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안드레아 - 열여덟 살 사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다
룽잉타이.안드레아 지음, 강영희 옮김 / 양철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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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2



어머니는 열여덟 살 때 뭘 알았어요?

― 사랑하는 안드레아

 룽잉타이·안드레아 글

 강영희 옮김

 양철북 펴냄, 2015.11.23. 13000원



  아침에 밥을 하다가 그만 엄지손가락을 칼로 베었습니다. 물을 만지는 부엌일을 하자면 밴드를 안 붙일 수 없습니다. 밴드를 붙이고 아침을 마저 짓고 밥상을 차립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왼손 엄지손가락에 밴드를 붙인 줄 알아차립니다. 아이들은 무릎이 크게 까지건 말건 그리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나, 밴드 붙이기를 재미있는 놀이 가운데 하나로 여겨요. 좀 긁히거나 까지거나 핏방울이 맺더라도 그냥 두면 곧 낫는 줄 알지만 밴드를 붙이고 싶지요. 이러다 보니 아버지가 손가락에 감은 밴드를 아주 빨리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오늘 큰아이는 좀 남다르게 말합니다. “아버지 손가락에 밴드 붙였으니 내가 설거지를 할게.” 씩씩하고 의젓한 살림순이는 밥그릇을 다 비운 뒤 아버지 그릇이랑 동생 그릇까지 정갈하게 설거지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너는 물었어. “엄마, 엄마는 열여덟 살 때 뭘 알았어요?” (19쪽)


엄마가 만 열여덟 살이었을 때 아폴로가 달에 착륙했고, 미국과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입했어. 미국 전역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고. (23쪽)



  룽잉타이 님하고 안드레아 님이 주고받은 글을 엮은 《사랑하는 안드레아》(양철북,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은 어머니(룽잉타이)하고 아이(안드레아)가 나눈 글을 가장 많이 가장 많이 실었지만, 안드레아보다 어린 동생이 형한테 쓴 글도 더러 싣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고받은 글을 읽은 다른 사람들이 보낸 글도 사이사이 함께 싣습니다.


  어머니가 아이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고, 아이가 어머니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어머니하고 아이가 주고받는 글을 읽은(신문에 실린 글을 읽은) 사람들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 느낌하고 생각을 보냈고, 이 글 가운데 몇 꼭지를 나란히 싣습니다.


  곰곰이 따지자면 《사랑하는 안드레아》는 아이가 스스로 이 땅에 우뚝 서서 생각을 곱게 가다듬고 튼튼하게 갈고닦는 길에 동무나 이웃이나 곁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함께 빚은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엄마는 걱정이 지나치신 것 같아요. 여름에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 말예요, 어느 날 아침, 동생은 아직 자고 있고 저는 막 잠에서 깬 참이었죠. 엄마는 그런 절 붙들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너무 많이 논다느니, 공부는 뒷전이라느니 불평을 늘어놓으셨어요. (56쪽)


안드레아, 너는 어렸을 때 네가 찬 공이 어느 집 정원에 떨어졌을 때조차도 선뜻 들어가서 가져오지 못했어. 지금의 너는 필립에게 뭐라고 말해 줄래? (68쪽)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글을 씁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이가 글을 씁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가 살림을 가꿉니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아이가 살림을 거듭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가 아이랑 손을 맞잡고 즐겁게 놉니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아이가 어버이랑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쁘게 노래합니다.


  어머니는 아이한테 거룩하거나 대단하거나 놀라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면 되어요. 그리고, 어머니라고 하는 자리는 어머니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려서 스스로 곱게 거듭나면서 이러한 숨결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는 어머니한테 훌륭하거나 빼어나거나 멋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면 되지요. 그리고, 아이라고 하는 자리는 아이 스스로 생각을 가꾸고 북돋우고 살찌우고 돌보면서 스스로 새롭게 깨어나면서 이러한 숨결을 어버이한테 보여줍니다.



저는 이 사회구조 속의 가상적인 일면만 볼 수 있을 뿐이에요. 심지어 그것을 참아낼 수도 있고요. (71쪽)


“엄마는 성인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야. 도덕의 취사선택은 개인의 일이야. 논리가 끼어들 필요는 없어.” (76쪽)



  《사랑하는 안드레아》를 쓴 어머니는 아이한테 “엄마는 거룩한 사람(깨어난 사람/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참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어머니가 안 거룩하거나 안 깨어나거나 안 슬기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동안 ‘새롭게 어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지식이나 정보로 가르칠 수 없는 줄 깨닫는 어버이는 누구나 ‘슬기로운 숨결’로 거듭나요. 아이를 오직 사랑으로 가르치고 보살피며 어루만질 수 있을 때에 즐거운 삶이 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어버이는 모두 ‘아름다운 넋’으로 거듭나요.


  우리 집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는 손길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이웃을 곱게 안고 포근히 아낄 수 있는 손길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한테 어버이인 나는 ‘거룩한 사람’일까요? 네, 나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거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태여 거룩하고 훌륭하고 이러하고 저러하고 하는 이름을 떠나서, 어른으로 기쁘게 서고 어버이로 즐겁게 서며 사람으로 기쁘게 설 수 있는 숨결입니다. 아이가 배울 만한 몸짓을 스스로 지으면서 날마다 새롭게 노래하는 넋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삶을 물려받습니다. 나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삶을 물려받지요. 내가 오늘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삶이나 사랑이란 언제나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베푼 삶이요 사랑입니다.



형은 반년 동안 사귄 친구들이 유럽 학생들뿐이고 본토 학생은 거의 없다면서, 그 이유가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초래한 장벽 때문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느낀 바로는,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 홍콩에서 2년을 살면서도 나는 공공주택에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사귀지 못했어. (178쪽)


집을 나서기 전 미국과 유럽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들에게 시위행진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어요. 다들 기말시험 준비 때문에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186쪽)



  나는 나로서 오롯이 서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로서 오롯이 서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다우면서 아름답고 아이는 아이다우면서 아름답습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은 이녁대로 아름다우며, 이웃이 낳아 돌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다르면서 아름답고, 저마다 다르게 슬기롭습니다. 저마다 다르면서 사랑스럽고, 저마다 다르게 기쁜 노래를 불러요.


  아침저녁으로 마당에서 아이들하고 손을 맞잡으면서 춤을 춥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마당에서 짓는 춤놀이는 똑같습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마당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놀고, 여름에도 겨울에도 밤마다 흐드러지는 별빛을 잔치처럼 누립니다.


  이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서 줄 수 있어서 반갑습니다. 이 아이들이 맛나게 밥을 먹어 주니 고맙습니다. 이 아이들이 내 노래를 즐겁게 들어 주니 재미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저희 나름대로 새롭게 노래를 지어서 불러 주니 싱그럽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네게 묻고 싶은 건 말이야, 안드레아. 네가 말하는 키치가 대체 어떤 거니? 네 아버지 세대의 독일인들이 벽에 걸어 놓은 마리아나 목각으로 만든 천사는 예술이니, 키치니? (231쪽)


빈랑(담배처럼 씹는 것)을 씹는 사람을 왜 정부에서 관리해야 하죠? 그런 논리라면 양치질하지 않는 사람, 변기를 사용한 뒤 물을 내리지 않는 사람,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뀌는 사람 등도 다 정부가 관리해야겠네요? (259쪽)



  아이한테 글을 써서 띄운 어머니(룽잉타이)는 어머니대로 새롭게 자랍니다. 어머니한테 글을 써서 보내는 아이(안드레아)도 아이대로 새롭게 피어납니다. 머릿속에 담은 지식을 글로 써서 띄우지 않아요. 이 지구별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썰미를 글로 담아서 띄웁니다. 교과서나 책에 적힌 이론을 글로 써서 보내지 않지요. 스스로 겪은 삶을 글로 빚어서 보냅니다. 몸소 치른 삶을 글로 엮어서 보냅니다.


  온누리 모든 어버이와 아이가 저마다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교사가 되거나 박사가 되어야 이야기를 잘 들려줄 만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머니요 아버지이면 됩니다. 그저 어버이요 어른이면 돼요. 그리고 아이들은 그저 아이인 넋으로 어버이와 어른을 마주하면서 꿈을 새롭게 지으면 됩니다. 글 한 줄이란 꿈이고, 글월 두 줄이란 사랑입니다. 4348.12.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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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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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7



시가 뭐고? 삶노래요 사랑노래요

― 시가 뭐고?

 강금연 외 88명

 삶창 펴냄, 2015.10.26. 9000원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기 앞서까지 나는 ‘시’라고 하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시라고 하는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기 앞서까지 ‘시’라고 하는 글을 잘 읽지도 않았고, 잘 헤아리지도 못했으며, 잘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큰아이가 글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글을 읽어 달라 하고, 나중에 아이 스스로 글을 읽으려 하는 무렵부터 비로소 ‘시’라고 하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니, 아이가 글을 읽고 싶다고 할 적에 아이한테 어떤 글을 읽힐까 하고 생각하다가 내가 손수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겠다고 할 적에 무엇보다 ‘어버이가 쓴 글’을 읽히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 시쓰기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읽기를 배운 적도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를 읽고 외우는 수업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시험 문제에 나오는 어른시를 읽고 외우는 수업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시쓰기이든 시읽기이든 모두 나하고 동떨어진 어느 머나먼 별나라나 달나라나 꿈나라 이야기로만 여겼어요.



비가 안 와서 / 노은 마르고 / 드래 가서 오지도 안는 영감 때무네 / 마음이 단다 / 하느님이 비를 주쓰면 조겠는데 / 비를 안 주니 / 콩 모종 들개 모종 해야 하는데 / 무러서 땡땡 마음도 가물다 (김기선-마른 땅)


참 따뜻하다 / 감나무밭 김을 멘다 // 꽃다지는 노랑꽃을 뽐내고 / 냉이꽃은 흰꽃을 뽐내고 / 된장꽃은 보라색으로 뽐내고 (김숙이-밭 김매기)



  경상도 칠곡 시골자락에서 사는 할머니 여든아홉 분이 쓴 시를 그러모은 《시가 뭐고?》(삶창,2015)를 읽습니다. 책이름에도 붙듯이, 시골 할매는 “시가 뭐고?” 하고 묻습니다. 시를 쓰라고 하니 시라고 하는 글을 써 보지만, 할매들 스스로 시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면서 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골 할매는 ‘할매 나이’에 이르고도 한참이 지난 오늘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익혔습니다. 예순이든 일흔이든 여든이든, 이런 늘그막에 한글을 처음으로 익혔지요.


  이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시골 할매는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이라는 나이에 이르도록 ‘한글로 된 책’은 읽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글로 된 신문’조차 읽은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재미있지요. 시골 할매가 한글을 익힌 적이 없어서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는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 이름도 읽지 못하셨을 텐데 그야말로 선거를 해야 할 적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감꽃이 피었다가 하얗게 떨어지면 / 지푸라기 홀겨메어 한층 두층 뀌다보면 / 목걸이 만들고 옛날 그 시절 생각난다 / 감은 어머니의 둥지에서 영양분을 흠북 먹으면서 / 잘 큰다 가을 돼면 즐경을 이루고 (박태분-감나무)


택배 주소도 쓸 줄 몰라 / 우체국 여직원 손 빌렸다. / 용기 내어 내 손으로 / 주소를 써 갔더니 / 여직원 둘이서 의아한 표정 (김옥순-고마운 한글 공부)



  시를 배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글조차 배운 적이 없고, 책을 배운 적도 없는 할매한테는 문학이라고 하는 글도 처음입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도 시골 할매한테는 아무것이 아니기도 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시골 할매한테는 이녁 딸아들이랑 이녁 손자 이름이 대수롭고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남지만,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들 이름은 안 대수롭고 안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안 남지요.


  그렇지만 이 시골 할매들이 시를 씁니다. 처음으로 한글을 익히고, 처음으로 연필을 쥐면서, 처음으로 할매들 이야기를 이녁 손으로 스스로 씁니다. 이녁 이야기를 입으로 읊어서 지식인이나 연구원이 녹음기로 받아서 따로 옮겨서 나오는 글이 아니라, 늙은 할매가 스스로 연필을 쥐고 스스로 이녁 이야기를 시라고 하는 얼거리로 찬찬히 빚습니다.



어릴 적 / 산골짝에 남자아이들 / 학교 보내주고 여자들은 / 공부하면 남의 집에 간다고 / 보내주지 않았다 (박후불-한글 공부)


논에 들에 / 할 일도 많은데 / 공부시간이라고 / 일도 놓고 / 헛둥지둥 왔는데 / 시를 쓰라 하네 / 시가 뭐고 / 나는 시금치씨 / 배추씨만 아는데 (소화자-시가 뭐고)



  글을 모르고 책을 모르며 학교를 모르는 시골 할매입니다. 그렇지만 시골 할매는 다른 것을 알아요. 집짓기하고 밥짓기하고 옷짓기를 알지요. 시골 할매는 대학교뿐 아니라 학교 문턱조차 밟은 일이 없으나, 씨앗을 언제 심고 풀은 언제 베며 열매는 언제 거두는가를 압니다. 시골 할매는 박사도 석사도 연구원도 아니지만, 씨앗을 겨우내 어떻게 갈무리를 하고, 추운 겨울에 먹을 밥은 어떻게 건사해서 어떻게 다루는가를 압니다. 시골 할매는 보일러 같은 기계를 만들거나 다룰 줄 모르지만, 나무를 할 줄 알고, 아궁이에 불을 지필 줄 압니다. 시골 할매는 오븐이나 전자제품을 마음껏 다룰 줄 모르더라도, 전기 하나 없이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살림을 건사할 줄 알아요.



새벽 다섯 시 손자 자는 것 보고 / 자전거 타고 논밭에서 / 바쁘게 일을 하고 집에 온다 / 손자는 깨지 않고 있다 / 자는 모습이 예쁘고 고맙다 / 꽃나무에 물을 주고 또 문을 열어보면 / 일어나서 손을 빨고 놀고 있다 (김순덕-손자 규현)



  칠곡 할매 시집인 《시가 뭐고?》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시골 할매더러 ‘씨앗’이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씨앗마다 언제 심고 어떻게 돌보아 어떻게 거두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시골 할매더러 ‘땅’이나 ‘밭’이나 ‘논’이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땅이나 밭이나 논을 어떻게 가꾸고 일구고 보듬으면서 삶을 짓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시골 할매더러 ‘아기’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아기를 집에서 어떻게 낳고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둘째딸이 쇠비름 무침이 먹고 싶답니다 / 온갖 좋은 것 다 먹고 살았을 텐데 / 딸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이종희-쇠비름)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좋다 불을 때면서 / 그을린 부뚜막에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 어린 시절 엄마가 나무를 아궁이에 넣던 모습 / 불을 꺼집어내어 감자를 굽던 모습이 / 생각난다 (한순길-추억)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시’라는 말을 안 씁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노래’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자, 우리 함께 부를 노래를 써 봤어’ 하고 글종이를 내밉니다. 그러면 큰아이가 이 글종이를 받아서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입혀서 나긋나긋 살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노래처럼 글로 빚기에 이 글, 그러니까 ‘시’를 ‘삶노래’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아끼고 보살피며 사랑하는 이야기를 노래처럼 글로 엮기에 이 글, 그러니까 ‘시’를 ‘사랑노래’라고 느낍니다.


  일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입니다. 아기를 재우며 부르는 노래는 ‘자장노래’입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마음껏 부르는 노래는 ‘놀이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들노래’입니다. 숲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는 ‘숲노래’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시라고 하는 문학’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어요. 아니, 시인이 아닌 ‘삶노래님’이 되고 ‘사랑노래님’이 됩니다. ‘들노래님’이 되고 ‘숲노래님’이 됩니다. ‘자장노래님’이나 ‘놀이노래님’이 되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나 다 다르게 아름다운 ‘노래님’입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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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보푸리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10
다카하시 노조미 글.그림,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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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96



어머니가 짠 털옷이 사랑스러워요

― 내 친구 보푸리

 다카하시 노조미 글·그림

 이준영 옮김

 북극곰 펴냄, 2014.2.28. 15000원



  그림책 《내 친구 보푸리》(북극곰,2014)를 읽습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이 그림책을 재미있게 들여다봅니다. 털실로 짠 털옷을 입은 아이가 털실 끝자락이 살며시 풀리며 생긴 보풀한테 ‘보푸리(보풀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제 고운 놀이동무로 삼는 이야기를 즐겁게 마주합니다.



나는 이 스웨터가 제일 좋아요! 그리고 보푸리는 내 친구예요. (2쪽)




  아이한테는 보풀 하나도 동무가 됩니다. 아이한테는 조약돌 하나도 동무가 됩니다. 아이한테는 종잇조각 하나도 동무가 됩니다. 아이한테는 연필 한 자루도 동무가 됩니다. 아이한테는 장난감이나 인형뿐 아니라 병뚜껑이나 나무토막도 얼마든지 동무가 되어요.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혼자 놉니다. 아마 집에 다른 놀이동무가 없는 탓입니다. 언니도 없고 동생도 없어요. 혼자 노는 아이는 어머니가 저랑 내내 놀아 줄 수 없는 줄 알기에 혼자 놀면서 ‘보푸리’라고 하는 새로운 놀이동무, 그러니까 ‘꿈으로 짓고, 코앞에서는 보풀 하나로 늘 만지작거리는’ 따사로운 숨결하고 사귀어요.



스웨터가 더러워지면 보푸리랑 같이 빨래를 해요. 그리고 함께 햇볕을 쬐요. (5∼6쪽)




  아이가 혼자이지 않고 여럿이라 하더라도 보푸리 같은 동무를 얼마든지 사귑니다. 아이들도 때로는 혼자 조용하거나 고요하게 놀고 싶거든요. 아이들은 서로 뒤엉켜서 얼크러져서 놀기를 즐기지만, 때때로 홀로 해바라기를 하거나 나무 밑에서 그늘을 누리면서 생각에 잠기기를 즐기기도 해요.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동무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둥둥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를 동무로 삼을 수 있어요. 나비를 동무로 삼을 수 있고, 풀씨나 꽃잎을 동무로 삼을 수 있어요. 모두 따사로운 동무이고, 모두 반가운 동무예요. 모두 기쁜 동무이고, 모두 사이좋은 동무이지요.


  따사로운 동무이기에 어디를 가든 함께 갑니다. 반가운 동무이기에 신나는 일이건 슬픈 일이건 모두 털어놓습니다. 기쁜 동무이기에 늘 마음을 기울이고, 사이좋은 동무이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놀고 싶어요.



마침내 보푸리가 걸린 곳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보푸리는 이제 털실 뭉치가 되었어요. (22쪽)



  그림책 《내 친구 보푸리》를 보면 어머니 심부름을 하던 아이가 그만 보푸리를 잃습니다. 털옷 한 자락이 어딘가에 걸려서 털옷이 그만 한 올 두 올 풀리는 줄 잊었거든요. 집으로 돌아와서야 털옷이 모두 풀린 줄 알아차렸지만 보푸리는 그만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끼던 털옷인데, 어머니가 사랑으로 떠서 베푼 선물인데, 살가운 놀이동무 보푸리가 달린 털옷인데, 아이는 몹시 서운하고 슬픕니다.




엄마가 뜨개질을 시작했어요. 털실 뭉치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25쪽)



  어머니는 아이 마음을 읽습니다. 얘야, 그 털실뭉치를 주렴, 그리고 어머니를 거들어 주렴, 털실뭉치를 다시 잘 여미어 실꾸리를 빚고, 이 실꾸리를 바늘 둘을 써서 새롭게 털옷을 지으면 되지.


  어머니는 솜씨 좋게 뜨개질을 합니다. 온누리 모든 어머니는 솜씨가 좋습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솜씨가 좋아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 곁에서 사랑스러운 손길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 옆에서 따사로운 손길을 찬찬히 느끼면서 살림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랑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에서 고운 손길을 느끼면서 시나브로 사랑을 꿈을 노래를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롭게 배웁니다.


  바야흐로 어머니는 새 털옷을 짜 주었고, 아이는 보푸리를 새롭게 만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요 살림이요 꿈이며, 언제나 오직 따사롭고 고운 손길로 함께 짓는 삶이며 이야기이고 노래입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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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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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3



‘말’을 빼앗겨 ‘자급자족’을 못하는 ‘그림자 삶’

―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글

 노승영 옮김

 사월의책 펴냄, 2015.12.1. 15000원



  즐겁게 일하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즐겁게 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얻더라도 즐거움이 찾아들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먹으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먹을 수 있습니다. 즐겁게 먹으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대단한 곳에서 대단하다는 대접을 받더라도 즐거운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에 즐거울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할까요. 내가 스스로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기에 즐겁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셈이라고 할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학교 교육은 유전적 차이를 왜곡해 신분 하락 자격증을 발급하는 것과 다름없고, 건강의 의료화는 감당 가능하고 유효적절한 한도를 훨씬 넘는 의료 수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상식적인 의미의 ‘건강’ 즉 환자의 유기적 대처 능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운송 부문에서는 출퇴근 시간대에 차량이 몰림에 따라 허비되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동 수단의 자유로운 선택 폭이나 상호 접근성 모두가 줄어든다. (21쪽)



  이반 일리치 님이 쓴 《그림자 노동》(사월의책,2015)이 새롭게 나옵니다. 이 책은 1988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옮겼지 싶은데, 그동안 몇 차례 새 옷을 입고 나오기도 했으나 이내 판이 끊어졌습니다. 널리 읽힐 만한 책이기에 꾸준히 새로 나오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이기에 자꾸 판이 끊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인문책 《그림자 노동》은 어떤 줄거리를 다룰까요? 무엇보다도 책이름으로 붙은 ‘그림자 노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임금 노동’ 밑바닥에 그림자처럼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시커멓게 짓눌린 채 끙끙 앓는 ‘그림자가 되어 버린 노동’을 다루어요. 그리고, ‘그림자 노동’이 태어나도록 이끈 몸짓과 사람들과 물결이 무엇인가를 다루지요.



자급자족 활동이 점차 희귀해짐에 따라 모든 무급 활동은 가사 노동과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된다. 성장 지향적 노동은 유급이건 무급이건 획일화되고 관리되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쪽)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벌지 않고 소비만 하는 것이 과연 특권인지 묻는다. 다시 말해 의무적인 소비의 패턴에 매여 있느라 사실상 질 낮은 일에만 내몰리고 있는 게 아닌지 묻는다. 학생들은 학교 다니는 것이 배우기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인지 묻는다. (57쪽)



  지구별 곳곳에 ‘그림자 노동’은 왜 생길까요? 이반 일리치 님은 이 실마리를 풀려고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벗기는데, 실마리를 하나씩 찾으려고 하면서 ‘말’이라고 하는 대목을 마주합니다.


  아니, ‘일(노동)’을 다루는데 ‘말’이라니? 왜 그림자 노동은 ‘말’에서 모든 실타래가 비롯하는지?


  그야말로 수수께끼라고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무엇이요 말을 정치권력자가 어떻게 다루려 했는가를 돌아보고 짚고 살피고 생각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그림자 노동이 비롯한 자리를 알아차릴 만하고, 그림자 노동을 걷어치우는 길을 찾아낼 만합니다.


  이반 일리치 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한테 다시금 힘주어 말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서기(자급자족)’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걸림돌을 살피는 실마리가 바로 ‘말’에 있고, 말을 어버이가 집에서 가르치지 않고 ‘국가기관이 세운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려고 하는 자리에서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다고 외쳐요.



(스페인에서) 네브리하의 바람은 훗날 교회가 쓴 금지의 방법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쇄물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중의 토박이말을 문법학자의 언어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이 인문주의자가 제안한 것은 구어를 표준화함으로써 인쇄라는 신기술을 토박이 영역으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73쪽)


네브리하가 문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읽기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여왕에게 권력과 권위를 달라고 청원한 이유는 자신의 문법을 이용해 읽기의 무정부적 확산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 … 그의 계획이란 제국의 동반자를 침착하게 제국의 노예로 바꾸는 것이었다 … 토박이말로부터 가르치는 언어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모유에서 분유로, 자급자족에서 복지로,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 시장가치를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8, 79, 80쪽)



  이반 일리치 님은 에스파냐(스페인) 이야기를 불쑥 꺼냅니다. 에스파냐 어느 지식인이 ‘에스파냐 곳곳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쓰던 고장말(사투리)’을 더는 못 쓰게 하면서 ‘표준 에스파냐말(국가 통제 표준말)’만 쓰도록 할 때에, 에스파냐 사람들(민중)은 ‘여왕 폐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외칩니다. 중앙집권 권력을 이루고, 왕권을 더욱 튼튼히 다질 뿐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놀라우면서 가장 무시무시한 일이란 바로 ‘국가 표준말’을 세워서, 사람들이 ‘국가 표준말’로만 ‘의사소통’을 하도록 시키는 데에 있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뚱딴지 같다고 여길 만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릎을 칠 만하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그림자 노동》에서 잘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아주 먼 아스라한 옛날부터 ‘말’은 ‘여느 집’에서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아이한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말을 가르친다면서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학교를 짓거나 교사를 키우거나 교과서를 엮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비롯해서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는 모든 마을 모든 집에서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던, 돈으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고 스스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아름다운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대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가난뱅이가 부자처럼 말하고, 환자가 건강한 사람처럼 말하며, 소수가 다수처럼 말하도록 하는 데 돈이 쓰인다. 우리는 아이와 교사의 언어를 개선하고 교정하고 확장하고 갱신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용어에는 더 많은 돈을 쓰고, 고등학교에서 십대들이 이 용어를 맛보도록 하는 데는 더더욱 많은 돈을 쓴다. (112쪽)


이 부부는 자녀 앞에서까지 ‘인 로코 마기스트리’ 즉 ‘교사의 입장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라는 셈이었다. 두 어른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향해 말끝마다 ‘교육’을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말하는 본보기를 보였고, 내게도 그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130∼131쪽)



  아이한테 말(을 비롯해서 온갖 지식)을 가르칠 적에 학교에 보내는 일이 ‘사람 역사’에서 대단히 짧습니다. 게다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말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아이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모두 가르쳤어요. 여느 보금자리인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운 아이들은 누구나 손수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을 몽땅 배웠지요.


  한국 사회를 돌아보아도 이 대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조선 봉건 사회일 적에도 일제강점기 사회에서도 분단이 되고 전쟁이 터지던 때에도, 시골에서 여느 마을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던 모든 어버이는 이녁 아이한테 ‘말을 바탕으로 집짓기·밥짓기·옷짓기’를 가르치고 물려주었습니다.


  학교 문턱을 밟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수수한 어버이입니다만, 책 한 권조차 읽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투박한 어버이입니다만, 쓰레기 하나 내놓지 않으면서 ‘손수 삶을 지어서 삶을 누리는 길(완전한 자급자족)’로 살림을 빚었어요.



점점 커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전통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비생산적인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임무를 줘서 달랜다는 속임수가 통하게 된 것이다. (193, 194쪽)


자본가와 관료 모두 임금 노동보다는 그림자 노동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성으로 결합된 가족은 이들에게 그림자 노동의 예속을 강화할 수 있는 청사진을 마련해 주었다. (202쪽)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오늘날을 돌아볼 노릇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집짓기나 밥짓기나 옷짓기를 못 배우고 못 하지요. 서울에 있는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나온 젊은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학교에서 집이나 밥이나 옷을 짓는 솜씨를 못 배웁니다. 이런 삶을 배울 생각조차 아예 못 하기까지 해요.


  이름난 대학교를 마친 젊은이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많이 벌는지 모르지요. 돈으로 집도 밥도 옷도 살는지 몰라요. 그러나,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고작 하루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국가권력은 ‘말’을 표준말로 바꾸려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람들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는 동안 국가권력은 학교와 문학과 예술과 언론매체를 빌어서 고장말(사투리)을 몽땅 짓밟아 사라지게 합니다. 고장말이 사라진 곳에서는 자급자족 얼거리가 모래알처럼 무너졌으며, 자급자족 얼거리가 무너진 곳에서는 ‘고향사랑’ 같은 마음이란 가뭇없이 흩어집니다. 이리하여 ‘서울로! 서울로!’를 외치면서 서울이나 큰도시로 몰려들어 회사원 일자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불나비 사회로 내몹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국가정책에 따라 사람들 삶이 휘둘립니다. 나라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지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었으니까요.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 자리는 바로 우리가 스스로 말을 잃은 자리라는 대목을 낱낱이 따져서 밝히는 책이 《그림자 노동》입니다. 우리가 ‘우리 말(토박이말을 가리키는 한국말이 아닌 우리 말)’을 찾아서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담아 우리 삶을 짓는 길을 밝히는 넋을 북돋우는 말’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그림자 노동을 걷어내고 ‘참일(참다운 일·노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내 말)’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서기(자급자족)’하고 언제까지나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거나 안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하거나 안 얻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웃는 삶으로 거듭나는 슬기로운 넋으로 자라야 합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삶이기에 모든 차별과 불평등과 따돌림이 그림자 노동 다음으로 잇달아 자라나고, 이런 자리에서는 전쟁과 경쟁이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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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말이야
장 뒤프라 지음, 조정훈 옮김, 넬리 블루망탈 그림 / 키즈엠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95



시골에서 밤하늘을 보았니?

― 태양은 말이야

 장 뒤프라 글

 넬리 블루망탈 그림

 조정훈 옮김

 키즈엠 펴냄, 2012.10.26. 11000원



  시골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눈부시도록 쏟아지는 별잔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전깃불이 없고 자동차도 오가지 않는 시골일 때에 흐드러지는 별잔치를 누리면서 즐겁게 춤을 출 만합니다. 달밤에 춤을 춘다는 말이 있는데, 별이 쏟아지는 한밤에 별잔치를 올려다보노라면 참말 저절로 춤이 흘러나옵니다.


  고요한 겨울 밤이든, 개구리 노랫소리로 우렁찬 여름 밤이든, 또 풀벌레 노랫소리가 고즈넉한 가을 밤이든, 아니면 무럭무럭 자라난 새끼 새들이 신나게 노래하다가 잠드는 봄 밤이든, 별밤이란 더없이 고운 숨결이 흐르는 때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고 쉬를 누러 마당으로 내려서는 한밤이면 으레 마당 한복판에 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뒤꼍에도 올라 빙글빙글 돌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미리내를 살피고 숱한 별자리를 헤아리며 초롱초롱 빛나는 저 별처럼 이 지구별도 초롱초롱 빛나면서 저 별한테 보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앗, 눈부셔!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2쪽)



  장 뒤프라 님이 글을 쓰고 넬리 블루망탈 님이 그림을 그린 《태양은 말이야》(키즈엠,2012)를 재미있게 읽습니다. 이 그림책을 함께 보는 큰아이가 문득 묻습니다. “아버지, 지구는 풀빛이야? 지구는 풀빛 별이야?” 그림책을 보니 해님 곁에 있는 지구가 풀빛이로군요. “우리가 선 이곳에서는 지구가 어떤 빛깔인지 볼 수 없지만, 지구 바깥인 우주로 나가서 보면 풀빛으로 보인대.”


  그림책 《태양은 말이야》는 지구과학이나 우주과학을 아이들이 쉽게 바라보고 살피도록 도우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린이가 지구 바깥으로 마음껏 날아다니고, 해님 곁에서 춤을 추다가는, 해님을 둘러싼 뭇별하고 나란히 노래를 부르는 그림이 나와요.


  우주옷도 안 입고 어떻게 우주에서 저렇게 떠다니거나 날아다니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아이들은 꿈나라에서 이렇게 마음껏 우주를 가로지를 수 있어요. 해님 곁에 다가가서 “해님, 해님은 어떻게 태어났어요?” 하고 물어볼 수 있고요.




새로 태어난 행성들은 태양을 따라다녔어. 어미 닭을 졸졸 따르는 병아리 떼처럼 말이야. (11쪽)



  2000년대까지 밝힌 과학 지식으로 작고 예쁜 그림책이 하나 나옵니다. 앞으로 2050년대 과학이 새로 나타나거나 2200년대 과학이 새로 샘솟거나 2500년대 과학이 새로 일어서면 그때에는 그때대로 더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는 그림책이 나올 만하겠지요.


  해님하고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은 해님 무게가 몇 톤이나 되는지 몰라도 됩니다. 해님 너비나 지름을 숫자로 알지 않아도 됩니다. 우주에 별이나 은하가 몇이나 되는지 몰라도 되고, 지구에 있는 사람 숫자를 몰라도 되지요.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으면 돼요. 우주는 아주 놀라운 별나라이고, 이 지구도 아주 사랑스러운 별나라입니다. 너른 은하로 헤아리면 지구라는 별은 그야말로 작아서 먼지나 티끌만큼도 안 될 만합니다. 지구라는 테두리에서 바라보면 어린이 한 사람은 더없이 작아서 먼지나 티끌만큼도 안 될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아끼면서 사랑할 이웃이에요. 해님을 둘러싼 ‘병아리 떼’ 같은 별처럼, 은하를 이룬 수많은 별처럼, 우리는 이 지구라는 곳에서 ‘다 다른 사람’이자 ‘다 다른 별’처럼 삶을 짓습니다.




아주아주 커다란 은하는 커다란 태양과 별들을 끌고 다니며 빙글빙글 돌고 있어. (14쪽)



  도시에서는 아주 깜깜한 밤에도 별을 보기 어렵습니다. 밤 한 시나 새벽 두어 시에도 별을 구경하기 어렵지요. 전깃불이 너무 밝거든요. 자동차도 너무 많아요. 어쩌면 도시에서는 굳이 별을 보아야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별보다는 문명을 보고 문화를 보아야 할는지 몰라요.


  그래도 우리는 해님이 있기에 이 삶을 누려요. 해님이 따스하게 비추기에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요 꽃이 피어요. 해님이 포근하게 어루만지기에 겨울에도 꽁꽁 얼어붙기만 하지 않아요. 해님이 햇볕하고 햇빛하고 햇살을 베풀기에 이 지구에서 저마다 즐거우면서 새로운 삶을 누려요.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하를 저 멀리에서 큰곰자리가 바라보고 있어. 큰곰자리는 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18쪽)



  너른 우주에서 별자리는 여러 별을 그림처럼 엮은 이음고리입니다. 우리 지구별에서도 ‘국경’이 마치 별자리와 같다면,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가 마치 그림처럼 곱게 엮은 이음고리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에 쇠가시울타리를 세우지 말고,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에 군대나 전쟁무기를 두지 말고,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에 따사로운 숨결이 흐르면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우주에서는 별과 별 사이에 전쟁도 전쟁무기도 없는데, 지구라는 자그마한 별에는 전쟁도 전쟁무기도 너무 많아요.


  해님이 지구별을 따사롭고 포근하게 감싸듯이 지구에서는 우리가 서로서로 따사롭고 포근한 손길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 해님 같은 마음으로 삶을 지을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해님 같은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살림살이와 마을살이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4348.12.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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