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4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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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72



몸에 깃든 넋을 돌아본다

― 강철의 연금술사 4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4.3.10. 4200원



  《강철의 연금술사》 넷째 권을 읽으며 몸과 넋이란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이 몸은 어떤 몸일까요? 내 넋은 어떤 넋일까요? 너와 내가 ‘사람’이라고 할 적에는 겉으로 보는 몸을 놓고 ‘사람’이라 할까요, 아니면 몸에 깃든 넋을 바라보면서 ‘사람’이라 할까요?


  그러니까, 몸이라고 하는 옷을 입으면 사람이 될까요? 몸이라고 하는 옷이 없어도 넋이 있으면 사람이 될까요? 몸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몸이 있으면 사람인 셈일까요? 몸이 없어도 넋이 있기에 사람이요, 몸이 있어도 넋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너희들은 귀중한 제물을 죽여 버릴 뻔했단 말야, 알아? 거기다 누구 맘대로 우리 비밀을 까발리려 들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어쩔 거야, 응?” (10쪽)


“그렇게 벌벌 떨 것 없어. 난 군의 지위가 탐나서 국가 자격을 딴 것도 아니고. 게다가 존댓말은 뭐하러 해? 이런 어린애한테.” (39쪽)



  만화책 《강철의 연금술사》는 두 어린 사내가 이야기를 이끕니다. 에드워드와 알폰소, 이 두 형제가 연금술로 저희 어머니를 살리려고 하다가 그만 에드워드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고, 알폰소는 몸뚱이를 통째로 잃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팔과 다리를 ‘오토메일’이라는 기계로 붙였어요. 알폰소는 쇳덩어리로 된 커다란 인형에 넋을 씌웠지요.


  두 아이를 바라보면, 한 아이는 팔다리가 쇳덩이입니다. 팔다리가 하나씩 쇳덩이라 하더라도 이 아이를 바라보며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팔다리가 모두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머리통만 빼고 모두 기계라 하더라도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동생 알폰소처럼 몸뚱이가 하나도 없이 커다란 쇳덩어리에 넋만 씌우면 어떠할까요? 이때에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사람인가 아닌가’를 따질 수 있을까요.



“진짜 형제라면, 떠나겠다는 것도, 오늘처럼 다친 것도 다 말해 줬을 텐데.” “의논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의논할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 윈리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 줄 거라 생각한 게 틀림없어.” (80∼81쪽)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로 가짜 동생을 만들 멍청이가 세상에 어딨어! 너희들은 세상에 단둘뿐인 형제란 말야.” (99쪽)



  몸에 깃든 넋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 몸을 움직이는 넋이 있기에 내 삶은 오늘 이곳에서 내 나름대로, 또는 내 마음대로 지을 수 있습니다. 내 몸을 움직이는 넋이 없으면 나는 내 나름대로, 또는 내 마음대로 삶을 짓지 않습니다. 내 넋이 없으면 내 몸뚱이는 ‘내가 바라거나 내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남이 바라거나 남이 시키는 일’만 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여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넋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 마음이 없고, 제 생각이 없으면, 아무리 제 몸이 있더라도 사람다운 모습이라고 하지 않아요. 남이 시키거나 바라는 대로 휘둘리는 몸뚱이라면 이른바 종(노예)이나 톱니바퀴(기계·부속품)일 뿐이겠지요.



“만드는 법 배웠으니까 알이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만들어 줄게. 이런 걸 ‘엄마의 손맛’이라고 하나 봐.” (140쪽)


“대총통 지위에 오르는 것도, 휴즈의 원수를 갚는 것도 모두 나 개인의 의지다! 상층부를 파고 들어간다. 따라오겠나?” “뭘 새삼스럽게.” (158쪽)



  만화책에 나오는 두 아이가 ‘처음 몸을 되찾으려’고 하는 까닭은 오늘 이곳에서 팔다리나 몸뚱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두 아이는 몸을 되찾으려고 하는 몸짓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몸에 깃든 넋으로 어떤 삶을 지을 때에 스스로 즐겁고 스스로 아름다우며 스스로 사랑스러운가 하는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 긴긴 여행길에 나섭니다. 삶을 이루는 슬기를 배우려고 긴긴 여행길에 나선 셈이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생각을 지을 때에 사람이기에, 꿈을 꿀 때에 사람이기에, 사랑을 노래할 때에 사람이기에, 두 아이는 외롭거나 힘들거나 아프더라도 씩씩하게 일어서면서 늘 새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어린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아요. 어린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아요. 마음이 있기에 무엇이든 하고, 생각이 있기에 다시금 기운을 낼 수 있습니다. 4348.11.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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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 김기찬, 그 후 10년
김기찬 지음 / 눈빛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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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잡지 <포토닷> 2015년 11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2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사진을 찍는다

―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과 아홉 사람 글

 김기찬 사진

 눈빛 펴냄, 2015.8.27. 18000원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하고 묻는 이웃이 있다면 나는 늘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하고. 잘 찍느냐라든지 잘 못 찍느냐는 대수롭지 않으니 처음부터 안 따집니다. 멋지게 찍느냐 안 멋지게 찍느냐도 대수롭지 않기에 처음부터 안 따져요. 값어치가 있는 사진이냐 아니냐도 처음부터 안 따집니다. 다만 늘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따지기’를 하지 않고 ‘생각하기’를 해요. 사진기를 손에 쥔 나 스스로 ‘사랑’인가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고 이웃을 마주한 내가 언제나 ‘사랑’인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내가 너를 바라보는 눈길이 ‘사랑’으로 있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내 사진 속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낮에 남자들이 일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리가 없다. (21쪽/김기찬)



  김기찬 님은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길을 걸었습니다.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을 여러 권 선보였습니다. 김기찬 님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셨기에 더는 골목을 거닐지 못하고 골목을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그러나 김기찬 님이 남긴 글하고 사진이 있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눈빛,2015)라는 책이 태어납니다. 이 책에는 김기찬 님이 골목을 바라본 마음을 손수 적은 글을 앞자락에 싣습니다. 이러고 나서 뒷자락에는 김기찬 님 사진을 바라보는 아홉 사람 이야기를 싣습니다.


  한정식, 전민조, 김호기, 임종업, 윤한수, 최종규, 정진국, 이광수, 윤일성, 이렇게 아홉 사람이 김기찬 님 사진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김기찬 님이 거닐던 골목을 새삼스레 걸어 보고, 김기찬 님이 거닐던 골목이 요즈음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피며,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과 사진책이 어떠한 숨결로 우리한테 삶을 보여주는가 하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골목안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다. 작고 납작한 집들이지만 서로서로 껴안기도 하고, 바람 한 점 끼어들 틈 없이 바짝바짝 붙어 있어 어찌 보면 정겹기도 하다. 그런 집들이 동서남북으로 줄지어 서 있으니 자연히 골목길이 생겨난다. (27쪽/김기찬)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요? 사진은 누구나 이녁 삶대로 찍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고, 너는 네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사진은 고스란히 삶입니다.


  김기찬 님이 찍은 골목안 풍경은 ‘골목안 풍경’일 뿐 아니라, ‘김기찬 님 마음자리 모습’이에요. 김기찬 님이 골목안을 ‘어머니 품’으로 느꼈다면, 김기찬 님 스스로 이녁 마음을 ‘어머니 품’처럼 되도록 보살피거나 가꾸거나 보듬으면서 삶을 지었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골목안을 ‘포근하고 따뜻하다’고 느꼈다면, 김기찬 님 스스로 이녁 마음을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할’ 수 있도록 돌보거나 일구거나 어루만지면서 사진을 빚었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어머니 품이 되지 못한다면, 골목안 풍경을 어머니 품처럼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포근하거나 따뜻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골목안 풍경을 포근하거나 따뜻하게 찍을 수 없어요.




은행나무 골목은 언제나 즐겁고 인정이 넘쳐 나는 골목이다. 혜령이 할머니는 환경미화원이든 우편배달부 아저씨이든 땀 흘려 수고하는 분들에게 시원한 차 한잔이라도 대접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분이다. 게다가 나 같은 사진쟁이에게까지 차 대접을 하니 참으로 송구스럽다. (35쪽/김기찬)



  사진을 찍는 수수께끼는 실마리를 풀기 아주 쉽습니다. 내 마음이 어두울 적에는 내 사진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밝을 적에는 내 사진이 밝을 수밖에 없어요.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은 ‘골목안 사람들이 사진기를 거스르지 않고 사진가를 따스하게 받아들여 주던 문화가 아직 있던 때’였기에 빚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은 ‘김기찬 님 마음이 그대로 골목안 풍경으로 드러나면’서 빚는 사진입니다.


  그래서 김기찬 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김기찬 님이 밟은 골목’을 다시 밟더라도 ‘김기찬 님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어설픈 ‘따라하기 사진’만 찍습니다. 김기찬 님처럼 스스로 어머니 품이 되려 하지 않고서는 어머니 품 같은 사진을 찍지 못해요. 김기찬 님처럼 스스로 포근하거나 따스한 마음이 되려 하지 않으니 포근하거나 따스한 기운이 스미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골목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퀴퀴하거나 어둡거나 지저분하거나 낡’아 보이도록 찍습니다. 왜 이렇게 찍을까요?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사진기를 손에 쥔 분들 스스로 이녁 마음이 퀴퀴하거나 어둡거나 지저분하거나 낡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은 ‘보여지는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이 아닙니다.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어떤 삶인가 하는 대목이 보여지는 이야기’입니다.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겉치레를 하고 꾸며서 보여주지만 아디릉느 순진하고 정직한 동심 그대로이니 아이들 사진만큼 편안한 사진도 없다. (39쪽/김기찬)



  멋있어 보이도록 찍는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다른 사람 눈치’를 살핀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럴듯한 모습을 꾸며서 ‘남한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잘 찍은 사진’을 바라는 사람은 왜 사진을 잘 찍으려고 할까요? 이분들도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한테서 칭찬을 받거나 남보다 윗자리에 올라서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에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고 말아요.



골목은 꼬불꼬불 산비탈에 길이 나 있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뛰어다니기에 알맞으니 다리가 튼튼하다. 다리가 튼튼하니 몸도 마음도 튼튼하다. 게다가 생활이 넉넉지 못하니 하기 싫은 과외공부가 필요없다. (41쪽/김기찬)




  김기찬 님이 어떤 사진을 찍었는가 하는 대목을 이제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김기찬 님은 ‘좋은 이웃을 만났기에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았습니다. 김기찬 님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었기에 김기찬 님이 걷는 골목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을 만나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사진’을 못 찍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어요. 이른바 ‘작품’이나 ‘예술’이나 ‘기록’은 하더라도,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마음이라면 ‘작품·예술·기록’은 할 테지만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 생각해 보셔요. 김기찬 님이 찍은 사진은 무엇일까요? 오직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이 찍은 사진은 작품이나 예술이나 기록이 아닙니다. 김기찬 님은 ‘사진가’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서 골목안 이웃을 찍는 골목안 풍경을 이루었어요.



내가 이 돌담 마을에 애정을 갖는 것은 우선 돌담은 성벽보다 소박하고 예쁘기 때문이다. 성벽은 우람하지만 강제로 쌓여졌고 돌담은 우직한 농부들이 밭을 일구다 주워 놓은 돌로 내 집, 내 터 둘레에 바람을 막고 오붓한 내 살림을 꾸미기 위해서 쌓았기 때문이다. (93쪽/김기찬)




  김기찬 님은 성벽이나 문화재가 아닌 골목을 찍었고 돌담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은 작품도 예술도 기록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은 공모전이나 상장이나 이름값을 바라지 않았어요. 김기찬 님은 언제나 이웃을 사랑하면서 생각했고, 즐겁게 골목을 천천히 거닐면서 이녁 마음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꽃송이를 돌보듯이 곱고 부드럽게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에 꽃송이를 어루만지는 손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넘실거리기에 숲에서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는 숨결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따스하기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두레를 하는 몸짓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넉넉하기에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웃거나 울면서 가만히 노래를 부릅니다. 꿈을 노래하고, 삶을 노래해요. 너를 노래하고, 나를 노래하지요.


  사진책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는 오늘 우리한테 ‘사진은 어떻게 찍으면 즐거울까?’ 같은 수수께끼를 따사로이 풀어 줍니다. 이 도톰한 사진책은 오늘 우리한테 ‘사진은 어떻게 찍으면 다 같이 기쁠까?’ 같은 수수께끼를 아기자기하게 풀어 줍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을 꿈꾸면 됩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면 됩니다. 비싼 사진기나 값진 사진기나 좋은 사진기나 멋진 사진기가 아니라, 그저 사랑 어린 손길로 즐겁게 쥘 만한 사진기 한 대가 있으면 됩니다. 삶이 드러나고, 사랑이 드러나며, 사람됨이 드러나는 사진 한 장입니다. 4348.10.1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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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11-0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으로 기쁘게 잘 읽었는데~ 숲노래님의 아름다운 느낌글로 더욱더
생생하고 즐겁고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5-11-07 21:53   좋아요 0 | URL
우리 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사진책이
아름다운 손길과 사랑을 받으면서
오래오래 아름다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바탕이 되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
 
말의 미소 난 책읽기가 좋아
크리스 도네르 글, 필립 뒤마 그림, 김경온 옮김 / 비룡소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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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0



시골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말의 미소

 크리스 도네르 글

 필립 뒤마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어린이문학 《말의 미소》(비룡소,1997)는 프랑스 어느 조용한 시골마을 이야기를 다룹니다. 프랑스도 한국하고 시골살림은 비슷한지, 시골은 자꾸 줄어들고, 사람도 떠나고, 아이들도 차츰 사라져서, 시골학교도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마냥 지켜볼 수 없다고 여긴 시골학교 교사 한 사람은 생각을 짜내고 짜내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흐름을 돌이킬 수 있을까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스러져 가는 시골마을에 새롭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도록 북돋울 수 있을까 하고.


  이리하여 어느 날 ‘말’을 떠올립니다. 말 한 마디를 학교에 들이자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어도 말을 장만할 돈이 없습니다. 교사도 주머니를 탈탈 털고, 아이들도 저금통을 탈탈 텁니다. 그러나 말 한 마리를 장만할 돈으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교사와 아이들은 말 한 마리를 얻어요.



비르 아켕이 왜 그렇게 쇠약해졌는지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말이 늙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원인을 찾아보지 않고 은퇴시키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 나이로는 더 이상 돈벌이를 할 수 없을 거야. 도살 전문가가 고기값으로 돈을 준다면 모를까.” (22쪽)



  교사도 아이들도 말을 잘 모릅니다. 이러저러하게 생긴 짐승이 말인 줄 알 뿐입니다. 말 사육장을 거느린 사람은 말을 압니다. 어느 말을 경마장에 내보내면 돈을 잘 벌 만한가를 알고, 어느 말은 ‘은퇴’시켜서 도살장으로 보내어 고기로 바꾸면 돈이 될 만한가를 압니다.


  말 사육장을 거느린 백작은 시골학교 교사가 찾아왔을 적에 속으로 ‘잘되었네!’ 하고 생각합니다. 늙었는지 어디가 아픈지 아무튼 경마장에서 더는 달릴 수 없는 말을 시골학교 교사한테 팔기로 했지요. 도살장에 넘기려고 했는데, 도살장에 넘기는 값보다 돈을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늙었는지 아픈지’ 알 길이 없는 말을 모르는 척 떠넘깁니다.


  그러면, 말 사육장을 거느린 백작은 말 한 마리가 ‘늙었는지 아픈지’ 왜 모를까요? 이녁은 말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돌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돈벌이만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말은 웃지 않는다. 말이 윗입술을 콧구멍 위까지 들어올릴 때는,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배가 아프기 때문에, 몹시 아프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수의학에서는 이를 ‘위통’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말을 만나기 전부터 줄곧 말을 사랑해 왔다. (33쪽)



  시골학교 교사와 아이들은 말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아아 말이란 이렇게 크구나, 아아 말이란 이렇게 멋지구나, 하고. 그런데 말이 웃는 낯입니다. 아이들은 ‘말이라는 짐승을 아직 몰라’요. 그래서 말이 웃는 낯인 모습을 보면서 왜 이러한 모습인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저 말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서 웃네!’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아주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 말을 거절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싶어했다. (41쪽)



  시골학교 교사하고 아이들 앞에서 웃는 낯이던 말은 얼마 못 걷고 길바닥에 픽 쓰러집니다. 입에 거품을 뭅니다. 교사도 아이들도 저희 돈을 몽땅 털어서 장만한 말인데, 나날이 초라해지고 쓸쓸해지는 시골마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서, 아이들한테 꿈을 심어 주려는 뜻에서, 그야말로 온 사랑을 쏟아서 말 한 마리를 시골학교에 두면서 돌보려고 했는데, 말을 데려온 날, 이 말은 힘없이 길바닥에 쓰러져서 몹시 끙끙 앓습니다.


  수의사가 달려옵니다. 수의사는 이 말이 이제 더 살 수 없다고 진단을 합니다. 그러나 교사도 아이들도 말한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수의사를 바라봅니다. 부디 이 말이 살아나도록 해 달라고 바랍니다. 수의사는 ‘웃는 말’을 보고는 이 말은 ‘죽음으로 가는 말’인 줄 알지만, 차마 아이들한테 그 이야기까지는 털어놓지 않습니다. 수의사로서 ‘말이 부디 덜 아픈 채 죽음으로 가도록 할 생각’이었으나, 아이들 얼굴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마취 주사를 놓고 배를 가르기로 합니다. 큰 수술을 하기로 합니다.



아이들은 말의 털을 만져 보았고, 말의 온기와 냄새를 느꼈다. 아이들은 말의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말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려고 말의 몸을 정성껏 쓰다듬었다. (46쪽)



  늙고 아픈 말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늙고 아픈 말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이 말한테서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시골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의사는 큰 수술을 마쳤습니다. 수의사는 ‘기적’도 ‘놀라움’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들 눈망울을 보고는 말을 차마 죽음으로 보내지 못하고 큰 수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길바닥에 쓰러진 채 끙끙 앓는 말을 어루만져 주고 기운을 내라는 얘기까지 들려줍니다.


  말이라고 하는 짐승이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알아듣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늙고 아픈 말은 마취에서 풀려난 뒤 무언가를 느낍니다. 제 곁에서 저를 지켜보면서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낍니다. 거의 죽음 문턱에 이르렀던 말은 마지막 힘을 쥐어짭니다. 아니, 마지막 힘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스스로 일으킵니다. 앞으로 경마장에서 달릴 일은 없을 테지만, 이 말은 말로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립니다. 앞으로 아이들한테서 사랑을 받고, 또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새롭게 살 수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 맞아! 어른들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는 것은 역시 아이들뿐이야!’ (53쪽)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린이문학 《말의 미소》입니다. 이 작품은 수의사 눈길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끕니다. 말 한 마리를 둘러싸고 시골마을 작은 학교 교사하고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는가를 차분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준 뒤 “어른들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는 아이들”을 노래하면서 끝맺습니다.


  이 작은 이야기에서도 들려주는데, 시골아이가 할 수 있는 ‘큰 일’은 없습니다. 시골아이한테는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들한테는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아끼는 사랑이 있고, 다른 목숨을 아끼는 사랑이 있으며, 따사롭고 너른 마음에 가득한 사랑이 있어요.


  마을을 살리는 힘이라면, 마을을 살리는 길이라면, 그리고 마을뿐 아니라 나라와 지구별을 살리는 밑힘이라면 바로 아이들이겠지요. 웃는 아이들이 모두를 살리고, 웃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온누리를 따사로이 어루만질 테지요. 4348.11.7.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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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 왕자 덜신 동화는 내 친구 47
C. W. 니콜 지음, 서혜숙 옮김 / 논장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01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서는 길을 배운다

― 벌거숭이 왕자 덜신

 C.W.니콜 글·그림

 서혜숙 옮김

 논장 펴냄, 2006.11.25.



  아침에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넙니다. 볕이 들 듯 말 듯 구름이 짙습니다. 바람이 살며시 불기에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낮밥을 먹는 자리에서 작은아이가 문득 밖을 내다보더니 “비다! 비가 온다!” 하고 외칩니다. 이러면서 마당으로 달려나가려 합니다. 나도 부랴부랴 일어나서 마당으로 달려나가려 합니다. 작은아이는 아침에 누나하고 평상에 잔뜩 올려놓고 놀던 장난감이 비에 젖을까 보아 걱정합니다. 나는 잘 마른 빨래가 빗물에 다시 젖을까 보아 근심합니다.


  빨래를 걷으며 작은아이를 바라봅니다. 작은아이는 고 작은 손으로 장난감 자동차를 고 작은 가슴에 잔뜩 안습니다. 영차영차 소리를 내면서 맨발로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걸어갑니다.


  문득 옛일을 더듬습니다. 이 아이들이 더 어릴 적에는 이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그대로 둔 장난감도 내가 다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제 아이들 장난감은 아이들이 스스로 건사하고, 나는 우리 식구 빨래만 건사하면 됩니다.



켈토이의 콘라 왕은 사인즈나크 해적들을 격퇴하기 위해서 배를 서른세 척이나 만들도록 명령했다. 서른 척이 넘는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년 이상 된 참나무 500그루, 붉은 느릅나무 80그루, 가장 키가 큰 산 소나무 100그루, 1000년 이상 된 거대한 전나무 다섯 그루를 온 나라의 숲에서 베어야만 했다. (20쪽)


“우리 켈토이는 항상 산과 숲의 비밀을 소중하게 보호해 왔지요. 오랫동안 이런 비밀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읽을 수 없게 하려고 문자로 전하지는 않았지요. 단지 나는 단순하고 짧은 시를 노래했어요.” (73쪽)



  C.W.니콜 님이 빚은 청소년문학 《벌거숭이 왕자 덜신》(논장,2006)을 읽습니다. 이 책은 켈트 겨레가 지난날 어떠한 삶을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켈트 문화를 책으로 읽으면서 옛날과 오늘과 앞날 사이에 흐르는 너른 숨결을 슬기롭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책이름이 ‘벌거숭이 왕자’인데, 왕자 ‘덜신’은 스스로 깊은 숲에서 혼잣힘으로 씩씩하게 살아남아서 다시 왕자 자리로 돌아간 아이입니다.


  연장도 무기도 없이, 게다가 옷이랑 신조차 없이, 아주 알몸으로 궁궐에서 쫓겨나 숲에서 한 해 남짓 살아남아야 하는 덜신이에요. 그런데 이 아이는 이 징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맞아들입니다. 왕자가 왕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도록 하려는 꿍꿍이 때문에 궁궐에서 내쫓긴 덜신 왕자인데, 덜신 왕자는 이렇게 내쫓기는 일을 나쁘게 바라보지 않아요.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하는 징검돌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어요.



“덜신 왕자님, 이 까마귀는 재생의 여신, 모리간의 눈을 한 신의 심부름꾼이에요. 모리간은 두렵고 힘센 존재지요. 그 여신이 지금 어 이린 까마귀의 눈을 통해 당신을 보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어요. 그 까마귀를 잘 보살피세요. 이건 아주 중요하답니다. 엄마처럼 그 새를 보호하세요.” (44쪽)


덜신은 안장 없이 말 등에 올라타면 말의 기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49쪽)


“그래, 그랬었지.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 반 년 정도 산에서 지내면서 바람과 나무들이 전하는, 불쌍하게 파멸되어 가는 켈토이 소식을 듣게 되었지. 그래, 귄더, 바람과 숲과 강이 웅얼대며, 새가 지저귀며, 잎과 가지가 바삭거리며 똑같이 내게 말하더군.” (84쪽)



  청소년문학 《벌거숭이 왕자 덜신》을 읽을 어린이나 푸름이는 어쩌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설마 아무것도 없는 맨손에 알몸으로 숲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는지 모르지요. 오늘날에는 깊은 숲이란 데가 없을 터이며, 궁궐에서 쫓겨나도 편의점이 있지 않겠느냐고 여길 어린이나 푸름이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혼잣힘으로 씩씩하게 삶을 짓도록 북돋울 만한 깊은 숲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다섯 살쯤 되는 푸른 넋이 제 몸을 가꿀 옷을 숲에서 얻고, 제 몸을 살찌울 밥을 숲에서 찾으며, 제 몸을 갈고닦을 모든 배움과 훈련을 숲에서 깨달으려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아니, 이러한 생각을 할 만한 푸른 넋은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시험공부로 바쁠 터이니, 무슨 옷이며 밥이며 집을 스스로 건사하느냐고 여길 만합니다.


  책을 덮고 생각해 봅니다. 청소년문학 《벌거숭이 왕자 덜신》에 나오는 덜신 왕자는 오롯이 홀로서기(자립)를 합니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다른 어른한테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몸짓은 숲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새롭게 배우는 하루가 됩니다. 먹을거리를 찾으려고 맨발로 숲을 거닐면서 흙과 풀과 나무를 새롭게 마주하면서 배웁니다. 입을거리를 얻으려고 풀줄기를 훑고 실이 될 만한 것을 헤아리면서 그야말로 숲이 어떠한 터전인가를 새롭게 알아차립니다.



“덜신, 잘 들어라. 이제 너는 신들의 자식이며 자연의 보호를 받는다. 야생의 형제와 자매들을 관찰해서 그들의 말을 잘 듣고, 항상 그들을 존경과 예의로 대하라. 이제 너는 인간 생활의 족쇄에서 자유롭다. 단순한 것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아라. 귀 기울여 보아라.” (92쪽)


낮이 밤으로 이어져 여러 날이 지나갔다. 덜신은 항상 먹을 것에 대해 생각했고, 언제나 배고픔에 시달렸다. 덜신은 점점 더 약해지고 아주 말라서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 대신에 색깔이나 소리 그리고 냄새는 더욱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밤에는 사냥하는 박쥐의 높은 울음소리도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98쪽)



  돈을 많이 벌어서 살아야 홀로서기이지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지을 때에 홀로서기입니다.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손꼽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기에 홀로서기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아파트 한 채를 ‘내 집’으로 장만하기에 홀로서기라고 하지 않아요.


  연봉이 높은 회사를 다닌다 한들, 그 회사가 사라지면 어찌 될까요. 내 집인 아파트가 있다 한들, 전기가 끊어지고 물이 끊어지면 어찌 될까요. 내 자동차가 있다 한들 기름이 마르면 어찌 될까요.


  현대문명을 거슬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이 서는 자리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첨단문명이나 도시 사회에 등을 돌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기계나 연장을 안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손수 짓고 빚고 가꾸고 가다듬을 줄 아는 몸짓이 되어야 합니다.



으르렁거리거나 히힝 하는 말 울음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최대한 맑게 하고, 검은번개의 앞이마의 삼각형 표시에 마음을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곳으로 투사하면, 검은번개가 반응을 보였다. (136쪽)


덜신은 바다표범과 더불어 노래하고 헤엄치며 놀았다. 그들은 친구들인데, 어떻게 그들의 신뢰를 배반할 수 있을까. (159쪽)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서는 길을 스스로 배울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물음에 ‘네!’ 하고 말하려 합니다. 이르든 늦든, 더디든 빠르든,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일어서는 길을 스스로 배운다고 느낍니다. 어떤 아이는 학교를 차곡차곡 다니면서 시나브로 배울 테고, 어떤 아이는 아무 학교도 안 다니면서 천천히 배울 테지요. 어떤 아이는 예순 살이나 여든 살이 되어서야 알아차려서 새로 배울 테고, 어떤 아이는 아흔 살에 눈을 감으면서도 하나도 못 배울 테지요.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뒤져서 지식이나 정보를 빠르게 얻는 아이가 있을 테고, 책도 인터넷도 없이 머리와 생각과 느낌으로 차근차근 깨닫고 알아차리는 아이가 있을 테지요.


  옛사람은 텔레비전을 켜서 날씨 방송을 들어야 날씨를 알지 않았어요. 개미 움직임이나 제비 날갯짓을 보면서 날씨를 알았어요. 바람맛을 보고, 구름 흐름을 살피면서 날씨를 알았어요. 그리고, 옛사람은 식물도감을 뒤져서 풀이름을 알지 않았지요. 옛사람은 모두 어버이한테서 풀이름을 배웠고, 풀이름뿐 아니라 풀을 어떻게 다루고 건사하면서 어디에 어떻게 쓰는가 하는 대목까지 낱낱이 익혔어요.



덜신은 라그다의 손에서 하프를 받아서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그 소리는 상쾌하게 동굴에 울려퍼졌다. 즉시 덜신의 가슴에서 노래가 나왔다. 이 노래는 인간의 말도 리듬도 아니었다. 그 노래는 바람, 나무, 파도, 새 그리고 동물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서로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223∼224쪽)


자란 나뭇잎들은 그 자체가 말이었다. 나무들은 모든 날씨와 태양, 달, 별의 복잡한 운행을 알고 있었다. 나무들은 새들의 이야기를 알았고, 새들로부터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전해 들었다 … 미래는 도토리나 밤의 껍질 속에 보호되어 잠자고 있었다. (231쪽)



  우리 집 여덟 살 아이가 걸레질을 합니다. 설거지도 합니다. 곁님이 집에서 구운 빵을 썰 적에는 큰아이한테 빵칼을 맡겨 봅니다. 우리 집 다섯 살 아이도 요즈막에는 제 잠옷을 제법 잘 갭니다. 다섯 살이나 되어서야 잠옷을 개느냐고 나무랄 어른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아이는 그동안 실컷 노느라 바빠서 옷을 개는 일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이제는 제 옷을 스스로 건사하고 다루는 손길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모든 아이가 똑같은 나이에 똑같은 지식이나 정보를 익혀야 하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가 똑같은 나이에 똑같은 교과서를 받고는 똑같은 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여덟 살이면 초등학교를 가야 하거나, 열네 살이면 중학교를 가야 하지 않아요. 나이는 그냥 나이일 뿐이에요. 혼인을 몇 살에 해야 하는 법이란 없고, 아기를 몇 살에 낳아야 하는 법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열아홉 살에 아기를 낳을 테고, 누군가는 마흔 살에 아기를 낳을 테지요. 어떤 아이는 열아홉 살에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어떤 젊은이는 스물아홉 살에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요.


  나이에 맞추어 어떤 지식을 아이한테 밀어붙이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삶을 즐기고 누리고 가꾸고 사랑하고 펼칠 수 있는 길을 열도록 옆에서 따사로이 지켜보면서 도와주면 되리라 느껴요.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 일어서도록 북돋우면 되리라 느껴요.



“이 싸움은 복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왕자의 마음에서 화를 풀어내야만 하는 싸움이다. 그러니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269쪽)



  청소년문학 《벌거숭이 왕자 덜신》에 나오는 덜신 왕자는 어떻게 될까요? 숲에서 홀로 살아남은 덜신 왕자는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씩씩하게 다스리는 길을 스스로 배웁니다. 이리하여 ‘앙갚음’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았고, ‘사랑’도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아차렸어요. 새가 지저귀는 노래에 깃든 이야기를 스스로 알아듣고, 바람에 춤을 추는 나뭇가지가 들려주는 노래를 스스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받으며 사랑스레 자라는 아이들이 가슴속에 꿈씨 한 톨을 곱게 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곱게 자라는 꿈씨를 가슴속에 심으면서 날마다 새롭게 깨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모두 맨손이고 알몸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새롭게 태어나고, 처음부터 새롭게 하루를 열면서 기쁘게 웃을 수 있습니다. 4348.11.6.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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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
존 버닝햄 글.그림 / 보림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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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79



놀면서 심부름을 즐기는 아이들

― 장바구니

 존 버닝햄 글·그림

 김원석 옮김

 보림 펴냄, 1996.7.10. 9000원



  밤에 별을 보려고 마당에 나옵니다. 아이들은 모두 새근새근 잡니다. 아이들이 잠든 이 밤은 나한테 아주 홀가분한 한때입니다. 아버지도 호젓하게 별바라기를 하거나 달춤을 추고 싶단 말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당에 서서 달도 별도 함께 바라보면서 별자리를 그리고 미리내를 헤아리다가 대문을 열고 고샅에 서 봅니다. 요즈음은 시골에도 곳곳에 전등불을 밝히느라, 전등불 없는 곳을 찾자면 좀 걸어야 합니다. 시골사람이라면 누구나 밤눈이 밝고, 전등불이 없어도 밤길을 잘 다닙니다만, 이렇게 밤새 전등불을 켜면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남새도 밤새 못 쉬지요.


  불빛이 없는 곳을 찾아서 고샅을 걷는데, 이웃집 개가 컹컹 짖습니다. 고양이라도 지나가는 줄 알았을까요. 개 한 마리가 짖으니 저 건너편 창고 앞에 있는 개도 짖습니다. 그리고 마을 안쪽에 있는 개도 짖습니다. 밤에 고요히 별바라기를 하려고 나오는데 너희가 짖으면 시끄럽잖니, 하고 생각하면서 마을을 벗어나도 개는 컹컹 소리를 자꾸 냅니다. 이래서야 호젓함도 고요함도 즐거움도 없구나 싶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대문을 닫고 마당에 서서 별바라기를 하는데도 이웃집 개는 컹컹 소리를 그치지 않습니다. 한동안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스티븐은 아기에게 줄 달걀 여섯 개, 바나나 다섯 개, 사과 네 개, 오렌지 세 개, 자기가 먹을 도넛 두 개랑 과자 한 봉지를 샀어요. 그러고 나서 스티븐이 가게에서 나오는데 곰이 있지 뭐예요. (5쪽)



  존 버닝햄 님이 빚은 그림책 《장바구니》(보림,1996)를 읽습니다. 단출한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찬찬히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심부름을 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바쁘고, 여기에다가 온갖 집안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나’는 스스럼없이 심부름을 하러 다녀오기로 합니다.


  그런데, ‘내’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온갖 짐승이 나옵니다. 온갖 짐승은 내 장바구니에 담긴 것을 하나씩 달라고 으르렁거립니다. 내 장바구니에 있는 것을 안 주면 나를 괴롭힌다고 하는군요.


  이런. 나한테 으르렁거리는 온갖 짐승을 만나니, 나는 차츰 골이 납니다. 자꾸 짜증이 납니다. 처음에는 좀 부드럽게 말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지겨워서 거친 말을 내뱉습니다. 얼른 심부름을 마치고 ‘내 놀이’를 하고 싶다는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바나나 내놔. 안 주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거야.” “내가 바나나를 개집 위로 던지면, 넌 시끄러우니까 저 사나운 개가 깰 테고, 그러면 잡지도 못할걸.” “내가 시끄럽다고?” 원숭이가 말했어요. (11쪽)





  아이들은 심부름을 싫어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심부름을 대단히 즐거워 합니다. 아이 나름대로 무언가 거들 수 있어서 기뻐하고, 아이 힘으로 살림에 한손을 보탤 수 있어서 반깁니다.


  그림책 《장바구니》에 나오는 온갖 짐승은 ‘무엇’을 넌지시 빗대었을까요? 마을 개구쟁이일까요? 아니면, 마을에 있는 ‘짓궂은 형들’일까요? 온갖 짐승들은 심부름을 하지도 않고, ‘심부름하는 나’를 도울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내’ 곁에서 ‘나를 괴롭히는 재미’로 엉겨붙으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릴 적에도 내가 심부름을 하는 길에 ‘좀 있다가 집으로 가고, 같이 놀자’고 붙잡는 동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맡긴 심부름을 깜빡 잊고 놀이에 흠뻑 빠지는 일이 곧잘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장바구니를 들고 서둘러 집으로 갔어요. 스티븐이 집에 다다랐을 때 문 앞에 엄마가 있었어요. (29쪽)




  그림책 《장바구니》에 나오는 아이는 온갖 짐승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느라 바쁩니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뭔 그런 심부름을 하는데 왜 이리 늦느냐고 나무랍니다.


  아이는 이제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애써 심부름을 마쳤는데, 저를 괴롭히는 온갖 짐승을 물리치며 집으로 씩씩하게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나한테 들려주는 말은 칭찬조차 아닌 나무람입니다. 힘들게 심부름을 했는데 따사로운 말을 못 듣습니다.


  이래서야 다음에 또 심부름을 할 마음이 들까요? 아마 다음에 다시 심부름을 해야 하더라도 웃는 낯으로 기쁘게 하기는 어렵겠지요. 살림을 거드는 일이란 지겹거나 재미없다고 여길 만하겠지요.


  그림책 《장바구니》에는 ‘심부름을 하는 사내 아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내 아이가 아닌 ‘아이 아버지’가 심부름을 한다면 어떨까요? 남자 어른은 집안일을 얼마나 잘 거들까요? 남자 어른은 장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기꺼이 심부름을 할는지요?


  가벼운 심부름 하나를 놓고 기나긴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놓는 《장바구니》를 가만히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 아버지 심부름을 할 적마다 늘 즐겁게 했습니다. 집부터 가게까지 신나게 달리기를 하곤 했습니다. 어릴 적에 심부름을 마치면 어머니는 늘 ‘고마워’ 하고 말씀하셨고, 오늘 나는 우리 집 두 아이가 살림을 돕거나 심부름을 해 주면 ‘고마워’라든지 ‘고맙습니다’ 하고 똑똑히 말합니다. 참말 고마운 일이니까요. 아이들이 심부름을 하는데 무척 오래 걸리더라도 언제나 즐겁게 노느라 오래 걸릴 뿐이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상냥하게 바라보고 고마이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8.11.6.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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