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9. ‘자유로운’ 생각과 삶과 말

― 아이한테 들려줄 노래에 담는 말



  어른이 지어서 아이와 함께 부르려는 노래를 가리켜 ‘동요(童謠)’라고 하지만, 이 한자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현대문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널리 쓰던 말마디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동시’나 ‘동화’라는 낱말도 이와 같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에 안 써야 할 낱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을 거치든 중국을 거치든 미국을 거치든,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가장 알맞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새 낱말’을 지을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한 뒤 즐겁게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아직 안 실리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부를 노래요, 어린이가 즐기는 노래라는 뜻에서 ‘어린이노래’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한국에서는 지난날에 그냥 ‘노래’라고만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굳이 가른다면 ‘일노래’와 ‘놀이노래’가 있습니다. 어른은 일을 하니 ‘일노래’이고, 아이는 놀이를 하니 ‘놀이노래’입니다. 지난날에 아이가 부르던 노래는 모두 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예요. 그러니, ‘어린이노래’란 모두 ‘놀이노래’이면서 그냥 ‘노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얌전히 앉아서 듣거나 부르지 않아요. 춤을 추거나 웃거나 뛰놀면서 노래를 불러요. 어른들은 무대나 공연장 같은 데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이런 노래가 몹시 힘듭니다. 좀이 쑤시지요. 한편, 노래를 더 살피면 지난날 어른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들노래’와 ‘마을노래’로 가를 수 있어요. 들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고, 마을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면 ‘살림노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거나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이면서 ‘살림노래’로 여길 만해요.


  오늘날 널리 퍼진 어린이노래 가운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고,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지은 어른이나 오늘날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나 그냥 듣고 부릅니다. 그런데, 두 어린이노래에서 크게 잘못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산 위에서”와 “산 속 옹달샘”입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바닷바람입니다. “바다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도 “들에서” 불 뿐, “들 위에서” 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부는 바람”이나 “멧골에서 부는 바람”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사람들은 “산에 나들이를 갈” 뿐, “산 속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집 속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깊은 산에 옹달샘”이나 “깊은 멧골 옹달샘”처럼 어린이노래를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잘못 쓰는 말투라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를 ‘자유’로 보아야 할까요? 널리 퍼진 노래라 하더라도 잘못 쓰는 말투가 더 퍼지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할까요? 널리 퍼졌으면 잘못된 말투라 하더라도 그대로 써야 할까요? 널리 퍼지기 앞서 바로잡았으면 가장 나았을 테지만, 노래를 선보이거나 문학을 선보이거나 책을 선보이는 어른들은 ‘낱말 하나’와 ‘말투 하나’까지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은지 제대로 안 살피기 일쑤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살피지만, 말다운 말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갈래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가게에 놓인 과자에 ‘독성 물질’이 섞였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빵집에 놓인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이라고 해서 소와 닭을 수십만 마리나 산 채로 파묻기까지 하는 어른들 모습은 무엇일까요? 입에 들어가는 밥에서 아주 조그마한 잘못이 하나라도 드러나면, 하늘이 무너지듯이 깜짝 놀라면서 아주 발빠르게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생각을 가꾸는 말은? 사랑을 살찌우는 말은? 넋을 북돋우는 말은?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 마음을 이끕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사랑과 넋을 움직입니다. 널리 퍼진 노래에서 한두 군데 잘못된 대목이니, 슬쩍 눈을 감고 지나쳐도 될까요?


  자유로운 말이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말이란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을 곱게 가꾸면서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참다운 자유가 되리라 느낍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피는 까닭을 돌아봅니다. 마음을 알뜰살뜰 여미어 이웃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꿈을 짓고 싶기에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핍니다.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리는 까닭을 짚습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내 보금자리와 우리 마을을 모두 아름답게 일구고 싶기에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규칙이니까 지켜야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마음을 살찌우고 싶기에 말을 곱게 가다듬습니다. 원칙이니까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다 함께 기쁘게 노래하듯이 생각을 키우고 싶기에 글을 정갈히 추스릅니다.


  전남 광주에서 다달이 나오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2015년 1월호를 보면, 전남 곡성 수월리 김봉순 할매가 들려주는 “우덜이 날마다 밭고랑으로 기어댕긴께 도시사람들 묵제. 내 손이 키와서 전국이 다 묵제. 힘들다고 모다 호맹이 자리 땡개불문 모다 못 묵제(27쪽).” 같은 말마디가 고스란히 나옵니다. 전라말이요 곡성말이면서 수월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표준말이나 서울말로 고쳐서는 말맛이 나지 않습니다. 곡성 옆에 있는 구례에서는 구례말을 쓸 테고, 구례 옆에 있는 하동에서는 하동말을 쓸 테지요. 마산은 마산말, 진주는 진주말, 순천은 순천말을 씁니다. 자유롭게 쓰는 말이란 내가 나고 자란 터전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때에 참으로 자유로우면서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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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5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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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69



이 길을 가면서 보는 한 가지

― 은여우 5

 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4.11.30.



  귀를 기울이면 온갖 소리가 내 귀로 스며듭니다. 어느 소리는 높고 어느 소리는 낮습니다. 어느 소리는 고요하구나 싶고, 어느 소리는 우렁차구나 싶습니다. 이 소리를 좋게 받아들이거나 나쁘게 여길 수 있을 테지요.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생각합니다. 어느 소리가 좋다면 왜 좋고, 어느 소리가 나쁘다면 왜 나쁠까요. 어느 소리가 반갑다면 왜 반갑고, 어느 소리가 거슬리다면 왜 거슬릴까요.


  모든 소리는 노래입니다. 소리는 그대로 소리이면서 노래입니다. 모든 소리가 노래인 까닭은 모든 소리에는 이야기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저마다 살면서 누리는 온갖 꿈과 사랑이 서립니다.


  시골에서 아침마다 듣는 멧새 노랫소리도 노래요,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도 노래이며, 아이들이 길게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는 소리도 노래입니다. 노래가 아닌 소리가 없기에, 어떠한 소리이든 노래로 듣지 못한다면, 나한테는 노래가 없다는 뜻입니다.



- “역시 제일 먼저 오면 기분이 좋다니까!” (13쪽)

- “하아, 모처럼 사토루의 멋진 무대인데 응원하러 갈 수가 없다니.” “아니, 출전한다뿐이지, 이길지 질지도 모르는데요.” “그렇지 않아!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걸!” “승패는 상관없어!” (27쪽)





  어두운 밤에 촛불 한 자루를 켭니다. 촛불 한 자루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한참 촛불을 바라보노라면, 촛불이 어느새 둘로 갈립니다. 왜 둘로 갈릴까 하고 갸우뚱하게 여기면서 눈을 끔뻑이지만, 촛불은 늘 둘로 갈립니다. 살그마니 눈을 돌려 다른 것을 쳐다봅니다. 다른 것은 둘로 안 갈립니다. 오직 촛불만 둘로 갈립니다.


  가까이에서 촛불을 바라보든 멀리 떨어져 촛불을 바라보든, 촛불은 늘 둘로 갈립니다. 이리하여, 촛불을 곰곰이 지켜보기로 합니다. 둘로 갈라져 보이는 촛불은 나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는지 지켜보고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둘로 갈라져서 춤을 추는 촛불은 나한테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하고 마주하면서 기쁘게 맞아들이기로 합니다.


  촛불은 불꽃입니다. 촛불은 불춤입니다. 촛불은 불노래입니다. 촛불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스르르 녹고, 촛불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이 새롭게 깨어납니다. 오늘 하루를 여는 내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도록 이끌고, 오늘 하루를 닫는 내 마음이 고요히 잠들도록 돕습니다.



- “다른 녀석들은 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신경 안 써. 그리고 세상도 전혀 달라지지 않아. 스스로 제일 만족할 수 있도록 하면 돼.” (29쪽)

- “신의 도움으로 이기면 뭐 하겠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까, 나머지는 순리대로 되겠지. 그저 전부 쏟아낼 뿐이야.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전진할 수 있을 것 같거든.” (41∼42쪽)





  오치아이 사요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학산문화사,2014)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은여우》 다섯째 권에서는 이 만화를 이루는 여러 아이들 가운데 ‘사내 아이’가 홀가분하게 일어서서 웃으면서 걸어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서려 하는 만큼 이리 흔들리거나 저리 설레기도 하지만, 떨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이때에 이 아이를 둘러싼 이웃과 동무와 님은 웃음과 노래로 이야기를 건네요. 모든 삶은 ‘즐거움’이니, 이 즐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함께 웃고 노래하자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 “내가 아직 못 미더울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걱정하지 말고. 지켜봐 줘.” (55∼56쪽)

- “신사는 신을 만나러 오는 곳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시는 분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79쪽)

- “우리는 우연히 이런 형태로 지상에 머물렀어. 신안을 가진 인간이 우리와 이어지듯, 신의 사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기 위해서 말이야. 역할을 마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이곳에 있는 똑같은 영혼이니까. 그 이후에는 신이 있는 똑같은 세계. 또 다시 어떤 형태로 변할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그 앞에도 ‘즐거움’은 있다고 생각해.” (158쪽)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내 삶입니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내 삶입니다. 그런데, 삶에서는 잘 되거나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 될’ 뿐입니다. 이를 곰곰이 바라봅니다. 높이 뛸 수 있고, 높이 안 뛸 수 있습니다. 밥을 지을 수 있고, 밥을 태울 수 있습니다. 국이 싱거울 수 있고, 국이 짤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쁘게 맞이하는 하루요 삶이며 살림입니다.


  처음 글씨를 쓰는 아이들 손놀림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흐르고 이레가 흐르며 달포가 흐르고 몇 해가 흐르는 사이, 아이들 손놀림은 야무지고 단단합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글놀이와 그림놀이를 하면서 내 손놀림은 다부지고 든든합니다.


  함께 짓는 하루이고, 함께 가꾸는 삶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하는 하루입니다. 함께 꿈꾸고, 함께 사랑하는 살림입니다.



- ‘엄마나, 긴타로, 모두 그 이후가 똑같다면, 그, 훨씬 나중에라도, 또 언젠가, 긴타로를 만날 수 있을까?’ (160∼161쪽)

- “우리가 지금 이렇게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시간을 받았다는 것이, 기적일지도 몰라.”



  이 지구별에서 우리가 걷는 길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내가 스스로 짓는 기쁨입니다. 어떤 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가 걸어가면 바로 길이 됩니다.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언제나 길이 없습니다. 걸으면 길이요, 걷지 않으면 길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하지 않는 일만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내가 기쁘게 손수 하는 일입니다. 만화책 《은여우》에 나오는 젊고 푸른 아이들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노래하는 새로운 길을 나도 기쁘게 지켜보면서 함께 웃고 노래합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저물면서 새로운 봄이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아침볕이 곱고, 아침바람이 포근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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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 온 손님 그림책 보물창고 5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 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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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1



슬기롭게 생각해야 삶을 짓는다

― 지구별에 온 손님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펴냄, 2005.5.10.



  모디캐이 저스타인 님이 빚은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보물창고,2005)은 우리가 이 지구별에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나한테 찾아온 삶을 어떻게 누릴 때에 즐거우면서, 이 삶을 마친 뒤 죽음에 이를 적에 내 ‘다음 삶’을 어떻게 그려야 다시 지구별로 돌아와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지 안 태어나는지 궁금할 수 있고, 안 궁금할 수 있습니다. 죽고 나서 다시 안 태어난다고 여길 수 있을 테고, 죽고 난 뒤에 틀림없이 다시 태어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다 옳습니다. 다만, 삶을 누리는 동안에는 늘 삶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삶을 마친 뒤에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려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아이는 밤마다 하늘을 쳐다보곤 했어요.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어디론가 은하수가 흘렀어요. “저 너머엔 무언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 언젠가 꼭 한번 가 봐야지.” 아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어요 ..  (4쪽)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에 나오는 나무꾼은 ‘나무꾼으로 살면서 키운 꿈’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꾼은 이 꿈을 이루려고 ‘다시 태어났’을 텐데, 스스로 꿈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느’라 바쁘게 하루하루 보내다가 죽음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니까, 어떤 꿈을 이루려고 다시 태어났지만, 막상 다시 태어났어도 스스로 꿈을 이루지 못해요. 이리하여, 죽은 뒤 찾아온 새로운 누리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살펴서 고릅니다. 어느 별누리로 갈는지, 별누리 가운데 어느 별에 깃들는지, 별에서 어떤 목숨으로 깃들는지, 별에서 어떤 목숨으로 깃들되 어느 터전에서 어느 어버이를 만나려는지, 어느 어버이를 만나서 어떤 삶을 누리려 하는지, 하나하나 낱낱이 새로 살펴서 고릅니다.


  이 그림책에서는 ‘죽고 난 뒤에 다시 고르는 자리’가 있다고 나오지만, 죽기 앞서 이 모든 ‘다음 삶 이야기’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고 난 뒤에는 그저 텅 빈 곳을 떠도는 넋이 되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떤 삶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면서 가꾸는 삶이 아니라면 ‘살아서 움직일’ 때에도 내 꿈과 뜻을 이루지 못하는 쳇바퀴입니다. 삶을 마감하고 죽음으로 나아갈 적에도 아주 마땅히 ‘살아서 움직일’ 때 모습 그대로 갑니다. 여느 때에 생각이 없이 지냈으면, 죽은 뒤에도 생각이 없겠지요. 죽은 뒤에도 생각이 없으면, 이러한 사람은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 나무꾼의 눈앞에 우주 전체가 펼쳐져 있었어요. 우주는 새해 전날의 불꽃놀이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이 우주에는 은하계라 불리는 수억 개의 세상이 있느니라. 은하계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고 모두들 아름답지. 어느 은하계든 네가 살고 싶은 곳을 골라 보아라.” ..  (10쪽)




  그림책을 곰곰이 읽으면, 나무꾼으로 늙다가 죽은 사람은 늙으면서, 또 죽으면서, 이 삶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았지요. 이러고 나서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꾼 할배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 삶’을 그린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 스스로 돌아볼 노릇이에요. 오늘 이곳에서 살며 우리는 무엇을 그릴까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지으려 하나요? ‘다음 삶’은커녕 ‘오늘 이곳 삶’조차 하나도 안 그리면서 아침을 열지는 않나요? 오늘 하루도 늘 똑같이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수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따분함과 고단함과 힘겨움만 잔뜩 끌어들이지는 않나요?


  나 스스로 아침부터 고단하거나 따분하거나 힘겹다고 생각하니, 참말 이 생각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거나 따분하거나 힘겨운 쳇바퀴를 돌아야 하지 않나요?



.. “나처럼 되세요! 그럼, 얼마나 신나겠어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생물들이 나무꾼을 향해 소리쳤어요 ..  (16쪽)




  생각이 삶을 바꿉니다. 기쁘게 스스로 짓는 생각이 내 삶을 스스로 기쁘게 바꿉니다. 남이 바꾸어 주는 내 삶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바꾸는 내 삶입니다. 남한테 기댄들 남은 나한테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내가 먹을 밥을 남이 먹어 준들, 내 배가 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읽을 책이 남이 읽어 준들, 내 마음이 넉넉할 수 없습니다.


  내 밥은 내가 손수 지어서 내가 수저를 들어서 먹어야 합니다. 내 책은 내가 손수 골라서 내가 신나게 읽어야 합니다.


  내 삶은 내가 지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돈다발이 툭 하고 떨어져야 내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삶을 바꾸려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키워야 비로소 내 삶을 바꿉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스스로 쳇바퀴를 돌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하겠노라 생각을 키우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얘야, 이리 오렴! 어서 우리 아이가 되렴!” 그때 나무꾼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한 아버지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한 어머니의 미소도 보았습니다. “바로 저분들이 나의 부모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22쪽)



  슬기롭게 생각해야 삶을 짓습니다. 생각을 해야 삶을 짓지는 않습니다. 아니, 생각만 해서는 삶을 짓지 못합니다. 바보스레 생각하거나 멍청하게 생각할 때에는 삶을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게 지어요. 그러니, 생각을 하더라도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사랑스러움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가 누를 아름다움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내가 나아갈 사랑스러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에 바로 내 앞길이 환하게 열립니다. 내가 여는 내 앞길이지요.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 ‘지구별 손님’인 대목을 밝힙니다. 맞아요. 우리는 지구별에 온 손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다른 별에서 지구별로 온 손님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사랑과 평화와 꿈을 이루려고 모인 손님입니다. 그래서, 다 다른 나라와 겨레를 이루고, 다 다른 삶을 지으면서, 다 다른 사랑을 노래하지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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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9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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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71



너를 만나기까지

― 설희 9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13.3.4.



  순천에서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이웃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뱀과 개구리와 들딸기가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빙그레 웃음이 터집니다. 참말 그렇지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들딸기가 돋는 곳에는 으레 뱀이 나옵니다. 뱀이 나오는 곳에는 으레 개구리가 삽니다. 들딸기가 넝쿨줄기를 뻗는 데는 사람들이 가시에 긁히거나 찔리니 딸기를 훑을 때가 아니면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 자리이고, 이런 곳에는 개구리가 깃들기 일쑤예요. 들딸기는 물기 적은 데에서도 줄기를 뻗지만, 물기 많은 곳이나 도랑 둘레에 아주 흐드러집니다. 이래저래 들딸기와 개구리와 뱀은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나저나 왜 웃음이 터졌느냐 하면, 이웃님이 뱀과 개구리를 이야기했기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뱀과 개구리는 ‘시골’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오늘날이요, 나는 오늘 시골자락에서 사니까 으레 뱀과 개구리를 만나는데,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순천 이웃님도 ‘순천 시골자락’에서 지내시니까, ‘시골내음’이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하고 느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 ‘거침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리카 앞에서 난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마치 내 애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랄까.’ (38쪽)

- “하지만 그럼 너는 전생의 꿈에서 연인이어서 사귀자는 거지. 지금 내가 진짜로 좋아서 사귀자는 건 아니라는 거야?” “진짜로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가 중요해졌어?” “당연하잖아! 네가 말한 내 전생이야 어쨌건 나는 나거든. 난 과거의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해서 사귀자는데 기분 좋을 리 없잖아!” “알아. 알고 있어. 넌 너야. 그럼 넌 내가 좋다는 거야?” (45∼46쪽)




  내가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 이야기를 나눌 적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도시에서 산다면 시골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음이 터질 일은 드물리라 느낍니다. 내가 아파트에서 산다면 아마 이웃들과 아파트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내가 운동경기를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운동경기 이야기를 나눌 테고, 내가 사진을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사진 이야기를 나눌 테며, 내가 정치에 눈길을 둔다면 이웃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삶을 짓는 하루에 눈길을 둔다면, 나는 내 이웃님하고 기쁘게 ‘시골에서 삶짓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이들과 곁님하고 시골에서 삶을 노래하는 하루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나는 내 모든 이웃님하고 언제나 즐거이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가를 놓고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내 삶을 손수 짓습니다. 내 이웃도 이녁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이녁 삶을 손수 짓습니다. 이리하여, 나와 이웃(나와 너)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너(나와 이웃)는 나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이런저런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이웃(나와 너)은 성별도 지역도 신분도 계급도 아닌, 오롯한 사람으로서 만납니다.



- ‘애정이란 게 누가 더 많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 것인 건가?’ (56쪽)

- ‘만약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세상을 구원한다는 연애를 하면 어때요?’ (65쪽)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13) 아홉째 권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열한째 권까지 나온 《설희》를 모두 읽고 나서 아홉째 권을 다시 넘기니, 이야기 얼거리가 살짝 성기거나 조금 늘어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조금 더 단단하게 틀을 짜서, 한결 더 빠르면서 야무지게 엮을 수 있을 텐데, 어딘가 아무래도 끈이 풀린 듯합니다. 이를테면, 만화에 나오는 스물 갓 넘은 젊은이들이 차라리 더 가볍게 말을 섞고 어우러지다가 차츰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면서 차근차근 철이 드는 얼거리를 보여준다든지, 나이를 떠나 모든 주인공이 더 꼼꼼하고 야무지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더 깊고 너른 마음읽기를 보여준다든지, 어느 한쪽으로 또렷하게 만화 얼거리를 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무심코 튀어나와 버렸지만, 사실 난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90쪽)

- ‘그럼 도대체 설희는 어떤 마음으로 세이를 보는 걸까? 스물한 살의 나는 이런데, 도대체 얼마를 살았을지 모를 설희가 세이에게 가진 감정은 무엇일까? 전생의 감정?’ (117쪽)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설희)’는 사백 해나 오백 해쯤 죽음이 없이 살아왔다고 할 만합니다. 이동안 눈아이는 다른 사람이 죽고 나면서 ‘되살이(윤회)’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되살이로 새롭게 사는 이들은 예전 삶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되살이로 이 땅에 다시 왔으나 예전 삶을 도무지 떠올리지 못해요.


  예전 삶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이 예전 삶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들은 이제껏 몇 차례에 걸쳐서 몇 해쯤 되살이를 했을까요? 설희도 ‘죽음 없는 삶’을 사오백 해를 누리기는 했으나, 이러한 ‘죽음 없는 삶’에 앞서 얼마나 기나긴 나날에 걸쳐서 되살이를 했을까요?


  우리한테 나이란 무엇일까요? 나이가 쉰 살이면 많을까요? 나이가 여든 살이면 많을까요? 고작 열 살이나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그동안 지나온 되살이를 치면 오천 살이나 오만 살쯤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 떠올리지 못할 뿐, 우리는 그동안 온갖 삶을 죄다 누리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지난날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나 짓을 했을까요?




- ‘밖에는 눈이 오고, 여기엔 희망이 있는 것 같은, 왠지 따스한 분위기.’ (178쪽)



  우리는 지난날에 몹시 바보스럽거나 멍청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매우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만 돌아보면서 ‘예전이 좋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새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짓겠어’ 하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는 ‘너’를 만나려고 이곳에서 새롭게 살려 합니다. 눈아이하고 만난 ‘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삶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는지 아직 갈팡질팡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면 어제를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아도 모레에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바보스러운 짓을 할까요? 오늘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으면, 어제까지 내가 보여준 모든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발자국을 돌이키거나 새롭게 추스를 수 있을까요? 만화책 《설희》는 이러한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앞으로 어느 만큼 풀거나 맺을 수 있을까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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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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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0



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글

 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 2014.12.1.



  이월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흐르면서 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쑥삭이 돋습니다. 쑥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키보다 훌쩍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주 조그마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이 조그마한 싹이 나중에 우람한 풀줄기로 커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다가 시들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작은 쑥잎은 더 작은 씨앗에서 깨어납니다. 더없이 자그마한 씨앗에서 조그마한 쑥잎이 돋습니다. 흙은 아주 자그마한 쑥씨를 품어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데, 이 따스한 품을 고맙게 맞아들인 쑥씨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 쑥대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꽤 많은 흙이 쑥대를 붙잡아 주어야 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쑥대는 천천히 시들어서, 그동안 저를 붙잡느라 힘써 준 흙한테 다시 돌아가 ‘새로운 흙’이 생기도록 온몸을 내놓습니다.


  다른 풀씨를 보아도 쑥씨와 비슷합니다. 모든 풀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깨알보다 훨씬 작은 풀씨입니다. 아주 작은 먼지조각으로 보이는 풀씨예요. 흙은 이 모든 풀씨를 고이 아낍니다. 풀씨를 고이 아끼면서 보듬고 돌보는 흙은 나중에 풀한테서 너른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만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병치레하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 아이를 재우는 일을 비롯해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 서구 사회에는 돈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돈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흘러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  (17, 18, 20쪽)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흙과 같습니다. 작은 씨앗이라고 할 아이들을 아끼고 돌보면서 섬기는 어버이는 흙과 같은 마음결입니다. 작은 씨앗인 아이들은 어버이를 흙처럼 반기고 고마워 하며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리하여, 작은 씨앗은 흙을 믿고 기대면서 무럭무럭 자라요. 흙은 작은 씨앗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북돋우지요.


  풀은 흙이 있어서 자랍니다. 흙은 풀이 있어서 기름질 뿐 아니라,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쓸리지 않습니다. 드세거나 거친 비바람에 흙이 좀 쓸리면, 때로는 많이 쓸리면, 흙은 아파 하거나 슬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작은 풀씨가 해마다 나고 지고 자라고 시들면서 새로운 흙을 빚으니까요. 오랜 나날에 걸쳐서 흙은 제자리를 되찾습니다.


  높은 봉우리는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봉우리 높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새로운 풀씨가 끝없이 자라고 돋아서 시들어서 흙한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흙이 쓸리고 쓸려도 새로운 흙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당신을 보며 묻는다. “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이 세상에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죠?” … 강제력을 동원해서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해야 한다 …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 …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 이것 역시 배움이다 ..  (25, 33, 37, 43쪽)



  그런데 사람들이 억지로 삽차를 써서 흙을 파헤치면, 이때에는 흙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이때에는 풀씨가 죽는 소리를 냅니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뒤흔들거나 괴롭히면 풀씨도 흙도 모두 고달프면서 아파서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풀씨와 흙이 앓다가 죽는 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과 제도권과 법률과 정치경제는 모두 풀씨와 흙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에 눈을 감습니다.


  피를 말리는 싸움을 붙이는 물질문명입니다. 피가 뒤도록 다투게 몰아세우는 현대사회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작은 풀씨와 너른 흙은 모두 괴롭습니다. 물질문명 현대사회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고단하면서 힘에 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 요즘 부모들은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기의 두뇌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운운하는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인다 … 제3세계 국가에서 아이들을 징병한다는 소식에 우리는 놀란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아이들도 제3세계에 있는 아이들 못지않게 잔인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우리 가정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기업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걸까 …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 ..  (49, 69, 84, 92쪽)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글을 쓰고, 원마루 님이 한국말로 옮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아이들 이름은 ‘오늘’입니다. 아이들 이름은 ‘어제’도 ‘모레’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면 어른들 이름은 무엇일까요? 어른들은 ‘어제’일까요? 어른들은 ‘모레’가 되면 될까요? 아니에요. 어른들도 이름은 아이들과 똑같이 ‘오늘’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삽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돌아보고 모레를 내다봅니다. 모든 사람을 오늘을 지으면서 어제를 사랑하고 모레를 꿈꿉니다.



.. 무조건 복종하는 아이로 만드는 게 양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아이들이 확신을 갖고 인생을 탐험하게 돕되 자신의 한계도 알게 해야 한다 …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고 과거는 깨끗이 용서받아야 한다 …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 ‘정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 걸까? 어린아이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대신 변화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 ..  (123, 125, 140, 146쪽)



  어버이가 할 몫은 삶을 지어서 아이와 함께 누리고 가꾸는 길입니다. 아이가 할 놀이는 삶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입니다.


  어버이는 삶을 짓습니다. 아이는 놀이를 누립니다. 어버이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는 살림을 가꿉니다. 아이는 웃음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어른(어버이)과 아이는 한집을 이루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지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는 사랑스러운 싹이 터서 새로운 숲이 우거집니다.


  학교에 맡겨야 할 교육이 아니라, 집에서 삶을 지으면 되는 하루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슬기롭게 가꾸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에 이바지를 할 아이들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숲을 돌보면서 사랑과 꿈으로 하루를 누려야 할 아이들입니다.



.. 나는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창조주의 흔적을 안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 마음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 규칙이나 금지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부모가 사랑을 보여주면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이 선물로 따라온다 ..  (163, 179, 185, 186쪽)



  우리 모두 씨앗을 심어요. 우리 모두 텃밭을 일구어요. 도시에는 텃밭 삼을 땅이 없다구요? 그러면 자가용을 내다팔아요. 자가용을 내다팔고 땅을 한 평이든 두 평이든 내 몫으로 장만하고, 아이 이름으로 마련해요. 자가용은 돈을 더 모아서 나중에 다시 장만해도 돼요. 그러나, 내 땅은 바로 오늘 장만해야 해요. 도시에서도 한 평짜리 자투리땅부터 장만해요. 그리고 이 땅에 씨앗을 심어요. 두 평을 장만할 수 있으면 한 평에는 풀씨(푸성귀 씨앗)를 심고, 다른 한 평에는 나무를 심어요. 이윽고 석 평과 넉 평을 더 장만하고, 자꾸자꾸 땅을 넓혀서 열 평과 백 평을 이루도록 해요. 시골에서는 백 평이나 천 평씩 꾸준히 땅을 넓혀서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요. 도시에서도 텃밭과 조그마한 숲정이를 이루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노래할 터전으로 가꾸어요.


  땅값이 비싼가요? 땅값이 비싸면 이 땅값을 댈 만큼 즐겁고 씩씩하게 돈을 벌어요. 아니면, 땅값이 싼 곳으로 집을 옮겨서 ‘부동산’ 아닌 ‘보금자리’가 될 곳을 찾아야지요. 그대로 머무르지 마셔요. 그대로 고인 물이 되지 마셔요. 우리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씨앗을 손수 심어서 가꿀 수 있는 땅뙈기’에 보금자리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우리가 손수 지어야 합니다.


  건물까지 손수 지으면 가장 나으나, 건물은 남이 지은 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땅만큼은, 씨앗만큼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심어서 숲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교육을 학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삶을 사회한테 맡기지 마셔요. 사랑을 정치한테 맡기지 마셔요. 살림을 경제한테 맡기지 마셔요. 꿈을 인문학한테 맡기지 마셔요. 이야기를 종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놀이를 스포츠한테 맡기지 마셔요. 노래를 영화나 예술한테 맡기지 마셔요. 모든 배움(교육)과 삶과 사랑과 살림과 꿈과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를 우리가 손수 지어서 기쁘게 누려요. 바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길이 있어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배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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