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찾아서 - 어느 무신론자의 진리를 향한 여정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7



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 신을 찾아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글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2015.10.16. 14800원



  내 어릴 적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허옇거나 속이 다 비치는 무언가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만한 어른이 둘레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보는 내 눈이 무엇인가를 밝힐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침이고 밤이고 가위에 눌린 몸짓이었습니다.


  귀울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귀울음이라기보다는 어떤 소리가 늘 들리곤 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적에 이 소리는 한결 크게 들립니다. 이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닙니다. 달리기를 해도, 뜀박질을 해도, 수다를 떨어도, 늘 내 귀로 듣는 이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만한 책이나 지식이 곁에 없는 채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17쪽)


백화점에는 내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없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 아니면 통신판매사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공적인 환경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교외의 모습이라 해도, 게나예나 한 가지라 지루할 뿐이었다. 어딜 가나 벽돌 한 장, 지붕 판자 하나까지도 판박이였다. 그러나 자연은 차원이 다르다. 나뭇가지 하나, 구름 한 덩이, 바다의 파도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제각각 눈길을 끈다. (32쪽)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이 쓴 《신을 찾아서》(부키,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도 어릴 적에 ‘무엇인가’를 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녁이 본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예배당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학교는 있어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밝혀 주는 길잡이나 어른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신을 찾아서》를 쓴 분은, 또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신(神)’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는 ‘님’이 있습니다. ‘지기’라든지 ‘지킴이’도 있고, ‘하느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겨레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땅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앞서부터 ‘하느님’을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해님·달님·별님·꽃님·숲님처럼, 모든 목숨이나 숨결한테 ‘님’을 붙였지요.


  개님이나 고양이님이나 닭님이나 범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목숨붙이가 어떤 넋인가를 헤아리면서 ‘님’이라는 말을 붙여요. 그래서, 풀님이나 나무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풀과 나무를 고이 아끼는 몸짓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밥님’이라 말하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비님’이 오신다고 외치지요.



학습 친구들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허수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남들이 무엇을 목구멍에 쑤셔넣든 그대로 삼키게 될 거라고. (52쪽)


생명의 목적은 죽음일까, 아니면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64쪽)


우리는 지상에서 짧은 삶을 살다 죽지만, 대신에 의미라는 영예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이때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저 높은 하늘에서 북극광처럼 빛나면서 그간의 모든 하찮음과 고통을 상쇄해 준다는 것. (76∼77쪽)



  사람은 살려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기에, 살면서 할 일을 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사는 동안 죽음만 걱정하다 보면, 정작 스스로 할 일을 놓치거나 멀리하고 말지요. 돈을 버는 까닭이 오로지 돈벌이를 하려는 뜻이라면 죽는 날까지 돈은 실컷 벌 만하리라 느껴요. 돈벌이에만 뜻을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뜻이라면 말이지요.


  학교를 오래 다닌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이와 같아요. 왜 학교를 오래 다녀야 할까요. 왜 대학교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책은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얼마나 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짝은 몇 사람이나 사귀어야 할까요.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먹어야 배부르거나 넉넉할까요. 자동차는 얼마나 몰아야 하고, 잠은 얼마쯤 자야 할까요.


  얼핏 보기에 너무 마땅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지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늘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새롭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삶이 새롭게 열리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지 않으면 누구나 죽지만, 숨쉬기를 생각하며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쉴 적마다 ‘아, 난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마시는 숨이 얼마나 달콤하거나 고마운가를 문득 생각할 만해요.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싶다는 꿈을 품을 만해요. 오늘은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숲집에서 살겠노라는 꿈을 품을 수 있어요.



동생들은 일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 있었으므로 내 시야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 앞으로 끌려간 동생들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90쪽)


나는 무엇에 반기를 들었던가? 내가 맞선 건 고등학교의 집단주의적 기획이었다. (103쪽)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집단주의가 끔찍하게 괴로웠습니다. 끔찍하게 괴롭다 보니 못마땅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집단주의가 모질게 고달팠습니다. 모질게 고달프다 보니 싫음을 넘어 미움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집단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군대도 없어질 낌새가 아직 없으며,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는 군대하고 닮습니다.


  평등을 말하려면 평등은 어디에서 이루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척척 갈리는 얼거리가 있는데 평등을 말할 수 없겠지요. 직책에 따라 시키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갈리는 곳에서 평화를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가장 위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는 소리요, 으뜸 심부름꾼이 대통령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집단주의란 무엇일까요? 집단주의는 집단에 따르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집단에 따르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움직이면 ‘집단이 안 되’거든요.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면 집단이 깨지지요. 그래서 집단에서는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고, 어떤 지도자 한 사람 뜻에 따라 한꺼번에 움직이는 흐름이 됩니다.


  함께 움직이면서 슬기롭게 힘을 쓸 수도 있어요. 이른바 두레와 품앗이가 있어요. 이때에는 함께 뜻을 세워서 어떤 일을 합니다. 다만, 두레와 품앗이는 어느 일을 할 적에는 함께 움직이되, 여느 때에는 늘 저마다 제 삶을 지어요.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에서도 저마다 몫이 다릅니다.



아메바에게도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산소 원자는 수소 원자에게 실제로 욕망을 느낀다고 과학이 시인했다면, 나는 아마도 덜 외로웠으리라. (119쪽)


나는 동생에게 솜사탕을 안기고 앉힌 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만 알면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178쪽)



  《신을 찾아서》라고 하는 책은 무엇을 말하려 할까요? 이 책은 ‘신’이나 ‘님’이나 ‘하느님’을 말하는 책일까요? 어느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을 말하지 않으려는 책이면서, 다른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은 하늘 꼭대기나 땅 깊은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보라’고 이야기하려는 책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속에서 싱그럽게 살아서 춤추고 꿈꾸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삶을 즐겁게 지어서 아름다운 길을 가자고 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평생 싸웠던 대상은 가난도, 실패도, 종교도, 지적 퇴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따분함이었다. (239쪽)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고. 배우는 것 근처에도 못 갔다고. (314쪽)



  요즈음도 나는 맨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맨귀로 무엇인가를 듣습니다. 이 모습과 소리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허깨비를 본다고는 느끼지 않고 헛소리를 듣는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아마 나는 마음에 있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는지 모르고, 마음에 있는 귀로 무엇인가를 들을는지 몰라요.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눈으로 서로 사귀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느껴요.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귀로 서로 아끼고 보듬는 꿈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요.


  삶으로 사랑을 짓고, 삶으로 꿈을 노래합니다. 삶으로 사랑을 들려주고, 삶으로 꿈을 주고받습니다. 《신을 찾아서》는 바로 이 대목을 느즈막한 나이에 비로소 찾은 발자국을 들려주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제 죽음 문턱에 선 나이라고 느끼는 글쓴이가 그동안 수수께끼처럼 가슴에 품었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기나긴 삶길을 보여주는 책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신을 찾아서”란 “나를 찾아서”입니다. “나를 찾아서”란 “삶을 찾아서”입니다. “삶을 찾아서”란 “꿈을 찾아서”이고, “꿈을 찾아서”란 “사랑을 찾아서”이지 싶어요. 나를 찾으면서 삶을 찾고, 바야흐로 꿈과 사랑을 찾으면서, 오늘 하루도 아침부터 노래하는 웃음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4348.11.1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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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다이家 사람들 2 삼양출판사 SC컬렉션
모리모토 코즈에코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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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73



흐르고 흐르는 착한 마음

― 코우다이 家 사람들 2

 모리모토 코즈에코 글·그림

 양여명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5.4.16. 7000원



  모리모토 코즈에코 님 만화책 《코우다이 家 사람들》(삼양출판사,2015) 둘째 권을 보면, 첫째 권에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 코우다이 집안을 이룬 할머니하고 할아버지가 나와요. 코우다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우다이 집안에서 할아버지 적에 할아버지가 영국으로 배움길을 떠났을 적에 ‘마음에 맞는 영국 아가씨’를 만났어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바로 영국 아가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영국 아가씨는 삶이 따분했다고 해요. 이녁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따분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겉멋을 부리거나 겉치레만 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으로 배움길을 떠난 할아버지(그무렵에는 앳된 젊은이)는 그저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마음이었다 하고, 다른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착한 마음이었기에, 이 착한 마음을 읽은 영국 아가씨는 고향나라를 등지고 일본으로 비행기를 타고 건너가서 새롭게 한 집안을 이루었다지요.



‘히라노 키에는 신기한 사람이다. 최근 들어 갑작스레 뿜어져 나오는 망상이 좌우지간 재밌어서 마음에 든다. 그리고 언짢은 일이 생기면, 그것이 분노나 원망이 되기 전에 엉뚱하고 우스운 이야기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한 점이 굉장하다고 생각하다. 함께 있어도 불안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9쪽)


‘미츠마사 씨랑 헤어지게 되면 어쩌지? 그와 만나기 전 나는 뭘 위해 살아왔더라? 고작 몇 개월 전일 뿐인데 한심해. 서둘러서 내 삶의 목표를 찾아야겠어!’ (24쪽)



  《코우다이 家 사람들》에 나오는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코우다이 집안 어머니’가 있습니다. 이 집안 어머니는 할머니한테서 ‘마음읽기’는 물려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생각을 모두 말로 내놓는 사람이기 때문에, 따로 ‘읽힐 마음’이 없다지요.


  자,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볼 일입니다. 착한 마음을 읽고 고향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시집간 영국 할머니는 삶이 즐거웠을까요? 네, 즐거웠습니다. 영국 할머니가 낳은 딸(코우다이 집안에서 오늘날 어머니)은 삶이 즐거울까요? 음,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분도 이분 나름대로 즐거운 삶을 살펴서 이녁 한길을 걷습니다. 비록 이러한 길이 이분한테는 격식과 예절과 가문을 따지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길을 꿋꿋하고 씩씩하게 걷는 삶도 즐겁기 마련입니다.



‘쫓아갈 수 없었다. 시게마사가 한 말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앤에게도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87쪽)


‘이렇게 예쁜 사람인데도 좋아하는 사람과 관련된 일이면 역시 불안해지는 건가.’ (111쪽)



  만화책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는’ 대로 삶을 지을 적에 홀가분하면서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느낍니다. ‘마음이 가는’ 결을 살피지 못한다면, 남한테 끌려다니는 나날이 되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마음은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그러니까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늘 생각해서 마음에 씨앗으로 심을 수 있도록 다스려야 할 테지요.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꿈을 씨앗으로 마음에 심을 적에는, 이 씨앗은 찬찬히 싹이 트고 자라서 그야말로 아름답게 흐르는 생각이 되리라 느껴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당신을 만나 당신의 마음을 알게 돼 행복해.’ (121쪽)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은 분명 누구도 치유해 줄 수는 없는 것. 하지만 모두가 이렇듯 걱정하고 있다는 건 분명 전해졌을 거예요.’ (125쪽)



  마음을 읽으면서 즐거운 삶이라면, 마음을 못 읽으면서도 즐거운 삶입니다. 마음을 읽으면서도 즐겁지 않은 삶이라면, 마음을 못 읽으면서도 즐겁지 않은 삶이에요.


  우리는 저마다 즐거운 삶이 되도록 생각을 기울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남이 나한테 선물해 줄 즐거움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숨결을 선물하듯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즐거운 마음이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고운 마음이 되며, 고운 마음이 착한 마음이 됩니다. 흐르고 흘러서 맑은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4348.11.10.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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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물고기 독깨비 (책콩 어린이) 38
린다 멀랠리 헌트 지음, 강나은 옮김 / 책과콩나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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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1



너와 나는 달라서 더없이 아름답다

― 나무 위의 물고기

 린다 멀랠리 헌트 글

 강나은 옮김

 책과콩나무 펴냄, 2015.10.30. 13000원



  학교나 사회를 보면, 언제나 ‘안 아픈 이’ 틀에 따라 맞춥니다. 그리고 언제나 ‘힘이 센 이’ 틀에 따라 맞추기 일쑤입니다. 이러면서 ‘아픈 이’나 ‘힘이 여린 이’를 돕는 틀을 살짝 곁들이려 합니다.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따라가야 하고,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나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말 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파서 집 바깥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사람은 으레 ‘복지’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회입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이를테면, 버스나 전철이나 배나 비행기 같은 데에서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틀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버스나 전철에 경로석이나 어린이석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리에 이름표만 붙일 뿐, 버스를 타러 가기까지, 또 전철을 타러 오가는 길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사회 얼거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만 살펴도 알 수 있지요. 지하도 계단은 언제나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춥니다.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는 하나도 살피지 않아요. 여느 버스 계단도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을 뿐,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에는 너무 높고 가파르며 좁습니다. 온 나라에 생기는 ‘자전거길’은 어른이 타는 자전거만 생각할 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만하도록 생각해서 마련하지 않습니다.



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입을 열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일곱 군데의 학교를 전전하면서 나는 아무 말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걸 배웠다. (23쪽)


나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쳤지만 글자들이 꿈틀거리고 춤을 추었다. 움직이는 글자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 걸까? (29쪽)



  린다 멀랠리 헌트 님이 쓴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책과콩나무,2015)를 읽다가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내 어릴 적 일이 환하게 갑작스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앨리’라는 아이는 열세 살쯤 되는데 글을 제대로 못 읽습니다. 책을 펼치면 글씨가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날아가거나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난독증’이라고 한다는군요. 아마 글을 잘 읽는 사람이라든지, 글을 읽으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붙인 이름일 테지요.


  나한테 난독증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혀짤배기이고, 말을 조금만 빨리 하려고 하면 혀가 꼬여서 소리가 샙니다.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언제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윽박질렀고, 교과서 읽기를 시킨다든지 발표를 시킬 적에 하나라도 틀리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춤을 추고 손찌검으로 불을 뿜었어요. 이런 학교 얼거리에서 교과서 읽기를 시키면 몹시 떨린 나머지 말소리가 샜습니다. 말소리가 새지 않도록 천천히 읽으려 하면 굼벵이가 기어가느냐 하면서 다그치니 동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교과서 읽기를 시킬 적마다 웃음거리가 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일이 언제나 두렵고 무섭도록 내몰던 예전 학교 모습이라고 할까요. 《나무 위의 물고기》를 읽는 내내 어릴 적 학교가 떠올라서 자꾸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 목소리에 담긴 피곤함에, 졸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널 싫어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엄마가 외쳤다. “세상에 누가 너 같은 아이를 싫어하겠어?” (43쪽)


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들이 전부 똑같기를 바라는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완벽하고 얌전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대니얼스 선생님은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71쪽)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를 보면, 앨리 곁에 앨리를 돕는 동무가 둘 있습니다. 두 아이는 앨리한테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모습’은 그저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이 대목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는 앨리가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을 놓고 끈질기게 꼬리를 잡으면서 놀리거나 괴롭히려고 하지만, 앨리 곁에서 동무로 함께 지내는 두 아이는, ‘서로서로 아름다운 동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되어 줍니다.


  이리하여, 세 동무가 씩씩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어려움을 헤치고 즐거운 삶을 찾는 이야기가 흐르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또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수업을 하며 무시무시한 교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으르렁거리면서 나처럼 뭔가를 ‘잘 못 하’거나 ‘어설프게 하’는 아이를 다그치거나 놀림감이나 웃음거리로 삼는 짓을 하더라도, 이런 짓에 웃지 않는 동무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 동무들은 제가 여느 때에 함께 걷거나 놀거나 어울리다가 ‘말소리가 샐’ 적에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이러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아차립니다. 이 동무들은 나한테 “너 혀짤배기네!” 하면서 놀린 적도 없고,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무렵에 그 모습을 제대로 못 느꼈습니다. 내가 또 말소리가 샜구나 하고 느껴서 얼굴이 발개지고 창피하다고 느꼈을 뿐, 내 동무들은 내 말소리 샌 모습을 하나도 놀리지 않고 따지지 않는데, 이렇게 고맙고 훌륭한 동무들이 있는데, 이 동무들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그때에는 미처 밝히지 못했어요. 내 창피를 감추느라 바빴습니다. 이제서야 그 마음을 깨닫습니다.



“깜깜한 방이 어째서 너에 대한 그림이야, 앨리?” 선생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무척이나.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깜깜한 방에 있으면 아무도 날 못 볼 테니까요.” (76쪽)


‘글 읽기가 서툴다’는 표현 하나로, 사람들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테면, 내가 깡통에 담긴 수프인데, 깡통에 쓰인 재료를 읽기만 하면 나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것처럼. (122쪽)



  누군가는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잘 나올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운동을 잘 할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책을 잘 읽을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글씨를 잘 쓸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동무들을 잘 이끌거나 타이르거나 다독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새로운 놀이를 끝없이 빚어서 다 함께 웃고 떠들면서 놀도록 선보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잘 지어내면서 따스한 바람이 불도록 할 테지요.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도 밥을 잘 짓고 집일도 알뜰히 거들 테지요.


  참말 모두 다릅니다. 참으로 모두 다른 마음이요 생각이며 넋입니다. 그러니, 이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삶길을 걸을 수 있도록 북돋우거나 가르칠 때에 아름다운 학교라고 여겨요. 성적에 따라 등수를 매겨서 줄을 세우려는 학교가 아니라,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을 키워서 모두 새롭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이끌 학교여야지 싶습니다.



나비들이 나에게 날아왔다. 나비들의 색과 무늬를 보며 왜 지금껏 한 번도 나비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들이 나는 방식은 새들과 달랐다. 온갖 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았다. 나도 일부는 나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48쪽)


“앨리, 넌 남달라. 나도 남달라. 앨버트도 남달라. 그리고 속하고 말고를 누가 결정하는데? 셰이 같은 애들이? 걔는 못돼 먹은 애야. 걔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 (175쪽)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아이를 둘러싸고 여러 교사가 나옵니다. 여러 교사를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뿐 아니라 ‘다 다른 아이’를 다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교사도 있고, 다 다른 아이를 그저 ‘다 똑같은 아이’로 맞추어서 줄을 짓거나 판에 박도록 이끌려는 교사도 있습니다.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미처 모든 아이를 제대로 못 살피는 교사도 있어요.


  어느 모로 보면, 앨리라는 아이는 동무와 교사를 잘 만났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 이렇게 좋은 동무와 교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자리에서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는 제 마음자리에 아프고 괴로운 앙금이 있는 터라, 다른 동무들이 힘들거나 아파할 적에 살며시 다가가서 어깨를 쓰다듬어 줄 줄 압니다. 앨리라는 아이 곁에 좋은 동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앨리도 다른 동무한테 좋은 벗님이에요.



“학교에 오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매일 학교에 오잖니. 학교에서의 하루가 힘들 거란 걸 알고 다른 아이들이 놀릴 거란 걸 알면서도, 너는 매일 학교에 와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하잖아.” (196쪽)


나는 반장이 되고 싶어지는 내 마음이 두렵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내가 교실 앞에 서 있고 선생님이 나를 축하해 주는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게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집어 들고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최선을 다해. (248쪽)



  나는 어릴 적에 내 좋은 동무들한테 어떤 벗님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혀짤배기 말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한 번도 나를 놀리지 않던 그 동무들한테, 나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재미나며 아름다운 벗님으로 함께 지냈을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짓궂은 장난도 꽤 많이 쳤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자꾸 치던 개구쟁이였는데, 그래도 나는 내 좋은 동무들한테 착하면서 맑은 몸짓과 웃음을 보여주었는가 하고 참말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나도 내 동무들한테 좋은 벗님이 될 만했기에 나를 따스히 아낀 동무들이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내 동무들도 그 아이들대로 누구한테나 좋은 벗님이 될 만한 아름다운 넋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 다른 동무가, 키도 다르고 몸집도 힘도 모두 다른 동무가, 씩씩하게 손을 맞잡고 걷습니다. 키가 좀 어긋나도 어깨동무를 합니다. 걸음걸이가 좀 달라도 깔깔깔 웃고 노래하면서 걷습니다. 내가 아플 적에는 동무가 나를 보살피고, 동무가 아플 적에는 내가 동무를 보살핍니다. 내가 힘들 적에는 동무가 나를 돕고, 동무가 힘들 적에는 내가 동무를 돕습니다.


  책을 잘 못 읽으면, 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글을 잘 못 쓰면, 글은 안 써도 됩니다. 힘이 여리면 힘을 써야 하는 일은 안 해도 됩니다.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스스로 아름답게 걸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돼요.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너와 나는 다르지만, 너와 내가 다르기에 서로 아름답지’ 하는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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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여인숙 민음의 시 105
이정록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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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5



시와 제비꽃

―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글

 민음사 펴냄, 2001.9.28. 8000원



  겨울이 저물고 봄이 찾아올 무렵, 우리 집 둘레로 온갖 봄꽃이 핍니다. 봄까지꽃이 피고, 코딱지나물꽃이 피며, 냉이꽃에 꽃다지꽃에 갓꽃이랑 유채꽃이랑 곰밤부리꽃이랑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이들 봄꽃은 한겨울에도 피어나기 일쑤이고,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도 피어납니다.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 곳곳에서 피는 제비꽃을 살피니, 이월에도 삼월에도 사월에도 피지만, 여름에도 한 차례 피고 지기도 하고, 구월과 시월과 십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그리고, 십이월과 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다만, 한 포기 사이에서 다달이 피고 지지는 않고, 한 포기 사이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꽃하고 씨앗을 봅니다. 이 씩씩하면서 앙증맞도록 작은 꽃송이를 바라보는 동안 ‘보랏빛’이라는 빛깔을 ‘제비꽃빛’으로도 가리키면 더없이 곱겠네 하고 느껴요.



주걱은 /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 나무라면, 나도 /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 나를 패서 나로 지은 / 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 눈물 흘려보는 것 (주걱)


고목이 쓰러진 뒤에 / 보았다, 까치집 속에 /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아름다운 녹)



  이정록 님이 빚은 시집 《제비꽃 여인숙》(민음사,2001)을 읽습니다. 어른이 읽는 시도, 어린이가 읽는 시도, 또 어린이가 읽을 동화도 쓰는 이정록 님이 서른 한복판 나이를 가로지를 무렵 내놓은 시집입니다. 이제 쉰 살 나이를 지나가는 이정록 님인데, 서른다섯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하고, 쉰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앞으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 이르면,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어떻게 돌아볼 만할까요.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이나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제비꽃 아래)



  우리한테는 모든 나이가 꼭 한 번씩입니다. 서른다섯 살도 한 번이고, 마흔다섯 살이나 쉰다섯 살도 한 번입니다. 스물다섯 살하고 열다섯 살도 오직 한 번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나이를 거치는 동안 느끼거나 겪을 수 있는 삶도 오직 한 번뿐입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과 괴로움이 얼룩지는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스러울 수 있고, 때로는 훌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웃음꽃이요, 때로는 눈물꽃일 수 있어요.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저마다 꼭 한 번 누리는 ‘나이’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자랍니다.


  아이도 자라고 어른도 자라지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몸이랑 마음이 함께 자라지요. 아이는 키가 크고 몸이 불어납니다. 어른은 키나 몸이 더 불지 않는다고 여길 만한데, 힘살이나 아귀힘이나 굳은살이나 여러 가지 모습이 새롭게 바뀌거나 거듭나요.



올해 나는 서른일곱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과 무엇으로 딱히 가르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내 아랫배처럼 두루뭉실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두 아이의 이름이 섞이고 어머니와 아내가 섞이고 새끼토끼들의 고모와 이모가 섞이고 풀과 나무와 땔감이 섞이고 귀여운 토끼와 토끼탕이 섞이고 (토끼)



  시집 《제비꽃 여인숙》을 쓴 이정록 님이 읊은 서른일곱이 된 나이를 돌아봅니다. 아이들이 토끼처럼 자라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빛을 헤아립니다. 이제 이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떤 숨결로 이곳에 설까요.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새로운 토끼’를 찾는 사랑을 꿈꿀까요.


  아침에 감알을 썰어 아이들한테 건네면, 아이들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랑해.” 하고 감알을 보며 외칩니다. 나도 감 한 알을 집어서 함께 먹습니다. 나는 한 알을 먹고 아이들은 두 알씩 먹습니다. 나는 한 알로도 넉넉한데, 아이들은 두 알로도 모자랍니다. 다 먹고 더 달라 하면 더 줍니다. 몸뚱이로 보자면 어른인 내가 훨씬 크고 힘도 세지만, 먹고 싶은 밥그릇으로 대자면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습니다.


  아마 이러한 삶은 스스로 누리지 않는다면 모를 만합니다. 스스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아이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꿈을 새로 낳으면서, 스스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누나하고 부르면 / 내 가슴속에 / 붉은풍금새 한 마리 /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붉은풍금새)


새벽 이슬에 / 손마디가 /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새벽 이슬)



  아침 낮 저녁으로 뒤꼍으로 오르면 십일월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유자 익는 냄새가 물씬 퍼집니다. 고닥 뒤꼍에 설 뿐이지만 내 코는 유자 냄새를 큼큼 맡으면서 즐겁습니다.


  봄에 뒤꼍에 서면 매화꽃 내음이 가득 퍼집니다. 매화꽃이 질 무렵에는 모과꽃 내음이 고루 퍼지고,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찔레꽃이랑 감꽃이 온몸을 따사로이 어루만져 줍니다.


  철마다 다른 꽃과 열매가 철마다 다른 숨결로 스며듭니다. 철마다 다른 풀과 꽃이 돋으면서 철마다 새로운 노래와 이야기가 퍼집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 이 아이들은 꼭 한 번 지나가는 한 살 두 살 다섯 살 여섯 살 모두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홉 살 열 살도, 열네 살 열다섯 살도 새로운 몸짓이에요. 어른한테도 서른일곱 살이랑 마흔일곱 살이란 그야말로 새로우면서 재미난 삶자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에도 대보고 /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 외길로 둟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부러진 숟가락)



  시 한 줄을 읽으면서 노래 한 가락을 읊습니다. 시 두 줄을 읽으면서 노래 두 가락을 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사랑을 짓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삶결대로 새로운 사랑을 짓습니다.


  이정록 님을 낳은 어머님이 건사한 ‘목이 부러진 숟가락’은 어떠한 사랑이었을까요. 언뜻 보자면 그냥 ‘목이 부러진 숟가락’이지만, 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무럭무럭 자란 오랜 이야기가 깃든 노래주머니일 수 있습니다. 쓰레기통에 던지면 쓰레기이지만, 살강에 가만히 얹으면 알뜰살뜰 누리는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 먼 길, 내 책가방 속에는 / 돌멩이 가득했다 (돌의 이마를 짚다)



  삶을 노래하기에 시 한 줄입니다. 삶을 꿈꾸기에 시 두 줄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시 석 줄입니다. 삶을 노래하지 못하면 시가 태어나지 못하고, 삶을 꿈꾸지 않으면 시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아픔도 시로 쓰고 슬픔도 시로 쓸 뿐 아니라, 기쁨과 보람과 자랑과 꿈과 이야기와 웃음 모두 시로 씁니다.


  오늘도 아침에 마당 한쪽에 쪼그려앉아서 제비꽃을 들여다봅니다. 어제그제 찬비가 내려서 마당 한쪽 제비꽃은 꽃송이를 야무지게 닫습니다. 꽃송이를 벌린 제비꽃도 곱고, 꽃송이를 꼭 닫은 제비꽃도 곱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운 숨결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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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 신나는 새싹 15
길상효 글, 안병현 그림 / 씨드북(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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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78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한테 골목이란

― 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

 길상효 글

 안병현 그림

 씨드북 펴냄, 2015.9.18. 11000원



  내 어릴 적을 떠올리면, 그무렵에는 누구나 목소리로 서로 부르며 살았습니다. 대문을 두드린다든지 단추를 눌러서 사람을 부르지 않았어요. 목소리를 높여서 서로서로 불렀어요. 놀자고 할 적에도 소리를 내어 부르고, 심부름을 할 적에도 소리를 내어 부릅니다.


  이 집에 누군가 있으면 이 집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 집에 아무도 없으면 이웃집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그 집에 아무도 없는데’ 하고 알려줍니다. 손전화가 없고 집전화가 없어도 몸소 찾아가서 만났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웃집이 건너건너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오늘날에는 집 주소를 놓고 무슨무슨 길이라거나 번지 숫자가 빼곡하지만, 목소리로 이웃집을 부르던 지난날에는 주소나 번지 숫자가 아니라 ‘집에 사는 사람’ 이름으로 서로 알았습니다. 아무개네 집이 어딘가 하고 찾았지, 몇 번지 몇 통 몇 반으로 집을 찾지 않았어요. 그리고,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든지, 대문이 무슨 빛깔인 집이라든지, 집마다 다른 모습과 숨결을 살펴서 서로 알음알음했습니다.



골목은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어요. 그런데도 눈이 오거나 가랑잎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자기 집 앞 골목을 쓸어요. (5쪽)



  길상효 님이 글을 쓰고, 안병현 님이 그림을 빚은 《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씨드북,2015)는 오늘날 어린이한테 골목마을이 어떤 삶터인가를 들려주려고 하는 그림책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골목이나 골목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구나 무척 많은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자랍니다. 통계청 자료를 살피면 2005년에 41.7퍼센트가 아파트에서 살고, 2010년에 47.1퍼센트가 아파트에서 산다고 해요. 2015년 통계는 2016년에 나올 텐데 50퍼센트를 웃돌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50퍼센트가 넘는다 하더라도 아파트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건물에서 사는 사람이 무척 많지요.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도 많고요. 골목마을에도 2층이나 3층짜리 낮은 집이 꽤 있습니다만, 이 그림책에서 다루는 골목마을 같은 골목집에서 사는 사람은 무척 적어요. 더욱이 골목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은 아주 빠르게 줄어듭니다.




골목을 지나가면 많은 이야기가 들려와요. 귀가 어두운 어느 집 할아버지가 크게 켜 놓으신 텔레비전 뉴스 소리도 들리고. (10쪽)



  골목마을에서 사는 사람은 골목마실을 따로 다니지 않습니다. 골목길을 늘 지나다니기는 하되 굳이 이 골목이나 저 골목을 빙글빙글 돌면서 다니지 않아요. 골목마을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 골목마실을 다니기 마련이고, 이들은 이 골목과 저 골목 사이에서 흐르는 곱고 따순 숨결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아무래도 아파트와 골목집은 사뭇 다르기 때문일 텐데, 아파트는 이웃집이 어떠한 숨결인지 알기 어렵고,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골목집은 담벼락이 있어도 까치발을 하면 들여다보이기도 할 뿐 아니라, 골목길을 따라서 골목밭이 있기도 하고, 골목집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는 골목집보다 높이 솟아서 어디에서나 잘 보입니다.


  골목마실을 하는 ‘골목 밖 사람’은 골목길을 거닐면서 꽃도 보고 나무도 봅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정갈하게 보듬는 골목길을 거니는 동안 수수한 이야기를 느끼고, 수수한 살림을 마주하며, 수수한 사랑이 어떻게 마을을 가꾸는가를 바라볼 만합니다.




골목은 그냥 지나만 다녀도 놀이터가 돼요. 언제 어디서 친구들이 나타날지 몰라요. 꺾인 모퉁이 뒤에서 갑자기 ‘왁!’ 하고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어요. (14쪽)



  그림책 《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는 아직 아파트 바람이 휭휭 불기 앞서까지 골목마을이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던 조촐한 재미와 기쁨을 새록새록 보여주려고 합니다.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을 보여주고, 골목 한쪽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어우러지는 이웃들을 보여줍니다. 허물이 없는 삶을 보여주고, 도란도란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보여주지요.


  가만히 보면, 골목집은 햇볕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햇볕을 더 잘 받는 집은 따로 없습니다. 올망졸망 담벼락을 맞대고 이어지는 작은 집들은 해가 흐르는 결에 따라 찬찬히 따스한 손길을 받습니다. 작은 집이 서로 모여서 시끄러운 소리가 골목마을로 스며들지 못하고, 작은 집이 나란히 붙은 터라 한겨울에도 한결 따스한 기운이 감돕니다.




나를 등지고 반대쪽으로 뛰어가던 친구가 어느새 내 앞에서 뛰고 있기도 해요. 꺾이고 갈라지는 골목에는 숨을 곳이 정말 많아요. 그래서 숨바꼭질은 매일 해도 재미있어요. (17쪽)



  집과 집 사이에 난 길을 골목이라고 합니다. 길게 맞붙은 집 사이로 흐르는 길이 골목입니다. 이 골목은 이 집 것도 저 집 것도 아닙니다. 함께 나누어 쓰는 길이고, 함께 걷는 길입니다. 함께 오가는 길이요, 함께 누리는 길이에요.


  골목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골목을 쓸고 치웁니다. 함께 누리는 삶자리이니까요. 골목마을에서는 누구나 이웃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언니 오빠 누나 동생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마을은 들과 숲과 냇물을 함께 누리는 삶자리이고, 골목마을은 도시에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삶자리입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나누고, 큰 것은 큰 것대로 나눕니다. 웃음은 웃음대로 나누며, 눈물은 눈물대로 나누어요.


  그림책 《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는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한테 이웃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면서, 바로 우리 누구나 서로 이웃이 되고 동무가 되면서 오순도순 삶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알려주려고 하지 싶습니다. 어깨를 겯는 동무가 되고, 손을 맞잡는 이웃이 되어, 우리 삶터를 우리 사랑으로 곱게 가꾸자는 꿈을 넌지시 들려주려고 하지 싶습니다. 4348.11.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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