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시에 먹는 저녁



  어제 고흥에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 닿아 다섯 시 사십 분 즈음부터 출판사 대표님하고 디자인회사 대표님이랑 ‘거의 최종 편집 디자인 교정’을 보는데, 이 일이 열한 시를 넘겨서 끝난다. 이리하여 우리 세 사람은 거의 열두 시가 될 무렵 저녁밥을 먹을 곳을 찾았는데, 서울이라는 곳에서는 밤 열두 시에도 ‘밥 먹을 데’가 있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저녁밥을 먹다가 돌아보니, 어제 나는 아침이나 낮에 한 끼니도 따로 먹지 않았다. 고흥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느라 밥을 안 먹기도 했지만, 거의 여섯 시간 동안 편집 디자인 교정을 함께 보는 동안 밥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늦은 때에 비로소 ‘늦은 저녁’을 먹겠다며 서울 홍대 언저리를 걷는 동안 그때가 ‘밤 열두 시’인 줄마저 생각하지 못했다. 그무렵 밥을 먹고 보리술을 한잔 마시자면서 새로운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던 때는 새벽 두어 시 무렵. 삼십 분 넘게 이리저리 홍대 언저리를 걷고서야 그때가 몇 시 즈음 되는 줄 뒤늦게 알았는데, 그 늦은 밤에도 서울 곳곳은 불빛이 환했다. 별빛이나 달빛은 깃들지 않아도 전등불빛이 환한 서울에서는 때를 알기는 어려운 하루가 흐른다고 할까. 그렇지만 때를 알기 어렵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일을 하면서 수많은 이야기가 흐른다고도 할 수 있을 테지. 이튿날 아침 여덟 시가 된 이때에 어제 하루를 돌아보다가 괜히 웃음이 나온다. ‘아니, 어제 밤 열두 시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잖아? 게다가 밤 두 시 넘은 때에 보리술 한잔 하자면서 술집을 찾아다녔잖아?’ 하는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나온다. 2016.,5.3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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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첫 서울마실



  2016년 들어 첫 서울마실을 한다. 올 1월부터 5월에 이르는 동안 고흥집에서 글을 쓰고 텃밭을 일구며 아이들하고 새로운 배움노래를 부르느라 내내 바깥으로 안 다녔다. 오늘 ‘가제본 교정지’를 들고 서울에 간다. 열흘 뒤에는 인천에 ‘책잔치 초대’를 받아서 바깥일을 본다. 바야흐로 기지개를 켜면서 안팎에서 여러 가지 일을 보는 셈이라고 느낀다. 새벽 빨래를 하고 짐을 챙긴다. 아이들이 오늘 하루 재미나고 즐겁게 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야지. 2016.5.30.달.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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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나를 볶는 꼬투리



  바야흐로 ‘새 사전 원고’ 끝손질을 하는데, 오늘 두 가지 낱말을 새로 보태야 하느라 손이 많이 간다. 첫째 ‘볶다’라는 낱말을 보태고, 둘째 ‘꼬투리’라는 낱말을 보탠다. 흔히 쓰는 이 두 가지 낱말이 올림말에서 빠졌기에 아차 하고 무릎을 치면서 부랴부랴 보태려 한다. 그래도 이 원고를 다시 읽고 또 읽고 거듭 읽으며 이제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하고 느낀다. 끝손질을 하기까지 두 낱말이 빠진 줄 알아채지 못했으면 얼마나 아찔했을까. 아이들이 고이 잠들어 준 밤에 기운을 내어 마저 교정종이를 넘긴다. 2016.5.2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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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돌보기 (산후조리)



  통장에 8만 9천 원쯤 있기에 카드를 쓰기로 하면서, 곁님한테 먹일 미역하고 소고기하고 수박을 장만했다. 아기가 어머니 몸에서 열 달을 채우고 나면 곳곳에서 미역값을 보내 주곤 할 테지만, 아기가 어머니 몸에서 석 달쯤 살다가 너무 일찍 나오면 미역값을 보내 주는 손길이 없다. 돈이야 곧 벌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문득 달리 생각해 보았다. 미역을 가게에서 장만하기보다는 바다에서 손수 딸 수 있는 살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수박도 밭에서 손수 씨앗을 심어서 거두는 살림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하고. 겨울이 아닌, 그러니까 겨울에 낳는 아기가 아닌, 이 봄날 오월에 갑작스레 먼저 찾아온 핏덩이를 받으며 곁님을 돌보는 살림(산후조리)이 되면서 ‘주머니에 없는 돈’보다 ‘우리 살림을 어떻게 자급자족으로 새로 짓는가’ 하는 생각을 곰곰이 해 본다. 잠이 잘 안 오지만, 잠을 자야 ‘곁에서 자는 아이들’을 잘 보살필 수 있겠지. 2016.5.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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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6-05-22 04:41   좋아요 0 | URL
아....

숲노래 2016-05-22 06:20   좋아요 1 | URL
셋째나 넷째한테는 이름을 지어 주지 못했는데
문득 두 핏덩이한테 모두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별에서 새롭게 태어나리라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hnine 2016-05-22 05:02   좋아요 0 | URL
아내 분 몸 잘 추스릴수 있도록 숲노래님께서 잘 돌봐주시겠지요. 몸 뿐 아니라 마음도 잘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숲노래 2016-05-22 06:19   좋아요 1 | URL
넷째가 바람처럼 와서 바람처럼 가 버리려고 할 즈음부터
저는 오른어깨가 갑자기 결리면서
요새 설거지를 못해요.
얼추 열 해 만에 곁님더러 ˝며칠만 설거지 해 달라˝고 물었습니다 ^^;
설거지를 빼고는 다른 일은 여느 때처럼 하고 그러는데,
어쩌면 오른어깨 결림이 ˝넷째가 바람처럼 스쳐 가겠다˝고
저한테 미리 말을 건 일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더 잘 해야지요.
 

근로장려금과 빈곤층, 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이 올해에 근로장려금을 처음으로 받는다면서, 이 얘기를 이녁 페이스북에 올렸다고 합니다. 쉰다섯 살 나이에 처음으로 받는 근로장려금이라 조금 놀라셨지 싶습니다. 최영미 시인은 페이스북에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이라는 말을 적으십니다.


  최영미 시인은 ‘아는 교수’들한테 시간강의를 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아는 교수’들은 최영미 시인한테 ‘학위’를 물었다지요. ‘국문과 석사학위’가 없이는 ‘대학교 시간강의’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으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해마다 근로장려금을 받으면서 지냅니다. 올해에도 근로장려금을 받을 텐데, 나는 나를 ‘빈곤층’이라고 여긴다거나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아직 우리 살림살이에서 ‘돈’이 많지 않다뿐입니다. 돈은 많지 않아도 밭을 일구고, 아이들하고 자전거를 타며, 시골마을에서 서재도서관을 꾸리면서 하루하루 재미를 누립니다.


  나는 고등학교만 마친 가방끈인 터라, ‘학위’는커녕 ‘졸업장’도 딱히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를 불러서 한두 시간쯤 이야기(강의)를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가끔 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최영미 시인은 시집을 수십만 권 팔았다고 하는데 목돈이나 살림돈은 얼마 안 남으신 듯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돈이라고 하는 숫자’는 덧없거나 부질없을는지 몰라요. 최영미 시인 같은 사람조차 근로장려금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리 이름이 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근로장려금을 일찌감치 받았을 테고, 기초생활수급자로서 다른 기금을 받기도 할 테지요. 최영미 시인은 적어도 ‘기초생활수급자’이지는 않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돈 걱정을 안 하고 글을 쓸 수 있다면, 무척 아름다운 사회요 복지이자 문화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글 쓰는 사람뿐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도 돈 근심을 안 하고 흙을 만질 수 있어야지 싶어요. 도시 자영업자나 작가는 이럭저럭 ‘근로소득’이 잡힐 테지만, 시골에서 흙 만지는 사람한테는 ‘근로소득’이 잡히기란 매우 어려워요.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꿈을 키울 수 있기를 빕니다. 군대나 전쟁무기는 차츰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전쟁무기에 나랏돈을 들이지 말고, 사람들 살림살이를 보살피는 데에 나랏돈을 들일 수 있기를 빕니다. 2016.5.1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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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9 2016-05-19 17:23   좋아요 0 | URL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이 글을 보고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자신에 꿈을 키울수 있도록 복지,지원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갑니다.

숲노래 2016-05-19 17:20   좋아요 2 | URL
말씀처럼 참다운 복지정책이 서서
가난도 다른 고단함도 없이
누구나 즐겁게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