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양장 합본 개정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장 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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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70



쳇바퀴에서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

― 설국열차

 장마르크 로세트 그림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3.7.29.



  빗소리 사이사이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따스한 비가 내리니 멧새도 이 비를 맞으면서 마실을 다닐까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멧새가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들려주는지 헤아립니다. 우리 집 마당과 뒤꼍을 오가는 수많은 멧새는 어떤 날갯짓을 하면서 비를 긋거나 먹이를 찾는지 살펴봅니다.


  설날이 지나갑니다. 남녘 시골자락은 겨우내 얼음이 안 얼기도 했지만, 설날이 지나며 내리는 비는 아주 포근한 봄비로구나 싶습니다. 아직 이월이니까 겨울이라 할 텐데, 이 겨울 끝자락에 내리는 빗줄기는 봄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알리는 비요, 따스한 기운이 골고루 퍼지면서 씨앗이 깨어나도록 북돋우는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 “이봐요, 진실을 외쳐야죠! 당신들을 억압하고 바퀴 달린 수용지에 가둬 놓은 자들에 맞서 당당히 부르짖어야지요!” “?” “일단은 당신의 석방을 촉구하겠어요. 이런 감금은 용납할 수 없어요. 중위를 만나서 해명을 들어야겠어요!” (17쪽)

- “당신은 그곳 생활을 잘 알잖아? 왜 말을 안 해? 그들도 수용지에서 나오고 싶어 하잖아. 왜 그들을 옹호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거야?” “입 다물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55쪽)





  오늘은 다른 날보다 흙이 더 폭신합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뒤꼍으로 가서 우리 집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온몸으로 느낍니다. 참말 폭신한 이 뒤꼍을 괭이로 갈 날이 곧 다가오겠다고 느낍니다. 올해에 우리 집 아이들과 즐겁게 뿌릴 씨앗을 생각하면서 설렙니다.


  흙에서 나무가 자라고, 흙에서 풀이 돋습니다. 흙에서 자라는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흙에서 돋는 풀이 꽃을 피워 고운 열매, 이른바 풀알, 다른 이름으로는 곡식을 맺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무열매와 풀열매를 먹습니다. 나무열매와 풀열매를 바로 먹지 않더라도 짐승이나 물고기를 거쳐서 먹습니다. 바다도 그냥 바다만 있어서는 바다가 싱그러울 수 없어요. 비바람을 타고 숲에서 흙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에 바다에도 새로운 숨결이 피어나서 모든 물고기와 바닷말이 살아서 숨쉴 수 있습니다.



- 칸막이로 나뉘고 꽉 막힌 이 세상에서 부자나 가난뱅이나 객차의 벽만 보고 살기는 마찬가지. (66쪽)

- “꼬리칸에서 죽어 간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추워서? 병으로? 아니. 그들은 살해당한 거야!” (81쪽)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님이 글을 쓰고, 장마르크 로세트 님이 그림을 그린 《설국열차》(세미콜론,2013)를 읽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책을 읽을 무렵이든, 이 만화책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가 극장에 걸쳤을 때이든, 나는 만화책이나 영화에 눈길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만화책은 그리 깊거나 넓게 이야기를 건드리지 못했으리라 어렴풋하게 느꼈거든요. 아직 읽지도 않은 만화책을 어떻게 느꼈느냐고요? 알고 보니, 이 만화책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미콜론에서 나온 만화책은 ‘다시 펴낸 책’입니다. 그러니, 나는 현실문화창조에서 처음 펴낸 만화책으로 《설국열차》를 한참 앞서 읽었고, 예전에 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좀 어설프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도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면서 어수룩하게 건드리다가 어영부영 끝을 맺는구나 하고 느꼈기에, 이런 어설픈 만화책이 다 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 “왜 그래요? 조금 전부터 통 말이 없군요. 무슨 문제라도?” “왜냐고요? 모르겠소? 우린 여기서 한가롭게 식탁에 앉아 지배인이 가져오는 고급 요리와 포도주 비슷한 혼합 음료를 마시고 있잖소. 감미로운 배경 음악까지 깔고. 젠장, 여긴 도대체 어떤 세상이지? 지금이 언제요? 내가 꿈을 꾸는 거요? 시간을 벗어나 버린 기분이요!” (71쪽)

- “섹스와 강간, 상상할 수 있는 체위와 방식은 모두 다 동원됩니다! 불안과 권태를 이기는 데에는 그게 최고니까. 섹스도 일종의 마약이죠. 대마초나 비프시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73쪽)





  만화책 《설국열차》를 보면, ‘앞칸 사람’이든 ‘뒷칸 사람’이든, 하나같이 ‘살섞기(섹스)’에 빠져듭니다. 앞칸이든 뒷칸이든,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몸에 따라 움직입니다. 마음에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몸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인류 멸종’을 앞두고 기차에 허둥지둥 오르기만 했을 뿐이요, 삶을 어떻게 짓거나 가꾸어야 하는가를 하나도 헤아리지 않아요.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은 지구별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으리라 여깁니다. 그럴밖에 없어요. 이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찻길뿐이거든요. 기찻길 너머로는 어느 누구도 가 보지 못하고, 가 볼 엄두를 못 냅니다. 설국열차에 탄 이들은, 기찻길이 난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달리기만 합니다. 스스로 도시를 벗어나서 숲으로 갈 생각을 조금도 안 합니다.



- “톰, 브래디. 헛수고를 했군요. 살아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자동 시스템이에요. 막막하군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요, 퓌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진실을 말해야지, 브래디. 진실. 여기까지 와서 노래밖에 못 건졌다고.” (250쪽)



  숲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그러나, 숲에 겨울이 있어도 숲은 꽁꽁 얼어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샘솟는 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샘물은 안 업니다. 졸졸졸 골짝물과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 물기운을 받아 숲이 겨울에도 살아서 움직입니다. 이 물기운이 있기에 겨울잠을 안 자는 숲짐승이 겨우살이를 합니다.


  전쟁무기 때문에 ‘인류문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설국열차만 남습니다. 그래요, 문명과 물질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러면, 문명과 물질이 모두 사라졌으니 인류가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문명과 물질에 기댄 사람들만 사라졌습니다. 설국열차에 탄 사람들은 저희를 기차 바깥으로 꺼내줄 만한 ‘다른 문명이나 물질’을 바랍니다. 이러다가 모두 굶어죽거나 얼어죽지요.


  스스로 삶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문명과 물질을 내다 버리고, 맨몸으로 숲을 짓거나 가꾸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그저 살섞기에 매달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죽을 테지요. 그뿐입니다. 만화책도 영화도 그저 그뿐입니다. 삶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없고, 삶을 그리지 않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안 보입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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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나라의 루시 - 물구나무 그림책 048 파랑새 그림책 48
소피 드 레슬러 지음, 김효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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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0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어도

― 씨앗 나라의 루시

 소피 드 레슬러 글·그림

 김효림 옮김

 주니어파랑새 펴냄, 2006.6.25.



  그림책 《씨앗 나라의 루시》(주니어파랑새,2006)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만, 이 대단한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끼려면, 우리가 손수 씨앗을 건사해서 심을 땅이 있어야 합니다. 손수 씨앗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손수 씨앗을 심지 못하며, 손수 씨앗을 가꾸지 못한다면, 이 그림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겉훑기’로만 지나치고 끝납니다.


  겉훑기를 한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나오는 수많은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보면 ‘자연·환경·생태’를 다루는데, 막상 오늘날 어린이나 어른 모두 ‘자연·환경·생태’와는 아주 동떨어진 도시에서 살거든요. 도시에서 살며 모자란 대목인 ‘자연·환경·생태’를 책으로나마 아이한테 맛보게 하려고 이러한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읽히곤 하는데, 손수 밟을 흙땅이 없이 생태책이나 환경책이나 자연책을 읽는다면,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요? 아이가 둘레를 살펴보면 흙이고 풀이고 나무이고 없는데, 이러한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은 어떤 구실을 할까요?


  아파트에서 살며 집안에 꽃그릇을 두더라도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집안에 꽃그릇을 두더라도, 마루나 방이나 툇마루에 흙이 굴러다니는 ‘꼴’을 두고볼 수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 ‘흙’이나 ‘모래’가 거의 없기 일쑤입니다. 아파트 놀이터에 흙이나 모래가 있어서, 이곳에 씨앗이 드리워 싹이 트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파트 지킴이가 어느새 이 ‘풀싹’을 뽑아서 없앨 테지요.



.. 할아버지는 나무와 풀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답니다. “씨앗도 여행을 해요?” 동생 앙트완느는 깜짝 놀란 것 같았어요. “얘들아, 텃밭으로 나오렴. 씨앗 나라로 떠나 보자!” ..  (7쪽)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는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에서 《씨앗 나라의 루시》 같은 그림책은 어느 모로 본다면 ‘바보스럽’거나 ‘반동’이거나 ‘거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밥은 무엇일까요? 밥은 풀열매입니다. 벼라는 풀에서 맺은 열매인 ‘벼알(볍씨)’이 바로 밥입니다. 다만, 벼알이 바로 밥이 되지 않아요. 벼알을 감싸는 껍질(겨)을 벗겨야 ‘쌀’이 되고, 이 쌀을 냄비에 넣고 물을 맞추어 끓여야 밥입니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돼지나 소나 닭은 모두 ‘풀알(풀열매)’과 ‘풀잎’과 ‘짚(마른풀)’을 먹으면서 자라는 짐승이에요. 요즈음에는 돼지와 소와 닭한테 사료를 주지만, 더군다나 풀짐승한테 ‘고기 성분이 깃든 사료’를 주는 끔찍한 짓을 일삼지만, 돼지와 소와 닭은 풀알과 풀잎과 짚을 가장 즐기면서 반기지요. 사람이 고기를 먹더라도, 곰곰이 따지면 언제나 ‘풀’을 먹는 셈입니다.



.. ‘저 낙하산처럼 생긴 건 왜 씨앗에 붙어 있는 걸까?’ 루시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민들레 이야기를 떠올려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씨앗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어요. 루시는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  (19쪽)



  삶을 먼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삶을 옳게 읽지 못합니다. 삶을 옳게 읽지 못한다면, 어른은 아이한테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어른 스스로 흙과 동떨어진 시멘트나라에서 사는데, 아이가 ‘흙내음 이야기’를 반가이 들을 수 없습니다. 어른 스스로 풀이나 나무하고 등진 아스팔트나라에서 사는데, 아이가 ‘풀꽃 이야기’를 기쁘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림책 《씨앗 나라의 루시》는 들을 가꾸는 할아버지한테서 슬기로운 숨결을 물려받는 아이들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시골에서는 살아야 이 그림책을 온몸으로 헤아릴 수 있고, 시골에서 살지 않더라도 틈틈이 흙땅을 두 발로 밟고 흙을 두 손으로 만지는 아이쯤 되어야 온마음을 기울여 이 그림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금자리 둘레에는 자가용과 아파트와 건물만 그득한 도시에서 《씨앗 나라의 루시》를 아이한테 읽히려 한들 읽힐 수 없어요.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에서는 ‘닐스의 신기한 여행’조차 아이한테 읽히기 어렵습니다.





.. 다람쥐는 배불리 먹었는지 남은 솔방울을 자기만 아는 곳에 숨겨 놓으려고 바쁘게 왔다갔다 했어요. “겨울을 나려고 먹이를 쌓아 두는 거야.” 루시가 속삭였어요. “그렇구나. 깜빡 잊고 먹지 않은 씨는 자라서 나무가 될 수도 있겠네?” 앙트완느가 덧붙였어요 ..  (29쪽)



  씨앗 한 톨은 시멘트나 아스팔트에 깃들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은 언제나 흙 품에 안깁니다. 흙은 씨앗을 반깁니다. 씨앗과 흙은 서로 아끼고 섬기면서 돕는 이웃입니다. 씨앗은 흙이 있어서 포근하게 잠들고, 흙은 씨앗을 만나면서 한결 아름답게 거듭나요. 씨앗은 흙이 품는 포근한 기운을 받으면서 새로운 숨결로 깨어납니다. 싹이 돋아 풀이나 나무로 자라요. 흙은 ‘풀이나 나무로 자란 씨앗’이 무럭무럭 올라가면서 뿌리를 내리는 동안, 뿌리가 붙잡는 온갖 기운을 맞아들여 기쁠 뿐 아니라, 가을이 되어 풀잎이나 나뭇잎이 흙으로 돌아와서 새 기운을 살찌워 주니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씨앗과 흙은 서로 돕고 아끼는 사이,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 할아버지는 루시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며 말했어요. “우리 루시는 앞으로 식물학자가 될 씨앗 같구나!” ..  (36쪽)



  사람은 씨앗을 흙에 심습니다. 사람은 씨앗과 흙을 잇는 징검돌이자 이음고리요 사랑입니다. 씨앗과 흙한테 사람은 멋진 손길이에요. 씨앗과 흙은 저마다 제 가슴에 고운 님이 감도는데, 이 고운 님을 깨우는 손길은 바로 사람들이 일으켜 주는 상큼한 산들바람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려고 씨앗을 심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가꾸려고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가 삶을 가꾸려고 씨앗을 심는 땅은 바로 우리 보금자리입니다. 우리 보금자리에는 어떤 ‘나쁜 기운’도 들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가 심은 씨앗이 ‘숲’으로 자라고, 우리가 심은 씨앗으로 ‘흙’이 기름지니, 이 아름다운 터전은 ‘숲집’으로 거듭나요.


  지구별이 예부터 푸르면서 파랗게 빛나는 눈부신 터전이었던 까닭은,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씨앗을 심을 흙이 있으며, 씨앗이 자라는 보금자리(집)가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는 도시에서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시멘트땅이 갈라진 틈바구니에 씨앗을 심어요. 일부러 시멘트땅을 쪼개어 흙땅을 넓히고 텃밭을 가꾸어요.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에 기대지 말고, 우리 사랑을 쏟아서 흙을 북돋우고 지구별을 살려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나 씨앗나라로 기쁘게 나들이를 다닐 수 있습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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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금파리 아스트리드 국민서관 그림동화 83
마리아 옌손 지음, 김순천 옮김 / 국민서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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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3



신나게 뛰어놀고픈 아이들

― 나는야 금파리 아스트리드

 마리아 옌손 글·그림

 김순천 옮김

 국민서관 펴냄, 2008.5.15.



  도시에서는 겨울에 바람이 멎으면 날이 포근합니다. 도시에서는 겨울에 눈이 내리면 길바닥이 얼어붙습니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바람이 멎으면 땅마다 싹이 돋습니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눈이 내리면 흙이 반깁니다.


  바람은 불어야 할 까닭이 있어서 붑니다. 비와 눈은 내려야 할 까닭이 있어서 내립니다. 볕은 내리쬐어야 할 까닭이 있어서 내리쬡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바람도 비와 눈도 볕도 그늘도 안 반깁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온대서 궁시렁거리는 도시 문화요, 눈이 오면 눈이 온대서 투덜거리는 도시 문명이며, 바람이 불거나 볕이 내리쬐면 또 이런 날씨라서 말이 많은 도시 얼거리입니다.


  보금자리에 나무를 심어서 돌보는 사람이라면, 볕과 바람과 비와 눈과 그늘이 모두 골고루 어우러져서 삶이 빛날 때에 즐거운 줄 압니다. 삶자리에서 손수 밥과 옷과 집을 얻는 사람이라면, 별과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을 모두 찬찬히 헤아리면서 삶을 가꾸는 기쁨을 압니다.



.. 나는 천장에서 걸어다닐 수도 있고요, 바람처럼 엄청 빨리 날 수도 있어요. 또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어요. 물론 바닥에 쾅 부딪히지 않고 말이죠 ..  (4쪽)



  충북 음성에서 설날 아침을 맞이합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아주 살짝 내렸습니다. 아침부터 안개가 퍽 짙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는 고흥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아침빛입니다. 겨울에 제법 추운 멧골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니, 새롭고 새삼스럽구나 싶어 한참 창밖을 내다보다가, 앞마당을 천천히 걷습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흙바닥에 말라죽거나 시든 풀잎을 밟으니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납니다. 이런 소리도 겨우내 포근한 시골에서는 도무지 느끼거나 겪을 수 없습니다. 눈과 겨울안개는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싱그러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설 언저리에 찾아오는 눈과 겨울안개라면 찻길에서는 하나도 안 반가우리라 느낍니다. 이런 날에는 자동차를 몰기에 몹시 나쁠 테지요.


  아이들은 창밖을 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반깁니다. 비록 눈을 뭉칠 만큼 쌓이지 않아 살짝 손바닥으로 쓸기만 할 뿐이지만, 눈을 보고 만질 수 있으니 몹시 기뻐합니다.


  아이들은 비가 와도 기뻐합니다. 아이들은 바람이 불거나 볕이 나도 기뻐합니다. 아이들은 그늘이 지거나 벼락이 쳐도 기뻐합니다. 날씨가 달라질 적마다 새로운 기운이 감도니까, 새로운 기운을 맞아들이면서 새로운 놀이를 그립니다.



.. 내가 너무 오래 놀러 나가 있는다 싶으면 알뤼 이모가 나를 찾아와서는 막 잔소리를 해요. 두툼한 파리채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 버리는 끔찍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말이죠 ..  (12쪽)



  마리아 옌손 님이 빚은 그림책 《나는야 금파리 아스트리드》(국민서관,2008)를 읽습니다. 쇠파리도 똥파리도 쉬파리도 아닌 ‘금파리’가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금파리 한 마리가 도시에 있는 어느 집에 깃들어 지내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주인공 그림책은 한 마리이지만, 이 아이 곁에는 수많은 형제가 있고, 이모 파리에 온갖 살붙이 파리가 있습니다. 파리네 집안은 아주 커다란 집안입니다. 이들은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곳에 조용히 깃들어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숨을 쉬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무엇보다 금파리 아스트리드네 집안은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도시 어느 살림집에 살며시 깃든 파리들은 바로 ‘어느 집 안쪽’이 이녁 삶터이자 보금자리요 고향일 테지요. 이곳에서 떠난다는 일은 생각조차 못할 테지요.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면 앞날이 까마득할 테지요.



.. 하루는 소시지를 아주 배불리 먹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 버렸지 뭐예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저 내가 깼을 때 아주 춥고, 조용하고, 깜깜했다는 것밖에는요. 게다가 날개는 눈곱만큼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  (20∼22쪽)



  금파리이자 ‘집파리’인 아스트리드는 제 보금자리에만 머물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사람 살림집 이곳저곳’ 두루 돌아다니기를 즐깁니다. 금파리 아스트리드한테 이모인 ‘알뤼 이모 파리’는 아스트리드 파리더러 ‘파리 보금자리 바깥’에서 함부로 오래 돌아다니다가는 사람한테 들켜서 곧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면서 나무란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사람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용히 있어야 오래도록 아늑하게 지낼 만할 테지요.


  그러나, 사람도 파리도 모두 같아요. 한곳에만 머물 수 없어요. 그저 밥만 먹고 살 수 없어요. 집안에만 있을 수 없으니, 집 둘레를 쏘다니고 싶습니다. 사람이 마을 언저리 숲으로 나들이를 가고, 일하러 다니며, 바다나 냇가나 골짜기로도 돌아다니듯이, 파리도 이곳저곳 마실을 다니면서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 소시지 사건이 있었던 그날 이후, 내가 제일 많이 먹는 음식은 바로 야채랍니다 ..  (28쪽)



  금파리 집안 파리들이 ‘사람 살림집’을 떠날 수 있을까요. 금파리 집안 파리들은 앞으로도 사람 살림집에 그대로 머물까요. 금파리 아스트리드는 어쩌면 사람 살림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직 어린 아스트리드는 어머니와 이모가 있는 사람 살림집에 그대로 머물며 무럭무럭 자란 뒤, 어른 파리가 되면 씩씩하게 더 먼 나들이를 떠나면서, 너른 숲이나 들에 새로운 터전을 닦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멀리 뻗으려는 꿈을 키웁니다. 아이들은 다리힘이 닿는 데까지 달리려는 꿈을 가꿉니다. 아이들은 손힘을 길러 무엇이든 손수 짓는 꿈을 갈고닦습니다. 아이들이 푸르면서 싱그럽게 지으려는 꿈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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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달빛 마이노리티 시선 15
표광소 지음 / 갈무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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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시와 싸움

― 지리산의 달빛

 표광소 글

 갈무리 펴냄, 2002.8.27.



  때때로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 왜 이렇게 졸린가 하고 문득 돌아보면,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나는 이른 새벽에 알림시계 없이 늘 스스로 일어납니다. 저녁에 잠들면서 이튿날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속에 말을 걸면 언제나 그때에 일어나요. 그런데 낮에 졸음이 쏟아지면, 아침마다 하루를 열면서 오늘 하루 어떻게 무엇을 할는지 제대로 생각을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나는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으이구 바보 같으니라구, 하면서 혼자 뉘우치거나 나를 스스로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아 그래 오늘 아침에 하루를 미처 안 지었네, 하면서 혼자 되새기거나 이제부터 비로소 하루를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졸음은 졸음대로 받아들이면서 몇 분쯤 눈을 붙이면서 쉰 다음 맑은 넋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졸음은 졸음대로 억지로 버티다가 하루 내내 고단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 간밤의 어둠이 깃들었던 / 계단 밑에 / 소주 병 하나, 종이 컵 하나, 귤껍질 하나 / 꽁꽁 얼어붙어 있다 ..  (방 한 칸)



  졸린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한껏 신나게 놀다가 졸음이 가득 두 눈에 고인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때가 아니면 스스로 잠자리에 눕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적에 잠자리에 스스로 눕기도 하지만, 놀다가 고개를 폭 꺾으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밥이나 과자나 빵이나 떡이나 뭔가를 먹다가 그만 고개를 폭 숙이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졸음이 잠으로 바뀌어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바라보면 몹시 즐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버이를 믿거든요. 믿고 얼마든지 기대거든요. 내가 졸려서 곯아떨어지면, 나를 포근히 안아서 따스히 재우리라 믿고 기쁘게 곯아떨어져요. 나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졌어도, 이 아이들을 안고서 천천히 걷습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도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곯아떨어졌으면 한동안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달래다가 잠자리로 옮기지요.



.. 내 딸 / 은송이는 / 가난한 노동자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 난산 끝에 태어나 / 뒤집기 / 배밀이 / 홀로서기 끝에 / 함박 웃으며 / “엄마” / “아빠” / “맘마” / “어부바”도 곧잘 하고 / 첫돌이 되어 잔치 준비를 하는 동안 / 첫걸음을 뗐다 / 예쁘기도 하지 ..  (잔치)



  설이나 한가위나 다른 날에 아이들과 먼 나들이를 다닙니다. 시외버스이든 기차이든 으레 예닐곱 시간이나 여덟아홉 시간을 달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찾아갑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새근새근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버스나 기차에서 개구지게 놀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면서 몸이 힘들면, 나도 버스나 기차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돌립니다. 나는 아이들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면, 아버지가 한동안 눈을 붙이더라도 두 아이가 씩씩하게 잘 놀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그리 크지 않은 알맞춤한 목소리로 재미있게 지내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믿고 잠들고, 나도 아이들을 믿고 잠듭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기대면서 아낄 수 있는 삶을 누립니다.



.. 산다는 것은 / 거푸 / 기쁘다 ..  (거푸)



  표광소 님 시집 《지리산의 달빛》(갈무리,2002)을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선보인 이 시집은 2015년에 어떻게 읽을 만할까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앞으로 열세 해가 더 흘러 2028년이 되면, 또 2050년이 되면, 이 시집은 앞으로 어떤 빛이 나거나 어떤 바람으로 사람들한테 다가갈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집일까요. 사랑을 읊는 시집일까요. 아픔과 슬픔을 밝히는 시집일까요. 피가 튀기도록 싸우다가 다친 사람들을 달래는 시집일까요. 고단하거나 괴로운 삶에서도 웃음과 노래가 반드시 있는 대목을 드러내는 시집일까요.



.. 돈도 배경도 없는 / 노동자 구보 씨의 / 첫 직업은 / 독립문 청소부였다 ..  (독립문,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1)



  돈이나 뒷줄이 없기에 표광소 님은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 일꾼을 맡았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표광소 님이 아니더라도 서울 독립문 둘레에서 청소 일꾼을 지낸 사람이 많습니다. 참말 이들은 돈이나 뒷줄이 없어서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돈이나 뒷줄을 애써 바라지 않기에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돈은 돈대로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쓰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돈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돈은 돈대로 안 아름답습니다. 돈을 손에 거머쥔 사람이 즐겁게 못 쓰거나 이웃과 살가이 나누지 못하면, 이러한 돈은 안쓰럽고 슬픕니다.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지기로 일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까요. 비질을 하면서 무엇을 마주하고 헤아리고 맞이할까요.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버립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줍습니다. 조금만 헤아려 보면, ‘내 집 방바닥’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집 방바닥’을 남한테 치우라고 맡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얼거리라야 맞지요. 그런데, 내 집 방바닥에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고, 이러한 쓰레기를 남한테 치우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어요.



.. 너는 /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버릴 것 같다 / 그것이 무섭다 ..  (연애 감정)



  삶은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싸우면서 어느 한 사람이 외치는 목소리가 더 옳다고 내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사랑하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하는 기쁜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늘 싸움을 생각합니다. 싸우는 사람은 누구하고 싸워야 할는지 자꾸 찾고 자꾸 따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하고라도 사랑을 하는 너르면서 깊은 품이 되어 언제나 웃음을 노래합니다.


  시집 《지리산의 달빛》을 덮습니다. 여덟 살 큰아이하고 글씨놀이를 하려고 조그마한 그림엽서 뒤쪽에 정갈하게 글 몇 줄 적습니다. 아이가 읽을 글이기에 어버이인 나는 가장 정갈하다 싶은 글씨로 노래를 씁니다. 아이와 함께 부를 노래를 글로 쓰고, 아이와 함께 사랑할 하루를 글로 담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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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 밀사와 연희의 성노동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6
밀사.연희.지승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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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3



‘사랑’을 모르거나 잊은 한국 사회

―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연희·밀사·지승호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4.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무척 드문 오늘날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나 스스로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줄 생각조차 못 하기까지 합니다.


  한자말 ‘연애’는 사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어 ‘섹스’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중노래나 연속극이나 영화에 으레 나오는 ‘사랑’ 가운데 사랑이라고 할 만한 숨결이나 넋이나 이야기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내와 사내 사이에서 마음이 끌리거나 살갗을 부비는 몸짓은 어느 한 가지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으니 사랑을 알 턱이 없어서 사랑을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순 엉터리만 흐릅니다. 집에서는 아이와 어른 모두 바깥으로 나돌도록 내몹니다. 마을에서는 돈으로만 얽힌 사회 얼거리만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키면서 대학바라기가 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바라기에다가 어설픈 놀음놀이만 판칩니다. 사회는 서로 피가 튀는 돈다툼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드러내거나 함께하는 일이란 참말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 사회는 여성에게 정숙할 것을 요구하죠.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여성은 낙인찍고 추방하고요.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로 가르는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이 이 사회에는 만연합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창녀’가 아니라는 것을, ‘창녀’와 다르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은 ‘창녀’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어필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 내심은 그냥 그 운동이 싫은 거예요. 남성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여성주의 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 성노동은 여성 빈곤의 문제와도 닿아 있어요. 절대다수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노동은 생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성노동자임을 알리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해요 ..  (13, 22쪽)



  마음이 끌리는 일은 ‘마음 끌리기’입니다. 눈이 맞는 일은 ‘눈 맞음’입니다. 마음이 끌리거나 눈이 맞는대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살을 섞는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이성애나 동성애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랑은 아닙니다. 이성끼리 끌리거나 동성끼리 끌리는 모습일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끌릴 적에는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끌려서 그리로 내 마음과 몸이 가니까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살맛이 안 난다거나, 어느 한쪽이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는 마음은 ‘좋아하다’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다’라는 마음일 적에는 어느 한 사람을 놓고 기쁘거나 싫거나 아쉽거나 즐겁거나 벅차거나 서운하고 안쓰럽거나 하는 뭇느낌이 불거집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취미나 취향입니다. 이상형을 따지는 마음이란 ‘좋아하는’ 틀입니다. 어느 한 가지에 끌리자면, 내 마음에 들거나 끌리는 데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니까, 취미와 취향과 이상형 같은 모습을 살필 뿐인데, 이러한 모습이나 흐름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걸맞지 않습니다.



.. 성노동을 인정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노동이 만연한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돈과 힘을 가진 남자는 언제든 손쉽게 여성의 성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매매금지가 법으로 제정된 이후에도 그런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들의 섹스는 ‘몸만 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성노동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  (25, 27, 64쪽)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면 ‘좋다’입니다. 좋다는 마음과 함께 ‘싫다’는 마음도 있을 테지요. ‘좋다·싫다’는 뭇느낌(감정)이 아닙니다. 뭇느낌에 따라 좋거나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드러나는 ‘좋다·싫다’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든지 ‘좋은 사이’라든지 ‘좋은 동무’라든지 ‘좋은 이웃’처럼 말합니다.


  ‘좋아하는 나라’라 한다면, 그저 내 마음이 끌리는 나라를 가리키고, ‘좋은 나라’라 한다면, 내 마음이 끌리지 않더라도 살 만하다 싶은 나라를 가리킵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이녁이 나한테는 내키지 않거나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얼마든지 동무로 사귑니다. 좋은 사람이니까요. 좋은 사람은 허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은 금을 긋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아주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마음이 끌리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겠느냐, 아니면 마음이 안 끌려도 좋은 사람한테 가겠느냐, 이렇게 두 갈래이지요.


  어느 쪽으로 간대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간다면, 나 스스로 눈먼 매달림일 테고, 좋은 사람한테 간다면, 내 느낌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감추는 셈일 테지요.



.. 성노동자라고 밝히면 성추행·성희롱에 바로 노출되더라고요.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성들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그 앞에서는 섹스 이야기도 꺼리면서도 성노동자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요 … 온라인 유흥가 사이트에서는 업소에 많이 다니고 후기를 올린 사람은 권력이 돼요. 구매자들이 그 사람의 글을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거예요 … 그분들 생각에 성노동 즉 성매매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고 사라져야 할 악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그 일이 좋다. 자부심을 갖는다. 내 스스로 선택한 거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 이렇게 말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죠 ..  (78∼79, 83, 87쪽)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서로 ‘그릴’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지 못한다면, 몹시 애가 타거나 괴롭거나 힘듭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옆에 없으니 안절부절 못할 뿐 아니라 기운이 빠져요. 좋은 사람이 옆에 없으면 아쉽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옆에 없다 해서 안절부절 못할 일은 없고, 기운이 빠질 일도 없습니다.


  ‘그리운 사람’은 옆에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먼 데 떨어졌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에 다 괜찮습니다. 그리움은 엽서 한 장으로도 가슴을 부풀도록 하고, 그리움은 말 한 마디로도 기운이 샘솟도록 합니다. 그리움 하나에 기대어 서른 해나 쉰 해를 얼마든지 기다립니다. 그리움은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마음입니다. 서로 그릴 수 있기에 거룩하고, 서로 그릴 수 있으니 아름답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그리움도 사랑은 아닙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이지요. 그리움을 놓고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사랑을 놓고도 그리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움은 거룩하거나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언제나 꼭 이만큼입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좋아하다’가 ‘좋다’나 ‘그리다’보다 낮지 않습니다. ‘그리다’나 ‘좋다’가 ‘좋아하다’보다 높지 않습니다. 세 가지 마음은 높낮이가 아닙니다. 그저 마음 움직임일 뿐이고, 마음결일 뿐입니다.



.. 진보는 자신이 얼마나 양심적인지를 호소하는 인정투쟁에만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만족이 과연 진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 이분법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도 언론에서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려 줄까요? 일단은 ‘알리는’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알리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19, 40, 45쪽)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철수와영희,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연희·밀사 두 사람이 지승호 님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성매매자’가 아닌 ‘성노동자’가 누구인지 밝히면서 말하는 책이고, ‘성노동’이란 무엇인지 드러내면서 다루는 책입니다. ‘성매매 심판’이 아니라 ‘성노동 바라보기’로 이끄는 책이요, 사랑과 꿈이 자라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노동을 하는 성노동자한테도 권리(노동권)가 있다는 대목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와 아울러, 제도권으로 똘똘 뭉친 여성운동과 진보운동 모두 어설픈 울타리에 갇혀서 삶과 동떨어진 모습을 찬찬히 드러내는 책입니다. 



.. 간파를 했어야죠. ‘아, 이걸 놓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게 운동가로서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왜 저들이 나를 거부할까?’ 이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겁니다. 자기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성노동자들을 위한 법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잖아요. 있었다면 법을 그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죠. 성매매특별법을 만들 때 법의 당사자인 성노동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성찰도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일인 거예요 ..  (48쪽)



  여성운동이나 진보운동이 나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과 진보운동은 좋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도 학교교육만 받았을 뿐이기에, 사회와 삶과 사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요.


  학교에서 성교육은 시키지만, 그나마 허울뿐인 성교육입니다. 임신과 피임을 다루는 성교육이지만, 성추행이나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어떤 몸이고, 사람은 어떤 숨결이며, 목숨은 어떠한 빛인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청소년이나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성교육은 과학(생물학) 언저리조차 못 닿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진보운동을 하더라도 사람과 사랑과 삶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남녀평등을 외칠 테지만, 평등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분담이 평등일까요? 남자도 아이를 돌보도록 이끌어야 평등일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자나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돌보고 하는 흐름을 제대로 배우기나 하는지요? 의무교육 열두 해에다가 대학교육 네 해를 받은 젊은이(여성·남성)는 아이를 낳을 만한 몸과 마음이 어느 만큼이라고 할 만할까요? 아이를 왜 낳고, 아이를 어떻게 낳는가를 알면서 살곶이(섹스)를 하는 젊은이인지요?


  사람은 왜 이 땅에 태어날까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을 할까요. 평화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인가요. 경제성장이나 경제개발은 진보가 아닙니다. 권리와 의무와 법률과 행정이 조금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진보가 아닙니다.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권력이나 언론하고 맞서기에 진보가 아닙니다. 덜 바보스러운 사람이 진보일 수 없습니다. 조금 바보스럽든 많이 바보스럽든 모두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진보라 할 때에는, 스스로 제대로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제대로 거듭날 줄 아는 숨결입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면서 진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며 알지 못하면서, 진보운동이나 여성운동을 하기에, 모두 삶과 동떨어지고 이웃과 어깨동무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제가 처음에 집창촌에 있었는데, 그때 여성단체들이 자주 와서 반성매매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그게 운동인지도 몰랐는데, 여자들 몇 명이 와서 과자 몇 개 주고, 머리끈도 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지도 아닌데. 그러면서 이런 나쁜 일 하지 말고 업소에서 나와라, 자기들이 도와주겠다고 해요. 솔직히 불쾌했어요. 자기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 업주한테서 받은 선불금을 ‘마이킹’이라고 하거든요. 이게 큰돈인데 법적으로 무효라고 판결이 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들 입장에선 쉽게 소송을 못 걸죠. 업주나 일수쟁이들이 다 조폭 끼고 장사를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겁니다 ..  (73, 78쪽)



  사랑이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제대로 헤아려야 하며, 슬기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 끌리기(좋아하다)’가 아닙니다. 사랑은 ‘싫고 좋음을 따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워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룩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랑은 늘 사랑 그대로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습니다. 사랑은 너와 내가 하나로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삶을 밝힐 때에, 비로소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엽니다.


  사랑은 징검다리 구실을 합니다. 사랑은 이음고리 노릇을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서로 한마음인 줄 느끼도록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울타리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서로 한몸인 줄 알도록 합니다.


  넉넉하고 너그러우면서 넓은 ‘사랑’입니다. 따스하면서 포근하고 밝은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아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다치거나 슬픈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습니다. 사랑은 ‘뭇느낌(감정)’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기쁨일 뿐이지, 사랑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 사랑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이 될 때에는, 바야흐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으로 거듭날 적에는, 이제부터 삶다운 삶을 짓는 길에 한 발자국 들어섭니다.



.. 우선 불우한 환경에서 시작한 사례가 있어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집을 나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있고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형적인 경우지요. 돈을 벌려고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언니는 20대 때 악착같이 일해서 모은 돈으로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면서 잘 지냅니다. 또 알바 삼아 잠깐 나오는 사람, 특히 학생들이 많아요. 학비나 자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잠깐씩 일하러 오는 경우지요 … 어쩔 수 없이 성노동을 택하는 건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잖아요. 그렇다면 빈곤해소,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죠. 그 사람들을 피해자로 낙인찍는다고 해서 해결이 되느냐는 거예요. 아무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 성노동자는 피해자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는 점, 열악한 현실에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이 바로 나와 같은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  (98, 106, 118쪽)



  인문책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를 읽으려면,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사랑으로 가다듬지 못하면서 이 책을 펼친다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을 밝히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책 한 권을 읽어서 알고 느끼며 거듭나야 할 슬기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삶과 사랑과 사람을 알고 느끼면서, 새로운 숨결이 되는 슬기를 얻습니다.


  성노동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노동과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이란 무엇일까요. 더 높은 노동이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이 있을까요? 성노동자란 누구일까요. 공장노동자와 시골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란 누구일까요? 더 높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가장 거룩할까요? 1급 공무원이 가장 높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이 가장 훌륭할까요? 청소부나 재벌그룹 우두머리가 가장 대단할까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거룩하거나 훌륭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삶 그대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사랑을 사랑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짓는 길을 걷고, 내 삶을 내 손으로 지을 수 있을 때에, 서로 하나되는 넋으로 거듭납니다. 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숨결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새롭습니다. 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있는 사람은, 늘 웃고 노래하면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우리는 바로 이곳 지구별에서 사랑을 하려고 태어나고, 어른이 되며, 아이를 낳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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