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 육아에 무너진 여자를 일으킨 독서의 조각들
김슬기 지음 / 웨일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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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11.20.

까칠읽기 105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김슬기

 웨일북

 2018.6.15.



온누리 모든 어른은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라는 나날을 누렸다. 어른인 우리를 기꺼이 낳아서 돌본 어버이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이곳에 설 수 없다. 다만, 우리를 낳은 모든 어버이가 어질거나 슬기롭거나 참하거나 착하지는 않다. 쓸개빠진 이도 있고, 주먹을 휘두른 이도 있고, 막짓을 일삼은 이도 있다. 그런데 얼뜬 모든 어버이도 처음에는 아기였고 아이로 자랐다.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살다가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는 자리에 새롭게 서는 사람이라면, 몇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간다. 첫째,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한 짓 그대로 되풀이한다. 둘째,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한 짓을 찬찬히 짚고서 모두 털어내고 씻어내어 사랑을 그린다. 셋째,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베푼 사랑을 고스란히 물려준다. 넷째,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베푼 사랑을 새롭게 북돋아 우리 아이뿐 아니라 모든 아이하고 나눈다.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를 곰곰이 읽었다. 글쓴이는 ‘아이 엄마’하고 ‘어버이’라는 이름을 버거워하는데, 그렇다면 ‘어른’이라는 이름도 버거울 듯싶다. 아직 ‘아이’로 머물고 싶기에 ‘엄마·어버이·어른’ 모두 안 바라보려는 듯하다고 느낀다. 스스로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그대로 여러 이름을 새로 받게 마련인데, 스스로 나아갈 길과 살림을 안 바라보려고 하면 ‘나’라는 이름도 바라볼 수 없다.


아기인 나를 받아들여야 태어난다. 아이인 나를 받아들여야 자란다. 어른인 나를 받아들여야 배우고 익히며 나누고 가르친다. 어버이인 나를 받아들여야 사랑을 깨달으려고 눈뜨는 하루를 살아내고 살림을 짓는다. 아기요 아이에 어른이자 어버이인 나를 알아차리면 ‘어머니’나 ‘아버지’ 가운데 하나를 품을 수 있고, 이제부터 스스로 하늘빛을 품느냐 못 품느냐에 따라서 ‘한어버이(할머니·할아버지)’가 되거나 ‘늙은이’가 될 수 있다.


책마루로 숨기에 나쁠 일이란 없다. 숨어서 지내는 틈을 누릴 노릇이다. 아니, 집일과 집살림을 곁님한테 통째로 맡기고서 달포나 이태쯤 집을 비워도 된다. 아니, ‘어버이요 아버지이자 어른’이라는 이름을 짝꿍이 제대로 못 바라보고 못 받아들일 적에는, 여러 해쯤 집을 비우고서 홀로서기를 하면 된다. 짝꿍(사내)도 스스로 부딪히고 벼랑끝에 서면서 깨달을 틈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어버이 가운데 어머니 쪽은 아버지한테 끝없이 일을 맡기고 시키고 얘기해야 한다. 이때에 잔소리라 여긴다면 집을 나오면 된다. 이 모든 잔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사랑소리인 줄 알아채고 받아들일 때까지 쉬잖게 일을 맡기고 시키고 얘기할 노릇이고, 이렇게 살림을 하다 보면, 어머니 쪽도 아버지 쪽도 ‘어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스스로 어떤 이름인지 안 바라보고 안 받아들일 적에는 ‘나’부터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보기’가 아닌 ‘나만 보기’를 하느라, 한자말로 하자면 ‘자아도취’에 사로잡힌다.


ㅍㄹㄴ


아이를 낳기 전까지, 엄마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의 나는 자아도취형 인간이었다. (16쪽)


나는 더 이상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기 시작했다. (23쪽)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보편성은 얼마나 무서운가. 엄마라는 말이 가진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해서, 내가 엄마가 되는 순간 ‘나’라는 인간이 갖고 있던 개별성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라는 한 사람인데,. (50쪽)


나는 갈등 자체를 회피했다. 이보가 예민할 수 없는 사춘기 여학생들의 감정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62쪽)


이 작은 아이의 ‘살아 있어’는 이렇게 펄떡펄떡 생기가 넘치는구나. 그럼 나는? 나의 ‘살아 있어’는 뭘까? (84쪽)


나는 늘 작가들을 동경했다. 뛰어난 글을 읽으며 감탄한 뒤에는 ‘나는 이렇게 쓸 수 없다’는 절망감과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에 휩싸였다. (88쪽)


하지만 지치고 고단한 나에겐 화풀이의 대상이 필요했다. (123쪽)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김슬기, 웨일북, 2018)


한 아이의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 아이 엄마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

→ 아이 엄마는 어떻게 사는지

→ 아이 엄마란 어떤 삶인지

5쪽


그때의 나에게 간절했던 건 오롯이 나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시간과 비좁은 공간이었다

→ 그때 나는 오롯이 혼자 지낼 틈과 작은 곳에 목말랐다

→ 그때 나는 오롯이 혼자 있을 짬과 작은 곳을 빌었다

→ 그때 나는 오롯이 혼자 머물 겨를과 작은 곳을 바랐다

7쪽


책모임을 시작한 건 같은 해의 가을이다

→ 책모임은 그해 가을부터 한다

12쪽


그럭저럭 괜찮은 날이 많아졌다

→ 그럭저럭 보낸 날이 는다

→ 그럭저럭 산 날이 늘어난다

13쪽


육아에 지칠 때마다 남편에게 열변을 토하며 내뱉은 넋두리다

→ 아이한테 지칠 때마다 짝한테 내뱉은 넋두리다

→ 아이 돌보며 지칠 때면 곁님한테 내뱉은 넋두리다

39쪽


불안 역시 피할 수 없는 기제로 작동한다

→ 걱정도 떨칠 수 없다

→ 근심도 버릴 수 없다

→ 걱정도 안 할 수 없다

→ 근심도 꼭 한다

66쪽


나의 일, 나의 길은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내 일과 길은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그만둬야 하거나 그만둘 수 있지도 않다

→ 나는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일과 길을 끝내야 하거나 끝낼 수 있지도 않다

94쪽


이런 일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의미를 생각했다

→ 이런 일에 숨은 숱한 뜻을 떠올렸다

→ 이런 일이 무슨 뜻인지 곱씹었다

101쪽


나를 알기 위해, 내 주변의 사물을 알기 위해,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속의 역사를 알기 위해 반짝이는 눈으로 질문을 던지는 아이를 보며

→ 나를 알려고, 둘레를 알려고, 온누리와 내가 없던 지난날을 알려고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 아이를 보며

→ 나와 둘레와 온누리를 알려고, 또 내가 없던 어제를 알려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아이한테

203쪽


소멸의 계절 겨울을 지나

→ 잠드는 겨울을 지나

→ 사위는 겨울을 지나

228쪽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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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세계 십 대와 사회를 연결하다 2
최진우 지음, 도아마 그림 / 리마인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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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11.19.

까칠읽기 75


《숲이라는 세계》

 최진우 글

 도아마 그림

 리마인드

 2024.1.2.



‘십대와 사회를 연결하다 2’로 나온 《숲이라는 세계》이고, 푸른씨한테 숲을 들려주려는 얼거리는 눈여겨볼 만하다. 그렇지만 숲을 숲에서 바라보지 않으니, 숲을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까? 풀이나 나무가 우거져도 풀숲에 나무숲이고, 사람이 우글우글해도 사람숲이라 이른다. 그렇지만 서울이라고 하는 곳은 숲을 짓밟고 억누르며 죽이면서 세운 잿터이지 않은가. 서울에서도 잿더미(아파트)는 그야말로 들숲메를 깡그리 팽개치면서 죽이는 곳이기도 하다. 웬만한 시골(군 단위)보다 사람이 많이 살아가는 잿마을(아파트단지) 하나인데, 이 잿마을을 먹여살리고 돌보려고 밥·물·빛(전기)을 얼마나 많이 끌어들여야 하는가? 잿마을에 나무 몇 그루를 심은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흔 해 즈음 된 잿더미를 허물고 다시짓기를 할 적에 나무를 죄 베어서 죽이는 판이다. 나무부터 고스란히 살리는 다시짓기란 아예 없다고 할 만하다.


푸른씨한테 숲을 숲으로 이야기하자면, 글쓴이부터 숲이나 시골에서 살아야 맞다. 먼저 숲을 넓고 깊게 품으면서 풀과 꽃과 나무가 무엇인지 속삭여야 한다. 풀꽃나무한테 깃드는 풀벌레를 동무하면서 풀벌레가 사람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받아적어야 한다. 풀꽃나무하고 함께살기를 이루는 숱한 새(텃새·철새)가 사람한테 알려주고 싶은 바를 곰곰이 듣고서 찬찬히 옮겨야 한다.


숲을 다루는 책이지만 정작 ‘숲말’을 안 쓰고서 ‘서울말(일본말씨인 전문용어)’만 잔뜩 늘어놓은 대목도 안타깝다. “일정한 녹지 면적을 갖추어야 합니다”라든지 “현재 아파트에 조성된 숲은 도시공원 못지않게 시민들의 중요한 녹지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같은 글자락은 차갑고 매캐한 서울말에 갇힌 보기이다. ‘숲·들숲·멧숲·푸른숲·들빛·숲빛·푸르다·푸른터·푸른길·푸른살림’ 같은 낱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채 부스러기(전문지식)에 얽매인다면, “숲이라는 길”하고는 그저 멀 뿐이다. 숲이라는 길을 함께하려면 스스로 숲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숲살림을 품고 숲사랑을 펴는 하루를 일구는 동안 익힌 숲말을 숲마음으로 들려줄 노릇이다.


나무와 사람은 다르기에, 나무는 사람처럼 안 움직인다. 나무가 사람처럼 안 움직인다고 해서 나무가 “안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나무는 새나 벌레를 꾀지(유혹) 않는다. 나무랑 새랑 벌레랑 나비랑 벌이랑 그저 ‘함께살기’를 이룬다. 소나무와 느티나무는 꽃이 작거나 수수할 뿐이다. 솔꽃과 느티꽃을 “화려하지 않은 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푸른씨한테 푸른숲을 들려주려는 뜻은 훌륭하더라도, 먼저 푸르게 살아가고 푸르게 말하고 푸르게 생각하고 푸르게 노래하는 오늘부터 지을 일이라고 본다. ‘목소리를 담을’ 책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는지 담을’ 책으로 거듭나기를 빌 뿐이다.


ㅍㄹ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단지를 건설하려면 법적으로 일정한 녹지 면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법 덕분에 아파트에 심어진 나무들이 시간이 흘러 숲으로 변모할 수 있었습니다. 2020년 기준 경기도의 공동주택단지 녹지의 총면적은 경기도 도시공원 면적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현재 아파트에 조성된 숲은 도시공원 못지않게 시민들의 중요한 녹지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66쪽)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적정한 토양과 뿌리의 생장을 위해 충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나무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보도에 띠 형태의 녹지대를 조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수분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빗물 저장 및 공급 시스템을 확충해야 합니다. (82쪽)


이처럼 나무는 움직일 수 없기에 번식을 위해서 곤충이나 야생동물을 유혹해야 합니다. 그러나 버드나무와 은행나무의 경우에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고, 야생동물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수분이 이루어집니다. 꽃이 화려하지 않은 소나무와 느티나무도 바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94쪽)


+


《숲이라는 세계》(최진우, 리마인드, 2024)


나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르는 게 많습니다

→ 나무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정작 잘 모릅니다

→ 나무를 잘 안다고 보지만, 막상 모르기 일쑤입니다

6쪽


이 책을 통해 자연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우리의 태도와 역할을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 이 책을 읽고서 숲과 함께하는 길과 몫을 헤아려 보기를 빕니다

→ 이 책을 읽으며 푸르게 어울리는 삶을 함께 헤아려 봅시다

→ 이 책과 함께 숲빛을 헤아려 보기를 바랍니다

7쪽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는 우림(雨林)이 발달하기도 하고

→ 비가 잦은 곳에는 비숲이 우거지고

→ 비가 많이 내리면 나무숲이 짙고

14쪽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생명의 나무’로 불립니다

→ 숲살림을 잇는 노릇을 하여 ‘살림나무’라고 합니다

→ 숲살이을 가누는 몫을 하여 ‘푸른나무’라고 합니다

18쪽


아파트에 심어진 나무들이 시간이 흘러 숲으로 변모할 수 있었습니다

→ 잿더미에 심은 나무가 오래되면 숲이 될 수 있습니다

→ 잿집에 심은 나무도 한참 지나면 숲을 이룹니다

66쪽


현재 아파트에 조성된 숲은 도시공원 못지않게 시민들의 중요한 녹지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오늘날 잿마을에 가꾸는 숲은 쉼터 못지않게 푸른터로 여깁니다

→ 요즈음 잿집에서 돌보는 숲은 쉼터 못지않게 풀빛터로 삼습니다

66쪽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적정한 토양과 뿌리의 생장을 위해 충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 나무가 잘 자라려면 흙이 기름지고 뿌리가 뻗을 틈이 있어야 합니다

→ 나무가 잘 자라려면 흙이 살지고 뿌리가 뻗을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82쪽


나무가 수분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빗물 저장 및 공급 시스템을 확충해야 합니다

→ 물이 메말라 나무가 힘들지 않도록 빗물을 받아서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 나무가 메마르지 않도록 빗물을 받아서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82쪽


야생동물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수분이 이루어집니다

→ 들짐승이 아니라 바람이 가루받이를 합니다

→ 들짐승 말고 바람이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94쪽


꽃이 화려하지 않은 소나무와 느티나무도 바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 꽃이 조그마한 소나무와 느티나무도 바람받이를 합니다

→ 꽃이 수수한 소나무와 느티나무도 바람받이꽃입니다

9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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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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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11.18.

까칠읽기 102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17.11.21.



  마치 안 읽으면 안 된다는 듯이 이곳저곳에서 《이상한 정상가족》을 추켜세웠지만, 이 모든 추킴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나서 차분히 읽어 보았다. 다른 숱한 ‘인문책’과 마찬가지이니, 온통 뒤틀리고 비틀린 이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여러 보기를 바탕으로 걱정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얼거리이다. 그렇다면 “안 이상한 안 정상가족”이란 무엇인가? 어느 무렵부터 우리나라 ‘인문책’은 새길(대안)은 아예 없이 목소리(정의로운 주장)만 높인다. 남이 일구는 새길을 안 찾아보기 일쑤일 뿐 아니라, 스스로 어떤 새길을 가꾸는지도 안 담는다. 그저 ‘남탓’과 ‘남삶’만 길게 늘어놓는다.


  ‘이상·정상·가족’은 모두 일본말이다. 우리말이 아니다. ‘이상가족’이나 ‘정상가족’도 그냥 일본말이다. 우리는 먼 옛날 옛적부터 수수하게 ‘집’이라고만 했다. 경남과 전라 시골에서는 수수한 집을 일구는 사람들이 서로 일컬을 적에 ‘이녁’이라 부르곤 한다. 전라남도 시골에서는 ‘지비(집이)’라 부른다. 한자로 ‘택(宅)’이 있으나, 손수 온살림을 지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쓰고 나눈다.


  집이란 어떤 곳인가? 집은 “짓는 곳”이다. 안 짓는다면 집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짓는 곳인 집”이 아닌 “사고파는 값(부동산)인 늪”이게 마련이다. 서울뿐 아니라 시골마저 ‘집’이 아닌 ‘값’으로 치는 데가 늘어나고 퍼진다. 집에서는 ‘지내다’라는 낱말을 쓴다. 하루를 지으면서 살아내기에 ‘지내다’이다. 집은 쉬는 곳이기만 하지 않다. 집에서 모든 삶과 살림과 사랑을 지어온 이 나라요 수수한 사람들이다.


  왜 “이상한 정상가족”이건 “정상인 이상가족”이건 말장난 같은 일본말로 이 나라를 가리킬 만한지 곱씹을 노릇이다. 우리는 엉터리 나라이기 앞서 “엉터리 하루살이”를 한다. 집을 집이 아닌 값으로 후려치면서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무너진 집”으로 뒤바뀔 수 있다. 으리으리하거나 비싸거나 널따랗기에 ‘집’이지 않다.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집살림과 집일을 온집이 함께하기에 비로소 ‘집’이다. 책쓴이쯤 된다면 예부터 ‘집’이란 무엇인지 밝히고 ‘집’이라는 우리말이 무슨 뜻인지 똑바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짓고 지내며 즐겁기에 즈믄해를 잇는 곳”이라서 집이라고 한다.


ㅍㄹㄴ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해롭다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36쪽)


의무교육조차 시키지 않는 교육적 방임은 심각한 아동학대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확고했더라면 그 아이들이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당했을까. (61쪽)


나는 아동인권단체에서 일하면서도 한동안은 입양의 여러 문제점을 잘 몰랐다. (144쪽)


2017년 대선에서 쟁점이 됐던 기초생활수급제의 부양의무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 허울뿐인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해 극빈층으로 전락하거나, (172, 173쪽)


애초에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보편적 아동수당이 국회에서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되면서 선별 지급으로 후퇴한 것이다. (241쪽)


+


《이상한 정상가족》(김희경, 동아시아, 2017)


부양의무제로 인한 부작용이 많은데도 이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이유는

→ 살림몫 탓에 골칫거리인데 이 틀을 걷어내지 않는 까닭은

→ 삶몫 때문에 말썽거리인데 이 얼개를 치우지 않는 뜻은

173쪽


가족 내 문제로 치부하기 마련인 사안에서

→ 집안일로 여기게 마련이어서

→ 집에서 풀 일로 삼게 마련이어서

22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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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히치하이커 - 제4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 작품집 사계절 1318 문고 117
문이소 외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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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10.23.

까칠읽기 101


《마지막 히치하이커》

 문이소·남지원·은이결·민경하

 사계절

 2018.11.23.



《마지막 히치하이커》는 ‘SF문학상’을 받은 글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은 ‘SF’라지만, 무엇이 ‘SF’인지 하나도 알 길이 없다. ‘로봇·인공지능’을 내세우면 ‘SF’인가? 요새는 ‘AI’를 끼워넣는데, 이런 글감이나 얼거리를 짜더라도 정작 다루는 줄거리는 ‘지치는 집·학교’에 갇힌다. 아무리 로봇이 어쩌고 인공지능이 저쩌고 읊더라도 집에서 괴롭고 학교에서 시달리는 얼거리에 사로잡히면, ‘SF’를 흉내내는 푸념일 뿐이다. ‘SF’라는 옷을 입힌 하소연이기도 하다.


푸념과 하소연이 나쁠 까닭이 없다. 괴로우며 푸념을 하고, 시달리니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글에 왜 푸념과 하소연을 채워야 하는지 헤아려 보자. 어린이를 걱정하기에 어른으로서 같이 푸념과 하소연을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다 안다”는 마음으로 푸념과 하소연을 글에까지 얹는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바꾸어 갈는지 그리지 않는다면, ‘생활문학’도 ‘SF’도 ‘어린이문학’도 ‘어른문학’도 아니다. 그저 겉치레에 허울이다. 이름만 내세워서 목소리를 높이면 ‘문학’이 아니라 ‘주의주장’이다. 이른바 ‘신문 사설’하고 무엇이 다른가.


글을 쓰려면 먼저 마음을 가꿀 노릇이다. 마음을 가꾸려면 먼저 삶을 지을 노릇이다. 삶을 지으려면 먼저 집에서 보금자리를 일구는 살림꾼으로 든든히 설 노릇이다. 집부터 사랑으로 돌보는 하루를 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럼없이 말과 글을 사랑으로 펼 수 있고, 이때에는 저마다 살아온 나날을 저마다 다른 글감과 갈래에 맞추어 얼마든지 글꽃을 지피게 마련이다. 글은 안 쓰거나 나중에 쓰면 된다. 먼저 삶부터 일구고 살림꾼으로 서는 하루를 지은 뒤에, 이러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익히고서, 느긋이 붓을 쥐어야 ‘글’이 된다.


ㅍㄹㄴ


서창수네 엄마는 몰리오를 보자 ‘아, 저거요? 작년에 좀 유명했는데 이젠 한물갔죠.’라며 아는 척을 했다. (19쪽)


“하아…… 아저씨, 우리 아빠가 대전 지방 경찰청 강력2반 형사라서 좀 아는데요, 아저씨가 저한테 막 소리 지르고 겁주고 이러는 거 다 아동학대예요. 그리고 승차거부. 뭐 그런 것도 신고하라던데? 아빠한테 물어봐야겠다.” (23쪽)


+


《마지막 히치하이커》(문이소·남지원·은이결·민경하, 사계절, 2018)


사람처럼 말하는 걸 배우는 데 특화되었거든요

→ 사람처럼 말하기를 잘 배우거든요

→ 사람처럼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는걸요

15


몰리오의 다리는 돌무더기에 파묻혀 있었다

→ 몰리오는 다리가 돌무더기에 파묻혔다

15


사람들한테 배운 대로 하는 건데요

→ 사람들한테서 배운 대로 하는데요

16


서창수는 자기 엄마아빠랑 똑같이 공부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다

→ 서창수는 저희 엄마아빠랑 똑같이 좀 안다고 사람을 따돌린다

→ 서창수는 엄마아빠처럼 좀 배웠다고 사람을 괴롭힌다

18


먼저 히치하이킹을 했던

→ 먼저 잡아타던

→ 먼저 함께타던

→ 먼저 얻어타던

31


편집부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엮음터 지기님도 고맙습니다

→ 엮어 주신 분도 고맙습니다

→ 엮으신 분한테도 절을 올립니다

35


혀에 강렬한 통각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 혀가 찌릿합니다만

→ 혀가 아립니다만

→ 혀가 아픕니다만

42


잿빛 어둠 속에서 아홉 개의 가지가 불타고 있는 나무였다

→ 잿빛으로 어두운데 아홉 가지가 불타는 나무이다

49


서동팔 씨는 내 아빠다

→ 서동팔 씨는 아빠다

→ 울 아빠 서동팔 씨다

69


이런 경우, 백발백중 엄마가 아빠의 등짝을 찰싹

→ 이럴 때 바로 엄마가 아빠 등짝을 찰싹

→ 이러면 냉큼 엄마가 아빠 등짝을 찰싹

71


춤을 보는 내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 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90


동사하기 5초 전 집에 들어섰을 때, 거실 가운데 선 엄마는 눈물로 세수를 하고서

→ 얼어죽을 뻔하다가 집에 들어서니 엄마는 마루에서 눈물범벅이고

→ 얼어죽겠다가 집에 들어서니 엄마는 마루에서 눈물바람이고

→ 꽁꽁 언 채 집에 들어서니 엄마는 마루에서 눈물을 흘리고

128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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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주의 선언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12
코린 펠뤼숑 지음, 배지선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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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9.17.

까칠읽기 99


《동물주의 선언》

 코린 펠뤼숑

 배지선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9.8.23.



‘숨결(생명)’을 보려면, 먼저 “‘나’는 어떤 숨결인가?”부터 들여다보면서 “‘나’를 둘러싼 ‘너’는 어떤 숨결이지?”를 나란히 바라볼 노릇이다. 나하고 너가 언제나 다르면서 하나인 몸마음인 줄 알아본다면, 어떤 숨결을 놓고서도 고스란히 헤아리면서 품을 수 있게 마련이다.


《동물주의 선언》을 읽는 내내 왜 이렇게 ‘우리말’을 안 쓰고 ‘일본말·옮김말’에 갇히나 싶어 아리송하다. 나란길(평등권)을 바라는 마음이라면 언제나 이 나라 누구나 어깨동무하면서 쉽게 읽을 만한 말글로 가다듬을 노릇이다. 말글부터 나란길이 아닐 적에는 으레 위아래로 가르고 만다.


모름지기 ‘글’이 아닌 ‘말’로 살아가며 살림하던 온누리 뭇사람은 ‘동물권·평등권’ 같은 일본한자말을 몰랐어도 서로 어깨동무하는 하루였다. 더구나 사람으로서 목숨을 이으려고 ‘먹을’ 적에도 짐승뿐 아니라 풀과 열매도 함부로 거두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이을 만큼 알맞게 다루고 품는 살림길이었는데, 나라(정부)가 서고서 벼슬자리가 늘고 임금붙이가 생길 무렵부터 이 모든 살림길이 흔들렸다.


조금만 짚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벼슬아치와 임금붙이는 손에 물도 흙도 안 묻힌다. 그들(벼슬아치·임금붙이)이 사내이건 가시내이건 똑같다. 그들(권력자)은 해바람비를 등지면서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었는데, 그들은 우리(살림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림꾼은 살림하는 대로 가려서 먹는다.


숨결(감수성)이 없는 목숨은 없다. 짐승만 숨결이 있지 않다. 벼와 밀한테도 숨결이 있다. 능금과 배한테도 숨결이 있다. 그대가 쌀알 한 톨을 짓밟으면 쌀알이 안 아프겠는가? 그대가 밤새 불을 켜놓으면 벼나 나무가 멀쩡한가? 아니다. 모든 풀꽃나무도 해바람비를 반길 뿐, 등불을 밝혀서 잠을 안 재우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동물권·동물주의’에다가 ‘식물권·식물주의’를 나란히 놓으면 “그럼 뭘 먹으란 소리예요!” 하고 외치거나 따질 수 있겠지. 그런데 ‘뭇숨결(동식물)’은 참말로 뭇숨결인 줄 알고서 먹을 노릇이다. 풀짐승한테 뜯기는 풀은 풀짐승을 미워하지 않는다. 고기짐승한테 잡아먹히는 풀짐승은 고기짐승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 이어갈 뿐이다. 풀짐승이 먹은 풀은 풀짐승을 이루고, 풀짐승을 먹는 고기짐승은 ‘풀짐승이 먹은 풀빛’이 어느새 스미면서 고기짐승이라는 몸을 이룬다. 이윽고 고기짐승이 몸을 내려놓고서 흙으로 돌아가면, 흙은 ‘고기짐승 뼈와 살과 가죽’을 개미와 지렁이와 굼벵이와 버섯과 쥐며느리에 갖은 잔숨결을 거쳐서 새흙으로 돌려보내니, 풀꽃나무는 새삼스레 무럭무럭 자란다.


풀꽃나무는 ‘시든 잎’과 ‘떨어진 열매’도 다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죽은 짐승 몸뚱이’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온누리 숨빛은 나란히 돌고돈다. 높거나 낮은 길이란 없이, 낫거나 나쁜 밥살림이란 없이, 그저 서로서로 몸과 숨결을 바꾸면서 흐른다.


《동물주의 선언》은 나쁜책은 아닐 테지만, ‘동물주의·동물권’에 너무 얽매이는 나머지 ‘풀꽃나무’한테는 마음(감수성)이 아예 없다고 몰아붙인다. 터무니없다. 왜 이렇게 외쳐야 하나? 사람도 짐승도 풀꽃나무도, 돌과 모래와 흙도, 다 다르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아보려고 하지 않으면, 그들(권력자)하고 똑같을 뿐이다.


벼와 밀을 비닐집이나 유리집에 가두어서 키울 수 있을까? 어림조차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박이며 상추이며 딸기이며 토마토이며 무화과에 유자까지 비닐집에 가두어서 꼭짓물(수돗물)을 먹이고 기름(석유)을 때서 겨울나기를 한다. ‘공장축산’일 뿐 아니라 ‘공장농업’이라는 굴레를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들빛(동물권)을 제대로 못 짚는다. 들빛이란, 사람과 짐승과 풀꽃나무가 몸만 다른 얼개일 뿐, 마음도 숨결도 나란히 하늘빛이라는 대목을 알아보고 받아들여서 함께 반짝이는 별로 피어나려는 길일 노릇이다.


ㅍㄹㄴ


인간은 동물이 ‘감수성’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동물을 도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섬세함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15쪽)


식물 역시 편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감수성’을 가진 존재만이 편견의 피해를 개별적이고 주체적으로 겪는다. 감수성은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자아실현의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강제된 삶의 조건에 대한 저항, 즐거움, 협력의 의지,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식물에 관해서도 존중을 말해야 하지만 동물과 사람의 권익이 침해되는 것은 정의의 측면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키므로 동물과 사람이 실질적인 권리를 갖도록 촉구해야 한다. (65쪽)


푸아그라는 집오리나 거위에게 3주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양의 먹이를 억지로 먹인 결과로 만들어진 병든 간이다. 자연상태에서 오리나 거위는 장기 비행을 하기 전에 자연스런 방법으로 살을 찌우는데, 당연하게도 비행에 적합한 정도로만 절제한다. (109쪽)


#CorinePelluchon #Manifeste Animaliste (2017년)


+


《동물주의 선언》(코린 펠뤼숑/배지선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9)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 사람과 짐승 사이는 사람이 어떤 숨결인지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

→ 사람과 얽히는 짐승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10쪽


반려동물이 버려지고, 동물 보호소는 가득 차 넘치며

→ 곁짐승을 버리고, 들돌봄터는 가득하며

→ 벗짐승을 버리고, 들돌봄울은 차고 넘치며

11쪽


나와 타자를 구별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동일시하는 연민은 타자를 외형에 따라 종, 종류, 공동체로 분류하지 않고 다 같은 생명체로 인식한다

→ 나와 너를 가르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남을 겉모습에 따라 씨·갈래·무리로 가르지 않고 다같이 숨결로 여긴다

12쪽


연민이 없는 정의로움은 가능한가

→ 불쌍히 안 보며 곧을 수 있나

→ 딱하게 안 보며 바를 수 있나

17쪽


공장식 축산의 과정에서 동물은 오직 하나의 기능만 수행하도록 강요받는다

→ 짐승은 가두리에서 오직 한 가지 쓰임새이다

→ 짐승가두리는 오직 한 가지만 바라본다

→ 짐승을 몰아놓는 곳에서는 오직 한 가지로 다룬다

22쪽


종차별반대주의antispeciesism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서 비롯된 말이다

→ 나눔씨는 먼저씨란 말에서 비롯하였다

→ 나란씨는 앞씨란 말을 보며 지었다

→ 함께씨는 웃씨란 말 때문에 엮었다

→ 같이씨는 으뜸씨란 말과 맞물린다

→ 이웃씨는 꼭두씨란 말과 마주한다

27쪽


자연상태에서 오리나 거위는 장기 비행을 하기 전에 자연스런 방법으로 살을 찌우는데, 당연하게도 비행에 적합한 정도로만 절제한다

→ 들숲에서 오리나 거위는 오래 날기 앞서 차근차근 살찌우되, 날기 알맞게 먹는다

→ 들오리나 들거위는 오래 날기 앞서 천천히 살을 찌우되, 날 수 있을 만큼 먹는다

109쪽


동물에게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데 있어 앞장서는 국가는 경제적인 면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고 번영할 것이다

→ 짐승을 올바로 헤아리려는 나라는 살림살이를 비롯해 모든 곳에서 피어난다

→ 짐승을 곧게 살피려는 나라는 살림살이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발돋움한다

122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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