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50. 나락서점



  인천에서 나고자라고서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지내던 2003년 여름 무렵까지는, ‘나락’이라고 하면 으레 한자말 ‘나락(那落)’부터 떠올렸습니다. 2003년 가을부터 시골에 깃들면서 일터와 삶터를 바꾼 뒤로는, 누가 ‘나락’이라고 하면 ‘씨나락’이며 ‘나락베기’부터 떠올립니다. 살아가는 터가 다르면, 살아가는 말이 바뀝니다. 살림하는 자리가 어디에 따라서, 살림을 그리는 말이 다릅니다. ‘나락’은 ‘낟알’을 가리킵니다. ‘낱’으로 있는 ‘씨알’이라서 ‘낟알’이요 ‘나락’입니다. ‘씨나락’은 올해에 거두어서 이듬해에 심을 ‘볍씨’로 삼는 알입니다. 또는 지난해에 거두어서 올해에 심을 볍씨인 낟알입니다. 부산에 마을책집 〈나락서점〉이 있습니다. 왜 ‘나락’이라는 이름일는지 아직 여쭈지 않았습니다만, 벼랑끝에서 아슬아슬하거나 힘겹거나 두려운 누구나 이곳에서 나긋나긋 마음을 달래면서 품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곱씹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시골내기로 살아가는 터라 ‘나락’을 ‘낟알·씨나락’으로 느껴요. 올 한 해 푸짐하게 누리는 들빛인 낟알처럼, 이듬해에 새롭게 심어서 돌볼 낟알마냥, 우리는 누구나 씨앗 한 톨이니, 스스로 마음에 책이라는 낟알 한 톨을 심으면서 새롭게 피어나고 깨어나는 길을 찬찬히 나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헤아려 봅니다. 책집지기님은 다른 뜻과 숨결로 책집에 이름을 붙였을 테지요. 나중에 책집마실을 새롭게 하면 그때 여쭈기로 하고, 부산 문현동 마을책집을 그리고 기리는 글을 끄적끄적 적습니다.



나락서점 (부산)


벼랑끝에 서면 무서워

그러나

네가 날 벼랑끝으로 몰면

나는 늘 별밭을 바라본다


낭떠러지 옆은 두려워

그런데

내가 널 낭떠러지로 밀면

넌 으레 나긋이 웃더라


벼락치는 밤에 눈 번쩍 떠

쭈뼛쭈뼛 머리카락 설 때면

비바람에 그저 춤을 추는

가늘며 곧은 벼포기 떠올려


볍씨 한 톨은 한몸 내놓고는

숱한 낟알 푸지게 이루더라

씨나락이란 살리는 씨알같아

나무처럼 나로 서는 낱인걸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노래꽃/우리말 동시사전

시를 씁니다 ― 49. 벌



  벌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더는 꿀을 못 누립니다. 벌이 사라지기에 열매를 못 맺거나 씨앗을 못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벌이 베푸는 꿀을 아무도 못 누리고 말아요. 푸나무는 어떻게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길까요? 바로 ‘나비·나방’으로 날개돋이를 하는 ‘애벌레’가 있거든요. 모든 풀과 나무에는 풀잎과 나뭇잎 한 가지만 갉는 애벌레가 깃들고, 이 애벌레는 잎갉이를 하면서 허물벗기를 잇다가, 풀이며 나무가 꽃을 피울 즈음이면 고치를 틀어서 깊이 잠듭니다. 한참 꿈길에서 몸을 뜨겁게 녹인 애벌레는 마침내 옛몸을 내려놓고서 날개와 더듬이와 눈과 발과 꼬리를 갖춘 새몸으로 거듭나요. 이러고서 푸나무 둘레를 가볍게 바람을 타며 날갯짓으로 누비고, 가만히 꽃가루받이를 하면서 꽃꿀을 처음으로 누리며 기뻐하다가 짝을 맺고는, “그동안 잎갉이를 하던 푸나무” 잎에 알을 낳아요. 나비는 벌처럼 꽃가루받이를 잔뜩 하지 않되, 풀과 나무가 알맞게 낟알이며 열매를 맺고서 씨앗을 남길 만큼 꽃가루받이를 돕습니다. 푸나무로서는 애벌레랑 나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애벌레는 새가 알맞게 잡아서 “지나치게 안 늘도록 다스립”니다. 오늘날 풀죽임물(농약)과 죽음거름(화학비료)과 죽음켜(비닐) 세 가지를 끔찍하도록 잔뜩 쓰느라 애벌레가 확 사라졌고, 애벌레가 확 사라지며 새도 확 줄었습니다. 이러며 벌도 덩달아 줄었습니다. 벌나비를 눈여겨보면서 애벌레를 돌아보는 마음을 잊는다면, 사람살이도 죽음벼랑으로 치닫게 마련입니다.




모든 풀에는 이름이 있고

풀마다 잎을 갉는

다 다른 애벌레가

다 다른 나비로 깨어난다


모든 나무는 이름이 다르고

나무마다 다 다른 나비가 깃들고

다 다른 하늘소가 함께살며

나무꽃을 반기며 어울린다


나비와 하늘소는

풀과 나무를 가려서 살고

벌은 어느 푸나무이든

고맙게 꿀과 꽃가루 얻어


숱한 꽃이 흐드러지면

숱한 벌이 물결을 치고

철마다 다른 꽃 피어나면

철마다 다른 꿀맛 반짝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8. 봄끝



  해마다 다른 날씨입니다. 올해하고 지난해가 다르고, 그러께에 서너 해 앞서가 다릅니다. 열 해나 스무 해 앞서가 다르고, 앞으로 다가올 서른 해나 쉰 해 뒤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늘 다른 날씨는 언제나 새롭게 흐르는 철빛을 읽으라고 속삭이는 숲말이라고 느낍니다. 넌지시 알려주면서 부드러이 일깨우는 푸른별 숲살림입니다. 2025년 봄 석 달을 돌아보면, 지난 스무 몇 해하고 댈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첫봄에 한봄에 늦봄이로구나 싶어요. 오늘날 이 별은 어느 곳이건 삽질이 끊이지 않고 부릉부릉 오가는 쇳덩이(자동차)가 줄달으면서 매캐하고 지저분해요. 더구나 총칼(전쟁무기)을 더 모질게 만드는 길에 목돈을 아낌없이 쏟아붓기까지 합니다. 날씨가 널뛰거나 미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올봄은 이른더위가 오려고 할 적마다 차분히 적시는 비가 내렸고, 이튿날은 구름하루를 이으면서 토닥토닥 달래더군요. 이러다 보니 먼지바람(황사)이라든지 꽃가루바람 탓에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집니다. 아니, 올해에는 먼지바람과 꽃가루바람이 아예 없은 듯합니다. 사람살이를 지켜보는 하늘이 이렇게 푸른빛으로 돕는다면, 우리도 이 터전을 다시금 바라볼 노릇이지 싶어요.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새롭게 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며 아름터로 가꿀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시골과 서울을 어떻게 푸른고을로 가다듬으면서 아이들한테 들숲메바다를 곱게 물려줄 만한지 헤아릴 때예요. 첫여름을 앞둔 봄끝에 이 삶과 꿈과 씨앗과 길을 노래합니다.



봄끝


가을끝에 서면

피고 지고 자는 길을

한 발자국씩 돌아보며

바람줄기 스산하다


겨울끝에 오면

쉬고 숨고 가는 삶을

한 자락씩 되새겨보며

바람빛이 서늘하다


봄끝에 이르면

돋고 트고 여는 씨를

한 톨씩 맞아들여보며

바람결이 산뜻하다


여름끝에 보면

짓고 익고 펴는 꿈을

한 자루씩 베풀어보며

바람맛이 수수하다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ㅍㄹ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7. 넘나들기



  넘나들 수 있는 사이일 적에 ‘너나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너’하고 ‘나’가 다르되, 사람이라는 숨빛으로는 하나이면서 나란합니다. 서로 다른 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누구나 ‘사람’이라는 넋으로는 아름답게 ‘사랑’인 줄 반갑게 맞아들이는 마음이기에 너나들이라고 합니다. 너나들이로 마주할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럼없이 넘나들면서 날갯짓을 하고 활갯짓으로 어울려요. 너나들이가 아닐 적에는 으레 남남입니다. 가르고 쪼개고 할퀴고 깎고 팽개치고 따돌리고 시샘하고 핀잔하고 타박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넘나드는 사이로 넘어서지 않으니 그만 담을 쌓아요. 나란히 넘나들 줄 알기에 마음에 사랑을 담고 꿈을 담으며 씨앗을 담습니다. 홀가분히 넘나드는 나날이기에 삶을 가꾸는 길에 손을 맞잡아요. 가붓이 넘나드는 하루이기에 살림을 짓는 눈빛으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가로막으려는 담은 사나울 뿐 아니라 스스로 죽어가는 굴레입니다. 차분히 차곡차곡 담아서 이루는 그릇이란, 숲을 이루는 나무처럼 든든히 그루를 이뤄요. 우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요? 우리는 어떤 발걸음인가요? 들숲메를 넘나들면서 바람과 바다가 한몸을 이루는 빛줄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새벽마다 새날을 그리고, 밤마다 밝게 별바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요. 살가이 마주하는 살뜰한 숨결이 너머로 갑니다. 알뜰히 맞이하는 아름다운 숨소리가 넌지시 드나듭니다. 두런두런 잇는 말은 이야기를 이루면서 찰랑찰랑 물결로 일어납니다.



넘나들기


바다는 소금을 머금고서

온누리를 고루 돌아본다

바람은 물씨를 앉히고서

뭇누리를 두루 드나든다


들숲메를 흐를 적에는 가볍게

갯벌에 이를 즈음에는 묵직히

민물과 짠물이 넘나드는 사이

온숨결이 서로 자라고 깨어나


나는 새날을 그리고서

아침마다 길을 나선다

너는 새마음을 담고서

밤마다 꿈길 접어든다


마을까지 어울릴 적에는 살뜰히

이웃으로 마주하는 곳은 알뜰히

생각과 수다가 넘나드는 동안

온사랑이 차츰 퍼지고 일어나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6. 흰나물



  열여덟 살을 살아가는 큰아이하고 논두렁을 걷는 어느 늦봄날, 찔레꽃을 한 송이씩 훑으며 먹다가, 마삭줄꽃은 두 송이씩 훑으며 먹습니다. 큰아이가 ‘마삭줄’이라는 이름이 안 떠오르는 듯 “어, 무슨 꽃이었더라?” 하기에 “꽃을 보면 뭐가 떠오르지 않니?” 하고 묻고는 “네가 어릴적에는 바람개비를 닮았다고 여기면서 ‘바람개비꽃’이라고 했어. 다른 사람들도 꽤 ‘바람개비꽃’이라고 말을 해.” 하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고작 쉰 해쯤 앞서 1975년 언저리까지만 해도 으레 들숲메에서 풀꽃과 나무꽃을 따서 나물로 삼았습니다. 다들 긴긴 겨울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들숲메를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나물을 캐고 꽃을 먹고 장작을 날랐습니다. 요사이는 “꽃을 그냥 먹어도 되나요?” 하고 묻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괭이밥꽃이나 씀바귀꽃이나 잣나물꽃이나 꽃마리꽃이 모두 나물인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꽃이 핀 돌나물꽃도 즐겁게 누릴 만하지만, 쑥갓꽃도 고스란히 나물인데, 어쩐지 들살림과 숲살림과 멧살림을 몽땅 잊다가 잃는구나 싶습니다. 서울에서 일하며 살다가 합천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즐겁고 야무지게 살아가는 이웃님을 만나러 가는 시외버스에서 문득 ‘흰나물’이라는 이름이 떠오릅니다. 적잖은 나물꽃이 ‘흰빛’이더군요. 한겨울 흰눈은 나물은 아니되, 눈내리는 겨울이면 입을 크게 벌리고서 그대로 눈송이를 받아먹으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네철 내내 다 다른 흰빛을 밥으로 나물로 꽃으로 빛으로 숨결로 넉넉히 누리면서 어른으로 자랐구나 싶어요.



흰나물


둘쨋달에 매나무꽃 먹고

이윽고 흰민들레 먹는데

냉이꽃 피기 앞서 캐고

새봄에 잣나물꽃 누려


넷쨋달에 딸기꽃 가득해

어느새 앵두꽃 소복하고

닷쨋달에 찔레꽃 훑다가

마삭줄꽃 달콤히 딴다


엿쨋달에 감쫓 주울까

봄끝에 이팝꽃 넘실댔고

한여름에 파꽃 동그랗고

슬금슬금 부추꽃 오른다


고추꽃은 고추 못잖게 매워

나락꽃은 밥알 닮은 냄새야

흰눈은 겨울에 덮는 꽃송이

하얗게 별이 돋으며 잠든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