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낯선 생각을 권하는 가장 따뜻한 사진
강윤중 글.사진 / 서해문집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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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6



yaja.khan.kr

‘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

―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강윤중 글·사진

 서해문집 펴냄, 2015.11.10. 13900원



  흔히 말하기를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기자는 객관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 자리에 서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룬다면 다른 한쪽 자리에 서는 사람이나 모임을 깎아내리거나 헐뜯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자라고 한다면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을 모두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이 어떤 뜻을 밝히는가를 차분히 적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해자하고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하고 피해자 목소리를 고루 듣고 고루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마땅한 소리라고 느낍니다. 다만, 이는 한 가지 대목에서만 마땅하리라 느낍니다. ‘사실 보도’라는 대목에서는 중립과 객관을 지켜야지요. 그러면,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만 해야 할까요? 어쩌면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안 하지는 않나요?



장애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없다’는 것을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장애인에게 좀더 깊이 다가가려 했을 때 비로소 내 안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닫힌 생각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4쪽)


막장의 소음 속에서 백승호 씨는 소리 질렀다. 그는 이어 물었다. “가장 정직하고 깨끗한 일이지 않습니까?”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그런 웃음으로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대신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진 두어 장을 찍은 채 갱도 밖으로 나왔다. (22쪽)



  경향신문 사진기자인 강윤중 님이 선보인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서해문집,2015)를 읽으면서 ‘기자는 어느 자리에 서서 어떤 일을 할 때에 기자다운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기자는 어떤 글을 쓰거나 어떤 사진을 찍어서 신문이나 방송을 엮을 적에 기자로서 제몫을 다하는가를 헤아립니다.


  사실 보도라고 한다면, 이를테면 대통령 담화문을 옮기거나 대통령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뒤 고스란히 적는 일쯤 될 만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때에 으레 대통령이나 여러 정당 관계자를 더 만나서 느낌을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느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온갖 곳에서 일하거나 살림을 짓는 수많은 사람을 두루 만나서 ‘대통령이 펼치려는 정책을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는가’ 같은 이야기를 매체에 담지 못합니다.


  사실 보도라는 테두리에서 보자면, 대통령 한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이르러 모든 신문과 방송이 ‘4대강사업에 부질없이 쏟아부은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밝힙니다. 이제 모든 신문과 방송은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진실 보도’까지 하는 신문과 방송은 아직 그리 안 많습니다. 왜 4대강사업을 그토록 부질없이 밀어붙였는가 같은 ‘참(진실)’을 안 밝힌다고 할까요? 그도 그럴 까닭이 적잖은 매체가 어느 대통령 한 사람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 같은 정책을 두 손 들고 반기면서 널리 알리는 나팔수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로 떠드는 ‘까만’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니?” 답이 금세 돌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국사람이죠.” (56쪽)


“왜 커밍아웃을 합니까?” 반사적으로 명료한 답이 돌아온다. “행복하려구요.” (132쪽)


한국 생활 4년째라는 이도 간단한 우리말 대화가 되질 않았다. 음식 얘기가 이어졌다. “한국 식당에는 메뉴가 너무 많아요. 그중에 삼겹살과 김치찌개만은 먹을 만해요.” (143쪽)



  나팔수 노릇을 하는 기자도 어느 모로 보면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한쪽 자리에 서서 한쪽 자리에 있는 이들이 읊는 말만 옮겨적는 ‘편견에 가득 찬 사실 보도’입니다. 이리하여, 기자다운 기자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면 ‘사실 보도’에 그치지 말고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빚은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는 바로 기자로서 사실만 다루지 않고 진실을 다루겠노라 하는 다짐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 스스로 ‘기자라는 이름표’는 살짝 내려놓고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마주하려고 하는 몸짓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사진기자로 온갖 곳을 뛰어다니면서 미처 못 본 모습을 바라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모습을 배우며, 섣불리 파고들지 않았던 자리에 씩씩하게 나아가려는 마음을 책 한 권으로 여미었구나 싶습니다.



이제 ‘그림이 될까, 또 어떤 얘기로 풀어갈까?’를 다시 고민하는 내게 오 교사는 가만히 말을 건네 왔다. “여기 있는 동안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내 속이 들켜버린 듯 화끈거렸다. 나는 목적을 가지고 왔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내가 갖는 조바심이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마음의 공간을 허락할 수 있을까. (163쪽)



  기자도 사람입니다. 기자가 만나는 이들도 사람입니다. 기자는 어디 별나라나 달나라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기자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이웃입니다. 아직 이름도 낯도 모를 뿐이었던 수많은 이웃을 만나서, 이들 이웃이 가슴으로 삭이거나 새긴 눈물과 아픔을 차분히 듣고서, 이를 다른 이웃한테 알리는 몫을 맡는 기자입니다. 수많은 이웃이 피어내는 웃음과 기쁨을 가만히 듣고서, 이를 새롭게 수많은 이웃한테 알려주는 구실을 맡는 기자입니다.


  기자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기자가 그저 기계일 뿐이라면 ‘사실 보도’만 하고 그칩니다. 기자가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참말로 ‘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라고 한다면, 어느 매체에서 일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진실 보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금 용역들이 비닐집을 둘러쌌어요. 지금 와 주실 수 있나요?”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망설였다. 내 안의 변명은 이랬다. ‘내가 현장에 가서 강제 철거를 막을 수는 없다. 나는 기록하는 자여야지 개입자여서는 안 된다.’ … ‘기사 게재라는 목적을 위해 철거민들은 그저 이용할 수단일 뿐인가, 이 취재에 진정성이 있는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철거 현장으로 가야 했다. (190쪽)



  사진은 기계질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기는 틀림없이 기계입니다만, 이 기계를 만지고 움직이고 다루는 손길은 ‘사람 손길’입니다. ‘기계 손길’이 아닌 사람 손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연필이나 볼펜이나 노트북은 모두 연장이나 기계입니다만, 글은 기계로 쓰지 않습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노트북이든 모두 사람 손길로 다루어요.


  사람이 취재를 해서, 사람으로서 보고, 사람으로서 느끼며, 사람으로서 생각한 끝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엮습니다. 기자라는 이름표에 앞서 사람이라는 숨결로 이웃을 마주합니다. 아픈 이웃을 마주하고, 기쁜 이웃을 마주합니다. 눈물짓는 이웃을 만나고, 웃음짓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리하여, 사진기자 강윤중 님은 강원도에 있는 작은 분교로 찾아가서 ‘다큐 취재’를 할 적에 다큐도 취재도 아닌 ‘아이들 놀이동무’로 한동안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늦깎이에 한글을 익히고 검정고시 졸업장도 따고 싶은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다니는 야학에서도 사진기는 저만치 안 보이는 데에 숨기고서 말동무가 될밖에 없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난 이후 얼마간 사천 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실 때면 ‘최 할아버지의 점심 스무 끼구나.’ 만 원을 지불할 때면 ‘야, 이건 쉰 끼네.’ 하고 따지게 되고, 회사에 가득 쌓인 신문을 보면, ‘저 정도면 김 할머니 천 원 벌이네. 이천 원 벌이쯤 되겠지.’ 하고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251쪽)



  기사 한 번 썼으니 이제 끝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한 번 썼으니 ‘후속 취재’를 안 해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취재원도 모두 사람이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도에서 그치지 않고 진실 보도를 하려는 매체라고 한다면, 대통령 담화문이라든지 대통령 소식이라든지 대통령 일정쯤 며칠 동안 한 마디도 안 쓸 만합니다. 정치 이야기는 며칠 동안 아예 한 줄로도 기사를 안 써도 됩니다. 이러면서 봄에는 기자들도 시골로 모내기를 하러 가고, 가을에는 또 시골로 가을걷이를 하러 가면서, 적어도 봄가을에 다문 며칠이라도 시골살이 이야기를 몸소 겪으면서 시골 이야기를 머릿기사로 두고두고 다룰 만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주인공을 대통령이나 정당 지도자가 아니라,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 할매와 할배로 삼아서 여러 날 재미나게 엮을 만합니다. 참말로 모든 매체는 ‘사실 보도’에서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적에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누나 사랑해.” 엄마는 솟는 눈물을 찍어 냈다. 소진이 방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뒤에 선 엄마의 흐느낌이 전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엄마를 눈물짓게 한 것이 내 탓이라 어쩔 줄 몰랐다. (262쪽)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어른들이 동시를 씁니다. 삶을 곱게 가꾸면서 밝히려는 뜻으로 아름다운 동화가 꾸준히 나오고, 사랑스러운 동시가 잇달아 태어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빚는 신문이나 방송은 어떤 이야기가 될 만할까요? 하루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하루가 지나면 이내 잊혀지고 말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아니면 두고두고 되읽거나 되새기면서 삶을 새롭게 마주하도록 북돋우는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다리품을 팔아서 이웃을 만나고 귀를 기울였기에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같은 책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그때그때 사실 보도 취재만 했다면, 사실 보도 취재 이야기는 책으로 태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글도 사진도 이웃을 헤아릴 적에 비로소 빚습니다. 신문도 방송도 책도 언제나 이웃을 생각할 적에 비로소 짓습니다.


  사진기자 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그늘진 자리를 취재하려고 ‘다큐 취재’를 했을 수 있습니다만, 누구보다도 기자로서 ‘중립·객관’이라는 틀을 넘어서 ‘이웃을 가까이에서 사귀면서 알려는 몸짓’이 되려고, 다시 말하자면 ‘편견을 깨려는 편견’을 스스로 배우려고 하면서, 이 같은 책을 꾸몄구나 하고 느낍니다. 탄광에 가 보지 않고는 탄광을 알 수 없고, 작은 분교에서 지내 보지 않고는 작은 분교를 알 수 없습니다. 낫을 들고 풀을 베어 보지 않고는 시골을 알 수 없고, 숲에 깃들어 맑은 바람을 들이켜지 않고는 숲이 얼마나 사람한테 고맙고 아름다운가를 알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참을 비트는 ‘바보스러운 편견’이 아니라,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구석자리로 내몰리는 곳으로 찾아가서 ‘잊혀진 한쪽 이야기를 더 귀담아듣는 예쁜 편견’일 수 있을 때에, 너와 나는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낮은 몸짓으로 찾아가서 귀와 눈과 마음과 입을 여는 예쁜 기자가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2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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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 - 구글 vs 도요타, 자동차의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전쟁의 시작
이즈미다 료스케 지음, 이수형 옮김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215



자가용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자율운전 자동차’는?

―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

 이즈미다 료스케 글

 이수형 옮김

 미래의창 펴냄, 2015.11.20. 13000원



  나는 마흔 해 남짓 살며 아직 자동차를 안 몹니다. 다만, 나는 자전거를 몹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스무 해 남짓 늘 자전거를 몰았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돌보면서도 언제나 자전거를 몰고,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함께 돌아다닙니다. 아이들이 크면 자전거에 못 태우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있으면, 아이들이 아버지 자전거에 함께 타고 달리기 힘들 만큼 자라면 아이들 스스로 자전거를 달릴 테니 그때에는 그때대로 즐거운 삶이 되리라 느낍니다.


  또 누군가는 묻습니다. 쉰 살이 넘고 예순 살이 넘어도 자전거를 몰겠느냐고. 나로서는 예순 살이 아닌 일흔 살이나 여든 살에도 자전거를 못 몰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자전거는 빨리 달리려고 몰지 않습니다. 내가 가려고 하는 데를 가려고 몹니다.


  여기에 누군가는 더 묻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동차 없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그래요, 요즘 같은 세상에 텔레비전도 안 키우고 자동차도 안 거느리는 집은 몹시 드물 테지요. 아직 나는 자동차가 나한테 쓸모있으리라 느끼지 않으니 안 몰 뿐인데, 나한테 자동차가 생기더라도 ‘내가 손수 자동차를 몰’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는 자동차에 흥미를 잃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 자동차 운전이 어려운 고령자를 어떻게 줄여 나갈지가 더 중요한 과제일 수도 있다. (19쪽)


자율주행 자동차의 구동 플랫폼에서 동력원이 바뀌면 에너지 회사의 역할도 달라진다. 지금처럼 더 이상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지 않으면 석유회사의 사업 모델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33쪽)



  이즈미다 료스케 님이 쓴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미래의창,2015)를 읽으면서 자동차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그야말로 두멧시골에서 살기에 우리 집에 자동차가 있으면 한결 수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되, 딱히 자동차가 삶을 북돋아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살림에 자동차를 누군가 준다면, 또는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자동차를 장만하여 굴리려 한다면, 나는 이때에 참말 내 손으로 자동차를 몰 생각이 없습니다. 따로 운전수를 두면 모르되, 내 손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살림을 가꾸는 길’에 쓸 생각입니다. 내 손을 ‘운전대를 잡는 손’으로 쓸 마음이 없습니다.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는 ‘구글’이라는 회사가 꽤 예전부터 목돈을 들여서 힘을 쏟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룹니다. 다만, 이 책을 쓴 분은 일본사람이고, 일본에 있는 ‘도요타’라고 하는 큰 자동차 회사를 한복판에 놓고서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루려 합니다. 구글은 자동차 회사도 아니지만 벌써 자율주행 자동차를 놓고 도요타보다 몇 걸음이 훌쩍 앞서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구글은 수익률이 매우 높은 기업이지만, 현재 모습은 검색엔진을 축으로 한 인터넷 광고 기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구글은 자신들이 강점을 지닌 ICT와 자율주행 자동차를 결합시켜 가까운 미래 사회를 움직일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본다. (22쪽)


일본의 자동차 산업 관계자들은 그동안 전기자동차나 연료전지차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다분히 기득권적 발상에 따른 것이다. (45쪽)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운전대를 안 잡으면 무엇이 바뀔까요? 첫째, 면허증이 사라지겠지요. 운전면허를 시험으로 치러야 할 일이 사라지겠지요. 어린이를 비롯해서, 몸이 아픈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들어 걷기도 힘든 사람까지 자동차를 걱정없이 타겠지요. 아이를 혼자 자동차에 태워도 ‘시스템’이 ‘프로그램에 넣은 대로’ 태울 수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걷지 못하는 사람도, 누구나 자율주행 자동차로 도움을 받을 만합니다.


  더욱이, 자율주행 자동차는 석유가 아닌 전기로 달립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면 주유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판인데다가, 석유회사는 돈벌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이러면서 ‘석유에 기대던 문명’은 그야말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가 일어설 만합니다.


  여기에다가, 자율주행 자동차는 ‘면허증 있는 어른’이 몰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를 걱정할 일이 없기 마련입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한테는 아무 책임이 없기 때문에 보험회사는 돈벌이를 어마어마하게 잃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자율주행 자동차는 모든 보험회사한테 무시무시한 목숨앗이라 할 만합니다. 사람들은 보험료를 낼 걱정이나 짐이 없이 느긋하게 자가용을 거느릴 만합니다.



테슬라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전자가 주체이며 자율주행을 할 때에도 운전자가 주체적으로 조작한다. 반면, 구글의 자율운전은 주체가 운전자라기보다 자율운전 시스템의 운영자다. 그리고 그 운영자는 당연히 구글이다. (60∼61쪽)


새로운 경쟁 영역에서 도요타의 경쟁사는 구글이나 테슬라다. 더 이상 폴크스바겐이 아니다. (121쪽)



  다만,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어서 자리잡도록 하려는 구글 회사는 ‘자율주행 얼거리’를 구글이 다스리려고 생각합니다.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가 아니라, ‘시스템이 모는 자동차’이기 때문에, 모든 정보와 기록이 ‘시스템 운영자’한테 넘어가지요.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구글은 이제껏 벌어들이는 수익을 훨씬 뛰어넘는, 그야말로 가없는 수익을 끝없이 거두어들일 만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를 빌어서 누리는 삶’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서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라고까지 할 만합니다. 시스템 운영자가 ‘멈춰!’ 하면 모든 자율주행 자동차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멈추어야 할 테니까요.



자율주행 시스템에서 사고가 났을 때 탑승자의 책임이 없다면 이는 보험사에게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 이 시스템에서 가동되는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자동차 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보험사는 자율주행 시스템의 운영자와 보험 계약을 맺을 뿐이다. (140쪽)



  시골에서 사는 우리 집으로서는 자율주행 자동차는 까마득히 먼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더라도 한동안 큰도시에서만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자리를 잡는다면, 곧 자율주행 비행기가 나올 테고, 자율주행 자동차나 비행기는 ‘고속도로’를 가볍게 뛰어넘으리라 느낍니다. 공항까지 가야 타는 비행기가 아니라, 작은 역(지점)에서 다른 작은 역(지점)으로 가볍게 날아가면서 사고 걱정이 없는 얼거리가 자율주행 비행기가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형 토목공사’도 부질없을 만합니다. 고속도로가 늘어나야 할 사회가 아니라, ‘자율주행 얼거리’를 제대로 갖추는 사회로 거듭나겠지요.


  앞으로 언제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올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구글 회사는 벌써 대여섯 해째 자율주행 자동차를 놓고 시험 운전을 했다고 하며, 구글 회사 개발직원은 이동안 자율주행 자동차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가 진짜로 도전해야 할 분야는 산업 인터넷 개념에 가까운 자동차 제어 영역이다 … 전 세계의 도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도쿄의 도시 디자인은 인구 감소를 전제로 실행되어야만 한다. 덧붙여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90쪽)



  곰곰이 더 헤아리면, 이 자율주행 자동차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무렵 그야말로 모든 집에 자동차가 몇 대씩 생길 만합니다. 아니면, 이 자율주행 자동차 얼거리는 ‘혼자 타는 차’가 아닌 ‘여럿이 함께 타는 차’가 될 수 있을 테고요. 집집마다 자동차가 몇 대씩 있으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자동차로 뒤덮여서 오도 가도 못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혼자 타서 혼자 움직이기만 하는 자율주행 자동차라면, 크기를 한 사람 몸에 맞춘 아주 작은 자동차가 될 만하고,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내 자동차’를 누리더라도 길이 자동차로 북적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찻길로만 다니는 자동차가 아니라, 가볍게 하늘을 날면서 서로 부딪히지 않고 마음껏 어디로든 오갈 만하리라 느낍니다. 앞으로 이런 사회 얼거리가 된다면, 고속도로나 찻길 때문에 자꾸 숲을 밀거나 도시개발을 할 까닭이 사라지고, 우리 삶터는 참으로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꿈 같은 일은 앞으로 나타날 테고, 그야말로 스스로 꿈을 꿀 때에 이 꿈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구글 회사는 더 높은 수익을 바라면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을 테고, 일본 도요타 회사도 더 높은 수익을 꾸준히 거두기를 바라며 구글 뒤를 좇을 텐데, 이들 회사가 수익만 거두는 사업이 아니라, 삶을 곱게 살찌울 수 있는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시스템 통제’ 권력을 거머쥐려는 흐름이 아니라, 삶을 밝히는 터전을 가꾸려는 손길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기를 빕니다. 4348.11.2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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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스케이트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5
유모토 카즈미 지음, 호리카와 리마코 그림, 김정화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22



여우하고 들쥐가 서로 동무로 지내며

― 여우의 스케이트

 유모토 카즈미 글

 호리카와 리마코 그림

 김정화 옮김

 아이세움 펴냄, 2003.10.1. 7000원



  동무 사이라면 서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동무 사이라면 이른바 ‘조건’을 걸면서 따지지 않아요. 동무이니까요. 동무는 기쁘게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입니다. 동무는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춤출 수 있는 사이입니다. 동무는 ‘네가 이렇게 해 주어야 나도 너랑 같이 있지’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무라면 ‘그래, 우리 같이 있자’ 하고 말할 뿐입니다.



호수 한가운데는 색이 왠지 어둠침침하고 칙칙했습니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는 아주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숲은 컴컴하고 빽빽했습니다. ‘저 숲에 가 보고 싶다. 저 커다란 숲에는 뭐가 있을가?’ (14쪽)


저녁놀이 비친 호수는 오렌지 맛이 나는 젤리 같았습니다. 여우는 손을 물에 살짝만 갖다 댔는데도 온몸이 달달 떨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발을 다 담그고 일곱까지 셀 수 있었는제, 지금은 아무리 참아도 셋까지밖에 셀 수 없었습니다. (25쪽)



  유모토 카즈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가운데 하나인 《여우의 스케이트》(아이세움,2003)를 읽으면서 ‘동무 사이’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어린이문학은 ‘여우’가 주인공이고, 들쥐가 주인공하고 동무가 되는 숨결이며, 여우가 발에 끼워서 얼음을 지치는 스케이트가 수많은 동무하고 잇는 징검돌입니다.


  《여우의 스케이트》에 나오는 여우는 아직 새끼 여우인데, 어미 품에서 씩씩하게 잘 자란 뒤 처음으로 어미 품을 떠나서 홀로서기를 하려 합니다. 혼자서 숲을 달리고, 혼자서 먹이를 찾으며, 혼자서 꿈을 짓는 삶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혼자 먼먼 길을 나서다가 어느 날 숲 가장자리 못가에서 풀썩 쓰러져요.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 넋을 잃습니다.


  이때에 여러 숲짐승이 여우를 봅니다. 이 여우를 본 숲짐승은 살짝 망설이는 듯했지만 따스한 마음으로 여우를 돌보기로 합니다. 여우는 따스한 손길을 받고는 다시 기운을 차리는데, 기운을 차린 여우는 숲 가장자리 못가 마을에서 아주 개구진 짓을 하면서 설치고 놉니다.



“나도 먹어 본 적은 없어. 우리 할머니한테서 들었어. 그 열매는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로 맛있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이 숲에 그 파란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딱 한 그루 있었대. 엄청나게 큰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면 모두들 배부르도록 먹었대. 그 나무가 있었을 때는 이 숲도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았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 (32∼33쪽)



  여우는 몸이 다 나았으나 ‘사는 재미’를 좀처럼 찾지 못합니다. 애써 홀로서기 길을 나섰으나 ‘심심한 곳’에 얽매인다고 느낍니다. 날이면 날마다 짓궂은 장난을 일삼습니다. 작고 여린 들쥐를 꽁꽁 묶어서 으르렁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가 무서우면서도 여우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 속내는 막상 무척 보드랍고 너른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를 저한테 둘도 없이 살가운 동무로 여깁니다.


  여우는 처음에 작고 여린 들쥐를 그냥 잡아먹을 생각만 했지만, 이 작고 여린 들쥐가 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동무로 여기는’ 모습을 보고는 그악스럽다고도 여기지만, 어느새 천천히 마음이 바뀝니다. 아니, 이제 막 철이 들려고 하는 ‘어미 품을 떠난 지 첫 해째인 새끼 여우’는 차츰 어른이 되면서 너르고 따스한 마음이 찾아든다고 할 만합니다.



솜사탕처럼 달지는 않았지만, 여우와 들쥐는 눈 맛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37쪽)



  들쥐는 쉬지 않고 여우한테 말을 겁니다. 여우는 들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습니다. 이러면서 넓디넓은 못 너머에는 어떤 숲이 펼쳐질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무도 저 못 너머로 갈 엄두를 내지 않지만, 여우는 숲 너머를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들쥐는 겨울이 되면 이 넓디넓은 못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여우는 왜 겨울에 이 못을 건널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또 들쥐가 하는 말을 못 미덥게 여기지만, 드디어 겨울이 되어 못물이 꽁꽁 얼어붙으니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얼음판을 가로지르면 되는 일입니다.



들쥐는 젤리를 딱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서랍장 깊이 잘 넣어 두었습니다. 여우가 돌아오면 같이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53쪽)



  숲마을 숲동무가 모두 힘을 모아서 스케이트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여우가 떠나고 싶어 하는 먼 마실길에 쓰라고 스케이트를 선물합니다. 여우는 숲동무가 선물로 준 스케이트를 신고 꽁꽁 언 못을 지치며 나아갑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자꾸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아 주기를 바라지만, 여우는 그야말로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내체 달리기만 합니다.


  여우는 못 너머로 건너간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까요? 들쥐는 저한테 둘도 없는 동무라고 여기는 여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른 숲짐승은 모두 여우가 다시 안 돌아오리라 여깁니다. 오직 들쥐만 여우가 꼭 돌아와 주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겨울이 저물고 봄이 되려 하기까지 여우는 돌아올 낌새가 없습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이곳으로 다시 건너올 수 없는데 들쥐는 동무를 잃었다는 생각이 슬픕니다.



그때 작은 숲에서 나무가 일제히 흔들렸습니다. 호수에 작은 물결이 일었습니다. 여우와 들쥐는 향긋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습니다. (74쪽)



  어린이문학 《여우의 스케이트》에 나오는 여우는 얼음이 모두 녹는 날 아슬아슬하게 들쥐 곁으로 돌아옵니다. 여우는 등에 큰 나무 한 그루를 짊어지고 돌아옵니다. 여우가 짊어진 나무는 들쥐가 할머니한테서 이야기로만 듣던 열매 나무입니다. 여우는 들쥐가 저한테 얼마나 사랑스러운 동무인가를 찬찬히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사랑스러운 동무가 바라고 꿈꾸던 ‘들쥐 할머니가 이야기한 열매 나무’를 숲 너머에서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이 열매 나무가 있으면 이곳 숲짐승 모두 맛난 열매를 실컷 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고 합니다. 들쥐뿐 아니라 다른 숲짐승한테도 고마운 뜻을 돌려주고 싶었을 테지요.



“야, 참말 맛있다! 여우야, 어쩜 넌 이렇게 나무 열매를 잘 따니. 넌 참말 참말 대단한 여우야.” 들쥐는 자기가 묶인 줄도 잊은 채 감탄했습니다. (29쪽)



  여우와 들쥐 사이에 따스한 마음은 언제부터 싹이 텄을까요? 아마 여우가 들쥐를 꽁꽁 묶으며 괴롭히던 때에도 들쥐가 여우한테 늘 상냥하게 말을 걸고 ‘여우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일’을 들쥐가 몹시 고마워하는 몸짓을 늘 느끼면서, ‘어미 여우한테서 홀로서기를 하려던 마음’에 문득 ‘사랑이라고 하는 씨앗이 싹이 텄’으리라 봅니다. 이때에 싹이 튼 작은 씨앗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 여우가 이제는 ‘의젓하게 철이 든 어른 여우’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구나 싶어요.


  참말로 사랑이란 아무것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조건 없는 마음’이기에 사랑입니다. 동무 사이에서도 토를 달 까닭이 없습니다. 짝을 짓는 두 사람뿐 아니라, 어깨를 겯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토를 달지 않으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기에 동무가 되면서 사랑이 흐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바라는 마음도 바로 이 ‘토를 안 다는 사랑’이리라 봅니다.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거나 보여줄 수 있는 마음도 바로 이 ‘토를 안 다는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사랑이 싹트는 자리에서 웃음하고 노래가 흐릅니다. 사랑이 싹트는 두 사람은 기쁘게 손을 맞잡으면서 춤을 추고 삶을 새롭게 짓습니다. 4348.11.2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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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 모둠 산꽃 도감
김병기 지음 / 자연과생태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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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0



꽃하고 함께 살아야 꽃이름을 안다

― 모둠 모둠 산꽃도감

 김병기 글·사진

 자연과생태 펴냄, 2013.5.27. 33000원



  어릴 적에 어머니하고 나들이를 다니면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어머니와 나들이를 다니면서 “어머니,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라든지 “어머니, 이 풀은 뭐예요?” 하고 뻔질나게 여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이름을 알려주셨고, 잘 모르시겠으면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알려주어도 몇 차례 듣고는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요즈음은 꽃도감이나 풀도감이 꽤 많이 나오지만, 1980년대에는 마땅한 꽃도감을 찾기도 어려웠고, 이런 책을 내려고 하는 출판사도 드물었어요. 그나저나 아무리 이름을 외우려고 하더라도 잘 못 외우겠더군요. 그무렵에는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왜 외우기 어려운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꽃이나 풀을 그리 안 좋아해서 이름을 못 외울 수도 있지만, 꽃이나 풀하고 언제나 함께 사는 하루가 아니었으니 이름을 알기 어려울밖에 없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나물로 먹는다든지 짐승한테 뜯어서 준다든지 했다면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나 스스로 온갖 이름을 꽃하고 풀한테 붙여 주었을 테지요.



돌나물은 씨앗을 잘 맺지 않는 성질이 있으며, 포기를 뽑아 버려두어도 말라죽지 않고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정도로 강인하다. 주로 양지바른 돌 틈에서 자라고, 나물로 이용할 수 있어 돌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돗나물 또는 돈나물이라고도 부른다. (30쪽)


(둥근바위솔은) 예전에는 동해안의 방품링 밑이나 바위틈에서 많은 개체가 흔하게 발견되었으나 암 치료 좋다는 속설 때문에 자생지가 훼손되어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38쪽)




  김병기 님이 글하고 사진으로 묵직하면서 야무지게 묶은 《모둠 모둠 산꽃도감》(자연과생태,2013)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이 ‘산꽃도감’은 멧꽃(산꽃)을 모둠으로 엮어서 보여줍니다. 꽃을 하나씩 따로 떼어서 살피지 않고, 비슷한 갈래에 있는 꽃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여주지요.


  가만히 돌아보니, 이제껏 나온 수많은 꽃도감은 ‘비슷한 갈래’를 묶기는 하더라도, 이 꽃도감처럼 낱낱이 견주어서 저마다 어떤 풀이나 꽃인가를 제대로 알려주는 구실까지는 못했구나 싶습니다. 참말로 들이나 숲에는 비슷해 보이는 꽃하고 풀이 많거든요. 그래, 이 아이는 이 꽃이었지 하고 똑똑히 가르기 어려울 만하다고 할까요.



(백작약은) 커다란 흰 꽃이 피어나는 모양이 함박웃음을 짓는 것 같다고 함박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81쪽)


들바람꽃은 경기도 북부와 백두대간 중부 이북지역 일부 높은 지대의 한정된 장소에만 자생해 만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와 달리 중국 동부지역과 러시아에서는 습기 있는 들판에서 자상해 들바람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7쪽)



  ‘백작약’은 ‘함박꽃’이라고도 한다는데, 문득 이런 꽃이름은 몇 해쯤 되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를테면, 오백 해 앞서 한겨레 옛사람은 그 꽃을 보며 어떤 이름으로 가리켰을까요? 천 해나 이천 해 앞서 한겨레 옛사람은 어떤 이름으로 꽃 한 송이를 가리켰을까요? 한자가 들어오기 앞서 ‘백작약’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함박웃음이나 함박이나 함지박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들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들에 피는 꽃이면서 바람하고 얽힌 꽃이기에 들바람꽃일 테지요. 그야말로 수수한 이름이면서 수수한 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들바람꽃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백 해나 이백 해 앞서는 어떠했을까요? 그때에도 이 들꽃이나 멧꽃은 찾아보기 어려웠을까요? 오백 해나 천 해 앞서도 이 들바람꽃을 만나기 어려웠을까요?




바디는 예전에 베나 가마니를 짤 때 날줄에 씨줄이 촘촘하게 짜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직기의 구성품이며 빗살 모양으로 생겼다. 바디나물의 줄기에 난 세로줄이 이 바디의 빗살을 닮아 바디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14쪽)


(매미꽃은) 뿌리부터 뭉쳐서 올라오는 잎은 작은잎 3∼7개로 구성된 홀수깃꼴겹잎으로 잎 가장자리에 피나물보다 깊고 날카로운 톱니가 있고, 줄기를 자르면 붉은색 유액이 나온다. 이 액체 색깔로 보아 피나물과 이름이 뒤바뀐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며. (235쪽)



  꽃하고 함께 살면 꽃이름을 잘 압니다. 풀하고 함께 살면 풀이름을 잘 알아요. 나무나 물고기나 새나 벌레가 어떤 이름인가 궁금하다면, 나무나 물고기나 새나 벌레하고 함께 살면 돼요. 함께 살기에 이름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지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한테는 ‘자동차 이름’이나 ‘아파트 이름’이 낯익습니다. ‘가게 이름’이나 ‘갖가지 공산품 이름’이 낯익지요. 도시에서 늘 보는 것이 자동차요 아파트요 가게요 공장 제품이니까요.


  《모둠 모둠 산꽃도감》을 빚은 김병기 님이 멧꽃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골골샅샅 골짜기와 멧자락을 뒤지고 다닐 뿐 아니라, 아예 스스로 씨앗을 받아서 멧꽃을 심어서 돌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김병기 님 스스로 멧꽃하고 함께 누리는 삶을 짓기 때문에 멧꽃을 알뜰살뜰 가눌 줄 알고, 이처럼 모둠으로 그러모아서 여러 멧꽃을 나란히 살피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구나 싶습니다.



눈개승마 잎은 승마의 잎과 닮았지만 미나리아재비과의 승마속과는 관계가 없는 식물이므로 눈개승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울릉도에서는 어릴 때의 잎 모양이 산삼을 닮았다 해 삼나물이라 부르고, 깊은 산속에서 자라므로 눈산승마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 산촌에서는 봄에 삐쭉 내민 새싹을 노인들도 쉽게 뜯을 수 있다 해 삑쭉바리라고 부른다. (251쪽)


금낭화는 비단주머니처럼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모란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꽃줄기가 등처럼 휘어진다 해 등모란 또는 덩굴모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 산촌에서는 꽃의 생김새가 예전에 여인네들이 치마 속에 차고 다니던 복주머니를 닮았다 해 며느리주머니라 부르기도 하고, 나물로 먹을 수 있다 해 며늘취라 부르기도 한다. (304쪽)




  먼 옛날부터 꽃이나 풀에 붙인 이름은 고장과 고을과 마을마다 다릅니다. 때때로 꽃이나 풀을 놓고 똑같은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꽃이나 풀을 놓고 사람마다 다르게 이름을 붙입니다. 왜냐하면 고장마다 말이 달라 고장말이고, 고장에서도 고을마다 말이 달라 고을말이며, 고을에서도 마을마다 말이 달라 마을말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투리라고 하지만, 곳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사투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표준말은 다 다른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다 같은 한 가지 말을 익혀서 생각을 나누자는 뜻으로 세웁니다. 이를테면 ‘민들레’나 ‘냉이’는 표준말로 쓰는 이름이 되지요. 도감에는 이런 표준말 이름이 오르고요. 학문을 하는 이들이 이런 표준말 이름으로 꽃이나 풀을 살핍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 가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학문 틀거리에서는 학계에 처음으로 어느 꽃이나 풀을 알린 사람이 학술 이름에 이녁 이름을 나란히 적곤 합니다. 식물학자나 생물학자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꽃이나 풀’을 살펴서 맨 먼저 보고서로 올리면 이녁 이름이 꽃이나 풀에 붙는 학술 이름에 나란히 붙을 텐데, 학자가 그 꽃이나 풀을 학계에 올리는 일은 맨 처음일는지 모르나, 그 고장이나 고을이나 마을에서 사는 사람은 먼 옛날부터 그 꽃이나 풀을 보고 살피고 누리고 함께하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꽃이나 풀이나 나무를 놓고, 또 벌레나 물고기나 새나 짐승을 놓고,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오래된 이름’이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겨레는 저마다 ‘오래된 이름’이 있어요. 이러한 이름은 먼먼 옛날부터 그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벌레나 물고기나 새나 짐승을 눈여겨보았다는 뜻이면서, 사람들하고 이웃이 되는 숨결로 함께 살았다는 뜻입니다.




(솜다리는) 이름의 ‘다리’는 순 우리말로 예전에 여인네들이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대던 땋은 머리를 뜻한다. 꽃차례가 다리를 넣은 것처럼 탐스럽다고 붙인 것이다. (395쪽)


(산부추는) 전국에 분포하며 조금 깊은 산속의 햇빛이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사질토양에서 다른 식물과 함께 자란다. 잎은 긴 송곳 모양으로 생겼으며 단면은 삼각형이고 2∼3장이 위쪽으로 비스듬히 퍼지며 자란다. 잎이 기다랗고 소나무 잎처럼 생겨 솔나물 또는 산솔나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512쪽)



  듬직하면서 예쁘장한 《모둠 모둠 산꽃도감》은 그저 멧꽃 이름을 잘 가누거나 살피는 길잡이 구실만 하지 않습니다. 숲을 아끼고 들을 사랑하며 시골을 보듬을 줄 아는 손길로 곁에 둘 책이라고 느낍니다. 모든 풀은 약풀이라는 오래된 시골말처럼, 모든 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나무는 다 함께 모여서 숲을 이룹니다. 모든 사람은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면서 마을을 이루지요.


  우리 삶을 둘러싼 수많은 꽃과 풀은 우리한테 밥도 되고 약도 됩니다. 우리가 밥이나 약으로 삼지 않아도 숲짐승이나 풀벌레는 이 꽃과 풀을 밥이나 약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아도 꽃가루받이가 되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는 까닭은 벌이랑 나비랑 벌레가 그 꽃한테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숲이나 들에는 몇 가지 꽃이나 풀만 있을 수 없어요. 그야말로 온갖 꽃이랑 풀이 함께 어우러지기에 비로소 숲입니다. 이 꽃하고 저 풀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라기에 아름다운 숲이지요.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이 된 멧꽃을 함부로 캐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빕니다.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이 아닌 산국이나 들국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풀약으로 죽인다거나 시멘트를 들이부어서 없애는 몸짓은 나오지 않기를 빕니다. 눈으로 볼 적에는 눈부신 기쁨을 베푸는 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빌고, 코와 살갗으로는 맑고 고운 냄새와 바람을 베푸는 꽃을 아낄 수 있기를 빌어요. 시골이나 숲이나 멧자락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올망졸망 들꽃이나 멧꽃이 씨앗을 퍼뜨리면서 다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19.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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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특고 아이들 5
김민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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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77



남다르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 강특고 아이들 5

 김민희 글·그림

 서울문화사 펴냄, 2009.7.31. 4000원



  김민희 님이 빚은 만화책 《강특고 아이들》(서울문화사)은 2007년에 첫째 권이 나오고, 2010년에 일곱째 권이 나오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강특고’는 서울 강남이 아닌 강원도에 있는 ‘특고’이고, ‘특고’에서 ‘특’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가 아니라 ‘특별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모이는 고등학교’입니다.


  ‘강특고’ 아이들이 펼치는 남다른 재주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흔히 ‘초능력’이라고 일컫는 재주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 모이는 아이들이 쓰는 남다른 재주는 여느 사람들이 좀처럼 받아들여 주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여느 사회에서 여느 사람들이 받아들여 주지 못하다 보니 강원도 깊은 멧골에 숨듯이 있는 강특고로 모인다고도 할 만합니다.



‘도시는 너무 시끄러워. 인상이 절로 써지는걸. 외롭다. 고등학교 때는 모두에게서 사랑받았는데.’ (31쪽)


“새랑 쥐가 불쌍해! 나 정말 채식주의자가 될 거야!” “앞으로 야채 반찬 먹기 글렀네.” “그럼, 세나 피부가 좋아진 건 새랑 쥐를 먹어서 그런가? 그럼 나도 새나 쥐를 먹어 볼까! 내 피부!” (37쪽)



  중학교는 고등학교로 가는 징검돌이라 하고, 초등학교는 중학교로 가는 징검돌이라 합니다. 고등학교는 대학교로 가는 징검돌이거나 사회로 나가서 일자리를 찾는 징검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일자리를 찾아서 돈을 벌든, 대학교까지 더 다녀서 일자리를 찾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고등학교를 마친 뒤 집에서 놀거나 대학교를 마치고 나서 집에서 놀면 미움이나 손가락질을 받지요. 일자리를 얻지 않는 아이들을 가리켜 ‘흰손’이라는 뜻으로 ‘백수’라고도 합니다.


  강특고를 다닌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갈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로 간 몇 안 되는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은 ‘소리를 아주 잘 듣’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몹시 괴롭지요. 온갖 자질구레한 소리가 다 들리니까요. 더군다나 강특고에서는 저마다 ‘남다른 재주’가 있기는 하지만 이 남다른 재주 때문에 여느 사회에서는 이웃하고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들이 모였어요. 다시 말하자면, 강특고 아이들은 서로서로 마음으로 따스히 헤아리면서 즐겁게 지낼 만한 이웃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귀엽다고 한 소리는 내게 한 게 아니구나. 어째서 그런 걸까. 그 동물들도 다 나인데.’ (58쪽)


“지문이가 내 인간 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호숙이(멧짐승인 범)는 귀엽지만 이 몸(사람으로 바뀐 몸)은 늙은이니까.” (61쪽)



  만화책 《강특고 아이들》은 어렵거나 골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남다른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깊은 멧골에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재미나게 노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웃음이 터질 만한 이야기가 흐르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한 이야기가 흘러요.


  어느 모로 본다면 ‘초능력이 있는 녀석들이 참 바보스럽게 구네’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스럽게 굴거나 노는 모습은 ‘초능력이 있다는 사람’뿐 아니라 ‘초능력이 없다는 사람’도 매한가지예요. 그냥 사람으로서 누구나 보여주는 모습이니까요. 강특고 아이들한테는 남다르다는 재주가 하나씩 있을 뿐이거든요.


  그리고, 강특고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저마다 남다른 재주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바느질 솜씨가 좋다든지, 걸음이 빠르다든지, 노래를 잘 부른다든지, 된장국을 잘 끓인다든지, 밥물을 잘 맞춘다든지, 비질이나 걸레질을 잘 한다든지, 심부름을 잘 한다든지, 저마다 즐겁게 누리는 솜씨나 재주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그저 잘 노는’ 모습으로도 재미있으면서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공기놀이를 잘 할 수 있고, 저 아이는 딱지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그 아이는 연날리기를 잘 할 수 있어요.



‘이상하네, 싫지가 않아. 여전히 좋아! 정말 좋아하면 겉모습은 상관없나 봐.’ (80쪽)


“선배, 뭘 믿고 새로 변신 안 하셨어요? 제가 없었음 떨어져 죽었어요!” “변신하면 옷 찢어질까 봐!” (86쪽)



  아이들은 남달라서 남달리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남다르지 않아서 수수하게(남다르지 않게) 사랑스럽습니다. 말솜씨가 없든 글재주가 없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말솜씨가 없는 아이는 말솜씨가 없는 대로 사랑스럽습니다. 글재주가 없는 아이는 글재주가 없는 대로 사랑스러워요. 개구진 장난을 즐기는 아이는 개구진 장난을 즐기는 대로 사랑스럽고, 말썽꾸러기라는 아이는 말썽꾸러기 모습이 사랑스럽지요.


  나는 시골에서 두 아이를 돌보면서 이 대목을 늘 느낍니다. 두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쉬지 않고 놉니다. 지칠 줄 모르는 기운이 솟아서 끝없이 놀고 또 놀고 새롭게 놉니다. 때때로 두 아이가 놀이를 그치고 얌전히 있을 때가 있는데, 문득 낮잠이 오거나 살짝 힘이 들 때입니다. 한 아이라도 낮잠이 들면 집안이 아주 고요해요. 마치 사람이 안 사는 집 같습니다. 이때에 이런 기운을 느끼면서 새삼스레 돌아보지요. 참말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기에 아이들이요, 무슨 놀이가 되든 실컷 누릴 수 있어야 아이다운 숨결을 북돋우는구나 싶어요.



‘동물로 변신 못하는 나는 아무 힘이 없구나. 이런 건 싫어. 힘을 되찾으려면 손을 놓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 하지만 손을 놓고 싶지 않아.’ (111쪽)


“그러던 어느 날, 수많은 토끼 중에 날 골라 이름을 붙여 줬지. 민수랑 지내면서 난 정말 오래 살고 싶어졌어. 즐거운 게 뭔지, 슬픈 게 뭔지, 괴로운 게 뭔지,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어서 … 나, 능력을 잃어가나 봐. 몇 년 전부터 늙어가는 게 느껴져.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지금처럼 민수가 힘들어 하면, 그게 나에게도 느껴져서, 너무 아파.” (148, 149쪽)



  아이들은 저마다 삶을 배웁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삶을 배우고, 집에서 스스로 책을 읽고 놀면서도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려고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졸업장을 따려고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졸업장을 선물하려고 아이를 학교에 넣을 까닭은 없습니다. 대학교를 잘 보내 주는 학교라든지 일자리를 잘 얻게 이끄는 학교에 아이들을 넣지는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을 가꾸도록 이끄는 학교를 다닐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이러면서 다 다른 아이들마다 다 다르게 좋아하고 아끼는 숨결을 따스히 북돋아 주어야지요. 대학교나 취업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도록 떠밀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 길을 밝히는 이야기를 배우도록 북돋아야지 싶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스스로 길을 찾으니,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려 하든 일자리를 얻으려 하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대학교에 안 가도 됩니다. 아이들은 몇 해쯤 일자리 없이 집에서 쉬어도 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꿈을 찾아서, 이 꿈을 사랑스레 이루려는 뜻에서 태어납니다.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스물다섯 살쯤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물다섯 살에 대학생이 되어도 좋고, 고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쳐도 좋습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도 좋고, 집에서 집살림을 도우면서 지내도 좋습니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흙을 가꾸어도 좋고, 도시 한복판에서 텃밭을 가꾸어도 좋아요.


  남다르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는 대목을 재미나게 보여주는 《강특고 아이들》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이 나라 모든 학교가 ‘강특고’만큼은 아니어도, 멧자락 하나쯤 끼거나 냇물이나 골짜기를 옆에 끼면서 있으면 무척 좋으리라고. 아이들이 버스나 전철이나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다니기보다, 들길이나 숲길이나 냇길을 거닐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리라고. 교과서보다는 사랑을 배우고, 시험공부보다는 꿈을 그릴 수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운 학교가 되리라고. 4348.11.19.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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