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64. 우리빛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책도 많지만, 날마다 버림받는 책도 많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버림받는 만큼 새책이 태어난다고도 여길 수 있습니다. 저는 1992년부터 헌책집에서 ‘도서관에서 버린 책’을 만났는데, 헌책집지기님한테 여쭈니 “허허, 젊은이는 몰랐는가? 도서관은 책을 들이는 만큼 버려. 그런데 다시 찍지 않는 아까운 책을 엄청나게 버리지.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도서관을 세운 뒤에는 책을 둘 자리는 늘리지 않으니, 도서관에 새책을 놓으려면 옛책이나 헌책은 버려야 해. 그래서 우리 같은 헌책집 사람들이 ‘버림받은 책’ 가운데 되살릴 책을 캐내려고 하지.” 하고 말씀하더군요. 작은 헌책집 몇 곳에서 ‘버림치’를 되살리더라도 얼마 안 됩니다. 오래오래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책이지만, 그만 파묻히거나 사라져야 합니다. 올해에 갓 나온 책이라야 더 읽힐 만하지 않습니다. 지난해에 나왔거나 대여섯 해 앞서 나왔기에 해묵지 않습니다. 모든 책은 한두 달이나 몇 해만 읽히고 버리도록 마련하지 않습니다. 모든 책은 종이가 바스라지고 낡더라도 두고두고 속으로 새기려고 빚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너와 나는 어떤 숨빛일까 하고 늘 곱씹습니다. 되살려서 되읽고 싶은 책을 쓰다듬다가, 이 작은 종이꾸러미하고 나는 남남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인 빛일 텐데 하고 느낍니다. 책이 되어 준 나무를 떠올립니다. 나무를 지켜보는 별을 그립니다. 나무 곁에 있던 꽃과 돌을 되새깁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서로 새롭게 어울리려고 이곳에 태어났을 테지요.


ㅍㄹㄴ


우리빛


나만 덩그러니 있는 듯한데

아무도 나를 안 쳐다보는데

내가 서성여도 못 알아보고

울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데


별이 나를 보면서 속삭인다

“네가 혼자 있던 날은 없어.”

꽃이 나한테 다가와 말한다

“너는 여태 외롭던 적 없어.”


나무가 빙긋 웃더니 외친다

“너랑 내가 있어 우리 뜰이야.”

돌이 도르르 굴러 노래한다

“우리는 늘 네 곁에서 살았어.”


나비하고 내가 있어도 우리란다

빗방울과 내가 놀아도 우리이고

바람이랑 내가 나란하게 우리에

멀리 있는 너하고도 늘 우리래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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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62. 어디로 가나



  뚜벅뚜벅 걷습니다만, 고무신을 꿴 걸음새는 발소리가 아주 작습니다.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려고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멧자락에 2003년 9월부터 깃들면서 비로소 고무신을 만났습니다. 첫 고무신은 그해에 음성읍 저잣거리에서 2500원에 장만했고, 2025년에는 한 켤레에 6000원입니다. 고무신 한 가지만 발에 꿰는데, 열 달 남짓 꿰면 바닥이 닳아 구멍나고 옆구리가 튿어집니다. 요새 신 한 켤레 값은 꽤 비싸기도 하지만, 온통 플라스틱입니다. 멋을 내거나 놀이마당에서 뛰자면 더 좋다는 신을 꿰야 할 텐데, 맨발에 맨손으로 어울릴 만한 터전을 잃고 잊으면서 발바닥과 땅바닥이 나란히 고단하다고 느껴요. 고무신을 꿰면 거의 맨발로 다니는 셈입니다. 고무신이나 맨발로 거닐면 땅이 안 다칩니다. 딱딱한 멧신(등산화)이나 구두라면 들길도 멧길도 숲길도 망가뜨리지요. 우리는 무엇을 하러 어디로 가는 길인지 돌아봅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며 함께 나아가는 길인가요? 사람하고 이웃하는 풀꽃나무나 들숲메바다는 어느 만큼 헤아리나요? 땅을 살피고 풀꽃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되찾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바닥이 바람을 쐬고 햇볕을 머금으면서 까무잡잡한 손발과 낯으로 거듭날 일이라고 봅니다. 푸른길로 같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커다란 쇳덩이가 차지하면서 부릉부릉 매캐하게 시끄러운 길이 아닌, 어린이가 신나게 뛰고 달리는 곁으로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길로 나란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요. ㅍㄹㄴ



어디로 가나


새벽에 동이 트면

별이 자러 가면서

“넌 이제 눈뜨렴.”

환하게 속삭인다


아침에 해가 오르면

꽃도 활짝 피면서

“너도 같이 피자.”

가만히 웃음지어


낮에 바람이 불며

나뭇잎 가볍게 춤추며

“나랑 함께 놀자.”

반갑게 일렁인다


저녁에 어스름 덮어

소쩍새 그윽히 울며

“우린 꿈으로 가.”

밝게 이야기한다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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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61. 늑대



  늑대라고 하는 이웃은 사납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눈으로 보면 이렇게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늑대 눈으로 사람을 보면 어떠할까요? 사람이야말로 더없이 사납거나 거칠거나 모질거나 괘씸하거나 무시무시하거나 끔찍하거나 지저분하거나 터무니없을 수 있어요. 늑대가 사람을 보기에는 이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사람은 ‘먹이’로 삼을 뜻도 아닌 그저 ‘재미’로 온갖 짐승을 마구 잡아서 죽입니다. 사람은 ‘보금자리’로 꾸밀 뜻이 아닌 그저 ‘돈벌이’를 노리면서 숲을 마구 허물거나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이룬 나라는 저마다 평화를 외치면서도 군대하고 전쟁무기를 어마어마하게 갖추어서 으르렁거려요. 평화를 바란다면서 왜 군대하고 전쟁무기에 그토록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을까요? 과학자는 왜 이렇게도 군사무기를 새로 만드는 데에 온힘을 쏟을까요? 이제 늑대를 오롯이 늑대 마음으로 바라보기를 바라요. 스스로 늑대 눈으로 보고, 스스로 늑대 발로 달리고, 스스로 늑대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늑대 털로 느끼고, 스스로 늑대 입으로 노래하고, 스스로 늑대 숨결로 별빛을 읽는 길을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이 별을 이룬 여러 이웃 가운데 하나인 늑대를 참말로 이웃으로서 마주해 봐요. 이 마음을 고스란히 사람살이에 맞물려 놓고서, 사람인 이웃을 상냥하고 아름답게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는 길을 열어 봐요. 우리들 사람은 이 별에서 즐겁게 배우고 새롭게 익혀서 곱게 나누는 보람을 노래하려고 살아가지 싶습니다.



늑대


있는 힘껏 들을 달려

바람을 즐기거든

귀 쫑긋 숲을 갈라

잎새 스치는 느낌 누리거든


달빛보다는 별빛을 봐

작은 꽃빛을 눈여겨보고

들풀에 어린 이슬을 읽고

안개에 서린 물방울을 느껴


아이가 태어나면

씩씩하되 상냥한 마음을

당차되 부드러운 걸음을

밝으며 꿰뚫는 눈망울을


여기에다가

서로 돌볼 줄 아는 숨짓을

놀이로 가르치고서

들녘사랑을 물려주지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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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60. 플라타너스



  우리 곁에 서는 나무가 숱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온 터전에는 언제나 뭇나무가 우거졌습니다. 나무가 없이는 숨쉬지 못 하고, 나무가 없이는 집짓지 못 하고, 나무가 없이는 살림이며 세간을 마련하지 못 하고, 나무가 없이는 들숲메가 메마르기에, 사람뿐 아니라 뭇숨결은 살아가지 못 합니다. 이 별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나무는 다 다른 땅과 하늘과 날과 철에 따라서 그야말로 다르게 싹트고 자라고 뻗습니다. 사람은 다 다른 나무를 다 다르게 마주하고 품으면서 “사람도 서로 다르면서 나란한 숨빛”인 줄 배웁니다. 풀 한 포기도 서로 다르고, 나무 한 그루도 서로 달라요. 더구나 까마득하게 솟거나 커다랗게 서는 나무라지만 나무씨 한 톨은 매우 작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씨앗·열매를 보면서 ‘방울나무’로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줄기빛·줄기무늬를 보면서 ‘버즘나무’로 이름을 붙이기도 한 ‘플라타너스(platanus)’입니다. 여름바람을 잎빛으로 시원하게 달래는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푸른들에 파란하늘 같은 바람을 일으키는 나무라면, 여름뿐 아니라 봄가을에도 푸른숨을 내놓아 이바지하고, 겨울에도 푸른빛을 베풀며 이바지합니다. 그냥 부는 바람은 없어요. 모래벌에서는 메마르고 뜨겁게 훅훅 부는 바람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닷방울 기운을 품는 바람입니다. 나무 곁에서는 나무가 다독이면서 어루만지는 바람입니다. 풀밭에서는 작은 풀꽃이 북돋우는 바람입니다. 방울처럼 밝게 노래하는 바람 한 줄기를 헤아리면서 큰나무 굵은줄기를 쓰다듬습니다.



플라타너스 (방울나무·버즘나무)


처음은 누구나 씨앗으로

첫길은 언제나 뿌리부터

첫눈은 살그머니 하늘로

이제부터 바람을 머금고


껑충껑충 큰나무 보면서

높이높이 하얀별 보다가

줄기가 굵고 가지를 내어

잎을 활짝 벌린다


조금씩 자라는 동안

줄기껍질을 벗어

꽃지고 맺는 열매는

동그랗게 알알이


단열매나 아름꽃 아니나

푸른잎으로 물결 이루어

바닷소리를 고루 퍼뜨려

한여름을 파랗게 식힌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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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59. 가을



  어릴적부터 “너나 잘해!” 같은 말을 곧잘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동무나 언니나 어른한테 조그마한 귀띔이나 도움말을 들려주려는 뜻이었지만, 몸도 자그맣고 힘없이 고삭부리로 지내는 꼬마가 들려주는 말은 썩 안 반가울 만했구나 싶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분들이 먼저 저한테 귀띔이나 도움말을 바라지 않았는데 먼저 불쑥 알려주니까 싫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여쭙기에 찬찬히 짚어서 알려줄 적에도 거북한 낯빛인 분이 제법 있습니다. 이런 나날을 누리면서 조용히 헤아립니다. 아무래도 제 말씨가 그리 상냥하지 않구나 싶으면서, 누구누구를 돕거나 이끌 수 없는 노릇이겠네 싶어요.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 길을 찾아서 스스로 부딪히고 스스로 깨달으면서 스스로 어깨를 활짝 펼 뿐이네 싶습니다. “너나 잘하셔!”나 “너나 똑바로 해!” 하고 쏘아붙이던 분들은 그분들 말씨야말로 쏘아붙이는 화살인 줄 모르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새삼스레 생각해요. 저는 이 가을을 새로우며 싱그이 맞이하고 싶다고, “네, 저는 저부터 잘할게요. 가을이에요!” 하고 속삭이면서 제가 걸어갈 길을 바라보려 합니다. 한여름에는 한여름대로 불볕을 마음껏 누렸어요. 한가을에는 한가을대로 열매를 실컷 누리면 되겠지요? 한겨울에는 한겨울대로 함박눈을 푸짐히 누리고, 한봄에는 한봄대로 새잎잔치를 골고루 누리려 합니다.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기에 맨몸으로 이 비를 맞으면서 시원히 걷습니다. 가을밤에 가을별이 초롱초롱 뜨기에 온몸으로 별빛을 머금습니다.



가을


우리 집 초피잎은

가을이면 샛노랗지

후박잎 동박잎은

갈겨울 모두 짙푸르고


푸른 모과알 유자알

차츰 노르스름 바뀌면

풀노래 조용조용 사위고

바람소리 조금씩 깊어가


쑥꽃 조롱조롱

억새씨앗 하늘하늘

이제 들숲은 누릇누릇

곧 별밤빛은 반짝초롱


고구마를 찔까

감자밥을 할까

갈잎배를 엮어

냇물에 띄울까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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