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 -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 되는 곳
김경희 지음 / 공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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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5



기쁨은 돈으로 따지거나 재지 않습니다

― 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

 김경희 글·사진

 공명 펴냄, 2015.12.30. 13800원



  방송작가로 일하는 김경희 님은 좀처럼 말미를 내어 차분히 쉬거나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열 살 난 아이가 있어서 이 아이를 두고 보름씩 집을 비우면서 나라밖을 다녀올 생각을 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부탄을 둘러보려는 마음이 커서 체류비를 씩씩하게 냈고, 마흔 문턱에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넋으로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공명,2015)라는 책은 부탄이라고 하는 나라가 참으로 얼마나 ‘기쁨 나라(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인가를 몸으로 겪어서 느껴 보려고 하는 발걸음으로 태어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김경희 님은 2014년에 바닷속에 슬프게 가라앉은 세월호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잊거나 잃은 ‘사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부탄에서 찾아보고 싶었다고 해요.



부탄 사람들에게는 순박하고 착해 보인다는 흔한 말로는 부족한 정갈한 매력이 있었다. 그게 뭘까, 한참 생각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것이 ‘품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는 농부대로, 공항 경비원은 또 그들대로, 자기 나름의 분위기와 품위가 있었다. (28쪽)


부탄의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거대한 산자락 아래 위치한 이 학교는 시야가 탁 트여 있으면서도 무척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운동장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정경은 최고였다. (87쪽)




  경제성장율이나 국민소득으로 치자면 부탄이라는 나라는 거의 맨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요. 숫자로 쳐도 부탄은 국민소득이 3000달러 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부탄에서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은 무척 높다고 나와요.


  한국은 경제성장율이나 국민소득으로 치자면 꽤 앞쪽에 든다고 할 수 있어요. 숫자로 치면 한국사람은 제법 잘사는 나라라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부탄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기쁜 삶’이라고는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부탄하고 견주면 얼추 아홉 곱(2014년 잣대로 한국 국민소득은 27090달러)이나 되는 국민소득인 한국이지만, 정작 한국사람이 살갗으로 느끼는 기쁨은 무척 떨어진다고 할 만해요.


  다시 말하자면, 부탄은 숫자로 기쁨을 따지지 않는 나라요, 한국은 기쁨보다는 숫자를 따지는 나라입니다. 부탄이라는 나라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사는 기쁨’하고 ‘사는 보람’을 생각한다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며 벌어야 하는 돈’하고 ‘살며 가져야 하는 돈’에 많이 얽매이는 셈입니다.



20달러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을 가진 기업들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스카프 한 장이 수십만 원에 팔리는 세상에서 대자연의 기도가 담긴 머플러를 20달러에 두 장이나 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더마가 내게 차 한 잔을 더 권했다. (112쪽)


“하하, 요리를 재미로 하나요? 가족들과 함께 맛있게 먹기 위해서 하죠.” “그렇구나. 초키는 정말 좋은 남편이에요.” “누구나 하는걸요, 뭘. 한국 남자들은 요리를 안 하나요?” (120쪽)





  《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를 쓴 김경희 님은 방송작가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다큐작가로서 쓰지 않습니다. 보름에 걸쳐서 부탄에서 조용히 살며 겪은 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때때로 사진기를 들어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두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으며 느낀 이야기를 적바림해요.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책을 덮고서 부탄하고 얽힌 여러 가지 ‘지표(숫자)’를 살펴보고, 한국하고 얽힌 여러 가지 지표도 살펴봅니다. 한국하고 얽혀 땅뙈기는 세계 109위라 하고, 인구는 세계 26위라 하며, 국민소득은 세계 11위라고 나옵니다. 부탄은 땅뙈기가 세계 137위라 하고, 인구는 세계 165위라 하며, 국민소득은 세계 159위라고 나와요.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는 세계 역사나 문화를 가르칠 적에 으레 이러한 숫자를 바탕으로 가르치겠지요. 매체에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룰 적에도 으레 이러한 숫자를 들 테고요. 그러면 이러한 숫자에는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이나 사랑이나 꿈이 깃들었다고 할 만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정부는 언제나 경제성장율을 높이겠다는 정책만 밝히는데, 경제성장율을 높이면 우리는 얼마나 기쁘거나 즐겁게 살 만할는지요.



와이파이가 되지 않으니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고 불빛이 없으니 책을 읽기에도 좀 애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함 속에 누워 있으니 평소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귀에 들렸다. 몇 시간 사이에 빗줄기가 굵어졌는지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소리가 전해졌다. (172쪽)


현명한 부탄 아가씨들은 돈이나 배경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구애를 펼치는지 본능으로 받아들인다. (184쪽)





  부탄도 부탄이지만 내가 지내는 보금자리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이들한테 어머니나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서 집안으로 가지고 와야 아이들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 때보다는 저희랑 함께 있으면서 함께 놀고 웃고 노래하고 어울리고 잠들고 이야기할 적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합니다. 밥상맡에 함께 둘러앉아서 수저를 들 때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합니다. 밥상에 온갖 먹을거리를 잔뜩 차려야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언제나 따스한 사랑하고 너른 꿈을 바라요. 아이들은 어떤 숫자나 지표를 따지거나 챙기거나 살피지 않아요. 과자 한 점을 먹을 적에도 서로 나누고 어머니나 아버지 입에도 똑같이 주고 싶은 아이들은 기쁜 마음하고 즐거운 숨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나게 뛰놀 수 있는 마당을 좋아하는 아이들이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들길을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점배, 아이들이 어쩜 저렇게 인사를 잘하죠?” “학교에서 배우고 집안에서 배우고 마을 어른들에게도 배우니까요.” (263쪽)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듯하다. 부탄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에도 성공하는 것에도 능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확실히 우리보다 더 행복하다. (311쪽)




  김경희 님이 《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라는 책에서도 쓰듯이, 기쁘기에 기쁘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돈을 벌기에 기쁜 삶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 하면 돈을 벌 뿐입니다. 국민소득이 높으면 그저 국민소득이 높다는 뜻일 뿐, 사람들이 서로 돕고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고 어깨동무를 한다는 뜻이 되지 않아요.


  참말로 기쁨은 숫자로 따질 수 없습니다. 기쁨은 돈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기쁨은 시험성적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기쁨은 집 넓이나 자동차 크기로 따질 수 없습니다. 기쁨은 키나 몸무게로 따질 수 없습니다. 기쁨은 언제나 마음으로 살펴서 삶으로 누릴 뿐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이 되기에 노래가 흘러나오고, 춤추는 마음이 되기에 춤사위가 샘솟습니다. 노래방에서만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몸짓이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밥을 짓고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느긋하고 살가이 노래할 수 있는 몸짓이 될 때에 비로소 기쁜 삶이 되리라 봅니다. 돈을 내고 들어가는 춤판이 되기에 춤을 추는 몸짓이 아니라, 밥을 짓다가도 춤을 추고 길을 걷다가도 춤을 추며 마당에서 아이들하고 신나게 춤을 출 수 있는 몸짓이 될 적에 바야흐로 기쁜 사랑이 되리라 느껴요. 멀리 있는 기쁨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는 기쁨이니, 바로 이 기쁨을 눈여겨보고 아낄 때에 스스로 웃는 삶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349.1.1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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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화가 났어? 울퉁불퉁 어린이 감성 동화 1
톤 텔레헨 글, 마르크 부타방 그림, 유동익 옮김 / 분홍고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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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11



골부림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 너도 화가 났어?

 톤 텔레헨 글

 마르크 부타방 그림

 유동익 옮김

 분홍고래 펴냄, 2015.2.28. 13000원



  ‘화(火)’가 난다고 할 때가 있어요.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쓰는 한자말인데, ‘화’는 한국말로 ‘성’을 가리킵니다. ‘성’은 싫거나 섭섭하거나 서운한 마음을 가볍게 나타내려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에요. ‘성’하고 비슷한 ‘부아’는 어떤 일이 잘 안 된다고 할 적에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모습을 가리켜요. 그리고, ‘골’은 마음에 거슬리거나 싫은 일이 있을 적에 벌컥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나는 모습을 가리키고, ‘짜증’은 마음에 안 맞거나 하기 싫어서 갑자기 치미는 안 좋은 마음을 가리켜요.


  곰곰이 돌아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서운하거나 싫거나 할 적에 느낌이 다 다를 텐데, 요즈음은 ‘화’라는 한 가지로만 뭉뚱그려서 나타낸다고 할 수 있어요. 이냥저냥 다 싫고 마음에 안 드니 굳이 여러 낱말을 알맞게 골라서 쓸 겨를이 없을 수 있겠지요. 성이나 부아나 골이나 짜증 가운데 아이들이 문득 입술을 내밀면서 툭툭거리는 모습은 ‘골’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해 보려고 하는데 자꾸 안 되거나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꽝 하고 터지는 모습은 ‘부아’예요.



드디어 코끼리가 나무 꼭대기에 올랐어요. 코끼리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발아래로 숲이 펼쳐져 있었어요. 저 멀리 바다에는 태양이 파도 위로 일렁거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멋진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코끼리는 한 다리로 섰어요. 너무나 행복해 귀를 펄럭이며 코를 하늘 높이 올리고 발레리나처럼 춤을 추려고 했어요. 그런데 몸이 기우뚱하더니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13쪽)




  톤 텔레헨 님이 글을 쓰고, 마르크 부타방 님이 그림을 그린 《너도 화가 났어?》(분홍고래,2015)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마음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화가 나든 성이 나든 골이 나든 부아가 나든 짜증이 나든, 이런 마음이 되는 까닭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무래도 어떤 일이 잘 안 되기에 싫은 마음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잘 된다고 할 적에 싫은 마음이 들 일은 없으리라 느껴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골이 나요. 나는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 부아가 치밀어요. 다른 아이들은 잘 하는데 나만 못 한다는 생각에 젖어서 그만 성을 내고 짜증이 샘솟아요.


  《너도 화가 났어?》에 나오는 코끼리는 나무 꼭대기를 반드시 올라가고야 말겠다면서 씩씩거립니다. 그런데 커다란 코끼리 몸집으로는 나무를 타고 오를 적마다 자꾸 미끄러져요. 커다란 코끼리는 나무에서 미끄러져서 바닥에 엉덩이를 찧을 적마다 부아를 냅니다. 다른 사람이나 나무한테 부아를 내지 않고, 코끼리 저 스스로한테 부아를 내요. 이러다가 끝내 우듬지까지 올라가지요. 그러고는 이 우듬지에서 무척 먼 곳까지 환하게 내다보며 모든 부아가 풀려요.


  드디어 스스로 해냈거든요. 참말 스스로 이렇게 해냈거든요. 스스로 마음에 품은 뜻이나 꿈을 이루기까지 넘어지거나 엎어지거나 깨지면 자꾸 부아가 날 만하지만, 이 모두를 헤치고 끝까지 나아가고 보니 부아가 나던 마음은 말끔히 사라져요.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어요.



“글로 쓴다면 그렇게 될 거야. 내가 ‘나는 기뻐’라고 쓰면 나는 기쁜 거야. 기쁘지 않다면 기쁘다고 쓸 리가 없어. 편지 맨 끝에 ‘고슴도치’라고 쓰면 내가 고슴도치가 맞잖아.” 고슴도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내가 무엇이라고 쓰면 그게 바로 나야.’ (36쪽)




  어린이는 어른보다 힘이 여리고 손도 작고 솜씨도 모자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못 하는 일이란 없어요. 어린이는 언제나 어린이 나름대로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더러 어른처럼 무거운 짐을 나르라 할 수 없고, 밥을 지으라든지 집을 지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도 어린이 나름대로 심부름을 할 만하고, 조그마한 살림을 얼마든지 거들 만해요.


  어른도 뜨개질을 처음 하려 하면 잘 안 되지요. 어린이도 뜨개질을 처음 손에 쥐면 잘 안 되기 마련이에요. 안 되고 엉키고 헝클어지고 하면서 천천히 깨닫고 배웁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흙집을 지을 적에도 처음부터 멋지게 흙집을 짓는 어린이나 어른은 없습니다. 무너지고 쌓고 무너지고 쌓고 하는 몸짓을 되풀이하면서 차근차근 익숙해져서 나중에 흙집을 잘 쌓습니다.


  가위질도 그렇고 글씨쓰기도 그렇지요. 씩씩하게 하고 꿋꿋하게 하면서 비로소 즐겁게 해낼 만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처음으로 마주한다면, 서두르지 않을 수 있어야 해요. 서두르기에 부아가 나요. 빨리 해내려 하니 골이 나요. 어른처럼 못 하거나 다른 동무처럼 안 된다고 여기면서 짜증이 나지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이라서, 어른 사이에서도 이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이 일이 더딘 사람이 있어요. 어린이 사이에서도 똑같으니, 더 빨리 하는 아이가 있고, 더 천천히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개미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화’를 잘 숨길 수도 있다고 했어요. ‘화’를 바다로 흘려보낸 뒤 파도에 밀려 진정시킬 수도 있고요. 그리고 시들어 더는 볼 수 없게 할 수도 있어요. 또 노래를 불러서 ‘화’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했어요. “노래를 불러서 없애 버린다고?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두꺼비가 물었어요. (66쪽)




  어린이한테 ‘싫은 마음 다스리기’를 넌지시 알려주는 《너도 화가 났어?》는 화가 난 아이한테 ‘네가 잘못하지는 않았단다’ 하고 부드럽게 타이릅니다. 화가 날 수 있지요. 화가 나도 되고요. 다만, 화가 났으면, 이 화를 어떻게 스스로 다스리면서 새로운 몸짓으로 거듭날 때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즐거움이 사라지기에 화도 나고 성도 나고 골도 납니다. 즐거움을 잊었기에 부아가 나고 짜증이 나지요.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면 섭섭하거나 서운한 일이 없어요.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노래가 된다면 싫거나 밉거나 시샘하는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어른들은 흔히 명상을 하는데, 어린이도 어른하고 함께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면서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참으로 고단하거든요. 학교 공부로 고단하고, 학원 공부로도 고달파요. 홀가분하게 뛰놀 틈이 거의 없는 오늘날 어린이인 터라, 어린이도 골이 날 일이 잦다고 할 수 있어요.


  화풀이나 성풀이를 해야 화나 성이 풀릴 수 있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는 저 먼 바닷물에 화를 띄워 보낸다든지, 가랑잎에 성을 실어서 흙으로 돌려 보낸다든지, 가만히 노래를 부르면서 이 노랫가락에 날려 보낸다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 네가 골이 났네. 그러면 그 골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풀면 되지. 골이 났다고 해서 나쁜 일이 아니야. 골이 난 까닭을 생각해서, 앞으로 즐겁게 노래하면서 놀면 돼. 아니면, 앞으로도 이대로 골만 내면서 아무것도 못 하거나 안 하고 싶니?” 하는 말을 아이한테도 들려주고, 어른인 내가 나 스스로한테도 들려줍니다. 즐거움을 잊은 마음에 어느새 끼어들려고 하는 골부림을 빙그레 웃으면서 슥슥삭삭 비질을 하며 치웁니다. 4349.1.1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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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타고 온 아이 난 책읽기가 좋아
티에리 르냉 지음, 한지선 그림,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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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30



별에서 온 따사로운 숨결이 내 곁에

― 별빛을 타고 온 아이

 티에리 르냉 글

 한지선 그림

 심지원 옮김

 비룡소 펴냄, 2003.6.23. 7000원



  아이는 한 살 두 살 자라면서 궁금한 것을 묻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 궁금해 하기에 모두 다 물어요. 밥을 왜 먹는지도 묻고, 잠을 왜 자는지도 묻습니다. 이를 왜 닦는지도 묻고, 몸을 왜 씻는지도 묻지요. 그리고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났는지도 묻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수 있던 까닭이라면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오직 이 하나만을 아이한테 말할 수 없어요. 아이가 태어나는 일뿐 아니라, 사람이 늙거나 다치거나 아파서 죽는 일을 놓고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만 말할 수 없어요. 삶도 죽음도 아이한테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뿐 아니라, 이 아이들을 낳은 나랑 곁님도 어버이가 있어요. 나도 예전에는 아이로 태어나서 자랐어요. 내가 오늘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고요히 숨을 거둔다면, 그때에 아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아이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실마리가 되어요.



나는 마로니에 나무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나무는 할아버지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지의 아빠가 심어 놓은 나무였습니다. 나는 두 주먹으로 나무를 마구 때리면서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움직여 보세요! 움직여 보란 말이에요…….” (10쪽)


내가 롤라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만 조용히 돌아서서 그 방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너희 부모님은 돌아가셨단다.” (23쪽)



  티에리 르냉 님이 글을 쓰고, 한지선 님이 그림을 그린 《별빛을 타고 온 아이》(비룡소,2003)를 읽습니다. 이 어린이문학은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첫째, 죽음을 다룹니다. 둘째, 삶을 다룹니다.


  이 책을 읽으면 첫머리에서는 죽음을 먼저 다뤄요. 어느 마을에서 할아버지하고 사랑스레 살던 아이가 있는데, 어느 날 그만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요. 아이는 죽음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해요. 어제까지 즐겁게 함께 놀고 웃던 할아버지가 오늘부터 없다고 하니 이 대목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아이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이한테 죽음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요. ‘죽었다’는 말하고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을 빼고는 더 이야기를 하지 못해요.


  아이한테는 할아버지일 테지만 어버이한테는 아버지예요. 아이도 할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테지만 어버이도 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셈이에요. 그러니 어버이도 아이도 그만 아픈 수렁에서 헤매기만 해요. 아이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가슴이 뻥 뚫린 채 ‘눈물 없는 사람’으로 살아요.




롤라는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길 만큼 강할 수 있을까?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까? 왜 롤라는 죽음과 싸우기 위한 나무로 된 칼이 필요하지 않는 걸까? (33쪽)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한테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두 분이 돌아가실 무렵에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를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돌아가셨다’는 말만 해 주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이 땅을 떠날 적에도 ‘죽었다’는 말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를 놓고도 ‘태어났다’는 말만 들었어요. 새로운 아이가 어떤 숨결로 이 땅으로 찾아왔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이야기로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을 오늘 우리 아이들이 나한테 묻습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무엇이고, 아기가 새로 태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으며, 사람은 왜 아기로 새로 태어나는가 하고 물어요.



“나는 별에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아요. 사실 진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곳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나는 별똥별의 꼬리를 타고 여행을 다녔어요 … 처음에는 지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산이랑 숲, 바다, 이런 모든 것들이 참 예뻤지만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곧 떠나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어떤 아름다운 마을 한가운데에서 작은 점 두 개를 발견했어요.” (36∼37쪽)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품에 안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갔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엄마 아빠의 대화를 듣게 됐어요.” (38쪽)




  《별빛을 타고 온 아이》를 읽으면, 이 책에서는 삶(태어남)을 ‘기쁨을 누리려고 다른 별에서 이 땅으로 왔다’고 하는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새로운 숨결이 별(별똥)을 타고 지구 둘레뿐 아니라 온 우주를 마음껏 돌아다니는데, 지구라는 별을 둘러보다가 매우 사랑스러운 두 사람을 보았대요. 별(별똥)을 타고 온 우주를 오랫동안 돌아다니던 숨결은 지구라는 별에서 문득 찾아내어 지켜보는 두 사람이 매우 사랑스럽기에 가만히 보고 또 보고 하다가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마음으로 비는 꿈을 엿들었대요. 그러고는 이 두 사람한테서 태어나기로 마음먹었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교통사고로 두 어버이를 잃은 아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죽은 뒤로 가슴이 뻥 뚫린 채 눈물이 말라붙은 채 사는 아저씨’한테 들려줍니다. 두 어버이를 잃은 아이는 오히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아저씨더러 기운을 내라면서 북돋아 주어요. 간호사 아저씨는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병원에 드러누워 꼼짝을 못 하다가 곧 죽음을 맞이하려는 아이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차분히, 따스히, 넉넉히 마음으로 보듬어 줍니다.



“떠나지 마……. 우리와 함께 있어, 롤라…….” 롤라의 입술이 움직였습니다. 롤라는 간신히 숨을 쉬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쥘 아저씨, 별빛 속에서…… 나를 찾으세요…….” 그리고 롤라의 눈은 감겼습니다. (45쪽)



  먼 우주에서 별을 타고 온 아이는 다시 먼 우주로 별을 타고 떠났을까요? 먼 우주에서 별을 타고 온 숨결은 이 지구에서 태어나려고 몸을 얻었다면, 이 지구에 나들이를 와서 기쁘게 한삶을 누린 뒤에 다시 먼 우주로 떠날 즈음에는 몸을 이곳에 내려놓고 고요히 숨을 멈춘 셈일까요?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뿐 아니라 오늘 내 곁에 있는 아이들도, 바로 나도, 그리고 우리 어버이도, 모두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처럼 별을 타고 지구로 찾아와서는 다시 별을 타고 우주로 긴긴 나들이를 떠날까요?


  아홉 살 아이하고 ‘별아이’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아홉 살 아이는 ‘별아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다른 별에서 이 지구로 찾아와서 함께 사랑을 짓는 사이로 지낸다고 이야기하고, 저마다 이 지구라는 별에서 기쁜 살림을 가꾸면서 꿈을 키운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면 모두 가슴에 담겠지요.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아직 잘 모르겠으면 아직 모르는 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일 테지요. 우리가 저마다 별아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기쁜 넋이라는 뜻이에요. 별아이로서, 또 어버이로서, 또 우리 어버이한테는 아이인 삶으로서, 오늘 하루도 기쁨을 가슴에 담고 활짝 웃고 노래하자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4349.1.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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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케이크 왕이야! 책 읽어주는 책
엠마 치체스터 클라크 글.그림, 포 옮김 / 어썸키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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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10



즐겁게 먹고 싶어서 손수 케이크를 굽지요

― 내가 케이크 왕이야

 엠마 치체스터 클라크 글·그림

 포 옮김

 어썸키즈 펴냄, 2014.5.20. 11000원



  케이크는 누구나 구울 수 있을까요? 오븐이 있다면 손쉽게 굽겠지요. 오븐이 없으면 케이크를 못 구울까요? 오븐이 없어도 지짐판에 불을 아주 여리게 넣어서 케이크를 구울 수 있습니다. 다만 오븐으로 하듯이 손쉽게 굽지는 못 하고 손이 많이 가야 해요. 오븐으로 구울 적하고 여느 지짐판으로 구울 적에는 반죽도 좀 다르게 합니다. 굽는 판이 다르니까요. 소금이나 물도 오븐에서 구울 적하고 다르게 맞추고요.


  우리 집에는 오븐이 없어서 집에서 빵이나 케이크를 굽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븐이 없으면 없는 대로 수도 없이 해 보고 또 해 보면서 여느 지짐판으로도 빵이나 케이크를 굽는 길을 새로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기까지 여러 해 걸렸어요.


  그러면 왜 굳이 오븐 없는 집에서 빵이나 케이크를 구우려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집에서 굽는 빵, 이를테면 ‘집빵’이 대단히 맛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구 입맛에 맞추어서 손수 굽는 빵이 참말 맛있더군요. 아마 아이들도 옆에서 거들면서 함께 반죽을 하고 굽고 기다리면서 모든 얼거리를 함께 지켜보고 바랐기 때문에 더 맛난 집빵(마치 집밥처럼)이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루루야, 너 케이크를 구워 본 적 있어?” 알피가 물었어요. “어머, 알피! 누구나 케이크 정도는 구울 수 있어!” 루루가 말했어요. (8쪽)



  엠마 치체스터 클라크 님이 빚은 그림책 《내가 케이크 왕이야》(어썸키즈,2014)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살랑살랑 꼬리마을’이 무대입니다. 이 살랑살랑 꼬리마을에서도 ‘루루네 집’이 무대예요.


  살랑살랑 꼬리마을은 ‘온갖 개’가 모여서 사는 조그맣고 예쁜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서 루루네 집은 이 예쁜 마을에서도 가장 예쁘다고 할 만한 작은 아이(개)네 집입니다.



“우리는 아주 커다란 케이크를 구울 거라서 아주 커다란 쟁반이 필요해요!” 루루가 말했어요. “케이크에 소시지를 넣으려고요. 아저씨 생각은 어떠세요?” “케이크에? 미스터 첨프차프 씨가 웃었어요. “정말 웃긴 케이크로구나!” (11쪽)





  어느 날 살랑살랑 꼬리마을에서 ‘케이크 대회’가 열립니다. 이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개)이 저마다 집에서 손수 케이크를 구워서 겨루기를 한다고 해요. 마을사람들은 누가 굽는 케이크가 가장 멋질까 하고 두근두근 설레면서 기다립니다. 아이들(개)은 저마다 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케이크를 굽습니다. 자, 그러면 이 그림책에서 주인공은 루루는 어떤 케이크를 구울까요?


  루루는 매우 예쁜 아이입니다만 이제껏 케이크를 한 번도 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케이크 대회가 열린다고 하니까 그저 이 대회에서 ‘1등’을 하겠다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루루는 케이크 굽기를 배우지 않아요. 책조차 살피지 않아요. 게다가 루루는 케이크에 소시지를 넣으려 하고, 반죽도 아무렇게나 양념이나 간도 아무렇게나, 굽는 시간도 아무렇게나 ……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합니다. 옆에서 동무(개)가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고 묻지만 아랑곳하지 않아요.


  루루네 집에 있는 오븐에서 나온 ‘케이크’는 차마 케이크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 됩니다. 그렇지만 루루는 이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를 들고 학교에 가요. 그러고는 이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로도 1등을 거머쥐고야 말겠다고 여깁니다.



“나는 정말, 정말 최고가 되고 싶었어!” 루루가 흐느꼈어요. “항상 이길 필요는 없어, 루루야.” 알피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우승은 중요하지 않아. 케이크를 재미있게 만들었잖니. 안 그래?” (24쪽)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못 할 만할까요? 처음에는 누구나 낯설어서 서툴기 마련입니다. 어른도 처음부터 칼질을 잘 하지 않아요. 손가락을 베기도 하면서 꾸준히 칼질을 하기에 채썰기를 잘 해내고 이모저모 밥을 잘 지을 수 있습니다. 아이도 차근차근 칼질을 익히고 반죽하기를 익히면서 이모저모 재미나게 밥살림을 가꿀 수 있습니다.


  글씨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어요. 연필 쥐기부터 찬찬히 익히고 손가락에 힘을 붙이면서 비로소 글씨가 하나 태어납니다. 이 글씨를 자꾸자꾸 가다듬으면서 글꼴이 자리를 잡고, 어느덧 내 마음을 고이 드러내는 글을 쓸 수 있어요.


  아이들하고 함께 살면서 이 같은 살림을 하나씩 돌아봅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못 하는 아이들은 어버이랑 함께 살면서 하나씩 배우고, 하나씩 익혀서, 차근차근 자라요.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익히며, 글씨를 배우고, 호미질이나 젓가락질을 익힙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수없이 넘어지거나 틀리거나 어긋납니다. 그런데 넘어지거나 틀리거나 어긋나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걷다가 넘어지면서 웃고, 글씨를 쓰다가 틀리며 웃습니다. 반죽을 하다가 튀어서 웃고, 젓가락으로 집다가 흘려서 웃어요.



루루는 모두가 자신의 춤을 바라보느라 자리를 비켜 주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모두들 루루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루루는 살랑살랑 꼬리마을에서 제일 춤을 잘 춰!” (28∼29쪽)




  그림책 《내가 케이크 왕이야》로 돌아가 보면, 이 그림책에 나오는 루루는 케이크 대회에서 1등으로 뽑히지 못해 몹시 서운해 합니다. 그런데 케이크 대회를 마치고 마을잔치가 벌어지는데, 이 마을잔치에서 루루는 신나게 춤을 춰요. 즐거운 노랫가락이 흐를 적에 루루는 저절로 몸이 움직이면서 아주 멋지게 춤을 춥니다. 이때에 살랑살랑 꼬리마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루루가 춤을 몹시 잘 추기 때문에 ‘루루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어요. 루루는 그저 노랫가락이랑 춤사위에 흠뻑 빠져들면서 신나게 춤을 추었고,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루루를 추켜세우면서 이 마을에서 춤을 가장 잘 춘다고 얘기합니다.


  케이크 대회에서 1등으로 뽑히지 못한 루루는 어느새 마음이 풀어집니다. 다시 홀가분하면서 씩씩한 마음이 되어요. 이리하여 루루는 동무들더러 저희 집에 가서 케이크를 함께 먹자고 말하지요. 그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를 말이지요. 동무들은 차마 그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를 먹겠다는 엄두를 못 내지만, 그래도 루루네 집에 함께 갑니다. 루루가 밥상에 차린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를 입에 대 봅니다.


  그런데 웬걸요, 생김새로는 볼품없던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인데 맛은 훌륭하다는군요. 루루는 온갖 것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를 구웠지만 맛만큼은 아주 훌륭한 ‘새 주전부리’를 빚은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밥을 지을 적에는 밥상에 차린 것이 없어도 맛이 아주 좋아요. 아마 그러한 얼거리하고 같으리라 느낍니다. 기쁘게 지은 밥을 기쁘게 먹고, 기쁘게 짓는 살림으로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하고 기쁜 하루를 누립니다. 4349.1.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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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지음, 이상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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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6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은?

― 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글

 이상화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15.12.12.18. 13000원



  1990년에 미국에서 “The Practice of the Wild”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을 한국말로 옮긴 《야생의 실천》(문학동네,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에 《야성의 삶》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 있습니다.


  ‘야성(野性)’이라는 한자말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뜻하고, ‘야생(野生)’이라는 한자말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합니다.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책에 붙은 ‘야생’은 ‘야생마·야생화’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말로 ‘들말·들꽃’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야생이란 ‘들’을 나타내는 셈이고, 야성이란 들 같은 숨결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지난날에 함석헌 님은 ‘들사람’을 말한 적이 있어요. ‘들사람’이란 바로 ‘야생인’이라 할 테고, 이는 야성으로 살거나 야생인 삶이라 할 테지요.



‘자연’이라는 말 자체는 위협적인 말이 아니지만, ‘야생’의 개념은 문명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나 똑같이 종종 제멋대로임, 무질서, 푹력과 연결됩니다. (29쪽)


야생지의 문화들은 자급자족 경제가 가르쳐 주는 삶과 죽음의 교훈에 맞춰 삽니다. 그러나 지금 ‘야생적인’이라든지 ‘자연’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32쪽)



  우리는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는 사람일까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예부터 지구별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었지 싶습니다. 들에서 난 목숨은 들에서 자라는 목숨(풀, 열매)을 먹어요. 들에서 자라던 목숨은 들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됩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돌고 돕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새로 깨어나고 새로 살다가 새로운 들이 되어요. ‘논밭’이란 ‘들’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고, 들판이나 들녘 같은 말은 우리 스스로 먼 옛날부터 누구나 들사람이었다는 대목을 넌지시 비추지 싶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 사회는 물질문명이 넘치면서 도시가 커집니다. 고작 서른 해나 쉰 해 앞서만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에서 나고 자라다가 들로 돌아갔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이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어요. 이제 오늘날 지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들을 볼 겨를이 없고 들길을 걸을 틈도 없으며 들내음을 맡을 말미조차 얻기 힘들어요.


  참말 오늘날 사회에서는 들바람을 쐬기가 어렵기에 어떻게든 틈을 내어 ‘올레 걷기’처럼 스스로 온몸을 맡기면서 숲이나 들을 걸으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시 사회나 문명 사회에서 버티기 어려울 테니까요.



학교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목적은 우리를 얼마 안 되는 언어행동 영역의 울 안에 가두고 몇 가지 선호하는 특징들만을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직업을 구하거나 파티석상에서 사회적 신용을 주는 데나 도움이 될 문화적으로 한정된 엘리트 형식들인 것이지요. (51쪽)


걷는 일은 굉장한 모험이며 최초의 명상이며 인간에게는 으뜸가는 진심과 영혼의 실천입니다. (52쪽)



  《야생의 실천》을 쓴 게리 스나이더 님은 이 책을 빌어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을 찬찬히 짚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지어서 살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도시에서 문명 사회로 스며들어 일자리를 찾거나 문화를 누리는 데에 얽매이도록 하려는 뜻으로 학교에서 말을 가르친다고 이야기해요.


  그러고 보면, 교과서에서 다루는 말이나 사회에서 쓰는 말은 ‘도시에서 지내기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교과서를 비롯해서 수많은 인문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흐르는 말도 ‘도시에서 문화를 누리기에 어울리는 말’이에요.


  참말로 교과서나 인문책에는 농사짓기하고 얽힌 말이 나오지 않아요. 고기잡이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아요.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살림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골말뿐 아니라,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를 두루 아우르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풀이나 꽃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도 나오지 않고, 방아나 절구나 베틀이나 물레나 빨래나 낫이나 호미 같은 말도 교과서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말이거나 박물관에 갇힌 말이기 일쑤예요.



모든 전통 문화에는 춤이 있습니다. 춤을 공부하러 올 때 젊은이들은 그들의 비길 데 없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힘을 함께 가져옵니다. (110쪽)


신성한 산과 그 산으로의 순례는 아시아에서는 깊이 자리잡은 민중종교의 특징입니다. (198쪽)



  ‘걷기’가 대단한 모힘이며 명상이고 실천이라고 밝히는 게리 스나이더 님은 지구별 모든 곳에서 오래도록 이어온 삶에서는 ‘춤’이라고 하는 기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거룩한 산’을 이야기해요.


  춤이란 무엇일까요?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이 궁둥이만 흔드는 몸짓이 춤일까요? 산이란 어디일까요? 온갖 장비와 옷을 갖춘 뒤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데가 산일까요?


  어떤 틀이 있어서 그 틀에만 맞추어야 하는 춤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기는 춤을 보면 그야말로 몸 가는 대로 손이며 발이며 뻗고 활짝 웃어요. 남 눈치를 보면서 춤을 추는 아이는 없어요. 그야말로 신나고 즐겁게 춤을 춥니다.


  산이라고 하는 곳은 ‘산’일 뿐 아니라 ‘숲’입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데를 놓고 ‘거룩한 산’이라 하지 않아요.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곱게 드리운 숲일 때에 비로소 산다운 산이에요. 숲짐승이 있고 숲바람이 부는 고즈넉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곳이 바로 아름다운 숲이면서 산입니다.



오늘날 지중해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잿빛 암산이 한때는 작은 숲과 야생동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집중적인 파괴는 농업 유형의 한 기능이었습니다. (255쪽)


딸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딸기는 새와 곰을 유혹해서 기꺼이 먹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만 또한 답례이기도 합니다. 열매의 씨앗이 그들에게 실려 멀리 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315쪽)



  《야생의 실천》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차분히 되새깁니다. 오늘 우리가 얻은 것이라면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자가용과 고속도로과 텔레비전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잃은 것이라면 자급자족과 두레와 품앗이와 마을과 사랑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돈을 벌고 쓰는 살림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장과 자격증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집에서 어버이가 사랑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도시라고 하는 문명 사회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골과 숲과 산과 들이라고 하는 터전과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커다란 정신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동물과 인간은 모두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곳을 통과한 자는 남을 치유하고 도와줄 힘을 갖게 됩니다. (320쪽)


우리 문화가 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현실의 일을 함께하고, 혹은 놀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문제를 일으킬 때, 또는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거나 태어날 때, 혹은 추수감사절 같은 모임에서입니다. (347쪽)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시골에서 살며 이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이나 학원 어느 곳에도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 집이 고운 보금자리가 되면서 즐거운 삶터가 되고 앞으로는 너른 숲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아이들이랑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졸업장을 따기보다는 말다운 말을 삶에서 배우기를 바라면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요. 아이들이 문명인이나 사회인이 되기보다는 슬기로운 어른이 되고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집에서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에 앞서 나부터 들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숲사람으로 거듭나려는 꿈으로 사는 셈입니다. 나도 아이도 함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고운 들사람으로 거듭나고 예쁜 시골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며 슬기로운 숲사람으로 살림을 가꾸려는 꿈을 키웁니다.


  “야생의 실천”이란 “들을 살다”를 가리키지 싶습니다. 들내음을 맡고 들바람을 마시면서 들꽃을 마음밭에서 피울 수 있는 살림일 때에 “들을 살다”라 말할 수 있지 싶습니다. 손수 흙을 일구고 손수 씨앗을 심어서 손수 살림을 짓는 하루를 누릴 적에 바야흐로 “들을 살다”라 말하면서 가없는 기쁨으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지 싶어요. 내 넋이 ‘들넋’이 되기를 빕니다. 내 손길이 ‘들결’ 같은 사랑이 되기를 빕니다. 내 몸짓이 ‘들춤’처럼 흐드러지기를 빕니다. 4349.1.1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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