 수 있고, 다른 새뜸에서는 안 하는 줄 아는데, 한동안 〈한겨레〉는 모든 새내기(신입기자)한테 ‘석 달 신문배달부 체험’을 시켰다. 누구나 반드시 석 달 동안 ‘사는집 가까운 신문배달구역’에서 새벽마다 일하도록 해야 했다.


  석 달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 여름 석 달을 일한 사람과 겨울 석 달을 일한 사람은 오지게 다르다. 봄가을에 석 달을 일했으면 또 다르다. 새뜸나름이로 가장 고단한 철은 여름이다. 한겨울에도 늘 땀범벅으로 뛰고 일하는 나름이(배달부)인데, 여름에는 따로 수건을 둘씩 챙겨서 손땀을 닦더라도 ‘집집마다 나르는 새뜸’에 땀이 묻는다. ‘젖은 새뜸’이 집에 닿으면 싫어하는 분이 많더라. 모든 새벽나름이는 한겨울에도 수건을 챙기면서 일한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비롯해서, 손에 돋는 땀을 닦고서 새뜸을 넣거든. ‘수건을 챙기지 않는 새뜸나름이’가 있다면 엉터리이거나 거짓말이다.


  여름에는 1분만 지나도, 겨울에는 12분쯤 지나면, 수건마저 땀으로 흥건하다. 그야말로 “땀방울 안 묻은 새뜸”을 넣기는 너무 어렵다. 어떤 분은 “땀방울 묻은 새뜸”을 못 보겠으니 바꿔 달라고 새벽에 신문사지국으로 전화를 건다. 어쩌겠는가. 바꾸러 그 집에 두바퀴를 달려서 찾아가야지.


  1998년 어느 날 안수찬 씨를 만난 자리에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새벽에 신문배달부 체험은 하셨다지만, 새벽만 돌렸으니까 ‘수금’은 안 하셨겠지요?” “네? ‘수금’이요? 수금이 뭔가요?” “신문을 돌렸으면 신문값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러면, ‘지로’나 ‘찌라시’를 넣은 적도 없겠네요?” “지로요? 찌라시요? 그게 뭔가요?” “아무리 신문배달 체험이라고 해도요, 지로와 찌라시도 모르면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어요. 요새는 그마나 나아서 ‘지로’를 끼워서 돌리는데요, 지로를 끼워도 신문값을 안 내는 분이 아주 많아요. 수금을 하러 가면 값을 깎아 달라고 하려고 하시거든요.” “…….” “신문배달은 새벽일이 끝이 아니에요. 한 달 가운데 보름은 아침과 낮에 수금을 하러 집집마다 다 다시 돌아야 하는데, 신문값을 그날 바로 받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신문배달로 새벽 두 시간을 달린다면, 수금을 하러 아침과 낮에 여덟 시간을 달려야 해요.” “…….”


  요새 ‘쿠팡 때리기’를 하듯 ‘쿠팡 체험’을 하고서 글을 쓰는 분(기자·작가)이 꽤 있는 듯싶다. 이런 분들은 지난날 ‘한겨레 신입기자 석 달 신문배달부 체험’조차 아닌 하루이틀이나 기껏 보름쯤 조금 해보고서 글을 쓰더라. 그런데 하루이틀이나 보름 조금 맛본대서 뭘 알까? 겉은 훑을 수 있겠으나 뭘 알지? 쿠팡이 ‘한국계 기업’인지 ‘미국계 기업’인지 모르겠으나 ‘중국계 기업’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왔고, 쿠팡 못지않게 ‘새벽배송’을 하는데, 여태 ‘중국계 기업 새벽배송’을 놓고서 한 마디라도 하는 글꾼(기자·작가)은 한 놈도 없다.


  이따금 ‘해병대 체험’이라든지 ‘군대 체험’이라면서 ‘유격훈련’을 한나절이나 몇날쯤 해보는 분이 있더라. 그런데 싸움터(군대)는 ‘훈련이 목적’이 아니다. 싸움터는 ‘경계근무’와 ‘전쟁수행’을 꾀하는 곳이다. ‘헬기레펠’이라든지 ‘철조망 포복’이라든지 ‘통나무 들기’는 아주 귀여운(?) 노닥질이다. ‘사상교육’을 날마다 꼬박꼬박 스물여섯 달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날마다 둘∼네 시간씩 경계근무’를 스물여섯 달 내내 해본 적이 있는가? ‘경계근무’란 ‘완전무장’을 한 채 꼼짝않고 소리도 안 내면서 가만히 서서 북녘 철조망과 초소를 노려보며 보내는 짓이다.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똑같다. ‘물골작업·제설작업·도로보수’를 끝없이 오로지 삽 한 자루를 들고서 한다. 소대마다 적어도 1km쯤 삽 한 자루로 맡아야 하는데,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갈 물골을 내러, 눈이 오면 눈을 쓸러, 적어도 1km 길을 오직 삽 한 자루만 들고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내내 길에서 보내어 본 적이 있을까.


  국방부장관 같은 자리라면 ‘육군 보병 소총수’로 철조망을 앞에 끼고서 보낸 구슬픈 사람한테 맡길 노릇이라고 본다. ‘디엠지 특수부대원’도 힘들겠지. 그러나 ‘디엠지 특수부대원’은 ‘수색로 정찰’을 하는 몫일 뿐, 그들이 펑(지뢰)을 묻거나 거두지 않는다. 가시울(철조망)을 세우고 고치는 몫이라든지, ‘사주정리(수색·정찰·경계를 할 적에 걸리적거리는 풀과 나무를 쳐내려고 고엽제를 뿌리거나 정글칼로 제초작업을 하는 일)’는 오롯이 육군 보병 소총수가 한다. ‘디엠지 특수부대’에 먹을거리나 살림살이를 갖다 주는 몫도 육군 보병 소총수가 다 해준다. 물골내기와 눈치우기도 육군 보병 소총수가 다 해준다. 육군 보병 소총수는 ‘도솔산’을 지키지만 ‘해병대’는 도솔산 귀퉁이에도 없다.


  나는 ‘도솔산 중대’와 ‘도솔산 선점’에서 꽤 오래 지냈는데, 도솔산이라는 곳은 “한 해 가운데 이레만 해가 나는” 미친 멧골짝이었다. 빨래가 마르지 않는 채 한 해를 보내야 하고, 언제나 곰팡이를 먹어야 하고, 한여름에도 밤에는 ‘- ℃’로 뚝 떨어지고, 한겨울에는 ‘- 54 ℃’까지 떨어지는, 그런 곳이 우리나라 어느 켠에 있다. 군대체험이란 뭘까? 두 시간을 넘어 서너 시간쯤 경계근무를 설라 치면, 꼼짝않고 한곳에 서서 북녘을 노려보기만 해야 하다 보면 쉬가 마렵게 마련인데, 한겨울에 쉬를 누면 오줌발이 바닥에 떨어지기 앞서 얼어붙는다. 겨울에 쉬를 누면 ‘언 오줌’이 바닥에 떨어진다. 이런 곳이 이 나라에 있고, 이런 곳에 가난하고 힘없고 돈없고 이름없는 젊은사내가 마냥 끌려가서 젊은날 죽도록 얻어맞고 추레질(동성 성폭력)에 시달리고 겨우 살아남아서 바깥(사회)으로 돌아온다.


  새벽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새벽에 하는 일이다. 체험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그저 겉훑기일 뿐이다. 살아가는 사람을 알고 싶다면, 삶터를 옮겨서 이웃으로 여러 해 지내면 된다. 삶터를 옮길 마음이 없이 어쩌다가 하루이틀쯤 조금 맛보기를 했대서 섣불리 ‘체험’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까? 한자말 ‘체험’은 ‘맛보기’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기’일 텐데, 조금 굴러 보았대서 ‘얼마나 느끼거나 알’는지 그야말로 아리송하다. 2026.1.10.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둘쨋것이 무슨 사진인지 모를 사람도 있을 텐데

농약 뿌리는 무인헬리콥터가 마구 날아다니며

뿌리던 모습이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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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1.9.

숨은책 1115


《月刊 中央 155호》

 양태조·이종기 엮음

 중앙일보사

 1988.12.1.



  전두환을 끌어내리고서 맞은 1988년에 온나라가 꽤 바뀌는 듯했습니다. 17시만 되면 온마을에 ‘뚜!’ 하고 울리며 누구나 길에서 멈춘 뒤에 ‘가까운 한나래(태극기)’를 바라보며 왼가슴에 오른손을 올려야 하던 바보짓이 사라집니다. 우두머리(대통령)가 길거리를 지나간다고 할 적에 모든 어린이·푸름이가 길가에 서서 한나절을 기다리고서 작은 한나래를 펄럭이던 짓도 사라집니다. ‘새마을청소’를 이제는 더 안 해도 됩니다. 다만 전두환 씨는 사슬터에서 안 죽고 용케 나왔고, 목숨을 마치는 날까지 술에 절어서 얼뜨기로 뒹굴다가 떠납니다. 《月刊 中央 155호》는 ㅈㅈㄷ이 하루아침에 얼마나 옷갈이를 할 수 있는지 놀랍게 보여주는 얼거리입니다. 이때까지 ‘빨갱이’ 소리를 듣던 ‘이철수·반쪽이’ 같은 사람한테서 그림을 받아서 실을 뿐 아니라, “백기완의 첫 미국기행” 같은 꼭지를 큼직하게 실어요. 게다가 “전두환 영구집권의 꿈”처럼, 뒤늦게 전두환 씨를 나무라는 꼭지가 수두룩합니다. 살아남으려고 눈치를 보았을 테고, 살아남은 뒤에 보이는 민낯은 언제나 창피합니다. 그런데 큰 펴냄터는 이런 달책에 알림글을 노상 실었습니다. ㅈㅈㄷ만 탓하기에는 우리 몸짓과 말씨와 모습부터 바로세울 일이지 싶습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2026년 1월 9일에 '내란 재판'을 한다는데

'사형 선고'가 나오지 않는다면

놀랄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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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1.9.

숨은책 1114


《論註 月印千江之曲 上》

 박병채 글

 정음사

 1974.3.10.



  열일곱 살을 앞둔 1990년에 뭇언니가 살살 놀립니다. “이제 고등학교에 가면 중학교하고는 견줄 수 없이 힘들걸?” 이모저모 보면, 우리는 어린이·푸름이·젊은이로 잇는 ‘즐거울 배움길’을 그만 ‘지치고 괴로운 죽음길’로 몰아넣습니다. 이제는 이 불늪 같은 죽음길이 살짝 누그러졌다지만 ‘누그러진 불늪’일 뿐 외려 담벼락이 더 높다고 할 만합니다. 뭇언니가 왜 ‘고전문법’을 ‘고문’이라 줄여서 말했는지 알아채면서 ‘고전문학’을 배우는데 《월인천강지곡》 몇 대목을 가르치는 길잡이도 스스로 버거워 노상 땀을 뺐습니다. 우리 이야기도 아닌 중국 이야기를 왜 배워야 할까요? 1400년이나 1500년에 우리 옛사람이 어떻게 살아오고 살림했는가 같은 이야기는 없이, 그저 중국섬김질(중국사대주의)로 가득한 글을 ‘우리옛글’이라 해도 될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러나 불늪을 치르려면 배움책에 나오는 한두 꼭지로는 모자랍니다. 따로 《論註 月印千江之曲》 같은 책을 헌책집에서 찾아내어 머리를 쥐어짜며 혼자 읽고 새겼습니다. 이 헌책을 예전에 읽은 분도 틀림없이 머리에 쥐가 났을 만합니다. 삶글도 살림글도 사랑글도 숲글도 아닌, ‘훈민정음’으로 옮겼을 뿐인 먼먼 임금과 얽힌 토막글은 누구한테 이바지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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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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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1.8.

숨은책 1113


《공장새마을운동, 이론과 실제》

 이동우·신용백·김정길 엮음

 새마을운동중앙본부·공장새무을운동추진본부

 1983.12.20.



  후려친 일삯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던 1970∼80해무렵입니다. 이때에 온나라 여러 만듦터(공장)에서 들불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비로소 일두레(노동조합)가 섭니다. 여러모로 보면 ‘후려친 일삯’에다가 ‘쉴틈이 아예 없이 하루 16∼18시간을 돌리는 굴레’를 바꾸면 되는데, 지난날 일터지기(공장장)나 나라지기는 이 대목을 안 쳐다보았어요. 그저 후려치고 내려치고 깎아치며 옭아매려 했습니다. 이러면서 벌인 여러 짓 가운데 하나가 ‘공장새마을운동’입니다. ‘공장새마을연구총서 1’로 나온 《공장새마을운동, 이론과 실제》는 일순이·일돌이(공장 노동자)가 일두레로 가지 말고 ‘공장새마을운동’으로 넘어와서 ‘떡고물’을 얻어먹으라고 부추기던 속셈을 보여줍니다. 일삯을 제대로 치르기보다 몇몇 허수아비한테 목돈과 나라밖마실(해외연수)을 보내주면서 갈라치기를 꾀한달까요. 우리나라는 안 가난합니다. 서울·큰고장에서 일순이·일돌이로 살든, 시골에서 논밭지기로 살든, 제몫을 넉넉히 누릴 수 있습니다. 나라지기를 비롯해서 고을지기와 벼슬아치가 사이에서 뒷돈을 빼돌리느라 일꾼이 제몫을 못 누릴 뿐이에요. 이제는 눈가림짓을 걷어낸 나라일까요. 앞으로 눈속임짓을 더는 안 하는 터전으로 설 수 있는가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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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가볍게



  사흘 만에 저잣마실을 나온다. 싱싱칸(냉장고) 없이 스무 해 남짓 살던 무렵에는 날마다 저잣마실을 했다. 집에 싱싱칸을 두더라도 두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에는 거의 날마다 저잣마실을 했다. 나를 빼더라도 세 사람이 누릴 밥살림이라면 그야말로 끝없이 장만하고 차리고 치우고 살펴야 한다. 오늘은 혼자 읍내로 가자니 두 아이는 “가볍게 지고 오셔요.” 하고 얘기한다.


  나래터에 들러서 글월을 두 자락 보내고서 가게에 간다. 등짐에 이모저모 챙겨서 담는다. 천천히 걸으며 책을 읽다가, 다리를 쉴 잎물집에 간다. 할배 한 분이 그림(유튜브)을 큰소리로 본다. 목을 가다듬고 이맛살을 부드러이 푼다. “할아버지, 밖에서는 귀에 꽂고서 듣거나, 소리를 줄이셔야지요.” 할배는 아마 다른 거의 모든 시골내기처럼 시골집에 혼자일 듯싶다. 또래나 동무나 동생도 거의 흙으로 떠났으리라 느낀다. 이 할배를 고흥읍에서 스친 지 벌써 열일곱 해이니 그새 얼마나 많이 떠났을까.


  시골할배는 글붓집(다이소)에서 고작 5000원이면 좋은 귓소리(이어폰)를 파는지 모를 수 있다. 이제는 면사무소나 읍사무소에서 어르신한테 하나씩 사주어야겠다고 느낀다. 어린이와 푸름이도 배움터에서 귓소리를 하나씩 사주기도 해야겠고. 숱한 할매할배에 어린이에 푸름이가 길이며 열린터(공공장소)이며 버스이며, 소리를 마구 키워서 듣거나 쳐다보거나 놀기 일쑤이다. 서울·큰고장에서는 이런 얼뜨기가 퍽 줄었지만, 서울·큰고장에도 아직 많고, 시골에는 철철 흘러넘친다.


  우리는 열 살이나 열다섯 살뿐 아니라, 스물다섯과 서른다섯과 마흔다섯과 쉰다섯과 예순다섯과 일흔다섯과 여든다섯도, 또한 온다섯 살도 새배움(재교육)을 즐겁고 푸르고 가볍고 사랑스레 펼 수 있어야지 싶다. 사이(세대차)는 마땅히 있을 수밖에 없다. 다 다른 나이가 함께 모여서 도란도란 읽고 쓸 수 있기를 빈다. 다 다른 순이돌이가 한자리에 모여서 오순도순 책을 읽고서 글을 쓰는 살림길을 열어야지 싶다. 다 다른 갈래에 선 사람들이 나란히 모여서 곰곰이 이야기하고 차분히 뜻을 나누고 새롭게 길을 열 노릇이라고 본다.


  서로 스스럼없이 만나고 말을 섞을 적에 집과 마을부터 살아난다. 목소리(주의주장)가 아닌,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길을 그리기에 즐겁다. 목소리만 내면서 안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곱씹어야 한다. ‘우리쪽(아군)’이 아니라면 아예 얼씬조차 않을 뿐 아니라, ‘한목소리(통제·강요)’만 있어야 한다고 여기느라 온나라가 갈가리 찢기고 싸우고 다투면서 삿대질이 춤춘다.


  오직 사랑으로 만나는 순이돌이여야, 순이하고 돌이는 엄마랑 아빠란 이름을 새로 받으면서, 나란히 ‘어버이(어머니 + 아버지)’라는 새빛으로 일어서서 아기를 품는다. 사랑이 아닐 적에는 아기를 못 품고, ‘낳지’ 않는 마음이라서 ‘어른’이 아닌 ‘어른흉내’이다. 혼살림(비혼)이라면 이웃아이를 ‘낳은아이’로 바라보고 마주할 수 있을 적에 어른이다. 아이곁에 설 줄 모른다면, 이웃아이를 ‘우리집 아이’로 헤아릴 줄 모른다면, ‘엄마아빠(어버이)’란 자리에 있어도 철없기만 하다.


  철들기에 사람이다. 철들지 않으면 ‘아직 사람이 아니’다. ‘아직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적에는 ‘날개돋이’를 못 한 채 밥그릇에 붙들린다는 뜻이다. 밥그릇을 놓을 줄 알아야, 내 밥그릇을 너한테 가만히 내밀면서 빙그레 웃음지을 줄 알아야, 비로소 철든 몸으로 일어서고, ‘철든 몸으로 일어서는 사람’한테만 ‘어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른으로 선 둘(순이돌이)이 만나서 아기를 품으면, 이때에 둘은 새롭게 ‘어버이’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갈수록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철없는 늙은이’만 늘어난다.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에 나오는 ‘럼피우스 할머니’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고, 짝을 맺은 바도 없지만, 마을 아이들이 모두 ‘할머니(한어미)’라고 부른다. ‘할머니·할아버지’라는 오랜 우리말은 ‘하늘엄마·하늘아빠’란 뜻인 줄 잊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다. 왜 영어에서도 ‘grand’를 붙여서 할매할배를 부르는지 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낳든 안 낳든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라야 “눈뜨고 깨달아 철든 사람”인 ‘어른’이다. 가볍게 함께 즐겁게 하늘을 날 수 있기를 빈다. 2026.1.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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