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여자회 방황 3
츠바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68



나는 너와 사이좋은 동무

― 제7여자회 방황 3

 츠바나 글·그림

 박계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3.10.30.



  놀이동무는 함께 놉니다. 일동무는 함께 일합니다. 길동무는 함께 길을 걷습니다. 생각동무는 함께 생각합니다. 꿈동무는 함께 꿈꿉니다. 책동무는 함께 책을 읽습니다. 만화동무는 함께 만화를 그리거나 읽고, 삶동무는 함께 삶을 가꿉니다. 어깨동무는 서로 어깨를 겯으면서 나아가고, 소꿉동무는 기쁜 놀이를 함께 지으면서 어린 날 꿈을 키웁니다. 배움동무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길에서 웃습니다. 웃음동무는 함께 웃지요.


  놀이동무는 하나일 수 있고, 둘일 수 있습니다. 일동무는 셋일 수 있고, 넷일 수 있어요. 길동무는 여럿일 수 있으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생각동무나 꿈동무나 삶동무 모두 여럿일 수 있는 한편, 하나일 수 있어요.


  동무는 아주 많아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동무는 하나만 있기에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동무는 가까이에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합니다.



- “나 항상 이사 다녀서 친구가 전혀 안 생겨서, 외로워서.” “아, 그럼 나랑 같네! 나도 옛날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 줄곧 친구가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친구가 생겨서 매일 즐거워! 괜찮아, 괜찮아!” “거짓말쟁이. 혼자서 어슬렁거렸잖아.” (18쪽)

- ‘몇 년이나 몇 년이나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은 커다란 공간에는 세계의 고독이 천천히 쌓여 가고, 그것이 결정화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관측한 시점에 또다시 형태를 잃거나 혹은 반대로 부풀어버린다.’ (88쪽)



  나한테는 동무가 있습니다. 먼 데서 사는 동무가 있고, 곁에 있는 동무가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나한테는 동무이고, 곁님도 나한테는 동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들이나 곁님 나이를 딱히 헤아리지 않으면서 살기 때문이고, 날마다 삶과 살림을 함께 나누는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동무 가운데에는 나이가 같은 동무가 있어요. 또래동무입니다. 그러니까, 동무라 할 적에는 나이가 크게 벌어질 수 있고 비슷하거나 같을 수 있어요. 이웃도 이와 같아요. 나이가 엇비슷해야 이웃이지 않아요. 서로 돈(재산)이 비슷하기에 이웃이지 않아요. 서로 같은 일을 하기에 이웃이지 않고, 한 마을에 함께 살아야 이웃이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돕고 어깨를 겯는 마음일 적에 이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상냥하고 기쁘게 손을 맞잡는 마음일 적에 동무입니다. 그래서, 아이와 어버이는 서로 살붙이로 지내면서 동무이고 이웃입니다. 서로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사랑이자 노래입니다.



- ‘정말로 나는 어디에서 온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나는 이방인.’ (137쪽)

- “확실히 아빠 회사는, 생활이 편해지는 도구를 많이 만들고 대단하지만, 아무리 세상에 편리한 것이 넘쳐흘러도, 아무리 유리한 제도에서 매일이 충족된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이런 옛날 전쟁에 관한 거나 공부해야 하는 건 어째서야? 매일 보건소에서 동물들이 죽어 가는 것도 어째서야? 왜 이사 가야 하는 거냐고!” (146∼147쪽)



  츠바나 님 만화책 《제7여자회 방황》(대원씨아이,2013) 셋째 권을 읽습니다. 《제7여자회 방황》 셋째 권에서는 이 만화책을 이루는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생각을 가꾸었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어버이를 따라 내내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던 아이한테는, 그러니까 ‘보금자리’가 없습니다. 마음을 놓거나 붙이거나 가꿀 만한 겨를이 없습니다. 둘레에서도 이 아이한테 따사롭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사랑이 흐르지 않은 삶이었고, 노래가 흐르지 않는 나날이었습니다.



- ‘사이토는 누구야? 이노우에는 누구냐고? 사토라는 이름은 몇 십 명이나 있었고, 누구 누군지 모르겠다. 좀더 일찍 버렸으면 분명 가벼웠을 텐데. 이런 것 받은 순간부터 이미 필요없었는데!’ (149쪽)

- ‘내가 갈 고등학교에는 처음에 친구 한 명씩 짝 지워 주는 나한테 유리한 제도가 있고, 나에게 있어서 그 상대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친구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믿는 나는 꽤 좋은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내 길을 믿고 있다. 나는 그런 꿈 많은 여자아이. 불평하지 말라고.’ (152쪽)



  나는 너와 사이좋은 동무입니다. 나는 너를 생각하는 넋입니다. 나는 너하고 함께 놀려 하며, 나는 너하고 함께 살려 합니다. 함께 꿈을 키우고, 함께 사랑을 가꾸어, 함께 노래와 춤을 누리려 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동무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 지구사람이고 지구동무이며 지구이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불어, 숲내음이 골고루 퍼집니다. 언제나 바람이 흘러, 바다내음과 들내음이 지구별에 가득 깃듭니다. 새 아침이 싱그럽습니다. 4348.2.1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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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란디의 생일 선물
안토니오 에르난데스 마드리갈 글, 토미 드 파올라 그림, 엄혜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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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2



노랫소리와 노래가 아닌 소리

― 에란디의 생일 선물

 안토니오 에르난데스 마드리갈 글

 토미 드 파올라 그림

 엄혜숙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09.5.12.



  봄이면 풀벌레가 깨어납니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풀벌레 노랫소리가 함께 무르익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풀벌레 노랫소리가 한결 우렁찹니다. 풀벌레가 저마다 온갖 소리를 낼 적에, 나는 시골에서 이 소리를 노랫소리로 느껴서 받아들입니다.


  경운기가 지나갑니다. 마을방송이 흐릅니다. 택배 짐차가 지나갑니다. 철마다 농약 치는 소리가 들리고, 두멧시골에까지 종교를 퍼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양복을 갖추어 입고 찾아옵니다. 풀벌레가 들려주는 소리가 노랫소리라 한다면, 경운기나 기계나 마을방송이나 종교 퍼뜨리려는 소리는 어떤 소리가 될까요. 자질구레한 소리일까요. 이러한 소리도 모두 노랫소리일까요.



.. 에란디는 일어나 얼굴을 씻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었어요. 마마는 에란디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주었어요. 에란디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지요 ..  (3쪽)




  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갑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탑니다. 버스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는 데까지 걸어서 갑니다. 읍내 버스역에서 이웃 도시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기차역에서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도 아이들도 발바닥을 구르면서 놉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아이들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나 수많은 사람들 복닥거리는 소리를 얼마든지 노랫소리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귀를 찢는 따가운 소리로 여길 수 있고, 때로는 사랑스러우면서 멋진 노랫소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왜 나한테 노래로 스며들까요. 이 소리는 왜 나한테 귀에 거슬릴까요. 나는 왜 이 소리를 귀여겨들으면서 흥얼흥얼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까요. 나는 왜 이 소리에는 귀를 닫고 눈마저 질끈 감고 싶을까요.


  어느 대목에서 노래와 ‘그냥 소리’가 갈릴까요. 어느 대목에서 ‘삶을 밝히는 소리’와 ‘삶에서 고단한 소리’로 나뉠까요. 내 마음은 나를 둘러싼 소리를 어떻게 맞이하고 싶을까요. 내 숨결은 내가 스스로 짓는 소리에 어떤 가락을 담아서 이웃한테 퍼뜨리고 싶을까요.



.. “에란디,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그럼요, 마마. 내 생일이잖아요!” 에란디가 말했어요. 내일이면 에란디는 일곱 살이 될 거고, 마마는 에란디에게 생일 선물을 사 줄 거예요. 에란디는 마을 피에스타에 입고 갈 새 옷을 갖고 싶었어요 ..  (7쪽)




  안토오 에르난데스 마드리갈 님이 글을 쓰고, 토미 드 파올라 님이 그림을 그린 《에란디의 생일 선물》(문학동네,2009)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시골마을에서 함께 살림을 가꾸는 어머니와 딸아이는 조용히 하루를 누립니다. 어머니는 그물을 손질하면서 고기를 낚고, 아이는 고즈넉한 시골에서 동무와 어울려서 놉니다. 어머니는 딸아이 머리카락을 곱게 빗으면서 아낍니다. 아이는 해마다 새롭게 찾아오는 생일을 기다리면서 고운 꿈을 꿉니다.


  그런데 두 어머니와 가시내한테 고빗사위가 찾아옵니다. 어머니가 고기를 낚을 적에 쓰는 그물이 낡고 해집니다. 어린 가시내가 새 옷을 한 벌 얻었지만, 새 인형을 장만할 돈은 없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이녁 머리카락을 잘라서 돈을 마련해 보려 하는데, 어머니 머리카락은 짧아서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아마 시골마을 어머니는 지난해에도 머리카락을 잘라서 돈으로 바꾸었나 봐요. 아직 머리카락이 길게 새로 자라지 못했나 봐요.


  일곱 살이 꽉 차는 가시내 에란디는 망설입니다. 그리고 알아챕니다. 어머니는 왜 머리카락이 짧은지 알아채고, 에란디네 집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에란디가 머리카락이 잘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에란디는 오직 제 뜻대로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자고 합니다.



.. 마마는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어요. “내 딸의 머리는 팔지 않아요.” 그때 에란디가 마마의 손을 잡아당기며 마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그렇게 해요, 마마. 내 머리를 팔아요.” 에란디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어요 ..  (20쪽)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너른 사랑을 나누어 주는 하루를 가꾸고 싶습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슬프거나 고단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아이도 같은 마음이에요. 아이도 어버이한테 너른 사랑을 나누어 주는 하루를 짓고 싶어요. 아이도 어버이가 슬프거나 고단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요.


  그림책에 나오는 시골마을 어머니가 아이 머리카락을 고이 아끼고 싶듯이, 시골마을 가시내도 어머니 머리카락을 고이 아끼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제 머리카락을 날마다 곱게 빗고 땋아 주듯이, 아이도 나중에는 어머니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서 땋아 주고 싶습니다. 둘이 오래오래 따순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하루를 아름답게 짓고 싶습니다.



.. “마마, 걱정 마요. 내 머리는 곧 전처럼 길고 예쁘게 자랄 거예요.” “네 머리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웠는데.” 마마가 말했어요. 에란디는 잠깐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마마, 이제 새 그물을 살 수 있어요?” ..  (27∼28쪽)



  어머니는 아이를 걱정하고, 아이는 어머니를 근심합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과 근심은 오래가지 않아요. 이내 사그라듭니다. 두 사람이 나누면서 키우는 사랑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어머니한테 다부지게 말하지요. 새 머리카락은 곧 다시 자란다고 말하지요. 어머니는 아이를 한결 포근하게 안으면서 생각합니다. 그래 우리한테는 새로운 앞날이 있지 하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사랑하고, 한결같이 꿈을 꿉니다. 늘 춤을 추고 기쁘게 노래합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파랗게 눈부신 꿈을 꿉니다. 파랗게 맑은 냇물을 길으면서 파랗게 눈부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해맑고 따스한 햇볕을 쬐면서 해맑고 따스한 놀이를 누리고, 해맑고 따스한 손길을 나누면서 해맑고 따스한 하루가 흐릅니다. 4348.2.17.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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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2 - Vol.15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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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2



남이 찍은 사진만 본다면

― 사진잡지 《포토닷》 15호

 포토닷 펴냄, 2015.2.1.



  사진잡지 《포토닷》 15호(2015.2.)를 읽습니다. 《포토닷》 15호를 보면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하는 몸짓을 넌지시 나무라는 이야기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신의 두상에는 창의성을 말살하는 획일적인 미술교육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동시에 한국에서 부쩍 성장하기 시작한 성형산업으로 인해 맹목적으로 추종되고 학습되어지는 ‘이상적인 미’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겼다(이철승/27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한국 사회에서 하는 미술교육을 보면 ‘베껴그리기’입니다. 내 그림을 그리도록 이끄는 미술학원을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거의 모든 미술학원은 ‘입시학원’입니다.


  논술학원도 거의 다 입시학원입니다. 노래나 춤을 가르친다는 학원도 거의 다 입시학원입니다. 피아노학원이나 태권도학원 같은 데는 어떠할까요? 이런 곳은 입시와 살짝 동떨어졌다고 할 만하지만,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억지스럽게 다녀야 하는 테두리에서는 엇비슷합니다. 마음껏 삶을 누리려고 하는 아이들이 기쁘게 다니는 학원은 참말 찾아보기 어려워요.


  한국에서 ‘사진기 있는’ 사람이 많고 ‘사진작가로 뛰는’ 사람이 많지만, ‘나다움’을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저을 만합니다. 학교와 사회와 제도와 문화가 모두 틀에 박힌 곳에서 잔뜩 억눌리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 분들 역시 작품을 보고 그곳이 어린이대공원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시더라고요. 이처럼 늘 옆에 있고 일상적인 것이라 미처 관심을 주지 못하고 놓치는 것들이 있는데 저는 이런 것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집중하려고 했어요(손준호/37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찍을 만한 모습은 늘 우리 옆에 있습니다. 아주 먼 데에 ‘놀라운 사진감’이 있지 않아요. 저 먼 나라에 간다든지, 적어도 일본이나 중국쯤 날아가야 ‘재미난 사진감’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집에도 재미난 사진감이 있고, 내 이웃과 동무가 날마다 일구는 삶이 놀라운 사진감입니다.


  내 옆을 볼 수 있어야 내 삶을 봅니다. 내 삶을 볼 수 있어야 내 옆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경을 신념과 이데올로기로 나누어진 체제로 만들고 바라본다. 그래서 풍경은 문화적 구조물이다. 풍경은 아름다운 의미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명사이다. 만일 장군이 아니라 시인이 바라본다면 아무르는 ‘아빠’라는 의미로 전환될 수 있지 않겠는가(남택운/92쪽).” 같은 이야기처럼, 적잖은 사람들은 틀에 갇히고 굴레에 허우적거립니다. 아름다움을 스스로 일구지 못합니다. 남이 만든 틀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줄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이름난 사람이 어느 것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외치면, 모두 줄달음치듯 그곳으로 가서 ‘이름난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아름답다는 것’에 빠져듭니다.


  책에도 베스트셀러가 있고, 사진에도 인기작가가 있습니다. 책에서도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움을 찾지 못하며, 사진에서도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움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꼬만 터주면 될성부를 사람을 만나면 충분히 대우해 주고 지원하려 한다. 돈을 깎지 않고 더 대접하면 그들도 흥이 나서 일하고 결과는 늘 풀러스 알파였다.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촬영할 때에 나의 목표는 모델이나 촬영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주느냐는 것이다(준초이/104쪽).”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생각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될성부른’ 사람입니다. ‘될성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아름다운 싹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싹을 스스로 틔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학교교육을 바라보셔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아요. 학교교육에서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시험점수’를 받도록 내몹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꿈을 키우고 싶으나, ‘다 같은 교과서’만 들여다보도록 내몰아요. 다 다른 아이들은 그예 ‘다 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고, 다 다른 아이들은 그만 줄서기를 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잘 할 만한지 모르는 채, 남들이 시키는 대로 휩쓸려요.


  이리하여, “대형전시는 객관적으로 작품을 선보인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좀더 정확하게는 관객에게 작품감상의 방식과 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감정까지도 ‘가이드라인’을 정해 두고 통제하는 모양새다. 그렇기에 어떤 대형 사진전에 가더라도 전시장 벽면에서 ‘감동’, ‘순간의 거장’, ‘이 시대 최고의 사진작가’와 같은 글자를 마주할 수 있다. 작가에 대한 신격화는 관객에게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평적, 주관적 감상을 거부하고 일관된 작품 감상법을 주입시킨다(이기원/117쪽).” 같은 이야기가 불거집니다. 왜 사람들은 ‘대형전시’를 보러 가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가꾸는 사진잔치를 보러 가지 못할까요? 왜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한 권조차 읽기 벅찰 만큼 바쁘게 살아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짓도록 돕는 수많은 책을 골고루 읽고 누리면서 느긋하고 아름답게 살기 어려울까요?






  이제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제는 남이 시키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바라는 꿈을 키워야 합니다.


  “온누리를 티없이 바라보려고 하는 어린이가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아이는 사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사진기로 삶을 지어서 놉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온누리를 휘어잡아 독재정권 문어발을 더 뻗으려는 어른이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어른은 사진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전쟁에 미친 어른은 전쟁을 부르짖고 싶어서 사진기를 내세웁니다 … 왜 사진을 찍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도 왜 거짓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일까요(최종규/129∼131쪽)?” 같은 이야기마따나, 우리는 누구나 삶을 즐기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미없습니다. 남을 속이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아슬아슬하며 조마조마합니다. 참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참되게 섭니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사랑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기뻐서 노래와 웃음이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내 눈길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내 삶을 가꾸면 됩니다. 내 하루를 손수 지으면 됩니다.


  남이 찍은 사진은 굳이 안 보아도 됩니다. ‘남’이 아닌 ‘이웃’과 ‘동무’가 찍은 사진을 보셔요. 그리고, 나 스스로 내 눈길로 사진을 찍어요. 내가 내 눈길로 찍은 사진을 이웃과 동무한테 보여주셔요. 그러면 됩니다.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은 먼 별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이야기가 사진문화요, 내 삶이 사진예술입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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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학의 논리 - 정보혁명 시대 네티즌의 무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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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2



말길을 아름답게 트는 한누리

― 민중언론학의 논리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3.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딘 때를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내 어버이한테 보여주었을 때, 두 분은 비싼 배움삯을 대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며 빚을 지셨습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무렵, 내가 대학교라는 데에 발을 걸치는 동안 들여야 한 빚(배움삯)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딜 적부터 ‘꿈’이 아닌 까마득한 ‘수렁’을 느꼈습니다. 이곳 대학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려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싸움터요, 온통 바보들이 득시글거리는(나 또한 바보였습니다) 중학교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더니, 더욱 끔찍한 싸움터이면서 더욱 바보스러운 이들이 넘치는(나 또한 더 바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라니, 나는 나를 얼마나 괴롭혀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중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이런 느낌이 똑같았어요.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는, 교사라는 어른들이 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를 개처럼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갈기고 온갖 거친 말에다가 갖가지 얼차려로 괴롭히거나 들볶았어도, 동무들끼리 모여서 하하 웃고 뛰놀면 모든 앙금을 풀 만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는 교사도 바보요 동무도 바보입니다. 나도 바보이지요. 그저 죽자 죽자 하고 뒹굴 뿐이었습니다.



.. 민중이 주체적 결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지식인’들은 민중이 게으르고 공짜만 좋아한다고 ‘훈계’하다가 친일의 길로 걸어갔다 … 식민사관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도 양적 확대재생산의 문제도 아니다. 식민사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체화한 한국 언론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거나 내일을 열어 가는 데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독자의 신뢰를 받아야 할 신문기업의 성격상 자신들의 친일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강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친일의 과거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가적 차원의 진상 규명조차 ‘종북’으로 ‘마녀사냥’ 해 왔다 ..  (36, 38, 44쪽)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동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둘째, 따분하고 지겨운 수업을 받는 동안 나 혼자 생각에 잠겨 홀가분하게 누리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셋째, 미술 시간에 하는 그림그리기는 재미없지만, 수업을 받는 동안 공책에 몰래 그리는 그림은 아주 재미있었어요.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혼자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동안 하늘을 마시고 바람을 쐬는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배웠습니다. 넷째, 함께 어우러져서 뛰논 동무는 몇 해가 흐르건 언제까지나 동무로 지낼 수 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몇 가지를 배웠어요. 중학교에서는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구나 하는 대목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중학교는 ‘더 큰 감옥’에 갇힐 수 있도록 길들이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어요. 중학교라는 데는 우리한테 있던 놀이를 모두 빼앗아 바보로 길들이려 하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지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놀이를 빼앗긴 몸이 되니, 동무란 없어도 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니,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서 ‘시험성적 높이기’만 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고, 동무를 짓밟아야 하며, 시험성적을 높였으니, 이제는 더 높은 대학교에 올라가서 내 밥그릇을 잘 챙기면 되는구나 하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나라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도덕과 교육과 예술과 학문과 종교에 걸맞다 싶은 ‘종(노예)’이나 ‘기계 부속’이 되는 길을 고등학교에서 아주 또렷하게 배웠습니다.



..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를 묻는 문항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45%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 수치는 신뢰도 1, 2, 3위로 나타난 한겨레(15%), KBS(12.3%), MBC(5%)를 모두 합친 숫자보다 많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신문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조선일보(4%), 중앙일보(3.7%), 동아일보(2%)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보다 한겨레의 신뢰도가 높다는 점이다 … 한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미국 언론에 비해 수용자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자신에게도 더 불신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것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존재원칙을 명확히 정립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한 과제다 ..  (49, 83쪽)



  모든 학교를 내려놓고, 모든 졸업장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책을 내려놓고, 모든 지식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무엇이 남을까요? 학교와 졸업장과 책과 지식을 내려놓은 나한테는 무엇이 남을까요? 네, 바로 ‘내’가 남습니다. 나한테는 오직 ‘나’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허물을 내려놓은 뒤에 비로소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고, 졸업장을 찢으며, 상장이나 표창장은 재활용품 사이에 끼워넣으니,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으니,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1998년 가을에 대자보를 석 장 썼습니다. 전지와 매직을 ‘근로장학생 알바를 하던’ 대학구내 서점에서 장만한 뒤, 세 시간에 걸쳐서 또박또박 대자보를 쓰고는,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게시판에 씩씩하게 붙였습니다. 어떤 대자보를 썼느냐 하면, “나는 오늘 이 대학교를 그만둔다(자퇴한다)”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서 왜 대학교를 그만두려 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려 하느냐 하는 이야기에다가, 나와 함께 이 길(대학 자퇴)을 걸으면서 삶을 스스로 새롭게 지을 동무를 기다린다는 뜻을 또렷하게 밝혔습니다.


  이때 붙인 대자보는 한 시간쯤 뒤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수위나 교수나 학교 관계자가 뜯거나 찢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이 대학교를 다니던 젊은이가 뜯어서 찢었습니다. 나는 대자보도 썼고, 학과방에는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도 갈기갈기 찢겨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갈기갈기 찢긴 대자보와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종잇조각을 나도 밟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종잇조각에 아쉬움을 남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정치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을 선택해 미디어법의 통과를 각각 성명과 호소문 형태로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연 사실은 그만큼 입법 의지가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자본이 힘을 모았을 때 여론 형성력을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영향력이 큰 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어 낸 한목소리에 언론까지 적극 가세했다 … 실제로 국회가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자리 2만 6000개가 늘어난다는 논리는 사실과 어긋남에도 계속 부각되었고 널리 퍼져 갔다. 명백히 사실과 다른 주장을 부각해 보도했으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정하거나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사실 확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  (92, 97쪽)



  손석춘 님이 쓴 《민중언론학의 논리》(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교재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나 피디나 작가가 되려고 하는 이들한테는 여러모로 길동무가 될 만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손석춘 님은 ‘민중’이라는 낱말이 ‘죽은 말’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낡거나 한물 간 이름’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민중’이라는 낱말은 ‘민중이 스스로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지식인이 지었어요.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민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어떤 이름으로 가리킬까요? 시민? 서민? 대중? 군중? 국민? 백성? 노동자? 인민? …… 이도 저도 모두 아닙니다.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아무런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알쏭달쏭하지요. 아리송하지요. 그러나,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따로 다른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민중인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멋진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거든요. ‘민중인 사람’은 이 나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착하면서 참답고 살가운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썼어요.



.. 후쿠자와는 “조선인민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글까지 발표해 조선 침략론을 전개했다. 따라서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을 권했던 1882년, 후쿠자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신문과 관련해서 ‘국민’을 계몽이나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박영효·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는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공론장과 중세사회의 변혁 열망을 적대시하게 된다 …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국제표준에 대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개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판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인권과 노동을 아예 생각도 못 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이론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  (165, 174, 206쪽)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습니다. ‘민중언론학’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려고 하는 ‘언론학 길잡이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까, 친일부역을 했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버렸으니까, 군사독재를 일으켰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등지니, 4대강사업이라든지 자유무역협정이라든지 밀양송전탑이라든지 온갖 핵발전소를 마구 밀어붙여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잊으니까, 전쟁무기와 군대로 자꾸 바보짓을 일삼아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인 줄 모르니까, 폭력이나 강간이나 차별이나 따돌림 따위를 자꾸 부추기지요.


  우리는 그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살폈습니다. 두 갈래인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이’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른’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한 가지로 갈립니다. 나이로? 아니에요.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지 않아요.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하나 ‘철’로 가릅니다.


  철이 들면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철든 사람은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철이 안 들면 철부지입니다. 철이 든 척하는 아이는 ‘애늙은이’입니다. 철부지는 떼쟁이요 바보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철 안 든 어른 모습인 사람’이 아주 많아요. 나이만 많대서 어른이 아니기에, 나이만 많으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일삼습니다.



.. 적어도 대학이 정부 및 기업과 논리를 공유하며 기업이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다 …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하더라도 고투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긴 리영희는 한국현대사 전공인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인터뷰에서 끝없이 공부해 나가는 자세를 밝혔다 … 경제적 이익 추구 차원이 아닌 경제적 고통을 풀어가는 ‘윤리적 차원의 사유’가 필요하다 … 이 땅의 학문적 사대주의는 조선왕조 내내 중국의 주자학을 맹신해 온 지배적 학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습관’처럼 언제나 무시하는 일본만 하더라도 오래전부터 학문의 자주성을 일궈 가고 있지만, 한국 학계는 미국식 연구방법이나 이론적 논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얕잡아보거나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고 폄훼하기 일쑤다 ..  (231, 266, 286, 323쪽)



  한국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정치집권자가 ‘사대주의’를 즐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치집권자는 스스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정치집권자는 손수 삶을 짓지 않았어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정치집권자나 학자나 지식인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늘 입으로만 떠들어요. 그래서 중국을 사대주의로 모시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사대주의로 받들다가, 해방 뒤에는 미국을 사대주의로 높이지요.


  한국에서 정치집권자뿐 아니라 모든 학자와 지식인은 온갖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과 이론을 폅니다. 안타깝지만, 《민중언론학의 논리》를 쓴 손석춘 님도 ‘한국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쓰는 말’로는 이 책을 펼치지 못해요. 손석춘 님도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을 펼칩니다. 다만, 손석춘 님은 ‘제 말’을 아직 못 찾았지만, ‘제 넋’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넋을 살려서 ‘사람다운 언론’이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사대주의란 정치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니고, 언론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말과 넋과 삶 모두 사대주의입니다. 광고도 대학교도 교육도 문학도 문화도 모두 사대주의로 흐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이끌려고 하는 《민중언론학의 논리》입니다. 이 책을 읽을 젊은이라면, 또 대학생이라면, 앞으로는 ‘내 사람된 참모습’뿐 아니라 ‘내 사람된 참말’도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 책을 읽을 ‘나이든 어른’이라면, 이제껏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삶을 가만히 되새기면서, 이제부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길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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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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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67



내가 부르는 소리

― 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6.25.



  설날을 앞두고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큰 청소’가 한창입니다. 그동안 시골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에 모처럼 찾아와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줄 못 느낄 테고,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또 고샅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런 모습을 아예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동차로만 움직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 도시에는 풀도 꽃도 나무도 둘레에 없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기에 알맞도록 아스팔트 찻길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를 심는다 하더라도 시늉일 뿐이고, 그나마 시늉으로 심은 나무조차 제대로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래도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설을 앞두고 풀을 뽑습니다. 아니, 설 앞이니 풀을 뽑지는 않고 밭두렁과 논두렁을 태웁니다. 온통 불잔치입니다. 이곳에서도 불을 피우고 저곳에서도 불을 피웁니다. 불을 피우는 김에 이런저런 쓰레기도 함께 태웁니다. 나중에 설이 지나고 보면, 설을 맞이해서 도시에서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에 있던 플라스틱과 종이도 함께 태워요.


  마을에서는 곳곳에 불을 지르느라 부산하고, 면소재지에서는 마을방송으로 ‘논둑과 밭둑을 함부로 태우지 말라’고 알리느라 부산합니다. 면소재지 공무원은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면사무소 책상맡에서 녹음테이프로 방송을 할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은 온통 새하얀 연기에 둘러싸입니다. 마당에 서도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고, 창문을 꼭꼭 닫아도 연기 냄새가 스며듭니다.




- “간판? 연주자를 그런 기준으로 보십니꺼?” “보지. 나는 일반론으로 하는 말이야.” (27쪽)

- “사와무라 마츠고로, 네 할아버지 맞지? 그 연주는 신기였어. 그런데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아는 것은 일부 연주자와 그 지방 사람들뿐. 평생 가난에 찌들었지?” “할배는, 그래도 행복했어예!” “난 말이야! 그 재능을! 그 보배를! 후세를 위해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워 죽겠다고! 마츠고로는, 보물을 혼자 끌어안고 죽어 버렸어!” (28∼29쪽)



  낮이 지나면서 비가 옵니다. 겨울비입니다. 겨울비는 마을마다 지핀 불을 잠재웁니다. 곳곳으로 퍼지던 연기는 비를 맞으면서 사그라듭니다. 이제 조금 숨을 쉴 만합니다. 겨울을 떠나 보내려는 비가 오면서 시골자락은 한결 샛노란 빛이 되고, 겨우내 시든 누런 풀잎은 곧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될 테지요.


  뒤꼍에 서서 비를 맞으며 겨울눈을 바라봅니다. 우리 집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에 돋는 겨울눈을 쓰다듬습니다. 앞으로 한 달 뒤면 움이 틀까요. 아니면 보름 뒤에 움이 틀까요. 포근하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들과 숲과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가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웁니다. 나는 아이들과 이 고운 바람과 기쁜 햇볕을 맞이하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 “다른 사람이 쓰는 게 더, 내가 쓰면 샤미센이 불쌍할 것 같아서.” “불쌍해? 샤미센의 마음을 니가 아나?” (38쪽)

- “샤미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잖아?” “응?” “사와무라가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라고 다른 애들도 생각할 거야.” “그치만도 나는 누가 갈키 주나?” “뭐? 사와무라도 누군가한테서 배우고 싶었어?” (39∼40쪽)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3) 셋째 권을 읽습니다. 샤미센을 켜는 아이들이 나오는 《순백의 소리》인데, 셋째 권에서는 ‘샤미센을 켠 적이 없는 동무’한테 샤미센을 가르쳐야 하는 아이가 나오고,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소리를 어떻게 삭혀야 할는지 헤매는 아이가 나옵니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하고 똑같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새롭게 들려줄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아마 할아버지도 처음에 혼자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처음에 ‘어린이’였을 적에는 이녁 할아버지나 둘레 다른 사람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면서 마음으로 담고, 온갖 소리를 하나하나 녹여서 ‘내 소리’로 누리는 동안, ‘새로운 내 소리’ 하나가 태어났으리라 생각해요.




-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니는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만 봐 오지 않았나. 우선은 초보자를 상대로, 썽내지 말그라.” (59쪽)

- “내 주위엔 그 정도는 당연히 켜는 사람밖에 없었다. 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사람이 대회까지 얼마나 늘지 내 우예 아노? 대회 때, 나는 느그들 수준에 맞춰 줄 생각 없다.” (61∼62쪽)



  내가 부르는 소리는 내가 사는 소리입니다. 내가 부를 소리는 내가 살아갈 소리입니다. 내가 부른 소리는 내가 살아온 소리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에 따라 내 소리를 빚습니다. 내 소리는 오롯이 내 삶이면서 내 꿈이요 내 길입니다. 내 소리는 옹글게 내 사랑이면서 내 빛이며 내 손짓입니다.


  더 나은 소리가 없고 덜떨어지는 소리가 없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1등이 되어야 훌륭한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을 때에 나 스스로 즐겁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으려고 저마다 새롭게 배워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써요.




- ‘이때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엇에 짜증이 나느냐고 그걸 알면 이렇게 짜증나지도 않지!’ (96∼97쪽)

-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소리가 되고 싶다!’ (105쪽)

- “다들 나한테는 관심 없다.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할배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뿐이지.” (128쪽)



  빗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겨울빗소리는 끝납니다. 이월이 무르익다가 삼월로 접어들면, 이때부터는 봄빗소리입니다. 겨울비와 봄비는 다르고, 가을비와 여름비는 달라요. 겨울볕과 봄볕은 다르며, 겨울노래와 봄노래는 다르지요.


  똑같은 날이 없으니 똑같은 소리도 없습니다. 똑같은 하루가 없으니 똑같은 노래도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 똑같은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모두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삶을 짓습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 나오는 아이들이 웃고 노래합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이 겨울빗소리를 가만히 귀여겨들으면서 내 하루를 웃고 노래합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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