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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인천 16] 방학숙제 ‘식물채집’

― 사랑 없이 더미만 안긴 그곳



  국민학생이던 때, 방학이면 늘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방학숙제에 짓눌립니다. 방학 동안 우리가 해내야 하는 짐(숙제)은, 첫째 일기, 둘째 탐구생활, 셋째 과목에 따라 멧더미 같은 베껴쓰기, 넷째 만들기·독후감·여행감상문 쓰기 들이었습니다. 일기는 이레 가운데 나흘은 꼭 써야 했고, 탐구생활은 빼곡하게 채워야 했습니다. 탐구생활을 하자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반드시 들어야 했기에, 탐구생활 방송이 나오는 20분 남짓을 맞추자면, 밖에 나가서 논다든지 어머니 심부름을 한다든지 그즈음 뭔가를 해야 하면 못 풀고 지나칩니다. 과목 숙제는 여느 때에도 늘 있는 숙제이지만, 방학을 맞이하면 길잡이(담임 교사)는 과목마다 무슨무슨 숙제를 해야 한다고 잔뜩 적어서 아예 표를 만든 뒤 나눠 주는데, 방학하는 날 나누어 주는 숙제표를 받을 때마다 동무들은 괴로운 소리를 뱉어냅니다. 다른 숙제도 숙제이지만 과목 숙제를 하자면 날마다 몇 시간씩 숙제에만 매달려도 빠듯하거든요. 만들기 숙제는 으레 ‘과학 만들기’입니다. 저는 다른 숙제는 그리 내키지 않아도 종이와 빨대 따위를 오리고 자르고 붙여서 집을 만든다든지 석유 캐는 배를 만든다든지 하면서 조물딱조물딱 하기를 즐겼습니다. 독후감 숙제야 여느 나날에도 한 달에 몇 벌씩 하는 숙제입니다. 걱정거리라면 여행감상문인데, 어디 여행을 다녀올 수 없는 살림일 때에는 ‘가까운 동무’한테 찾아갔다가 온 이야기를 이렁저렁 살을 붙여서 씁니다. “이게 무슨 여행감상문이야?” 하고 길잡이가 꾸짖으면, “어디 멀리 나갔다가 와야지만 여행인가요. 어느 곳을 다녀오든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면 여행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면서 대꾸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대꾸를 할 적마다 출석부로 신나게 얻어맞았습니다.


  국민학교 낮은학년을 마감하고 높은학년으로 접어드는 4학년이 되니 새로운 방학숙제가 하나 생깁니다. 바로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 한 가지 하기. 여기에 ‘취미활동 결과’ 하나 내기.


  그리 길지 않은 방학 동안 우리들한테 숙제만 하라고 들볶는 학교라 할 만한데, 따지고 보면 여느 나날에도 언제나 짐더미를 안기던 학교였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숙제와 성금과 체벌과 시험과 단속과 검사와 훈련과 강요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엇인가 알차고 즐겁게 ‘배운다’고 느낀 적은 하루조차 없었습니다. 무언가에 길들도록 우리를 내몰고, 그들(교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납고 무시무시한 주먹과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4학년이 되어 맞이하는 여름방학 날, 과목 숙제와 탐구생활 따위와 함께 더 얹은 숙제를 길잡이가 알려줍니다. 다른 동무들은 죽겠다는 소리를 지르며 “방학 때 하루도 놀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고 따집니다. 책상을 치고 걸상을 끌며 대꾸합니다. 길잡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짐이 참 많다고 느끼지만, 동무들이 대꾸하는 꼴이 적이 짜증스러운 듯 “왜 이리 시끄러워? 방학 첫 날부터 맞아 봐야겠어?” 하며 굵직한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조용히 시킵니다.


  새로운 방학숙제가 더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던 저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다른 짐이라면 모르지만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은 제가 늘 즐기는 일이고, 취미활동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형하고 우표모으기를 해왔거든요. 과목 숙제가 너무 많아 늘 힘들지, 다른 덤짐(추가 숙제)은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숙제가 없어도 이런 일은 언제나 으레 하며 살았으니, 으레 하던 그대로 짐으로 엮기만 하면 됩니다.


  곤충채집도 함께 할까 하다가, 벌레를 아무렇게나 잡아서 죽여 모으는 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더군요. 언제나 나비에 잠자리에 딱정벌레에 개미에 거미에 사슴벌레에 베짱이에 사마귀에 방아깨비에 잘 잡으면서 놀았지만, 곤충채집장에 가느다란 못으로 쿡 찔러서 죽여서 담는 곤충채집을 며칠 해보다가 “잠자리를 잡고 손가락에 끼우고 놀다가 놔주는 일하고 채집은 너무 다르구나. 차마 이 아이들을 못으로 찔러 죽이지 못 하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을 다니며 낯선 풀을 모조리 뽑아 모으는 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살아숨쉬는 목숨이라면 풀 한 포기도 살아숨쉬는 목숨입니다. 다만, 어릴 적에는 이 대목까지 생각하지는 못 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본다면, 곤충채집은 풀벌레를 못으로 찔러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요, 식물채집은 풀꽃을 뿌리까지 캐내어 말려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에요.


  어린 앵두나무를 캐다가, 곧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텐데 싶은 들딸기를 캐다가, 씨앗을 맺어 퍼뜨리려던 제비꽃을 캐다가, 아직 자그마한 해바라기를 캐다가, 속으로 자꾸 뜨끔했습니다. 어릴 적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내가 자꾸 잘못을 하는구나. 바보 같은 나를 봐주렴.” 하고 속삭였어요. 얼핏 풀꽃나무가 제 마음으로 스며들어 “넌 풍뎅이를 못으로 찔러죽일 적에는 뜨끔하거나 못할 짓이라고 여기면서, 나를 뿌리째 캐내어 무거운 책더미에 짓누르고 말려서 죽이는 짓은 안 뜨끔하거나 안 못할 짓이라고 여기니?” 하고 따지는 듯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따지는 마음소리를 내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떡하니. 식물채집 숙제를 안 내면, 또 그놈(담임 교사)이 우리를 먼지 나게 두들겨패는걸? 또 맞기 싫어.” “네가 그놈한테 볼기를 얻어맞는다고 네 목숨이 사라져? 한동안 따끔하고 붓겠지만 네 목숨이 사라져? 아니잖아? 그런데 네가 우리를 뿌리를 안 남기고 모조리 뽑아내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어. 뿌리를 남겨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식물채집을 할 적에는 뿌리까지 캐라고 했어.” “이그, 너는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구나? 너한테 말을 건 내가 잘못이네.” “아,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어.”


  여름방학 동안에는 꽃삽이나 호미랑 비닐자루랑 책을 챙겨서 다녔습니다. 풀꽃을 캐면 흙을 털고 잎을 반듯하게 펴서 책 사이에 끼웠습니다. 처음 이 짐을 하라고 시키는 말을 듣던 1985년(4학년) 여름날에는 모처럼 ‘할 만한 짐’이라고 여겼으나, 풀꽃을 모으면 모을수록 속으로 켕겼습니다.


  그래도 4학년과 5학년과 6학년 세 해를 보내는 동안, 동무들하고 놀다가 틈틈이 풀을 뽑아서 그러모읍니다. 뿌리까지 알뜰히 캐야 하는데, 밖에서 뛰놀 적에는 호미 같은 연장은 미처 못 챙기기 마련이니, 놀다가 풀을 캘 적에는 손으로 땅을 파서 풀포기를 한 뿌리 두 뿌리 모읍니다. 


  뽑아서 집으로 가져온 풀포기는 뿌리와 잎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낸 다음 신문 사이에 누르고 두꺼운 책들, 이를테면 전화번호부를 위에 올리고 눌러 놓습니다. 적어도 이레쯤 눌러 놓아 납작쿵이 됩니다. 셀로판테이프(비치는 테이프)를 가늘게 잘라서 두꺼운 그림종이 하얀 쪽에 붙입니다. 뿌리가 길면 뿌리는 잘라서 옆에 붙입니다. 뽑거나 캔 풀마다 이름이 무엇인가는 거의 어머니가 알려줍니다. 방학을 하기 앞서 제 ‘식물채집장’은 일찌감치 서른 쪽이든 쉰 쪽이든 꽉꽉 찹니다. 방학 동안 제 식물채집장을 꾸미려고 하는 일이란, 겉에 글씨를 종이로 파서 예쁘게 붙이기라고 할 만합니다. 여느 때에 이미 식물채집을 다 해놓았기에, 여름방학에는 껍데기를 얼마나 더 예쁘고 돋보이도록 할까에 마음을 썼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할는지 모르는데, 제 식물채집장은 방학이 되기 앞서 다 마쳐 놓았기에, 다른 동무하고 견주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밖에 없고, 5학년 때 식물채집장은 학교를 통틀어 가장 잘한 방학숙제라며 ‘최우수’를 받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식물채집이든 곤충채집이든 방학이라는 짧은 동안에 하라고 시킬 짐이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싶습니다. 풀이든 벌레이든 사람들이 함부로 갈무리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이를 짐으로 여기도록 하면서 애먼 목숨을 죽이도록 길들여서는 안 돼요. 참다이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풀을 들여다보고 벌레를 살펴보는 마음을 길러 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채집장’이 아닌 ‘그림묶음’을 내도록 하는 길이 옳다고 느낍니다. 풀벌레나 풀꽃을 ‘잡아죽여 모으’는 채집장이 아니라, 풀벌레나 풀꽃을 지켜보고서 그림으로 담는 ‘그림묶음’을 하도록 북돋울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학에 반짝 힘겹게 시키는 짐더미가 아닌, 여느 때에 이처럼 스스로 둘레를 살피고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야 할 테지요. 따로 ‘방학숙제’란 이름으로 시켜서 짜맞추는 굴레가 아닌, ‘언제나 즐겁게 누리고 해온 아이만 내도록’ 해야 할 테고요. 이제는 배움터에서 어린이를 사납게 두들겨패거나 막말을 일삼는 길잡이가 사라졌을 테지만, 참말로 이러한 ‘채집이나 모으기나 만들기’를 안 했다고 해서 두들겨패거나 점수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날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팬 그들은 그들이 일삼은 주먹질(학교폭력)을 조금이라도 뉘우칠까요?


  우리는 짐더미가 아닌 사랑으로 커 나갈 저마다 곱고 어여쁜 어린이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눈길을 익히고 고운 손길을 다스리며 착한 마음길을 북돋울 어린이입니다. 어린이가 신나게 뛰놀면서 마음을 가꿀 적에 아름답게 철드는 어른으로 설 수 있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2010년에 써둔 글이다.

조금 손질했다.

그무렵에 인천을 떠나기 앞서

몇 꼭지를 썼는데

틈나는 대로 마저 더 쓰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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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골목빛


+ + +


도화1동 09-0405-100 : 조그맣더라도 마당은 마당. 이 마당에는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고 꽃이 핀다. 풀꽃나무가 자라는 마당에 너는 빨래는 풀꽃나무 기운에 해바람을 듬뿍 머금는다. 어떤 옷을 어떻게 입을 적에 즐거울까? 어떻게 하루를 맞이하면서 누리기에 빛날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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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랑 비랑



  비가 오는 인천입니다. 이 빗소리를 듣고 빗물 내음을 맡으며 골목을 걸으려 합니다. 함께 걸을 이웃님들하고 사뿐사뿐 나긋나긋 조용히 걸으려 합니다. ‘비골목’이란 얼마나 상큼하고 시원한지 몰라요. 우산을 들고, 또는 비옷을 입고, 아니면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천천히 골목을 거닐면, 아 내가 이 비랑 바람이랑 골목이랑 하나가 되어 이곳에 있네 하고 느낄 수 있어요. 2016.10.25.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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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려는 곳



  살아가려는 곳하고 구경하려는 곳은 서로 다르다. 살아가려 하기에 비로소 온마음을 기울여서 가꾼다. 구경하려는 곳은 구경할 때를 빼고는 마음을 쓰거나 기울일 일이 없기 마련이다. 사회나 나라에서는 ‘구경하는 곳(관광지)’이 보기 좋도록 꾸민다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데, 구경하려는 곳은 돈을 들여서 돈을 버는 데에만 쓰임새가 있다. 이와 달리 살아가려는 곳에는 아직 사회나 나라에서 돈을 안 쓰지만, 사람들 스스로 제 삶터에 온마음을 쓴다. 그래서 살아가려는 곳은 나랏돈이 한 푼조차 스며들지 않더라도 언제나 정갈하면서 아름답기 마련이다. 살아가려는 곳은 사람들 스스로 사랑으로 가꿀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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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 서는 길



  아이들한테 골목은 걷는 길이다. 어른들한테 골목은 걷는 길도 되지만,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도 된다. 아이들한테 골목은 걸을 뿐 아니라 달리거나 뛰거나 노는 길이다. 그런데 어른들한테 골목은 자동차를 세우는 길이 되기 일쑤이다. 어른들 가운데에는 골목 한쪽에 텃밭이나 꽃밭을 가꾸는 사람도 있으나, 하루 내내 자동차를 세워 놓아서 걷기 번거롭게 하거나 아이들이 뛰놀지 못하게 가로막고야 마는 사람도 있다.


  어른들은 왜 자동차를 골목길에 세우려 할까? 자동차를 장만하기 앞서 자동차를 댈 만한 자리를 이녁 집에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자동차는 자동차를 세우는 자리에 둔 뒤, 골목이 넉넉하고 홀가분해서 아이도 어른도 누구나 걱정없이 드나드는 터전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골목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하루 내내 자리를 차지하는 자동차만 없어도 골목은 무척 넓고 호젓하다. 4348.11.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골목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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