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 - 고집불통 작가와 제멋대로 화가의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여행
맥 바네트 글, 애덤 렉스 그림, 고정아 옮김 / 다산기획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 같은 그림책을 놓고 쓴 이 글은 <아침독서신문>에 실으려고 썼으나, 싣지 못한 글입니다. 앞서 올린 글과 이 글은 '같은 책'을 읽은 느낌을 담은 글이지만, 이야기를 푸는 얼거리가 사뭇 다릅니다. 따로 떼어서 읽어 보시면, 이야기를 어떻게 달리 풀어내는가를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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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76 ㄴ



이야기를 짓는 사람 ㄴ

―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

 맥 바네트 글

 애덤 렉스 그림

 고정아 옮김

 다산기획 펴냄, 2015.1.12.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어른은 ‘어버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은 ‘그냥 어른’이고, 아이를 낳은 어른만 ‘어버이’입니다. 어버이가 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를 헤아려서 이모저모 새로 짓거나 마련하거나 가꿉니다. 이를테면, 아기가 찾아오는 집에 아기가 깃들 방이나 잠자리를 마련하고, 배냇저고리를 새로 짓지요.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릴 텐데, 젖을 뗄 무렵에는 아기가 먹을 밥을 마련해요. 아기가 쓸 수저와 밥그릇을 장만하지요. 아기는 젖만 먹고 자라지 않으니, 어버이는 노래를 들려주고 여러모로 아기하고 놀려 합니다. 왜냐하면, 아기는 혼자 서거나 걷거나 돌아다니지 못하니, 곁에서 어버이가 놀아 주면서 놀잇감을 건네기도 해야 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말을 익힐 수 있도록 어버이는 아기 곁에서 말을 들려줍니다. 어버이가 여느 때에 쓰는 여느 말이 바로 아기가 배우면서 물려받는 말입니다.


  아기 티를 벗고 아이가 되면, 그동안 어버이한테서 듣고 배운 말을 이리 엮고 저리 짜서 ‘아이 나름대로 새로운 말’을 빚습니다. 어버이가 거친 말을 쓴다든지 영어를 자주 쓰면, 아이도 거친 말을 똑같이 쓸 뿐 아니라 영어도 자주 써요. 어버이가 고운 말을 쓴다든지 정갈한 말을 늘 쓰면, 아이도 고우면서 정갈한 말을 써요.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노래를 듣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켜면 온갖 이야기가 흐르고 갖가지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백 해쯤 앞서만 해도 모든 아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언제나 시골마을에서 시골사람이 시골일을 하다가 부르는 시골노래를 들으면서 시골살이를 배웠어요. 어버이는 딱히 아이한테 흙짓기나 집짓기나 옷짓기를 가르치지 않지만, 아이는 늘 어버이 곁에서 호미질과 괭이질과 바느질과 베틀질과 절구질과 낫질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하나씩 배우고 물려받아요. 놀이도 노래도 춤도 저절로 물려받고 배우면서 ‘제 가락’이 싱그럽습니다. 다만, 이제 이러한 삶길은 거의 끊어졌어요. 민속학자는 두멧자락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삶노래(민요)’를 받아적어서 남기려 하는데, 삶노래는 책에 안 적혔어도 수천 수만 해를 곱게 이으며 흘렀습니다.


  그림책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다산기획 펴냄,2015)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줄거리가 따로 없’이 ‘이야기를 그때그때 새로 짓는 얼거리’를 ‘줄거리’로 보여줍니다. 어딘가 알쏭달쏭하다 할 만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스스로 새롭게 지어서 즐겁게 누렸다는 대목을 재미난 짜임새와 앙증맞은 인형과 그림으로 장난스레 보여주어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다 언제나 새로운 틀로 거듭나는 이야기예요. 줄거리는 똑같아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맛이 달라지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 맞추어 이야기결을 바꾸며, ‘이야기하는 날과 때’를 살펴 이야기꽃을 새로 피웁니다. 그러니까,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는 끝이 날 수 없습니다. 그림책은 마흔 몇 쪽에서 ‘끝’이라고 나오지만, 우리는 이 다음 이야기를 우리 나름대로 새로 지어서 붙일 만합니다. 그림책 뒤에 하얀 종이나 파란 종이를 붙여서 어버이와 아이가 새로운 이야기를 그리고 써도 재미있어요. 이 그림책은 ‘그림책을 즐기는 길’은 아주 많다고 넌지시 알려줍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새 이야기를 지어서 함께 나눌 수 있다고 가만히 보여줍니다.


  삶을 짓는 사람이 이야기를 짓습니다.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기에, 이야기를 언제나 새롭게 짓습니다. 주어진 노랫말대로만 노래를 부를 수 있으나, 노랫말을 내 나름대로 고쳐서 새로 부를 수 있습니다. 노랫가락도 우리 나름대로 새로 짓거나 붙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끝이 없고, 꿈은 끝이 없으며,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끝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오늘 하루도 기쁘게 불러요. 4348.2.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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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 - 고집불통 작가와 제멋대로 화가의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여행
맥 바네트 글, 애덤 렉스 그림, 고정아 옮김 / 다산기획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 <아침독서신문>에 싣는 글입니다. 그림책 한 권을 놓고 느낌글을 두 가지로 썼습니다. 두 가지 느낌글을 따로 올려놓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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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76 ㄱ



이야기를 짓는 사람 ㄱ

―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

 맥 바네트 글

 애덤 렉스 그림

 고정아 옮김

 다산기획 펴냄, 2015.1.12.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적에 ‘시간 흐르는 줄’ 잊기 일쑤입니다.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니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은 곧 흐릅니다. 서너 시간이나 예닐곱 시간까지 바로 흘러요. 그런데, 반가운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하고 돌아보면 아주 수수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를 놓고 몇 시간을 지치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워요.


  아이라면 누구나 수수한 놀이 하나를 놓고 하루 내내 신납니다. 이 장난감이 있어 이 놀이를 해야 신나지 않아요. 아무런 장난감이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지을 줄 압니다. 연필 한 자루로도, 비닐봉지 하나로도, 돌멩이 하나로도 온갖 놀이를 지을 수 있어요.


  그림책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다산기획 펴냄,201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은 새로운 얼거리를 써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 이 그림책에 흐르는 줄거리는 어떠할까요? 줄거리는 새로울까요? 이 그림책을 읽을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텐데,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은, 책이름에서도 나오듯이 ‘끝없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줄거리도 끝이 없고 이야기도 끝이 없습니다. 끝이 날 수 없는 이야기를 ‘얼핏 끝이 났다’고 보여주지만, 아무래도 이야기가 더 있으리라고 느낄 만해서, 책을 이리저리 살펴야 합니다. 어디엔가 ‘도라에몽 사차원 주머니’가 붙어서 다른 이야기가 더 이어지리라 생각할 만하니까요.


  얼거리를 가만히 보면, 《사자 사냥꾼 클로이의 끝없는 이야기》는 ‘글을 쓰는 사람’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나오고, ‘글 아저씨와 그림 아저씨가 빚은 클로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엮는다고 할 만해요. 그런데, 세 사람은 또 한 사람을 부릅니다. 누구를 부르는가 하면, 이 그림책을 펼쳐서 읽을 아이(또는 어른)를 부릅니다. 그래서, 네 사람(또는 다섯 사람, 때로는 예닐곱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엮으면서 보는 그림책입니다.


  글 아저씨가 먼저 첫머리를 엽니다. 글 아저씨는 ‘인형’ 모습으로 나와서 이름을 밝히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러고 나서 그림 아저씨가 ‘인형’ 모습으로 나와서 ‘클로이’라는 아이를 만화로 그려서 보여주어요. 이제 이렇게 세 사람이 이야기를 엮으려고 하는데, 그림 아저씨는 곧잘 글 아저씨하고 다툽니다. 옥신각신하지요. 왜냐하면, 그림 아저씨도 ‘그림책을 엮는 일’을 함께 하고 싶거든요. 글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싶지 않아요. 글 아저씨는 어떤 마음일까요? 글 아저씨는 글 아저씨대로 생각한 얼거리가 있어서, 이 얼거리를 따르지 않는 그림 아저씨가 괘씸합니다. 사자한테 잡아먹히도록 내몰아요.


  그림 아저씨가 사자한테 잡아먹히게 했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그림 아저씨를 부르든 글 아저씨가 손수 그림을 그리든 해야 할 테지요. 글 아저씨가 그림 아저씨하고 머리를 맞대면서 둘이 더욱 재미나게 이야기를 엮으면 부드럽게 그림책 하나가 나올 텐데, 글 아저씨가 그만 억지를 부리고, 그림 아저씨도 글 아저씨한테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지 못했어요. 이 사이에서 ‘클로이’는 모두 괜찮으니까, 그림책 이야기를 차근차근 다시 엮자고 두 아저씨한테 말합니다. 두 아저씨는 살짝 바보스러웠으나 클로이라는 아이는 슬기롭고 차분하게 다독여 주어요. 자, 그러면 이 다음에는 이야기가 어떻게 흐를까요? 궁금한 분은 손수 이 그림책을 장만해 보셔요. 모든 줄거리를 다 밝히면 “끝없는 이야기”에서 ‘끝’이 보일 테니까요. 끝이 없는 이야기에 참말 끝이 없도록, 즐겁게 읽으면서 우리도 새로운 이야기를 책 뒤에 종이를 더 붙여서 손수 글과 그림을 넣으면 더욱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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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 보통 엄마의 거창고 직업십계명 3년 체험기
강현정.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배움책 31



‘내 일’을 찾으면 아름답습니다

―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강현정·전성은 글

 메디치 펴냄, 2015.1.20.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합니다. 느끼든 느끼지 않든 우리는 저마다 ‘내 일’을 찾아서 합니다. ‘내 일’이란 내가 스스로 찾아서 누리는 일입니다. 남이 시키기에 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내 일’입니다.


  ‘내 일’은 ‘내 삶’입니다. 내가 스스로 짓는 삶이란 내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내 삶을 짓지 못합니다. 내가 스스로 바라면서 꿈을 꿀 때에 내 삶을 짓습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꾸역꾸역 한다면 내 삶을 짓지 못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도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남이 시키는 일을 해서 드러나는 ‘내 삶’은 내가 바라거나 꿈꾸는 모습이 아닙니다. 반갑지 않고 기쁘지 않으며 설레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설픈 모습이요, 아름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힘들어도 참으면서 이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 가는 거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여태껏 내가 믿어 왔던 게 혹시 허상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내가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려 하는지, 이 아이와 함께 어떤 삶을 꾸려 나가려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같은 문제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흔들렸다 ..  (27, 31쪽)



  ‘내 일’을 하는 사람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 일을 하기에 얼굴이 환합니다. 내 일을 할 적에 마음이 가볍고, 내 일을 하며 마음이 가볍기에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홀가분합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안 늙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안 아프고 안 힘듭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에 거북하거나 힘들거나 지겹거나 따분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 알아야 합니다. 내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은 따로 ‘쉴 틈’을 내지 않습니다. 내 일을 하기에 굳이 안 쉽니다. 내 일은 워낙 기쁘고 아름다우니 이 일에 아주 빠져들어서 무척 오랫동안 신나게 하지요. 이와 달리 남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는 몸이 지치고 마음도 벅차기에 자꾸 쉬어야 합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다가 살짝 쉬더라도 기운을 되찾기 어렵고, 남이 시키는 일을 날마다 해야 하는 사람은 온몸이 찌뿌둥합니다.


  이를테면, 서울을 오가며 일터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 바깥에서 서울 안쪽으로 새벽같이 들어가서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핏기가 없기 일쑤요, 웃음도 없기 마련입니다. 아무 낯빛이 없어요.



.. 선생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사랑’이었다 … 내 아이들에게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 것, 그것은 사랑을 이루는 참 사람됨의 가치다 …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돈과 힘을 갖겠다는 말은 어쩌면 지독한 오만일지 모른다 … “몸은 힘들었지만 내 안에서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집이란 뭘까? 기둥은 왜 이렇게 세워야 하지? 이음은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 걸까? 내 인생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지요.” 성윤제한테는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  (37, 79, 125, 157쪽)



  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기쁜 일’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기쁜 일을 하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빛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빛나면서 스스로 사랑스레 노래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일은 아니나,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기쁜 일’이라면 돈을 아랑곳하지 않기 마련이지만, 스스로 기쁜 일이기에 이 일에는 돈이 끝없이 들어옵니다. 아름다이 일하는 사람한테는 아름다운 돈이 줄기차게 들어옵니다.


  돈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돈이 기쁘게 들어와서, 다시 돈이 기쁘게 나갑니다. 돈에 시달리거나 들볶이지 않기 때문에 돈을 기쁘게 벌어서, 다시 돈을 기쁘게 씁니다.


  우리는 돈을 벌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으려고 일을 합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일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찾아서 기쁘게 지으려고 내 일을 살펴서 껴안습니다.


  ‘직업’이나 ‘진로’를 찾아야 하지 않습니다. ‘일’을 찾아야 합니다. ‘기쁨’을 찾아서 ‘기쁜 일’을 누려야 합니다. ‘사랑’을 찾아서 ‘사랑으로 기쁜 일’을 해야 합니다.



..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진학과 진로를 성적에 맞추는 모양새가 우리 현실이긴 하다 … 공부와 인성, 둘 중에 인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백날 말해도, 내 아이의 착한 행동보다 성적만 좋은 옆집 누구를 부러워하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에게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 “차라리 삐삐만 있던 때가 좋았어. 아니, 그것도 없던 때가 좋았어. 인터넷도 없던 때가 좋았어.” 하며 부질없이 기술의 발전을 탓한다. 하지만 이 모든 푸념은 속상한 내 감정을 배설해 버리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45, 65, 174쪽)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메디치.2015)을 읽습니다. 강현정·전성은 두 분이 엮은 책입니다. 강현정 님은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로서, 이녁 스스로 돌아보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고, 거창고등학교를 이끈 전성은 님한테 말씀을 여쭈어 ‘배움·가르침’을 들으며, 거창고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을 만나서 ‘삶’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대목을 묻습니다.


  책이름을 보면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 나오는데, 강현정 님이 만난 ‘거창고 마친 아이들’을 보면, ‘직업’을 찾아서 산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사는 아이들은 누구나 ‘직업’이 아닌 ‘내 일’을 찾습니다. 사회에서 남들이 바라보는 ‘더 좋아할 만한 직업’이 아닌 ‘스스로 내 삶을 기쁘게 지을 만한 일’을 보면서 한 걸음씩 걷습니다.



.. 그 일은 아이에게 단지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기쁨만 준 게 아니었다. 더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믿어 준 만큼 자신감을 얻는다 … 부모는 아이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해도 아이에게 믿음을 주면 통제 속에서 큰 아이보다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다 … 가만히 따져 보면 화가 난다. 도대체 뭣 때문에 교육을 이렇게 비비 꼬아 놓은 걸까. 누구를 위해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걸까. 도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 걸까 ..  (181, 199, 202쪽)



  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있다고 합니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을 보면 첫머리에 이 열 가지 다짐말이 나옵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 열 가지를 하나하나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열 가지 다짐말은 거창고등학교 아이들한테 빛이 되거나 소금이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다만, 나한테는 이 열 가지 다짐말이 하나도 안 와닿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시골에서 두 아이와 곁님하고 살거든요. 이 열 가지 다짐말 가운데 ‘시골사람’한테 걸맞는 대목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시골사람은 ‘월급’이 없는데 월급이 적은 쪽이 어디 있을까요? 월급을 따지는 일자리는 도시에 있습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노동자한테는 이런 것을 따져야 할 텐데, 왜 고등학교 아이들이 ‘월급 노동자’로만 일해야 할까요? 왜 돈을 먼저 따져야 할까요?


  아이들이 돈을 버는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이 돈을 생각하도록 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할 만한 일을 찾아서 하느냐’ 하는 대목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손수 삶을 짓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 꿈으로 가는 일을 해야지, 남이 시키는 일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승진’이라든지 ‘모든 조건’이라든지 ‘장래성’이라든지 ‘사회 존경’ 같은 대목은 부질없어요. 그리고, ‘좋은 조건’이 있다면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나는 두 아이와 사는 어버이이기 때문에 이 대목을 늘 생각합니다. 내가 시골에서 아름답게 일구는 보금자리라면 누구보다 아이한테 물려줄 만합니다. 내가 아름답게 일군 보금자리를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이 아이들이 새롭게 가꾸어서 사랑스레 지으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들한테 다시 물려주어서 다시금 새롭게 가꾸는 보금자리로 이을 수 있어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두고두고 수많은 나날에 걸쳐서 즐겁게 살면 모두 아름답습니다.



.. 지금은 옆에 안 계시지만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교육은 그런 거였다. 엄마가 나에게 정말 해 주고 싶었던 말, 내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셨던지 그 마음. 그걸 그렇게 나와 함께하는 때때마다 삶 속에서 보여주셨던 거다 ..  (223쪽)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롭게 다짐말을 짓습니다. 나는 내가 할 일과 놀이를 생각하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다짐말을 손수 새롭게 짓습니다. 나는 ‘직업’을 찾을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오직 ‘내 일(내 놀이·내 삶·내 길)’을 찾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하나, 하면서 기쁜 일을 하자. 둘, 하면서 신나는 일을 하자.


 셋, 손수 밥·옷·집 짓는 일을 하자. 넷, 사랑스러운 일을 하자. 다섯, 아름다운 일을 하자. 여섯,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자. 일곱,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을 하자. 여덟, 숲을 짓는 일을 하자. 아홉, 파란하늘을 보며 바람을 마시는 일을 하자. 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열 가지 다짐말을 새롭게 적습니다. 나는 이 열 가지 다짐말을 새롭게 적으나, 우리 아이들이 스무 살 즈음 되면, 우리 아이들은 또 우리 아이들 나름대로 새로운 ‘내 일 찾기 다짐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열 가지로 새 다짐말을 쓸 수 있고, 한 가지만 쓸 수 있으며, 스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거창고등학교 아이들이 ‘직업선택의 십계’를 외우듯이 쳐다보도록 하지 말고, 거창고 아이들 스스로 ‘내 길 찾는 다짐말’을 쓰도록 이끌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 길은 내가 스스로 찾아야 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은 내가 손수 짓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내 일은 스스로 찾아서 할 뿐, 남이 시키거나 알려주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가 너를 흉내내면 안 아름답습니다. 내가 나다운 말을 할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네 말을 흉내내거나 따라하면 앵무새가 될 뿐입니다. 내 삶은 오직 내가 압니다. 내 사랑은 오직 내가 길어올립니다. 내 꿈은 오직 내가 이룹니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을 쓴 강현정 님도 이 대목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을 따라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강현정 님 아이들도 ‘남이 하는 일을 시키려’ 하면 그 아이들도 힘들고 강현정 님도 힘듭니다. 스스로 할 일을 스스로 합니다. 스스로 누릴 삶을 스스로 누립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며, 스스로 사랑합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을 배우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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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민낯 - 패망한 일본은 한반도의 권력 구도를 어떻게 바꿨나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7
김삼웅.장동석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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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5



정치·사회·경제가 걸어온 발자국

― 한국 현대사의 민낯

 김상웅·장동석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3.1.



  ‘역사’라는 이름을 써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을 살핀 지 얼마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은 ‘역사’라는 낱말을 쓴 적이 없고, 쓸 일이 없으며, 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서 권력을 거머쥐면서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들은 ‘역사’를 만들어서 퍼뜨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권력을 쥔 임금은 이녁 발자국을 돌에 새깁니다. 이 빗돌은 오늘날 문화재나 유적이나 유물이 됩니다. 권력을 쥔 임금 옆에서 고물을 받아서 챙기는 신하나 양반은 이녁 발자국을 족보에 남깁니다. 이러면서 이녁 무덤에 빗돌을 세웁니다. 이 빗돌은 문화재나 유적이나 유물이 되지 않으나, 두고두고 제삿상을 차려서 쳐다보도록 합니다.


  권력을 쥐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느 사람들은 날마다 삶을 새로 짓습니다. ‘어제(지나간 일)’를 구태여 붙잡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흙을 갈고 보듬으면서 밥을 지으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밥을 먹을 텐데 어제 먹은 밥을 떠올려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어 새밥을 먹는데 아침에 먹는 밥을 되새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흙과 함께 사는 사람은 역사도 족보도 빗돌도 없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질없는 줄 잘 압니다.



.. 모든 사람이 진실이 아니라고 인정한 식민지사관까지도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게 이 땅의 보수 세력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보수도 아니죠. 극우 세력입니다 …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데, 자세한 상황과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 역사적 진실이 오롯이 전해지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를테면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인식 같은 것 말입니다 … 우리 헌정사가 불안한 이유는 시작부터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야욕에 의해서 국가의 기본인 헌법이 애초부터 망가졌으니까요 ..  (11, 27, 51쪽)



  ‘학문’을 하는 이들은 옛날에 남겨진 빗돌이나 책을 살피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그런데, 옛날 빗돌이나 책은 오로지 ‘정치·사회·경제 권력자 발자국’입니다. 권력자 눈에는 권력자만 보이기 때문에 다른 발자국은 못 남깁니다. 이를테면, 임금 자리에 앉아서 흙 한 줌 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씨앗’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낫도 모를 테고, 괭이도 모를 테며, 솥도 모를 테지요. 신하나 양반이 아궁이를 알까요? 부지깽이를 알까요? 솔가지를 알까요? 짚신을 알까요? 메주를 알까요? 콩꽃을 알까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이든 조선왕조실록이든, 이런 책에는 ‘삶을 지은 사람들이 날마다 기쁨으로 누린 이야기’가 한 줄도 없습니다.


  ‘정치·사회·경제 권력자 발자국’인 옛 역사책에는 그저 권력자 발자국만 적혔으니, 이를 학문으로 삼아서 살피는 사람은 언제나 권력자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한겨레에서 99.99%를 이루었다고 할 만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밝히거나 다룰 수 있는 역사학자나 인문학자나 문화인류학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느 시골사람 이야기는 글 한 줄로도 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시골사람을 옆에서 구경한 뒤 적은 글은 몇 줄 있어요. 그나마 귀양살이를 하던 몇몇 지식인이나 학자가 이런 글을 남깁니다. 서울 한복판 궁궐 언저리에서 임금바라기를 하던 지식인이나 학자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글로 안 씁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니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해요. 벼꽃이 언제 피는지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벼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 밥이 되는 쌀은 어떻게 나오고, 쌀이 되는 벼는 어떻게 얻으며, 벼가 되는 나락은 언제 누가 어떻게 심어서 어느 만큼 돌보아서 자라는가를 제대로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 해방공간에서 역량이 있던 〈동아일보〉에서 이렇게 보도가 되다 보니 김구·이승만·박헌영 등 좌우익 인사들이 모두 반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신문 기사 하나가 한민족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고 민족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동아일보〉에서 왜 이런 보도를 했는지, 혹시 미국의 힘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열악한 통신 사정에 의한 오보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 경찰, 정치깡패, 반공청년단, 군대, 그리고 주한미군까지 있었는데, 거기에 민주적으로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이 바로 4·19혁명입니다..  (41, 78쪽)



  김상웅·장동석 두 분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묶은 《한국 현대사의 민낯》(철수와영희,2015)을 읽습니다. 김삼웅 님은 수많은 자료와 책을 살피면서 ‘한국 현대사’ 발자국을 좇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를 거머쥔 권력자가 거짓스레 뒤바꾸거나 감추려는 역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온 발자국을 드러내려는 역사를 밝히려고 합니다.


  오늘날은 지난날과 달리, 시골사람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시골사람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도 하며, 지식인이나 학자가 된 사람 가운데에는 시골살이를 오래 누리고 나서 도시로 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지난날과 조금 다릅니다. 다만, 이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지식이나 학문을 다루려면 죄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만 사는데, ‘한국 현대사’를 읽으려는 이들은 틈틈이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시골사람 목소리’를 곧바로 귀여겨들으려 합니다. 이를테면 ‘증언’을 듣지요.



.. 백범 선생 암살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까 안두희는 테러 집단인 서북청년단 핵심 요원이었어요 … 그때 88구락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일파 출신으로 이승만의 핵심 측근들이었죠. 이 사람들이 비밀회의를 거듭해서 암살 적임자를 선발했는데, 그게 바로 안두희입니다. 안두희는 우리 육군에 입대하기 전에 미국방첩대(CIC)의 정보원이자 요원으로 활동했어요. 이런 복잡한 인맥을 가진 안두희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두희의 아버지가 북한 출신인데, 아주 악질적인 친일파로 못된 짓을 많이 해서 재산을 크게 불렸어요 ..  (46∼47쪽)



  김구와 여운형이라는 분이 죽은 앞뒤를 살던 할매와 할배는 아직 이 땅에 있습니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독재정권을 움켜쥐다가 사월혁명을 맞아서 부랴부랴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은 언저리에 살던 할매와 할배는 꽤 많이 이 땅에 있습니다. 군사쿠테타로 정치권력을 가로채서 그악스러운 독재를 일삼던 박정희라는 사람이 춤추던 무렵을 살던 아재와 아지매는 이 땅에 대단히 많습니다. 시골에는 새마을운동 부스러기가 짙게 남았으며, 오늘날 도시에도 새마을운동 찌끄러기가 곳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에서 권력을 주름잡는 이들이 거짓말로 역사책을 꾸미려 하면, 이제 이런 거짓말은 아주 쉽게 들통납니다. 이제는 ‘책’과 ‘자료’로도 참과 거짓이 환하게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람(시골지기)’과 ‘학자(지식인·신하·관료)’와 ‘임금(권력자)’이 따로 놀았다면, 오늘날에는 사람 사이에 학자가 있고 학자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있는 학자나, 학자 사이에 있는 사람은, 임금(권력자)이 저지르는 짓을 꼼꼼히 알아채서 낱낱이 밝힐 수 있습니다.



.. 이승만으로서는 기반이 없으니 그들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죠. 친일파들은 일제가 항복하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젊은 층은 대부분이 군대나 경찰에 입대해서 자기 전과를 숨겼어요. 이승만에게 줄을 선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돈과 정보를 갖다주고, 라이벌을 죽여 주기까지 했죠. 이승만 주변에는 일제 치하에서 관리나 법관, 경찰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이승만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친일파들은 자기 구명을 할 수 있으니 절묘하게 궁합이 맞은 거죠 …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 것이 1949년 5월 초였고, 6월에는 반민특위가 해체됩니다. 6월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죠. 이승만 정권 핵심부는 절묘한 공안 시스템을 가동해서 국회를 무력화한 것입니다 ..  (55, 59쪽)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라는 조그마한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샅샅이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실마리를 짚어 줍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는 우리를 둘러싼 숨겨진 그림자를 우리가 스스로 캐내어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건드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눈을 뜨지 않기에 그동안 못 보거나 안 보던 그늘이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참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참을 봅니다. 거짓을 보면서 거짓인 줄 알아채려 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이 마치 참인 줄 잘못 받아들입니다. 이를테면, 교과서에 나온 지식이라고 해서 이 ‘교과서 지식’이 다 옳을까요? 교과서 지식은 그저 ‘교과서에 적힌 지식’일 뿐입니다. 교과서를 엮는 사람이 어떤 정치권력 입맛에 맞게 춤추느냐에 따라서 교과서 지식이 달라집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엉터리 역사 교과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한국에서도 얼마 앞서까지 ‘엉터리 역사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런 지식으로 대입시험을 치르게 했고, 대입시험을 누구나 치러야 하는 지옥으로 굴레를 만들어서. ‘교과서 지식이 옳든 그르든 맞든 틀리든 따지지 말고 외우도’록 길들였어요.


  요즈음은 한국에서 엉터리 교과서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엉터리 교과서는 아니어도 ‘참으로 담을 이야기’는 담지 못합니다. 아니, 안 담는다고 해야 맞겠지요. 엉터리는 아니어도 참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교과서도 참다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해요.



.. 미국 국무성 등이 파악한 박정희는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인물입니다.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들이 칼 차고 다니는 게 매력적으로 보여서 일본군에 지원했을 정도니까요. 그때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고 기혼인 상태였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만주군관학교 결격사유인데 혈서까지 써 가며 일본에 충성하기로 맹세합니다. 하지만 일본 패망 후 재빨리 변신해서 광복군에 이어 국군에 입대하고, 군부 내 남로당 세력의 핵심 책임자가 됩니다. 북에서 온 형의 친구 황태성을 처형하는 매정함도 보입니다 … 박정희는 미국에 자신의 반공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를 처형해 버리지요 … 세계적인 개발 붐과 저유가 정책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발전한 건데, 이것을 모두 박정희 정권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는 거죠. 박정희가 한일 굴욕 회담 결과 일본으로부터 받은 건 고작 5억 달러입니다 … 독도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탈해 간 문화재 환수 문제, 사할린 동포 문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 등은 거론조차 안 했어요. 오히려 굴욕 회담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정항을 계엄령을 내려 진압했습니다 ..  (80∼81, 83∼84쪽)



  권력바라기 정치꾼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권력을 바라면 그저 권력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권력바라기 정치꾼은 권력을 손에 쥐면 으레 바보짓을 일삼습니다. 아니, 바보짓이라기보다 멍청한 짓을 일삼아요. 한 줌조차 안 될 그런 권력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거머쥐었다’는듯이 여기면서 독재를 일삼으려 합니다.


  가만히 보면, 권력바라기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내가 거머쥔 권력을 다른 사람도 바라기 마련일 테니, 권력을 쥔 정치꾼은 다른 사람을 모두 맞수(적)로 삼아서 무찔러야 한다고 느낄 만해요. 독재가 될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교육권력이나 종교권력 모두, 혼자 무시무시한 힘을 휘둘러서 모든 사람이 이녁 앞에서 무릎을 꿇도록 짓누르려 합니다.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씨앗 한 톨을 손수 흙에 심는 사람은 권력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권력자가 총칼을 들이밀면서 시골지기더러 ‘너 말야, 내가 시키는 일만 해. 왜 씨앗을 심으려고 해? 씨앗 심지 말고 군복 입고 총 들어!’ 하고 윽박지른들, 시골지기는 이런 권력자 말을 안 듣습니다. 그저 한 마디 해 줄 테지요. ‘얌마, 네가 대통령놈이고 임금년이고 뭐고 말이야, 내가 이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굶어죽을 텐데, 나더러 총을 들라고? 총 들고 싶으면 너 혼자 들어!’ 하고요.


  권력이나 독재나 군대나 전쟁무기가 생기는 까닭은 ‘손수 씨앗을 심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나 독재자나 군인은 씨앗을 안 심습니다. 씨앗을 안 심기도 하고, 씨앗을 돌보지 않기도 합니다. 이들은 아이를 낳지도 않고, 아이를 돌보지도 않으며, 아이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권력자가 아이를 낳은들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까요? 권력자는 독재 짓거리를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가르칠 뿐일 테지요.


  역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를 더 깊이 파헤쳐서 더 많은 역사 지식을 알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역사를 읽어서 스스로 깨달았다면, 이제 책은 그만 내려놓고, 씨앗을 심으러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흙이 있고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내 보금자리가 달라지고, 내 마을과 고장이 달라지며, 내 나라가 달라집니다. 참민주를 이루려면, 뛰어나거나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나오기보다는, 우리가 다 함께 흙을 가꾸면서 씨앗을 심을 노릇입니다. 4348.3.2.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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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스커넥트 -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터넷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로버트 맥체스니 지음, 전규찬 옮김 / 삼천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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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4



정치권력은 민주와 평화를 안 바란다

― 디지털 디스커넥트

 로버트 W.맥체스니 글

 전규찬 옮김

 삼천리 펴냄, 2014.12.12.



  홀가분하게 앞을 바라보다가 문득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두 발을 하늘로 뻗으면 가볍게 물구나무서기가 됩니다. 이때에는 벽에 두 발이 닿지 않아도 몸이 가만히 선 채 무척 느긋하게 두 팔로 땅을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닥을 살피다가 영차 하고 힘을 주면 물구나무서기가 안 되거나 두 발이 벽에 쿵 소리를 내면서 닿아요.


  물구나무서기를 할 적마다 느끼는데, 힘으로 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힘으로 하려 하면 힘이 들어요. 힘을 굳이 주지도 빼지도 않으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아늑하고 느긋하면서 재미있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놀이입니다.


  셈틀을 켜서 인터넷을 열 적에도 늘 같아요. 홀가분하게 인터넷을 누비면 내 마음 그대로 즐겁게 여러 가지를 누립니다.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셈틀을 켜서 이것저것 하려고 들면 여러모로 골이 아프기도 하고, 막상 하려던 일도 엉키거나 힘이 들기 일쑤입니다.



.. 학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조사하고 탐색할 때,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국가에서조차 상층부를 차지한 채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 사항이다. 구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런 상황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 미국에서 진짜 권력은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한 자들에게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경제학은 기업이 비용보다 더 큰 수익을 창출하는 한도 안에서만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기업들은 경쟁 업체와 차별화된 것으로 인식될 브랜드를 창조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광고는 상표에 일종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 상표에 내재하는 제품의 차별성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며, 효용성과는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 ..  (48, 69, 88, 89쪽)



  시골에는 사람이 적습니다. 시골에는 젊은이가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적습니다. 사람도 적고, 젊은이도 적으며, 어린이와 푸름이도 참으로 적은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은 있으나, 셈틀을 놓아 인터넷을 살피는 사람도 퍽 드뭅니다. 시골마을 할매나 할배는 텔레비전에 기대어 ‘새로운 정보’를 얻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보가 아니라면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면, 군청이나 면사무소 공무원이 알려주는 정보를 듣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에는 젊은이도 매우 많습니다. 도시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신문 읽는 사람도 많으며, 아침마다 거저로 나눠 주는 신문도 많고, 텔레비전뿐 아니라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살피는 사람도 몹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정보를 얻는 길이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또 넘치며 자꾸 넘칩니다. 도시에는 극장도 많고 문화시설도 많습니다. 도시에는 찻집이나 옷집이나 온갖 가게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도시에서는 ‘알아야 할 것’투성이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둘레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을 일이 없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볼 일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이웃집에 들러서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보노라면, 참말 볼거리가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이바지할 만한 이야기는 어느 한 가지조차 없다고 할 만한 텔레비전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무엇을 그리 많이 알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사건과 사고를 왜 그리 많이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과학을 왜 그리 많이 헤아리면서 갖가지 ‘새 정보’를 날마다 머릿속에 넣으면서 ‘어제 정보’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루가 지나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 정보라면, 처음부터 쓰레기통에 넣을 정보이지 싶습니다. 몇 시간쯤 지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라면, 이런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는 처음부터 만들지도 퍼뜨리지도 읽지도 않아야 홀가분한 노릇이지 싶습니다.



.. 기업체들이 경쟁사로부터 자사의 제품을 차별화하기 위해 더 많은 광고를 하면 할수록 미디어와 문화에는 더 많은 상업적 ‘정보 혼란’ 상태가 야기된다 … 정치경제의 기본 내용들에 관해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은 사실상 뜻을 같이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공적인 토론이나 논쟁의 테이블 위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다. 맥퍼슨의 견해에 따르면, 양당 시스템은 특히 경제 스펙트럼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민의 무관심과 탈정치화를 조장하고 엘리트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아주 이상적이다 … 지금도 소수의 대형 업체들이 영화 제작과 네트워크 텔레비전,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템과 채널, 출판, 음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 생산자 주권이 소비자 주권을 대신하게 된다. 미디어 기업들은 이제 자신들이 무엇을 제작하고 무엇을 제작하지 않을지에 관해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된다 ..  (90, 117, 137쪽)



  로버트 W.맥체스니 님이 쓴 《디지털 디스커넥트》(삼천리,2014)를 읽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좀먹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인터넷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어떻게 갉아먹거나 무너뜨리려 하는가를 알려주려는 책입니다.


  마음 착한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사랑과 평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마음 궂은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전쟁과 차별과 독점을 이룬다고 합니다.


  깊이 헤아리지 않아도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돈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거머쥔다면, 오직 돈굴리기에 매달릴 테지요. 권력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오로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더 세게 움켜쥐려고 할 테지요.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미국’ 이야기를 다루는데, 미국에 있는 회사 이름을 한국에 있는 회사 이름으로 바꾸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는 ‘한국’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아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있는듯이 보이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 실제에서는 결국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그들이 이후에 원하게 되는 바를 중요하게 결정한다 … 오늘날 미국의 초등교육은 사실상 상업주의 가치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 대다수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던 상표를 주로 이용하며, 어린이들 또한 부모들의 구매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 이익에 굶주린 몇몇 발행인들은 황색 저널리즘이라 이름 붙여질 선정주의가 돈 되는 길이라는 점을 곧 깨닫는다 … 오늘날 미국에는 민주적 지배 구조에 관한 이해할 만한 수준의 냉소주의가 팽배하다. 권력을 가진 상업적 이해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희망을 포기해 버린 탓이다 … 독점 방송 면허권과 저작권 연장, 세금 보조 같은 특혜가 항상 베풀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140, 141, 155, 165쪽)



  한국이라는 나라에 민주가 있을까요?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한테 있을까요? 투표하는 민주 제도는 있으나, 이 다음으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지켜보는 민주 제도는 있을까요? 평화로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민주 제도가 한국에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맡는 몫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지키는’ 자리는 정치권력자와 경제권력자 울타리일 뿐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 주머니를 털어서 권력자 울타리를 지키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 노릇만 하지 않나요?


  사회에서도 민주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이요, 학교에서도 민주를 찾아내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는 입시교육만 있습니다. 입시교육에 따라 아이들을 줄세우고, 똑같은 제복(죄수 옷차림)을 비싼 값을 치러서 입도록 내몰면서 ‘다 다른 모든 아이’들을 ‘다 같은 종(노예)’이 되도록 길들입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어버이가 집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버느라 바빠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이 입시지도만 하느라 아이들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저 시험공부만 합니다. 아이들은 동네나 마을에서도 아무런 삶을 보거나 배우거나 익히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저 물질문명과 소비사회만 바라보고 이런 흐름에 젖어듭니다.



.. 정부 규제의 핵심은 한마디로 기업이 기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게 되어 버렸다. 이게 바로 새로운 공익 개념이다 … 규제가 더욱 줄어든 상태에서, 더 적은 수의 거대기업들만 살아남게 된다 … 미디어 기업들이 지난 15년 동안 사실상 인터넷의 개방성과 평등성을 제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시스템을 최대한 폐쇄하고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이나 국가가 인터넷 이용자들을 은밀하게 모니터링하도록 하며 … 1970년대 베트남전쟁 직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이 군산복합 시스템은 그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았다. 군사와 안보 예산 지출이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경제의 상당하고 지속적인 일부로서 자리잡아 왔다 ..  (192, 197, 219, 278쪽)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신문도 방송도 볼 일이 없습니다. 더 헤아린다면, 시골에서는 인터넷도 할 일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시골에서는 전화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그저 시골살이만 하면 넉넉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시골에서는 왜 신문도 방송도 학교도 인터넷도, 여기에 전화도 책도 부질없을까요? 시골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삶’을 이루는 얼거리가 어떠한 줄 몸과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깨닫자면 겉치레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리려면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남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모난 돌’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을 털어야 합니다.


  나는 너하고 다릅니다. 나는 너하고 다르기에 나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너는 너입니다. 내가 너와 똑같은 차림새로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네가 나와 똑같은 몸짓이나 얼굴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너와 내가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호미질도 낫질도 삽질도 괭이질도 저마다 다르게 제 보금자리 밭을 일구는 몸짓으로 하면 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밥을 빨리 먹어치워야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니를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이에 맞추어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시집장가를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죽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지으며 살 사람입니다.



.. 미국식 선거라는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생각해 보자. 대통령 선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거에서 지역 선거는 뉴스로 잘 보도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무의미한 것들, 종종 TV 광고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선거 뉴스가 된다. 홍보 전략에 대한 평가나 후보자의 말실수, 여론조사 따위가 선거 뉴스를 이룬다 …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뉴스에 파묻혀 산다. 그러나 이런 뉴스의 상당수는 기업과 정부가 은밀히 생성하여 기자에 의해 전혀 걸러지지 않은 홍보성 기사들이다 … 미국은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나라가 아니라 점점 발전도상국을 빼닮아 가고 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거의 모두 사유화하거나 아웃소싱시켜 버리는 그런 나라이다 ..  (316∼317, 318, 389쪽)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지금대로 내버려진 채 자본의 필요에 따라 계속 달리게 한다면, 인터넷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놀랍도록 위배한 채 좋은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400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책을 맺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스스로 삶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합니다. 자본주의 노예가 되어 내 삶을 잊으려 하겠는지, 내 삶을 손수 짓는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거듭나려 하겠는지, 어느 길로 가든 내 몫이니,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우리 삶은 자유로울 때에 자유입니다. 우리 삶은 평화로울 때에 평화입니다. 우리 삶은 민주로 이루어질 때에 민주입니다. 자유도 평화도 민주도 남이 우리한테 선물로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일구고 보듬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고 손질할 때에 비로소 모든 자유와 평화와 민주를 기쁘게 누립니다.


  손수 짓는 삶일 때에 자유와 민주와 평화입니다. 정치권력이 우리한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학교교육이 우리한테 민주를 주지 않습니다. 전쟁무기가 우리한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삶을 가꿀 때에, 비로소 자유와 민주와 평화가 내 보금자리에서 깨어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신문을 읽든 텔레비전을 켜든 인터넷을 열든, 나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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