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26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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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66



다른 목숨을 빼앗아야 ‘그 님’이 되지 않아

― 강철의 연금술사 26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0.9.25. 4200원



  만화책 《강철의 연금술사》는 여느 낱권으로는 스물일곱 권으로 마무리가 되고, 완전판으로는 열여덟 권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여느 낱권으로 마지막 한 권을 남긴 《강철의 연금술사》 스물여섯째 책을 읽으면, ‘신’을 손에 거머쥔 ‘다른 숨결’이 태어난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제껏 ‘신’이 아니면서 ‘신’을 꿈꾸다가 드디어 ‘신’이 되었다고 여기는 ‘그동안 플라스크에서만 살던 꼬마’가 ‘신’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스스로 믿는 이야기가 흐르지요.


  여러 연금술사가 나오는 만화책인 《강철의 연금술사》입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러 연금술사 가운데 가장 ‘힘센’ 연금술사란 바로 ‘신이 되었다고 여기는 플라스크 인조 생명체’입니다. 지구별에 있는 사람들 넋을 사로잡아서 ‘제 몸(플라스크에서만 살던 꼬마)’에 가두고는 무시무시한 힘을 뽐낼 수 있거든요.



“너희들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한 적이 있나? 아니, 생명체라기보다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까? 너희 인간 하나의 정보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방대한 우주의 정보를 기억하는 시스템. 그 문을 열면 과연 얼마나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생각한 적이 있나?” (27쪽)


“모두 부탁한다! 힘을 빌려 다오!” “흐흠, 고작 50만 명 분의 현자의 돌로 애쓰는군. 그렇지만 시간 문제다.” (72쪽)



  만화책에 나오는 ‘신이 되었다고 여기는 인조 생명체’ 모습은 여러모로 헤아릴 만합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 돈을 어마어마하게 빼앗아서 어마어마하게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한 사람은 ‘가장 손꼽히는 부자’일 테지요. 다른 사람한테 있던 돈을 다 빼앗았으니, 이 한 사람만큼 돈이 많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홀로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쥔 이 사람은 어떤 삶이 될까요? 즐거운 삶일까요? 아름다운 삶일까요? 사랑스러운 삶일까요? 다른 사람 돈을 다 빼앗은 뒤에 무엇을 할 만할까요? 아름다운 기부? 아름다운 자선? 아름다운 나눔?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스스로 가장 힘센 넋이 되었다’고 여기는 ‘플라스크 인조 생명체’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고 눈짓으로만 쳐다보아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커다란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힘이지요. ‘주먹힘’입니다. 수백만에 이르는 군대가 이 한 목숨을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이겨내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핵폭탄으로도 이 ‘신이 되었다고 여기는 플라스크 인조 생명체’를 죽일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주먹힘이 가장 세다고 여기는 이 가녀린 아이는, 주먹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딱한 아이는, 참말 무엇을 할 만할까요?



“이 나라 사람들의 혼은 정신이라는 이름의 끈에 의해 아직 신체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 예를 들자면 탯줄로 모체와 이어진 태아처럼 말이지. 완전히 네 것이 되진 않았다는 뜻이야.” (81쪽)


“네가 신이라는 것을 손에 넣엇을 때, 이미 인간의 역전극은 시작되고 있었어! 혼은 육체와 절묘하고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그것을 억지로 잡아떼어 다른 곳에 정착시키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그 반대는 간단해. 혼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되거든. 원래의 육체가 고스란히 있다면 혼은 저절로 그쪽으로 가지.” (87쪽)



  다른 목숨을 수백만, 아니 수천만, 아니 수억이나 수십억을 빼앗은 ‘플라스크 인조 생명체’가 낼 수 있는 힘은 아주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 인조 생명체는 무엇인가를 부수는 짓은 신나게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무엇인가를 새로 짓는 일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목숨을 낳는 어버이 구실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새로운 목숨한테 물려줄 사랑이나 삶이나 꿈이란 아무것도 없지요.


  왜 그러할까요? 왜 인조 생명체는 ‘신이라 할 만한 힘’을 손에 거머쥐었으나 아무것도 새로 짓지 못할까요?


  다른 모든 목숨을 빼앗아서 제 몸에 가두었으니, 이 땅(지구)에는 다른 목숨이 없거든요. 이 바보스러운 인조 생명체하고 맞서서 싸우는 몇 연금술사와 전사를 빼고는 다른 목숨이 없으니, 이 인조 생명체가 ‘지구 으뜸’이 되었다 한들 이 지구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할 수 있는 놀이도 없어요.



“하찮은 문답을 하는 사이에 원수를 갚을 수 없게 되었구나, 소녀여. 준비된 레일 위의 인생이었지만, 너희들 인간 덕분에, 보람 있는, 좋은 인생이었다.” (116∼117쪽)



  전쟁이란 언제나 바보짓입니다. 전쟁은 마구 때려부수는 짓만 하기 때문에 늘 바보짓입니다. 전쟁은 어느 것도 새롭게 짓지 않기에 참말로 바보짓입니다. 전쟁에는 아무런 사랑도 깃들지 않으니 그야말로 바보짓입니다.


  누군가를 헤아리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 될 테지요. 누군가를 헤아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될 테지요. 다시 말해서, 전쟁이나 폭력은 ‘다른 누군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바보스러운 몸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나 폭력은 언제나 사랑을 끔찍히 미워합니다. 전쟁이나 폭력은 언제나 주먹힘이나 전쟁무기로 사랑을 짓밟으려고 합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지구에서 ‘으뜸 권력’을 거머쥔다면, 이 권력자는 무엇을 할 만할까요? 전쟁무기를 앞세워 지구에서 ‘으뜸 권력자’ 노릇을 하려고 든다면, 참말로 무엇을 할 만할까요? 아무런 사랑이 없는 권력자는 언제나 바보짓을 맴돌이치는 굴레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스스로 사랑이 되지 않고 권력만 거머쥐려고 하는 이들은 늘 바보짓에 사로잡히면서도 스스로 바보인 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새발의 피라도 상관없다! 계속 해! 저 녀석의 몸은 지금 ‘신’이라는 것을 가둬 두는 것만으로도 벅차! 터지기 직전의 빵빵한 풍선 같은 상태다! 조금씩이라도 돌의 힘을 갉아 들어가면 언젠가 저 녀석의 몸에도 한계가 올 거야!“ (143쪽)


“호문쿨루스에서는 뭐가 생기지? 뭘 낳을 수 있나? 파괴밖에 가져오지 않는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어? 궁극의 존재라도 된 줄 알겠지만, 넌 그게 다야.” (186쪽)



  다른 목숨을 빼앗아서 ‘신’이 되려고 하는 이는 아주 바보입니다. 왜 다른 목숨을 빼앗아서 신이 되려고 할까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하느님(신)인걸요. 성경책에 나오는 하느님이 아니라, 온누리에 따스하고 너른 사랑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슬기로운 하느님입니다. 너를 사랑하고 나를 아낄 줄 아는 착한 하느님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아낄 줄 아는 참된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기쁜 웃음을 노래하는 길을 씩씩하게 여는 고운 하느님입니다.


  저마다 ‘내 마음속에서 흐르는 사랑’을 읽고 살피면서 북돋울 줄 안다면, 스스로 하느님이 됩니다. ‘그 님(신)’은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님은 다른 목숨을 빼앗거나 사로잡거나 가로챈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그 님은 다른 사람 것을 훔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요한 숨결이 되고, 스스로 따사로운 넋이 되며, 스스로 즐거운 노래가 될 때에 비로소 너도 나도 하느님입니다.


  어린이 마음일 때에 바야흐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어린이 마음’으로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바람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나는 홀가분한 넋으로 삶을 짓는다면, 참말 우리는 서로서로 하느님인 셈입니다. 내가 너를 아끼고 네가 나를 아끼는 기쁜 두레를 이루는 마을살이를 가꾸면, 참으로 우리는 늘 하느님 나라에서 웃고 노래하며 춤추는 멋진 사람인 셈입니다.



“시시한 건 그쪽이야. 자기 머리로 생각하려 들지도 않는 사고정지 바보 주제에! 그리드가 차라리 너희들보다 더 진화한 인간이라고.” (162쪽)



  꿈을 생각하면서 꿈이 됩니다.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생각하면서 전쟁이 되고, 미움을 생각하면서 미움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삶을 짓습니다. 그러니, 나는 우리 곁님이랑 아이들하고 기쁘게 노래할 꿈을 마음에 품습니다. 푸른 숲이 되고, 숲을 가꾸는 바람이 되며, 바람을 마시는 고운 사람으로 이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일구자는 꿈을 품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삶을 짓는 길을 걸으려 합니다.


  삶을 짓는 사람은 으뜸도 버금도 딸림도 아닌 그예 수수한 사람입니다.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사랑을, 나는 내가 새로운 어버이가 되어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들하고 오순도순 살면서 나도 언제나 ‘어린이 마음’으로 하루를 짓겠노라 하고 생각합니다. 4348.10.2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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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는 늘 싸우기만 했을까? - 한국.중국.일본의 교류 이야기 처음 읽는 이웃 나라 역사
강창훈 지음, 오동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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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17



독재자가 엮는 역사 교과서는 무엇을 가르칠까

― 세 나라는 늘 싸우기만 했을까?

 강창훈 글

 오동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13.7.29. 12000원



  ‘국민교육헌장’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다짐말을 외우게 하는 학교가 있을까 모릅니다만, 군사독재로 이 나라를 짓누르던 권력자는 아이들한테 참을 보여주지 않고 거짓을 보여주면서 바보로 길들이려 했어요.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몽둥이로 맞아야 했고, 교과서마다 맨 첫머리에 이런 다짐말을 굵은 글씨로 새기고 독재자 얼굴을 나란히 싣기도 했습니다. 이는 북녘에서도 엇비슷합니다.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모두 독재인 나라에서는 독재자 사진이나 그림을 교실이나 광장이나 회사나 공장마다 커다랗게 붙여놓기 일쑤입니다.


  오직 정부에서만 교과서를 엮어서 학교에서 가르칠 적에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 이른바 ‘국민’을 키웁니다. ‘국민’이라고 하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 사회에서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아시아에서 한국이 맨 마지막으로 겨우 몰아내고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이라는 이름은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만 몰아냈을 뿐 사회 곳곳에서는 아직 널리 씁니다. ‘국민연금’이나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이름으로도 쓰지만, ‘국민 여동생’이나 ‘국민 배우’ 같은 이름으로도 씁니다. 그야말로 한국사람 스스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고, 역사를 슬기롭게 가르치지 않았으며, 역사를 참다이 이야기하는 자리가 없던 탓입니다.



고조선의 힘이 더 세질까 봐 걱정한 한나라 황제 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했고, 결국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아. (11쪽)


한 무제는 사방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웃 나라를 정복했지만, 정복한 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신하와 군대를 일일이 파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비용이 많이 필요했지. (18쪽)



  강창훈 님이 쓴 《세 나라는 늘 싸우기만 했을까?》(책과함께어린이,2013)라는 어린이 인문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세 나라’는 한국하고 중국하고 일본입니다. 세 나라가 지난 이천 해에 걸쳐서 서로 어떻게 어우러지며 살았는가 하는 대목을 짚으면서, 세 나라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 적에 함께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삶이 되려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외교 문서에는 어떤 글자를 사용해야 했을까? 당연히 중국 황제가 사용하는 한자를 사용해야 했어.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한자를 알아야 했단다 … 중국과 외교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학문과 문화 교류도 늘어 갔어. 국경을 오가는 무역도 증가했지. 그 바람에 한자의 쓰임새도 함께 커졌어. (36쪽)




  흔히 한국하고 중국하고 일본을 ‘한자 문화권’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말은 썩 옳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세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한자 지식을 갖추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학교 교육 힘으로 꽤 많은 사람이 한자 지식을 갖추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보다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더 파고들어서 말한다면, ‘글을 모르는 사람’이나 ‘글을 안 쓰는 사람’이나 ‘글을 안 읽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지난날에는 어떠했을까요? 이천 해 앞서 세 나라에서 ‘한자를 알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중국에서도 한자를 알던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도 정치권력이나 문화권력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글이나 책을 읽을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일본도 한국하고 똑같은데, 거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90퍼센트가 넘는 수수한 사람들은 시골에서 흙을 부치며 살았어요. 시골에서 시골지기로서 땅을 일구며 먹을거리를 지은 사람들은 글(한자)도 책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문화권’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다. 권력자끼리 의사소통을 하려고 쓰던 글인 한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바로 이 ‘의사소통 도구’인 한자를 빌어서 여느 사람들을 짓눌렀어요.



안시성 전투가 끝나고 20여 년이 흐른 후,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아. 그런데 그때는 훨씬 많은 고구려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당나라로 끌려갔단다. (53쪽)



  나라마다 힘을 키울 적에는 언제나 군대를 늘립니다. 군대를 늘려서 힘을 키운 나라는 어김없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중국도 일본도 이러했고, 한국도 이러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흔히 ‘영토 확장’이라고 말하지만, 고구려가 만주나 중국 쪽으로 땅을 ‘넓힌’ 일은 만주나 중국 쪽에서 옛날부터 조용히 살던 사람들한테는 ‘침략’입니다. 중국과 일본만 한국으로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군대로 나라힘을 키웠다고 하는 모든 나라는 이웃나라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평화보다는 이웃나라를 넘보면서 ‘땅을 빼앗는 침략 전쟁’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당나라에는 신라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고, 조선에는 일본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어. 일본에는 명나라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지. (61쪽)




  다만, 정치 권력자는 침략 전쟁을 생각했어도, 여느 사람들은 침략도 전쟁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조용히 땅을 일구며 살기도 했고, 이웃나라로 씩씩하게 건너가서 새로운 마을을 일구어서 무역을 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 사람이나, 조선에 찾아온 일본 사람이나, 중국으로 넘어간 중국 사람은 ‘정치 권력자가 시켜’서 여러 나라를 오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열어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림을 지으려는 생각입니다.


  평화는 언제나 문화가 흐를 적에 이룹니다. 평화는 언제나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조용히 어깨동무를 할 적에 이룹니다. 평화는 언제나 정치 권력자가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이 오순도순 손을 맞잡을 적에 이룹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조선에서 건너간 《팔만대장경》 인쇄본이 50여 부나 남아 있어. 일본 승려들은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일본 곳곳의 절에 대대로 잘 보관했을 뿐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단다. (91쪽)


‘자기’는 중국에서 처음 탄생했지만 한국과 일본도 중국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어. 한국은 세계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고려청자의 비색과 상감 청자 기술을 창조했고, 일본은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여 세계적인 자기 생산국이 되었으니까 말이야. (110쪽)




  강창훈 님이 쓴 《세 나라는 늘 싸우기만 했을까?》라는 어린이 인문책은 세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이야기도 다루지만, 세 나라 사이에서 사랑스레 흐른 문화 이야기를 찬찬히 다룹니다. 누가 더 훌륭하거나 낫다는 이야기가 아닌, 세 나라가 저마다 제 삶자리에 맞추어 새롭게 가다듬거나 북돋운 아름다운 문화를 다루어요.


  《팔만대장경》이 얼마나 훌륭한가 하고 일찌감치 알아본 일본에서는 조선 정부에 끊임없이 ‘인쇄본’을 달라고 바랐다 하며, 조선 정부가 내어준 인쇄본은 일본 곳곳에 알뜰히 건사해서 오늘날까지 정갈하게 지켜 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일본은 여러 차례 일으킨 전쟁에서 이 땅을 마구 어지럽히거나 책도 사람도 함부로 빼앗았습니다만, 정치 권력자 몸짓이 아닌 수수한 사람들 몸짓에서는 아름다운 숨결이 흐릅니다.


  우리 어린이가 세 나라 역사를 살피면서 바라볼 곳은 바로 이 대목이지 싶어요. 정치 권력자가 자꾸 일으키려고 한 전쟁이나 침략이 아니라,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조용히 일구면서 주고받은 아름다운 문화와 삶과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조선은 연은분리법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어. 은을 생산해서 은화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 이 기술로 은 생산량을 늘리면, 명나라에서 다시 옛날처럼 은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할지도 모르니까. (125쪽)



  조선 사회는 이웃 중국 등쌀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문화를 더 북돋우지 못하기도 했습니다만, 조선 사회 스스로 봉건 계급주의에 사로잡혀서 어떤 문화를 어떻게 북돋아야 하는가를 모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도 한국 스스로 어떤 문화와 숨결과 역사를 어떻게 북돋아야 하는가를 제대로 모르는 채 헤매는 몸짓이 아닐까요? 대통령 한 사람이나 정치꾼 몇 사람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우리들도 조금 더 슬기롭고 조금 더 따사로우며 조금 더 아름다운 살림이 되도록 스스로 일어설 노릇이 아닐까요?


  그런데, 정치 권력자는 이 나라 사람들을 아직 바보로 알기 때문에, 더군다나 대통령이나 집권자나 정부가 시키면 고분고분 따르기만 해야 하는 줄 알기 때문에, ‘국정교과서 말썽’을 일으킵니다. 왜 독재 권력자는 아무것도 못 깨달을까요? 아무것도 못 깨닫기 때문에 독재 권력자가 되고 말 터입니다만, 역사를 보고 배우지 못하기에 독재 권력자가 될 터입니다만, 억지스레 뜯어고치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국정교과서’가 나온다면, 이런 교과서를 누가 믿고 따를까요. 4348.10.25.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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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 신나는 새싹 17
세르주 블로크 글.그림, 권지현 옮김 / 씨드북(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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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71



네 고운 손길이 어여쁜 사랑을 이루는구나

―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

 세르주 블로크 글·그림

 권지현 옮김

 씨드북 펴냄, 2015.9.30. 12000원



  여덟 살 큰아이가 아침에 일어나더니 귤빛 실 한 가닥을 묶더니 실뜨기를 합니다. 손가락을 놀려서 이리저리 무늬를 이루더니 길쭉한 실뜨기를 보여줍니다. “자, 이거 뭐 같아?” 큰아이가 보여주는 실뜨기를 들여다봅니다. “음, 풀잎?” “풀잎? 음, 그러네. 풀잎처럼 보이네.”


  실뜨기를 할 적에 풀잎을 뜨는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풀잎 무늬가 되도록 실뜨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또는, 실뜨기를 하는 사람 마음속에 풀잎이 있다면 풀잎을 뜰 수 있겠지요.




주워서 살펴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선이었어요. 보잘것없는 작은 선……. 나는 선을 주머니에 넣고 따뜻하게 감싸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4∼6쪽)



  세르주 블로크 님이 빚은 긴 그림책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씨드북,2015)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서는 프랑스말 ‘trait’를 ‘선(線)’이라는 한자말로 옮겼으나 ‘線’은 “줄 선”이라는 한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줄’입니다. 영어라면 ‘line’일 테지요.


  아무튼, 그림책을 보면 아이가 어느 날 길에서 자그마한 ‘줄’을 하나 줍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 빛깔이 없으나 자그마한 줄만 빨강입니다. 다만, 자그마한 줄이 빨강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이 줄을 알아차리지 않아요. 아마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작은 줄을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이 줄을 들여다볼 생각을 안 했고 주우려 하지도 않았어요. 오직 어느 작은 아이가 작은 줄을 알아보고는 가만히 몸을 숙여서 천천히 주웠습니다.




나는 틈만 나면 공책을 펴고 선에게 말을 걸었어요. 선은 나를 쳐다보다가 여기저기를 긁적긁적했어요. 아마 나랑 놀고 싶나 봐요. (16∼17쪽)


때때로 우리는 서로서로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럼 선은 기지개를 펴며 긴 수평선을 그렸지요. 저길 보세요! 저 멀리 뜬 배 한 척이 보이지요? (30쪽)



  작은 줄을 주운 아이는 이 작은 줄로 무엇을 할 생각일까요. 작은 줄을 주운 아이는 이 작은 줄을 어디에 놓으려 할까요.


  작은 아이는 작은 줄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적에는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집에서도 늘 곁에 둡니다. 작은 줄은 그야말로 작은 줄이었는데, 작은 아이가 지켜보고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마주보는 동안 천천히 자라요.


  네, 작은 줄에도 ‘목숨’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줄은 작은 아이한테서 눈길을 받는 동안 따사로우면서 씩씩하게 자라지요. 작은 아이는 작은 줄을 돌보는 너른 품이 되면서, 작은 줄하고 늘 함께 어울려 노는 동무가 되어요.




우리는(나와 선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어요.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46∼48쪽)



  작은 아이는 작은 줄을 살뜰히 아낍니다. 작은 줄도 싱그러운 숨결로 꾸준하게 자라면서 작은 아이를 알뜰히 사랑하지요. 두 넋은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두 넋은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한길을 걷습니다.


  작은 아이는 작은 줄을 아끼는 마음을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을까요. 아마 이녁 어버이한테서 배우거나 물려받았을 테지요. 작은 줄은 작은 아이한테서 새로 배우고 물려받는 사랑을 어떻게 건사할까요. 저 스스로 기쁘게 누리면서 작은 아이한테도 돌려주고, 이웃 누구한테나 이 기쁨과 보람을 베풀 테지요.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작은 아이하고 작은 줄은 어느덧 ‘작지 않은 어른’이 되고 ‘작지 않은 줄’로 거듭납니다. 두 넋은 오래오래 함께하면서 언제까지나 이 길을 나란히 걷는 길벗으로 지내요.




나는 오랜 친구인 선의 몸을 조금 잘라 냈어요. 아주 작은 선으로요. (74쪽)



  아이들은 작은 종잇조각에도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작은 종잇조각은 쓰레기통에 버리면 쓰레기가 되고, 이 종잇조각을 쳐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작은 종잇조각을 가만히 손바닥에 얹어 연필로 쓱쓱 그림을 그리면 멋진 ‘그림’으로 거듭나요. 작은 종잇조각에 크레파스로 빛깔옷을 입히면 새로운 놀잇감으로 거듭나요.


  흔하디흔한 광고종이라 하더라도, 뒤쪽 하얀 자리에 곱게 그림을 그리면, 이 광고종이는 어느새 고운 그림으로 거듭납니다. 아주 깨끗하면서 고운 종이가 있더라도 쓰레기통에 버리면 쓰레기가 되고, 이 깨끗하면서 고운 종이를 쳐다보지 않고 묵히거나 처박으면 이 종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랑을 기울여서 사랑을 담을 때에 사랑이 됩니다. 웃음을 지으서 웃음을 담기에 웃음이 됩니다.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담으니 노래가 되어요.


  어버이가 아이를 사랑하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그저 사랑을 나누거나 베풀거나 함께하면 됩니다. 선물꾸러미나 케익이나 자가용이나 놀이공원이나 아파트를 베푼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따사롭고 너그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오로지 포근하고 넉넉한 손길로 어깨동무를 할 적에 시나브로 사랑이 되어요.


  그림책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는 어느 날 문득 알아차리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빚은 고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삶은 늘 우리 곁에서 사랑이 됩니다. 노래는 늘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삶을 짓는 사람들 가슴속에서 피어나서 곱게 흐릅니다. 4348.10.24.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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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분의 일 2
타카토시 나카무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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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65



우리는 서로서로 돕는 지구별 이웃님

― 십일분의일 (1/11) 2

 나카무라 타카토시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12.25. 4800원



  저녁에 아이들을 재웁니다. 두 아이가 마음껏 뛰고 떠들고 웃고 노래하고 뒹굴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보고 다 놀았구나 싶을 무렵 초 한 자루를 켭니다. 집안에 차분하게 흐를 만한 노래를 틉니다. 전깃불은 모두 끕니다. 모두 방석에 앉아서 촛불을 바라봅니다. 촛불에서 어두운 곳을 고요히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낯설거나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지만, 이제 무척 야무지게 촛불보기를 합니다. 나도 아이들이랑 함께 씩씩하게 촛불보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촛불을 보다가 하품이 나오거나 졸리면 스스로 들어가서 이부자리에 눕습니다. 나는 촛불을 더 보고 나서 이부자리를 살피지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이불깃을 여미어요. 얼마 앞서까지는 촛불보기를 하지 않고 그냥 아이들 사이에 누워서 한 시간 남짓 자장노래를 부르면서 재웠고, 요즈막에는 저녁마다 촛불보기를 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제 잠자리를 챙겨서 눕도록 합니다.



‘그래도 그는 골키퍼라는 포지션이 좋았다. 온몸을 사용해 골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좋았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12쪽)


‘그 녀석이 그렇게 날 믿고 있는데, 내가 날, 믿지 않으면 어쩌자는 거야.’ (34쪽)



  아이들이 모두 잠들었구나 싶은 때에 부엌으로 갑니다. 작은아이가 저녁에 먹고 남긴 밥그릇을 들여다봅니다. 이 밥은 내가 마저 먹습니다. 한창 먹다가 아차 하고 깨닫습니다. 아이들이 남긴 밥은 우리 집에서 함께 눌러서 사는 마을고양이한테 주어도 될 텐데.


  다음에는 아이들이 남긴 밥을 고양이밥으로 살뜰히 챙기자고 생각하면서 만화책 《십일분의일(1/11)》(학산문화사,2013) 둘째 권을 읽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만화책 이름인 ‘십일분의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쉽게 알아챌 만합니다. 바로 축구 이야기입니다. 운동장에서 뛰는 열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삶을 짓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는 레귤러 자리를 지키고 싶어 골키퍼가 되었던가? 아니잖아.’ (49쪽)


“당신은 몸을 던져 골을 지켰어. 거기서 주저하며 움츠러들었다면 내가 흠씬 두들겨팼을 거야! 그러니, 당신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 절대 사과할 필요 없어.” (54∼55쪽)



  아는 사람은 다 알 테고 모르는 사람은 다 모를 텐데,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닙니다. 다른 운동 경기도 이와 같아요. 혼자서 하는 경기는 없습니다. 경기장에 나서는 사람이 혼자라 하더라도 경기장 둘레와 뒤에서 돕거나 지켜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경기장에 혼자 나서는 사람도 경기장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녁이 연습을 하거나 훈련을 하도록 돕지요.


  이리하여, 열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열한 사람이 한몸처럼 움직이는 물결 가운데 한몫을 맡습니다. 열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빠지더라도 다른 열 사람 물결이 흔들려요.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경기장에서는 모두 한마음이요 한몸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잘 해도 열한 사람이 함께 잘 하는 물결이고, 한 사람이 잘 못해도 열한 사람이 함께 잘 못 하는 물결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잘 못 하더라도 다른 열 사람이 곁에서 받치거나 돕습니다. 두 사람이 잘 못 하면 아홉 사람이 받치거나 돕지요.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이 잘 못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기꺼이 나서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다만, 경기를 마친 뒤에는 ‘최우수 선수’나 ‘우수 선수’를 가리곤 합니다. 모두 훌륭했으나 이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사람을 따로 가리기도 해요. 그러면, 이 한 사람은 왜 가장 으뜸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다른 열 사람이 튼튼하게 버팀나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열 사람이 넉넉하고 아기자기한 밑물결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가장 으뜸인 한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까닭은 열한 사람이 모두 으뜸이 되도록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잔소리 해대지 않아도 다 알거든! 내가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여자아이가 우울해 하고 있으면 위로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힘든 사람을 더 몰아세우면 어쩌자는 거야?” (77쪽)


“슬픈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덧씌우면 되잖아?” (80쪽)



  아이들이 잠든 밤에 부엌에서 조용히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아이들한테 집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더러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지만, 밥을 하라거나 설거지를 하라거나 빨래를 하라거나 청소를 하라거나 같은 일은 안 시킵니다. 아이들더러 읍내에 가서 장보기를 하라고 시키지 않고, 아이들더러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다녀오라고 시키지 않아요.


  두말 할 까닭이 없습니다만, 나어린 아이들한테 섣불리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나어린 아이들한테는 ‘자, 너희는 기쁘게 뛰놀렴.’ 하고 말할 뿐입니다.


  만화책 《십일분의일》에 나오는 ‘한 사람’은 어떤 몫을 할까요? 공격수이든 수비수이든 문지기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저마다 한 자리를 맡아서 지키되, 다른 사람들이 제몫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버티는 나무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를 맡아서 지키는 동안, ‘한 사람’은 한 사람대로 마음껏 제 솜씨를 뽐내면서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은 한 사람을 받치고, 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어 다른 한 사람이 마음껏 뛰고 달리며 땀을 흘릴 수 있도록 받쳐 주어요.



“대충 적당히 한 녀석은 긴장 따위 안 해. 나도 시합 전엔 늘 긴장되거든. 그전까지 연습을 필사적으로 했을 때는 더욱 그렇고. 그러니 걱정 마. 넌 틀림없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97쪽)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헤딩이라면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난.” “‘나는, 나는’ 하며 뭐든 혼자 하려고 하지 마. 11명이나 있는걸. 네가 필살 슛을 넣지 않아도, 이길 수 있어.” (137∼138쪽)



  아이들은 밥을 지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밥을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밤에 새근새근 잠들면서 즐거운 꿈나라로 날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걸레질이나 비질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면 됩니다.


  축구라는 운동 경기에서 열한 사람은 저마다 한 가지씩 즐겁게 제몫을 맡으면서 다른 동무나 이웃이 기쁘게 운동장을 누비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선 한 사람은 다른 열 사람이 뒤와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기에 마음껏 웃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수십 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삶을 짓습니다. 나는 다른 지구별 이웃을 돕는 버팀나무요, 다른 지구별 이웃은 나를 돕는 버팀나무입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고, 함께 두레를 하기에 기쁩니다. 4348.10.23.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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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따오기 눈물 꿈터 책바보 11
질 르위스 지음, 정선운 옮김 / 꿈터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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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16



교육받기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 주홍 따오기 눈물

 질 르위스 글

 정선운 옮김

 꿈터 펴냄, 2015.10.15. 12000원



  아이들은 꼭 학교에 가야 하는가 하고 돌아보곤 합니다. 우리 집에 두 아이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어릴 적에 학교를 다니면서 즐겁거나 재미있다고 느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하루 내내 동무들하고 노는 재미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학교에서도 힘이 센 아이들이 힘이 여린 아이를 괴롭히기도 하고, 나도 이런 괴롭힘이 싫었습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제대로 놀 수 없으니 고단했어요. 게다가 숙제는 얼마나 많으며, 숙제를 안 하면 이튿날 얼마나 얻어맞아야 했는데요.


  흔히 말하기를 학교를 안 다니면 ‘사회생활을 못 한다’거나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만, ‘사회’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학교란, 사람들이 ‘위(정치 우두머리)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허수아비’를 만드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몸짓’에 길들지 싶어요.



“괜찮을 거야, 얘 혼자서 해야 해.” 나는 레드에게도 내 담요를 두르고 같이 앉아서 작은 새끼 새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애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여?” 나는 레드를 내 쪽으로 더 껴안으며 말했다. (21쪽)


“찌르레기, 푸른 박새, 뿔닭, 재갈매기, 집 참새, 롤러카나리아, 청둥오리, 타조, 양비둘기…….” 나는 계속했고, 새들의 이름은 차분한 리듬 속에서 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곁눈질로 보니, 레드가 몸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풀고 있는 것이 보였다. (31쪽)



  영국에서 날아온 어린이문학 《주홍 따오기 눈물》(꿈터,2015)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쓴 질 르위스 님은 《바람의 눈을 보았니?》나 《흰 돌고래》나 《반달곰》 같은 이야기를 쓰기도 했고, 이 책은 한국말로 나왔습니다. 글쓴이 질 르위스 님은 오늘날 아이들이 숲하고 멀리 떨어진 채 사는 대목을 눈여겨보면서 언제나 ‘숲하고 아이’를 잇는 징검돌을 헤아립니다. ‘바람’이나 ‘돌고래’나 ‘곰’이라고 하는 이름을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한국말로 나온 질 르위스 님 넷째 책인 《주홍 따오기 눈물》에서는 ‘따오기’가 열쇠말로 흐릅니다. 따오기, 이 가운데 주홍 따오기는 ‘새’ 가운데 하나예요.


  새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늘을 마음껏 나는 숨결입니다.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닌 하늘을 마음껏 나는 숨결이기에 새입니다. 다만, 《주홍 따오기 눈물》에 나오는 새는 ‘동물원에 있는 새’입니다. 날개가 있는 숨결이지만 막상 홀가분하게 하늘을 가르지 못하는 새가 나오지요.



짐 아저씨가 레드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우리는 또 다른 버드맨을 갖게 되었군.” 레드가 짐 아저씨를 올려보았다. 아저씨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양쪽 입꼬리에서 작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버드 보이예요.” 레드가 말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레드는 그 누구도 결코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고, 말을 걸거나 웃지도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그것이 레드의 병의 일부라고 했다. (56쪽)



  《주홍 따오기 눈물》에는 여러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주인공인 열두 살 가시내 스칼렛이 있고, 이 아이 동생 레드가 있습니다. 여기에 두 아이를 돌보는 몫을 맡았으나 아이들을 거의 팽개친 채 지내는 어머니가 있어요. 아이들 어머니는 곁님(아버지)이 일찍 숨을 거두는 바람에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열두 살 스칼렛이 집일이랑 집살림까지 도맡습니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몫도 열두 살 스칼렛이 맡아요.


  그런데 어린 동생 레드는 ‘여느 사회 구성원인 여느 사람이 보는 눈길’로는 ‘장애 아이’입니다. 누나 스칼렛이 바라보는 동생은 ‘그저 동생’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칼렛 동생을 오로지 ‘장애 아이’로만 여겨서 ‘사회 돌봄’이나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지요. 그리고, 사회에서는 두 아이가 ‘억지로(강제로)’ 복지 혜택이나 사회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세 식구가 오붓하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세 사람을 뿔뿔이 찢어서 어머니는 정신병원으로 보내고, 스칼렛은 임시 입양 보호가정에 맡기며, 동생은 보호시설에 넣어요.



담뱃갑을 엄마 얼굴 앞에 들고서 크게 소리쳤다. “엄마가 하는 일이라곤 이런 것에 돈을 쓰는 것뿐이에요.” (63쪽)


“있잖아, 만일 엄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네가 쟤를 돌봐줄 수도 있어. 네가 할 수 있겠어?” 내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레드 표정이 점잖고 진지했다. (68쪽)



  복지란 무엇일까요? 사회란 무엇일까요? 세 식구를 법에 따라 뿔뿔이 찢어 놓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결정 사항을 세 사람 뜻을 묻지 않고 ‘위원회’에서 ‘회의를 열어서 결정’해도 될까요?


  그러나, 다르게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이만 한 ‘보호 장치’조차 제대로 없다고 할 만합니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여러 ‘선진국’에서는 아이들을 지켜 주겠다면서 복지사가 있고 복지 제도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러한 제도와 정책과 공무원은 막상 ‘아이들 목소리’를 안 듣기 일쑤예요. 아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귀여겨듣지 않고 말아요. 열두 살 스칼렛이 제 동생을 그저 ‘동생’으로만, 오직 사랑스러운 동생으로만 바라보면서 아끼는 몸짓을 어른들은 하나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병원에서 전문 의사와 간호사가 정기검사를 해야 한다고 여기고, 어른들은 병원 검사에서 나오는 숫자를 따져서 ‘정상·비정상’을 가르려 합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에서도 이와 같아요. 학교에서는 시험 성적을 놓고서 높낮이를 따지지요. 시험성적이 높으면 모범생이요, 시험성적이 낮으면 문제덩어리입니다.



만일 레드가 여기에 있었다면 비둘기는 레드를 신뢰했을 것이다. 새들과 있을 때, 레드는 매우 조용했고 움직임이 적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가끔은 나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21쪽)


나는 짙은 갈색의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마 이것이 진짜 내 모습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아름다운 아이일지도 모른다. (154쪽)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참다이 배울 수 있을까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세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채, 제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임시 입양(또는 위탁) 보호가정에 갇힌 채 늘 감시를 받으면서 동생도 어머니도 볼 수 없는 자리에 놓여야 하는 아이는 ‘어떤 복지와 돌봄’을 받는다고 할 만할까요? 이러한 삶을 치러야 하는 아이는 학교에서 무엇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배울 만할까요?



“너희는 좋은 가족이 있는 좋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매일 저녁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너희 엄마와 아빠는 너희를 돌봐 주시지. 너희 부모님은 미치지도 않았어. 그리고 너희에게 욕을 하지 않고 너희 이름을 부르시지. 하지만 레드와 나는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서로뿐이야. 그리고 만일 너희가 우리에 대해 얘기해 버린다면, 우리는 헤어지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게 되는 거지.” (214쪽)



  어린이문학 《주홍 따오기 눈물》은 주홍 따오기가 흘리는 눈물을 이야기합니다. 동물원이나 새장이 아니라 하늘을 가르면서 바람을 타고 싶은 숨결을 이야기합니다. 번지르르한 정책이나 제도나 사회가 아니라, 따스한 사랑이 흐르는 사람들 마음씨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무엇을 받고 싶겠습니까. 아이는 언제나 오직 한 가지를 받고 싶어요. 돈도 집도 으리으리한 집도 장난감도 아닙니다. 아이는 누구나 언제나 오로지 한 가지, 바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아이는 교육을 받을 학생이 아닙니다. 아이는 사랑을 받을 숨결입니다. 아이는 보호나 돌봄을 받을 보호대상이 아닙니다. 아이는 따순 손길로 사랑을 받을 넋입니다. 아이가 사랑을 받고 어버이가 사랑을 베풀 때에 비로소 마을이 섭니다. 아이가 사랑을 받고 어버이가 사랑을 나눌 때에 비로소 학교가 학교답게 섭니다.


  사랑으로 흐르는 삶이 있은 뒤에 마을이나 학교나 사회가 있을 노릇입니다. 사랑으로 흐르는 삶이 없다면 학교도 마을도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모두 부질없습니다. 4348.10.23.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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