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문학동네 동시집 17
정완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70



스무 해쯤 지난 뒤에도 동시가 있을까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정완영 글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1.4.10. 8500원



  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시골에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줄면서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인구 감소’를 말할는지 몰라도, 도시에서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다닐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가 해마다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면소재지 초등학교는 거의 다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면 읍내 초등학교조차 아이 숫자가 부쩍 줄면서 아슬아슬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 있는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옛날하고 달라서 ‘시골 놀이’를 누리거나 즐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 시골은 어디에서나 농약을 엄청나게 뿌릴 뿐 아니라, 기계와 자동차도 흔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고샅놀이’도 ‘도랑놀이’도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짝을 지어 골짜기를 타거나 바다로 놀러다니는 일도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하고 똑같이 스마트폰으로 놀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게임을 할 뿐입니다.



다섯 살 우리 아기 앞니 빠져 내리듯이 /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쏙쏙 빠져 내립니다 / 사비약 사비약 하며 사비약눈 내립니다.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별들은 등불을 끄고 하늘 속에 꼭꼭 숨고 / 눈은 등불을 켜 들고 밤새도록 내리는데 / 우리는 한 이불 속에서 호끈호끈 잠이 듭니다. (눈 내리는 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쓴 동시조를 그러모은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문학동네,2011)을 읽습니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동시조’라기보다는 ‘어른이 읽을 시조’를 쓰는 분이었고, 이 동시조집에도 ‘어른이 읽을 시조’가 많이 나옵니다.



차창에 어둠을 싣고 시골 버스가 달려갑니다 / 호박꽃 초롱만 한 등불 싣고 달려갑니다 / 또 하나 그리운 등불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시골 버스)


새벽부터 매미가 운다 자지러지게 운다 /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을 뒤흔들듯 / 축 처진 나뭇가지들 들어 올리며 운다. (매미)



  〈시골 버스〉 같은 시조는 아련하도록 고운 노래라고 느낍니다. 다만, 어린이한테 걸맞을 만한 노래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 어른이 되어요. 이런 도시 아이들한테 〈시골 버스〉는 ‘고향’을 그리는 이야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시조 작품으로는 고운 노래일 수 있어도 동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매미〉도 그렇지요.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 같은 말마디는 어린이가 읊지 않습니다. ‘아기’나 ‘아기 엄마’ 같은 말마디를 넣는다고 해서 동시조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고, 어린이 꿈을 노래할 때에 비로소 동시요 동시조라고 느낍니다.



수문 닫아 걸었는가, 수문 열고 서 있는가 / 밀물처럼 오던 아이들 썰물처럼 다 나가고 / 햇살이 혼자서 찾아와 유리창을 닦고 있다. (폐교에 서서)



  〈폐교에 서서〉 같은 동시조도 오직 어른 눈길로 써서 오직 어른이 누릴 만한 시조일 뿐,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동시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골 아이라면 ‘폐교’를 알 수 있을는지 모르나, 학교버스를 타고 마을과 학교 사이만 오가는 요즈음 시골에서도 폐교를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도시 아이한테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폐교 이야기를 동시조로 그리려 한다면, 아흔 살 웃도는 할아버지가 먼 옛날에 학교 다니던 이야기를 그릴 때에 한결 구수하면서 구성진 노래가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정완영 님 스스로 어떤 놀이를 했는지, 동시조 할아버지 스스로 어떤 웃음꽃을 피우면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아스라한 옛날에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를 지냈는가 같은 이야기를 그릴 때에 비로소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동시조가 되리라 느낍니다.



한평생 흙만 주물며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 땅을 깔고 눕고, 하늘을 덮고 누워야 / 이승도 저승도 모르고 더렁더렁 코를 곤단다. (할아버지의 잠)



  〈할아버지의 잠〉 같은 동시조도 아이들한테는 어렵거나 아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서 죽을 때까지 늘 흙만 주무르던 할아버지 삶을 고이 그린 동시조이기 때문에, 이 같은 동시조는 아이들한테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어떤 꿈을 가슴에 품으며 살았는가 하는 대목을 엿보도록 이끌 만하리라 느낍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기에, 〈할아버지의 잠〉은 어여쁜 동시조라고 봅니다.



우리 마을 앞 냇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 돌팍 밑에 숨어 사는 버들붕어 두 마리는 / 돌팍이 저이들 집이래 여울목이 놀이터래. (버들붕어 두 마리는)



  요새는 시골에서도 버들붕어를 찾기 어렵습니다. 도랑도 냇물도 온통 농약냄새라서 물고기가 살기 어렵습니다. 도랑에서 가재를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입니다. 요새는 시골 아이도 개똥벌레 구경을 거의 못 합니다. 그러나, 동시조 할아버지가 버들붕어 이야기를 노래한다면,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 할 테지요. ‘징검다리’는 뭔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테지요. ‘돌팍’은 또 뭔 소리인가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울 테지요. ‘여물목’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어른들한테 여쭙겠지요.



참새는 참새끼리 오고 가는 길이 있다 / 잠 깊은 봄 하늘에 여울지는 길을 내며 / 아랫말 윗말 오가듯 오고 가는 길이 있다. (참새 길)



  스무 해쯤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스무 해쯤 지난 이 나라 시골자락에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읍내에 한 곳쯤 가까스로 남을 만한 모습이 된다면, 또는 읍내에조차 학교가 모조리 문을 닫는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 거의 모든 아이들이 좁은 도시에 몰려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때에도 동시가 있을 만한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동시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힐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삶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을까요?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은 ‘사비약눈’을 노래하지만, 도시에 사는 어른들은 눈이 오면 길이 막히고 자동차가 못 다닌다면서 투덜댑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 목소리’를 으레 듣습니다. 눈이 오는 날 ‘눈이 오니 너희는 즐겁겠네. 우리도 함께 눈놀이를 할까’ 하면서 빙그레 웃는 목소리를 낼 만한 어른은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 몇이나 남을까 궁금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모든 수업을 덮고는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함께 눈사람을 굴리자고 외칠 만한 교사나 교장선생님이 앞으로 몇이나 있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4348.10.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로 이야기 3
타니카와 후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59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 솔로 이야기 3

 타니카와 후미코

 한나리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9.15. 6000원



  아이들이 언제나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사랑해요” 하고 속삭입니다.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아이들한테 늘 “사랑해” 하고 노래합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는 마음으로뿐 아니라 입으로도 ‘사랑’을 늘 나누면서 하루를 열고 닫습니다.


  노래를 부를 적에도 ‘사랑’이라는 말마디가 으레 깃듭니다. 밥을 지을 적에도 사랑으로 짓자고 생각합니다. 마실을 다닐 적에도 함께 누리는 사랑이라고 돌아봅니다. 가볍게 소꿉놀이를 할 적에도 서로서로 아끼는 사랑으로 함께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이 땅에서는 어느 일이든 사랑으로 하는구나 싶습니다. 살붙이끼리만이 아니라, 동무끼리만이 아니라, 이웃끼리만이 아니라, 누구하고라도 사랑스러운 숨결을 나눌 적에 즐거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돕는 마음이 흐른다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란 없으며,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을 적에는 군대나 전쟁무기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그에게는 작고 귀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좋겠다. 나도 쓰담쓰담 받고 싶다. 소름 돋아. 서른이 넘은 여자가 이 모양이라니. 이건 중학생만도 못한 수준이야.’ (10∼11쪽)


‘뭐,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입니다. 고탄다를 많이 좋아했고, 요령 없는 나의 최선. 고탄다, 고마웠어. 덕분에 생각났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래, 이런 기분이었어.’ (20∼21쪽)



  타니카와 후미코 님이 빚은 만화책 《솔로 이야기》(대원씨아이,2015) 셋째 권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가꾸는 사람들이 저마다 ‘홀로’ 사랑을 꿈꾸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책입니다. 다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혼자’ 살지는 않아요.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닙니다. 집에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이웃도 많고 동무도 많아요. 그저 ‘이성친구’나 ‘애인’이라 할 사람이 없는 채 ‘홀로’인 이들이 이 만화책에 고개를 살며시 내밉니다.



‘추억을 담뿍 담은 이 옷은 그냥 티셔츠가 아니었다.’ (26쪽)


“그때 말이야, 그 쇼핑백을 버렸단 걸 알게 됐을 때 엄청 충격 받고 망연자실했는데, 한편으론 조금 안도했어.” (40쪽)



  곰곰이 헤아려 보면, 사람들은 으레 “혼자셔요?” 하고 묻습니다. 짝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말일 텐데, 짝이 없다고 하더라도 혼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혼자셔요?” 하고 묻는 사람하고 마주보며 함께 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짝 없는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깃들어서 사는 집을 짓거나 손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입은 옷을 지은 사람과 가게에서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혼자 찾아가서 밥을 사다 먹는 가게가 있고, 온갖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가게에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버스나 기차를 모는 사람이 있고, 택시나 비행기를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있고, 의사도 청소부도 있습니다.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뿐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함께 있습니다. 내가 하나하나 이름을 살피지 못할 뿐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터전을 함께 일구면서 삽니다.



‘유일하게 오로지 야마다만이 내 편이었고 정말 기뻤기에, 그게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다음엔 내가 유일한 야마다 편이 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60쪽)


‘인생에서 이런 장면이 몇 번째인 걸까. 몇 번씩 반복되는 건 내 잘못인 걸까? 일방적으로? 귀신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난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 어째서?’ (71쪽)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예쁩니다. 마음을 따스하게 기울여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가슴속에 품으니 예쁘지요. 짝사랑이어도 예쁘고, 풋사랑이어도 예쁩니다. 불타는 사랑이든 차가운 사랑이든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기에, 나부터 나를 한결 아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면서, 나부터 나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조금씩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차근차근 기쁘게 아침을 엽니다. 부풀거나 설레는 가슴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얼굴에 기쁜 웃음이 피어납니다. 들뜨거나 신나는 가슴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니 온몸에 기쁜 숨결이 고루 흐릅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는 오래 살아. 사랑 받으면서.” (76쪽)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싶고, 새로운 곳에서 살아 보고도 싶어. 그 언젠가가 언제인데? 언젠가는 언제지? 지금인지도 몰라.’ (90∼91쪽)



  만화책 《솔로 이야기》는 ‘홀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정작 ‘혼자’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손을 맞잡고 나들이를 다녀야 ‘혼자 아닌 삶’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살을 섞거나 입을 맞출 만한 누군가가 있어야 ‘혼자 아닌 몸’이 아닙니다. 먼발치에서 서성이더라도, 손을 잡을 만한 누군가가 없더라도, 따사롭게 피어나는 그윽한 꿈으로 웃음지을 수 있는 하루를 연다면 누구나 ‘함께 있는 넋’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거든요. 사랑은 바로 내가 나한테서 끌어내거든요. 나를 내가 스스로 아낄 수 있을 때에 사랑이 되거든요. 남이 나를 좋아해 주기에 사랑이 싹트지 않아요. 내가 나부터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아껴서 제대로 삶을 짓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싹틉니다. 내가 나부터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나부터 나를 제대로 아끼지 못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한들, 나는 나부터 믿지 못하니 다른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못해요.



“마, 마스미, 너 뭔가 빠뜨린 거 없니?” “응? 없는데? 짐은 가방뿐이었고, 생활비도 잘 챙겼고.” “그, 그거 말고. 어제 뭔가 받고 싶었던 사람이 저기서 시무룩해져서 있는데.” “아, 미안, 미안 아빠. 진짜 미안해.” (138쪽)



  말 한 마디에서 사랑이 태어납니다. 따스한 기운을 듬뿍 실어서 들려주는 말 한 마디에서 사랑이 자랍니다. 기쁜 웃음을 곱게 담아서 가만히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사랑이 퍼집니다.


  아이들이 연필을 손에 쥐고 하얀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그립니다. 나도 연필을 손에 쥐고 하얀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그립니다. 크레파스를 꺼내어 빛깔을 입힙니다. ‘사랑’이라는 글씨 둘레에 알록달록 무지개 그림을 그립니다. 언제나 사랑을 떠올리고 가슴에 담자고 생각하면서 사랑 그림을 방 한쪽에 붙여놓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 그림을 바라봅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104



시와 회사원

―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글

 창비 펴냄, 2015.9.25. 8000원



  한창 아플 때에는 아무것도 못 먹기 일쑤입니다. 끙끙 앓느라 바쁘기에 밥도 물도 몸에서 안 받을 뿐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몸이 아프면 소화기관은 모두 스르르 멈춘다고 할까요. 몇 끼를 굶거나 며칠을 굶어도 소화기관은 밥 달라는 소리를 않습니다.


  넋을 잃도록 아프던 나날이 지나고 조금 넋을 차리면 아주 조금 물을 마시거나 밥술을 뜹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제법 아픔을 털고 일어날 만한 때가 되면 조금 더 먹지만,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찬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조금만 먹어서 배가 차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면서 하염없이 꿈나라를 헤맵니다.


  아픔을 이럭저럭 털어내어 제법 움직일 수 있을 만하면, 몸에서 이것저것 많이 바랍니다. 그렇다고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골고루 몸에 넣어 달라고 바라요. 그동안 그리 내켜 하지 않던 것까지 몸속에서 넣어 달라고 바라기에, 나는 내 몸이 씩씩하게 나아서 튼튼하게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이것저것 신나게 먹습니다.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 /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오줌의 색)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현승 님이 빚은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창비,2015)을 읽습니다. 1973년에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책날개에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어떤 하루를 누리는지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를 읽으며 집안에 아이들도 있구나 하고 느끼고, 여느 살림집하고 비슷하게 집일이나 아이키우기는 거의 곁님이 도맡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에서 사는지 꼭 알아야 하지는 않으나, 시를 읽다 보면 이래저래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이웃인지, 도시에서 사는 이웃인지 궁금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시를 읽으면 이 시가 시골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도시에서 태어났는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 이 시를 쓴 분이 어떤 눈길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같은 대목도 넌지시 드러납니다.



죽은 사람의 눈을 감기듯 / 이불을 덮어주고 간 아내의 손끝이 한없이 부드러워 / 잠 깨어 다시 일어난다. (잠 깨우는 사람)


숨이 막힌다. / 가지런히 잘려나간 잔디에서 풀 냄새가 난다. / 씀바귀꽃이 개선 환영 인파처럼 늘어선 길을 걸으며 / 박수 받아야 할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 채 / 암담은 화창과 마주하고 있다. (블랙아웃)



  시인 이현승 님은 책끝에 붙인 말에 “사람의 말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담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사람 안으로 담기고, 그 사람의 모든 것에는 그 사람이 담긴다(134∼13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해적이 같은 말이 없어도 시만 읽더라도 시인이 걸어온 길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굳이 해적이를 달지 않더라도 시인이 품은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애써 온갖 이론과 지식을 곁들이는 시평(해설)을 책끝에 문학평론가 이름으로 달아 놓지 않더라도 시집 한 권이 우리한테 나누어 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초등학교 놀이터에 와서는, 놀이터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다 읽고서 생각해 봅니다. 아직 덜 나은 오른무릎을 살살 움직여서 자전거를 달려 놀이터에 와서는, 고작 오 킬로미터쯤 달리고도 무릎이 시큰거려서 아이들하고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그저 놀이터 둘레에 퍼질러 앉아서 시집 한 권 들춰야 하는 몸으로 천천히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 사람이 담기는데, 나는 이 시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이녁한테서 어떤 몸짓을 이웃한테 보여주려는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한테서 어떤 몸짓을 바라보려는 마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손은 두 개뿐인데 /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저글링)



  아이들은 마음껏 뛰놉니다. 땀으로 옷을 적시든 모래로 옷을 더럽히든 그야말로 마음껏 뛰놉니다. 손발이 지저분해지면 아버지가 씻겨 주는 줄 잘 압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아버지가 갈아입혀 주는 줄 잘 압니다. 신나게 놀아서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밥을 차려 주는 줄 잘 압니다. 개구지게 놀아서 졸음이 쏟아지면 아버지가 토닥토닥 어루만지면서 잠자리에 누여 주고 재워 주고 노래를 불러 주는 줄 잘 압니다.


  나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껏 일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기쁘면서 신나는 일을 할 적에 웃는 낯이 됩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일을 할 적에 노래하는 몸짓이 됩니다. 웃으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노래하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춤도 추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다만, 달포가 되도록 아직 무릎이 말끔히 낫지 않아서 춤은 못 춥니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봉급생활자)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은 없다. (허수아비 디자이너)



  여기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갑니다. 시골에 있고 싶은 사람은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시골에서 살고,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시골로 와서 삽니다. 도시에 있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서 살고,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로 가서 삽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싶으니까 자전거를 탑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논둑길에서 물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크게 엎어져서 무릎도 크게 깨져서 여러 날 몸져누워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갔지만, 무릎이 웬만큼 나아서 걸을 수 있은 뒤에 살살 자전거를 다시 달립니다. 자전거를 다시 달리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서 홀가분하게 놀도록 하자면 자전거를 달려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느라 밤잠을 거의 못 이루다시피 하는 나날을 어느덧 여덟 해를 보낸 삶도, 나 스스로 이러한 삶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참 많은데,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갓난쟁이일 무렵에 날마다 천기저귀를 마흔 장이나 쉰 장쯤 손빨래하는 일이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몸이 찌뿌둥하게 결리기는 했어도 신나게 빨고, 신나게 다리고, 신나게 개어서, 신나게 갈았어요. 눈을 감고도 기저귀를 채울 수 있고, 눈을 감고도 똥을 치울 수 있어요.



우주에 관해 내가 무얼 알겠는가? / 나는 그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나도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 사실 계속 걸어서 우리는 배가 조금 고팠다. / 우주를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다. (먼지는 외롭다)



  우주를 알고 싶은 사람은 우주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하기와 뺄셈을 알고 싶은 아이는 더하기와 뺄셈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하기와 뺄셈을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어렵고 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주나 더하기나 똑같습니다. 이리하여, 누군가는 밥짓기가 너무 어려워서 밥을 못 짓는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기저귀 채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기저귀를 못 채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아기 똥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서 아기 똥을 못 치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못 탄다고 하고, 누군가는 시골에서 못 산다고 하며,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합니다.


  중력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양자물리학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지구별 밖에 있는 수많은 별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수수께끼를 품기에 수수께끼를 풉니다. 사랑을 꿈꾸기에 사랑을 이룹니다. 삶을 노래하기에 삶이 즐겁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시라고 하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품는 사람이 씁니다.



아빠 구름은 어떻게 울어? / 나는 구름처럼 우르릉, 우르릉 꽝! 얼굴을 붉히며, // 오리는? / 나는 오리처럼 꽥꽥, 냄새나고, // 돼지는? / 나는 돼지처럼 꿀꿀, 배가 고파. (구름의 산책)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회사원’ 모습이 떠오릅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더라도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시를 못 쓴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이녁 삶을 시로 씁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로 못 씁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숲이나 나무나 바람이나 하늘이나 논밭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고요하거나 착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든, 또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든, 또 도시에서 딱히 일자리 없이 집에서 지내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가정주부’이든 ‘살림꾼’이든 대수롭지 않아요. 공돌이나 공순이라 하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라 하든, 참말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쓰고, 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읽습니다. “삶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시를 쓰고, 시를 읽습니다. 삶을 생각하기에 시를 생각하면서 노래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마음이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산 사람’이 살아서 시를 씁니다. 삶을 노래하는 마음이어야 시인이 되지 않고, 그저 살면 되고, 그예 하루하루 즐겁게 맞이하면서 밥 한 그릇 맛나게 차려서 먹으면 어느새 시 한 줄이 노래가 되어 조용히 태어납니다. 손에 연필을 쥘 수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씩씩하게 연필을 쥐어 보셔요. 우리는 누구나 시를 노래하는 ‘글님’이 될 수 있습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날 반달 그림책
성영란 글.그림 / 반달(킨더랜드)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9



조용하게 찾아온 기쁜 ‘어떤 날’

― 어떤 날

 성영란 글·그림

 반달 펴냄, 2015.9.14. 14000원



  숨바꼭질하고 술래잡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손을 재빠르게 놀려서 뭔가를 숨기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두 손을 써서 구슬 감추기를 할 적에도 잘 못 맞히지요.


  따로 숨바꼭질이 아니어도 집안에서 아무 말을 않고 조용히 어디엔가 숨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기도 합니다. 퍽 어린 두어 살이나 너덧 살 아이들도 어머니나 아버지가 뒷밭이나 뒤꼍 같은 데에서 조용히 풀을 베거나 씨앗을 심어도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곤 합니다. 시골집은 뒷간이 집 바깥에 있습니다. 볼일을 보러 뒷간에 웅크리고 앉아도 사람이 없는 줄 여기지요. 일고여덟 살쯤 되면 집안이 조용할 적에 ‘모두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찾지만, 나이가 이 밑인 아이들은 으레 울음부터 터뜨립니다.



다들 어디 갔지? (4쪽)





  성영란 님이 빚은 그림책 《어떤 날》(반달,2015)을 조용히 읽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고 하는 성영란 님은 어느 ‘어린 날’에 겪은 ‘어떤 날’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이니 조용하게 책을 넘기면서 시골 어린이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마 해남이 아닌 서울이라면, 강진이 아닌 부산이라면, 장흥이 아닌 인천이라면, 고흥이 아닌 대구라면, 사천이 아닌 대전이라면, 통영이 아닌 광주라면, 이처럼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는 매우 드물거나 겪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자동차 한 대도 어쩌다가 지나갈 동 말 동하는 시골마을에서 노는 시골 아이 삶자락이니, 어느 날 문득 “다들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릴 만합니다.



혼자 노니까 재미도 없고 (19쪽)




  아이는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났을까요? 책이라도 빌려서 읽다가 문득 둘레가 아주 조용한 줄 느꼈을까요? 숙제를 하다가, 아니면 공부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소꿉놀이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가위로 종이인형을 오리다가, 내 둘레에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줄 느꼈을까요?


  다른 때에는 혼자 놀아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뛰고 달려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음껏 놉니다. 다른 때에는 동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다른 때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데 둘레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떤 날’에 비로소 나는 깨닫습니다. 이 땅에, 이 마을에, 이 집에, 바로 이곳에 나 혼자만 있지 않은 줄 깨닫습니다. 다 같이 어우러져서 마을을 이루고 보금자리를 이루며 삶을 이루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22쪽)




  아무라도 만나려고 집을 나섭니다. 누구라도 찾아보려고 고샅을 걷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귀를 댑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헤아립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어떤 날’에는 구름조차 안 보이고, 바람조차 안 붑니다. 그야말로 고요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요. 어디 먼 데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는 부릅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넋을 차립니다. 어머니한테 달려갑니다. 이윽고 동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걷다가 자꾸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돌립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다가 내 손을 놓고, 나는 동무들이 부르는 곳으로 땀이 나도록 달려갑니다.



다들 어디서 나타났지? (32쪽)




  먼 별나라에서 우주선이라도 날아와서 나를 살짝 데려갔다가 이곳에 도로 데려다주었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먼 어느 곳을 나들이하다가 문득 바로 이곳으로 돌아왔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스라한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갔다가 조용히 이 자리에 다시 왔을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아무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 이야기를 가만히 아로새깁니다. 아리송한 어떤 날 이야기를 가슴에 묻습니다. 알쏭달쏭한 어떤 날 하루를 가슴에 씨앗처럼 심습니다. 나를 다시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보며, 동무들하고 이웃들을 다시 보던 어떤 날 이야기를 고이 되새깁니다.


  그림책 《어떤 날》은 우리가 늘 맞이하는 하루가 ‘늘 같지’는 않은 줄 넌지시 보여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는 언제나 ‘오늘 하루’뿐이면서 ‘내 삶에서 꼭 하루’뿐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그립니다.


  가을볕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샛노란 들녘을 어루만지는 시월에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오늘 누릴 즐거움과 재미와 웃음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밥 한 그릇 맛나게 비우고 마실을 다녀와야겠어요. 자전거를 꺼내어 천천히 논둑길을 달려야겠어요. 들내음을 마시고 가을바람을 먹으면서 햇볕도 듬뿍 쬐어야겠어요. 새로운 ‘어떤 날’로 내 가슴속에 드리울 수 있도록.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가는 학교가 싫다 난 책읽기가 좋아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 비룡소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3



꾸지람만 듣는 학교에 누가 가고 싶을까

― 올가는 학교가 싫다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우리 집 큰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할 만한 것이 없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기도 했고, 큰아이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가기도 합니다. 흔히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아이한테 함부로 ‘의무’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만 가르치고,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며,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점수에 맞추어 대학 줄세우기를 시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이 ‘집짓기’를 배울 수 있다면 기쁘게 학교에 보낼 만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옷짓기’를 익힐 수 있다면 즐겁게 학교에 보낼 만하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밥짓기’를 지켜보면서 손수 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신나게 학교에 보낼 만해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오직 ‘교과 수업’과 ‘학습 활동’뿐입니다.



올가 물건은 한 번씩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음메’ 하고 우는 젖소 인형, 일곱 식구 트럼프 놀이, 면이 아홉 개인 주사위, 타고 남은 성냥개비들, 상자를 열면 갑자기 튀어 나오는 꼬마 도깨비, 박하껌 두 개, 유아원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남자 친구 살뱅과 함께 파리잡이 끈끈이를 만들려고 둔 투명 테이프 등이었다. (8쪽)



  준비에브 브리작 님이 글을 쓰고, 미셸 게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올가는 학교가 싫다》(비룡소,1997)를 읽습니다. 《올가는 학교가 싫다》에 나오는 ‘올가’라는 아이는 학교에 처음 들어간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몇 살부터 학교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일고여덟 살로 보입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 가방에 온갖 장난감을 챙깁니다.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면 온갖 장난감을 다룰 줄 알고, 만들기도 해야 하며,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 올가는 교과서나 공책이나 다른 것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만 온마음을 쏟습니다.



올가는 엄마에게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선생님이 여기다가 뭐라고 써 주셨는데, 뭔지 모르겠어. 나는 읽을 줄 모르잖아. 엄마, 나는 책읽기를 배우고 싶지도 않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읽을 줄 알아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 (12쪽)



  이야기책을 가만히 읽으면, 올가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가한테 거의 아무런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이야기를 거의 안 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아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거의 안 듣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빠서 안 들을 뿐 아니라, 이내 잊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 그러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하느라 바빠서 아이 얼굴을 볼 틈도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아니, 한국만 이런 모습이 아니네 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서도 이러네 하고.


  게다가 학교에서도 올가는 고단합니다. 올가가 다니는 학급을 맡은 교사는 올가하고 말을 제대로 섞지 않습니다. 그저 올가 가방에 있는 장난감을 아무 말 없이 몽땅 빼앗을 뿐입니다. 장난감만 챙긴다고 해서 아이를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꾸짖을 뿐입니다. 아이한테 왜 이런 장난감을 챙기느냐고 차분히 묻지 못하는 교사요, 아이한테 부드럽거나 따스한 말로 ‘학교에서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교사입니다.



올가는 저녁마다 자그마한 깜짝쇼가 벌어지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올가는 엄마가 더 이상 선물을 하지 않으니까 이젠 자기가 엄마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일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19쪽)


“엄마! 엄마는 왜 내 목걸이 선물을 받고서 그걸 목에 걸지 않는 거야?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올가는 뾰로통해졌다. (22쪽)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사가 훌륭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사라는 자리에 서려면 ‘교과서 수업 진도 나가기’가 아닌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 마음을 읽고 아이한테 무엇을 즐겁게 가르쳐서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먼저 차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교사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아침부터 저녁(이나 낮)까지 마주하는 어버이 같은 몫을 맡는 교사라면, 아이가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북돋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연락장에는 날마다 선생님 편지가 씌어 있었다. 올가가 가지고 가는 수집품들은 뭐든지 다 압수당했고, 분명한 이유조차 모르면서 올가는 늘 야단맞았다. 그래서 올가는 늘 허둥거렸으며,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소란부터 떨곤 했다. (34쪽)



  이야기책을 덮고 한국 사회를 돌아봅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는 온갖 행정서류가 넘쳐서 학교에서 교사가 고달팠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으로 갖가지 ‘수행 결과 입력’을 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라기보다 ‘서류 처리반’ 같은 얼거리요, 교사가 교사로서 아이들을 느긋하고 넉넉하게 마주하기 힘들도록 내모는 행정 얼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이 이름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생도, 이 이름 그대로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삶을 누린 뒤 이 삶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이끄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기만 한대서 어버이가 아닙니다.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아낄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를 따사로이 아끼고 살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삶꽃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올가와 실뱅은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놀이를 했다. 올가가 선생님을 했고, 실뱅이 학생들 모두를 맡았다. 학생들 중에는 올가사 소피처럼 착한 아이도 있었고, 오스카 패거리나 실뱅과 고티에처럼 못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엄격했다. 그러면서도 공정했다. 선생님은 착한 아이들을 칭찬했고, 못된 아이들에게는 벌을 주었다. (53∼54쪽)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 삶을 기쁘게 누리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공부해야 하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고 튼튼하게 자라면서 마음껏 웃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숨결입니다.


  꾸지람만 듣는 학교라면 아무도 안 가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겁게 꿈꿀 수 있는 학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요. 윽박지르기만 하는 집이라면 이러한 집에서 살고픈 아이는 없을 테지요. 아무도 아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학교도 집도 모두 싫을 테지요.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도 이와 똑같습니다. 꾸지람만 듣는 회사에 가고 싶은 어른이 있을까요.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려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어른이 있을까요. 아이들은 참고 참습니다. 아이들은 참고 참다가 ‘선생님놀이’나 ‘학교놀이’를 하면서 겨우 버팁니다.


  어른들이 바쁘지 않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한테 기쁜 사랑을 아름답게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