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7.

숨은책읽기 67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글

 백범사상연구소

 1978.4.20.



  나이가 어리다고 젊은이가 아니요, 나이가 많다고 늙은이가 아닌 줄 시나브로 배웁니다. 어릴적부터 이 대목은 늘 느꼈어요. 둘레에 어른다운 어른이 드물었던 터라, 어릴적 제 꿈 가운데 하나는 “나이만 먹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를 먹는 사람이 되자”였어요. “슬기롭게 자라서 이 땅을 디디는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여겼어요. 문익환이라는 이름을 곧잘 들었지만 누구인지 모르다가, 1993년부터 이분 책을 찬찬히 찾아서 읽는데, 어느 날 헌책집에서 《꿈을 비는 마음》이란 매우 얇은 꾸러미를 만났어요. 이 손바닥책에 〈전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날〉이라는 노래가 있더군요. “감방쪽으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 말없이 지켜보던 개나리 꽃봉오리들 / 활짝 피며 흩날릴 그 금싸라기들은 / 영영 볼 길이야 없겠지만―”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차가운 사슬터에서 봄을 그리는 노래를 썼다니, 더욱이 이런 글을 서슬퍼런 박정희 굴레 한복판에 썼다니, 그즈음 다른 글바치는 무엇을 했을까 궁금하더군요. 따뜻한 집에서 붓을 휘두르면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쥔 숱한 이들은 어떤 글을 펼쳤을까요? 꿈을 비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너무 많고, 꿈을 빌지 않는 채 쓰는 글이 너무 넘실거리는 이 나라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덧.

94쪽에 ‘고은’이라는 분이 “시집이 나오는 날 나는 내 몇백억원을 다 가지고 나가서 그를 위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얼싸안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하고 적습니다. 사슬터에 갇힌 사람을 걱정한다는 말이 ‘술자리’라니, 참으로 술망나니인 고은답습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7.

숨은책 1044


《韓國動亂과 맥아더元帥》

 ? 글

 하혁 옮김

 범국민양서보급회

 1968.11.15.



  인천에서 나고자란 어린이 가운데 몇이나 ‘맥아더’가 좋다고 여기면서 자랐을까 궁금합니다. 저는 맥아더를 좋아한 또래를 한둘 빼고는 아예 못 보면서 자랐습니다. 인천에 있는 골목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손바닥만 한 ‘자유공원’이라는 데가 있는데, 인천에서 배움터를 다닌 분이라면 으레 이곳으로 봄나들이나 가을나들이를 가야 했습니다. 지긋지긋했어요. 한 군데 배움터만 자유공원으로 봄가을 나들이를 가지 않거든요. 초·중·고가 나란히 이곳으로 우글우글 몰리는데, 여러 배움터 사람들이 북새통으로 뒤덮이면서 앉지도 서지도 쉬지도 못 하는 채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맥아더 동상 앞 기념사진”까지 찍어야 겨우 하루를 마치고서, 집까지 먼먼 길을 다시 걸어가야 했습니다. 《韓國動亂과 맥아더元帥》는 누가 언제 낸 어느 책을 훔쳐서 낸 판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일본책을 훔쳤지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빈자리마다 노랫말을 잔뜩 적으셨군요.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뿐 아니라, 수첩처럼 삼은 셈인데, ‘인천상륙작전’을 한답시고 월미도를 비롯해 인천 골목마을을 아주 잿더미로 짓밟은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중에 다 드러난 일입니다만, ‘미국 군인이 보기에 놈(적군)과 우리켠(아군)이 똑같이 생겼기에 그냥 다 밀어버리고(죽이고)서 들이치려’ 했다지요. ‘전쟁영웅’이라는 이름이란 하나같이 “사람을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아주 많이 죽인 놈”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6.

숨은책 1042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민초희 글월

 김창완·이장수 글

 길석 사진

 야정문화사

 1990.12.20.첫/1991.12.20.5벌



  ‘13평’이라지만 아무래도 10평이 안 되었지 싶은 집에서 어린날을 보냈습니다. 언니하고 한 칸을 함께 쓰는데, 언니는 늘 소리(라디오)를 들었어요. 저는 소리를 들을 마음이 없어도 언니가 듣는 소리를 내내 들어야 했습니다. 언니가 듣는 소리에 어느 날 ‘민초희’ 이야기가 나왔고, 오래 살지 못 하고서 너머길로 갔다는 이야기가 흘렀습니다. 이윽고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이 나왔으며, 언니 심부름으로 이 책을 사왔습니다. 언니는 푸른배움터를 마치고서 울산으로 일하러 떠났고, 1992년에는 이 책을 바탕으로 보임꽃(영화)이 나오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던 민초희 님은 다른 또래처럼 배움터를 다니면서 스무 살을 맞이하는 꿈을 그렸다면, 그냥그냥 배움터를 다니던 저나 또래는 “이놈 학교에서 날마다 두들겨맞다가 스무 살을 못 보고서 골로 가지 않나?” 하고 여겼습니다. 더욱이 사내들은 큰배움터에 못 붙으면 곧장 싸움터(군대)로 끌려갑니다. 2025년이 아닌 1994년 싸움터는 그저 주먹질과 발길질로 애꿎은 젊은이가 죽어나가던 데였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끝없이 얻어맞는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는지 까마득했기에 ‘스물’은 너무 멀어 보였습니다. 오늘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스물은 어떤 나이일까요? 새롭게 피어나는 꿈을 사랑으로 그릴 만한 첫자락일 수 있을까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내 책이 아닌 언니 심부름으로 산 책이라

나한테는 이 책이 없기에

헌책집을 다니던 어느 날

문득 만나서

나도 우리 책숲에 건사하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6.

숨은책 1041


《科學哲學序說》

 김태섭 글

 정음사

 1963.9.10.



  일본에서 ‘철학’을 배우고서 미국에서 종이(학위)를 딴 다음,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분이 1963년에 내놓은 《科學哲學序說》을 읽으면 토씨만 한글입니다. 한글로 붙인 토씨를 가타가나로 바꾸면 일본책이 될 만합니다. 일본사슬에서 풀린 지 거의 스무 해가 된 무렵에도 우리말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우리글로 생각을 밝히는 길을 좀처럼 못 연 자취입니다. 이 책을 처음 장만해서 읽은 분은 1976년에 연세대학교 불문과 4년을 다닌 듯합니다. 책에는 다른 종이(영수증)가 둘 깃들었어요. “등록금 162,820원”하고 “앨범대 4000원”이 적히는데, 하나하나 보면 “수업료 105300원, 기성회비 45000원, 실습비 400원, 자율적경비 5880원, 학도호국단비 2140원, 졸업비 3850원”이라고 합니다. 배움삯(수업료) 못잖게 ‘기성회비’가 매우 높고, 뜬금없어 보이는 ‘자율적경비’에 ‘학도호국단비’가 있고, ‘졸업비’까지 받아내는군요. 큰배움터라기보다는 크게 쥐어뜯는 곳 같습니다. 이렇게 쥐어뜯는 얼거리이니, 가난한 사람은 얼씬조차 못 할 만한 틀이요, 다른 종이(졸업장)를 거머쥐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이는 길로 달려야 하는 굴레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배우고 가르치는 마당으로 거듭났을까요, 아니면 그대로일까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6.

숨은책 1040


《人間文化財》

 예용해 글

 어문각

 1963.9.25.첫/1969.3.1.재판



  이제는 조금쯤 “사람이 꽃이다” 같은 말을 곱씹는 분이 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사람이 돈이다” 같은 굴레에서 맴돕니다. 지난날 임금과 벼슬아치는 “사람이 종이다”처럼 굴었습니다. ‘백성(百姓)’과 ‘국민(國民)’이라는 한자 이름에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종(노예)으로 부리려는 노림길이 짙게 도사립니다. 이처럼 나라가 ‘나라사람’을 사람으로 안 여기면서 한창 휘어잡던 때에 예용해 님은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는 이름을 짓고서 〈한국일보〉에 이 이야기를 꾸준히 실었고, 1963년에 《人間文化財》라는 두툼하고 묵직한 꾸러미를 선보입니다. 나라에서 팽개치고 마을에서 따돌리던 일꾼을 눈여겨본 첫걸음이에요. 다만, ‘人間文化財’는 일본에서 쓰는 ‘人間國寶’라는 이름을 살짝 따온 말입니다. 우리말로 이름을 붙이면 낮잡던 물결 그대로 ‘사람꽃·사람빛’ 같은 이름을 못 쓰면서 ‘人間 + 文化財’라는 틀에서 맴돌았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고 마주하는 마음을 세울 적에 살림길을 살찌우고 북돋우는 사랑을 펼 만합니다. 사람꽃이란 살림꽃이면서 사랑꽃입니다. 사람빛이란 살림빛이면서 사랑빛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꽃이요 빛이듯, 우리 곁에서 돌보고 품고 헤아릴 말씨 하나를 그립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