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까마귀나무 빨간우체통 3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 박물관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126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 소녀와 까마귀나무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박물관 펴냄, 2008.6.5. 8800원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를 낳고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물어보고, 내가 낳아서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면서 물어봅니다. 먼저 우리 아버지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시느라 바빠서 이녁 아이들하고 얼굴을 마주할 겨를조차 몹시 적었습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날이었으니까요. ‘아버지하고 논다’고 하는 일은 겪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떠오를 뿐 아니라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다’고 하는 일조차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내가 우리 아이들하고 보내는 나날을 헤아립니다. 나는 집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놉니다.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도맡고, 바깥일이 있으면 이 바깥일도 도맡습니다. 이러면서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몫도 도맡습니다. 솜씨 있거나 야무지기에 이렇게 온갖 일을 다 하지는 않아요. 함께 짓는 살림에서 아버지로서 맡는 몫이 좀 더 많다고 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이렇게 얘기할 만한데, 힘이 조금 더 센 사람이 짐을 더 많이 날라요. 두 어버이 가운데 힘이 조금 더 있는 쪽이 여러모로 집일이나 집살림을 더 많이 하는 셈입니다.


  아무튼, 나를 낳아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니,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거의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 아이한테 새롭게 지어서 물려주려고 하는 길이라 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 거의 받지 못한 ‘아버지 사랑’이기에 ‘아버지로서 선 나’로서도 우리 아이들한테 ‘아버지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다고 할 만하지요. 그렇지만, 먼 옛날부터 이어졌을는지 모를 ‘사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지 못하거나 물려받기 어렵던 사랑’은 이제 끝나도록 마음을 쏟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까마귀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되니까 나무 꼭대기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잎사귀들 사이로 작고 동그란 까마귀 머리들이 까닥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9쪽)


첫 번째 까마귀가 날아오르면 다른 까마귀들이 따라 날아오릅니다. 이때 나무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 가지들은 흔들거리지요. (10쪽)



  리타 얄로넨 님이 글을 쓰고, 크리스티나 루이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박물관,2008)를 읽습니다. 책이름만 보아서는 소녀하고 까마귀나무가 도무지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알기 어려울 만합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문학 첫 쪽을 넘기니,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한테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사고로 일찍 죽었어요.



우리 보트를 닦을 때처럼 병든 나무도 깨끗이 씻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나무를 돌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씻어 주는 것은 비뿐이랍니다. (16쪽)


나는 벌써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앨범에 보트 사진들이 있는데,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엄마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도요. (27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는 ‘까마귀나무’를 무척 애틋하게 여깁니다. 나무 가운데 ‘까마귀나무’라는 나무가 있지는 않아요. 까마귀가 무척 많이 내려앉는 나무이기에 ‘까마귀나무’라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나무는 바로 ‘소녀네 아버지’가 소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알려준 나무예요. 두 사람(아버지와 아이)이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나무입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티나, 키사 그리고 사라가 내게 와서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슬프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답니다. (37쪽)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마다 아빠와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지금도 무심결에 자전거를 준비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곧 아빠가 계시지 않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 (38쪽)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말아서 아버지하고 얽힌 이야기(추억)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아직 튼튼히 계시지만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 일이 드물거나 얼굴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기에 서로 나눌 만한 이야기(추억)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도 ‘아버지가 사는 동안’ 서로 나눈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하고 한집에서 사는 데에도 막상 서로 마음을 열지 않아서 따사롭거나 너그럽거나 즐겁게 꽃피우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없기도 합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살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으레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읊습니다. 나는 이제껏 우리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제대로 읊은 일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부장 사회에서 자란 터라 사내(아들)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테지요. 그야말로 핑계이지요. 가부장 사회가 단단하건 말건,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아이라면, 아이로서 어버이한테 “아버지 사랑해요”이든 “어머니 사랑해요”이든 얼마든지 말할 만해요.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는 ‘이런 틀을 그대로 두라’고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를 깨고 아름다운 삶자리가 일어서도록 바꿀 수 있어요.



엄마는 한 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자 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44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는 아주 차분하게 이야기를 잇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씩씩하게 하루를 새로 맞이하면서 어머니하고 지낼 뿐 아니라 동무하고 지내는 소녀 이야기를 곰곰이 들려줍니다. 어린 가시내는 무엇을 하든 이곳에서는 이곳에서 함께 지내던 아버지가 떠오르고, 저곳에서는 저곳에서 함께 놀던 아버지가 떠오르지만, 그야말로 씩씩하지요. 그러나, 남모르게 눈물에 젖는 날도 많을 테고, 남이 알도록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을 테지요. 다만, 눈물에 젖든 눈물을 흘리든, 아버지하고 함께 지내고 놀고 어울리고 복닥이던 나날을 기쁜 사랑이라는 씨앗으로 가슴에 심습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로서는 짝꿍을 여의었어요. 아이는 어머니 마음까지 헤아리고, ‘까마귀나무’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무도 함께 헤아립니다. 어버이 한 사람이 곁을 떠나서 무척 슬플 텐데, 슬픔은 슬픔대로 맞아들이면서도 이 슬픔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요.



나는 이 아주머니와 봉은 잊어버리고 병에 걸린 나무의 움푹 패인 곳을 만져 보았습니다. 어쩌면 나무도 만져 주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무 옆에 서 있으면 내 생각을 듣겠죠. (60쪽)



  아침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을 깹니다. 저녁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아침저녁으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책상맡에 앉아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해요. 아침저녁으로 집 안팎에서 함께 뛰고 달리면서 놀고요.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는 꼭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이녁 손자하고 스스럼없이 웃고 뛰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으며 살았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오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을 즐겁게 받을 적에 참말 즐겁게 자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랑도 기쁘게 받을 때에 그야말로 기쁘게 자라요.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란 ‘사랑자리’요 ‘꿈자리’입니다. 아이한테 어머니 자리도 ‘꿈자리’이고 ‘사랑자리’예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도 아이는 늘 ‘사랑자리’이면서 ‘꿈자리’일 테니까, 어버이랑 아이는 서로서로 ‘사랑꿈자리’이고 ‘꿈사랑자리’로 한집살이를 이루리라 봅니다. 4349.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쌀 한 톨 - 수학 옛이야기
데미 글.그림, 이향순 옮김 / 북뱅크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603



‘쌀 한 톨’에 깃든 힘

― 쌀 한 톨 (수학 옛이야기)

 데미 글·그림

 이향순 옮김

 북뱅크 펴냄, 2015.1.30. 13000원



  쌀 한 톨이 있습니다. 벼라고 하는 풀이 맺은 열매를 깎아서 쌀을 얻습니다. 벼 열매인 ‘벼알’, 그러니까 ‘나락’ 겉껍질인 겨를 살짝 깎으면 누런쌀이고, 겉껍질인 겨를 많이 깎으면 흰쌀입니다. 겉껍질을 살짝 깎으면 누런 빛이 감도는 쌀을 얻고, 겉껍질을 많이 깎으면 하얀 빛이 감도는 쌀을 얻어요. 갓 지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쌀밥은 바로 벼라고 하는 풀이 우리한테 베푸는 고운 선물입니다.


  이 쌀을 알맞게 씻고 불려서 밥을 지을 적에 늘 아이들이 곁에 달라붙으면서 묻습니다. 날마다 먹으면서도 새삼스레 묻고, 늘 바라보면서도 새롭게 묻습니다. “이 쌀 뭐야?”


  이 쌀은 무엇일까요? 참말 이 쌀은 무엇일까요? 쌀이란 무엇이기에 우리한테 밥이 되고, 우리 목숨을 돌봐 주며, 이 땅에 논을 이루어 열매를 맺어 새로운 숨결을 베푸는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배가 부릅니다. 배가 부르면 한결 신나게 뛰어놉니다. 어른도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배가 불러요. 배가 고플 무렵에는 일을 멈추고 밥상맡에 둘러앉아 느긋하게 밥술을 들지요. 밥을 먹는 동안에는 누구나 평화롭고 평등하며 포근합니다.



그곳 백성들은 벼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농사지은 쌀을 거의 모두 왕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6쪽)



  데미 님이 빚은 그림책 《쌀 한 톨》(북뱅크,2015)을 읽습니다. ‘수학 옛이야기’라고 하는 《쌀 한 톨》인데, 이 그림책은 인도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빚었다고 해요. 굶주리는 백성을 못 본 척하면서 궁궐 곳간에 쌀자루를 가득 모아 두기만 한 임금님을 넌지시 나무란 어느 가시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어요.




쌀자루 하나에서 쌀이 떨어져 내리는 걸 동네에 사는 라니라는 소녀가 알아챘습니다. 라니는 재빨리 뛰어가 코끼리 곁을 따라 걸으면서 치마폭에 떨어지는 쌀알을 받았습니다. (13쪽)



  계급이 촘촘히 나뉜 인도 사회에서 가난한 시골마을 가시내는 어떻게 임금님을 넌지시 나무랄 수 있을까요? 게다가 고작 쌀 한 톨로 임금님을 구석에 몰아붙이면서 잘잘못을 일깨울 뿐 아니라, 쌀 한 톨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대목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림책 이야기를 살피면,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느 임금님이 궁궐 곳간에 쌀자루를 모으면서 ‘굶주림이 들 때를 살펴서 미리 쌀자루를 모으고, 나중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밝혔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나라에 굶주림이 돌자 임금님은 곳간을 안 열었다는군요. 나중에 더 큰 굶주림이 찾아들는지 모르는데 섣불리 곳간을 열 수 없다고 말했다는군요.


  임금님 말마따나 올해보다 이듬해에 더 깊고 고단한 굶주림이 찾아들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은 오늘 밥을 먹지 못해 굶주리다가는 그만 목숨을 잃겠지요. 올해에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듬해에는 ‘일할 사람’이 줄어들 뿐 아니라, ‘일할 힘’도 빠지겠지요. 한 번 굶주리고 나면 이듬해에는 더 굶주리기 마련이고, 그 다음해에는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어요. 임금님으로서는 ‘나중을 생각하겠다’고 말하면 될는지 모르나, 오늘 굶주리는 사람들로서는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기에 임금님더러 곳간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임금님은 이런 목소리를 귀여겨듣지 않아요.




“전하, 상이라니요. 저는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꼭 그리 하고자 하신다면 저에게 쌀알 한 톨만 주시옵소서.” (16쪽)



  임금님은 밥을 굶은 일이 있을까요? 임금님은 굶주려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드러누워야 하던 날이 있었을까요? 임금님은 농사가 잘 안 되어 곡식을 거의 거두지 못해 슬픈 삶을 스스로 겪은 적이 있을까요? 백성이 굶주릴 적에 임금님은 무엇을 먹으면서 지낼까요?


  곳간을 열지 않아 사람들은 굶주리다가 죽습니다. 이러는 동안 궁궐에서는 잔치도 열리지요.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줄 모르니까요. 이웃이 어느 만큼 배고프거나 고단한지 모르니까요.


  이럴 즈음 어느 시골마을 가시내가 ‘왕실 곳간에서 궁전으로 쌀자루를 싣고 가는 코끼리’를 봅니다. 쌀자루를 싣고 가던 코끼리는 ‘가는 길에 쌀알을 흘립’니다. 이름이 ‘라니’라는 가시내는 이 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쌀 한 톨만 이녁 치맛자락에 담지요. 그러고는 궁궐로 찾아가서 임금님한테 쌀 한 톨을 바치기로 해요. 코끼리가 흘린 쌀 한 톨을 마음대로 가질 수 없기에 임금님한테 돌려주겠노라 말하면서요.


  자, 임금님은 ‘길에 떨어진 쌀 한 톨을 임금님한테 돌려주겠다’고 밝히는 어린 가시내한테 무엇을 할까요? 임금님은 어린 가시내가 갸륵하다고 여기면서 무언가 선물(상)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갸륵한 가시내는 임금님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임금님은 거듭 무엇이든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 보라고 해요. 이때에, 어린 가시내는 하루에 쌀 한 톨만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튿날에는 곱으로 두 톨을 주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곱으로 넉 톨을 주되, 이렇게 서른 날만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해요.


  임금님은 가만히 헤아립니다. 어린 가시내가 그야말로 ‘욕심이 없이 너무 착하기’만 하다고 여깁니다. 코끼리가 싣고 가던 쌀자루에서 흘러내린 쌀알을 치맛자락에 고스란히 담아서 조용히 지나갔으면 더 ‘넉넉히’ 쌀을 얻었을 텐데, 좀 바보스럽기까지 하다고 여깁니다.




9일째 되던 날 라니는 256톨에 이르는 쌀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라니가 받은 쌀은 전부 511톨이었는데, 그건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정직하지만 대단히 영리하지는 않구나. 쌀자루에서 흘러나오는 쌀을 치마폭에 담았더라면 이보다 더 많은 쌀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왕이 생각했습니다. (20쪽)



  쌀 한 톨을 받기로 한 날부터 서른 날이 지난 뒤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참말 임금님 말대로 라니라는 가시내는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선물을 바랐을까요?


  첫 날에는 한 톨이고, 사흘째에는 넉 톨이며, 닷새째에는 열여섯 톨인 쌀알입니다.  여드레째에는 256이라는 숫자가 되고, 열나흘째에는 8192이라는 숫자가 되어요. 그런데 열여드레째에는 131,072라는 숫자가 되더니 스물이틀째에는 2,097,152라는 숫자가 되어요. 스물여드레째에는 134,217,728이라는 숫자가 되고, 마지막 서른째 날이 되니 자그마치 536,870,912이라는 숫자가 됩니다.


  임금님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린 가시내하고 다짐을 했기에 이 숫자만 한 쌀알을 모두 선물로 주었고, 서른째 날이 되니 임금님 곳간에 있던 쌀자루는 모두 어린 가시내한테 돌아갔습니다. 어린 가시내는 임금님을 아뢰면서 이 쌀자루는 모두 ‘굶주린 이웃’한테 나누어 줄 생각이라고 밝힙니다. 이때가 되어서야 임금님은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코앞에 있을 적에는 참말 ‘코앞에 있는 굶주린 사람한테 밥을 주어’야 하는 줄 깨닫지요. 쌀 한 톨이 한 달 사이에 ‘궁궐 곳간에 있는 쌀자루’를 모두 비우는 숫자가 되듯이, 굶주림이 이렇게 커진다는 대목을 비로소 알아차리지요.


  아이하고 그림책 《쌀 한 톨》을 함께 읽으면서 숫자놀이를 할 뿐 아니라, 숫자하고 얽히는 삶을 나란히 돌아봅니다. 겉으로 드러난 숫자만 읽는 눈길이 아니라 속으로 깃드는 삶을 곰곰이 읽을 줄 아는 눈길이 될 때에 비로소 참다운 살림이 되고 사랑이 되는 얼거리를 되새겨요. 곳간에 쟁이기만 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복지’도 될 수 없다는 대목을 생각하고, 작은 씨앗 한 톨을 심어서 새롭게 거두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헤아립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 바퀴, 언어 - 유라시아 초원의 청동기 기마인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형성했나
데이비드 W. 앤서니 지음,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224



앞으로 5000년 뒤를 생각해 본다면

― 말, 바퀴, 언어

 데이비드 W. 앤서니 글

 공원국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015.11.20. 4만 원



  데이비드 앤서니 님이 빚은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발자국을 가로지르면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하는 땀방울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지난 오천 해에 걸쳐서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떠한 살림을 가꾸고 어떠한 삶을 지으면서 ‘살림·삶’을 ‘문화’로 일구었는가 하는 대목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쉬운 일일까요? 조금도 안 쉽다고 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한테 기원전 3000년대 살림살이나 삶이란 너무 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무렵에는 숲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고, 그무렵에는 햇볕이나 바람이 오늘날하고 어떻게 달랐는지 알 수 없으며, 그무렵에는 어떤 생각을 어떤 말로 나타냈는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정말로 약 5000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어휘의 화석일까? (14쪽)


음의 변화가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언어 안에서 질서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뇌에 내장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41쪽)



  《말, 바퀴, 언어》라는 책이 아니더라도, 오늘 200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한 가지를 헤아려 볼 만합니다. 앞으로 오천 해가 지난 7000년대라고 하는 때를 살아갈 먼 뒷날 사람들한테는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일구는 2000년대 ‘문화’는 그야말로 동떨어지거나 아스라한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될 테지요. 앞으로 오천 해쯤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아갈 사람들은 아주 다른 말을 쓸 테고, 아주 다른 살림살이와 삶이 되겠지요.


  오천 해 뒤가 아닌 오백 해 뒤만 헤아리더라도, 앞으로 오백 해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 사람들은 ‘석유 문명’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원자력 발전’은 안 쓰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전쟁무기와 군대하고 얽힌 실타래도 무척 다르게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현대 문명이나 문화는 거의 하루가 다르다 할 만큼 빠르게 바뀌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니까요.



바퀴가 끼친 충격파의 명백한 증거는 네 바퀴 수레 기술의 전파 속도였다. 사실 너무나 빨리 전파되어 우리는 어디서 바퀴-축의 원리를 발명했는지조차 말할 수 없다. (112쪽)


길들인 소와 양은 인간이 흑해-카스피해 초원의 환경을 이용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와 양은 사람처럼 길러졌기 때문에 야생 동물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노동 및 걱정거리의 일부가 되었다. (206쪽)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앞으로 한두 세대 뒤만 되더라도 오늘날하고 아주 달라질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보면 ‘도시 거주민’이 90퍼센트를 웃돌고 ‘농업 인구’는 5퍼센트가 될 동 말 동합니다. 고작 5퍼센트 ‘농업 인구’가 95퍼센트를 먹여살리는 얼거리입니다. 이러니 한국에서 웬만한 곡식이나 열매는 이웃나라에서 사들일 수밖에 없지요.


  이런 ‘식량 수입 문명’은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머잖아 ‘국가 계획 통제 정책’이 생겨서 ‘강제 농업 종사 인구’가 늘어나지는 않을까요? 머잖아 ‘식량 수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아 지구별 모든 나라는 다른 어느 대목보다 ‘농업 인구’를 다시 늘리려는 길로 돌아서지 않을까요? 석유를 태워서 쓰는 문명이 저물 즈음에는 이러한 흐름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오천 해 뒤 역사나 문화라든지, 오백 해 뒤 역사나 문화뿐 아니라, 고작 쉰 해 뒤에 찾아올 역사나 문화마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201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2060년대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조차 도무지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장거리 교역, 선물 교환 그리고 대중적 희생제와 연희를 요구하는 새로운 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282쪽)


우리는 네 바퀴 수레가 정확히 언제 처음 유라시아 초원으로 굴러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 남부 브로노치체에서 나온 점토 잔 위에 찍힌 네 바퀴 수레 이미지의 연도는 확실히 서기전 3500∼서기전 3300년으로 정해졌다. (451쪽)



  1960년대를 살던 사람으로서는 2010년대에 이렇게 ‘스마트폰과 인터넷 문화’가 퍼질 줄 알기 어려웠겠지요. 게다가 2010년대를 사는 우리가 쓰는 ‘말·글’은 1960년대 사람들이 쓰던 ‘말·글’하고 무척 달라요.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흐름을 가로지르면서 ‘인도·유럽 공통조어’가 어떻게 퍼지거나 태어나거나 바뀌었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이런 고고학 연구나 언어학 연구를 하면서 되살린 ‘오랜 인도·유럽 공통조어’ 말소리(옛 음운)는 1500 가지 즈음 된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과 인도와 터키와 몽골 언저리에서 태어난 문화와 문명을 살피지요.


  그런데 실타래를 풀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해도 안개에 갇힌 대목이 훨씬 많습니다. 1500 가지에 이르는 말소리는 되살렸어도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은 ‘천오백 가지’가 아닙니다.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뜯거나 다룬 풀이나 나무’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가 넘을 테고, 그무렵 사람들이 집을 짓고 옷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쓰던 말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뿐 아니라 수천 가지가 될 테지요. 생각을 나누고 사랑을 북돋우며 꿈을 키우면서 주고받은 말을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말을 널리 썼을까요?



학자들은 초원의 전차가 훌륭한 전쟁 수단이었는지, 혹은 단지 행진이나 의례에서 쓰는 상징적 수레로서 우수한 근동의 진품을 조잡하게 모방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다르다. (571쪽)


말은 값싼 겨울용 고기 공급원이었다. 왜냐하면 소나 양은 겨울 동안 꼴과 물을 제공해야 하지만 말은 겨울 초원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50쪽)



  땅속에 파묻힌 유물을 캐내면서 오천 해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아주 작은 조각을 매만지면서 아주 조그마한 그림을 그리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레’를 누가 먼저 지어냈는지 알 길이 없고, ‘말’은 누가 먼저 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들판을 달리는 짐승을 누가 먼저 길들였는지도 알 길조차 없으며, 말고기이든 양고기이든 소고기이든 누가 먼저 먹었는지마저도 밝힐 길이 없어요. 이런 대목을 놓고 역사나 문화로 이야기하자면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동시다발)’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고고학 유물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유럽 학자들이 갈무리한 언어학 보고서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유럽을 둘러싼 문화와 문명’이 오천 해 앞서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생긴 낱말(말소리)이요 수레요 말고기였다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생긴 ‘여러 곳’이 어디인가를 밝히려 합니다. 마냥 수수께끼로만 남길 수 없다고 여기는 지구별 문화와 문명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목조 구조물은 불에 탐으로써 보존되고, 쓰레기 구덩이는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금속의 부식은 함께 묻힌 섬유를 보존한다. 그러나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우리 말의 음성 속에다 우리는 미래 세대 언어학자를 위해 현재 세계의 수많은 세부 정보를 간직해 놓는다는 사실이다. (660쪽)



  오천 해를 가로지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기는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 오만 해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연구나 학문을 하려고 든다고 여길 수 있을 테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부질없는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이렇게 오천 해 발자취를 오래도록 돌아보면서 시나브로 깨달은 한 가지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먼저, 고고학은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쓰레기 구덩이’를 다칠세라 깨질세라 알뜰살뜰 캐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어학은 ‘옛말 자취는 오늘날 말에서 몽땅 사라졌어도,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주고받은 정보(삶과 살림)는 고요히 깃든다’고 해요.


  2000년대에 오늘 우리가 쓰는 살림살이는 ‘쓰레기 매립지’에 파묻힐 텐데, 오천 해 뒤에는 어쩌면 ‘대단한 유물 구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 오늘 우리가 쓰는 말(낱말, 말소리)은 뿌리를 잊거나 잃은 채 흔들린다고 할 만하지만, 바로 이러한 말에도 한식구와 이웃과 동무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는 살림살이와 삶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마디를 물려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짓습니다.


  까마득한 일이라고 할 테지만, 오천 해 뒤인 ‘칠천년대를 살 뒷사람’이 오늘(2000년대) 우리한테서 아름다운 꿈·삶·넋을 ‘쓰레기 매립지(유물 구덩이)’하고 ‘말(낱말, 말소리)’ 사이에서 기쁘게 캐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을 먹는 토끼 창비아동문고 105
김녹촌 지음 / 창비 / 198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75



괭이질을 못 해도 ‘야구 중계’는 잘 하는데

― 꽃을 먹는 토끼

 김녹촌 글

 송심이 그림

 창작과비평사 펴냄, 1988.9.25. 8000원



  김녹촌 님이 빚은 동시집 《꽃을 먹는 토끼》(창작과비평사,1988)를 가만히 읽습니다. 1988년에 처음 나온 동시집이니 어느덧 서른 해 가까이 되었습니다. 나는 1987년까지 국민학교를 다녔고 1988년에 중학교에 들어섰습니다. 이 동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이 동시집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 배운 동시는 모두 글솜씨를 가다듬는 얼거리였다고 느낍니다. 삶이 드러나거나 묻어나는 동시는 배운 적이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그무렵 학교나 사회에서 흔히 쓰던 말은 ‘글짓기’였고, 억지로 쥐어짜서 멋있게 보이도록 뚝딱뚝딱 써야 비로소 ‘시나 동시가 된다(문학이 된다)’고 배웠어요.



이상한 일이다. / 도시 한복판 / 시멘트 발린 마당인데 / 마당 귀 어디에선가 / 철썩철썩 들려 오는 / 파도 소리. (은모래알 그놈들)


학교 오는 길에 / 강버들 꺾어서 만든 / 버들피리 / 자꾸만 불어 보고 싶다. // 선생님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 앵무새처럼 외워 대는 / 어머니 바둑이도 재미가 없어, (버들피리)



  〈버들피리〉나 〈지게〉 같은 동시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나도 어릴 적에 마을에서 버드나무는 흔히 보았습니다. 버들잎으로 멋지게 풀피리를 부는 동무를 보았습니다. 나도 따라서 해 보려 했지만 나는 잘 안 되었습니다.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마을에서 지게질을 하는 이웃 아저씨를 쉽게 보았습니다. 연탄을 나르든 짐을 나르든 지게를 많이 썼어요.


  그렇지만 이런 버들피리 이야기나 지게 이야기를 다룬 동시가 1980년대 교과서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무렵 교과서에서 ‘학교 공부(‘어머니 바둑이’를 읊는 교과서 공부)는 재미가 없고 버들피리를 불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룬 동시를 실어 줄 만했는지 궁금합니다만, 또 ‘지게 지고 일하는 시골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동시가 참말 그무렵 교과서에 나올 만한지 아닌지 모릅니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나 동화는 읽지 못한 채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갔습니다.



사과를 먹는다. / 아이들이 / 주렁주렁 익은 / 햇빛덩이를 먹는다. (사과)


우리 아버진 / 이 세상 처음 나실 때부터 / 지게 지고 / 태어나신 것일까? // 전라도 어느 산골 / 어려서부터 / 지게 지고 / 남의 집을 살다가, (지게)



  어릴 적에는 방학을 맞이하면 곧잘 어머니 시골집에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 시골집에서는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담배밭 사이를 지나가면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담뱃잎을 말리는 담뱃간 옆에서도 냄새가 어질어질했어요. 그때에는 〈땀냄새〉 같은 동시를 알지 못했어도, 담배밭 일이 얼마나 고되겠는가 하는 대목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서 소한테 여물을 끓여 주고 틈틈이 꼴을 베어 주는 살림을 사촌 형이나 누나가 의젓하게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삶을 꾸리고 짓는 손길’이 도시랑 시골이 이렇게 다르네 하고 새삼스레 느끼곤 했어요. ‘먹고 사는 일’은 하나도 모르는 채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삶은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노릇이 아닌가 하고도 느꼈어요.


  그러나 외가마실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오면 어느새 이런 일을 까맣게 잊습니다. 삶자리에서 늘 느끼거나 살피거나 겪거나 바라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노릇이요 배울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참말로 지난날 학교에서 어린이한테 가르친 동시는 너무 삶하고 멀어졌다고 할까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어린이한테 ‘삶하고 얼마나 가까운 동시’를 가르치는지 모르겠는데, 예나 이제나 ‘먹고 사는 일’을 어른이 아이한테 똑똑히 보여주고 슬기롭게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면서 지내는데, 늘 집에서 쉬고 자고 하는데, 밥이랑 옷이랑 집하고 얽힌 삶을 교과서나 동시나 문학에서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가르치지 못한다면 아이는 살갗으로 깨달아서 느낄 만한 이야기가 거의 없을 듯해요.



담배잎 따서 지고 오신 / 아버지도 형님도 / 비지땀으로 / 흥건히 옷이 젖었고, // 콩밭 매고 오신 / 어머니도 누나도 / 진땀으로 함초롬히 / 적삼이 젖었습니다. (땀냄새)


씨앗 하나 뿌릴 줄도 모르고 / 괭이질도 하나 옳게 할 줄 모르면서 / 밥만 먹으면 만날 야구나 / 해먹고 사는 사람들. // 어느 편이 / 지고 이기면 뭘 하며 / 누가 홈런을 쳐서 / 몇 점을 더 따면 뭘 하나? (야구 중계)



  김녹촌 님은 동시집 《꽃을 먹는 토끼》에 〈야구 중계〉라는 동시를 실으며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를 매섭게 나무랍니다.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가뭄이 들어 땅을 치는 농사꾼이 있으나, 우리 사회 다른 쪽에서는 야구 중계이니 축구 중계이니 하면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서 소리치고 떠든다고 해요. 괭이질도 모르고 씨앗 한 톨 뿌리지도 않으면서 도시 사람들이 스포츠 중계에 지나치게 목을 맨다고 나무라요.


  더군다나 1988년이라면 서울 올림픽을 치르던 해입니다. 이때에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스포츠 관람’에 더 마음을 기울이도록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엄청난 경기장을 무척 많이 짓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면 전두환이라는 분이 대통령 자리를 맡던 무렵인 1982년에 프로야구를, 1983년에 프로축구를, 잇달아 다른 여러 가지 운동경기를 널리 퍼뜨리려고 했습니다. 민주바람을 스포츠바람으로 잠재우려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동시집 《꽃을 먹는 토끼》에 나오는 〈야구 중계〉 같은 동시를 2016년 오늘 이곳에서 어린이나 어른은 어떻게 받아들일 만할까요? 너무 지나치다고 여길 만할까요? 스포츠 중계가 뭐가 나쁘다고 여길 만할까요? 이제는 야구나 축구뿐 아니라 지구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스포츠 중계를 안방뿐 아니라 손전화로도 아주 손쉽게 볼 수 있으니, 이런 동시는 그야말로 낡은 훈계쯤으로 여길 만할까요?



봄햇살이 하도 눈부시고 / 따사로와 / 새싹 돋는 보리밭을 / 여기저기 구경다닌다. (봄 고양이)


토끼의 맑은 눈과 / 아이들의 까만 눈이 / 반짝 마주쳤다. // 반짝 서로 / 씽긋 웃었다. (꽃을 먹는 토끼)



  운동 선수는 운동 한 가지만 잘 하면 돈을 만집니다. 그런데 운동 한 가지만 잘 하는 운동 선수는 서른 살이 넘기까지 운동을 하는 일이 드물고, 마흔 살이 넘기까지 운동을 하는 일은 더욱 드뭅니다.


  나이 서른이나 마흔은 ‘한창 꽃을 피우는 나이’라고 해요. 시골에서는 서른이나 마흔 살 나이가 ‘일을 솜씨 좋게 잘 해내는 나이’라고 할 만합니다. 스무 살 언저리부터 서른 살 사이는 젊은 일꾼이라면, 마흔 살 언저리는 듬직한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중계를 하는 운동경기를 하는 사람은 서른이나 마흔이라는 나이에 ‘은퇴’를 하지요. 그 나이가 지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일쑤예요.


  김녹촌 님은 이러한 대목도 살피면서 〈야구 중계〉라고 하는 동시를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른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배우면서 삶을 짓는 슬기를 얻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짚으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노란 벼도 고개를 / 숙였습니다. / 수숫대도 고개를 / 숙였습니다. // 알알이 익어 가는 / 열매를 안고 / 깊고 깊은 생각에 / 잠겼습니다. (익을수록)



  동시집 《꽃을 먹는 토끼》를 읽으면, 이 동시집에 넓고 깊게 흐르는 시골살이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나오는 거의 모든 동시집은 도시살이 이야기를 다루지요. 오늘날은 아무래도 거의 모든 어른과 아이가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도시살이 이야기가 아니라면 동시로도 쓰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나락이 고개를 숙이고 수숫대가 고개를 숙이는 이야기를 쓸 만한 동시인은 얼마쯤 될까요. 아이한테 나락을 이야기하고 보리를 이야기하며, 봄햇살이랑 겨울바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은 얼마쯤 될까요.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사랑하면서 의젓하게 가꾸는 길을 밝히려는 마음이 가득한 《꽃을 먹는 토끼》를 기쁘게 읽을 어른과 아이를 기다립니다. 4349.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동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카페 일기 3 - 행복이란, 분명 이런 것 다카페 일기 3
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223



곁에 있는 고운 사람을 찍는 사진

― 다카페 일기 3

 모리 유지 사진·글

 권남희 옮김

 북스코프 펴냄, 2012.12.10. 15000원



  ‘사진’을 말할 적에 문화나 예술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기록이나 보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며, 다큐멘터리나 패션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사진’이라고 하면 “즐거운 자리를 오래도록 그릴 수 있도록 웃으면서 찍는 일”이라고 떠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진을 다루는 잡지나 매체를 보면 ‘생활사진’은 거의 안 다루거나 아예 안 다루거나 아주 적게 다루기 일쑤입니다. 여느 사람이 수수한 자리에서 기쁜 사랑을 꽃피우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은 ‘사진’으로 여기지 않기 일쑤이지 싶어요. 문화나 예술쯤 되어야 사진으로 여긴다든지, 기록이나 보도를 하려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다큐멘터리나 패션을 헤아리는 전문 작가여야 비로소 사진을 한다고 여기기 일쑤로구나 싶어요.



2009년 2월 21일 토. 바다. 매화를 찍다.

2009년 4월 28일 화. 유치원 등산에 참가.



  모리 유지 님이 빚은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12) 셋째 권을 읽으면서 사진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다카페 일기》는 모두 세 권이 나왔습니다. 첫째 권은 2008년에 한국말로 나왔고, 둘째 권은 2009년에 한국말로 나왔으며, 셋째 권은 2012년에 한국말로 나왔어요.


  이 사진책을 선보인 모리 유지라는 일본사람은 ‘전문 사진가’라 여길 수 있으나, 그저 ‘아이를 사랑스레 사진으로 찍고 싶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다카페 일기》라는 사진책에 흐르는 사진은 빼어난 솜씨나 뛰어난 재주를 드러내는 사진을 그러모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아이가 태어난 삶을 찬찬히 아로새기고, 작은아이가 찾아온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기며, 집안에서 함께 사는 개가 차츰 느는 얼거리도 곰곰이 돋을새김하는 이야기가 이 사진책에 나와요.


  다시 말하자면, 《다카페 일기》라는 사진책에는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만 나옵니다.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 사진은 안 나와요. 멋을 부리는 사진이라든지,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은 이 사진책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리 유지 님을 둘러싼 사랑스러운 한집 사람들 이야기가 새록새록 피어나는 사진이에요.




2009년 5월 16일 토. 바다가 만화를 읽어 주는 동안 잠이 들어 버렸다.

2009년 6월 9일 화. 좁은 곳에 앉기.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을 문화로 볼 수도 있고 예술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을 기록이나 역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을 다큐멘터리나 패션으로 볼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사진이라고 하면 저로서는 맨 먼저 ‘곁에 있는 고운 사람을 찍는 사진’일 때에 사진다운 사진이 되리라 느낍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언론이나 역사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이나 상업이라는 틀보다도 먼저 ‘삶’이라는 자리에서 수수한 여느 사람들이 이녁 이야기를 한결같이 아끼면서 언제나 사랑하려는 숨결로 빚는 ‘빛그림’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나 기계가 있어야 ‘아이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장비나 기계를 어깨에 걸쳐야 ‘곁님이나 애인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아요.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쯤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풍경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지요.


  사랑으로 다가서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비로소 즐겁게 찍는 사진입니다. 즐겁게 찍고 사랑스레 찍는 사진이라면, 이렇게 찍은 사진은 모두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으로 다가서면서 찍는 사진에는 늘 이야기가 흐르니까요.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찍는 사진에도 노상 이야기가 흘러요.




2009년 7월 13일 월. 유치원 수영장에서 배운 발차기를 보여주는 하늘.

2009년 12월 17일 목. 카펫 위에서는 비눗방울이 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하늘의 의기양양한 짝다리.



  사진이라는 갈래를 더 헤아린다면, 보도사진이나 예술사진에도 ‘이야기가 있을’ 때에 한결 돋보입니다. 이야기는 없이 ‘충격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거나 ‘멋들어지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이 같은 사진은 다시 들춰보기 어려워요. 처음에는 뭔가 대단하다고 느낄 ‘충격스러운 모습’도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사이 충격스러움은 사라집니다. 멋들어진다는 모습도 ‘더 멋들어진다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으면 그만 시들시들해져요.


  사진책 《다카페 일기》를 다시 헤아려 봅니다. 이 사진책에 깃든 사진은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며 보도나 기록이나 다큐멘터리나 패션도 아닙니다. 그저 삶인 사진입니다. 더 뛰어나지도 않지만 덜 무르익거나 떨어지는 사진이 아니에요. 오직 사랑이 흐르는 사진입니다.


  사랑이 흐르는 사진은 보면 볼수록 감칠맛이 나요. 사랑으로 빚은 사진은 세월이 흐르고 흐를수록 더욱 빛나요. 사랑을 담아서 즐겁게 찍은 사진은 언제까지나 가슴에 품으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꿈노래를 길어올리지요.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카페 일기》라는 사진책을 좋아해 줄 수 있던 바탕에는 ‘멋지게 찍은 훌륭한 사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사랑을 담으려 한 사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10년 2월 18일 목. 콜라만 마시던 바다가 드물게 따뜻한 홍차를 주문. 집에 돌아오니 39도 2분.

2010년 4월 19일 월. 날지 못하는 원인은 점프가 부족해서라고 착각하는 하늘.



  모리 유지 님은 책끝에 “소중한 사람을 찍은 사진은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소중한 사진입니다(뒷이야기).” 하고 밝힙니다. 참말 이 이야기 그대로 사진을 바라볼 수 있을 적에 누구나 즐겁게 ‘내 사진’을 찍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온 나라 사람들이 사진기를 손에 쥐든 손전화를 손에 쥐든 태플릿을 손에 쥐든 그야말로 즐겁게 사진을 찍어요. 사랑하는 님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예술을 한다’거나 ‘문화를 한다’거나 ‘기록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에요. 오늘 이곳에서 마주보는 님을 사랑으로 찍어서 더욱 기쁜 하루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진가입니다. ‘전문 사진가(전문가)’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사진가’입니다. 값싸거나 가벼운 사진기로도 얼마든지 살을 사랑하면서 이야기 한 자락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가입니다. 사진기가 없으면 ‘손가락 사진기’로 찰칵 찍어서 마음자리에 애틋하게 아로새길 줄 아는 ‘꿈 사진가’입니다. 4349.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비평/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