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꽃 / 숲노래 우리말 2025.5.31.


말꽃삶 47 ‘로그아웃’ 안 합니다

― “기호 9·10·11”를 찍는 마음



 ㄱ 로그아웃과 나가기


  우리는 ‘인터넷’이 처음 퍼지던 무렵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저는 또렷이 떠올립니다. 싸움터(군대)를 다녀오고 보니 ‘피시통신’에서 느슨히 ‘인터넷’으로 넘어가려는 길목이었고, 이무렵 풀그림(프로그램)을 짜는 젊은일꾼은 “사람들이 낯설다고 여길 영어”를 되도록 쉽고 수수하면서 또렷하게 풀어내려고 몹시 애썼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즐겨찾기’ 같은 낱말을 널리 쓰는데, 이 새말은 “‘인터넷’이란 영어를 ‘누리’라는 낱말을 바탕으로 풀어내려던 젊은일꾼”이 처음 지어서 퍼뜨렸습니다. 이런 말씨를 지켜보면서 저는 제 나름대로 ‘즐겨먹기·즐겨읽기·즐겨보기·즐겨듣기·즐겨쓰기·즐겨가기·즐겨걷기’처럼 즐겁게 새말을 더 헤아려서 여밀 만하겠다고 느꼈어요.


  이렁저렁 쓸 수 있는 영어 ‘프로그램’이지만, 이 영어도 지난날 젊은일꾼이 ‘풀그림’이라는 새말로 나타냈습니다. “풀어서 품는 그림”이라는 밑뜻입니다. 영어로는 ‘로그인·로그아웃’일 테지만, 1994년 앞뒤로 이미 ‘들어가다·나가다’나 ‘들어오다·나오다’로 담아낼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쉽게 풀거나 담거나 엮는 매무새나 눈길이 차츰 옅거나 흐린 듯합니다. ‘들어오다·나오다’라 안 하고 ‘로그인·로그아웃’이라 하는 분이 꽤 많아요. 이만 한 낱말쯤 그냥 영어를 써도 되지 않겠느냐고 여기는 셈일 텐데, 이처럼 흔하고 수수한 말씨부터 더 마음을 기울일 적에, 저마다 마음을 말로 담는 길을 즐거우면서 새롭고 넉넉하고 알뜰하게 펼 만하다고 느낍니다.



 ㄴ 기호 9·10·11


  다른 고장은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라남도에서는 둘레에서 저한테 자꾸 “자네는 누구를 찍을랑가?” 하고 묻습니다. 아무래도 전라남도에서는 어느 쪽을 몰아서 찍는 물결이다 보니까, 더구나 전남 고흥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쪽을 가장 몰아서 찍는 곳이다 보니까, 고흥에서 나고자라지는 않았어도 2011년부터 벌써 열다섯 해째 고흥내기로 살아가는 저더러 “자네는 우리가? 아님 남이가?” 하고 따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기호 9번을 찍습니다.” “기호 9번? 9번이 누구지?” “기호 10번도 찍을 수 있습니다.” “10번? 10번이 어딨나?” “기호 11번도 찍을 마음이 있습니다.” “허허, 이 사람 장난하나?” “기호 9번은 어린이입니다. 기호 10번은 푸름이입니다. 기호 11번은 들숲메바다입니다. 기호 12번은 해바람비흙입니다. 기호 13번은 시골입니다. 기호 14번은 책과 책집과 책숲입니다. 기호 15번은 작은집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호 16번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어른과 어버이입니다. 기호 17번은 씨앗과 나비입니다. 기호 18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호 9번부터 18번을 모두 찍으려고 합니다.” “…… 자네하고는 뭔 말을 못 하겠네. 그럼 누구를 찍는단 말인가?” “조금 앞서 여쭈었듯이, 어린이와 푸름이와 들숲메바다와 해바람비흙과 시골과 책과 가난이웃과 어른·어버이와 씨앗과 나비와 사랑을 헤아리는 분이 있으면 누구라도 찍을 텐데, 기호 1번부터 8번까지 죽 보노라니, 어느 누구도 어린이는커녕 나비도 숲도 책도 사랑도 안 쳐다보고 안 들여다보셔서, 저는 기호 9번이나 기호 17번을 찍으려고 합니다. 투표용지에 기호 9번이나 17번이 없으면 제가 투표용지에 ‘기호 9번 어린이’라 적고서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숱한 나라는 ‘으뜸하나(승자독식)’입니다. 이러다 보니 47.1 : 47.0으로 갈리더라도 47.1이 모두 차지하는 얄궂은 얼거리입니다. 그러면, 이런 얼거리를 갈아엎을 뿐 아니라, 누가 나라지기나 벼슬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아름답게 일하는 터전으로 바꿀 때라고 느껴요.


  그래서 ‘나라지기 뽑기(대통령 선거)’에서 ‘45 : 44 : 10 : 1’처럼 나온다면, 45로 뽑힌 나라지기는 ‘장관·기관장’을 45%만 뽑고, 44로 떨어진 사람은 ‘장관·기관장’을 44%를 뽑고, 10으로 떨어진 사람은 ‘장관·기관장’을 10%를 뽑고, 1로 떨어진 사람은 ‘장관·기관장’을 1%를 뽑는 얼거리를 세울 만합니다. 이때에 ‘장관·기관장’은 구슬뽑기로 가리면 됩니다. 이른바 ‘대선득표율’에 따라서 ‘장관·기관장 지명 권리’를 고르게 나누면 되어요.


  이런 얼거리를 짠다면 ‘총선득표율’에 따라서 국회의원과 군의원과 구의원 같은 자리도 구슬뽑기로 나눌 만합니다. 또한 총선에서는 구슬뽑기로 ‘고을나눔(지역구 배정)’을 할 노릇입니다. 광주에서 나온 사람이더라도 구슬뽑기를 해서 부산에서 일해야 할 수 있고, 강원도에서 나온 사람이더라도 구슬뽑기에 따라서 인천에서 일해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구 배정’을 구슬뽑기로 돌려야 뒷돈이나 뒷짓을 걷어낼 만합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금지’를 해야 합니다. ‘투표소’ 앞에만 ‘후보자 이름과 얼굴을 적은 종이’를 붙이되, 다른 어느 곳에도 아무런 걸개천을 못 걸어야 합니다. ‘유세 차량 금지’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선거비용 보전’을 안 해야 합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후보자 공약집과 선언문’을 모든 후보한테 똑같은 쪽만큼 잡아놓고서, 이레마다 ‘후보자 공약책’을 찍어서 온나라 모두한테 한 자락씩 돌려야 합니다. 어떤 공약과 선언을 하는지 누구나 낱낱이 알도록 돌려야 하고, ‘대통령·국회의원·군의원 당선자’가 공약과 선언에 따라서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살피는 길을 세울 노릇이며, 공약과 선언을 안 지키면 ‘끌어내리기(탄핵)’를 해야지요. 우리나라는 ‘선거비용 보전’뿐 아니라 엉뚱한 데에 애먼 돈을 너무 많이 쏟아붓습니다. ‘선거비용 보전’만 안 하더라도, 이 돈으로 온나라 사람한테 밑살림돈(기본소득)을 해마다 고르게 펼 수 있습니다.



 ㄷ 가끔 이따금 하나둘


  ‘가끔’과 ‘이따금’뿐 아니라 ‘하나둘’에도 ‘-씩’을 안 붙입니다. 이러한 우리말씨를 제대로 모르는 분이라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어쩐지 낯설거나 힘들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말씨가 왜 이러한 얼거리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뜻을 새기고 살피고 짚노라면, 어느새 눈과 손과 입에 익으면서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차분히 배우면서 천천히 익히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하루이틀 흐르고 한 달 두 달 지나고 한 해 두 해 이르는 사이에 저절로 몸에 녹아들어요. 말이란, 하루아침에 달달 외우는 굴레가 아니거든요. 말이란, 즐겁게 이 삶을 누리는 동안에 저마다 마음에 싣는 새로운 소리이자 씨앗입니다. 열 살 어린이가 모든 말을 눈부시게 잘 해내야 하지 않습니다. 열 살 어린이는 열 살 어린이만큼 우리말을 하면 넉넉합니다. 다섯 살 아이가 모든 말을 엄청나게 펼쳐야 할까요? 아니지요. 다섯 살 아이는 다섯 살 아이만큼 딱 300∼500 낱말만 아는 얼거리에서 신나게 말꽃을 피우면 즐겁습니다.


  말을 말답게 살리는 마음이 얕기에 스스로 얄궂게 쓰고 맙니다. 아니, 말을 말씨(말씨앗)로 알아차리는 마음일 때에 비로소 말을 살리고 말씨를 빛냅니다. 글을 쓸 적에 줄거리를 짜는 데에 마음을 다 쓰느라, 정작 “마음을 담는 말”을 어떻게 새롭게 배우면서 기쁘게 추스르면 스스로 빛나는 글씨를 이룰 만한지 거의 생각조차 못 하기에 ‘얄궂말씨’에 물들거나 길들거나 갇히고 말아요.


  글을 왜 써야 할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말은 왜 하는지 생각할 일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이란 “마음을 담거나 그린 소리”입니다.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적에는 “눈빛으로 다 안다”고 여깁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으레 한몸으로 움직일 줄 알 뿐 아니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면서도 마음을 느끼고 읽어요. 이와 달리 바싹 붙더라도 마음을 안 읽으려고 하면, 기나길게 말을 하더라도 닫히거나 막히거나 갇힙니다.


  글을 잘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글을 쓸 적에는 “말을 담으려고 하”면 됩니다. 말을 할 적에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면 됩니다. 저는 말더듬이에 혀짤배기인 몸으로 태어난 터라, 어릴적부터 늘 말을 더듬고 혀짤배기 소리가 샜습니다. 그런데 저를 동무나 이웃으로 여긴 분은 “더듬거나 새는 소리”에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들어 주시더군요. 저를 동무나 이웃으로 안 여기는 분은 제가 “안 더듬고 안 새는 소리”로 말을 하더라도 제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ㄹ 글은 뭘까


  글이란 뭘까요? 글힘이 있는 사람이 글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글이란, 스스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이 마음 가득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고 씁니다. 그래서 ‘글씨’입니다. 글씨란 ‘글씨앗’을 줄인 낱말입니다.

  말이란 뭘까요?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말이란, 스스로 이 삶을 사랑으로 일구면서 이루는 작은사람 누구나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씨앗을 흩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씨’예요. 말씨란 ‘말씨앗’을 줄인 낱말입니다.


  말을 잘 하려고 하지 맙시다. 글을 잘 쓰려고 하지 말아요. 마음을 나타내고 나누면서 함께 이웃으로 지냅시다. 마음을 그리고 주고받으면서 서로 동무로 지내기로 해요.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이야기를 쓰기에 반갑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짓고 일구고 가꾸는 삶이 ‘조그맣든 크든 그저 이 삶’을 스스로 담아내기에 즐겁습니다. 굳이 ‘공모전·문학상’에 뽑힐 만한 글을 꾸미지 말아요. 그저 글을 그리고, 그대로 말을 물빛으로 펼쳐 봐요. 노래하는 말씨로 쓰는 글입니다. 사랑을 말과 글로 담는 사이로 만나는 우리이기에 서로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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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삶 39 가맛마루

― 일본말씨 ‘산복도로’ 떠나보내기



  2000년에 처음 부산이라는 고장을 이웃으로 만난 뒤로 몇 해만 살짝 걸렀을 뿐, 해마다 꾸준히 드나들었다. 2000년에 이를 무렵까지 ‘산복도로(山腹道路)’ 같은 일본말은 아예 몰랐다. 내가 나고자란 인천에서는 ‘재’나 ‘고개’나 ‘언덕’ 같은 우리말을 썼고, 곧잘 ‘동산·뒷동산’ 같은 우리말을 썼다. ‘동산’을 ‘東山’이라는 한자로 적는 이가 제법 있는데, ‘동산’은 ‘산(山)’이라 하기 어렵다. 둥그스름(동그스름)한 언덕배기를 ‘동산’이라 일컫는다. ‘언덕’보다 낮거나 작으면서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풀이나 잔디가 부드럽게 돋아서 뒹굴기에 넉넉하고 나무가 알맞게 있어서 해바라기를 하며 낮잠을 누릴 만한 자리를 ‘동산’이라 했다.


  마을에서 어울리는 아이어른은 ‘山이 아닌 동산’을 푸근한 쉼터나 뒤뜰이나 마당으로 여겼다. 인천이라는 곳은 예부터 ‘999곳에 이르는 높고낮은 메’가 있다고 여겼다. 즈믄(1000)에서 하나가 모자란다고 여기는데, 하나가 모자라서 ‘서울’이 될 수 없지만, 모자란 만큼 사람이 덜 몰리고 더 아늑하게 쉬고 숨는 터전으로 보았다. 높고낮은 메가 999곳에 이른다면, 이만큼 재나 고개나 언덕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흔히 부산을 놓고서 ‘산복도로’에 ‘168계단’에 ‘보수아파트’를 둘러싼 달마을을 꼽곤 하는데, 인천은 끝도 없이 오르고 내리는 잿길과 고갯길과 언덕길이 물결친다. 소금밭을 메운 인천 주안이라든지, 갯벌을 메운 중·동·남구 쪽 달마을은 쉴 겨를이 없이 오르면서 내리는 골목바다이다. 다만, 부산에서는 골목바다를 구경터(관광지)로 삼을 줄 아는 품이 있어서 아직 고스란한 곳이 많다면, 인천은 골목바다를 얼른 허물어 잿더미(아파트단지)로 바꾸는 삽질만 많다.


  부산에도 삽질은 많지만 인천이 훨씬 삽질이 많은데, 인천은 서울에서 가까운 고장인 탓이다. 서울사람만으로는 서울을 못 굴린다. 그래서 인천사람은 거의 서울로 죽음길(지옥철)을 새벽과 밤마다 납작쿵이 되어 오간다. 그런데 인천사람을 보태어도 서울을 떠받치지 못 하는 터라, 수원과 의정부와 구리와 부천과 남양주와 군포와 의왕와 안산과 과천에서까지 사람들을 박박 긁어모은다. 요사이는 김포에서도 허벌나게 사람들을 긁어모은다. 부산곁에서 부산으로 일하러 오가는 사람도 참 많지만, 서울곁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서 오가는 사람에 댈 수 없다. 그래서 서울곁에 있는 여러 고을과 고장은 굴레(식민지)이다. 서울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서울이 살면 같이 돈이 넘치는 흥청망청인 데가 ‘서울곁(수도권)’이다.


  2000년에 처음 들은 말 ‘산복도로’는 낯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뒤로 다른 고장이나 고을에서는 이 일본말씨 ‘산복도로’를 듣지 못 하다가 2015년 무렵 마산에서도 ‘산복도로’라는 말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山腹’이라는 한자는 ‘비탈’을 뜻한다. ‘비탈 + 길’인 얼개인 ‘산복도로’는 일본에서 엮어서 쓰는 낱말이다. 여러모로 보면, 부산이웃 가운데에 일본말인데 ‘부산 사투리’로 잘못 아는 분이 제법 많다. 부산말을 쓰는지 일본말을 쓰는지 찬찬히 짚으면서 가다듬는 분도 많지만, 그러려니 지나치는 분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인천에서도 일본말을 일본말이 아니라 ‘인천 사투리’로 여겨서 쓰는 일이 이따금 있지만, 이제는 거의 ‘근현대·개항’과 얽힌 데를 가리킬 적에만 남는다. ‘구락부’나 ‘부락’ 같은 일본말을 빼면 그리 안 쓴다고도 여길 만하다.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갈 테고, 이웃으로 여기지 않으면 시큰둥하게 잊을 테지만, 인천내기로서 서울에서 아홉 해를 눌러앉다가 전라남도 시골에 또아리를 틀고서 부산을 이웃으로 삼는 나날이니, ‘부산말씨 아닌 일본말씨’가 자꾸 귀에 걸거친다. ‘산복도로’를 어떻게 털어내거나 씻어낼 만한가 하고 열 해 즈음 헤아리다가 수수하게 ‘고개·고갯길·언덕·언덕·언덕길·재·잿길·비탈·비탈길’ 같은 말을 쓰면 되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이런 수수한 말씨를 들은 부산이웃 가운데 여태 어느 한 사람도 이 수수한 말씨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복도로’가 일본말이건 아니건 그냥 ‘부산말씨’로 삼는 듯하다.


  2025년을 앞둔 2024년 섣달에 ‘가마메(가마뫼)’라는 옛이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한자 ‘釜山’은 ‘가마 + 메(뫼)’인 얼개이다. 부산을 이루는 여러 멧줄기는 ‘가마솥’이라 여길 만하다. 인천에 있는 동산이나 언덕하고 다르다(게다가 인천에는 ‘동산중·동산고’ 같은 배움터까지 있다). 요사이는 가마솥을 아예 모르는 분도 많지만, 가마솥이 어떻게 생긴 줄 안다면, 부산 곳곳에 있는 멧길(멧자락길·비탈길)이 어떤 얼거리인지 어림할 만하다. ‘가마 + 메’인 고장이듯, 가마메에 있는 멧길이며 비탈길이며 고갯길이며 잿길이며 언덕길이란, 부산스럽게 부산말씨로 ‘가맛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어디에서도 이 이름을 못 쓸 테지. 오직 부산에서만 ‘가맛길’을 비롯해서 ‘가맛고개·가맛골·가맛재’ 같은 이름을 쓸 수 있다. 가마메인 곳에 있는 고개요 골이요 재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가맛마루’란 이름도 어울린다. ‘마루’라는 우리말은 집에서 가장 넓고 반반하게 두면서 두런두런 모이는 자리를 가리킨다. ‘마루’라는 낱말은 ‘머리’와 ‘미루’와 ‘미르’로도 잇는다. 우리말 ‘미르’는 ‘용(龍)’을 가리킨다. ‘머리’는 ‘꼭두머리·우두머리’ 같은 쓰임새처럼 첫째나 으뜸과 큰곳을 가리킨다. ‘미루나무’에 붙는 ‘미루’는 ‘미르’하고 같은 말이다.


  고이기만 하면 썩는다. 고이기만 하기에 꼬부라지고 꼬여서 ‘꼰대’로 잇는다. 고이되 가만히 퍼지고 새롭게 솟으니 ‘샘’이다. 모든 샘은 “고이되 그저 고이기만 하지 않고서 끝없이 솟아서 새롭게 살리는 물밭”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샘 ㄱ’은 ‘샘물’이다. 들숲바다와 뭇숨결을 살리는 곱고 곧은 물줄기인 ‘샘 ㄱ’이다. 그런데 끝없이 솟기는 하지만 고약하고 꼬부라지고 꼬인 모습이라면 ‘샘 ㄴ’인 ‘시샘·시새움’이다. 그저 끝없이 솟기만 한대서 이웃을 살리거나 북돋우지 않는다. 맑고 밝게 살리는 사랑일 적에만 ‘샘 ㄱ·샘물’이다.


  나는 부산만 이웃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모든 곳을 이웃으로 삼는다. 푸른별 모든 겨레와 나라도 이웃으로 삼는다. 그래서 누구나 이웃으로 삼으려고 먼저 우리 스스로 쓰는 낱말부터 사랑으로 바라보며 품으려고 한다.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가장 작은 낱말 하나를, 마치 낟알(나락) 한 톨처럼 사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나사랑’을 ‘너사랑’으로 뻗어서 ‘우리사랑’으로 이루는 ‘하늘빛’으로 다가설 만하다.


  인천에는 동산과 언덕길과 잿마루가 있다면, 부산에는 가맛길과 가맛재와 가맛마루가 있기를 바란다. 낫거나 나쁘지 않은, 좋거나 싫지 않은, 그저 다르면서 하나인 숨결로 빛나는 길을 함께 생각하고 살펴서 아이 곁에 있는 즐거운 노래를 지을 수 있기를 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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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말꽃삶 38 글을 잘 쓰고 싶다면

― ‘문학’을 내려놓아야 한다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이웃님이 꽤 많습니다만, 제발 글을 잘 안 써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글을 써야 하지 않고, 더더구나 누구나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은데, 먼저 말부터 즐겁게 할 노릇이거든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소리’인 ‘말’을 두런두런 오순도순 나눌 줄 알면 됩니다. 마음을 말로 차근차근 차곡차곡 주고받을 적에 비로소 숨결을 틔우고 생각을 열어요.


  다만, 말도 굳이 잘 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을 찬찬히 펴면 됩니다. 내 마음을 너한테 펴고, 네 마음을 내 귀로 가만히 들으면 되어요. ‘나누다’하고 ‘주고받다’하고 ‘오가다’라는 낱말을 곱씹을 노릇인데, 이 세 낱말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밀어대는 길이 아닙니다. 이쪽에서 부드럽고 상냥하게 저쪽으로 띄우고, 저쪽도 이쪽으로 보드랍고 사근사근 건네는 길입니다.


 나누다 + 주고받다 + 오가다


  혼자만 떠들 적에는 재미없습니다. 한 사람만 말할 적에는 고단하고 괴롭고 지칩니다. 함께 이야기하기에 나란히 웃고 같이 걸어가는 길을 찾습니다. 서로 마음을 말로 나누기에, 여태 모르거나 놓치거나 지나치거나 잊은 마음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종잇조각도 나누어 들면 한결 가볍다고 합니다. 가벼운 종이라서 더 가볍지 않아요. 작든 크든 ‘나누’려는 마음을 먼저 세우기에 함께 느긋하면서 즐겁다는 뜻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매한가지예요. 도둑질을 자꾸 하니, 어느새 바늘뿐 아니라 소까지 대놓고 훔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주 조그마한 일부터 나누고 주고받고 오가는 마음을 북돋울 적에, 나중에는 어떤 큰일이건 홀가분하면서 넉넉하게 나누고 주고받고 오갈 수 있습니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 → 자랑하고 싶다는 글


  어느 누구도 굳이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대목을 좀 짚어야 합니다. 누가 글을 “잘 쓴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어느 누구는 글을 “못 쓴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못 쓴 글”이 있기에 “잘 쓴 글”이 있어요.


  “잘 쓴 글”이란 으레 “널리 보이고 싶은 글”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글”이지요. “못 쓴 글”이란 늘 “안 보이고 싶은 글”입니다. “감추거나 숨기고 싶은 창피한 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옮긴 말이나 글이 창피할 수 있을까요? 오늘 어떤 밥을 차려서 먹고서 어떻게 설거지를 했다고 담는 수수한 글이 창피하거나 감출 이야기일까요? 늦잠 탓에 하루를 그르쳤다는 이야기가 부끄럽거나 못난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길에서 돌에 걸려 자빠졌든, 누구한테 크게 속아서 돈을 잃든, 누가 나를 때리거나 괴롭혀서 아프고 슬프든, 이웃을 도우면서 온마음에 환하게 별빛이 쏟아졌든, 그냥그냥 아무 일을 안 하고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든, 또 뭔가 어지르거나 엎어지면서 고달팠든, 이 모든 다 다른 삶을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옮기면 넉넉합니다.


 못 쓴 글이라는 마음 → 나와 남을 빗댄 굴레


  못 쓴 글하고 잘 쓴 글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못 쓴 글”을 굳이 꼽아 본다면, “나와 남을 자꾸 빗대느라, 스스로 제살을 갉고 깎는 굴레”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을 쓸 뿐이기에,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대단하거나 뛰어난 남하고 나를 빗대거나 견주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저 사람처럼 훌륭하거나 놀라워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떤 보람(문학상)을 받았기에 “잘 쓴 글”이지 않습니다. 어떤 보람을 받은 글은 “보람을 받은 글”일 뿐입니다.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린 글이라면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린 글”일 뿐입니다. 그러나 띄어쓰기나 맞춤길은 반듯하되, 아무런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다면 ‘시늉글’이에요. ‘겉글·겉멋글’이라 여길 만합니다.


  우리는 띄어쓰기를 꼼꼼히 맞출 수 있으나, 말을 하면서 “또박또박 띄어쓰기를 하며 말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하다가 더듬을 수 있고, 소리가 샐 수 있습니다. 어물어물 중얼중얼 갈팡질팡 헤매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듬더듬 어물어물 말을 하더라도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말로 옮기”면 반갑고 사랑스럽고 고맙습니다. 물처럼 줄줄줄 흐르는 말씨이되, 도무지 알맹이도 줄거리도 없이 혼자 떠들기만 한다면, 이런 말에는 아무 마음이 안 흐른다고 여깁니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 = 번듯하게 꾸민 글


  번듯하게 옷을 차려입기에 멋스러운 사람이지 않습니다. 그저 “차려입은 옷”이고, “몸을 꾸민 옷”입니다. 번듯하게 꾸민 글은 그냥 “차려쓴 글”이고, “겉을 꾸민 글”입니다. 까맣고 커다란 쇳덩이(자동차)를 굴리기에, 이런 쇳덩이를 굴리는 사람이 높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두다리로 걷는 사람이기에 모자라거나 못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숱한 글은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이거나 “까맣고 커다란 쇳덩이”하고 닮더군요. 차분히 짚으면서 생각을 북돋아 보기를 바라요. 보기좋은 글씨로 적기에 “잘 쓴 글”이지 않겠지요? 보기좋게 차려입기에 “착한 사람”이지 않겠지요? 돈이 많거나 이름을 드날리거나 힘이 세기에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겠지요?


  글쓰기와 말하기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지기(대통령)가 말을 했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떤 보람(문학상)을 받은 분이 썼기에 대단한 글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적에 ‘마음’만 바라볼 노릇입니다. ‘자리(신분·계급·지위)’는 아예 안 쳐다보아야 비로소 마음과 말과 글을 읽어내게 마련입니다. 오직 ‘마음’만 헤아려야 줄거리를 알아차리고 이야기를 알아듣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 문학 내려놓기 + 살림짓는 사랑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길은 늘 오로지 하나입니다. 먼저 ‘문학’을 내려놓을 노릇입니다. ‘시·소설·수필·희곡’이라는 무늬(형식)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고서 우리가 스스로 짓는 살림을 사랑으로 돌보는 눈길과 손길과 발길과 마음길과 숨길과 하루길을 살필 노릇입니다.


  글을 쓰고 보니 ‘시’가 될 수 있고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틀에 짜거나 맞추려고 한다면, 이때에는 ‘글’이 아니라 ‘글시늉·글흉내·글척’입니다. 글이란, 말을 옮긴 그림입니다. 말로 나누려고 하는 마음소리를 눈으로도 보고 느끼고 살펴서 아로새기려고 종이에 그리는 ‘글’입니다.


  글부터 쓰려고 하지 말아요. 말부터 할 일이고, 마음을 말로 나타내고서 귀담아들을 일입니다. 마음부터 서로 나누면서 말을 하나하나 곱새기고 곱씹은 다음에, 느긋이 글로 옮기고 담고 얹으면 즐겁습니다.


 입으로 말을 하면서 글을 쓰기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을 적에는 말을 하면서 쓰면 됩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글을 쓰기로 해요. 한집안을 이룬 짝꿍이나 아이나 어른한테 들려주듯, 반가운 동무나 이웃하고 이야기하듯, 입으로 말소리를 내면서, 이 말소리를 그대로 글로 옮겨 봐요. ‘문학’을 하려고 나서면 문학도 아니고 글도 아니기 일쑤입니다. 그저 글·말·마음이라는 세고리를 살피면서 삶·살림·사랑이라는 또다른 세고리를 나란히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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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함께 읽는 잡지

<파란씨앗> 창간준비호에 나란히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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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참으로 쉽다

말꽃삶 37 글 그릇 그루 그림



  우리는 눈으로 글을 읽습니다. ‘글’은 눈으로 보면서 알아보도록 적은 무늬라고 여길 만합니다. 눈으로 읽는 글이라면, 귀로 듣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눈으로 못 봅니다. 말은 늘 귀로 들어요. 그런데 말은 누가 들려주고 나면 어느새 우리 곁을 떠납니다. 누구한테서 들은 말을 나중에도 떠올리려고 종이나 바닥에 새기기에 ‘글’이라고 합니다. ‘글’이란 “그린 말”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말’을 눈으로 읽으면서 뜻을 알려고 그린 무늬가 ‘말’이다”처럼 간추릴 수 있습니다.


  소리로 내어 들려주고 듣는 말인데, 이 말이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말’이라는 소리로 바꾸어서 들려주기에 알아들어요. 네가 밝히려는 마음은 네가 들려주는 말에 소리로 담깁니다. 내가 알고 싶은 네 마음은 바로 네 말을 듣는 동안 차근차근 알아보거나 떠올릴 만합니다.


 마음 → 말 → 글


  말이 있기에 글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니 말이 있어요. 우리는 ‘글’이라고 하는 그림을 눈으로 보면서 서로 어떤 마음인지 알려고 합니다. ‘글’은 “그린 말”이면서 “마음을 담은 소리”를 옮긴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글 = 그린 말 = 담은 마음”이기에 “글 = 그려서 담은 마음소리”로 여길 만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거나 다룰 적에 ‘그릇’을 씁니다. 밥을 담아 ‘밥그릇’입니다. 국을 담아 ‘국그릇’입니다. 풀꽃을 심어서 돌보려고 ‘꽃그림’입니다. 돈을 차곡차곡 모으려면 ‘돈그릇’을 둘 테지요.


  사람이 푸르게 바람을 누리는 길에는 나무가 이바지합니다. 나무가 서기에 온누리가 푸르게 우거지는 숲입니다. 나무가 든든히 줄기를 올리는 밑동을 ‘그루터기’라고 해요. 그리고 나무를 셀 적에는 “나무 한 그루”나 “나무 두 그루”처럼 셉니다. 어른이 일하는 곳 가운데 ‘주식회사’란 이름이 있어요. ‘주식’이라는 한자말에서 ‘주(株)’는 ‘그루’를 가리킵니다. 나무는 한 그루만 있을 적에는 아직 ‘숲’이 아니에요. 숱한 나무가 어울리기에 숲입니다. 어른이 일하는 ‘주식회사’라는 곳은 여러 사람이 ‘여러 나무’를 돌보듯 뜻과 힘을 모은다는 얼거리입니다.


 글 : 마음을 담은 말을 담는 노릇

 그릇 : 살림을 담는 노릇

 그루 : 숲을 담는 노릇


  글쓰기가 안 쉽다고 여기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는 어릴 적에 오래도록 말더듬이였습니다. 바야흐로 쉰 살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렀는데, 아직 이따금 말을 더듬곤 합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라, 어떤 사람은 혀가 길고 말소리를 내기 안 어렵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혀가 짧고 말소리를 내기 꽤 어렵습니다.


  저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라는 몸을 타고났는데, 혀가 짧고 말을 더듬더라도 제가 하고픈 말을 즐겁게 합니다. 겉보기로는 소리가 새거나 말을 더듬되, 제 나름대로 할 말을 하거든요. 그렇다면 글을 쓸 적에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말소리를 낼 때가 아닌 글로 말을 옮길 적에는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이 말을 더듬는지 소리가 새는지” 하나도 못 느낍니다. 더구나 글쓰기를 할 적에는 스스로 되읽으면서 글손질을 할 수 있어요. 말은 마주보는 사람하고 바로바로 소리를 내야 하지만, 글은 오늘 쓴 글을 몇날에 걸쳐 다듬고 손보고 추슬러서 읽힐 수 있습니다.


  말하기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소리가 새거나 더듬더라도, 때로는 앞뒤가 안 맞거나 갈팡질팡하더라도, 이대로 말을 하면 됩니다.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중얼거리든 속삭이든 시끄럽든 다 다르게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와 달리, 글쓰기는 우리가 적어 놓은 말과 마음을 얼마든지 가꾸고 다듬고 손볼 수 있어요. 곰곰이 본다면, 글쓰기야말로 쉽습니다. 처음 쓴 글을 그대로 내보인다면 창피할 수 있다고도 할 테지만, 한 벌 고쳐쓰고, 두 벌 손보고, 석 벌 다듬고, 넉 벌 추스르고, 다섯 벌 어루만지고, 여섯 벌 가다듬고, 일곱 벌 되새기고, 여덟 벌 손질하는 사이에, 어느덧 즐겁게 펼 새 이야기 한 자락이 태어나요.


 글쓰기 : 마음을 담은 말을 하나씩 달래면서 옮기는 일


  나중에 보태고 손보면 됩니다. 첫벌부터 훌륭하거나 뛰어나게 쓰려고 여기니 어쩐지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첫벌쓰기를 할 적에는 그저 마음을 슥슥 고스란히 옮길 노릇이에요. 첫벌쓰기는 그냥 가볍게 부는 바람처럼 슬슬 쓸 일입니다. 이렇게 첫벌을 마치고 나서는 집안일도 돕고 여러 살림을 추스르고서, 느긋이 두벌쓰기를 하면 됩니다. 이윽고 다른 일을 더 보고서 석벌쓰기를 할 만합니다.


  아무래도 동무나 이웃이나 어버이하고는 조잘조잘 거리낌없이 말을 할 수 있어도, 우리 마음을 글로 옮겨서 읽히려고 하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부끄러운 마음을 그저 부끄럽다고 받아들이면 되어요.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럽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슬플 적에는 슬프다고 받아들여요. 기쁠 적에는 기쁘다고 받아들여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예요.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담기에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들려주고 들은 말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천천히 ‘그리’면 되어요. “이야기한 말을 그려서 담는 글”이에요.


  느낀 바를 그대로 담기에 글 한 줄이 사랑스럽습니다. 아픈 일은 아픈 느낌을 그대로 쓰기에 서로 아픈 멍울과 생채기를 나눠서 풀어요. 반갑고 뿌듯한 일은 반갑고 뿌듯한 느낌을 그대로 쓰기에 서로 활짝 웃으며 북돋아요.


  글은 꾸며서 쓰지 않습니다. 말도 꾸며서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그대로 담기에 말이 말답고, 글이 글다워요.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할 말이 아니요, 남이 잘 읽어 주어야 할 글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북돋우고 다독일 뿐 아니라, 생각을 빛낼 씨앗을 살필 글입니다.


  이리하여 ‘마음씨’하고 ‘말씨’하고 ‘글씨’라고도 합니다. ‘씨’는 ‘씨앗’을 줄인 낱말이면서, ‘심(힘)’을 나타내는 낱말이고, ‘심다’로 잇는 얼개입니다. 마음씨란, 마음에 심는 씨앗이란 뜻입니다. 말씨란, 말로 심는 씨앗이란 뜻입니다. 글씨란, 글로 심는 씨앗이란 뜻이고요.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스스로 남기고 일구려는 꿈을 그대로 드러내는 씨앗이라고 할 만합니다. 글을 꾸며서 잘 쓰려고 할 적에는 ‘꿈’하고 멀어요. 꾸민 글이라면 겉치레로 기웁니다. 꾸밈없이 쓰는 글, 이른바 우리 마음을 그대로 담은 글이라면, 속으로 빛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말을 잘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됩니다. 말더듬이에 혀짤배기인 저처럼, 그저 어떤 마음을 나타내고 싶은지 하나하나 헤아려 봐요. 글을 잘 쓰려고 꾸미지 않으면 됩니다. 두런두런 나눌 마음과 생각을 차분히 짚으면서 담아 봐요.


 글쓰기 = 말을 담기 = 마음쓰기


  ‘글쓰기’란 ‘마음쓰기’하고 맞닿습니다. 마음을 쓰는 하루가 그대로 글을 쓰는 손길입니다. 서로 마음을 쓰면서 이야기가 태어나고 자라요. 함께 마음을 쓰고 글을 같이 써 보면서, 눈을 밝히고 오늘을 사랑하는 동무로 만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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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 숲노래 말넋


말꽃삶 36 ‘좋아하는 말’은 없습니다

― ‘말’을 보는 ‘마음’



  우리말 ‘좋다’는 안 나쁩니다. 그렇다고 딱히 좋은 낱말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말은 그저 마음을 담을 뿐입니다. 이 말이라서 좋거나 저 말이라서 나쁘지 않습니다. 말은 마음을 담는데, 마음이란 우리가 지은 삶을 담은 빛이에요. 우리가 지은 삶을 마음에 담게 마련이라서, 삶에서 좋음과 나쁨이란 없어요. 가싯길도 삶이고 꽃길도 삶이에요. 미움도 삶이고 사랑도 삶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 삶을 어떻게 가꾸거나 짓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시샘하거나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하루라면, 마음에도 시샘과 미움과 싫음이 고스란히 흐릅니다. 새롭게 찾아드는 하루를 시시하게 보거나 시답잖게 여기거나 시큰둥히 바라본다면, 마음에서 시시하고 시답잖으며 시큰둥한 빛이 어립니다.


  어느 말은 거칠거나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뜻이 깃들기 때문에 ‘나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칠어도 거친 삶이고, 깎아내려도 깎아내리는 삶이고, 따돌리거나 괴롭혀도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삶입니다. 눈물이 나기에 눈물나는 삶이고, 슬프기에 슬픈 삶이며, 아프기에 아픈 삶입니다. 이렇게 다 다른 삶을 섣불리 ‘좋다’나 ‘나쁘다’로 가를 수 없습니다. 자꾸 ‘좋다’나 ‘나쁘다’로 가르는 탓에 오히려 삶을 가두다가 마음을 가두고 말까지 가둔다고 여길 만합니다.


  누가 누구를 괴롭히기에 ‘괴롭힘말’이 태어납니다. 괴롭히는 몸짓과 삶과 매무새가 그대로 마음에 깃들어서 말로 태어나거든요. 누가 누구를 사랑하기에 ‘사랑말’이 깨어납니다. 사랑하는 몸짓과 삶과 매무새가 고스란히 마음에 흐르면서 말로 깨어나요.


  거친말이나 막말이나 삿대말이나 더럼말이 있다면, 우리 삶터에 거칠거나 막되거나 삿대질을 일삼거나 더럼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친말을 없애자”고 외친들 거친말은 안 사라집니다. 이른바 ‘비속어·욕·차별어’를 없애자고 외치더라도 ‘비속어·욕·차별어’는 안 없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란 마음이 드러나는 소리요, 마음이란 삶을 담아서 드러내는 그릇이거든요.


  어느 말이 거친말(비속어)이라고 한다면, 거친말이 불거지는 삶을 치울 노릇입니다. 얄궂고 안타깝고 딱한 삶을 그대로 두면서 말(거친말·비속어)만 치워낼 수 없습니다. 어느 말이 막말(욕)이라고 한다면, 막말을 어른한테서 배운 아이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막말을 아무 곳에서나 마구 읊는 어른부터 마음과 매무새와 말씨와 삶을 아름답게 바로세우거나 다잡을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씨를 흉내내거나 따라하거나 배웁니다. 아이들이 먼저 막말(욕)을 쓰는 일은 없습니다. 둘레에서 막말을 하니까 “나도 써야겠어!” 하고 느끼면서 젖어들 뿐입니다. 둘레에서 사랑말을 하고, 살림말을 펴고, 숲말을 나눈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사랑말과 살림말과 숲말로 삶을 누리면서 마음에도 사랑말과 살림말과 숲말이 흐르고 피어나고 깨어납니다.


 좋아하는 말이 있나요?


  으레 한글날 언저리에 “좋아하는 말이 있나요?”나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좋은말’을 뽑아 주셔요!” 하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한글날이 아니어도 이렇게 묻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한테 으레 ‘좋다’라는 낱말부터 말밑을 풀어내어 들려줍니다.


  우리말 ‘좋다’는 ‘좇다’에 ‘좁다’가 얽힙니다. 뜻으로만 본다면 “좋다 : 마음에 들다”요, “나쁘다 : 마음에 안 들다”입니다. 마음에 들려면 ‘좁혀’야 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그쪽도 다 좋을 수 없어요. 그저 다 좋다고 하는 말은 하나도 안 좋다고 여기는 셈일 뿐 아니라, 다 싫거나 나쁘다고 손을 놓는 셈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로 좁히기에 ‘좋’습니다. 마음에 든다고 하는 ‘좋다’이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드는 쪽으로 ‘좇’습니다. 이러다가 ‘쫓기’듯 서두르거나 바빠요. 어느 쪽만 좋아할 적에는 그만 좁은 마음으로 기울면서 좇고 쫓기다가 ‘조용’합니다. 말을 해야 할 적에 말을 않기 일쑤예요. 좋아하는 쪽만 좇기에, 안 좋아하는 쪽에는 아무 마음이 없이 등지는 터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눈길조차 없으니 아무 말을 않는 ‘조용’한 팔짱질로 흐르곤 하더군요.


  이리하여 “저는 좋아하는 말이 없습니다. 이미 어느 말이건 ‘좋은말·나쁜말’로 가를 수 없고, 눈길을 좁혀서 마음까지 좁으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저는 늘 ‘사랑할’ 말을 헤아립니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은 뭘까?


  둘레에서 으레 흔히 자주 늘 쓴다고 할 만한 ‘사랑’입니다만, 오히려 사랑이 왜 어떻게 사랑인지 모르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사랑은 “좁히는 마음”도 아니고 “넓히는 마음”도 아닙니다. 사랑은 해바람비와 들숲바다처럼 그저 온통 품어서 풀어내는 푸근한 결입니다. 날씨가 다르더라도 해는 온누리에 고루 비춥니다. 날씨는 다르지만 바람과 비도 온누리에 두루 찾아듭니다. 들숲바다는 뭇목숨을 너르게 품는 터전입니다.


  사랑이란, 이쪽도 저쪽도 그쪽도 아닌 오롯이 ‘나’이고 ‘너’이면서 ‘우리’인 ‘하나’라고 여길 만합니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봅니다. 너랑 나는 서로 다른 넋이면서 하나인 숨빛이기에 ‘우리’로 어울리고 어우르고 아우르면서 포근히 안습니다. 겨울을 녹이는 포근하고 푸근한 품이 사랑입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모두 풀어내는 풀빛처럼 푸르게 빛나는 사랑입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이라는 말이 있듯, 사랑은 기울지 않고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저 바라보고 나아가면서 함께 있고 같이 서며 나란히 걷습니다.


 사람이란?


  우리가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는 사이로서 들숲바다를 품고 해바람비를 머금는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사랑’은 ㅁ과 ㅇ이 다를 뿐이면서 하나인 낱말입니다. 닿소리 ㅁ은 모두는(모으는) 결을 나타내고, 닿소리 ㅇ은 알고 아우르는 결을 나타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포근히 해가 들고 바람이 깃들기에 새롭게 마주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새’가 날듯, 스스로 생각하면서 새롭게 이 삶을 일구고 가꾸고 짓고 돌볼 줄 아는 사랑으로 들숲바다를 품으면서 노래하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람은 좋거나 나쁘다고 가르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아우르면서 너나없이 우리(하늘·한울)를 이루려고 태어납니다.


  우리말 ‘하늘·한울’은 “하나인 울”입니다. 울·우리가 하나이기에, 함께이기에, 하얗게 햇빛이기에, 함초롬하고 함함히 빛나기에 하나인 나와 너입니다. 이러한 결을 읽어 본다면, 누구나 “나는 어떤 말을 사랑하는 하루일까?” 하고 곱씹을 만합니다. 이리하여 “그렇다면 어떤 말을 사랑하나요?” 하고 누가 묻는다면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사랑합니다. 사람으로서 사랑을 사랑하려는 하루를 살고 살림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배우고 알아가려고 숲을 품는 길을 찾습니다. 사랑말을 나누고 싶기에 숲말을 익혀서 펴고, 살림말을 일구면서 살림글로 옮깁니다.


  사랑말을 한다면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사랑글을 쓸 적에도 참으로 쉽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어렵고 딱딱한 말이나 글입니다. 사랑을 등지기에 굳이 딱딱하고 어렵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더군요. 일본말씨나 옮김말씨(번역체)나 영어나 일본한자말이나 중국한자말이 ‘나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하면 되고, 미국사람은 미국말을 하면 되고,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하면 되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나고자라면서 이 땅에서 이웃과 동무를 마주하는 살림살이인 터라, ‘좋은말’도 ‘나쁜말’도 아닌 ‘우리말’을 ‘우리글’로 펼 뿐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는 말인 ‘우리말’입니다. 너랑 나를 사랑으로 마주하는 말인 ‘사랑말 = 우리말 = 살림말 = 숲말’입니다.


  이쪽이 좋으냐 저쪽이 좋으냐 하고 따지거나 가르려고 하면, 으레 싸움박질로 번집니다. 어느 쪽에 서든 고요히 사랑일 적에는 반짝반짝 웃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깨동무를 이루는 아름말과 아름글로 눈뜹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저절로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잊은 목숨붙이라면 아무리 덧씌우거나 치레하거나 꾸미더라도 ‘사랑척·사랑흉내·사랑시늉·사랑탈’일 뿐입니다. ‘척·흉내·시늉·탈’은 겉모습이에요. 사랑하고 아주 멀고, 사랑을 하나도 모르는 술레입니다.


  한글날이건 한글날이 아니건, 말을 보는 마음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굴레에서 사르르 빠져나와서 사랑하는 살림을 초롱초롱 맑은 눈과 반짝반짝 밝은 마음으로 즐겁게 노래하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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