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손힘찬 지음 / 스튜디오오드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30.

까칠읽기 67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손힘찬(오가타 마리토)

 스튜디오 오드리

 2021.2.8.



모든 책은 바탕이 ‘나살림(자기계발)’이다. 내가 나부터 살리려고 글을 읽고 쓴다. 내가 나를 살리는 길을 배우고 익힐 때라야 책을 읽고 쓴다. 굳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낼 까닭이 없다. 군더더기랄까.


‘자기개발’이든 ‘자기계발’이든 ‘자기관리’이든 말끝으로 장난을 칠 뿐이라고 느낀다. 내가 나를 안 돌보면 누가 나를 돌보나? 앓아누울 때조차 스스로 몸을 돌보면서 밥과 물을 끊고서 신나게 드러누워서 ‘나돌봄(나를 돌아보는 삶)’을 하기에 비로소 낫는다.


아이는 “남들이 걸으니까 따라서 걷지” 않는다. 아이는 “남은 남이고, 나는 즐겁고 씩씩하게 걷고 싶은 꿈”을 품기에 비로소 두 다리로 의젓하게 서서 척척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는다.


다시 말하자면 ‘나살림(자기계발)’을 밝히거나 외치는 글과 책은 이제껏 “바로 내가 나부터 안 돌보고 안 살리는 팽개치기를 해왔다”고 드러내는 셈이다. 우리는 ‘나살림책(자기계발서)’를 아무리 읽는들 못 바꾸고 안 바뀐다. “내가 나를 안 보고 안 돌보고 안 가꾸는 삶을 이은 줄거리”가 드러날 뿐인 글이나 책을 읽고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를 보면 머리말에 “나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했다”처럼 적는데, 어느 누구도 멍을 풀거나 옛이야기를 치우지 못 한다. 멍을 풀었다거나 옛이야기를 치웠다고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다 뻥이다. 눈속임이랄까. 멍을 지우려고 한들 지울 수 없다. 스스로 오늘을 사랑으로 지어서 일굴 적에 멍이 저절로 사라질 뿐이면서, 새살이 돋는다. 스스로 오늘을 사랑이라는 살림으로 가꾸기에 ‘옛이야기’는 ‘오늘이야기’로 녹아들면서, 바로 이곳에서 웃는다.


나는 남을 못 돕는다. 내가 남을 돕는다고 할 적에도 거짓말이다. 남도 나를 못 돕는다. 남이 나를 돕는다고 할 적에도 가짓부렁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리고 가꾸고 돌볼 뿐이니까.


내가 네게 들려줄 말이란, “넌 네가 너를 들여다보면서, 네 삶을 네가 너답게 너로서 사랑하는 길을 받아들이고서, 차분히 삭이는 틈을 들이면, 네 일을 언제나 네가 스스로 풀고 품어서 맺어.”일 뿐이다. 내가 너한테서 들을 말도 이와 같다. 우리는 서로 “스스로 할 일”을 두런두런 말을 섞으면서 “스스로 배울” 뿐이고, 이제 혼자 고요히 있는 보금자리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기”를 하면서 가다듬는다.


사랑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없다. 사랑은 온갖 곳에 아무렇게나 안 쓴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사랑이다. “저마다 사랑인 사람”이라서 “다 다른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저마다 사랑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스스로 ‘사람’인 줄 알아볼 적에, 바로 스스로 “내가 나를 보는 이 눈빛이 사랑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면서, “내가 나를 보듯, 네가 너를 보기에, 우리가 서로 볼 수 있네” 하고 느낀다.


손수 살림을 지으면서 삶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스스럼없이 사랑을 스스로 배워서 익히고 품고 풀어낸다. 오직 이뿐이다. 아무리 말로 읊는들 사랑을 모른다. 아무리 나살림(자기계발)을 해본들 사랑하고 한참 등질 뿐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아이곁에 서서 밥을 차려서 아이랑 같이 밥을 먹고, 아이랑 같이 치우고, 아이랑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어른곁에 서서 나란히 볕바라기를 하며 새노래와 개구리노래와 풀벌레노래를 귀담아들으며 아무 말이 없이 하루를 누리면 된다. 언제나 이뿐이다. 사랑은 ‘대화와 토론과 상담’으로는 ‘죽어도 못 깨닫’는다.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집살림을 맡아야 누구나 곧바로 알아보고 익히는 사랑이다.


ㅍㄹㄴ


최근 들어 가장 충격적인 발경는 내가 생각보다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점이다 … 나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나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4쪽)


특히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가 더욱 힘들다. 내가 본격적으로 코칭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코치가 있다. 그와 상호 코칭하면서 사랑에 관해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그는 사랑을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유가 사랑의 형태가 제각각이라 그렇다고 했다. (5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의 의무 - 정의당 이정미 정치산문집
이정미 지음 / 북노마드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26.

까칠읽기 66


《정치의 의무》

 이정미

 북노마드

 2019.11.11.



‘젊은순이’가 늘어나야 벼슬판(정치)이 바뀌지 않는다. 똑같이 젊은돌이가 늘어난들 벼슬판이 바로잡히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으로 돌본 아줌마’가 늘어나야 벼슬판이 바뀐다. ‘아이를 돌본 아줌마’ 곁에 ‘아이를 돌본 아저씨’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일을 해야 나라도 벼슬판도 바꿀 수 있다. 나이만 적은 사람이 아무리 늘어난들 새나라로 안 나아간다. 삶은 나이만으로 짓지 않는다. 삶은 오직 사랑으로 가꾸는 살림길로 짓는다. 그런데 보라, 이 나라 벼슬판은 ‘아이를 돌본 적 없는 꼰대 아저씨’만 우글거린다. 이 나라 벼슬판에는 아직 ‘아이를 돌본 아줌마’조차 없다시피 하다.


젊은이란 새롭게 나아가는 사람이기보다는, 새롭게 부딪히며 배우는 사람이다. 아줌마란, 새길을 모조리 부딪히며 하루하루 자빠지고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아프다가도 스스로 눈물웃음을 찾아내어 사랑을 일군 어른이다. 이른바 이 나라 벼슬판이 와장창 박살이 난 까닭이라면, ‘어질고 아름다운 아줌마’를 안 품는 탓이라고 해야 할 만하다.


이정미 씨가 쓴 《정치의 의무》를 읽다가 놀란다. 먼저, 이이가 부산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어린날을 보냈다는데, 내가 어린날을 보낸 마을하고 겹친다. 나는 도화동과 송림동과 숭의동과 송학동 언저리를 골목집 하나하나까지 발바닥에 담으면서 살았다. 다만 이 책에는 작은마을 작은집 이야기는 한 줄조차 없구나. 이정미 씨는 골목집에서 살아 본 일이 없을까? 다음으로, 이이는 1984년에 서울 한국외대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는데, 나는 1994년에 서울 한국외대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 이이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그만두었다면, 나는 사람답게 일하며 살고 싶어서 그만두었다.


서울에서 그냥그냥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잘 모를 수 있는데,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어서 다닌 일’이란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요사이는 좀 바뀌었을 만하지만, 2010년 무렵에도 이러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으면 큰고장인데도 걸개천을 붙였다. 우리 아버지도 걸개천을 붙이고 싶어했기에 너무 창피해서 말렸지만, 인천에서 마친 고등학교에서는 붙였기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268쪽짜리 책인데 빈자리가 너무 많다. 134쪽이나 70쪽으로 낼 만한 작은책을 두세 곱으로 부풀렸다. 바른길(정의당)을 밝힌다는 사람으로서 종이를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나? 바른길이란 ‘그들’이나 ‘저들’하고 다르게, 푸른길을 헤아리면서 온누리를 고루 알뜰히 품는 삶길이어야 하지 않은가?



남성들은 얘기한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지만 나는 남성들이 불편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다. 그 불편함 속에서,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태도로는 현재의 젠더위계에 눈을 감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 한다. (97쪽)



이정미 씨는 한참 잘못 본다.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가 아니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 때린놈이 때린놈(가해자)이고, 맞은이가 맞은이(피해자)이다. 아직 때리지도 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미(잠재적)’라고 붙여서는 안 될 노릇이다. 박정희는 온나라 사람한테 손그림(지문)을 받는 틀을 1962년에 세웠다.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 군사독재 사슬이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른길(정의당)에 서려는 일꾼이라면, 사람을 갈라치기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로 찍지 않는 눈을 틔울 노릇이다. 일본에 일본한겨레(재일조선인)한테 ‘외국인등록 지문강요’를 오래도록 일삼으며 괴롭혔듯, 이 나라가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며 괴롭히는 짓을 이제라도 멈추고 끝장내는 일부터 마음을 써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나라이든 돌이만 있으면 망가지고, 순이만 있어도 망가진다. 순이돌이가 어깨동무하면서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일구는 작은살림을 누릴 때라야, 작은집이 작은마을로 잇고, 작은마을이 작은고을과 작은고장으로 뻗어서, 작은나라를 이룬다. 그저 사내라는 몸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넌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야!” 하고 못을 박으면 쌈박질만 일어난다. 거꾸로 “넌 태어날 때부터 눌려야 해!” 하고 바보짓을 해도 쌈박질일 뿐이다. 둘 다 걷어낼 적에 비로소 어깨동무(평등·평화)이다.


갈라치기로는 아무것도 못 바꾸면서, 늘 쌈박질만 불거지고, 이 쌈박질이 더 크다가는 끝내 서로 불(분노)에 휩싸여 다같이 죽는다.



한국 진보정치 1세대는 권영길, 강기갑, 고(故) 노회찬 전 의원, 심상정 의원으로 상징된다. (49쪽)



뭔 소리인가? 우리나라 ‘진보정치 1세대’는 조봉암이지 않은가? 진보정치 2세대는 ‘장준하’이고, 진보정치 3세대는 ‘백기완’이지 않은가? 이처럼 조봉암과 장준하와 백기완이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몸을 바치다가 조봉암과 장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한테 목숨을 빼앗겼고, 백기완이 늘그막까지 애쓴 땀방울이 씨앗이 되어서 권영길·강기갑·노회찬·심상정에 이르는 ‘진보정치 4세대’가 태어났다고 보아야 맞다. 앞선 진보정치 ‘1∼3세대’가 모조리 사내투성이라서 “아주 없던 일”로 지우려는 셈인지, 이 나라 바른길(정의당)을 안 배운 탓인지 그저 아리송하다.



지금까지 인천은 여성 지역구 국회의원을 한 번도 배출한 적이 없다. 내가 첫 번째 지역구 여성의원이 되려고 한다 …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정의당 대표 이정미가 지역구 당선으로 재선하는 건 한국정치사에 획을 긋는 일이다. 차세대 진보정치의 초석을 닦는 일이다. (46, 47쪽)



이정미 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순이라는 몸을 입었기에 “한국정치사에 획을 긋는 일”이라든지 “차세대 진보정치의 초석” 같은 허울을 스스로 씌우지 않기를 빈다. 《정치의 의무》에는 이정미 씨 스스로 어떤 바른길을 폈거나 펴려고 하는가 하는 뜻과 꿈과 길이 거의 안 보인다. 또는 아예 안 보인다. 너무 ‘자랑’으로 가득하다.


무엇을 새롭게 하려는지 바라보려는 눈을 찾기가 어렵고, 무엇을 새롭게 하겠노라는 마음을 느끼기가 어렵다. 날선 목소리로 이놈과 저놈을 나무라기만 하는 데에 조그마한 꾸러미를 채우고 마니, 그저 안타깝다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청년들은 광화문이나 서초동에서 과연 자신의 깃발을 찾을 수 있었을까? 국제 학술지 논문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52퍼센트 비정규직 청년들에게 조국 장관 딸의 입시 문제는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청년세대의 가장 큰 좌절은 “진보건 보수건 특권층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무력감이었다. 그것이 조국 장관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226쪽)



조국 씨는 ‘군대’도 안 나왔다. 이른바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라는 떡고물을 날름 받아서 마치 ‘군복무’라도 했다는 듯이 감투를 얻었다. 조국 같은 사람은 그냥 ‘특권층’이다. 누가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몰래 마련해서 몰래 몇몇 ‘특권층’한테 베풀고는 몰래 없앤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를 날름 받아먹은 사람한테 ‘진보’라는 허울을 입히려 한다면, 이 나라에는 그야말로 진보가 없는 셈이다.


바른길(정의당)이 왜 무너졌는지 뼛속 깊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바른길은 뿌리를 못 내린다. 바른길이 그야말로 바르게 서려면, 서울에서 나가야 한다. 인천과 부산에서도 나가야 한다. 시골로 가야 한다. 전라남도 시골과 경상북도 시골과 강원도 시골과 충청북도 시골로 갈 노릇이다. 시골에서 먼저 ‘군의원’부터 맡을 노릇이다. 시골 아줌마를 일으켜세워서 시골 아줌마가 ‘흙살림을 하던 손’으로 시골 군의회부터 바르게 갈아엎는 밑동을 닦을 노릇이다.


먼저 시골 군의회부터 갈아엎은 뒤에, 서울과 부산과 인천에서 ‘아줌마 구의원’이 태어나도록 힘쓸 노릇이다. 국회의원이라는 떡밥은 잊기를 빈다. 먼저 군의원과 구의원부터 온나라 곳곳에서 천천히 다스리는 길을 펼 노릇인데, 가장 낮은 곳인 시골부터 헤아리지 않는 곳(대도시)에서는 아무런 바른길(정의당)이건 참길(진보)이건 싹트지 않는다.


누구보다 바른길과 참길이 서울과 큰고장을 몽땅 떠나서 시골에서 새길을 열려고 소매를 걷어붙일 때라야 이 나라가 바르고 참다우면서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이정미 씨, 제발 서울과 인천에서 떠나십시다. 아니면 인천에서 구의원부터 하시기를 빈다. 적어도 아파트밭인 인천 연수구부터 떠나서 인천 동구 골목마을 작은집에 달삯으로 들어가서 ‘동구 구의원’부터 하시기 바란다. 모든 바른길은 밑바닥부터 튼튼해야 할 노릇인데, 밑바닥이 없이 무슨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겠습니까?


모든 ‘바름·참(진보·정의)’은 목소리가 아닌 손바닥과 발바닥이다. 손바닥으로 일을 하고, 발바닥으로 마을을 두루 걸을 때라야 바르고 참답다. 이정미 씨가 낸 《정치의 의무》(2019)도 《정치하는 마음》(2021)도, ‘자랑’에서 맴돌다가 그친다. 부디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작은마을에서 작은일을 하는 땀방울을 천천히 글로 남긴 뒤에 책을 내시기를 빈다.


ㅍㄹㄴ


《정치의 의무》(이정미, 북노마드, 2019)


모든 게 술술 풀린다고

→ 모두 술술 풀린다고

23쪽


서울에 올라와

→ 서울에 와서

→ 서울로 와

24쪽


행복과 정치의 물음에 답을 준 사람은 언니였다

→ 즐겁게 다스리는 길을 알려준 사람은 언니이다

→ 즐겁게 일구는 길을 언니가 알려주었다

27쪽


독배를 마시는 걸 많이 보아왔다

→ 고약한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 추레한 짓을 으레 보아왔다

34쪽


그다음의 정의당, 또 그다음의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다

→ 그다음 바른길, 또 그다음 더 나은 새길을 바라고 추스른다

41쪽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나온 사람으로

→ 우리나라 윗굴레를 뚫고 나온 사람으로

→ 우리 삶터 하얀담을 뚫고 나온 사람으로

42쪽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사자성어를 줄인 말이다

→ 살림이란 말은 살리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261쪽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요

→ 나라는 왜 있는가요

→ 나라는 뭘 하는가요

→ 무엇을 하는 나라인가요

261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3년생 한동훈
심규진 지음 / 새빛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9.

까칠읽기 65


《73년생 한동훈》

 심규진

 새빛

 2023.12.25.



“책을 가려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적마다 갸우뚱하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말글을 몇 가지로 맞대어서 생각한다. 첫째 ‘아이’를 바라볼 적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둘째 ‘들숲메바다’를 마주할 적에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셋째 ‘사랑’이라면 어떠한가 하고 생각하고, 넷째 ‘나너우리’라는 살림빛이라면 어떠한지 생각하며, 다섯째 ‘씨앗과 꽃’이라는 숨빛이라면 어떠한지 더 생각해 본다.


어떤 아이라도 가려야 할 까닭이 없다. 들숲메바다는 어떤 숨붙이도 안 가린다. 사랑은 가리지 않고 그저 품어서 풀어낸다. 나와 너와 우리는 이때에만 좋거나 저때에는 나쁘다고 안 가린다. 씨앗은 언제나 자그마하지만 모두 다르게 빛나고, 꽃도 더 좋은 꽃이나 더 나쁜 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책은 가려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고 느낀다. “책은 몽땅 읽어야 한다고 말해야 맞다”고 느낀다. 이른바 ‘좋은책’만 읽으려고 하면 ‘좁은눈’으로 갇힌다. 이른바 ‘나쁜책’을 아예 멀리하면 거꾸로 ‘나쁜눈’이 된다고 느낀다. 어느 책이건 가리지 않으면서 읽을 때에 비로소 ‘열린눈’과 ‘트인눈’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글빗(비평)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모든 책을 고루고루 읽으면서 스스로 눈길을 틔우고 마음을 가꾸고 생각을 열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숲빛과 들빛과 바람빛과 바다빛으로 날개돋이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문기자뿐 아니라 우리(일반독자)도 비평가도 ‘스스로 좋아하는 책’에 너무 사로잡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출판사’라면 ‘덮어놓고 좋아하기’ 일쑤이다. ‘좋아하는’ 마음이기에 그만 ‘좁히’면서 ‘좇아다니’느라 이웃을 모조리 ‘쫓아내’면서 스스로 ‘종(노예)’이 되고야 만다. 좋아하는 마음이 아닌, 아이곁에서 사랑을 품으면서 들숲메바다로 살림을 짓는 씨앗과 꽃을 안팎으로 고루 헤아릴 적에, 비로소 ‘사람’으로 선다고 느낀다.


책을 가려읽지 말자. 좋은책을 찾지 말자. 아니, 그저 ‘책’을 읽자. 그리고 ‘스스로 배울 책’을 챙기자. 읽기에 까다롭거나 버거우면, 더 오래 품을 들여서 천천히 읽을 노릇이다. 수월하게 읽을 만한 책이면, 되읽으면서 ‘미처 놓친 곳’이 있지 않은지 돌아볼 노릇이다.


어쩐지 요즈음에는 ‘우리(일반독자)가 읽기 수월한 책’에 꽂히거나 추켜세우는 물결이 드센 듯싶다. “읽기 수월하기에 좋은책”일 수 있을까? 읽기 수월하기에 오히려 ‘나쁜책’이지 않을까? 


다시 더 생각해 본다. “가려읽는 사람은 스스로 어둠에 눈을 가리고 만다”고 할 수 있다. “나쁜책이란 없고, 책에 담긴 속내를 못 알아보는 눈이기에 얕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쓴 글부터 늘 되읽고 되새긴다. 나 스스로 나를 깨우칠 글을 쓰려고 하기에, 내가 쓴 글부터 나를 일깨우는 밑거름으로 삼으려 한다. 이러면서 나를 둘러싼 뭇사람 글을 몽땅 챙겨서 읽으려고 한다. 2025년 시골살림 눈으로 보자면, 시골에는 책집도 책숲도 아예 없거나 너무 허술한 탓에, 서울이나 큰고장에 마실을 가지 않고서는 책읽기를 널리 하기 힘들다. 그래서 바깥일로 마실을 가면 요새는 “하루 500권 읽기”를 하려고 눈에 불을 켠다. 하루 이틀 사흘 몇날에 걸쳐 ‘한 달치 책’을 몰아서 읽으며 한 달 동안 시골집에서 이 여러 책을 가만히 되새긴다.


책이 늘 둘레에 넉넉히 있는 서울사람이라면 굳이 “하루 500권 읽기”를 할 까닭이 없을 만하지만, 시골사람은 다르다. 거꾸로 보면, 시골사람은 들숲메바다가 언제나 곁에 있으니 서두를 까닭이 없이 들숲메바다를 날마다 느긋이 바라보고 헤아린다. 서울사람이라면 모처럼 들마실이나 숲마실이나 바다마실을 가면 그야말로 듬뿍듬뿍 품으려고 애쓰겠지.


+


《73년생 한동훈》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2023년에 진작 나온 줄 알았지만 기다려 보았다. 바로읽기를 하기보다는 기다려 보고서 읽자고 여겼고, 2025년에 장만해서 읽는다. 그런데 글쓴이는 ‘팬덤’으로 쓰고 말았네. ‘팬덤’이 아닌 ‘아이 생각’이나 ‘숲 생각’이나 ‘사랑 생각’이나 ‘너나우리 생각’이나 ‘앞날을 밝힐 씨앗 생각’을 안 한 탓에 그저 어느 누가 이름·힘·돈을 얻고서 나라지기로 올라서야 한다고 여기는구나 싶다.


나라지기는 누가 해도 된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 줄줄이 나라지기를 맡은 요즈음인데, 누가 나라지기를 맡았든 대수롭지 않다. 새 나라지기를 누가 맡아도 안 대수롭다. 우리 스스로 어떻게 꿈을 그리면서 어떻게 아이곁에 서는 어진 어른으로 살림하겠는지 밝힐 노릇이다. 그러나 《73년생 한동훈》에는 글쓴이 나름대로 한동훈이라는 사람한테서 어떤 빛과 그늘을 보았는가 하는 줄거리가 없다. 그저 한 사람을 올려세우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뿐이다.


왜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서 싸우겠는가? 다들 “책을 가려읽는 탓에 싸운다”고 할 수 있다. 이쪽에 서기에 이쪽 책만 읽으니 속이 좁다. 저쪽에 선다면서 저쪽 책만 읽으니 속야 얕다. 한쪽은 속좁고, 다른쪽은 속얕다.


서로 저희 쪽 책만 읽는 탓에 “왜 쟤들은 저렇게 멍청하게 굴어?” 하면서 엉뚱하게 말을 한다. ‘저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면 “저쪽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뿐 아니라,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저쪽 목소리가 담긴 글이나 책을 아예 안 읽으면서, 더욱이 저쪽 사람들을 아예 끊고 안 만난다면, 그저 저쪽을 미워하는 말만 쏟아내면서 끝없이 싸우고 만다.


저쪽에서 이쪽을 보는 눈도 똑같다. “왜 이놈들은 이렇게 마구 굴어?” 하면서 뜬금없이 말을 한다. ‘이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면 “이쪽 목소리”를 귀여겨들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다. 이쪽 목소리가 담긴 글이나 책을 아주 안 읽으면서, 덮어놓고 이쪽 사람들을 깔보고 비아냥대기만 한다면, 그냥 이쪽을 싫어하는 말만 내뱉으면서 그지없이 다투고 만다.


모든 사람은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써야 사람답다. 모든 사람은 왼발과 오른발을 나란히 써야 걸을 수 있다. 《73년생 한동훈》을 쓴 분은 예전에 ‘좌편향’이었다가 요새 ‘우편향’을 한다고 밝히지만, 글쓴이는 ‘진영논리’만 댈 뿐, 꿈(계획·대안·정책·비전)이 안 보인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들한테 차근차근 모든 빛과 그늘을 풀어내어 이야기롤 들려줄 노릇이라고 본다. 앞으로 어른으로 설 아이들이 어질고 슬기롭게 온누리를 일구는 손길과 발걸음으로 잇도록 눈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어떤 ‘팬덤’으로도 새길을 열지 못 한다. ‘좋은책(팬덤)’이 사라지고서 그저 ‘사랑책’과 ‘숲책’과 ‘아이곁책’과 ‘씨앗책’일 때라야 비로소 새길을 연다.


ㅍㄹㄴ


이 책은 70년대생으로서 가장 좌편향된 세대로 꼽히는 40대인 내가 왜 보수가 되었나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했습니다. (429쪽)


+


《73년생 한동훈》(심규진, 새빛, 2023)


정권의 탄압을 함께 겪어낸 브로맨스를 공유하고 있다

→ 나라가 눌러도 함께 두텁게 겪어내었다

→ 나라힘에 밟혀도 함께 겪어낸 바 있다

57쪽


판결을 너무 나이브하게 예단했던 것 아닌가 싶다

→ 판가름을 너무 물렁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 너무 어리숙하게 가리려 하지 않았나 싶다

60쪽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 가만히 구경해야 한다

→ 마음을 안 써야 한다

→ 흘려듣고 넘겨야 한다

437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초상, 개정판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3.30.

까칠읽기 64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한겨레출판

 1999.5.31.첫/2008.5.31.고침판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던 1999년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서울 이문동에서 ‘한겨레신문 나름이(배달부)’로 일했다. 새로 나온 책을 곧장 한국외대 구내서점에서 장만했고, 지국장님하고 나름이 여러 언니하고 돌려읽었다.


책을 다 읽은 우리 여섯 사람은 새벽일을 마친 아침자리에서 책수다를 폈다. 여섯 사람 모두 매우 아쉬웠다고 얘기했다. 왜 이렇게밖에 목소리를 못 내는지, 왜 아리송한 목소리가 있는지, 왜 삶으로 파고들지 않는지, 왜 프랑스에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밑자락 이웃을 바라보는 곳에 서지 않는지 아쉽다고 투덜투덜했다. 새벽일을 마친 땀나는 후줄근한 몸으로,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조그마한 신문사지국에서 달그락달그락 아침을 먹는 동안 주고받은 말이 2025년에도 선하다.


요즘은 사라진 듯한데, 예전에는 ‘한겨레신문 기자’로 뽑히면, ‘신문사지국’으로 한두 달, 또는 두어 달쯤 새벽 출근을 하면서 ‘신문배달 체험’을 시켰다. 아무리 〈한겨레신문〉이라 하더라도, 기자로 뽑히는 사람은 으레 여태껏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이 곱게 자란 얌전둥이”이게 마련이다. 대학교를 다닐 적에 학생운동을 했더라도 ‘집안일과 아기돌봄’을 해본 적이 있는 젊은이는 드물다. 그래서 하다못해 ‘새벽 신문배달’이라도 석 달 즈음 하라고 시키는데, 고작 석 달을 새벽에 돌리면서도 다들 지치고 힘들다고 혀를 내민다고 하더라.


그러나 새내기 신문기자가 힘들다고 하는 새벽 신문배달을 스무 해나 마흔 해를 거뜬히 해온 지국장과 총무가 있다.


1999년 늦봄에, 서울 이문동 한겨레신문 지국에서 우리 여섯 사람은 책수다 마무리를 이렇게 지었다. 지국장님이 한 마디로 갈무리를 해주었다. “홍세화 선생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겨레〉에 글을 쓴다면 신문배달 석 달쯤 해봐야지, 안 그래?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으면,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신문배달을 해야지. 서울에 와서 신문배달도 안 하고서 어떻게 서민을 안다고 할 수 있어? 새벽에 골목골목 돌면서 이웃집과 마을집이 어떻게 있는지 봐야 하지 않아?”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려면, 01시 무렵에 하루를 연다. 돌리는 새뜸이 적다면 03시 무렵에 하루를 열어도 되고, 부릉부릉 몬다면 04시에 하루를 열 수 있되, 꽤 늦다. 그러니까 새뜸나름이는 날마다 02시 무렵에는 하루를 열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 맡은 곳에 늦어도 05:30까지 새뜸을 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한 해 내내 이런 얼거리로 새벽을 연다면, 어느 곳에서 어느 일을 하든 엉큼하거나 못되거나 바보스런 짓을 아예 할 수 없다. 더구나 새벽일을 하는 사람은 막술은커녕 모금술도 섣불리 못 한다.


신문기자뿐 아니라, 소설과 시를 쓰는 사람도, 대통령과 장관도, 시장과 군수도, 두바퀴(자전거)나 두다리로 새벽을 열면서 새뜸나름이로 여러 달 일하는 나라라고 한다면, 얼뜬 짓은 없을 테고, 얼뜬 글을 쓸 일도 없으리라 본다. 스스로 땅바닥에 발바닥을 대면서 달리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 땅에 땀방울을 쏟으면서 어질게 일하는 사람으로 서면서 어깨동무를 찾아나설 테지.


ㅍㄹㄴ


이제 한국 땅에서 ‘보통사람’에 관한 신화는 사라져야 한다. 보통사람이 ‘위대한 한국’을 아무리 외쳐 봐야 한국이 위대해지지 않는다. 위대한 인물이 나와야 나라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아주 쉬운 산수 문제와 같다. (26쪽)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1주기를 맞아 기자회견을 했을 때 국무총리 이하 장관들이 함께 배석한 모습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모습이었다. (36쪽)


훈장을 단 사람에겐 훈장이 있을 뿐이다. 계급장을 단 사람이 계급장만 있는 것처럼, 속 빈 강정이 껍데기만 있는 것처럼, 사람이 발언하지 않고 상이 발언한다. 상에 경배하라. 권위를 숭배하라. 그리하여 소우주라 했던 인간은 간데 없고 상에 경배하고 권위를 숭배하는 강정이 되었다. (70쪽)


서울 평화상이 도대체 무엇인가?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자를 골라 서울시의 이름으로 상을 준다는 얘기겠다. 서울은 아직 평화의 이름으로 상을 줄 처지가 못된다. 제 앞가림부터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238쪽)


의식의 한쪽 날개가 애당초 찢겨 있고 대화와 토론의 장이 닫혀 있는 한국 땅에서 대중심리, 대중조작, 대중선동 그리고 지배적인 환경과 분위기에 멋모르고 휩쓸리는 바보 멍청이들이 양산된 게 사실이다. (289쪽)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정희 2 : 전쟁과 사랑 - 박정희朴正熙와 육영수陸英修의 연애 시절 박정희 시리즈 2
조갑제 지음 / 조갑제닷컴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3.30.

까칠읽기 62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조갑제

 조선일보사

 1998.10.28.1벌/2000.2.22.9벌



“다회용 젓가락”이라는 이름이 여러모로 안 어울린다고 느낀다. 젓가락은 예나 이제나 “오래오래 쓰는 살림” 가운데 하나이니까. “쓰고 버리는” 젓가락과 물그릇에 길든 눈인 분은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따지게 마련인데, 왜 저희랑 똑같이 안 구느냐고, 유난하게 구느냐고 따질 테지.


그래서 이때에는 거꾸로 “왜 애먼 젓가락을 오래오래 안 쓰고서 늘 버리고 또 버리셔요?” 하고 물을 만하다. 이렇게 되묻는 사람이 늘어야, “쓰고 버리기에 길든 분”이 조금이나마 틈을 낼 수 있다고 느낀다. 쓰고 버리기에 길든 사람이 오히려 ‘유난’한 굴레라고 바라보아야지 싶다.


“쓰고 버리기”에 길든 터전이라면, 사람도 똑같이 “쓰고 버리기”를 하게 마련이요, “두고두고 살림으로 건사하기”라는 터전이라면, 사람도 마을도 집도 숲도 곱게 돌보는 길로 나아간다고 느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1998년에 처음 나왔고, 2007년에 새판으로 나온 뒤에, 2015년에 《박정희》라고만 굵짧게 이름을 바꾸어서 “박정희 시리즈”라고도 덧이름을 붙인다. 문득 생각해 본다. 조갑제 씨는 왜 자꾸 ‘박정희’를 되살리려고 하는가? “다회용 젓가락”이라고 하는 뜬금없는 이름처럼, 왜 무덤에 침을 뱉지 말라 하면서 이렇게 높이높이 섬기려고 하는가?


여러모로 보면, 조갑제 씨는 ‘이씨 사내’만 임금 자리에 앉던 조선 무렵에 임금 곁에서 조아리던 벼슬아치 같다. ‘이씨 사내 임금’하고 ‘박정희’를 똑같이 바라보기 때문에, ‘임금님한테 티끌이나 얼룩이나 말썽이나 저지레나 잘못이 수두룩하다’고 하더라도, 모두 감추거나 숨기면서 ‘그쯤이야 있을 만하다’고 덮어씌운다고 느낀다. ‘임금님 잘못’을 마치 ‘임금님 보람(업적)’이라도 되는 듯 말바꾸기와 말치레를 하기까지 한다.


조갑제 씨는 “박정희는 소박(素朴)과 자주(自主)”라고 말하지만, 막상 “박정희는 소름과 자랑(자뻑)”이라고 말해야 알맞지 않을까? 박정희는 사람들이 소름이 돋도록 짓밟고 죽이면서,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박정희는 그이 스스로와 둘레 뭇사람이 뒷돈을 허벌나게 챙기도록 자리를 보아주면서 이 또한 자랑으로 삼았다.


이승만·박정희 무렵에도, 전두환·노태우 무렵에도, 그리고 박근혜·문재인·윤석열 동안에도, 똑같이 ‘나라도둑’이 철철 넘친다. 누가 우두머리에 앉든, 이 나라에 도둑이 수두룩하다. 도둑이 많기에 나라가 거덜나거나 흔들린다. 숱한 도둑이 뒷돈을 챙기느라 사람들이 홀쭉하다. 싸움붙이(전쟁무기)를 그토록 엄청나게 만들어내는데, ‘국방예산’이 얼마나 제대로 쓰이는지 누가 살필까? 아마 아무도 안 살필 뿐 아니라, 돌라먹기에 바쁘지 않을까?


조갑제 씨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쓰면서 ‘박정희 우상’을 세우고 싶었구나 싶은데, 오히려 이런 책을 썼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빈구멍과 저지레’를 더 널리 드러내 주었다고 할 만하다. 박정희는 왜 ‘백선엽·백인엽’ 뒤를 그토록 봐주면서 ‘인천 선인재단’이 인천을 통째로 집어삼키도록 밑밥을 깔아 주었는지 궁금했는데, 조갑제 씨가 쓴 글을 보고서 아주 잘 알아낼 수 있더라.


‘백선엽·백인엽’이 ‘전쟁영웅’인가? 뒤에 앉아서 작대기로 길그림을 척척 짚으면서, 여기에 몇 천 저기에 몇 천, 젊은사내를 총알받이로 내몬 우두머리가 어떻게 전쟁영웅일 수 있는가? 또한 두 백씨가 박정희를 등에 업고서 하던 막짓과 뒷짓을 보면, 군사독재정권 민낯을 더욱 훤히 읽어낼 수 있다. 서로 한통속이기에 이처럼 ‘우상숭배 경전’을 내놓아서 사람들을 홀려야 한다고 여기고야 만다.


ㅍㄹㄴ


박정희를 쓰면서 나는 두 단어를 생각했다. 소박(素朴)과 자주(自主). (10쪽)


IMF 관리 체제는 1988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10년의 비싼 대가(代價)였다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13쪽)


황민화 교육의 첨병을 양성하는 것이 설치 목적익도 했던 사범학교는 또한 군국주의 시대에 걸맞은 장교적 소양을 갖춘 교사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25쪽)


아리카와는 박정희를 “보쿠세이키, 보쿠세이키”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했다. 총검술을 가르칠 때는 박정희를 시범조교로 불러내었다. (52쪽)


박정희가 외래 사상이나 문화에 대해서 보여준 자주적인 자세의 출발점은 사물을 동양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려는 시각이었다. 그런 시각의 바탕에 깔린 것은 그가 대구사범 때 배웠던 한자 문화의 교양이었다. 그런 그가 한글 전용을 강행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뿌리로부터 단절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62쪽)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96쪽)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101쪽)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가 되었다. (117쪽)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만군(滿軍) 출신 장교들이 혼란스런 창군(創軍) 과정에 잘 적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원칙주의자들인 일군 장교 출신 장교들은 상황이 정상일 때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비정상일 때는 어리둥절해지는 반면 만주라는 혼란 상황에 익숙했던 만군 출신들은 오히려 요령과 임기응변을 잘 부리고 미군들과도 잘 사귀었다. (181쪽)


이때 박정희는 이현란 몰래 본처 김호남과 헤어지기 위해 이혼 수속을 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208쪽)


박정희를 살려 준 백선엽 육본 정부국장은 자상하게 그의 뒤를 봐주었다. 석방시킨 뒤에는 일 주일 동안 정양한 뒤 출근하도록 처리했다. 그 사이 백선엽 국장은 박정희 소령을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 냈다. (236쪽)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갔다. 일제 시대에 만든 수원청년훈련소에 정보국이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박정희가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 주는 것이 아닌가. 김 중위는 마음이 놓였다. “저분은 역시 북(北)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는 안도감.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 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283쪽)


위대한 민족 지도자 이승만의 생애에 있어서 서울과 시민 그리고 군인들을 버리고 몰래 한강을 건넌 뒤 다리를 끊은 이 행위는 일대 오점(汚點)으로 남게 되었다. (284쪽)


(1950년 대구·부산에서) 8월 어느 날 송 소위는 박정희에게 말을 건넨다. “과장님 왜 혼자 사십니까. 가족이 있어야 마음도 든든하고 위로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좋은 색시가 있어야지.” 송 소위는 외가 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란 색시를 소개했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만점인데 과장님이 보시면 만점이 될지, 영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그런 색시가 있느냐” 하는 정도였다. (309쪽)


박정희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다.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은 당시 준장으로서 부군단장이었고 육사 2기 동기생들은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동료들에 비해서 많은 나이와 낮은 계급은 현실에 대한 박정희의 불안을 구조화했다. (316쪽)


육종관은 집안을 왕국처럼 그리고 회사처럼 운영했다. 그는 소실을 데려다 놓고 놀고먹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4백 석을 생산하는 논밭일을 하는 데 소실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그 자신도 농사일에 참여했다. 장부 정리는 육영수의 몫이었다 … 어머니가 각기 다른 10여 명의 아이들과 섞여 살면서 육영수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분수와 품위와 영역을 지키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324, 325쪽)


평양은 12월 5일에 포기되었다. 평양이 고향이고 북진 때는 평양 돌입의 선봉장이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대동강 철교를 비롯한 평양의 중요 시설들이 모조리 폭파되고 대동강역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탱크 18대가 포 한 발 못 쏘아 보고 화염에 휩싸여 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생전에 내가 보는 평양의 마지막 모습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390쪽)


5·16 거사 직후 김시진은 반(反) 혁명 분자로 몰리고 있었다. 혁명 주체 김재춘이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말했다고 한다. “9사단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생선’이란 말이 ‘여자’를 가리킨다는 것도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이란 사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데려다가 씁시다.” (413쪽)


박정희 대령은 대구로 가는 길에 후방에 있던 김재춘 병참부장의 부대를 찾아갔다. 김재춘은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신(補身)을 시켜 주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415쪽)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조갑제, 조선일보사, 1998)


박정희를 쓰면서 나는 두 단어를 생각했다. 소박(素朴)과 자주(自主)

→ 나는 박정희를 쓰면서 두 낱말을 생각했다. 수수와 스스로

→ 나는 박정희를 쓰면서 두 낱말을 생각했다. 단출와 몸소

10쪽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 굵짧게 이야기했다

→ 한마디로 이야기했다

→ 그냥 이야기했다

101쪽


4백 석을 생산하는 논밭일을 하는 데 소실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 400섬을 낳는 논밭을 짓는데 꽃아씨도 일하여야 했다

→ 400섬을 얻는 논밭을 짓는데 버금각시도 일하여야 했다

324쪽


모여 앉은 사람들은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깔깔거렸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너털웃음이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활짝웃음이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함박웃음이다

412쪽


김시진은 반(反) 혁명 분자로 몰리고 있었다

→ 김시진은 거꿀이로 몰렸다

→ 김시진은 거스른다고 몰렸다

413쪽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신(補身)을 시켜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북돋아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살찌워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살펴 주고

415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