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7. 책은 어떻게 만날까


  책은 늘 마음으로 만납니다. 마음으로 만나는 책이기에 마음으로 읽습니다. 마음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만나지 않거나 못하면, 책을 마음으로 못 읽거나 안 읽습니다.

  동무는 늘 마음으로 사귑니다.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이기에 마음으로 어깨를 겯습니다. 마음으로 사귀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사귀지 않거나 못하면, 동무와 나는 서로 어떤 사이가 될까요?

  학교는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배우려고 학교를 다닙니다. 그래서, 학교는 한국말로 쉽게 풀이해서 ‘배움터’라고 일컫습니다. 배우는 터이기에 배움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는 놀이터가 아니고 삶터가 아니며 이야기터가 아닙니다. 오직 배우는 터이기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은 우리한테 여러 가지 지식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학교는 배우는 곳이기에 교과서를 씁니다. 교과서를 바탕으로 지식을 가르칩니다. 교과서에 안 나오는 지식은 학교에서 안 다룹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교과서 지식을 학생이 잘 알아서 시험을 잘 치르도록 이끕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안 하는(교과서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 아이를 몽둥이로 두들겨패거나 손찌검을 했습니다. 벌을 세우고 갖가지 거친 말도 일삼았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를 함부로 때리거나 패는 교사는 거의 사라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몽둥이질은 사라졌어도, 교과서 지식 가르치기는 그치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학교는 ‘더 위에 있는 다른 학교’에 갈 때에 쓸 시험지식을 외우는 구실을 합니다.

  학교에는 어떤 마음이 있을까요. 우리는 학교에서 어떤 마음을 느끼거나 만날까요. 우리는 마음을 기울여서 배우는가요. 어른들은 우리한테 마음을 쏟으면서 가르칠까요. 서로 마음을 기울이거나 쏟기는 하지만, 학교 울타리에서만 마음을 기울이거나 쏟을 뿐, 우리가 살아갈 마을과 집과 나라를 넓게 아우르는 눈썰미하고는 동떨어지지 않을까요.

  학교라는 곳에서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면, 학교라는 곳은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이때에는 ‘학교’라는 이름조차 안 쓰리라 생각해요.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는 틀을 넘어, 사랑을 나누고 꿈을 키우는 곳을 ‘학교’로 삼을 수 있으면, 학교는 더는 ‘학교’가 아닌 ‘마을’이 되고 ‘보금자리’가 되며 ‘숲’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 서로 마음을 살뜰히 주고받을 수 있을 때에 새로운 빛이 태어납니다.

  쿄우 마치코 님이 그린 물빛내음이 감도는 만화책 《미카코》(미우 펴냄)가 있습니다. 이 만화책에는 ‘말(대사)’이 얼마 안 나옵니다. 물빛과 같이 찬찬히 흐르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물빛처럼 보드라우면서 맑고 해사한 이야기만 조물조물 나옵니다.

  첫째 권을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토끼를 쓰다듬었다(60쪽).’와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나는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밑줄을 긋습니다. 그림책을 읽으면서도 밑줄을 그어요. 내 마음을 살포시 건드리는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느끼면 서슴지 않습니다. 즐겁게 밑줄을 긋고는 여러 차례 되읽습니다. 기쁜 가락을 새롭게 느껴 봅니다.

  둘째 권을 읽으면서 ‘어서 여기를 뜨지 않으면 발톱이 초록으로 물들 것 같다(16쪽).’와 같은 대목에서 밑줄을 그었어요. 풀밭에 맨발로 서니 발톱이 풀빛으로 물들 듯하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대목이에요.

  참말 그렇습니다. 바닷물에 두 발을 담그면 어느새 내 발은 바닷빛으로 바뀝니다.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구름을 잡으려 하면, 내 팔은 어느새 하늘빛과 구름빛으로 물듭니다.

  한두 살짜리 어린 동생이 있나요? 어린 동생이 있으면 어린 동생 볼살을 살살 쓰다듬어 보셔요. 내 볼을 어린 동생 볼에 대어 보셔요. 갓난쟁이 아기들 살결이 얼마나 보드라우면서 어여쁜가를 느껴 보셔요. 아기들 손을 쥐면 어느새 나도 아기와 같은 숨결이 됩니다. 아기들 눈망울을 바라보면 어느새 나도 아기와 같은 눈빛이 됩니다.

  셋째 권을 읽으면서 “따뜻해졌어(18쪽)?”와 같은 대목에서 밑줄을 긋습니다. 한겨울인데, 동무가 장갑 한 짝을 잃었습니다. 장갑을 안 낀 손이 빨갛게 업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다른 동무가 얼른 ‘장갑 안 낀 손을 호호 불고 비비면서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한참 이러고서 한 마디 묻는 말이 “따뜻해졌어?”예요.

  넷째 권을 읽으면서 ‘빨간 구두를 신으면 어디론가 데려가 줄 줄 알았다. 돈도 있고 탈것도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빨간 구두는 땅에 붙어 있었다(72∼74쪽).’와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새어머니한테서 학원비를 받은 미카코라는 아이는 학원에 안 갑니다. 드넓게 펼쳐진 강둑에 섭니다. 강바람을 맞으며 한참 섭니다. 아이는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어디 멀리 떠날까 하고 생각하지만,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어디로 갈 때에 즐거울까요. 어디로 갈 적에 마음속에서 샘솟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책은 언제나 마음으로 만납니다. 마음으로 만나지 못하는 책은 ‘유명세’나 ‘추천’이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만나겠지요. ‘독후감 숙제’ 때문에 만나는 책이 있을 테고, ‘선물받’아서 만나는 책이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독후감 숙제’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면, ‘대학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면, 책이란 무엇일까요.

  영화를 왜 볼까요? 마음이 맞는 동무하고 왜 사귈까요? 사랑을 왜 하고 싶을까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나를 낳았을까요? 나는 책하고 어떻게 만날 때에 즐겁게 웃을 수 있나요? 동무하고 둘이서 무엇을 하며 놀 적에 기쁘면서 신날까요?

  마음을 담지 않으면서 짓는 밥은 마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마음을 담지 않으면서 태어난 책은 마음을 북돋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서 읽지 않는 책이라면, 아주 마땅히 우리 마음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꽃을 바라보듯이, 푸른 바람을 마시듯이, 따순 햇볕을 맞아들이듯이, 마음을 활짝 열고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 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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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누리에는 어떤 책이 나올까


  온누리에 온갖 책이 새로 태어납니다. 한국에서도 날마다 여러 가지 책이 태어납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날마다 나오는 모든 새책을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로 가르쳐요. 한 학기나 한 해를 두고 교과서 하나로 한 과목을 가르칩니다. 예전에는 참말 교과서가 아닌 책을 학교에서 다루지 않았어요. 오직 교과서 하나만 다루었어요. 오늘날은 예전과 사뭇 달라, 교과서 아닌 책을 제법 다룹니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책’을 따로 장만해서 학교도서관에 두기도 하고 학급문고로 갖추기도 합니다.

  교과서는 ‘간추린 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에 쓴 이야기를 간추려서 엮는 교과서입니다. 책 몇 권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는 고작 한 줄로 간추리기도 합니다. 수천 권이나 수만 권에 이르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는 한 줄로조차 안 다루기도 합니다.

  교과서를 읽으면서 배우는 사람은 ‘교과서를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책을 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책을 보려면 참말 책을 살펴야 합니다. ‘간추린 교과서’가 아닌, ‘그대로 밝히거나 풀어놓은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이 수없이 태어나는데, 교과서 하나에만 기댄다면 우리가 무엇을 배울 만한지 생각해 봐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는데, 간추린 지식을 담은 교과서에만 머문다면 우리 마음밭이 얼마나 자랄 수 있을는지 헤아려 봐요.

  어느 책은 오래도록 사랑받습니다. 어느 책은 그다지 사랑받지 못합니다. 오래도록 사랑받기에 더 아름다운 책이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더라도 덜 아름답거나 안 아름다운 책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권정생 님이 쓴 《몽실 언니》(창작과비평사,1984)는 우리가 어떤 책으로 바라볼 만할까 궁금합니다. 무척 널리 읽히는 책이니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푸름이와 어린이라면 《몽실 언니》를 한 차례쯤 읽었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스무 살이던 1994년에 처음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적이나 중·고등학생이던 때에 이 책을 말하거나 알려주거나 건넨 어른은 없습니다. 스무 살이던 어느 날 책방마실을 하다가 스스로 알아보았어요. 스무 살 나이라면 어린이책은 안 읽을 만하다고 여기는 흐름이 한국 사회에 있지만, 그때 저는 이 책이 문득 끌렸어요. 스무 살이라면 대학생이 되는 나이인데, 다른 동무(대학생)들은 대학교재나 토익책을 옆구리에 꼈지만, 또는 인문사회과학책을 손에 쥐지만, 저는 어린이책 《몽실 언니》를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제 어린 날과 푸른 날에 만나지 못한 어린이문학이 몹시 궁금했어요.

  “이 산골마을 이름은 댓골이라 했다. 뒷산 골짜기로 보리둑나무가 무성하여 달밤엔 은빛 잎사귀가 아름다웠다(18∼19쪽).” 같은 글월에 밑줄을 긋고는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런 글월을 가만히 되읽으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투박하거나 수수한 글줄이라 할 테지만, 이렇게 투박하면서 수수한 글줄이 외려 제 가슴을 톡 건드렸어요.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사는 곳은 어떤 이름인가? 내가 사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사는 곳에는 어떤 나무가 자라는가? 내가 사는 곳에서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만나는가?’ 하는 생각이 잇달아 머릿속을 스칩니다.

  “맑은 개울물에 기저귀랑 저고리랑 담그어 놓고 방망이로 토닥토닥 두들겨 빤다. 몽실이와 순덕은 딴 아이들보다 빨래도 잘한다(33쪽).” 같은 글월에 연필로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다시금 한참 들여다봅니다. 괜히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글월이라 할 테지만, 그냥 그런 삶을 적은 글줄이라 할 텐데, 이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또 책을 덮었지요. 또 한참 생각에 잠겼지요. 예전에는 참말 모두들 맑은 개울물에서 빨래를 했겠다고 떠올렸어요.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그무렵, 또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쯤 앞서, 또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쯤 앞서, 모두들 맑은 개울물에 옷가지를 펼쳐서 척척 비비고 헹구었겠구나 싶었어요.

  맑은 개울물에 옷을 빨면, 옷은 맑은 개울물 빛깔과 무늬를 얻습니다. 맑은 개울물에 빨래한 옷을 마당에 척 널어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도록 하면, 옷은 따순 볕과 싱그러운 바람이 베푸는 기운을 받습니다.

  온누리에는 그야말로 많은 책이 꾸준하게 태어납니다. 수없이 많은 책은 저마다 어떤 삶을 그린 책일까요. 수없이 많은 책은 저마다 어떤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책일까요.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님은 몽실이 입을 빌어 “배운다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젖은 키를 크게 하고 몸을 살찌우는 것이고, 배우는 것은 머리가 깨고 생각이 자라게 한다(68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엄마젖, 또는 어머니젖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베푸는 젖을 먹고 자랍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이녁 어머니한테서 태어나 으앙 울면서 갓난쟁이 나날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시골 이야기를 책에 담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도시 이야기를 책에 싣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 이야기를 책에 쓸 테고, 일본에서는 일본 이야기를 책에 적어요. 한국에서는 한국 이야기를 책에 적바림할 테고, 역사학자는 역사 이야기를 책으로 펼칠 테며, 과학자는 과학 이야기를 책으로 선보일 테지요. 시골에서 자라는 사람은 어떤 책을 찾아서 읽을 만할까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어떤 책을 찾아서 읽을 만한가요. 온누리에는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책이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데, 거의 모든 책은 도시를 겨냥합니다. 시골을 바라보며 태어나는 책은 드뭅니다. 시골을 이야기하거나 시골살이를 밝히는 책은 아주 드물어요.

  두 다리로 걸어서 책방에 가 봅니다. 커다란 책방이든 자그마한 책방이든, 책방마다 가장 많이 쌓인 책은 ‘책이 아닌 교재’입니다. 학교에서 다루는 수험서가 책방마다 가장 많이 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가 책방에서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을 더 잘 익혀서 시험문제를 더 잘 풀고는 점수를 더 잘 받도록 꾀한다는 교재가 책방마다 가장 많아요.

  《몽실 언니》에서는 “몽실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도 그 애처럼 꽃을 꺾어 팔아서라도 떳떳하게 살까 봐.’ 여태 몽실이 살아온 건 모두 부끄러운 일뿐인 것 같았다. 얻어 먹고 살아온 것만 같았다. 몽실은 찬거리를 사들고 부랴부랴 꽃 파는 애한테 갔다. 그러나 거기 꽃 파는 애는 없었다(188쪽).”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몽실이는 학교 문턱을 밟지 못합니다. 몽실이는 어릴 적부터 배를 곯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어린 동생을 바라지합니다. 늙고 아픈 아버지를 수발합니다. 몽실이한테는 책이 없고, 교과서도 없습니다. 시험공부도 대학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삶이 있습니다. 살아가려는 몸짓이 있습니다. 살면서 누리고 싶은 사랑이 있습니다. 살면서 누리고픈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빛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책방마다 교재가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하니까, 우리들은 문제집과 참고서를 늘 옆구리에 끼면서 지낼 때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지 궁금하곤 해요.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다루니, 열두 해에 걸쳐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과서만 잘 익히면 될는지 궁금하곤 해요.

  온누리에는 왜 새로운 책이 날마다 꾸준히 태어날까요. 이웃나라에서도 한국에서도 왜 꾸준하게 새로운 책을 펴낼까요. 교과서가 있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가르치지만, 왜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라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많을까요.

  《몽실 언니》는 어린 몽실이가 마흔 살을 살며시 넘은 어느 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열다섯 살인 내가 앞으로 마흔 살 언저리에 이르면,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요. 스무 살인 내가 앞으로 마흔 살 즈음이 되면, 어디에서 어떤 눈빛으로 이웃과 마주할까요.

  “난남은 안네를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몽실이도, 죽은 금년이 아줌마도,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고 생각했다(261쪽).”와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되새깁니다. 온누리에서 새로 태어나는 책은 한결같이 한 가지를 밝히려는 뜻이리라 느낍니다. 바로 ‘사랑’을 밝히려고 하지 싶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밝히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길을 밝히며, 나와 네가 우리로 어깨동무하면서 새롭게 빚을 사랑을 밝히려는 책이지 싶습니다. 4347.6.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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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누가 책을 쓰는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노래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노래를 불러요. 가락이 어긋나더라도 빙긋빙긋 웃으면서 노래를 부르지요.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춤을 춥니다. 춤판이 아니어도 스스로 춤을 추어요. 걸음걸이가 춤사위입니다. 움직임이 언제나 춤짓입니다. 당근을 썰거나 양파를 썰 적에도 덩실덩실 어깨춤이에요. 누가 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꽃을 만납니다. 꽃밭에 가야만 꽃을 볼 수 있지 않아요. 들에서는 들꽃을 봅니다. 숲에서는 숲꽃을 봐요. 길에서는 길꽃을 보지요. 꽃은 들에서도 숲에서도 길에서도 피어납니다. 흙이 있으면 씨앗이 드리워 곱게 피어나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책을 손에 쥡니다.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노래하는 아름답고 호젓한 시골에 깃들어야 느긋하게 책을 읽지 않아요. 시끄러운 북새통인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에서도 책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좋아하니까요. 졸음을 쫓으며 책을 읽어요. 더위를 잊으며 책을 읽어요. 스스로 좋아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기에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좋아해 보셔요. 입에서 ‘좋아!’ 하고 톡 튀어나와요. 싫어해 보셔요. 입에서 ‘싫어!’ 하고 탁 튀어나옵니다. 좋으니 즐겁게 하고, 싫으니 억지로 해요. 좋기에 웃으면서 하고, 싫기에 울면서 겨우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떤 마음일까 헤아려 봅니다. 아이를 좋아해서 사랑스레 낳은 어버이일까요, 아이를 낳기 싫으나 억지로 낳은 어버이일까요. 따사로운 손길로 보살피면서 보드라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라면, 스스로 좋아해서 아이를 사랑스레 낳았으리라 생각해요. 아이를 학원으로만 내몰거나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도록 들볶는다면, 아무래도 스스로 좋아해서 아이를 사랑스레 낳았다고는 여기기 어렵습니다. 아이를 좋아해서 사랑으로 낳은 어버이라면, 언제나 아름답게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리도록 돌보는 한편, 마을과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힘쓰리라 생각해요.


  《말괄량이 삐삐》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있습니다. 1907년에 태어나 2002년에 숨을 거두셨어요. 이분이 어릴 적 삶을 돌아보면서 쓴 산문책이 《사라진 나라》(풀빛,2003)라는 이름으로 나온 적 있어요. 이 책에서 린드그렌 님은 “누군가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에 대해 물으면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자연은 내 모든 나날을 에워싸고 있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 삶을 채우고 있었습니다(93쪽).” 하고 이야기해요. 어릴 적에 숲과 들에서 뛰놀며 자랐다고 해요. 이분이 쓴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으레 숲과 들에서 뛰노는데, 머릿속으로 지은 모습이 아니라, 바로 린드그렌 님이 보낸 어린 나날 모습이요, 린드그렌 님네 식구들 모습이면서, 린드그렌 님이 어릴 적 함께 놀던 동무들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숲에서 즐겁게 뛰놀았으니, 이분이 글을 쓸 적에는 ‘숲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삐삐이건 마디타이건 로타이건, 모두 숲에서 살며 숲에서 뛰놀아요. 숲바람을 마시고, 숲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숲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맞이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숲을 누리며 숲에서 뛰노는 어린이가 거의 없습니다. 도시에서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어린이만 많습니다. 시골에 살아도 도시와 엇비슷하게 입시지옥에 얽매이는 삶입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글을 쓴다면, 스스로 겪거나 누리거나 본 모습을 담겠지요. 숲을 누리지 못했으니 숲빛을 글로 쓰기 어렵고, 숲내음을 마시지 못했으니 숲놀이를 그리기 어려우며, 숲살이를 즐기지 못했으니 숲사람이 꿈꾸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어려워요.


  린드그렌 님은 “상상력이란 바로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어난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한 인간의 상상 속에서 형태를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겨났겠습니까(149쪽)?” 하고 이야기해요. 생각이란 날개이고, 날개는 홀가분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날갯짓을 하는 삶이고, 날갯짓을 하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홀가분한 넋입니다.


  작가가 책을 쓰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예창작학과를 다녀야 글을 쓰거나 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받거나 작품집을 내놓았다고 해서 ‘작가’가 아닙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삶을 즐겁게 누린 사람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어릴 적에 즐겁게 놀면서 생각날개를 훨훨 펼친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누린 놀이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글을 쓰고 책을 묶습니다. 사랑스럽게 즐긴 삶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놓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일 때에 찬찬히 우러나옵니다. 좋아하는 넋일 때에 가만히 샘솟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나 억지로 글을 써야 한다면, 겉보기로는 짜임새가 탄탄하거나 줄거리가 재미있게 보인다 하더라도,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책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글은 보고서가 아니고, 책은 논문이 아니거든요. 글은 웃음이면서 노래입니다. 책은 사랑이면서 빛입니다.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놀던 하루가 글로 태어나요. 어깨동무하면서 숲을 뒹굴던 나날이 책으로 거듭납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잘 놀아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면서 뛰놀고 나서야 비로소 글이 나와요. 책을 쓰고 싶다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에 깃들어 고운 바람을 쐬어 보셔요. 가슴을 활짝 펴면서 지구별 기운을 누리면 시나브로 책이 나와요.


  어머니가 아이를 돌본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출퇴근 하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논밭을 일구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고 숲을 돌보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이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즐겁게 누리고 나서야 이야기가 하나둘 나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웃고 노래하며 뛰놀던 삶이 밑바탕이 되어 글을 쓰거나 책을 씁니다. 그나저나, 왜 숲에 깃들어야 글을 쓸 수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셔요. 사람은 누구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들이켜며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야 살아요. 아스팔트 찻길과 시멘트 건물만 있는 도시에는 이 모두가 없어요. 이 모두는 숲에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기에 삶을 살리고, 삶을 살리기에 사랑을 살리지요. 책을 쓰는 사람이란, 삶을 쓰는 사람입니다. 삶을 가꾸듯이 글을 쓰기에 책 한 권이 태어납니다. 4347.5.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책 푸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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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책은 어디에 있을까


  비질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걸레질을 책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빗자루를 옳게 쥐는 법을 책으로 쓸 수 있을 테지만, 굳이 책으로 써야 할까 생각해 보셔요. 연필을 잘 깎는 법을 책으로 묶을 수 있을 테지만, 애써 책으로 묶어야 할는지 헤아려 보셔요.

  요리책이 참 많아요. 아마 웬만한 집마다 요리책을 몇 권씩 두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요리’는 책으로 배워야 할까요? ‘요리’가 아닌 ‘밥’은 어떨까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짓는 밥을 공책을 펴서 쌀 몇 그램 보리 몇 그램 콩 몇 그램 낱낱이 밝힌 뒤, 물은 몇 밀리리터를 부어서 쌀을 헹구고는, 헹군 물을 몇 밀리리터 버리고 나서, 다시 물을 몇 밀리리터 또는 몇 리터 담아서 불은 어떠한 세기로 몇 분 동안 넣어야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하나하나 숫자로 밝혀야 할는지요?

  사진기를 새로 장만하거나 손전화 기계를 새로 장만한다면, 설명서가 꼭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으면 사진기나 손전화 기계 성능을 낱낱이 알 수 있어요. 기계를 다루는 설명서는 어느 모로 보면 ‘책’입니다. 잘 쓸 수 있도록 알려주는 길잡이책이에요.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하며 국을 끓일 적에 요리책이든 길잡이책을 봐야 할는지 생각해 보셔요. 먼먼 옛날부터 아무도 책이 없었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하면서 밥짓기를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입과 몸으로 밥짓기를 물려받았습니다.

  스스로 겪어야 압니다. 스스로 안 겪으면 모릅니다. 해돋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스스로 겪으면 압니다. 해넘이 빛이 얼마나 고운지는 스스로 바라보면 압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는 바닷가에 서면 누구나 스스로 압니다. 풀벌레와 개구리와 새가 들려주는 노래는 숲에 깃들면 누구나 스스로 알아요.

  먹어야 맛을 알아요. 굶어야 배고픔을 알지요. 추위와 더위는 스스로 겪을 때에 압니다. 바다뿐 아니라 하늘과 별과 무지개도 스스로 보아야 알아요. 바람과 햇살도 스스로 맞이해야 압니다.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책은 무엇을 쓸까요. 책을 쓰는 이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책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마쓰타니 미요코 님이 쓴 동화책 《안녕 모모, 안녕 아카네》(양철북,2005)가 있어요. 나는 마흔 살이 넘은 어른이지만 동화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동화책도 아름다운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푸름이도 동화책은 얼마든지 즐길 아름다운 책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동화책은 다 같이 누릴 아름다운 이야기잔치예요.

  이 작은 동화책을 펼치다가 “아카네가 목욕탕 문 옆에 서서 말했어요. ‘있잖아, 마코토. 우리 집 목욕탕에는 새하얀 보통 비누랑 사과 모양으로 생긴 비누가 있거든, 사과 비누 한번 써 봐. 그거, 미인이 되는 비누야.’ 그러자 문 안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어요. ‘흥, 우리 집에는 남자다워지는 비누가 있어서, 난 매일 그걸로 씻어.’(53쪽)”와 같은 대목을 찬찬히 읽습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두 아이는 비누 하나를 놓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뒷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마코토라는 사내 아이는 사과 모양 비누를 썼을까요, 안 썼을까요. “흥!” 하고 콧소리를 낸 사내 아이는 사과 모양 비누를 못 본 척했을까요, 살그마니 바라보다가 ‘어디 한번’ 써 볼까 하고 생각했을까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합니다. 아기씨가 어떻게 생기고, 아기씨는 어떻게 아기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목숨이 새로 태어나는가를 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아기씨 흐름을 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기는 하되, 정작 아이를 낳는 일과 아이를 낳기 앞서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라든지, 아이를 낳고 나서 어떻게 아이와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지는 않아요. 아기를 낳고 젖을 어떻게 물리는지, 아기를 낳기 앞서 몸을 어떻게 가누는지, 아기 낳는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고 집일과 집살림과 밥하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하나도 안 가르치는 성교육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평등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까지 어머니가 집일을 도맡기 일쑤예요. 집에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아직도 매우 드뭅니다. 그러면, 어머니 혼자 집일을 도맡다가 아기를 낳으면 어떡해야 할까요. 끼니마다 밥을 시켜서 먹어야 할까요. 할머니를 불러서 할머니더러 밥을 차리라고 해야 할까요. 어머니가 아프거나 다치면 집일과 밥은 어떻게 하나요.

  제대로 하는 성교육이라면, 가시내와 사내가 살을 섞는 일만 보여줄 노릇이 아니라, 둘이 함께 빚는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살림살이를 오롯이 알려주고 밝혀야 한다고 느껴요. 가시내도 사내도 밥을 맛나게 지을 수 있어야 하고, 빨래와 청소는 서로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낳았으면, 기저귀를 어떻게 다루고, 기저귀 빨래는 어떻게 하며, 아기를 어떻게 씻기고, 아기한테 말과 삶을 어떻게 가르칠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운가를 학교와 집과 마을에서 함께 가르치면서 물려줄 수 있어야지요.

  작은 동화책을 더 읽습니다. “‘아빠, 나, 여름밀감 가져왔어.’ 아카네가 배낭에서 여름밀감을 꺼냈어요. 그러자 온 방 안에 여름밀감 냄새가 퍼지고, 아빠 얼굴빛이 순식간에 밝아졌어요. 아빠는 후우 숨을 들이쉬고 아카네를 안아 주었어요. ‘아, 아주 편안해졌어. 여름밀감은 정말 대단하구나. 금세 공기가 부드러워졌어.’(149∼150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여름밀감 한 알이 집안에 맑은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능금 한 알이나 배 한 알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오월 한복판부터 들과 숲에서 돋는 들딸기와 멧딸기도 온 집안에 맑은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들딸기가 어떤 맛인지 아나요? 비닐집에서 키워 한겨울에도 먹는 ‘비닐집 딸기’하고 숲에서 스스로 돋아서 하얗게 꽃이 피다가 빠알갛게 익는 들딸기하고 맛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아나요? 먹어야 알 테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따서, 입에 넣고는 냠냠 씹고 꿀꺽 삼켜야 알 테지요.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셔요. 책은 바로 우리 곁에 있어요. 더 헤아려 보셔요. 책은 바로 우리 삶이에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 보셔요. 우리 마음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를 듣고, 내 어버이와 이웃 마음속에서 흐르는 고운 노래를 들어 보셔요. 책은 어디에나 살가이 피어나면서 퍼집니다. 4347.5.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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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책길 걷기

3. 책을 읽어 무엇을 얻는가



  책을 읽으며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았으나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었으나 삶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고 삶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있으면 책을 읽을 때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꾸는 기운을 가꾸는 넋이라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나는 빛을 헤아리는 매무새라면 풀을 뜯거나 나무를 어루만지는 동안 시나브로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없으면 흙을 만지거나 고기잡이를 하더라도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스스로 삶을 바꾸지 못하면 뛰어난 스승을 만나거나 훌륭한 이슬떨이 곁에 있더라도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면, 삶은 왜 바꾸어야 할까요? 삶은 굳이 바꾸어야 할까요?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애써 삶을 안 바꾸어도 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더라도 날마다 삶을 바꾸기 마련이에요. 어제는 어제요 오늘은 오늘입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하루로 맞이하면서 새로운 사랑과 꿈을 키웁니다. 다가오는 앞날에는 앞날대로 새삼스러운 사랑과 꿈을 품습니다.


  《이대로 가면 또 진다》(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다가, “저는 요즘 대학생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교수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짧지만 저는 경험상 노력하면 변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과 진실과 정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나가면 달라지는 게 보여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학습 모임을 제안하고 싶어요(40쪽).”와 같은 대목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 밑줄을 죽 긋습니다. 아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저 스스로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꿈(희망)을 품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한테서도 꿈을 읽습니다. 스스로 꿈을 품지 않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한테 꿈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스스로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고단하거나 어렵거나 팍팍하더라도 꿈을 붙잡으면서 웃습니다. 스스로 꿈꾸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느긋하거나 넉넉하거나 한갓지더라도 꿈을 그리지 않고 웃을 줄 모릅니다.


  대학생을 바라보며 ‘꿈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교수는 이녁 스스로 꿈이 없거나 꿈을 안 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을 바라보며 ‘꿈이 보인다’고 말하는 교수는 이녁 스스로 꿈이 있거나 꿈을 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푸름이한테 꿈이 있는가?’라든지 ‘어린이한테 꿈이 있는가?’ 같은 이야기를 물어 보셔요. 이때에도 똑같습니다. 푸름이한테서 꿈을 읽으려 하지 않는 어른은 어른 스스로 꿈이 없습니다. 어린이한테서 꿈을 느끼려 하지 않는 어른은 어른 스스로 꿈을 모릅니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을까요? 아무것도 못 얻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책을 백만 권 읽더라도 아무것도 못 얻습니다. 무엇이든 얻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딱 한 줄만 읽더라도 무엇이든 얻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오랜 나날 아름답고 훌륭한 빛을 베풀었다는 책을 손에 쥐어도 가슴이 울리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바꾸도록 힘을 쏟아야지!’ 하고 다짐하면, 이웃에서 그 책은 너무 허접하니 읽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책을 읽을 적에도 아름답고 훌륭한 빛을 얻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부릅니다. 마음이 마음을 낳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부르고, 사랑이 사랑을 낳습니다. 평화를 바라거나 민주를 바란다면, 책을 읽으면서 늘 평화와 민주를 생각하셔요. 그러면, 책 마디마디에서 평화와 민주를 깨우치는 글이 톡톡 튀어나와 우리 가슴에 포근히 안깁니다. 평등을 바라거나 통일을 바란다면, 책을 읽는 내내 늘 평등과 통일을 생각하셔요. 그러면 책 마디마디에서 평등과 통일을 일깨우는 이야기가 새록새록 샘솟아 우리 마음밭에 고운 씨앗으로 드리웁니다.


  천 리를 걷는 길은 언제나 한 걸음부터입니다. 티끌을 차근차근 모으면 커다란 봉우리가 됩니다. 밥 한 술로 굶주린 이웃을 살립니다. 밥 한 술씩 열 사람이 모으니 한 그릇이 태어나요. 하늘은 선물을 똑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늘이 선물을 똑 떨어뜨릴 수 있을 테지만, 하늘은 우리가 스스로 선물을 빚어서 스스로 기쁘게 하기를 기다립니다. 스스로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거두기를 바라는 하늘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심는 사람을 알뜰히 여겨 사랑하는 땅이요 흙입니다.


  남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많은 남이 나를 사랑하더라도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부질없습니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사랑하더라도 사랑을 느끼지 못해요. 스스로 나를 사랑하면 둘레에서 나를 안 쳐다보더라도 즐겁습니다. 노래는 스스로 부르기에 노래이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야 노래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바로 내 노래예요.


  《이대로 가면 또 진다》라는 책은 끝자락에서, “혹시 상상해 보셨나요? 병원비를 무료로 하는 법, 대학 등록금 없애는 법, 고졸자와 대졸자 사이의 임금격차를 없애는 법, 이런 법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만들어지는 날을 말입니다(106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법’을 마음속으로 그리라고 묻습니다. 남이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 꿈꾸고 바라며 일구라고 이야기합니다. 꿈꾸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꿈꿀 때에 이룬다고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을 때에 생각하지 않으면 읽으나 마나이기 마련입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어떻게 거듭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으면 읽으나 마나 그대로입니다. 밥을 먹을 적에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밥이 내 몸으로 들어와 어떤 기운이 되는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침해를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저 햇볕이 내 살갗에 닿아 얼마나 즐거운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나무와 풀이 햇볕을 받아 푸르고, 나무도 풀도 빗물을 먹어 싱그러우며, 나무도 풀도 바람을 들이켜며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어떤 스승이 찾아와도 안 됩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는 사람한테는 아무런 스승이 없어도 다 됩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어떤 책을 갖다 주어도 배우지 못합니다. 스스로 배우려는 사람한테는 책 한 권 없이 시골에서 호미와 쟁기와 가래를 손에 쥐어도 삶과 꿈과 넋을 즐겁게 배웁니다. 4347.4.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름이와 함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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