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냉이 평화그림책 10
권정생 시,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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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7



강낭알을 꿈꾸는 수수하고 조용한 평화

― 강냉이

 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

 사계절 펴냄, 2015.11.20. 11000원



  큰아이가 지난가을에 물었습니다. “옥수수 먹고 싶어.” 나는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그럼 씨앗 심어.” 큰아이는 웃으며 대꾸합니다. “와, 씨앗 심자! 심자!” 강냉이를 거의 다 거두는 늦여름에 이르러 우리 집 옆밭에 강냉이 씨앗을 다섯 톨 심고, 우리 집 뒤꼍에도 석 톨을 심습니다. 이제 곧 가을이 되고 겨울이 다가올 줄 알지만, 아이하고 함께 씨앗심기를 누리려고, 아이가 바라는 강냉이 씨앗을 심었습니다.


  늦여름에 심은 강냉이 씨앗은 첫겨울에 이르러 비로소 알이 뱁니다. 다만, 봄에 심어서 늦여름 즈음 거두는 강냉이하고 달리 알이 빽빽이 들어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제 손으로 씨앗을 훑어서 물에 불린 뒤에 흙에 심는 일을 했습니다. 조그마한 강냉이 씨앗 한 톨에서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오르며 꽃이 피다가 열매가 차츰 굵어지는 모습을 늘 마당 한쪽 옆밭에서 지켜보았어요.



집 모퉁이 토담 밑에 (3쪽)



  권정생 님이 조곤조곤 쓴 글(시)에 맞추어 김환영 님이 그림을 그린 《강냉이》(사계절,2015)를 새롭게 읽습니다. 글(시)하고 그림이 새삼스레 어우러지는 이야기로 가만히 읽습니다. 권정생 님은 이녁이 나고 자라며 들은 경상도 안동말로 강냉이 이야기를 썼고, 김환영 님은 아스라하다면 아스라한 한국전쟁 언저리에 시골에서 강냉이 씨앗을 심고 오붓하게 노래하던 수수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그림으로 빚습니다.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7쪽)



  집 모퉁이 흙담 밑에 씨앗을 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어매)는 빙그레 웃습니다. 어머니 혼자 밭일을 한다면 수월하면서도 빠르게 끝마칠 텐데, 어머니는 혼자 밭일을 하지 않아요. 어린 아이들한테 밭일을 맡겨요. 그렇다고 고되다거나 힘든 일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할 만큼 일감을 주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지켜봅니다.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북돋우고, 잘 못 하면 잘 못 하는 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함께 흙내음을 맡으면서 흙빛으로 웃으면서 구슬땀을 흘려요.


  이렇게 마당 한쪽 밭 한 뙈기를 일구어 강냉이를 심은 뒤 아이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노래하면서 놉니다. 저희가 씨앗을 심은 옆밭 곁에서 마음껏 노래하면서 놀아요. 얼른얼른 자라라고 노래하고, 부쩍부쩍 크라면서 웃고 놀지요.


  참말 모든 시골자락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열매는 아이들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자랍니다. 참말 모든 시골마을 논이며 밭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열매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커요.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13쪽)



  그림책 《강냉이》를 들여다봅니다. 그림책에 흐르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1980년대 이야기인지 1960년대 이야기인지, 또는 1940년대나 1920년대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시골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수수하면서 조용한 살림이거든요. 딱히 어느 연대를 헤아려야 하는 시골살림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고, 흙을 북돋우고, 밭을 보살피며, 곡식이랑 열매를 거두는 살림은 예나 이제나 같아요. 즐겁게 심고 기쁘게 돌보며 흐뭇하게 거두는 살림은 참말 오늘이나 앞으로나 같아요.


  그런데, 그림책 《강냉이》는 한국전쟁 언저리 모습입니다. 이리하여, ‘강낭알’을 심은 아이들은 저희 보금자리에 머물지 못합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합니다. 애써 심은 강낭알을 거두지 못한 채 떠나야 해요. 전쟁 불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쟁 손아귀에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조용히 흙을 일구며 살던 시골사람은 낫이랑 호미랑 괭이만 손에 쥐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지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총칼 탱크 전투기에 밀려서 보금자리를 잃거나 잊어야 합니다.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25쪽)



  총칼하고 탱크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총칼하고 탱크를 젊은이 손에 쥐어 주면서 서로 ‘죽일 놈’으로 여겨서 참말 죽이라고 시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왜 낫이랑 호미랑 괭이를 지어서 흙을 가꾸지 않고, 온갖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젊은이 손에 쥐어 주고는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켜야 할까요?


  정치권력이 다르니 전쟁을 해야 할까요? 나라가 달라졌으니 서로 싸워서 한쪽은 몽땅 죽어야 할까요? 정치권력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도 똑같이 밥을 먹고 강냉이를 먹는 살림이지 않을까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흙내음을 맡으면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나날이 되지 않을까요?


  서로서로 사이좋게 모여서 강낭알을 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강낭알을 네 밭에도 심고 내 밭에서 심으면서 여름 바람이 차분해질 무렵 함께 오두막에 모여서 강냉이를 폭 삶아서 맛나게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빌어요. 네 강냉이도 맛있고 내 강냉이도 맛있는 기쁜 살림을 나눌 수 있기를 빌어요. 오순도순 어우러지는 두레랑 품앗이가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날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저마다 제 밭을 가꾸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9.1.1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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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6-01-13 00:27   좋아요 0 | URL
이 그림책 저도 읽었어요. 사투리 입말이 정말 정겨워서 뒤에 실린 표준어로 고친 시가 얼마나 싱거운지 비교되더군요^^

숲노래 2016-01-13 05:31   좋아요 1 | URL
표준 서울말이 참... 싱겁지요 ^^;;;
고장마다 교과서도 다 고장말로 가르치면
한국 문화가 한결 재미나게 살아날 텐데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
 
젤리장수 다로 4
김민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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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93



서로 다른 삶이니 서로 다른 말

― 젤리장수 다로 4

 김민희 글·그림

 마녀의책장 펴냄, 2012.1.30. 6000원



  만화책 《젤리장수 다로》 넷째 권에서는 이 만화책 주인공 ‘다로’가 ‘공주님(인어 할아버지)’한테서 인어 비늘 하나를 얻어서 바닷속을 누비는 이야기가 첫머리에 나옵니다. 다로라는 아이는 인어 비늘을 잘못 붙였다가 몸 한쪽이 물고기 모습으로 바뀌는 줄 뻔히 알면서도 ‘공주님(인어 할아버지)’이 이녁 몸에서 떼어낸 비늘을 기꺼이 받아서 혀 밑에 붙입니다. 그러고는 공주님하고 함께 바닷속으로 들어가지요.


  바닷속을 마음껏 가르는 다로는 ‘바닷속이 어떤 곳’인지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바닷속에 있는 수많은 물고기하고 물풀이 들려주는 말을 ‘입을 안 써’도 마음으로 다 알아듣습니다. 공주님이 하는 말도 입이 아닌 마음으로 알아듣고, 다로도 마음으로 공주님한테 마음으로 말을 건넵니다. 뭍에서 사는 사람일 적에는 반드시 입을 열어야 말이 나왔는데, 게다가 뭍에서 살 적에는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말’ 가운데 거짓말이 많았는데, 바닷속하고 뭍이 이렇게 다른가 하고 새삼스레 느껴요.



“이봐, 불로장생의 약이란 게 있긴 있어?” “너도 그거 찾고 있는 거 아니었어?” “뭔 소리야?” “인어 잡아놨잖아.” “어찌 그런 불경한 소리를. 잡아놓은 게 아니라 모셔둔 거다.” (11쪽)


‘내가 어떻게 그 말을 거역할 수 있겠어. 거역하면 내 안에 아버지가 사라져버릴 것 같단 말야.’ (28쪽)



  그런데, 바닷속을 마음껏 가르다가 뭍으로 올라오니 어쩐지 얄궂습니다. 몸이 무척 무겁습니다. 홀가분하게 하늘을 날듯이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지내다가 뭍으로 올라서서 한 발짝을 디디려 하니 아주 죽을 노릇입니다.


  이때에 다로는 크게 하나를 배웁니다. 공주님이 왜 뭍에서 힘을 잃고 늙수그레한 할아버지 모습을 하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알아차려요. 다로 스스로 몸으로 겪은 뒤에야 비로소 공주님이 겪는 아픔하고 슬픔을 제대로 느끼지요.


  누구라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몸으로 겪지 않고서는 몰라요. 스스로 몸으로 겪지 않고서 ‘책으로 얻은 지식’이나 ‘남한테서 들어서 얻은 정보’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몸으로 겪어야 똑똑히 알지요. 김치찌개 맛을 책으로 읽거나 이야기로 듣는대서 알까요? 집집마다 다 다른 김치찌개 맛을 집집마다 찾아가서 밥상을 받지 않고서야 알까요?



‘인어의 말을 알아듣겠어. 아니, 이건 말이 아냐. 그냥 느껴진다. 상대방의 의사가.’ (32쪽)


‘진짜 기분 이상하다. 서서히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고 있어. 물 대신 공기가 코로 들어오고, 이마로 맛도 느껴지지 않아. 발을 내딛는 게 무거워. 바다에서는 조금만 힘을 줘도 길게 물살을 갈랐는데 온몸으로 느껴지던 감각이 죽고 있어. 바다에서는 물이, 생물들이 모두 말을 걸었는데,’ (58∼59쪽)



  서로 다른 삶이니 서로 다른 말을 씁니다. 서로 다른 삶이기에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이리하여, 우리는 자칫 다투거나 싸우고 맙니다. 서로 다른 삶이라는 대목을 잊은 나머지, 서로 다른 말이 마치 서로 얕보거나 깔보는 줄 잘못 생각하고 말아요. 서로 다른 삶이기에 서로 다른 말을 쓰는 모습은 서로 낯설지만 서로 새로울 수 있는 아름다운 이웃으로 나아가는 얼거리라는 대목을 놓치는 사람이 매우 많아요.



“혼자 있을 때는 늘 평온한 기분 속에 살았어요. 여기 와서 다로 씨를 만나서, 정말 여러 감정을 알게 되었어요. 얄밉다, 가증스럽다, 괘씸하다, 열 받는다, 열 뻗친다.” (118쪽)


“내가 어떻게 광야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느냐면, 내게는 광야 안이나 밖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광야가 내게 속삭이는 모든 말은 다 사실이거든.” (135쪽)



  만화책 《젤리장수 다로》는 푸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려는 앳된 다로가 몸소 삶을 부대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으로 새로 배우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김민희 님은 이 만화책을 무겁게 이끌지 않아요. 때와 곳에 알맞게 재미난 우스개를 섞고, 가벼운 말놀이를 벌입니다. 무뚝뚝하거나 어둡거나 힘겹게 어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즐겁게 노래하듯이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어요. 나비처럼 가벼운 날갯짓이 되고, 새처럼 고운 목소리로 거듭나는 길을 가만히 보여줍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스스로 즐겁습니다. 삶을 허물없이 마주하면서 스스로 의젓합니다. 삶을 가없이 헤아리면서 스스로 아름답습니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서로 다른 숨결인 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서로서로 곱게 아끼면서 새롭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슬기롭게 깨달을 만합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어린 다로도, 어른 다로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도, 저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9.1.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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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김지연 지음 / 아카이브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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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2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김지연 글·사진

 아카이브북스 펴냄, 2008.11.5. 1만 원



  시에는 시장이 있듯이, 읍에는 읍장이 있고, 면에는 면장이 있습니다. ‘리’로 끊어지는 시골마을에는 이장이 있습니다. 2015년부터 주소 얼거리가 바뀌어 이제 ‘리’로 끝나는 마을 이름이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시골마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행정을 맡은 이들한테는 ‘마을(리)’이 사라졌다고 할 테지만, 마을에서 사는 이들한테는 예나 이제나 똑같이 ‘마을’이 있고, 마을을 대표하는 분을 가리키는 ‘이장’도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마을지기’라고 할 수 있는 ‘이장’이라는 이름과 자리가 생긴 발자국은 매우 짧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같은 이장은 행정과 사회 얼거리에서 생긴 이름이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에는 이장이 아닌 ‘마을 어른’이 있었거든요.


  전북 전주에서 2013년부터 서학동사진관을 꾸리는 김지연 님이 지난날 전북 진안에서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을 꾸리던 무렵에 선보인 사진책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아카이브북스,2008)이 있습니다. 김지연 님은 전북 진안이라는 시골마을에 들어와서 계남정미소라는 곳을 ‘공동체박물관’으로 고쳐서 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장이라고 하는 자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도시살이만 헤아린다면 ‘이장’이라고 하는 자리가 보일 수 없습니다. 거꾸로 시골살이만 헤아린다면 ‘동장’이나 ‘통·반장’이라고 하는 자리가 보일 수 없을 테지요.



내가 시골에 들어가기 전에는 생활 주변에 있는 회사나 관청의 직책 즉 회장, 사장, 전무, 부장, 과장 등 아니면 높으신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변호사, 의사 등이 관심 있게 눈에 들어왔고 또 그것이 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직책인 줄 알았다. 이장이라니! 아직도 그런 직함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런데 시골로 들어오면서 이장이 하는 일이 참으로 놀라웠다. (머리말)




  김지연 님은 전북 진안에서 전북 전주로 ‘사진을 이야기하는 무대’를 옮겼지만 전라북도에서 시골마을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 일을 그대로 잇습니다. 2015년에는 《빈 방에 서다》(사월의눈)라는 사진책도 선보였습니다. 《빈 방에 서다》라는 사진책을 살펴보면 김지연 님이 시골을 무대로 사진을 찍기에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사는 할머니하고 할아버지를 이웃으로 만날 수 있는 숨결이 고이 흐릅니다.


  지난 2014년에는 《삼천 원의 식사》(눈빛)라는 사진책도 나왔어요. 《삼천 원의 식사》를 살펴보면 김지연 님이 이곳저곳 바삐 돌아다니다가 밥 한 끼니를 먹던 식당에서 만난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먼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김지연 님하고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진으로 찍힙니다. 멀디먼 곳에 있느라 거의 안 보이거나 감추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김지연 님 둘레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사람들이 김지연 님 사진으로 찬찬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김지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은 김지연 님이 스스로 일구는 삶에 따라서 마주하는 이웃을 사진으로 담은 책입니다.


  사진책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은 ‘이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시골사람을 마주하면서 ‘시골은 어떤 곳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비율로 치면 시골에 사는 사람은 10퍼센트조차 안 될 뿐 아니라, 막상 농사일(농업)을 하는 사람은 5퍼센트 안팎입니다. 9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도시에 살고, 농사일 아닌 일을 하는 사람이 95퍼센트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신문이나 방송뿐 아니라 사회와 학교에서 ‘시골에 살거나 흙을 만지는 사람’ 이야기나 움직임은 거의 안 드러날 만합니다. 아예 안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진책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은 이제껏 한국 사회에서 ‘안 보이’거나 ‘안 드러난’ 자리에 있던 시골사람 이야기와 움직임을 ‘이장’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은 시골지기 모습으로 밝혀서 드러내려고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좀처럼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마주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었다면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이라는 사진책은 시골마을 이장님을 바로 ‘내 이웃’이요 ‘우리 이웃’이라는 눈길로 마주하면서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이야기꾸러미라고 하겠습니다.


  일부러 멋있게 보이는 모습으로 찍지 않습니다. 시골을 지키는 듬직해 보이는 모습으로 찍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와 동떨어지게 끝까지 시골을 붙잡는 모습으로 찍지 않습니다. 늙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찍지 않습니다. 이런 편견이나 저런 선입관이 없이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이야기가 사진 한 장으로 흐릅니다.



“이곳이 좋아요. 이곳에서 낳고 이곳에서 자랐는데 도시에 나가서 무얼 합니까.” 그 말 속에는 젊은 시절 큰 도시로 나가고 싶었던 꿈까지 부정하기에는 많은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지금은 자기 고향에 많은 애착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떠날 꿈도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버릴 수 없는 땅과 가족과 친지와 자연이 있다. (머리말)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방송에서 흐르는 이야기에 눈길을 두는 사람도 무척 적습니다. 대통령 움직임이라든지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의사나 변호가나 사장 같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놓고 눈길을 두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에서라면 이처럼 ‘사회를 이루는 높다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나 움직임이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오르내려요. 이러면서 이런 사람들 이야기나 움직임이 여느 사람들 머릿속으로 스며듭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사회를 이루는 높다는 자리’뿐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낮다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나 움직임조차 머릿속으로 스며들 겨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시골사람한테는 어떤 이야기나 움직임이 머릿속으로 스며들까요? 바로 ‘땅’이나 ‘하늘’이나 ‘숲’ 이야기나 움직임이 머릿속으로 스며듭니다. 소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지요. 풀하고 나무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지요. 논이랑 밭 이야기를 가만가만 나누지요.


  사진책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을 읽으면, 소나 풀이나 나무나 논이나 밭 이야기가 나란히 흐르지는 않습니다. 이 사진책은 시골마을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면서 삶을 짓는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로 엮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골에 있는 이웃을 살가이 마주하는 손길이 드러나고, 시골에 있는 이웃이 저마다 즐겁게 짓는 살림이 얼마나 푸근한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젊은이나 어린이가 자취를 감추는 시골이라 하더라도 이장이라고 하는 자리를 씩씩하게 맡으면서 예나 오늘이나 이 작은 마을에서 오붓한 잔치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사진으로 넌지시 보여줍니다.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본래 이름은 ‘갈우소니’라 불리웠다고 한다. 산의 형태가 소가 가로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리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새로 개간한 밭이 많다고 해서 신전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동네 어른들은 ‘갈우소니’라 부른단다. 6만여 평의 밭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당도를 자랑하는 호박고구마를 생산한다고 이장님이 자랑을 한다. 상수리를 말려서 겨울에는 상수리묵도 해먹는다고 한다. (207쪽)



  사람이 사는 시골이고, 이웃이 살림하는 시골입니다. 흙을 일구어 삶을 짓는 시골이며, 흙에서 거둔 먹을거리로 사랑을 나누는 시골입니다.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할매가 밭을 일구어 거둔 남새를 찬찬히 상자에 담아 우체국까지 짊어지고 가거나 경운기에 싣고 가서 도시에 있는 아이들한테 부칩니다. 돈으로 치면 얼마가 될는지 모르나, 땀방울이 알알이 밴 곡식이랑 남새랑 열매에는 흙내음이 서립니다. 시골사람은 스스로 즐겁게 땅을 일군 뒤, 스스로 기쁘게 이웃(거의 도시이웃)한테 베푸는 살림을 짓는다고 할 만해요.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이라는 사진책에는 이런 모습이나 얼거리가 사진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바로 이런 살림을 조용히 가꾸면서 예나 이제나 고요히 마을을 돌보는 할매랑 할배한테 둘러싸인 이장님이 사진기를 바라보는 모습이 차근차근 나와요. 이장님은 저마다 이녁 마을이 얼마나 예쁘고 멋진가 하는 이야기를 사진가한테 자랑합니다.


  사진가는 조용히 사진을 찍으면서 조용히 이웃이 됩니다. 한 번 들렀다가 다시 안 오는 뜨내기나 구경꾼이 아니라, 한 번 들른 뒤에 기쁘게 다시 찾아오는 손님이 되고, 손님에서 어느덧 이웃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좋은 사진을 얻으려’고 자꾸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반가운 사이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웃으로서 여러 시골마을을 찾아갑니다. 이 투박한 사진책에 실린 여러 마을 이장님 얼굴을 바라보다가 우리 마을 이장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어김없이 새벽 네 시나 다섯 시에 마을방송을 하고, 궂은 일도 기쁜 일도 도맡으면서 씩씩하고 기운찬 우리 마을 이장님 모습을 곰곰이 그려 봅니다. 4349.1.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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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 꼬꼬마 도서관 5
오시마 다에코 지음, 육은숙 옮김, 가와카미 다카코 그림 / 학은미디어(구 학원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6



아이들은 흙을 만지면서 놀고 싶다

―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

 오시마 다에코 글

 가와카미 다카코 그림

 육은숙 옮김

 학은미디어 펴냄, 2006.5.5. 8500원



  모래가 있는 바닷가에 가면 바닷물에 뛰어들어 놀 수도 있고, 모래밭에서 모래를 쌓으면서 놀 수도 있습니다. 볕이 따숩고 바람이 없는 날이라면 겨울에도 바닷가로 자전거를 달려서 모래밭놀이를 하러 갑니다. 다른 고장이라면 엄두를 못 낼 수 있지만, 전남 고흥이라는 고장에서는 한겨울에도 무척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곤 해서, 이런 날은 모래놀이나 흙놀이를 하기에 좋습니다.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로 가서 모래놀이를 할 수 있고, 뒤꼍에서 흙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호미로 땅을 쪼고 꽃삽으로 다지며 손으로 무늬를 그리면서 저마다 재미난 흙집을 지으면서 놀아요.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흙을 일구며 살았고, 흙으로 집을 지었으며, 흙에서 난 것으로 실을 얻어서 옷을 지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러한 피를 물려받아서 흙놀이를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몸으로 먼저 알기 때문에 흙을 맨손으로 만지면서 놀 적에 무척 기뻐하면서 하루 내내 재미나게 웃음을 지을는지 몰라요.



비가 내리는 숲 속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해요. 나무가 도깨비처럼 보이고, 어쩐지 보통 때하고는 다른 기분이 들어요. “피피야, 어쩐지 무섭다. 그치?” (4쪽)




  오시마 다에코 님이 글을 쓰고, 가와카미 다카코 님이 그림을 그린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학은미디어,2006)를 읽습니다. 어머니랑 아이랑 개 한 마리, 이렇게 셋이 깊은 숲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산다고 하는데, 이 작은 ‘숲집’에 사는 아이는 날마다 숲마실을 다녀요. 나이로 치자면 예닐곱 살 즈음 되지 싶은 ‘그림책 아이’인데 개 한 마리를 이끌고 씩씩하게 숲마실을 누립니다.


  아이는 혼자 다닌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집에는 어머니가 있고, 언제나 함께 다니며 노는 개가 있어요. 그리고 숲에 깃들면 수많은 숲동무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요. 그림책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에서는 ‘진흙 동무’가 짠 하고 나타나지요.



단비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서 데굴데굴 구르네요. 바로 그때예요. 진흙탕 속에서, “어이쿠, 위험해!” 하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어요. 그리고 단비를 와락 감싸 안았어요. (8∼9쪽)



  비가 오는 날 비옷을 입고 숲마실을 나온 단비(그림책 아이)는 어쩐지 이날 따라 무섭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앞뒤를 안 가리고 막 숲을 가로지르면서 달리는데,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지려 해요. 이때에 땅밑에서 커다란 진흙덩이가 솟아올라요. 땅밑에서 솟아오르는 커다란 진흙덩이가 단비를 포근히 안아 주기에 단비는 조금도 안 다칩니다.


  커다란 진흙덩이는 단비한테 말을 걸어요. 이 진흙덩이는 진흙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지렁이를 귀여운 동무로 삼는 멋진 ‘흙 할아버지’입니다. 흙 할아버지 곁에는 흙 아이가 있어요. 이 흙 아이들은 단비라고 하는 멋진 아이가 숲으로 찾아와 주어서 반갑습니다. 흙 할아버지도 흙 아이도 숲 아이인 단비하고 함께 놀기로 합니다.




“할아버지, 우리 함께 놀아요!” 단비는 진흙 할아버지를 잡아끌었어요. “그래, 그래.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다.” 그때 여기저기 진흙탕 속에서 진흙 꼬마들이 나타나 진흙 할아버지를 따라왔어요. (12쪽)



  숲이란 어떤 곳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풀하고 나무만 우거지면 숲이라고 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흔히 시골이라 일컫는 곳은 논밭이랑 집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마을이 숲에 포근히 안긴 곳이라고 해야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켜 시골이라 하지만, 예부터 시골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숲으로 둘러싸여서 숲내음을 마시고 숲넋을 키울 만한 보금자리였지 싶어요.


  아이들은 숲에서 마음껏 여러 동무하고 이웃을 만나면서 놉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나무를 하거나 나물을 합니다. 아이들은 숲에서 실컷 뛰놀거나 뒹굴면서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랍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얻은 나무로 집을 짓거나 불을 피울 뿐 아니라, 숲에서 얻는 나물로 맛난 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숲이 있기에 늘 싱그러우면서 푸른 바람이 불어요. 맑으면서 따사로운 바람은 숲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다가 깨끗하고 시원한 물은 숲에서 샘솟지요. 냇물도 샘물도 숲에서 솟아요. 사람으로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숨결을 숲에서 얻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나, 진흙 할아버지 무릎이 의자가 되었네. 따뜻하고 흔들흔들 재미나요. 해님 냄새도 나고요.” 드르렁드르렁, 진흙 할아버지 숨소리가 들려요. 피피도 진흙 꼬마들도 잠이 들었어요. 단비도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23쪽)



  숲에 깃들어 흙 할아버지하고 노는 아이는 할아버지 몸에서 해님 냄새를 맡습니다. 해님은 흙을 따사로이 감싸고, 해님 기운을 받은 흙은 풀이며 꽃이며 나무이며 튼튼하게 북돋웁니다. 흙이 있어서 씨앗을 심습니다. 흙이 있기에 꽃이 핍니다. 흙이 있기에 숲이 우거져요.


  그림책 아이는 온통 흙투성이가 되도록 놉니다. 흙 아이를 동무로 삼기도 했고, 흙 할아버지가 지은 흙집에 들어가서 소꿉놀이도 하거든요.


  우리 집 아이들도 아주 꽁꽁 얼어붙도록 추운 날이 아니라면 맨발에 맨손으로 흙밭에 온몸을 맡기면서 놀기를 좋아합니다. 손발에서 흙내음이 나는 놀이를 즐기고, 온몸에서 흙가루가 포시시 떨어지도록 흙을 가까이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압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생각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노래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삶을 새로 배우고 사랑을 새로 가꿉니다. 4349.1.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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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 - 격렬하기 짝이 없는
유복렬 지음, 세린.세아 그림 / 눌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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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6



아이들이 ‘어머니 일기’를 읽으며 자라다

―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

 유복렬 글

 세린+세아 그림

 눌와 펴냄, 2015.12.22. 13000원



  한국말에 ‘아이키우기’나 ‘아이돌보기’는 따로 한 낱말로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으레 붙여서 쓰는 분도 있지만, ‘아이키우기’나 ‘아이돌보기’는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에는 한자말 ‘육아(育兒)’만 나와요.


  한자말 ‘육아’는 “아이 기르기”를 뜻합니다. ‘기르다’는 씨앗을 심어서 남새나 나무를 기르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러한 몸짓처럼 아이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말과 생각으로 심어서 기르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얼거리를 아우르면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도 ‘기르다’로 나타내요. 다음으로는 몸을 다스리는 일이라든지 버릇을 몸에 익히는 일도 ‘기르다’라고 해요.



매일 벌어지는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기저귀 못 떼서 학교 못 간 아이는 내 생전 본 적이 없다! 때가 되면 다 가리게 될 것을 왜 아이한테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주고 야단들이냐!” (34쪽)


나는 아이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 그만뒀다. 할 말이 없었다. 밥, 국, 반찬, 이것들을 한 상에 차려놓고 함께 먹는 우리 식습관이 프랑스에서는 아무렇게나 ‘돼지처럼 먹는’ 식습관으로 취급받은 것이다. (55쪽)



  나는 아이를 하나씩 낳아서 두 아이하고 함께 사는 동안 ‘아이키우기·아이돌보기·육아’를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지 않고서는 키우기이든 돌보기이든 기르기이든 알 길이 없어요.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기에 비로소 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피거나 아끼거나 사랑할 때에 즐거운 삶이 되는가를 알아요. 함께 살면서 늘 지켜보고 언제나 마주하는 동안 어버이로서 들려줄 이야기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함께 살면서 밥을 함께 먹고 잠을 함께 자는 동안 어버이로서 보여줄 몸짓을 새롭게 알아차려요. 함께 살면서 말을 섞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버이로서 어떤 사람으로 슬기롭게 서는 마음이 될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새롭게 익힙니다.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두 아이를 낳아 돌본 나날을 되새긴 이야기를 담은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눌와,2015)를 읽으면서 키우기나 돌보기나 기르기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금 되짚습니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어버이가 되었기에 아이를 낳습니다만,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만 ‘얻어먹’거나 옷만 ‘받아입’거나 잠만 ‘한집에서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보여주는 모든 몸짓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배워요. 아이는 어버이가 들려주는 모든 말씨를 낱낱이 들으면서 따라하지요.


  외교관 어머니를 둔 아이라면 아주 마땅하고도 부드러이 여러 외국말을 듣고 자랍니다. 이러면서 여러 이웃나라 삶과 사람을 마주하고요. 여러 외국말을 듣는 대서 더 열린 마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러 외국말은 그저 여러 외국말일 뿐이고, 어버이로서 열린 마음으로 살림을 가꿀 적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열린 마음을 익힐 수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프랑스에서 겪었던 힘겨운 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단호한 태도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68쪽)


프랑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가하는 가장 큰 벌은 엉덩이 때리기 같은 게 아니라 바로 ‘디저트 생략’이다. (87쪽)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를 읽어 보면, 이 책을 쓴 유복렬 님은 외교관으로서 몹시 바쁩니다. 그래서 갓난쟁이인 아이들을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한테 맡기면서 이녁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고 나서는 퍽 이른 나이부터 유치원에 다녀야 하고, 어린이집을 거쳐서 학교를 다니지요.


  유복렬 님은 어머니 자리에 있습니다만, 집 바깥에서 보내는 겨를이 훨씬 긴 터라, 아침하고 저녁(웬만하면 밤)에서야 아이들 얼굴을 마주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몫은 시설(유치원·어린이집)하고 학교가 맡지요. 다만, 아이들이 시설하고 학교에서 배우더라도 유복렬 님은 집에서 할 일을 젖혀두지 않아요. 집에서는 집살림이 있고, 집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보금자리입니다. 프랑스를 돌고 알제리에 머물다가 미국에도 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삶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나 유복렬 님네 아이들은 ‘집 아닌 보금자리’에서 삶하고 살림을 새로 가꾸는 하루를 누려요. 비록 아이들로서는 좀 고단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할 터인데, 아이들은 아예 새로운 말을 써야 하는 곳에 가더라도 의젓합니다. 그냥 받아들여서 그냥 배우거든요.


  한국말에서 프랑스말로 넘어가든, 프랑스말에서 다시 한국말로 넘어오든, 한국말에서 또 프랑스말로 넘어가거나 영어로 건너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짓는 보금자리에서 스스로 씩씩하게 일어서는 길을 슬기롭게 알아요. 그래서 아이들 나름대로 새로운 외국말을 즐겁게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기쁘게 키우면서,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아기자기하고 재미난 하루를 누립니다.



우리나라는 환경보호 차원에서 일회용 물건을 쓰지 못하도록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회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싫어서 일회용 물건을 쓰지 않는다. 좋은 물건을 사서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도록 오래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남이 그렇게 아끼면서 썼던 중고품을 사서 쓰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 (116쪽)


“왜 다음 학년에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하는 거죠? 그럼 학교에서는 뭘 하죠?” 아이의 얼굴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아마 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겠지. 선행 학습을 한다고 해도 완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면 확실하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럼 학교에서는 복습을 하는 거네요. 좀 이상해요.” (121쪽)



  어느 나이에 꼭 무엇을 알아야 할 교육이나 육아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아이가 다 다르니까요. 다만, 나이에 맞추어서 하는 교육이나 육아는 아니더라도 늘 지키거나 다스려야 할 대목은 하나가 있어요.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가 어느 나이라 하더라도 어버이는 늘 사랑으로 아이를 마주할 노릇이에요.


  유복렬 님이 ‘떠돌이’ 같은 외교관 노릇을 하며 여러 나라를 서너 해마다 올겨야 하지만, 아이들은 어머니를 떠돌이로 여기지는 않아요. 그저 어머니인걸요.


  한곳에 뿌리를 내려 내처 살기에 아이들이 더 잘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면서 다니기에 더 열린 마음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어떤 몸짓하고 눈빛하고 마음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마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한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더라도 어버이 마음이 흔들리면 아이들도 흔들려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도 어버이 마음이 씩씩하고 의젓하면 아이들도 씩씩하고 의젓하지요.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살가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대목이로구나 싶어요. 어머니로서(또 아버지로서) 수많은 어버이가 아이하고 함께 나눌 삶이란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보듬는 살림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눈빛을 나누며, 서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가꾸면 돼요. 



일본어를 배우는 세린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것이다. (152쪽)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환경에서 또래와 어울려 놀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언어를 체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늦다고 조급해 할 필요도, 오류가 많다고 잔소리할 필요도 없다. (183쪽)



  아이는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새로운 웃음이랑 노래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요.


  어버이만 아이를 가르치지 않고, 아이만 어버이한테서 배우지 않아요. 예부터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도 ‘키우기·돌보기·기르기’는 함께 주고받는 사이가 될 때에 이루어졌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아이를 키우거나 돌보거나 기를 적에는 즐겁게 웃으면서 가르치고 기쁘게 노래하며 배우는 동안 이루리라 느껴요.



이 책을 쓰는 내내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에 신나 보였다. 꽤 관심을 보이며 이따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둘이 붙어 앉아 엄마는 모르는 자기들끼리의 속내를 서로 주고받기도 했다. 내가 초고를 완성하여 원고를 건네자 두 아이 모두 끝까지 읽어 주었다. (238쪽)



  외교관으로 일하며 무척 바쁠 유복렬 님이지만 늘 아이를 헤아리는 하루이기에 아이들이 더없이 사랑스레 잘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이쁘장한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이한테 읽히기에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바라보고 배우고 마주하면서 즐겁게 자라겠네 하고 느껴요.


  어버이는 어떻게 육아일기를 쓸 수 있을까요? 아이한테서 배우니까 육아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어버이는 육아일기를 왜 쓸까요? 아이한테서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를 가슴에 품으면서 짠한 눈물이랑 웃음이 피어나기에 육아일기를 씁니다.


  오늘 어버이가 쓰는 육아일기에는 오늘 아이하고 마주한 삶을 되새기면서 즐겁게 배운 이야기가 깃듭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읽을 ‘어머니 육아일기’는 앞으로 아이들이 새로운 어른이 될 무렵 저희 어릴 적이랑 발자국을 되돌아볼 뿐 아니라 저희 어머니가 어떠한 마음으로 저희를 사랑하며 돌보았는가 하는 마음자리를 살피는 길잡이가 되어요. 나도 시골집에서 두 아이랑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열고 닫으면서 살몃살몃 육아일기를 씁니다. 나 스스로 우리 아이들한테서 새롭게 배운 이야기를 쓰는데, 이 이야기는 머잖아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이랑 사랑을 배우며 슬기롭게 일어서는 밑돌이 될 수 있겠지요. 4349.1.1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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