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은 따뜻하다 창비시선 88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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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5



시와 뼈다귀

―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10.25.



  고흥 시골자락을 떠난 시외버스는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서울에 닿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자락을 떠나 도시로 볼일을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시외버스에서 시집을 세 권째 다 읽습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시외버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죽이고 피가 튀는 모습이 흐르고, 내가 앉은 자리에서 네 칸쯤 앞에 앉은 일곱 살짜리 아이는 이런 방송을 버젓이 들여다봅니다.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나들이를 가는 할매도, 할매 곁에 있는 여러 할배도, 시외버스 일꾼도, 일곱 살 아이가 ‘사람들이 때리고 죽이고 거친 말을 일삼는 온갖 몸짓’이 흐르는 연속극을 안 보게 하도록 멈추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멍하니 이 연속극을 들여다봅니다.


  재미 삼아서 보면 될 연속극일 수 있습니다. 주먹다짐 연속극도, 살 섞는 이야기 흐르는 연속극도, 일곱 살 아닌 대여섯 살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틀어도 될는지 모릅니다. 아니, 한국 사회는 어른과 아이를 모두 주먹다짐 물결과 살섞기 바람으로 휘감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 내 너를 위해 더듬이를 잘라야겠느냐 / 내 너를 위해 저녁해를 따라가야겠느냐 / 모래내 성당의 종소리는 들리는데 / 개연꽃 피는 밤에 가을달은 밝은데 ..  (이별에게)



  서울로 접어든 시외버스는 오직 아스팔트만 있는 찻길을 달려 고속버스역에서 멈춥니다. 서울에서는 길바닥이 아니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길바닥 아닌 다른 데를 보고 걷다가는 전봇대에 부딪히거나 광고판에 부딪히거나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다른 사람이 툭툭 치고 지나갈 테니까요. 서울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나무를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걷기 어렵습니다. 겨울눈이 텄구나 하고 생각하며 쳐다보고 길을 걷다가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거님길을 빠르게 내달리는 자전거한테 치일 수 있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언제나 나무를 바라보며 지냈으나, 볼일을 보러 서울로 오면 길바닥만 바라봅니다. 사람이 걷기에는 너무 좁은 길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와 다른 사람한테 치이지 않으려고 바삐 걸음을 놀립니다.



.. 어둠 속에서도 풀잎들은 자라고 / 오늘도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흐린 불빛을 바라보며 / 내가 던진 마음 하나 별이 되어 사라지면 ..  (당신에게)



  서울을 가득 채운 아주 많은 사람은 저마다 일이 많아 바쁩니다. 발걸음도 바쁘고, 살림돈을 벌어서 달삯을 치르느라 바쁩니다. 여기를 갔다가 저기를 가느라 바쁩니다. 그래도 저마다 손에 손전화를 들고 무엇인가 들여다봅니다. 손에 종이책을 쥐는 일은 드물지만, 손전화에 찍히는 글은 바지런히 들여다봅니다. 책은 안 읽어도 글은 읽는 셈입니다. 다만, 삶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요, 사랑을 노래하는 글이 아니며, 꿈을 짓는 글이 아닙니다. 10초만 지나면 낡거나 삭는 ‘새롭지 않은 새소식’만 들여다봅니다. 10초만 지나도 잊고 마는 수없이 많은 ‘쪽글’만 들여다봅니다. 하나같이 바쁘면서 ‘새롭지 않은 새소식과 쪽글’을 들여다보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 넓은 서울에서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무척 드물고,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 매우 드뭅니다. 지하철역 유리벽에 시 몇 줄을 아로새기기는 하지만, 이 시 몇 줄이나마 읽을 겨를을 낼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유리벽에 아로새긴 시 말고, 정갈한 마음으로 곱게 꿈을 지은 이야기를 엮은 시집 한 권 장만하려고 동네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  (가을꽃)



  정호승 님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0)를 읽습니다. 시골집을 떠나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에서 읽습니다. 시골집을 벗어나 읍내로 가까이 갈수록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흘깃 바라보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고흥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탄 뒤로는 차츰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살짝 쳐다보다가 시집을 다시 읽습니다.


  별은 따뜻합니다. 저 먼 별도 이 지구별도 따뜻합니다. 연속극을 쳐다보는 일곱 살 시골아이도 따뜻하고, 큰 소리로 연속극을 틀고 시외버스를 모는 일꾼도 따뜻합니다.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따뜻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 속에 묻히셨다 ..  (어머니)



  그런데, 서울에서는 해가 질 무렵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새벽에도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달조차 볼 수 없고, 볼 수 없는 별과 달은 아예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서울인데, 경기도를 아우르면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이 우글거리는 도시인데, 이곳에서 별을 그리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정호승 님은 《별들은 따뜻하다》 같은 시집을 선보이지만, 정호승 님 스스로 서울에서 별을 얼마나 쳐다보고 나서 이러한 시집을 쓸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밤새 환한 불빛 때문에 별이 안 보이기도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숲 때문에 별이 가리기도 하지만, 엄청난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을 잿빛으로 덮어 별이 묻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두 발로 디디는 이 지구별부터 제대로 느끼려고 하는 몸짓은 아주 드물다고 느낍니다.



..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집을 짓다가 // 홀로 바람 되어 / 산길 따라 떠난 사내 // 지은 죄 많아 영혼 없어도 / 이제는 죽음도 아프지 않아 // 별들의 시냇물 소리에 / 새벽잠 드는 사내 ..  (金宗三)



  뼈다귀를 묻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고기를 뜯는 사람은 많아도, 고기가 밥상에 오르기까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다가 잡히는가를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뼈다귀를 묻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할 만한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이요, 고작 한 평짜리 자투리땅조차 대단히 비싼 값으로 사고파는 서울입니다.


  돈이 될 만하면 시멘트 건물을 높이 올리는 서울입니다. 언제나 돈부터 따져야 하는 서울입니다. 삶을 생각하거나 사랑을 헤아리는 보금자리하고는 너무 먼 서울입니다. 아이와 함께 꿈을 짓거나, 어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두레를 하기에는 너무 벅찬 서울입니다. 지구가 무너지더라도 나무를 심는다는 사람이 있다지만, 막상 이곳 서울에서 나무 한 그루 심겠노라 외치는 사람은 어디에서 만날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아파트를 내 집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아이와 함께 나무를 심을 만한 보금자리를 찾거나 살피려는 사람은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으니 책을 읽으려 하기 어렵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려 하지 않으니 손수 시를 쓰고 노래하면서 웃기란 어렵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푸른 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별을 볼 텐데, 서울에서 부산하게 하루를 여는 아주 많은 이웃들이 이녁 따순 가슴을 자꾸 잊으면서 그예 쳇바퀴만 돌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는 ‘어느 별이 어떻게 따뜻한지’를 밝히거나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문득 뼈다귀가 떠오릅니다. 4348.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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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루이 - 개정판
리비 글래슨 지음, 장미란 옮김, 프레야 블랙우드 그림 / 은나팔(현암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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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73



네가 나를 부를 적에

― 에이미와 루이

 리비 글레슨 글

 프레야 블랙우드 그림

 장미란 옮김

 다다북스 펴냄, 2007.3.3.



  잘 자던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납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요? 아이는 틀림없이 무슨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납니다. 아마 누군가 저를 부른 듯합니다. 잠결에 들은 살가우면서 반가운 소리는 잠을 한달음에 지웁니다. 나도 아이들 사이에서 잘 자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가운 멧새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고,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달이나 별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갓난쟁이가 밤오줌을 누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깼습니다. 또는, 갓난쟁이가 ‘아 쉬 마렵네’ 하고 마음속으로 읊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벌떡 일어나서 아이 귀에 대고 “쉬 할래?” 하고 소근거리면 아이는 “응.” 하고 가볍게 대꾸하고는 두 팔을 벌려 안아 달라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를 안아서 오줌그릇에 앉히면 홀가분하게 쉬를 하고 다시 팔을 벌리지요.



.. 에이미와 루이는 하늘만큼 높이 탑들을 쌓았어요. 깊은 구덩이를 파서 곰 인형들을 묻기도 했어요. 구름이 만들어 내는 마법의 동물들도 같이 구경했어요 … 에이미가 찰흙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루이는 방 한구석에서 변장을 하고 있다가 방 저쪽에 있는 에이미를 불렀어요. 에이미가 부르는 것과 똑같이요 ..  (2, 6쪽)





  그림책 《에이미와 루이》(다다북스,2007)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두 아이 ‘에이미’와 ‘루이’는 소꿉동무입니다. 두 아이는 날마다 즐겁게 어울리고, 언제나 기쁘게 놉니다. 두 아이는 스스로 놀이를 짓습니다. 두 아이는 스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두 아이는 스스로 웃고 떠들면서 하루를 아름답게 누립니다.


  그런데,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네 어버이가 보금자리를 옮깁니다. 땅을 파고 하늘을 보며 숲내음을 맡을 수 있던 마을을 떠나, 멀디먼 지구 맞은편 큰도시로 갑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남은 아이는 놀이동무가 사라져서 놀 기운이 없습니다. 시끌벅적하면서 놀이터조차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도 놀이동무가 없으니 놀 기운이 없습니다. 두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그러던 어느 날 에이미네 식구들이 멀리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지구 반대편으로요 ..  (11∼12쪽)




  도시로 가든 다른 마을로 가든,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까닭이 있어서 보금자리를 옮깁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살림을 꾸려야 하니, 새로운 터로 옮겨서 지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버이 자리에 선 사람은 ‘어버이가 할 일’만 생각하느라 ‘아이가 누릴 놀이’는 그만 잊지 않나요? ‘어버이가 할 일’이 대수로운 만큼 ‘아이가 누릴 놀이’가 대수로운 줄 잊지 않나요?


  어버이한테는 ‘할 일’이 있고, 아이한테는 ‘누릴 놀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놀면서 자라야 합니다. 가까이에 놀이동무가 있으면 두 아이나 여러 아이는 신나게 뛰놀아야 합니다. 가까이에 놀이동무가 없으면 어버이는 아이한테 즐거우면서 살가운 놀이동무로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놀면서 크고, 놀면서 배우며, 놀면서 사랑과 꿈을 키우는 삶이니까요.



.. 에이미가 사는 곳은 구덩이를 팔 땅도 없고, 탑을 쌓을 곳도 없고, 구름은 늘 비만 뿌려댔어요. 에이미는 밤에도 낮에도 루이를 생각했어요 ..  (17쪽)




  그림책에 나오는 두 놀이동무는 그만 헤어집니다. 두 놀이동무는 아직 글을 모르지 싶습니다. 글이라도 알면 편지라도 주고받을 텐데요. 그런데, 두 놀이동무네 어버이는 ‘놀이동무가 헤어져 서운하며 기운이 빠지는 하루’를 제대로 못 느끼지 싶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두 아이를 따사로이 바라볼 줄 아는 어버이는 없구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두 아이네 어버이는 ‘헤어진 놀이동무’를 그리는 아이들 마음을 도무지 못 읽습니다.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이는 하루 내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이는 학교에 가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나요. 아이는 그저 시험공부를 잘 받아서 대학교에도 가고 돈 잘 버는 회사에 들어가야 하나요. 아이가 어릴 적에 놀이를 모르면서 놀지도 못하는 채 보내야 하나요.



.. 루이가 아빠한테 물었어요. “에이미를 아주 크게 부르면 에이미가 들을 수 있을까요?” 아빠는 고개를 저었어요. “에이미는 지구 반대편에 있단다. 에이미가 아침에 일어나면, 너는 밤이라서 자고 있어.” 루이가 할머니한테 물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에이미를 부르면 에이미가 들을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말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한번 불러 보렴.” ..  (18∼19쪽)




  시골마을에 사는 ‘루이’는 외로우면서 쓸쓸하지만, 곁에 할머니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루이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그래요.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한다면,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지켜보아야지요. 기운을 북돋아서, 아이가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와야지요.


  루이는 크디큰 소리로 외칩니다. 놀이동무를 그리는 마음을 하늘에 띄워서 날립니다. 루이가 외친 크디큰 소리는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됩니다. 루이 마음을 담은 구름과 바람은 훨훨 날아 ‘에이미’한테 갑니다. 루이가 마음을 구름과 바람에 담아 띄운 때는 한낮이지만, 이때에는 에이미가 한참 잡니다. 두 아이가 지내는 나라는 낮과 밤이 다르거든요.


  에이미는 밤에 잠을 자면서 루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소리를 듣습니다. 루이는 마음을 띄워 보내면서 비로소 기운을 차립니다. 에이미는 마음을 받으면서 새롭게 기운이 납니다. 두 아이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지낸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함께 있으니, 두 아이는 늘 가슴속에 사랑과 꿈을 키울 만합니다.


  이제 두 아이는 한 가지를 새롭게 배웁니다. 그동안 두 아이는 함께 붙어서 놀며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기쁜 놀이’를 배웠으면, 오늘부터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마음이 함께 있는 줄 깨닫는 즐거운 삶’을 배웁니다. 4348.1.1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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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5 08:23   좋아요 0 | URL
아..네가.불러서..어린날..자다..그렇게 문밖으로 불려나간 거였네...멀리서도 불렀구나..너.

숲노래 2015-01-16 05:31   좋아요 0 | URL
모두들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지 싶어요
 
이바구길
사진사관학교 일우 엮음, 김홍희 기획 / 디자인하늘소(Designhanulso)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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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1



‘한길’인가 ‘일방통행’인가

― 이바구길

 김홍희·사진사관학교 일우

 디자인하늘소 펴냄, 2013.7.25.



  사진책 《이바구길》(디자인하늘소,2013)을 읽습니다. ‘사진사관학교 일우’에서 사진을 배우는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몇 장씩 찍은 사진을 책 한 권으로 그러모았습니다. ‘이바구길’은 부산 동구에 있는 산복도로를 걷다가 만난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넘긴 뒤, 책끝에 붙은 말을 읽습니다.


 “부산 동구의 ‘이바구길’은 고통을 감내한 자들이 자존감을 밝히는 길이다.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희망도 아니며 실오라기 같은 자존심도 아니다. 도도히 고통을 딛고 선 자들의 자기 독백이다. 한숨도 아니며 한탄도 아니다. 모진 세파를 겪어 온 자신을 담담히 드러내는 길이다. 자랑할 것도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다(김홍희).”


  사진을 읽으면서 ‘사진에 찍은 동네’가 어떤 이야기를 담으면서 어제에 이어 오늘이 흐르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어느 곳을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눈길로 바라보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에 나오는 이웃’을 ‘사진을 찍은 사람’이 어떻게 마주하려 했는가를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바구길 사람’일 수 있고, ‘이바구길 길손’일 수 있으며, ‘이바구길 나그네’일 수 있는 한편, ‘이바구길 구경꾼’일 수 있습니다. ‘사진사관학교 일우’ 사람들과 ‘김홍희’ 님은 어떤 사람으로서 이바구길을 걸었을까요? 어느 날 하루 걸었을까요? 여러 날에 걸쳐 걸었을까요? 여러 달이나 여러 해에 걸쳐 걸었을까요?


  이바구길을 어느 만큼 걷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봄에 걷든 가을에 걷든, 여름에 걷든 겨울에 걷든, 딱히 대수롭지 않습니다. 열 시간을 걷든 한 시간을 걷든, 날마다 몇 시간씩 걷든, 어느 하루 꼭 십 분을 걷든, 모두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걷는 시간’으로도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걷는 시간’과 맞물리는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마음결’에 따라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마음결이 포근한 사람은 열 시간을 걷든 십 분을 걷든 포근한 숨결이 감도는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은 몇 해를 걷든 하루를 걷든 착한 눈빛이 서린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자리가 어두운 사람은 몇 달을 걷든 몇 분을 걷든 어두운 기운이 담긴 사진을 찍습니다.


  이 사진을 찍기에 훌륭하지 않고, 저 사진을 찍기에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과 생각과 꿈과 사랑이 깃듭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마다 마음과 생각과 꿈과 사랑이 다르니, 이러한 숨결을 좋다 나쁘다 잘됐다 안됐다 하고 가를 수 없습니다.


  “부산 동구의 이바구길을 일우 친구들이 찍었다. 이야기의 속성처럼 긍정적인 시선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진은 현실을 개탄하기도 한다. 모두 애정에서 출발했지만 관심의 표명은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이야기이고 그래서 다양한 삶이다(김홍희).”


  사진책 《이바구길》은 ‘여느 출사 사진책’하고 다릅니다. 사진을 깊고 넓게 배우려는 이들이 함께 배우고 함께 생각하면서 함께 길을 걷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다만, 이 사진책에는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만 맴도는구나 싶습니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와 ‘찍히는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를 함께 담기에 사진이 되는데, 사진책 《이바구길》에서는 ‘찍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에 치우쳤구나 싶어요. ‘찍히는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가 무엇인지 여러모로 어렴풋합니다.


  볕이 좋은 날, 바다가 바라보이는 비탈골목집 옥상에 넌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는 사진에서 어렴풋하게 ‘찍히는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가 드러날 듯 말 듯하다가 끝내 이 사진에서도 ‘찍히는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는 좀처럼 못 드러났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찍히는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가 드러나지 못했다고 해서 ‘안 좋은 사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진입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가를 수 없는 사진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한길이고, 어느 모로 보면 일방통행입니다. 볕이 좋은 날에 옥상에 빨래를 넌 사람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무엇을 생각하며 빨래를 널었을까요? 이러한 이야기와 손길과 숨결까지 사진에 담지는 않았구나 싶어, 사진책 《이바구길》은 어느 모로 보면 한길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일방통행으로 흐르는 이야기가 모였습니다. 4348.1.1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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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씨 - 최명란 동시집
최명란 지음, 김동수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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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9



이야기가 자라는 마음밭

― 수박씨

 최명란 글

 김동수 그림

 창비 펴냄, 2008.4.30.



  최명란 님이 글을 쓰고 김동수 님이 그림을 넣은 동시집 《수박씨》(창비,2008)를 읽습니다. 예쁘장한 말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동시집이로구나 싶습니다. 이 동시집을 읽는 아이들은 예쁘장한 말과 그림을 함께 보면서 살며시 웃음을 지을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누구나 예쁩니다.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고 하듯이, 예쁘지 않은 아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니까, 어른 가운데에도 예쁘지 않은 어른은 없습니다. 모든 아이가 예쁘고, 모든 어른이 예쁩니다. 아이가 하는 말은 모두 예쁘며, 어른이 하는 말도 모두 예쁘지요.



.. 어미 닭이 / 알을 품었어요 / 쫄쫄 굶으며 / 꼼짝도 안 해요 ..  (어미 닭)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예쁜 까닭은 겉모습을 꾸미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예뻐서 사랑스러운 까닭은 겉치레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으면 내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기에 조약돌 하나를 갖고 온누리를 읽으면서 놉니다. 내가 나를 꾸밈없이 마주하기에 나무열매와 나뭇가지로 놀잇감을 엮어 소꿉놀이를 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놀이를 하고, 눈이 오는 날에는 눈놀이를 합니다. 구름이 흐르는 날에는 구름놀이를 하고, 해가 방긋 웃는 날에는 해놀이를 하지요. 모든 삶이 놀이요, 언제나 즐겁습니다. 어디에서나 놀이요,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즐겁습니다.



.. 나는 엄마 품 안의 / 초승달이다 ..  (나는 초승달)



  겉모습을 바라보려 하면 알맹이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겉치레에 휩쓸리면 속내를 잊기 일쑤입니다. 동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우리는 마음결을 차근차근 살펴서 즐겁게 담으면 됩니다. 덧붙이거나 덧씌울 일이란 없습니다. 수수한 모습 그대로 가장 따스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동시집 《수박씨》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단출하면서 깔끔한 싯말과 그림은 여러모로 예쁩니다. 다만, 예쁘장한 말과 그림은 있되, 이 다음으로 아이들이 생각할 꿈과 사랑은 무엇일까 아리송합니다. 동생 어금니에 썩은 자국을 바라보면서 까만 수박씨를 닮았다고 읊는 말은 재미있고 예쁩니다. 그런데, 어금니는 왜 썩을까요. 왜 썩은 자국이 자꾸 보일까요. 아이들 이는 어느 때에 튼튼하면서 단단할까요. 과자나 사탕을 먹기에 이가 썩을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면서 뛰놀 때에 이가 단단하면서 튼튼할 수 있을까요. 썩은 이는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는데, 썩은 이를 바라보고 나서 서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기쁘게 웃을 수 있을까요. 썩었으니까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아야 할는지요, 아니면 아이한테 네 몸을 네가 손수 지키고 다스리면서 아끼는 길을 들려줄 수 있는지요.


  오늘날 학교를 보면 언제나 시험입니다. 시험으로 가득한 학교에서 겨우 벗어난 아이들은 집과 동네에서도 언제나 시험입니다. 학교에 있든 학교 바깥으로 나오든 으레 시험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시험에 짓눌린 채 아프고, 시험에 짓눌린 채 아프니 이 아픔을 털어내려고 거칠거나 쓸쓸한 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마음껏 놀거나 신나게 뛰놀 틈이 없거든요. 놀이가 없고 놀이동무가 없으니, 아이들로서는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무거워요. 그러면, 이때에 어떤 이야기밥을 아이들한테 줄 만할까요. 학교에서든 학교 바깥에서든 집에서든 동네에서든 꿈·삶·사랑이 모두 없으니, 어린이문학에서도 꿈·삶·사랑은 안 그려도 될까요.



.. 올챙이는 개구리의 아기 ..  (냇가에서) 



  학교에서 겪거나 집에서 부대끼는 여러 가지 일을 아이와 나누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다만, 재미에서만 그친다면 이 이야기는 흐르지 못합니다. 가벼운 재미를 찾는 일은 더 좋지도 더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예 가벼운 재미로 그칠 뿐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자랄 아이요, 사랑을 주면서 함께 지내는 어른이니, 아이와 어른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조금 더 헤아려서 ‘예쁘장한 말과 그림’에 따사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빕니다. 손수 짓는 삶을 보여주고, 손수 가꾸는 사랑을 들려주며, 손수 일구는 꿈을 그릴 수 있는 글과 그림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야기가 자라는 마음밭입니다. 마음밭에 심는 씨앗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누리는 하루가 달라집니다. 이야기가 살아서 숨쉬는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자리에 어떤 꿈을 짓느냐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맞이하는 하루가 달라집니다. 이야기가 태어나서 흐르는 마음결입니다. 마음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보금자리를 가꾸는 하루는 새로 깨어납니다.



.. 땅속에는 / 고구마도 있고 / 감자도 있고 / 땅콩도 있다 / 내 마음속에는 / 피자도 있고 / 라면도 있고 / 아이스크림도 있다 ..  (있다)



  우리 아이들한테 무엇이 있으면 즐거울까요. 우리 어른들한테 무엇이 있으면 기쁠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며 놀아야 신날까요. 우리 어른들은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일해야 아름다울까요.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수수하게 그리되,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깃든 넋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하루를 누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그릴 수 있는 동시가 되기를 빕니다. 땅에는 씨앗을 심고, 씨앗을 심은 땅을 아끼며, 씨앗이 자라서 돋는 잎과 꽃을 사랑하고,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맺는 온누리를 가꾸는 손길을 어린이문학으로 빚을 수 있기를 빕니다.


  수박씨를 땅에 심어요. 수박씨에서 싹이 트기를 기다려요. 수박씨에서 튼 싹이 자라고 자라서 수박꽃을 피우고 커다란 수박알이 맺도록 돌보고 지켜봐요. 수박알이 소담스레 익으면 이웃과 동무를 불러서 함께 먹어요. 아이와 함께 그릴 ‘수박씨 이야기’는 훨씬 넓고 깊으면서 애틋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지어서 부를 ‘수박씨 노래’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면서 환합니다. 눈으로 보았으면, 이 다음에는 손으로 가꾸고, 이러면서 마음과 생각으로 하루를 짓는 동시가 되기를 빕니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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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4 15:0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한 동네 살던 동생의 한 반아이가 그렇게나 그 동생을 괴롭혔다.
그 동생이 항렬도 성도 같은 집 안은 아니었는데 발음은 같은 성씨..더구나 돌림자마냥 마지막 자까지 같아서 어릴때부터 그애 숙제봐주기도 내 몫 .그애 시험지나오는 날도 나까지 검사를 당하는 기분..내가 그 애보다 이년 위. 큰 차이는 아니었는데..그 앨 괴롭힌다는 그 머슴애를 혼내주라는 지령을 받았었다.그 동생은 반에서 키가 제일 컸는데 그 남자애도 그랬다.그래서 죽어라 짝이되서는 6년을 붙어지내야했던..불운한 (?)운명..어쩌냐..김치국..아하핫..내가 6학년 그내가 4학년 였을 때 기억이다.
수박씨...아마도 먹는 과일의 수박씨를 말함이겠지..그런데 나는 이름이 수박이고 누구누구 씨..할때..씨를 붙이는 상상을 하며..웃고있다..
아주 옛날의 동생기억까지 불러 들이면서..그앤..중간에..부천으로 이사를 갔다.
헤어져 동네는 썰렁하고 이젠 학생이라곤 얼마 안남은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가 뭔가...
이십리? 흥...! 학교가는 길엔 중부고속도로가..떡하니 놓여..허리를 자른게 내 입학하고 2년쯤였던가? 그때만해도 팔당 상수원인 그곳 의 물은 깊고 푸르고..그랬는데..
지금은 자글자글..물보다..넓은 자갈밭..엉성한 다리가 그곳이 한 때 물이 지나던 곳임을 알려줄뿐..
수박씨..하나가..별 기억을 다 불러들인다..이따금 아버지 산소에나 가야 드나들지..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았던 곳인데..산허리 중턱으로 버스가 영차영차 그림을 그려대는 ..재미난 곳.
내 사는 아랫 말에서 꼭대기 산으로 버스가 꾸불텅꾸불텅 지나는게 훤히 보였는데..
최명란+수박씨=조합이 추억을 불러내는 주문인 모양이다.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평화 공감 르포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 삼천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8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

 이애숙 옮김

 삼천리 펴냄, 2012.8.17.



  우리 집에서는 살림돈을 조금 모으면 으레 ‘오키나와 까만설탕(흑당)’을 장만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자라는 사탕수수를 그대로 졸여서 만든 ‘까만 덩어리’는 더없이 맛나고 여러모로 쓰기에 좋습니다. 배고플 적에 먹어도 되고, 기운이 빠졌을 적에 먹어도 되며, 떡볶이를 할 적에 넣어도 됩니다. 사탕처럼 먹어도 맛나지요.


  그런데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진 뒤로 ‘오키나와 까만설탕’을 손사래치는 사람이 꽤 늘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일본하고 오키나와(류큐)는 서로 다른 나라인데, 후쿠시마 핵발전소하고 ‘오키나와 까만설탕’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그럴까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일본이고 류큐(오키나와)는 류큐이기 때문입니다.


  정 모르겠다면, 세계지도를 펼치면 됩니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류큐’가 어디에 있고, 류큐섬에 있는 ‘나하’라는 도시가 일본 도쿄나 후쿠시마하고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자로 재 볼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자로 다시 류큐와 한국이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재 볼 노릇이에요. 류큐섬하고 어느 나라가 더 가깝고 어느 나라가 더 멀까요? 후쿠시마하고 훨씬 가까운 나라는 어디일까요?



.. ‘나는 왜 오키나와에 가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너는 왜 오키나와에 오는가?’라고 거절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와 겹치며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 본토 일본인은 오키나와 화생방 부대의 위협이 없는 땅에서 원자력잠수함의 자유로운 출입에 대한 방호책을 대충은 갖추고 살고 있다 … ‘과연 원폭 체험은 일본인에게 참 경험이 되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 어쩌면 원폭의 참 경험이라는 인간적 샘물은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갈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  (18, 51, 109쪽)



  일본은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다가 미군기지로 내주었다가 일본땅 가운데 하나로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까지 류큐섬은 홀로 아름답게 삶을 이루던 터전입니다. ‘일본에 있는 오키나와’가 아니라 ‘태평양에 있는 류큐’입니다.


  그런데 이 류큐섬 옆에 ‘게라마 줄섬(열도)’이 있고, 게라마섬에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황을 섬긴다고 하면서 아시아에 전쟁바람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 군대가 류큐섬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히고 짓밟다가 죽였어요. 이 같은 이야기는 ‘마루키 도시’ 님과 ‘마루키 이리’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오키나와의 목소리》(꿈교출판사,2013)에도 아주 잘 나옵니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읽으면, 평화로우며 사랑스럽던 작은 ‘섬나라 류큐’에 어떤 군대가 끔찍하게 몰려들어 온통 잿더미와 주검더미로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류큐사람은 조선사람처럼 ‘일본에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야’ 했고, 류큐사람도 조선사람처럼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에 맞아서 죽거나 피폭후유증으로 오랜 나날 괴롭게 앓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이라 할 텐데, 일본은 일본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그악스럽게 괴롭힙니다. 더 들여다보면, 일본은 일본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저희끼리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와 다르지 않아요. 한국도 한국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으로 오는 ‘제3세계 이주노동자’가 어떤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는지 들여다보면 잘 알 만합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학벌에 따라 따돌리고, 지역차별이 크며, 성차별과 신분차별도 끔찍합니다.



.. 오키나와에는 일하러 가서 피폭되어 귀향하거나 원폭 관련 질병에 대한 전문적 치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생존해 있다. 하지만 원폭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어서 피폭자들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다 … 나하 군항에서 일하는 잠수부들이 몸에 이상을 호소했다. 코발트-60에 오염된 진흙을 계속 채취하여 체내에 오염을 축적시킨 물고기 틸라피아와 섭조개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미군은 잠수부들의 이상이 방사능과 관련 없다고 단언하고서 그들을 본토 원폭병원으로 보내려던 전군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  (29, 48쪽)



  평화를 바라려면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려면 손수 흙을 지어야 합니다. 총이나 칼을 든 평화란 없습니다.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채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돈주머니를 홀로 꿰찬 채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가른 채 평화를 읊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전쟁무기가 있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은 안 가르치면서 시험성적으로 등급과 계급을 만드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 제국주의 일본도 평화롭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 사회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이웃을 아끼거나 섬기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느니 경제개발이라느니 하고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뒤집어엎는 짓을 잇달아 벌입니다. 한국에서 왜 새마을운동 같은 끔찍한 짓이 생겼고, 이런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펄럭일까요? 한국은 조금도 안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새마을운동 바람이 분 뒤로, 시골을 고향이나 보금자리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고, 아직도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시골이 시골답게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는 우익이 쳐들어왔다고 쓰고 싶지는 않다. 우익이 방해 연설을 했다는 말도 사용하지 않겠다.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쳐들어온 자들이나 더러운 말을 내뱉는 남자와 내 피가 직접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 오키나와가 미국 군부뿐 아니라 본토 일본인이 새삼 인지한 핵기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한테 물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히 침묵하는 내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 복귀는 ‘평화의 거점으로서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  (142, 154쪽)



  오에 겐자부로 님이 쓴 《오키나와 노트》(삼천리,2012)를 읽습니다. 1960년대 끝무렵부터 1970년대 첫무렵 사이에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어느덧 마흔 해나 묵은 글인데, 마흔 해를 묵은 글이라지만, 류큐(오키나와)와 일본을 묶는 슬픈 쇠사슬은 제대로 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랑스러운 끈이 아닌 그악스러운 쇠사슬이 너무 단단합니다.


  한국사람은 왜 서울로 가려고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서울에서 살려고 할까요? 서울이 아니면 부산, 부산이 아니면 대구, 대구가 아니면 인천이나 대전, 또 이런저런 큰도시, 저런그런 큰도시, 오직 도시만 바라보는 얼거리인데, 왜 자꾸 이렇게 나아가려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대학교를 가야 할까요? 대학교 졸업장은 왜 따야 할까요? 왜 꿈을 안 키우고 졸업장만 따려 할까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왜 교과서 시험공부만 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공부는 안 하거나 못 할까요?



.. 1903년의 이른바 인류관 사건은 당연히 그런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권업박람회 기간에 학술 인류관이라는 부스에 오키나와 여성 두 사람이 ‘진열’되었다. 그녀들은 곰방대와 야자수잎 부채를 들고 오두막에 앉아 있었고, 채찍을 든 남자가 여인들을 ‘이놈’이라고 부르며 설명했다고 한다 … 볼도저의 굉음, 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찬미하는 노랫소리는 그 의문의 목소리를 뭉개고 울려퍼지지만, 언제까지 굉음과 노랫소리를 지를 생각인 것일까 … 오키나와에 대한 무지의 단순화는 의식적인 회피와 냉혹한 일본인의 행태를 보여준다. 아시아에서 침략적으로 날뛰지 않을 때조차 일본인은 단순한 인식을 바탕으로 아시아인을 차별했다 ..  (165, 167, 171쪽)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서로 무엇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나한테 더 있는 돈을 나누려 하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배가 고픈 이웃한테 밥 한 그릇 내주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손에 있는 것을 서로 나누려 하지 않을 적에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려고 하지 않고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오에 겐자부로 님은 《오키나와 노트》라는 책을 쓰면서 ‘류코와 일본 사이에 맺힌 앙금’을 모두 풀지는 못합니다. 아마 풀 수 없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풀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서로 이웃이 되면 앙금이란 없어요. 서로 벗이 되고, 서로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되면 어떠한 앙금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왜 류큐에 미군기지를 그렇게 많이 두어야 했을까요? 도쿄 앞바다에 미군기지를 두어야지요. 왜 후쿠시마에 핵발전소를 세웠을까요? 도쿄 한복판에 핵발전소를 세워야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말고 문경이나 장흥 같은 데에 지어요.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한복판에 지어요. 대학교가 서울에 이처럼 많이 다닥다닥 모이도록 하지 말고, 서울에는 딱 한 군데만 남기고, 다른 모든 대학교는 군마다 한 군데씩 있도록 해야지요. 모든 길이 서울과 부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지 말고, 군과 군 사이를 살가이 잇는 작은 길을 내야지요.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몽땅 없애고,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들이던 돈은 이제부터 마을과 삶을 가꾸는 데에 써야지요.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은 살포시 내려놓고, 사랑과 꿈을 아이들이 품고 키우면서 일구도록 이끌어야지요. 대외무역에 기대지 말고, 이 나라에서 먼 옛날부터 모든 것을 손수 지어서 손수 누렸듯이, 모든 집·밥·옷을 누구나 손수 지어서 얻고 가꿔서 누리는 길로 나아가야지요.


  댐을 지어 수돗물을 쓰는 얼거리가 아니라, 시골과 도시 어디에서나 냇물을 마시도록 해야지요. 큰 발전소를 짓는 얼거리가 아니라, 집집마다 제몫으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도록 해야지요.



.. 자신들이 방치하고서 적을 향할 무기를 거꾸로 겨누고 자행한 강간에 대해, 먼저 자신을 속이고는 기만하기 쉬운 타인부터 의심 많은 타인까지 ‘거짓말’로 계속 왜곡시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눈에 강간이 아름다운 ‘한순간의 사랑’으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둔감한 상상력으로 그는 오키나와 현장에서 오키나와 여성 피해자가 “아니야, 그건 강간이었어!” 하고 소리치며 규탄하는 손가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라마 집단자결의 책임자도 그런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기만을 끊임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큰 죄 앞에서 그는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과 왜곡되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 죄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자기변호의 여지를 남기려고 과거 사실의 날조에 힘을 쏟는다 … 실제로 지금 재일조선인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의 윤리적 상상력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보라. 지극히 평범한 어리석은 고등학생이 실체도 모르는 것과 연결된 사명감, ‘어떤 고양감’에 휩싸여 조선 학생을 때리는 치졸하고 파렴치한 실상을 보라.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사건과 아버지들의 행동’과 똑같은 짓을 신세대 일본인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반복할 때 … 오키나와의 무한한 이의제기의 목소리를 묵살하려고 못 들은 척 하거나 들을 수 있는 귀를 키우지 않는 것은 국가 범죄로 가는 새로운 포석이 아닐까 ..  (184∼185, 189쪽)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이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함께 노래하고 웃으면서 춤을 춥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경쟁’이 불거지고 ‘순위’와 ‘등급’이 나타납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쓰레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먼 옛날부터 곱게 잇던 두레와 품앗이가 저절로 마을마다 되살아날 테니, 굳이 협동조합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스스로 노래를 안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짓지 않기에, 신문과 방송과 책에 휘둘린 나머지, 손수 짓는 삶과 자꾸 동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벼랑까지 그대로 나아가다가 그만 굴러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곳에서 아름답고 푸른 숲을 이룹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이 지구별은 그만 꽝 하고 터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 지구별이 온누리에 맑고 밝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거듭납니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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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5-01-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나와의 아픈 과거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행프로그램에서도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위 만행이 언급되었습니다. 얼마전 선거때도 오키나와 주일미군이 이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5-01-14 10:49   좋아요 0 | URL
네, 오키나와 역사는 `일본 역사`라고 할 수 없기도 하고,
그곳, 류쿠는
외려 일본보다 한국하고 문화와 삶이
한결 가까이 이어지기도 해요.

가만히 보면, 지도로 볼 적에도
뱃길이 류큐와 한국은 한결 가깝지요.
여름과 겨울에 바뀌는 바람을 타면
그야말로 옛날에는
류큐와 한국은 서로 자주 오갔겠구나 싶어요.

그리고, 두 겨레가 일본한테 끔찍한 짓을 겪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