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친구야 즐거운 유치원 1
나카가와 히로타카 지음, 하세가와 요시후미 그림, 이정원 옮김 / 보물상자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9



오늘부터 동무라면 우리 함께 웃어야지

― 오늘부터 친구야

 나카가와 히로타카 글

 하세가와 요시후미 그림

 이정원 옮김

 보물상자 펴냄, 2009.7.30. 8500원



  나카가와 히로타카 님이 글을 쓰고, 하세가와 요시후미 님이 그림을 그린 《오늘부터 친구야》(보물상자,2009)를 찬찬히 읽습니다. 더없이 상냥하구나 싶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유치원에서 ‘언니가 된’ 아이들이 ‘새로 유치원에 들어오는 동생’을 기쁘게 맞이하는 이야기가 조곤조곤 흘러요. 유치원이라는 데에 처음 발을 들이는 아이들은 모두 낯설 텐데, 유치원 언니들은 동생들을 헤아리면서 재미난 공연도 하고, 유치원 시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서로 사이좋게 노는 길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치원 언니가 부르는 노래를 헤아리다 보면 살짝 웃음이 납니다. “우리가 언니 오빠지만 절대 괴롭히지 않을 거야” 하고 부르는 노래란, 웬만한 여느 유치원 언니 오빠는 동생을 ‘(잘) 괴롭힌다’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새 친구들이 왔어요. 반갑게 맞이해 줘요. (2쪽)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나 유치원 바깥에서나 모두 동무입니다. 즐겁게 어우러지는 동무입니다. 함께 놀 뿐 아니라, 서로 아끼거나 보살피는 동무예요. 힘이 여린 아이가 있으면 기꺼이 힘을 내어 도울 줄 알지요. 걸음이 느린 아이가 있으면 이 아이한테 맞추어 천천히 걸을 줄 알고요. 셈이 더딘 아이가 있으면 차근차근 셈하기를 일러 줄 뿐 아니라, 나긋나긋 부드러이 말을 해 줄 줄 알아요.


  오늘은 유치원에서 어우러지는 동무라면, 앞으로는 학교에서 얼크러질 동무입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사회에서 만나면 오래도록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꿈을 가꾸고 함께 살림을 짓는 동무입니다.




“우리 악수하자. 오늘부터 우린 친구야. 우리가 언니 오빠지만 절대로 괴롭히지 않을 거야. 큰 소리로 같이 웃자. 오늘부터 우린 친구니까.” (7쪽)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도 않습니다. 우리 집은 보금자리이면서 학교이고 살림터이자 도서관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집에서 배우고, 집에서 놀며, 집에서 서로 어우러져요. 두 아이는 툭탁거릴 때도 곧잘 있지만, 툭탁거릴 때보다 서로 아끼면서 노는 겨를이 훨씬 길어요. 아니, 하루를 통틀어서 살피면 툭탁거리는 겨를은 하루에 2∼3분조차 안 되지 싶고, 온 하루를 그야말로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놉니다.


  아이들이 툭탁거린다면 어느 한쪽이 어떤 놀이를 잘 못 한다든지, 달리기가 느리다든지, 뭔가 다른 아이보다 처진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나이나 몸집이나 힘에 따라서 다 다르기 마련이지만, 이런 모습을 맞대어서 견주면 틀림없이 어느 한쪽은 풀이 죽어요. 풀이 죽으면서 시샘을 할 수 있고, 동무를 풀 죽게 하면서 우쭐거릴 수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다투거나 괴롭히는 몸짓이 되는구나 싶어요.




“어어, 친구끼리 싸우면 안 돼. 그네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순서대로 타야지. 이걸 맞히는 사람부터 타는 거다. 자, 어느 손에 구슬이 들었게?” (19쪽)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라면 어느 한길을 서로 아끼면서 찬찬히 나아가려는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어깨를 겯고 노는 동무라면 혼자서만 재미있게 놀려 하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놀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 사이에서도 이와 같아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라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더 갖춘 사람은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덜 갖춘 사람한테 따사로이 손을 내밀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동무이니까요. 아이들만 놀이를 함께 누리는 동무가 아니라, 어른들도 일을 함께 하고 살림을 함께 짓는 동무예요. 아이들만 유치원에서 동무로 지낼 삶이 아니라, 어른들도 사회와 마을에서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은 동무로 지낼 삶이라고 느껴요.


  그림책 《오늘부터 친구야》는 바로 이러한 대목을 아이들한테 넌지시 일깨워 주려 하지 싶어요. 어릴 적부터 서로 동무로 삼으면서 즐겁게 지내는 마음을 기르며 자라면,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서로 도울 때에 즐거운가 하는 대목을 스스로 알아차릴 테니까요.




“봐, 금방 양보해 주잖아. 먼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리 와. 이제 네 차례야. 형아가 밀어 줄게.” (23쪽)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는 하나뿐인데 두어 아이들이 서로 먼저 놀겠다고 아웅다웅을 하면 서로 하나도 못 놀 뿐 아니라,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차례를 세워서 지켜야 하지 않아요. 함께 즐거울 길을 찾아야지요. 가위바위보를 해 볼 수 있고, 한 아이가 이 놀이를 하면 다른 아이는 저 놀이를 할 수 있어요. 아이들끼리 이러한 대목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저마다 새로운 놀이를 즐기면서 빙글빙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두 아이 사이에서 하나를 놓고 다툼이 생기면, 누가 옳으네 그르네 하고 따진들 부질없을 뿐 아니라 두 아이 사이에 골이 깊어질 뿐입니다. 새로운 놀잇감을 떠오르게 하고, 새롭게 재미난 놀이를 보여주면, 두 아이는 어느새 ‘내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던 마음이 스르르 풀려서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놀이를 알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기에 다툼이 생기지 싶어요.


  오늘부터 동무라면, 오늘부터 서로 동무로 하기로 했다면, 우리는 서로 빙그레 웃는 사이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하는 길을 생각하기로 하기에 동무가 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유치원에 안 다니는 아이들도 모두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안 다니는 아이들이나 서로서로 아끼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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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5
히구라시 키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95



어떻게 하면 서로 곁님 마음을 읽을까

―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5

 히구라시 키노코 글·그림

 최미정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12.31. 5000원



  시골은 도시와 사뭇 달라서 해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캄캄합니다. 요새는 마을마다 등불을 곳곳에 세워 주기는 하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자리가 훨씬 넓습니다. 시골은 모름지기 밤에 어두워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마당이나 집 둘레를 밝히지 않습니다. 밤에는 풀도 나무도 꽃도 모두 자야 하니, 마을도 집도 밤에는 고요하게 잠듭니다.


  이런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밤에 손전등을 들면서 놀고 싶습니다. 캄캄한 밤에도 씩씩하게 별바라기를 하면서 놀기도 하지만, 손전등으로 비추면서 새로운 모습을 느끼는 놀이도 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손전등 놀이를 하면 건전지가 빨리 닳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건전지 닳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재미있게 놀이를 합니다. 건전지 걱정을 하는 사람은 오직 어른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밤에 마당이나 잠자리에서 등불 놀이를 하고픈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옛날을 아스라이 떠올립니다. 나도 이 아이들만 한 나이에 손전등으로 밤놀이를 하고 싶었어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서 ‘손전등 밥 닳는다’는 걱정이나 꾸중을 들으면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손전등을 켰지요. 불빛을 받은 이불 속은 낮에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새로운 빛깔이고 빛결입니다. 이런 모습을 느끼고 싶으니 걱정이나 꾸중을 아무리 들어도 손전등 놀이를 합니다.



‘이젠 부모님 마음을 충분히 알겠어. 마음은 아직 어린이와 어른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사회나 인간관계에 얽히며 겨우 어른이란 걸 자각하지만, 금전 감각은 완전히 어른이 됐구나.’ (17∼18쪽)


‘앞으로도 지금 내가 상상조차 못 할 내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접어두고, 그저 즐겁게 기다리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 (24쪽)



  히구라시 키노코 님이 빚은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대원씨아이,2015)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2013년 11월에 첫째 권이 한국말로 나온 지 이태 만인 2015년 12월에 다섯째 권이 나오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이 만화책은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사이가 ‘함께 사는 두 사람’으로 거듭나는 열네 해 이야기를 짤막하게 간추려서 들려줍니다. 그저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때에는 서로 어떤 마음인지 읽으려 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함께 사는 두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동안에는 서로 어떤 마음인지 읽으려 애씁니다.


  어버이가 아이 마음을 읽거나 느끼듯이, 어버이가 저마다 제 어릴 적 모습을 되새기면서 오늘 이곳에서 마주하는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거나 살피듯이,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에 나오는 사내와 가시내는 아주 천천히 서로서로 마음을 읽고 느끼면서 한집살이를 이룹니다.



‘한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이런 날도 길고 긴 연표 위를 걷는 것에 불과하겠지.’ (40쪽)


‘나는 지금 나 이외의 무언가를 책임져서 나를 성장시키고 싶은 거구나.’ (59쪽)



  마음읽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마음읽기는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을까요? 뭐,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울 텐데, 참말 마음읽기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겉으로 스치면서 지내는 하루라면 마음을 도무지 못 읽을 테고, 속으로 아끼면서 사랑하는 삶이라면 마음을 찬찬히 읽을 테지요.


  말을 해야 마음을 알기도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느낍니다. 아니, 말을 할 적에는 마음을 열어서 서로 나누고, 말을 하지 않을 적에는 마음이 고이 흐르면서 서로 느낍니다. 마음으로 아는 마음이 있고, 마음으로 느끼는 마음이 있다고 할까요.



‘날 위해서도 아니고, 리츠코를 위해서도 아닌, 우리의 미래를 위해.’ (102∼103쪽)


‘리츠코 마음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된다면 지금까지처럼 갑자기 화내거나 갑자기 울리는 일도 없었겠지.’ (141쪽)



  두 사람 사이가 한낱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무렵에는 마음읽기는 거의 생각조차 안 하다 보니, 이때에는 다투는 일도 잦았을 뿐 아니라 서로 마음에 송곳을 찍듯이 생채기를 내는 일마저 있습니다. ‘먹고 자는’ 사이로만 머물 수 없다고 여기면서 ‘함께 사는 두 사람’이 되는 길을 걷는 사이 어느덧 다툼은 잦아듭니다. 다만 아예 사라지지는 않고 다툼이 줄어요. 다툼이 줄면서 이야기가 늘고, 이야기가 느는 동안 어느새 스스럼없이 마음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딱히 마음을 말로 털어놓지 않아도 느낌으로 헤아립니다. 함께 있어서 즐거운 나날을 누리고, 함께 있기에 새롭게 가꾸는 살림을 깨달아요.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에서는 “우리 앞날”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얘기가 흐릅니다. 어느 한 사람을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길이라는 대목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길이라면, 이러한 길이 바로 “우리 앞날”이라면, 참말 이러한 길은 참답게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되리라 느껴요. 한쪽으로 치우친 길이 아니기에 사랑이요, 한쪽을 그냥 한쪽이 아니라 곁에 있는 님, 곧 ‘곁님’으로 느끼는 길이라고 할까요.


  곁이 있는 아름다운 숨결이기에 곁님이 됩니다. 그리고, 곁에 있으면서 서로 따사로이 보살피고 지켜 주는 사이가 된다면 곁지기가 되어요. 곁에 있는 사랑인 만큼 곁사랑일 테고, 곁에 있는 너른 꿈이라면 곁꿈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진심으로 느낀다. 리츠코와 부부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156∼157쪽)


‘아, 그렇구나. 어쩌면 부부야말로 어떤 의미로 궁극적인 남녀의 우정이 아닐까?’ (180쪽)



  사내와 가시내 사이가 되든, 사내와 사내 사이가 되든, 가시내와 가시내 사이가 되든, 마음으로 아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깨동무나 우정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아끼지 못한다면 어깨동무도 우정도 아닐 테고, 마음으로 아끼지 못할 적에는 ‘함께 사는 두 사람’이 아니라 ‘먹고 자는 두 사람’이기만 할 테지요.


  겉으로 드러내는 몸짓도 뜻이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함께 사는 사이라면 겉치레가 아닌 즐거운 몸짓이 되어 마음으로 포근히 안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겉모습이나 생김새를 아예 안 쳐다볼 수 없다고 합니다만, 함께 삶을 지으면서 나아갈 사이라면 겉모습보다는 속마음을 곱게 가꾸면서 활짝 웃는 살림을 지어야지 싶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사내와 가시내가, 또 수많은 짝꿍하고 동무가, 따사로운 숨결로 거듭나는 하루를 지으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곁님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상냥한 손길로 서로 어루만지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책을 이제 고요히 덮습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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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6-01-14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책이 마음에 안 들면 안 읽으면 됩니다.
여기에 악플 달 겨를이 있으면
그대가 좋아하는 만화를 읽기 바랍니다.
괜히 엉뚱한 곳에 와서 악플 달지 마셔요.
 
내 인생의 알파벳 두근두근 어린이 성장 동화 4
배리 존스버그 지음, 정철우 옮김 / 분홍고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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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8



학교가 아닌, 삶을 배워야 할 아이

― 내 인생의 알파벳

 배리 존스버그 글

 정철우 옮김

 분홍고래 펴냄, 2015.12.10. 12000원



  자그마한 우리 집에서는 네 식구가 한 방에서 함께 잡니다. 옛날에는 이 자그마한 집에서 예닐곱 사람도 살고 열 몇 사람도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옛날에는 집에서만 지내지 않고 집 바깥에서 일하거나 놀다가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무렵 바글바글 이 자그마한 집에 모여서 잠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집에서 넷이 모여서 자면 밤이 한결 따스하기는 하되, 두 아이는 언제나 나한테 달라붙습니다. 자다가 발로 차든, 자다가 손을 휘두르든, 이 아이들은 마음껏 뒹굽니다. 차다가 썰렁하거나 춥다 싶으면 누군가 이불을 걷어찼기 때문이고, 자다가 무겁거나 아프다면 누군가(큰아이나 작은아이) 나를 걷어찼거나 몸뚱이를 내 몸에 얹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던 때에는 밤새 기저귀를 갈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한창 무럭무럭 자라는 요즈막에는 밤새 이불깃을 여미어 준다든지 잠자리를 다시 챙긴다든지 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똑바로 누이고 이불깃을 새로 여민 뒤에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볼을 토닥이면 모든 시름이 사라져요. 이 어여쁜 아이들하고 누리는 하루가 더없이 고마우면서 기쁘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아빠의 근육은 주로 경직돼 있고 눈은 슬퍼 보인다. 동물 학대 방지 광고에 나오는 학대받는 강아지들 같다. 학대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듯 인생의 참혹함에 단념한 눈빛 말이다. 하지만 비행기……. 비행기를 날릴 때만큼은 근육은 긴장을 풀고 눈은 부드러워진다.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24쪽)


“펌프킨 너는 너만의 노래를 부르고 너만의 춤을 춘다는 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봐. 그거 알아? 삼촌은 가끔 우리 모두가 너처럼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44쪽)



  배리 존스버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내 인생의 알파벳》(분홍고래,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문학에 넣을 수 있을 테지만 청소년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함께 즐길 만한 문학이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둔 어버이도 기꺼이 누릴 만한 문학입니다.


  《내 인생의 알파벳》은 알파벳으로 a부터 z까지 이야기를 잇습니다. 학교에서 내 준 글쓰기 숙제를 하려는 아이는 ‘알파벳 하나’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쓰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알파벳 하나에 이야기 한 가지를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합니다.


  이 아이는 왜 고개를 갸우뚱해 할까요? 다른 아이들은 글쓰기 숙제가 지겹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 아이로서는 ‘고작 한 가지 이야기’만 쓸 수 없다고 여깁니다. 알파벳 하나로 여는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이 될 만하다고 여겨요.



우리 아기는 분명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고 내 눈 속에서 뭔가를 봤다. 아기 눈은 연한 파란색이었지만 그 속에 다른 색들도 있었다. 나는 깊이를 모르는 눈을 들여다보았고, 아기의 시선 뒤에는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하늘 속을 들여다보면서 스카이(하늘)가 아기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61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한테는 두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캔디스’이고, 다른 하나는 ‘펌프킨’입니다. ‘펌프킨’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큰아버지 셋만 쓰는 이름인데, 아이를 사랑스레 부를 적에만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합니다. ‘캔디스’는 어버이 스스로 차분해질 적에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가 저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를 잘 압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이름으로 저를 부르더라도, 이름 때문이 아니라 어버이 마음에 따라서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대목도 잘 압니다. 두 어버이와 큰아버지는 아이 앞에서 이녁 마음을 숨기거나 감추려 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는 이 책에서만이 아니리라 느껴요.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들은 어버이 마음을 잘 느끼고 살피며 헤아리리라 봅니다. 다만, 아이들이 모르는 척할 뿐이겠지요.


  입으로 읊는 말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종이에 적은 글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말’이 아니라 ‘결’로 알아챕니다. 아무리 겉으로 듣기에 부드러운 말씨라 하더라도 사랑이 깃든 말인지 아닌지 결로 다 알아채요. 어린이와 푸름이도 말투나 말씨가 아니라 ‘말결’로 속내를 환하게 알아챕니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교육정책을 해마다 새로 내놓는다고 하는데, 나라에서 내놓는 교육정책은 막상 이 나라 어린이나 푸름이를 헤아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제껏 나온 교육정책 가운데 입시지옥을 떨칠 만한 정책은 아직 나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나온 교육정책은 모두 입시정책을 어떻게 손질하느냐 하는 대목만 살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목을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압니다.



“고맙습니다. 그건 냉장고에 넣을게요.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리던가요. 전자레인지 말고 음식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만든 음식을 드세요.” “왜지?”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밤 11시까지 여기 있을 것이고 잠발라야는 냄비 바닥에 까맣게 눌러 붙을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제가 엄마를 위해 특별 음식을 만들었어요.” (113쪽)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제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구태여 학교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거나 학교를 얌전히 다니는 까닭은, ‘아이가 학교에 다닐 적에 어버이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나가 주어야 어버이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대목을 아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보육시설 품에서 커야 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저마다 제 어버이가 어떤 삶인지 다 알기에 모두 받아들여 줍니다. 제 어버이가 얼마나 바쁜가를 잘 알기에, 아이들은 느긋하게 제 어버이를 품어 주어요.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바깥일을 줄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살짝이나마 헤아린다면, 바깥일을 줄이기 어렵더라도 집에서 아이하고 살갑고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한때를 날마다 기쁘게 누리리라 봅니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화목했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버스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요’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곤 했다 … 그 시절의 아빠는 다른 운전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147쪽)


나는 부두에서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정말 축축했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매우 차갑기는 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현명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돌처럼 가라앉았고, 기다렸다. 구조든 죽음이든 먼저 오는 것을 기다렸다. (154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 펌프킨 또는 캔디스는 제 생일잔치를 하는 날에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이 아이 어버이는 큰아버지하고 사이가 대단히 나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나쁜 사이는 아니었으나 ‘자존심하고 돈’ 때문에 사이가 갈려서 말도 안 섞고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다고 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하고 큰아버지 사이를 마음껏 오갑니다. 이러면서 두 어른한테 찬찬히 묻습니다. 왜 두 사람(또는 세 사람)이 말도 안 섞고 다투기만 하느냐 하고. 한쪽(아이 어버이)은 아뭇소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다른 한쪽은 한숨만 폭 쉽니다. 아이는 두 집안 어른(모두 세 사람)이 모두 못마땅합니다. 더군다나 갓난쟁이일 적에 갑자기 저승으로 가고 만 어린 동생 때문에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한집에서도 거의 따로 살듯이 지냅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대목을 얼마나 살필까요? 어른들은 작은아이(어린 동생)가 너무 일찍 죽은 일 때문에 슬픔에 잠긴 채 여러 해를 바보처럼 사는데, 이동안 큰아이(오늘 살아서 코앞에 있는 아이, 이 책에서는 펌프킨/캔디스)도 얼마나 괴롭고 아픈가를 어느 만큼 헤아릴까요?


  집에서 사랑도 눈길도 못 받는 아이는 ‘살았어도 죽은 삶과 같다’고 여깁니다.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다가, ‘고향 별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날마다 높은 나뭇가지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동무를 보고는, 이 동무한테서 ‘배워서’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어 보기로 합니다. 제 생일잔치를 일부러 큰아버지 요트에서 치르기로 하면서 제 어머니하고 아버지를 억지로 큰아버지 요트로 이끌고 오다가 바닷물로 뛰어들면 ‘내(아이)가 죽든, 두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바닷물로 뛰어들어서 나를 살리면서 서로 앙금을 풀든’ 하리라 여겨요.



“아빠, 왜 계속 비행기만 쳐다봐야 해요?”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캔디스. 비행기를 보지 않으면 조종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날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그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행기가 괴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185쪽)



  《내 인생의 알파벳》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책 이야기를 이끄는 아이를 낳은 두 어버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만 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면서 늘 함께 지낸다고 할 적에도 이처럼 ‘아이 삶에 눈길을 못 두는’ 바보스러운 몸짓이었을까요? 아이 아버지는 혼자서 무선비행기를 하늘에 날리면서 ‘짜증풀이’를 한다지만, 아이는 무엇으로 짜증풀이를 할 만할까요?


  두 어버이가 한쪽은 무선비행기만 쳐다보고 다른 한쪽은 방구석만 쳐다본다면, 아이는 도무지 어디를 쳐다보아야 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두 어버이가 서로 ‘아픔에 짓눌린 삶’에 허덕인다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캔디스?” “사랑이요?” 내가 제안했다. “그리고 새로운 원격 조종 비행기요?” “휴가. 휴가를 가지면 우리 가족이 훨씬 좋아질 거야.” (193쪽)



  아이는 모두 압니다. 아이는 모두 알면서 기다립니다. 아이 어버이는 아직 모릅니다. 아이 어버이도 틀림없이 알리라 여기지만, 아이 어버이는 아직 스스로 깨닫거나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 못합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아이는 참으로 슬기롭지요. 한집안이 새롭게 일어서려 할 적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아이가 말하듯이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휴가’가 아니라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라면,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그냥 학교에만 맡길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 아이하고 ‘학교에서 겪거나 느끼거나 한 이야기’를 집에서 도란도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다른 어른(교사)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도맡도록 하지만 말고, 집에서도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삶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교과서만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삶을 배워야 하고, 집에서 어버이 몸짓과 말결마다 흐르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랑 어버이 사이에 따스한 사랑이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 마음을 어버이가 읽고, 아이 생각을 어버이가 살찌울 수 있는 슬기로운 길을 모든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따사롭고 고운 몸짓과 말결로 열 수 있기를 빕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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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2016-01-1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6-01-14 21:10   좋아요 0 | URL
틀림없이 그런 기쁜 날이 올 테고
우리가 오늘부터
새롭게 지으면 되리라 여겨요.

풍문 님 삶에
아름다운 이야기와 꿈이 고요히 흐르면서
삶을 아이와 어른이 즐거이 배우고 나누는
살림을 함께 일구어요 ^^
 
내 친구, 말하는 여우 -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감동 그림책 시리즈 1
이모토 요코 그림, 코와세 타와미 글, 프뢰벨교육연구소 옮김 / 프뢰벨행복나누기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8



동무가 된 아이와 여우 사이를 갈라놓는 어른

― 내 친구, 말하는 여우

 코와세 타마미 글

 이모토 요코 그림

 프뢰벨교육연구소 옮김

 프뢰벨행복나누기 펴냄, 2004.1.15. 8000원



  이모토 요코(いもと ようこ, 1944∼)라는 일본 그림책 작가가 있습니다. 나는 이분 그림이 어릴 적부터 익숙합니다. 어릴 적에는 이분 이름을 모르는 채 이분 그림을 둘레에서 아주 쉽게 보았습니다. 공책이나 책받침이나 책살피나 문방구 같은 데에 곧잘 이분 그림이 나왔거든요. 이와사키 치히로(いわさきちひろ, 1918∼1974) 님 그림도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보았어요. 이밖에도 일본 그림책 작가 여럿 작품은 한국에 퍽 널리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다만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까지 ‘누구 그림’인지 감춘 채 들어왔지요.


  내가 어릴 적에는 그냥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그림’이라고만 여겼고, 그저 ‘한국 어떤 그림책 작가’가 그렸겠거니 하고 여기던 그림인데,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되어 그림책을 살피다가 이모토 요코 님 작품이나 이와사키 치히로 님 작품을 ‘책으로 만나’면서 크게 놀랐습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이런 멋진 그림과 그림책을 빚은 이웃나라 사람 삶을 하나도 안 보여주었기에 나도 그저 모르는 채 살았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겁내지 마. 내가 도와줄게.” 타미는 여우에게 조심조심 다가갔어요. “커다란 가시네. 가시덤불에 걸렸었구나!” 타미는 여우 발에서 가시를 뽑아냈어요. (5쪽)



  《내 친구, 말하는 여우》(프뢰벨행복나누기,2004)는 코와세 타마미 님이 글을 쓰고, 이모토 요코 님이 그림을 그린 책입니다. 책이름에 잘 나오듯이 ‘말하는 여우’가 나오는 그림책이에요.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 ‘타미’라는 아이가 있고, 이 아이는 숲에서 혼자 놀다가 여우를 만납니다. 그런데 여우가 슬프게 울어요. 아이는 여우한테 다가갑니다. 여우가 무서워하니 여우를 달래면서 가만히 살핍니다. 이러다가 여우 발에 가시가 박힌 줄 알아채고는 살살 뽑아 줍니다.


  발에 박힌 가시가 빠진 여우는 홀가분하면서 기쁩니다. 이때 여우는 아이한테 ‘말하는 여우’ 모습을 드러내요. 아이는 여우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갈 줄 알았기에, 여우가 말을 할 적에 놀라기는 했지만 둘이 사이좋은 동무가 될 수 있으리라 느꼈어요. 이날부터 둘은 숲에서 살가운 놀이동무가 되어서 한껏 즐겁게 뛰놉니다.




다음 날, 타미는 숲 속으로 갔어요. “말하는 여우를 다시 만나면 좋을 텐데…….” 바로 그때였어요. 바스락바스락. 누군가 갑자기 덤불 속에서 툭 튀어나왔어요. (8쪽)



  그런데 말이지요, 아이랑 여우는 서로 사이좋은 동무이지만, 어른들 생각은 다릅니다. 어른들은 이 아이가 숲에서 혼잣말을 하면서 떠든다고 여깁니다. 게다가 여우라는 짐승을 제대로 만나거나 사귄 적도 없으면서 그저 여우를 나쁘게만 바라보아요. 타미네 어머니와 아버지도 타미가 더는 숲으로 못 가게 막을 뿐 아니라, 여우는 무서운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마을 어른들이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타미랑 여우가 얼마나 사이좋게 노는지 마을 어른들이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아니 마을 어른들도 숲에서 사는 수많은 짐승하고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놀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 보았다면, 참말 다를 텐데요.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 스스로 ‘아이처럼 여우하고 동무로 사귄’ 적이 없기 때문에 여우를 나쁘게 볼는지 모릅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마을 어른들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 있는 퍽 많은 어른들도 ‘여우나 여러 숲짐승을 이웃으로 여겨서 사귀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아이는 여우하고 동무가 될 수 없을까요? 어른은 여우하고 이웃이 될 수 없을까요? 우리는 누구를 동무로 여겨야 할까요? 우리한테는 누가 이웃이 될 만할까요?




마을 사람들은 타미를 점점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타미가 산마루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더라니까요!” “혹시 여우에게 홀린 게 아닐까요?” 그 소문은 타미의 엄마와 아빠에게까지 들렸어요, “타미야, 이제 숲 속에 가면 안 된다!” 엄마가 단단히 일렀어요. (15쪽)



  동무가 된 아이와 여우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어른으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마음으로 바라보며 서로 동무가 되지만, 어른들은 마음이 아닌 겉모습으로 바라보다가 이모저모 따지기 때문입니다.


  참말 눈을 가만히 감고 마주하면 ‘말하는 사람’이든 ‘말하는 여우’이든 똑같을 텐데요. 우리가 동무나 이웃을 사귈 저에 ‘눈을 감고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겉모습이나 재산이나 이런저런 것을 따지지 않을 텐데요.


  그렇잖아요. 반가운 동무는 잘생기거나 못생기지 않아요. 동무를 사귈 적에 얼굴을 볼 일이 없어요. 아니, 동무하고 사귀며 놀 적에 얼굴을 바라보기는 할 테지만, 얼굴 생김새가 잘생겼거니 못생겼거니 따지지 않아요. 우리는 얼굴 생김새로만 동무가 되거나 같이 놀지 않으니까요.


  어른들이 함께 일하는 이웃을 사귈 적에도 이와 같아요. 겉모습이나 생김새만으로 ‘함께 일할’ 수 있어요. 마음으로 믿고 기대며 아끼고 보살피고 어깨동무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일 때에 비로소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우를 잡으려고 산에 올라갔어요. 타미는 여우가 걱정이 되었어요. 타미는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산으로 올라갔어요. 타미는 말하는 여우를 찾아 헤맸어요. 그러나 말하는 여우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말하는 여우야…….” 타미는 너무나 지쳐 쓰러지고 말았어요. (26쪽)



  그림책 《내 친구, 말하는 여우》에 나오는 조그맣고 여리며 어린 아이 타미는 여우가 걱정스럽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여우 사냥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우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여우 같은 짐승은 숲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먼먼 옛날부터 숲에는 여우뿐 아니라 늑대도 이리도 삵도 범도 곰도 오소리도 너구리도 족제비도 쥐도 뱀도 잔나비도 솔개도 매도 수리도 올빼미도 소쩍새도 꾀꼬리도 박새도 할미새도 모두모두 저마다 사이좋게 어우러져서 지내는데, 사람들(아니 어른들)은 그만 사람 아닌 짐승은 숲에서 사라져야 하는 줄 여기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사람인 동무와 이웃’도 사귀지만 ‘짐승인 동무와 이웃’도 사귀는데다가 ‘풀과 꽃과 나무인 동무와 이웃’도 사귀는데, 어른들은 이 대목을 자꾸 놓치거나 잊고 말아요. 어른들 스스로 얼마 앞서까지 아이였던 줄 잊었기 때문일까요.


  포근한 마음이 흐르는 그림책을 아이들하고 함께 읽는 동안 아이들은 이 줄거리에 빠져듭니다. 나도 곁에서 이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아이랑 여우가 부디 오래도록 사이좋은 동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림책을 넘깁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여우를 비롯한 숲짐승’을 살가운 이웃으로 여길 줄 아는 슬기로운 어른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림책을 펼칩니다. 온누리 아이들 누구나 마음에 한가득 사랑을 담아서 기쁘게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어른으로 거듭나기를 꿈꾸면서, 이모토 요코 님 이쁘장한 그림책을 새삼스레 읽고 자꾸 읽어 봅니다. 4349.1.1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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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옆 탱자나무 - 한혜영 동시집 푸른사상 동시선 4
한혜영 지음 / 푸른사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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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7



할머니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조촐한 노래

― 닭장 옆 탱자나무

 한혜영 글

 푸른사상 펴냄, 2012.3.25. 9000원



  할머니 한혜영 님은 동시도 쓰고 동화도 씁니다. 이러한 글은 어린이문학을 하려는 글이기 앞서 이녁 손주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 이녁 손주가 스스로 손에 쥘 첫째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서 들려주려는 이야기예요.


  동시를 쓰는 할머니는 이녁 손주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까요? 동시를 쓰는 할머니는 이녁 손주를 낳아서 돌보는 이녁 딸아들이나 며느리나 사위한테 어떤 이야기를 물려주고 싶을까요? 아무래도 사랑을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을 테지요? 무엇보다 사랑을 차근차근 물려주고 싶을 테지요?


  옛날부터 내려오고 옛적부터 흘러온 이야기는 모두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녁 손주한테 물려주고픈 가장 슬기롭고 따사로운 사랑이리라 생각합니다. 재산이나 학력이나 이름값이 아니라,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랑을 물려주고 싶으리라 생각해요.



바람 한 차례 옥상으로 불어오자 / 블라우스와 와이셔츠 / 큰 빨래들은 / 어미 두루미처럼 날개를 활짝 펼쳤다. (빨래)


늦잠 자는 / 씨앗은 일어나라고 // 은지팡이로 / 토독! / 톡! / 톡톡! // 두들기며 비 옵니다 (봄비)



  아침에 잠을 깨는 아이들은 언제나 빙긋빙긋 웃으면서 나한테 다가옵니다. 저녁에 잠들기까지 이 아이들은 언제나 내 둘레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한테 달라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놀자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움직이자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몸짓을 지켜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말씨를 헤아립니다.


  빙긋빙긋 웃는 아이한테 나도 웃음을 짓습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놀자 하는 아이들한테 나도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밉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한 가지는 언제나 놀이입니다. 다만 억지스럽거나 고단한 놀이는 아닙니다. 학습 놀이나 체험 놀이를 바라지 않습니다. 교육 놀이라든지 사회 놀이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늘 따사로운 사랑으로 놀자고 웃음으로 말을 겁니다. 아이들은 늘 즐거운 사랑으로 놀자면서 노래하듯이 말을 해요. 이때에 어버이는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저 그대로 놀 수 있어요. 다음으로, 바쁘거나 다른 할 일이 있다면서 같이 안 놀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종이는 / 이제 막 한글을 배우는 / 꼬맹이의 삐뚤빼뚤한 / 이름을 받아 적는 종이다. (종이)


곰이랑 사자가 사람을 만났을 때 / 발톱부터 세우는 건 말이 안 통해서 그럴 거다 // 영어, 일어, 불어, 한문 학원 같은 / 간판 사이에 동물의 말을 가르쳐준다는 / 간판도 하나쯤 끼어 있으면 (이런 학원 어디에 없나요?)



  동시집 《닭장 옆 탱자나무》에 흐르는 이야기는 두 갈래로 살필 만합니다. 첫째는 할머니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포근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아이가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 안팎에서 겪거나 부대끼는 삶을 놓고 사랑으로 마주하자고 손짓하는 이야기예요.


  바람이 불어 빨래를 날리고, 비가 내리며 새싹이 자라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그리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해님이 움직이면서 그림자가 져요. 벌이나 나비가 집이나 교실로 들어왔다가 나가지요. 이를 모두 포근한 사랑이라는 눈길로 바라보면서 아이한테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으면, 아이는 제 이웃하고 동무를 따사로우면서 너그러운 몸짓으로 맞아들이는 슬기를 배워요.


  학원으로 바쁘거나 공부로 힘들다면, 바쁘거나 힘든 아이들을 북돋울 만한 이야기를 짓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열면서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 나라를, 너른 지구별을, 가없는 우주를 고이 품에 안을 수 있도록 생각을 여는 이야기를 짓습니다.



강이 아프단다. / 암처럼 딱딱한 / 시멘트 덩어리가 / 가슴께서 만져진단다. (아픈 강)


바람은 보이지 않으니까 소리를 내는 거야 / 안 그러면 제가 찾아온 걸 아무도 모르잖아 (바람은 소리를 좋아해)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아이들을 이끌고 들길을 걸어 봅니다. 한겨울이기에 찬바람을 함께 맞으면서 겨울이란 어떤 철인가 하는 대목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바람이 차니 아이들이 봄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포근한 한겨울에 아이들하고 마당에서 달리면서 함께 땀을 흘립니다. 바람이 안 불어 포근한 날씨이니 아이들은 겨울이 왜 이리 덥냐고 묻습니다.


  별빛으로 가득한 한밤에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 서서 별바라기를 하다가 서로 손을 맞잡고 삼십 분 남짓 밤마실을 합니다. 아버지 손을 꼬옥 잡고 별바라기 밤마실을 하는 동안 풀섶에서 마른 잎을 헤치는 들쥐 소리를 듣고, 족제비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멧비둘기가 자다가 우리 발자국을 듣고 깜짝 놀라 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손을 꼬옥 잡고 걷는 아버지가 있어서 밤소리를 들으면서도 재미나게 놀 수 있습니다.



손가락 까딱하는 것까지도 따라하는 / 그림자 때문에 / 청년은 결국 도둑질을 포기했대요 // 제 그림자가 빤히 지켜보는데 / 어떻게 도둑질을 할 수가 있겠어요? (무서운 그림자)



  할머니는 조촐하게 이야기를 엮어서 동시집 《닭장 옆 탱자나무》에 담습니다.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다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시집에 담습니다. 그림자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대목을 넌지시 알려주려고 동시를 살그마니 씁니다. 벌레 한 마리도 무척 아름다운 목숨일 뿐 아니라, 어머니도 아버지도 있는 우리랑 똑같은 이웃이라는 대목을 동시로 가만히 보여줍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그림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몸짓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대목을 일깨우면서 아이들 스스로 씩씩하고 의젓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속삭여요.


  곰곰이 돌아보면 먼먼 옛날부터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저마다 시인이 되어 아이들한테 사랑을 노래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문단에 오르거나 시집을 내놓았기에 시인이 아니라, 어버이 자리는 언제나 삶을 노래하는 자리이지 싶어요.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시인입니다.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사랑을 가슴으로 가다듬어 속삭이기에 시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즐겁게 놀도록 북돋우고, 언제나 아이들하고 손을 맞잡으며 함박웃음으로 놀 수 있기에 시인입니다.



“그 벌 죽이지 말고 살려서 보내줘라 / 누구의 아버지일지도 모르지 않니?” // 공책을 말아들고, 불끈! 솟구쳤던 팔뚝이 스르르 떨어졌다 (‘아버지’라는 말)



  오늘도 새 하루를 맞이하기 앞서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어 봅니다. 어제하고는 다른 새로운 아침에 아이들하고 무엇을 하며 놀는지, 아이들한테 어떤 놀이를 보여줄는지, 이 아이들하고 누리는 살림은 어떤 사랑으로 새롭게 피어날 만한지를 새벽녘에 고요히 헤아립니다. 나도 늘 노래(동시) 한 가락을 마음자리에 두면서 조촐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침을 맞이해야겠습니다. 4349.1.1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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