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먹는꽃



  해마다 한봄이면 우리집 동박꽃이 흐드러진다. 웬만한 곳보다 한참 늦게 봉오리를 내는 우리집이다. 우리집은 첫봄 끝인 이제서야 매꽃이 흐드러진다. 아마 다른 곳은 이미 매꽃이 지고서 벚꽃이 피려 하겠지. 사람이 다 다르고, 마을과 들숲메바다가 다 다르듯 나무하고 풀꽃도 다 다르다. 우리집 매나무를 올려다보면 꽂송이가 자그만치 골(10000)쯤 이른다. 매나무 곁에 서면 온몸이 꽃내음으로 감긴다.


  우리집 작은아이가 우리집 동박꽃송이를 한 달 남짓 볕말림을 해서 ‘말린동박꽃’을 마련한다. 지난해에 마련한 ‘말린동박꽃’을 올봄까지 이어온다. 물을 펄펄 끓여서 꽃송이를 둘 놓으면 향긋하면서 보드라이 퍼지는 꽃물을 누린다. 마당 한켠이 붉게 물들 만큼 잔뜩 떨어지는 동박꽃은 그대로 봄나물로 삼을 수 있고, 볕말림을 해서 이웃하고 넉넉히 나눌 수 있다. 봄나물로 삼는 동박꽃이라면, 천천히 잎을 하나씩 떼며 머금으면 꼭 동박새나 박새나 딱새나 직박구리나 까마귀가 된 듯 가볍고 즐겁다. 부산마실을 하며 동박꽃송이를 여럿 주워서 천천히 곁밥으로 삼는다. 꽃송이 하나로 배부르다. 꽃은 늘 그대로 누구나 북돋운다.


  하루하루 글을 새로 쓰고 책을 새로 쓴다. 누구나 샘물마냥 자아올릴 만한 살림살이에 글꽃에 이야기라고 느낀다. 우리는 누구나 먼먼 옛날부터 얘기꾼에 수다꾼에 노래꾼으로 어울려 살았다. 그저 오늘 우리가 스스로 잊을 뿐이다. 살림하는 동안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에 저마다 이야기를 짓는다. 서로서로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기에 스스로 새말을 짓고 새마음으로 피어난다. 지난날 사람은 “살림하면서 살림말을 손수짓기로 펴면서 사투리를 지폈다”면, 오늘날 사람은 “살림이 아닌 삶 한 가지만 거의 서울 한켠에서 쳇바퀴로 보내면서 지는 응어리를 그대로 옮기는 글”이게 마련이라서 “사투리도 아니고 서울말도 아닌, ‘문학용어’와 ‘전문용어’라는 이름은 일본말씨”에 갇히지 싶다.


  여러 이웃님을 만나서 말을 섞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든다. 씻고서 등허리를 편다. 발바닥을 주무른다. 오늘 장만한 책은 이튿날 새벽과 아침과 낮에 읽어야지. 눈을 감고서 곱씹는다. 나는 어제 쓰고 읽은 글을 되새기고서 오늘 새록새록 쓰고 읽는다. 오늘 쓰고 읽는 글을 곱씹으면서 앞으로 쓰고 읽을 글을 어림한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새로 마주하는 너랑 나 사이를 이으면서 말꽃을 피운다. 철마다 풀꽃과 나무꽃이 다르듯 날마다 글빛과 글결이 다르다.


  먼마실에 마실 물을 고흥 시골집에서 길어다가 들고 다닌다. 두 아이를 돌보고 챙길 적에는 물병을 넷씩 짊어졌고, 이제는 하나만 챙겨서 다닌다. 두 아이가 스스로 물병을 챙기기에 등짐이 갈수록 가붓하다. 같이 걸으며 드문드문 말을 섞는다. 둘러앉아서 끝없이 조잘조잘한다. 혼자 먼마실을 나와서 바깥일을 할 적에는 시골집에서 신나게 놀면서 살림을 맡는 모습을 마음으로 그린다. 붐비고 북적이는 큰고장에서 스치는 바람이 들숲메바다를 품은 시골에서 춤추는 바람과 어떻게 다른지 헤아려 본다. 밤이 되어도 별은 한 톨도 볼 수 없는 큰고장에서 눈이 따갑도록 넘치는 불빛을 바라본다. 불빛이 늘기에 별빛을 잃고 잊는다. 별빛을 잃고 잊으니 글빛과 말빛을 나란히 잃고 잊는 듯하다.


  첫봄이 기울어 한봄으로 간다. 2026.3.19.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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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주식투자 안 합니다



  나는 지난 쉰 해 남짓 살면서 그루놀이(주식투자)를 안 했다. 이다음 쉰 해 남짓을 걸어가는 길에도 그루놀이는 할 마음이 없다. 나는 책놀이를 한다. 다만 ‘독서투자’는 안 한다. 그저 사읽고, 그저 쓰고 짓고, 그저 삶과 살림을 노래하는 작은이로 서는 하루를 맞이한다. 언제나 사읽고, 언제나 쓰고 나누고, 언제나 숲들메와 해바람비를 그리는 작은어른으로 눈뜨는 오늘을 헤아린다.


  책놀이를 하기에 책노래를 부른다. 책놀이를 즐기는 책벌레라서 책살림을 가꾼다. 책놀이를 함께하고 싶으니 책동무를 사귄다. 책놀이라는 씨앗을 심으려는 길이기에, 책동무한테 다가가서 고즈넉이 책이야기를 들려주고서 듣는다. 책놀이로 하루를 살아가기에 책읽기와 책쓰기를 가만가만 품는다. 책노래를 즐기려는 마음이기에 책씨를 심고서 책꽃을 피우는 길을 걸으려고 한다.


  나는 수레놀이(자가운전)를 안 한다. 걷는다. 늘 걷는다. 책짐을 질끈 어깨에 메고서 뚜벅뚜벅 걷는다. 걷다가 이따금 버스를 탄다. 걸으면서 쓰고 읽는다. 모처럼 버스를 타면 짐을 다 내려놓고서 살짝 눈감는다. 이윽고 눈을 뜨고서 새롭게 읽고 쓴다.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다. 글을 읽으며 글을 쓰고, 바람을 읽으며 바람을 쓴다. 책을 읽으며 책을 쓰고, 별과 해와 비를 읽으면서 별과 해와 비를 쓴다. 곁님하고 보금자리를 돌보면서 보금숲 이야기를 읽고 쓴다. 두 아이랑 보금자리를 가꾸면서 보금살림 이야기를 읽고 쓴다.


  책벌레는 글벌레이기도 하다. 글벌레는 풀잎과 꽃잎과 나뭇잎이 흐드러진 들숲메를 보금자리로 삼는다. 책벌레는 차근차근 잎내음을 맡고서 잎물을 고이 받아들인다. 푸른책을 눈여겨보고 푸른글을 쓰려고 마음을 쓴다. 이제 오늘부터 모든 나날을 푸른날로 삼아서 푸른집을 짓고 가꾼다. 짙푸르기에 책벌레에 글벌레이다. 풀벌레가 짙푸른 잎사귀를 갉으면서 ‘풀밥(채식·비건)’이듯, 책벌레에 글벌레는 ‘푸른밥’을 누리고 푸른살림을 지으며 푸른노래를 부르니, 푸른꽃이 피고 지면서 푸른씨를 맺고, 푸른바람을 일으킨다.


  나는 볕바람을 후끈후끈 누린다. 나는 찬바람을 꽁꽁꽁 즐긴다. 살갗이 타면 까무잡잡하게 여름을 노래한다. 살갗이 트면 끙끙 앓고서 슬며시 일어난다. 여름에는 여름비가 씻는 하늘을 바라본다. 겨울에는 겨울비가 깨우는 들꽃을 돌아본다. 봄에는 봄비가 다독이는 흙빛을 쓰다듬는다. 가을에는 가을비가 달래는 씨앗을 손바닥에 얹는다. 철마다 다르게 흐르는 빛줄기를 헤아린다. 철철이 새롭게 드리우는 빛살을 품는다.


  같이 걸을까? 함께 볕바라기랑 해바라기랑 비바라기로 놀까? 나란히 별빛을 나누는 오늘을 그릴까? 나는 신나게 놀고서 집으로 돌아가. 너는 신바람으로 달리고서 집으로 뛰어가.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하루를 사랑하지. 우리는 모두 벌레야. 잎갉이를 하는 애벌레가 긴긴 허물벗기를 잇다가 마침내 스스로 실을 뽑아서 고치를 틀면 새근새근 잠든 다음에 날개돋이를 하듯, 책벌레에 글벌레인 너랑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하는 하루로 살아내다가 폭 잠들면 어느 날 시나브로 나래돋이를 하면서 눈뜨지.


  구름이 짙어도 해는 너머에 있어. 별이 돋아도 해는 너머에서 비춰. 구름이 걷히니 한결 눈부신 낮이야. 비가 개고 나면 별자리가 가득가득 넘실거려. 넌 어디에서 무엇을 하니? 난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려. 넌 오늘 무엇을 하니? 아직도 그루놀이(주식투자)를 하니? 겉치레 같은 책치레(독서투자)를 하니? 이제부터는 살림노래와 책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기를 바라. 오늘부터는 풀노래와 들노래를 같이 부르기를 바라. 앞으로는 별빛노래와 씨앗노래를 사랑하며 나란히 자라나기를 바라. 2026.2.28.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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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3.16.

숨은책 1138


《동방교양문선》

 김종권 엮음

 한국자유교육협회

 1969.4.20.첫/1974.11.20.재판



  ‘교련(敎鍊)’은 나쁜 한자말이 아닙니다. 아니, 나쁜말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푸름이를 오지게 들볶고 길들이고 두들겨패면서 모두 옭아매는 노릇이었습니다. 말뜻은 “가르치고 갈닦다”인 ‘교련’일 테지만 ‘작은 군사훈련’이자 ‘일제강점기 제식훈련’일 뿐이었습니다. ‘교양(敎養)’도 나쁜 한자말일 수 없습니다. 말뜻으로는 “가르치고 기르다”요, 삶과 살림을 손수 기르고 북돋우는 길을 가르친다는 얼개입니다. 그런데 “표준말 : 교양 있는 사람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 여기듯, “교양 : 대학교 넘게 서울에서 배운 사람이 아는 바”라는 굴레로 오래오래 흘렀습니다. 《동방교양문선》을 이따금 헌책집에서 봅니다. 노태우가 우두머리를 맡을 즈음까지 온나라 어린배움터·푸름배움터에서 ‘웅변·독후감 교재’로 삼던 ‘교양도서’입니다. ‘한국자유교육협회’란 데에서 엮었다는 꽤 긴 꾸러미인데, 박정희가 펴는 사슬나라를 추켜세우면서 ‘애국·충성·효도·봉사’ 네 가지만 쳐다보라고 윽박지르는 줄거리입니다. 얼핏 ‘좋은말’만 가득하지만, 달달 외워서 외치거나 다달이 느낌글을 내야 하는 아이로서는 그저 끔찍한 회초리였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교양’을 내세워야 할까요? 이제 ‘교양·문화·예절’이 아닌 ‘살림’을 볼 때일 텐데요.


- 벗이여, 당신은 국민교육헌장을 알고 있을 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 것입니다. 이 현장에 나는 세가지 중요한 사상을 보았읍니다. 첫째 민족주체성의 확립이요, 둘째 전통의 계승과 창조의 정신이요, 세째 애국애족을 통한 민족중흥의 사명감입니다. (19쪽)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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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3.16.

숨은책 1137


《해외펜팔》

 메아리펜팔협회·김종곤 엮음

 청자각

 1972.8.10.첫/1976.3.10.7벌



  1988해에 열네 살을 맞이며 푸른배움터로 들어가자니, 단골로 드나들던 나래집(우표상) 아재가 “이제 영어를 배울 테니 ‘펜팔’을 해보지?” 하고 얘기합니다. ‘펜팔’이 무어냐고 여쭈니 먼나라 또래하고 글월을 주고받는 일이라고, 영어로 글월을 쓰면 영어도 저절로 는다고 덧붙입니다. 이러면서 《해외펜팔》이라는 책을 보여주었고, 꽤 비싼값이지만 장만했습니다. 그무렵 이 책 한 자락이 한 달 살림돈(용돈)이었거든요. 아직 우리말로 글을 쓰는 길을 들인 바 없는데 영어로 글월을 쓰자니 지끈지끈했지만, 덴마크에서 날아오는 놀라운 글월은 놀라웠습니다. 덴마크에서는 이미 어릴적에 영어를 배울 뿐 아니라 열네 살이면 다른 이웃말을 배우고, 적잖은 아이는 서너 가지 이웃말을 배운다니 “우리나라는 안 되겠구나!” 싶어 주눅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06∼22시를 배움터에 갇히듯 보냈고, 이런 하루(일일수업표)를 어찌저찌 영어로 옮겨서 보냈더니 “그럼 언제 놀아? 그럼 뭘 할 수 있어?” 하고 묻더군요. 배움터(학교·학원)에 오래 붙들어맨들 말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지 않고, 삶을 읽거나 살림을 익히지 않습니다. 이웃을 만나고 먼곳 동무를 사귀며 눈을 틔우지 않을 적에는 그만 심부름꾼이나 허수아비가 된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몰랐는데 《해외펜팔》은 일본책을 통째로 베끼면서 몇 가지만 우리 글·그림로 바꿨더군요. ㅍㄹㄴ


- 釜山 靑○書林 西面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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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할 수 있는



  낮에 부엌에서 곁님과 큰아이랑 낮밥을 먹는데, 내 오른눈 옆에 피가 묻었다고 들려준다. 아마 그제 뒤꼍에서 후박나무 두 그루를 베다가 한 그루에 살짝 깔리듯 찧으며 멍들었으리라. 옆집에서 집을 다시 세운다며 우리 뒤꼍과 맞닿은 빈터를 샀다는데, 예전에 울타리(경계) 구실을 하던 나무를 치워야 했다. 고욤나무와 개오동나무를 살리려고 후박나무를 두 그루 베었다. 옆집에서는 기계톱으로 하겠다고 했으나 두 아이랑 손수 톱질을 하기로 했다. 한 그루는 옆으로 누였고, 다른 한 그루는 머리 쪽으로 받았다. 처음에는 받을 만하리라 여겼다. 바로옆은 벼랑이라서 우리 땅으로 떨구며 고욤과 개오동과 유자를 살리려면 내가 선 쪽으로 베어야 했다.


  나무줄기는 내 장딴지만 한데 오지게 무겁더라. 나무무게에 쿵 찧었으니 멍들 만하다. 곁님은 “나무는 물을 품으니 무겁지.” 하고 한말씀을 보탠다. 그래, 사람도 몸무게는 물무게이다. 더구나 나무는 사람과 달리 줄기를 죽죽 올리면서 가지를 좍좍 뻗고 꽃에 잎에 열매를 주렁주렁 달아야 하니 ‘물’을 옴팡지게 눌러담듯 모은다. 뒤꼍 유자나무를 가릴 만큼 자란 후박나무 한 그루를 지난달에 베어서 마당 한켠에 놓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 잎빛이 푸르다. 속으로 물을 얼마나 품었기에 이렇게 오래도록 안 마르나 하고 헤아려 본다. 그러고 보면, “집을 지을 나무”로 삼으려면 ‘물기운’을 빼려고 여러 해 말린다. 나무는 몇 해가 지나도 “속에 품은 물”을 다 내놓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한다. 이미 ‘무게’라는 낱말은 ‘물’이라는 밑말을 품는다. 우리는 몸에 물을 담고서 살아간다. 모든 ‘몸’은 ‘물’이다. 뼈도 물기운을 다 빼면 “무게가 없어서 가루로 바스라진”다. 아직 물을 듬뿍 품은 뼈는 무척 무겁다. 물기운이 빠져나가야 무게가 사그라들면서 가볍다.


  ‘물’과 ‘말’은 같은 낱말이다. 물이 숨결을 품는다면, 말은 삶결을 품는다. 말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삶을 배우는 셈이다. 말을 익힐 적에는 살림으로 무르익는다는 얼거리이다. 그래서 “책읽기 = 말읽기(말로 담은 삶을 읽기”라는 얼개이다. 우리가 늘 쓰는 수수하고 쉬운 말을 얼마나 헤아리느냐에 따라서 ‘삶눈(삶을 읽는 눈길)’이 확 다르다. 수수하고 쉬운 우리말을 안 쓸 적에는 삶을 모르는 채 겉핥기라는 뜻이다. 수수하고 쉬운 말은 안 배우며 책읽기를 하면 겉훑기로 그친다. 수수하고 쉬운 우리말을 쓰기에 삶을 알아가면서 무르익는다. 수수하고 쉬운 우리말을 배우고 익히는 누구나 ‘삶눈’에 이어 ‘살림눈’을 뜨고 ‘사랑눈’으로 깨어난다.


  모든 아이는 책을 안 읽더라도 “말을 어버이한테서 배우기”만 해도 이미 이 삶을 꿰뚫고 가로지를 줄 안다. 아이는 다 아는 넋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아이로 태어나서 자랐으니, 아이넋으로 말익히기를 늘 하면, 못 알아볼 일이 없다. 쉬운 말이 사랑이고 평화일 뿐 아니라, 모든 실마리이고 날개돋이라고 할 수 있다. 쉬운 말이 빛이고 숨결이면서, 모든 꿈으로 잇는 길이고 샘과 별빛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둘레(사회)를 보면, 다들 ‘말’이 아니라 ‘언어·철학·사고·표현·텍스트·화두·대화·용어·문학……’처럼 눈가림을 하거나 덧씌우면서 속이려 한다. 우리는 ‘말’을 보고 듣고 나누면서 ‘물’을 품고 사랑하고 돌볼 노릇이다. 사람은 말과 물로 삶을 짓기에 누구나 눈뜨면서 깨어나고 일어나니, 수수하고 쉬운 말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말을 잊은 채 물을 안 품으려고 하니, 무엇이든 다 못 하고 만다. 말을 일구면서 물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언제나 싱그럽고 튼튼하게 몸과 마음을 돌본다. 수수하고 쉬운 말을 등지는 채 바깥말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니까 허울만 좋고 허우대만 커다란 쭉정이로 기울고 만다. 2026.3.1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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