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비룡소의 그림동화 106
아이린 하스 글 그림, 백영미 옮김 / 비룡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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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03



이야기를 나누는 동무 사이

― 한여름 밤 이야기

 아이린 하스 글·그림

 백영미 옮김

 비룡소 펴냄, 2003.8.1.



  동무는 늘 놀이동무입니다. 함께 놀 수 있으니 동무입니다. 동무는 늘 이야기동무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동무입니다. 동무는 밥동무가 되고 책동무도 되면서, 일동무나 글동무도 됩니다. 편지동무도 되고 생각동무도 됩니다. 마을동무이기도 하면서, 지구동무이기도 합니다.


  또래끼리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할머니와 내가 동무가 되기도 합니다. 어버이와 아이는 서로 새로운 동무로 지내기도 합니다.


  마음이 맞을 때에 동무입니다. 서로 한마음이 되기에 동무로 거듭납니다. 마음으로 생각을 나누기에 동무입니다. 서로 한뜻이 되어 삶을 기쁘게 짓습니다.



.. 루시는 요술 모자를 쓰고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달님이 부드러운 손길로 모자를 쓰다듬자 어! 루시가 나뭇잎만큼 작아졌어요 ..  (4쪽)




  아이들한테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말 아이다운 아이라면 서로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즐겁게 어울립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서로 나이를 묻습니다. 왜 물을까요? 어른들이 아이를 보며 으레 나이를 묻기 때문입니다. 참말 어른들은 아이한테 나이와 성별 빼고는 궁금한 대목이 없어요. 나이를 묻고 성별을 살핀 뒤, 학교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까지 물으면 더 궁금한 대목이 없는 듯합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는 어른이 없고, 아이가 오늘 어떤 놀이를 누렸는지 묻는 어른이 없으며, 아이가 지난밤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묻는 어른이 없어요.


  아이들은 나이를 안 가리면서 함께 놉니다. 아이들은 할머니 등을 타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또래이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함께 놀 동무라면 즐겁고, 함께 어울리면서 하늘숨을 마시는 동무라면 반갑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 마음’이 되려고 한다면, 서로 나이를 따지지 않고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몸짓이어야 합니다.



.. 택시가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모두들 조잘조잘 떠들다가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꽝! 택시가 뭔가에 부딪혔어요. 크고 뚱뚱한 올빼미가 모두를 내려다보더니 큰소리로 외쳤어요. “아이고, 요것들! 정말 맛있게도 생겼구나!” ..  (12쪽)




  아이린 하스 님이 빚은 그림책 《한여름 밤 이야기》(비룡소,2003)를 읽습니다. 한여름 이야기 가운데 ‘밤’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이 그림책에 흐르는 숨결은 고즈넉합니다. 고요하게 짓는 춤사위 같고, 고요하게 출렁이는 노래 같습니다.


  우리는 한여름 밤에 무엇을 할까요? 밤에는 잠을 잘 테지요. 그러나 한여름이 되어 폭폭 찌는 날씨라면 쉬 잠들지 못해요. 더위를 식히려고 부채질을 하든 찬물로 몸을 씻든 마당에 나가서 바람을 쐬든 합니다. 이러면서 문득 이야기 하나를 짓습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올빼미 아저씨, 생일 축하합니다!” 올빼미가 외쳤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째! 다들 이렇게 내 생일을 기억해 주다니, 정말 고마운걸! 좋아 좋아, 오늘 밤에는 그냥 케이크만 먹을게. 벌레들은 말고.” ..  (20쪽)




  더위를 식히거나 잊도록 할 만한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더위를 기쁨으로 바꿀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도란도란 웃으면서 사이좋게 나누는 이야기라면 어느새 이야기로 깊이 빠져들어 더위쯤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런두런 속삭이고 살가이 나누는 이야기라면 어느덧 이야기에 퐁당 빠져들어 더위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아요.


  달빛을 보고 별빛을 봅니다. 새까만 밤하늘에 꽃처럼 피어나서 빛나는 뭇별을 봅니다. 이 별은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까요. 저 별은 우리 집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찾아오려 할까요. 별자리를 읽으면서 삶자리를 읽습니다. 별님을 부르면서 곁님을 부릅니다. 별꽃이 눈부시니, 서로서로 웃음꽃이 해맑습니다.



.. 루시는 요술 모자를 벗었습니다. 어! 그러자 다시 원래대로 커졌어요. 루시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형을 내밀었지요. “루시! 네가 찾아 주었구나!” 할머니가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습니다. “루시, 루시, 모두에게 인사해라. 우리 노래는 이제 행복하게 끝났단다!” ..  (26쪽)



  그림책 《한여름 밤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 루시는 참말 ‘작은 사람’으로 몸을 바꾸어 멋진 밤나들이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루시는 여러 새 동무를 사귀면서 할머니 옛 인형도 찾았겠지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모두 동무가 됩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참말 다 함께 동무가 되어요. 쥐하고도 동무가 되고 올빼미하고도 동무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믿는 동무입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겯는 동무입니다. 4348.4.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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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딜레마
레스터 브라운 지음, 고은주 옮김 / 도요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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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66



경제성장을 그치지 않을 때에는

― 지구의 딜레마

 레스터 브라운 글

 고은주 옮김

 도요새 펴냄, 2005.10.5.



  레스터 브라운 님이 쓴 《지구의 딜레마》(도요새,2005)는 이 지구별에서 경제개발을 그치지 않으면, 지구사람 누구나 수렁에 빠져서 더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구별 어느 나라이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더 눈부신 경제와 문명과 문화’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지어서 누리는 하루’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많은 자료와 통계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구별 모든 나라는 경제개발과 도시문명으로 치닫기만 합니다. 도시를 줄여 시골로 가려는 나라는 없습니다. 시골을 깎아내어 도시로 키우려는 나라만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젖혀놓고 한국만 생각해도 잘 알 만합니다. 한국에서 도시는 커지고 자꾸 커집니다.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면서 애쓰지만, 시골마을을 아름답고 정갈하게 가꾸려고 하는 정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 불과 몇 십 년 만에 각 국가들은 곡물의 자급자족에서 총 곡물 수요의 70%를 수입하는 수입국으로 탈바꿈했다 … 한 국가가 산업화·현대화되면 경작지는 산업 개발과 주택 개발에 이용된다. 자가용이 늘어나면서 귀중한 경작지에는 도로, 고속도로, 주차장 부지 등이 들어선다. 농부들은 자신의 땅이 경제성을 갖기에는 너무 좁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떠난다 … 중국이 농산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세계시장은 전멸할지도 모른다 ..  (30∼31, 35쪽)



  중국이 온통 도시문명 사회가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중국에 있는 시골이 모조리 도시로 바뀌면 어떻게 될까 헤아려 봅니다. 그러면 중국은 먹을거리를 다른 나라에서 사들이려 할 텐데, 중국은 진작부터 다른 나라에서 먹을거리를 사들입니다. 중국에서 새로 만든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과 쓰레기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이 나아가려는 길은 오직 경제개발입니다. 이러면서 중국은 핵무기를 더 만들려 하고, 이웃 작은 나라를 함부로 쳐들어가서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미국도 도시문명 사회입니다. 미국은 시골살이를 북돋우지 않습니다. 미국에 있는 시골은 거의 모두 커다란 기계와 비행기를 앞세워 농약과 비료를 퍼붓는 땅뙈기입니다. 기계가 없으면 지을 수 없는 땅이요, 시골살이는 공장과 똑같은 산업입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 따위를 헤아리는 이들이 으레 미국으로 가서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 무엇인가 배우려는 이들은 도시와 문명을 배웁니다. 미국에 가서 무엇인가 보려는 이들은 어마어마한 기계와 전쟁무기를 봅니다.



.. 경작지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자동차다. 전 세계적으로 40만 헥타르에 달하는 땅이 해마다 도로와 고속도로, 주차장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렇게 전환된 토지가 대부분 경작지에 속한다 …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집, 사무실, 공장, 쇼핑몰, 도로, 주차장을 농업에 부적합한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양질의 경작지가 위치한 곳에 몰려 있다. 이는 작물의 재배에 적합한 평평하고 배수가 잘 되는 땅이 도시나 도로 건설에도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  (106, 122쪽)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거의 다 도시에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른들도 거의 다 도시에 있습니다. ‘도시사람’을 가리키는 한자말 ‘시민’은 이제 여느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처럼 삼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90퍼센트를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지내니까요. 시골이라는 곳은 어쩌다가 들르는 관광지이거나 여행지이기 일쑤입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이 가운테 텃밭이나 마당을 누리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도시에서 ‘내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많되, ‘내 땅’이나 ‘내 밭’이나 ‘내 나무’를 가진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씨앗을 심어서 손수 열매를 얻는 길’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학교에서는 이러한 삶을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가 하는 몫은 아이들이 그저 도시내기가 되서 도시 노동자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삶을 마치는 쳇바퀴입니다.



.. 중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96%를 차지하는 밀, 쌀, 옥수수의 양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2004년 호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량보다 1200만 톤이 부족했으며, 이는 아르헨티나의 총 밀 수확량과 맞먹었다 … 소작인이 토지 소유주가 된다면 생산량은 다시 올라갈 수도 있다. 농부들에게 토지 소유 권한을 주면 울타리 치기나 저수 시설과 같이 장기적인 생산성에 이익이 되는 투자를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생산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중국의 침체된 농업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지방 관리들이 막대한 정치 수단인 토지에 대한 권한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  (177, 183쪽)



  경제성장을 그치지 않을 적에는 우리 모두 종(노예)이 됩니다. 경제성장만 바라볼 적에는 우리 모두 숫자와 경쟁과 전쟁에 종으로 얽매입니다. 입시지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입시지옥도 경제성장과 똑같이 숫자놀음이요 숫자싸움입니다. 회사원과 공무원이 받는 연봉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과와 성적이 나와야 하는 회사원과 공무원은 언제나 전쟁과 경쟁이면서 숫자놀음에 숫자싸움입니다.


  그런데, 삶을 이루는 기쁨은 숫자로 안 따집니다. 100원이 있기에 안 기쁘지 않습니다. 100억 원이 있기에 기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는 기쁨과 아이를 돌보는 기쁨은 돈이나 숫자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새봄에 마주하는 앵두꽃이나 딸기꽃은 돈이나 숫자로 살 수 없습니다. 한겨울에 쏟아지는 함박눈은 돈값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가문 날을 촉촉히 적시는 빗방울은 숫자로 어림할 수 없습니다. 서로 아끼는 사랑은 돈으로 매기지 않습니다.



.. 과연 브라질은 1950년대 구소련이 미개척지 개발로 얻은 생태적 재앙을 피하여 빠르게 경작지를 늘려갈 수 있을까? 과연 브라질은 증가하는 세계 식량 수요에 부응하여 식량 생산을 늘림과 동시에 아마존 열대우림과 세라도의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보호할 수 있을까 … 브라질의 콩 생산자들은 아시아 대두녹병과 씨름하고 있다. 녹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살균제 살포 비용으로 2003년과 2004년에 총 12억 달러가 소비되었고, 이마저도 잦은 강우로 씻겨 내려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때가 많다 ..  (189, 195쪽)



  삶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삶을 찾지 못합니다.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사람들이 경제성장에 목을 매다는 까닭은 그저 경제성장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들이 입시지옥에 목을 매야 하는 까닭은 어른과 아이 모두 입시지옥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라본다면 경제성장이 아닌 삶을 가꾸는 데에 온힘을 들이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바라본다면 입시지옥이 아니라 ‘참답게 가르치고 배우면서 기쁜 삶’에 사랑을 바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주 쉽습니다. 손수 삶을 지으면 됩니다. 우리가 갈 길은 아주 환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으면 됩니다. 《지구의 딜레마》라는 책은 갖가지 자료와 통계를 들어서 ‘경제성장’은 ‘전쟁’과 같은 바보짓인 줄 잘 보여줍니다.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자료와 통계를 보면서 이제부터 삶을 바꾸려고 힘을 기울일 테지요. 눈이 안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자료와 통계를 보면서도 도시문명과 사회제도와 정치경제에 발목을 붙잡힌 채 삶과 사랑과 꿈이 없는 하루를 보내겠지요. 4348.4.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숲책.환경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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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믈리에 9 - 완결
조 아라키 지음, 카이타니 시노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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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91



포도나무에 깃든 사랑

― 소믈리에 9

 아라키 조 글

 카이타니 시노부 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9.1.25.



  달걀을 삶습니다. 우리 집 유리냄비에는 달걀을 일곱 알 삶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네 사람이 있으니 세 사람한테는 두 알씩 돌아가고 한 사람한테는 한 알이 돌아갑니다. 나는 으레 한 알만 먹고, 다른 세 사람이 두 알씩 먹습니다. 때때로 나는 한 알조차 안 먹고 세 사람이 두 알씩 먹은 뒤, 아이들이 반 토막씩 나누어 먹습니다.


  곧잘 달걀을 삶다 보니, 우리 집 네 사람이 가장 맛나게 먹는 달걀을 언제라도 홀가분하게 삶을 수 있습니다. 노란 속살이 가장 보드라우면서 달콤하게 혀끝으로 달라붙도록 삶는 솜씨를 어느새 내 손에 익힙니다.


  그렇다고, 물을 얼마쯤 붓고 불을 몇 분쯤 넣어서 끓여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 합니다. 알맞게 물을 부어서 알맞게 불을 넣어 끓이다가 ‘아, 이제 불을 줄여야겠네’ 하고 느낄 무렵 불을 여리게 줄이고는, ‘그래, 이제 불을 꺼야겠네’ 하고 느낄 무렵 불을 끕니다. 이러고는 뚜껑을 닿고,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를 한동안 그대로 둡니다. 아이들은 다른 반찬으로 신나게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밥그릇을 반쯤 비울 무렵 비로소 달걀냄비 뜨거운 물을 개수대에 놓은 ‘설거지 할 그릇’에 붓습니다. 찬물로 두세 차례 헹군 뒤 톡톡 깨면 잘 벗겨지면서 말랑말랑하고 속살이 샛노란 알맹이를 얻습니다.



- “너는 손님의 외모나 직업에 따라 서비시의 질을 높이거나 낮추나? 적어도 그 사람은 신사적으로 행동했고, 다른 손님께 폐를 끼치지도 않았어. 손님이 가게 밖에서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VIP건 가난뱅이건, 우리에게는 관계 없는 일이야.” (23쪽)

- “그러니까 없죠. 고급 와인이라면 오래 보관하기도 하지만, 이런 값싼 와인은 나온 즉시 마시니까, 해가 넘어가기 전에 대부분 매진돼 버리거든요.” (43쪽)





  가만히 돌아보면, 국을 끓이든 반찬을 하든 나물을 무치든, 무게를 달아서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부침개를 하려고 반죽을 할 적에도 밀가루나 물 부피를 잰 적이 없습니다. 딱히 눈어림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이만큼 해서 먹으면 넉넉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꼭 이대로 합니다.


  예전에 가끔 요리책을 들출 적에, 이런저런 것을 무게와 크기와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려서 하라고 나오는 길잡이말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따져서 밥을 지을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빵이나 케익을 구울 적에는 1그램도 어긋나지 않게 잘 맞추어야 한다는데, 여느 밥이나 반찬이나 국을 마련할 적에는 1그램 아닌 10그램이 어긋나거나 벌어져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이나 반찬이나 국에서는 ‘맛이 달라지’거나 ‘새로운 맛이 나온다’고 할 만합니다.



- “평범한 와인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싼 와인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특별한 와인이죠. 손님은 자신을 평범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손님처럼 진실한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53쪽)

- “으악! 이 바쁜 와중에 사이토 셰프에게 파스타를 삶아 달라고 했어요?” “저 가족에게 오늘 이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67쪽)




  아라키 조 님이 글을 쓰고, 카이타니 시노부 님이 그림을 그린 《소믈리에》(학산문화사,2009) 아홉째 권을 읽습니다. 《소믈리에》는 아홉째 권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포도술 한 모금에서 어머니 사랑을 느낀 젊은이가 길을 잃고 헤맨 끝에 비로소 어머니 사랑내음을 찾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끝을 맺어요.



- “귀한 단골손님을 잃었다, 그것보다도 그 가족의 마지막 만찬을 내 손으로 망쳐 버렸어요.” “어른에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아니야. 자기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라 메르’에 있었다. 손님의 슬픔이나 괴로움까지 받아 주는 소믈리에게 이 레스토랑에는 있었다. 분명 그 아이는 오늘의 네 서비스를 평생 잊지 못할 거야.” (80쪽)

- “그 녀석은 매일매일 셀러의 와인을 못내 사랑스러운 듯 살피고 있었으니까. 사무적으로 와인을 다루는 사람과 그 녀석은, 와인에 대한 애착의 깊이가 다르지.” (99쪽)




  길을 잃은 젊은이가 길을 찾는 곳은 아버지 품입니다. 젊은이를 낳은 어머니는 포도나무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고, 젊은이를 낳은 아버지는 어머니가 남긴 포도나무를 건사하면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젊은이는 이곳저곳 돌고 또 돌고 다시 떠돈 끝에 ‘어머니 포도나무’는 바로 젊은이가 어릴 적부터 지낸 곳에 있는 줄 깨닫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준 사랑은 늘 내 가슴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움직이는 줄 늦게까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하나씩 실마리를 풀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차근차근 찾습니다.



- “이 지방에서는 자기 자식이 장성하면 코르크 스크류를 물려주는 관습이 있지. 나도 레지느에게 이것과 같은 것을 선물했었고, 자네도 레지느에게서 같은 것을 물려받았으니.” (141쪽)

- “되찾읍시다, 그 포도밭을! 이대로 쭈욱 과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실 겁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면 어머니는 절대 기뻐하지 않을 거예요! 되찾는 겁니다. 밭도, 과거도!” (180∼181쪽)




  포도술 한 모금에는 포도나무 기운이 고스란히 깃듭니다. 포도나무에는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이 어우러진 기운이 알뜰히 깃듭니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에는 또 어떤 기운이 깃들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가슴으로 길어올리는 사랑이 온누리에 깃듭니다. 아침마다 해님을 맞이하면서 사랑스레 웃습니다. 언제나 바람을 마시면서 사랑스레 노래합니다. 빗물과 냇물과 샘물을 모두 정갈하게 아끼면서 사랑이 솟습니다. 땀흘려 흙을 일구기에 기름진 들에 사랑이 흐릅니다.


  그러니까, 포도술 한 잔에는 온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숨결이 깃듭니다. 값진 포도술이나 값싼 포도술이 따로 없습니다. 저마다 다른 사랑이 저마다 새롭게 깃들어서 흐르는 포도술입니다.


  밥 한 그릇에도 저마다 다른 사랑이 고이 깃듭니다. 말 한 마디에도 사랑이 깃들고, 이야기 한 자락에도 사랑이 깃들어요. 이 사랑을 헤아리면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서로 돕고 아끼면서 어깨동무하는 삶을 아름답게 짓습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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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랑 함께 있어서 좋을 때가 더 많아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9
구드룬 멥스 글, 로트라우트 주잔나 베르너 그림, 문성원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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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90



너희와 함께 살아서

― 나는 너랑 함께 있어서 좋을 때가 더 많아

 구드룬 맵스 글

 로트라우트 주자나 베르너 그림

 문성원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9.12.30.



  아침과 저녁 사이에 샛밥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뒤꼍으로 가서 쑥을 뜯습니다. 비가 오는 날씨에 비를 맞으면서 쑥을 뜯습니다. 가볍게 내리는 보슬비는 싱그럽습니다. 따뜻하게 내리는 봄비이기도 해서 즐겁게 비를 맞습니다. 빗물이 달린 쑥을 하나둘 뜯으면, 빗물에 실린 쑥내음이 손끝으로 퍼져서 물듭니다.


  밀가루에 달걀을 풀고 소금과 설탕을 살짝 넣고는 반죽을 합니다. 물을 섞어 밀가루를 녹인 다음 쑥을 넣습니다. 소쿠리 가득 뜯은 쑥이지만, 밀반죽과 섞으니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쑥을 더 뜯을 수 있지만, 꼭 이만큼이 알맞습니다. 동그랗게 부치는 쑥부침개는 거의 다 푸른 물입니다.


  감자를 저며서 올립니다. 버섯도 저며서 함께 올립니다. 여린 불로 익힌 부침개를 한 번만 뒤집습니다. 쑥부침개 익는 냄새가 퍼지면서 아이들은 부엌으로 오고, 쑥부침개 넉 장을 말끔히 비웁니다.



.. 나는 아버지가 보내는 선물 때문에 부활절이 좋다. 아버지가 보낸 선물 꾸러미 속에는 늘 우스꽝스러운 물건들이 들어 있는데, 대체로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이다 … 꼬맹이 동생이 내 다리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다니거나, 또 하필이면 대 공책 위에다 레고 블록으로 탑을 쌓으면 숙제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런데도 동생은 꼭 내 공책 위에다 탑을 쌓는다. 그것도 늘 똑같은 탑만 … 동생을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동생이 일부러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안다. 동생이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  (9, 27, 35쪽)



  우리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샛밥을 늘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 주고는, 사이에 가볍게 주전부리를 마련해 줍니다. 출출할 즈음 받는 주전부리는 더없이 고맙습니다. 주전부리 한 점을 입에 넣어 새롭게 기운을 차리고 한결 씩씩하게 놉니다.


  밥상맡에서 부침개를 먹는 아이들은 소꿉을 가져와서 밥상에 올립니다. “나도 부침개 끓여야지.” 하고 말합니다. 부침개를 끓여? 그래, 너희는 아직 모르지. “부침개는 끓인다고 하지 않고 부친다고 해.” 소꿉 장난감으로 부침개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부침개 부쳐야지.” 하고 말을 바꿉니다. 동생이 물잔에 소꿉을 올린 뒤 천조각을 얹은 뒤 마루로 가서 딴 놀이를 합니다. 누나가 물잔 소꿉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소리를 냅니다. “어서 와, 넘쳐.” 부침개는 부친다고 알려주었지만, 국이 끓듯 부글부글 소리를 냅니다. 동생은 다시 부엌으로 달려와서 천조각을 열더니, 소꿉 냄비에 있는 나무조각을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집니다. 뒤집개는 없이 손으로 뒤집는구나. 이 아이들이 곧 무럭무럭 커서 손수 불을 다룰 나이가 되면, 맛나며 아름다운 부침개를 베풀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 아버지는 수를 받은 시험지를 보자마자, 당장 달려나갔다. 나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려고 말이다. 나는 어떤 선물일까 기대하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장난감 권총을 갖고 싶긴 하지만, 그런 선물은 절대로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점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너랑 같이 놀고 싶어.” 나는 스반티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랑 같이 놀아도 되고 말고!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놀자! 내 장난감도 보여줄게. 나는 아주 멋진 장난감을 갖고 있거든 ..  (55, 87쪽)



  구드룬 맵스 님이 글을 쓰고, 로트라우트 주자나 베르너 님이 그림을 그린 《나는 너랑 함께 있어서 좋을 때가 더 많아》(시공주니어,1999)를 읽습니다. 짤막한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는 이쁘장한 책입니다. 동화라고 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마주할 만한 ‘삶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동양과 서양이 삶이나 문화가 많이 달랐을 테지만, 요즈음은 동서양이 삶이나 문화가 엇비슷합니다. 구드룬 맵스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 이름’과 ‘어버이 이름’만 저 먼 나라 이름일 뿐, 우리 곁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 이번에는 먼지가 쌓일 염려도 없고, 또 쉽게 고장도 나지 않는 선물을 받고 싶었다. 생일날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기뻐할 수 있고, 또 쉽게 싫증이 나지 않는 그런 선물을 받고 싶었다. 나는 곧 그런 선물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를 선물로 받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와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다. 내 생일날, 그날 하루 종일 말이다 … 할아버지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든, 나는 상관없다. 냄새를 안 맡으면 그만이니까 ..  (92, 94쪽)



  《나는 너랑 함께 있어서 좋을 때가 더 많아》는 책이름 그대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럼요. 나는 너랑 함께 있어서 더 기쁘지요. 너는 나랑 함께 있어서 더 기쁠까요? 네, 그러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 있어서 아름다우면서 기쁘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있어서 기쁩니다. 어머니만 있든 아버지만 있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가 하나이든 둘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있어도 기쁘고, 어버이와 아이 둘만 단출하게 있어도 대수롭지 않아요.


  낯선 동네에서 낯선 아이한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아이가 쭈뼛쭈뼛 망설여도 사랑스럽습니다. 양로원에서 혼자 외로운 할아버지를 내 생일잔치에 모실 수 있어서 사랑스럽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양로원에 할아버지를 넣느라 돈을 벌지 말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오순도순 지낼 적에 한결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기엔 내 나이가 너무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혼자서 음식을 먹고 정상적으로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우리는 둘 다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다 … 우리는 케이크를 먹고 커피 마시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케이크가 다 뭉개지긴 했지만, 뭉개진 케이크도 뭉개지기 전하고 맛이 똑같이 좋았다. 오히려 더 맛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초콜릿과 생크림이 잘 뒤섞였기 때문이다 ..  (124, 127쪽)



  어른은 아이를 즐겁게 해 주려고 돈을 벌지 않습니다. 아이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면 말 그대로 즐겁게 해 줄 노릇입니다. 돈이 아닌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돈을 더 벌고 싶다면, 그냥 돈을 더 벌면 돼요. 이러면서 아이한테 제대로 말해야지요. 어른으로서 돈을 더 버는 데에 마음이 있다고 털어놓아야지요.


  자, 그러면 생각해 보셔요. 아이는 어버이가 ‘돈을 더 벌고 싶다’고 말하면 어떻게 대꾸를 할까요? 아이는 어버이가 저와 함께 있기보다는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하면 어떤 마음이 될까요? 저와 함께 즐거운 삶을 누리려 하지 않고, 돈에만 얽매이는 어버이를 보고 자라는 아이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돈만 바라보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아이가 어른이 되면, 내 어버이도 양로원에 넣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돈에만 얽매인 채 바깥일로 바쁜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앞으로 양로원에 들어가려고 신나게 돈을 버는 셈 아닐까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 아이와 함께 기쁘게 하루를 지으려 하지 않는 어른이라면, 참말 다들 양로원을 바라보려는 마음인 셈 아닐까요?


  나는 여기에서 웃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노래합니다. 나는 아이가 되어 내 어버이하고 웃고 노래합니다. 우리 집 아이는 나를 어버이로 삼아 함께 웃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아끼고 보듬으면서 하루를 따사롭게 열고 닫습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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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정승각 글.그림 / 초방책방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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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02



‘까막나라’ 임금님은 빛을 안 바란다

―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정승각 글·그림

 초방책방 펴냄, 1994.3.10.



  정승각 님이 빚은 그림책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를 읽습니다. 어느덧 서른 해 남짓 묵은 오래된 한국 그림책입니다. 앞으로도 이 그림책은 한국 어린이한테서 사랑을 받을 테니, 마흔 해도 묵고 쉰 해도 묵을 테지요.


  1990년대 첫무렵에 정승각 님이 어떤 숨결이 되어 이 그림책을 빚었을까 하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불을 찾으려는 불개는, 불을 찾았으나 그예 숨이 끊어지고 만 불개는, 새로운 숨결로 다시 살아난 불개는,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 곰곰이 되새깁니다.



.. “나라가 온통 깜깜하니 다스릴 수가 없구나.” 까막나라 임금님은 답답했습니다. “누가 불을 구해 올 수만 있다면…….”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을 가져오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  (4쪽)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를 보면, 까막나라 임금님은 ‘나라 다스리기’를 한다는데, 어떻게 무엇을 다스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임금님 둘레에서 임금님을 모신다는 이들은 무엇을 섬기거나 모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들은 ‘나라 다스리기’를 걱정하거나 마음을 쓸 뿐, 까막나라에서 사는 사람을 걱정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까막나라에 빛이 없어서 삶이 얼마나 메마르거나 팍팍하거나 힘든가 하는 대목도 걱정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아요.


  곰곰이 따지면, 임금 자리에 있는 이가 하는 일은 ‘까막나라’가 그저 ‘까만 빛깔 나라’이면서 ‘슬기에 깜깜한 나라’가 되도록 굳히는 몸짓이지 싶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나라이름부터 ‘까막나라’인걸요. 무엇보다 임금 자리에 있는 우두머리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일을 꾀할 뿐입니다. 스스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임금 자리 우두머리는 팔랑귀에다가 철부지입니다. 우두머리로서 일을 다 남한테 맡기거나 시키는데, 스스로 시킨 일조차 스스로 매조지하지 않아요. 삽사리가 불을 가져왔어도 이를 쓰지 않습니다. 신하라고 하는 이들이 말하는 대로 팔랑거리면서 따르다가, 뒤늦게 애를 태웁니다.



.. “불개야, 네 노래가 내 마음을 울리는구나.” 잔잔한 물 위로 현무가 나타났습니다. “환한 빛은 해와 달에서 나오는 거란다. 그러나 새겨 두어라. 참다운 빛은 마음속에 있는 거란다.” ..  (9쪽)




  까막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먼먼 옛날, ‘불이 없는’ 곳이 까막나라일까요? 아니면, 오늘날 바로 이곳이 까막나라일까요? 까막나라에는 불빛이 비추지 않습니다. 불이 없기 때문에 불빛이 안 비추지 않습니다. 해와 달이 하늘에 버젓이 있으나, 까막나라 임금님이나 신하나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빛’이 없기 때문에, 까막나라는 언제까지나 까막나라이면서 아무런 빛이 깃들 수 없습니다.


  삽사리는 제 몸을 불사르고 녹여서 ‘두 가지 불’을 가져옵니다. 이른바 ‘태극’이라고 할 빨강과 파랑입니다. 빨갛게 빛나면서 파랗게 빛나요. 오늘날 과학으로 치자면 양자역학인 셈입니다. 빨갛지만 파랗고, 파랗지만 빨갛습니다.


  까막나라에 드디어 빛이 오지만, 임금님이나 신하는 두려워 합니다. 왜 두려워 할까요? 빛이 왔기 때문에 두려워 합니다. 까막나라는 어둠에 파묻혀야 정치권력이 그대로 이어갈 텐데, 빛이 오니, 모든 어둠이 드러나서 임금님이나 신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훤하게 드러날 테니 두려워 합니다.



.. “이까짓 해쯤이야.” 불개는 와락 달려들어 해를 꽉 물었습니다. “앗, 뜨거워!” 손발은 오그라들고 뱃속은 타 들어갔습니다. 불꽃은 불개의 온몸을 황금빛으로 휘감았습니다. 불개는 입에 물었던 해를 뱉어내고 나동그라졌습니다 ..  (12쪽)




  까막나라에 누군가 빛을 가져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더는 까막나라가 아닙니다. 까막나라에 빛이 비추면, 이제 까막나라는 ‘빛나라’나 ‘하얀나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나라가 되려면, 그동안 권력을 지키던 임금님이나 신하는 어떻게 될까요?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까막나라를 다스릴 줄만 알던 이들은 떠나야 하얀나라를 새롭게 세울 수 있습니다.


  아마 예전에도 삽사리뿐 아니라 다른 숨결도 빛을 수없이 가져왔으리라 느낍니다. 다만, 그동안 수없이 다른 숨결이 빛을 가져올 적마다 임금님과 신하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이들을 매몰차게 내치거나 죽였겠지요. 이러면서 또 빛을 바라고, 빛을 가져오면 또 내치거나 죽이고 ……, 까막나라가 하는 짓이란, 까막나라 임금님과 신하가 하는 짓이란, 언제나 바보스러우면서 멍청한 짓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는 언제까지나 ‘까막’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 궁궐이 갑자기 환해지자, 신하들은 놀라서 벌벌 떨었습니다. “임금님, 저 개 몸에서 나는 이상한 빛을 보십시오. 빨리 없애지 않으면 무서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임금님도 퍼런 몸에 붉은 빛을 내는 불개가 두려웠습니다. 불개에게 상을 준다는 약속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불개는 쇠줄에 꽁꽁 묶인 채 궁궐 밖으로 들려 나갔습니다 ..  (23쪽)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정치권력자나 경제권력자나 문화권력자나 교육권력자나 종교권력자나 과학권력자나 군사권력자나 한결같이 바보스럽거나 멍청합니다. 이들은 이 나라를 까막나라로 짓누르려 합니다. 이 나라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여느 사람들이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리면, 이 사랑을 매몰차게 짓밟습니다.


  민주와 평화와 평등이 싹트려고 하면, 바로 권력자가 짓밟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과 꿈길이 열리려 하면, 바로 권력자가 짓이깁니다.


  삽사리와 까막나라에 빗댄 옛이야기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 벌어지는 ‘우리 스스로 바보스러운 모습’을 건드립니다. 까막나라 임금님한테 빛을 바치는 짓은 그치고,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새롭게 서도록 마음속 불길을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하는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건드립니다.


  우리가 까막나라에서 살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까막나라 권력자한테서 떡고물을 받아서 먹으려 한다면 까막나라에 그대로 머물면서 ‘까막사람’ 노릇을 하면 쳇바퀴처럼 되겠지요. 이제부터 밝고 환하면서 슬기롭고 철든 사람이 되려 한다면, 빨가면서 파랗고 파라면서 빨간 숨결을 바람처럼 가슴에 담아 아름답게 피어나는 새로운 봄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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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5-03-31 23:33   좋아요 0 | URL
옛이야기를 살린 작품이니
조금 더 마음을 기울였다면
`까막나라 임금님과 신하`라든지
`불개`가 삼킨 빨갛고 파란 빛 이야기를
더 찬찬히 짚거나 다룰 만했을 텐데
이 대목에서 여러모로 아쉽구나 싶어요.

그래도, 이 책을 아이들과 읽을 어른이
그러한 대목은 슬기롭게 알려주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