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노래 문학.판 시 12
김정환 지음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6



시와 발길질

― 레닌의 노래

 김정환 글

 열림원 펴냄, 2006.9.18.



  바람을 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들길을 가로질러 면소재지로 나옵니다. 아이들은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있는 놀이터로 나와서 놀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는 몇 가지 놀이기구를 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기를 손가락을 빨면서 기다렸습니다. 여덟 살이 된 큰아이도 다섯 살인 작은아이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안 다니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에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되어 학교를 쉬고, 일요일이 되어 학교가 조용할 때에라야 드디어 놀이터 나들이를 합니다.



.. 201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진다 /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  (레닌의 노래)



  두 아이는 놀이터에서 아주 개구지게 놉니다. 두 시간쯤 씩씩하게 놉니다. 우리 집 마당이나 뒤꼍에도 이런 놀이기구를 세울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집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아이들이 타고 놀 만큼 우람하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때에는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그네를 밀 수 있겠지요.


  이러구러 노는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초등학교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나무 앞으로 옵니다. 나무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헤아립니다. 나무 밑에서 춤을 추어 봅니다. 바람이 살랑 붑니다. 나무 앞에 쪼그려앉습니다. 내 새끼손톱 길이만 한 큰 개미가 기어다닙니다. 내 냄새를 맡았는지 꽤 많이 몰려듭니다.


  개미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개미 꽁지가 맑습니다. 꽁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잘 살펴보면 개미 주둥이에 있는 톱니가 무척 날카롭습니다. 개미가 물 적에 그렇게 따끔한 까닭을 알 만합니다. 개미 눈을 바라보고, 여섯 발을 어떻게 놀리는지 지켜봅니다. 문득 고개를 듭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하염없이 재미있고, 나는 개미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재미있습니다.



.. KBS 강원도 속초라나 지방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가 / 청년 떠난 마을 노인네들을 서울 식으로도 / 시골 식으로도 다루지 못하고 어정쩡한 방청석 / 아줌마 다루듯 아니면 학예회 부추기듯 / 시장, 도지사, 국회의원과 원로 문인들이 한데 모인 / 공식석상으로는 아무래도 얼렁뚱땅하는 / 애교도 흐드러졌다. / 관광객들은 대만족이다 ..  (산 너머 새)



  김정환 님 시집 《레닌의 노래》(열림원,2006)를 읽습니다. 김정환 님은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이 나라에 천민자본주의가 자꾸 판쳐서 재미없어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그래요, 옳은 말씀입니다. 이 바보스러운 나라와 정치꾼과 신문사와 이런저런 곳에 발길질을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발길질을 해 본들, 이 발길에 걷어차이는 재벌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아무리 발길질을 하더라도 정치 우두머리나 문화 우두머리나 교육 우두머리는 멀쩡합니다. 마치 하늘에 대고 하는 발길질 같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첨벙이는 발길질 같습니다.



.. 역사 따지는 사람 턱없다 그곳에는 / 농게 참게 노랑조개 모시조개도 있지만 / 그보다 생명이 태어나는 수천만 년의 광경이 있다 ..  (갯벌 새만금)



  하늘에라도 대고 발길질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보면, 발길질을 할 까닭도, 발길질을 안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면 됩니다. 예쁜 사람들은 서로 예쁘게 어우러지면서 예쁜 마을을 일구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꾸짖거나 손가락질할 일이 없습니다. 나무는 어느 누구도 나무라지 않아요. 풀은 어떤 사람도 꾸짖지 않습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 한 해가 진다 인간은 왜 사는가 보이지 않는 해가 / 소리도 없이 저무는데 목숨은 어떻게 이렇게 / 이어지는가 집단적인 질문이다 거룩함이다 / 인간의 불야성이 끝끝내 가닿지 못하는 어둔 밤 ..  (종로통 망년-사랑노래 8)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마음이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랑으로 서로 아끼고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품으로 얼싸안고 껴안으며 쓰다듬으면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손에 호미를 쥐고 텃밭을 일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밭을 갈아요. 손에 호미를 쥐고 씨앗을 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나무를 심어요.


  나무 한 그루가 우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고, 저 바보스러운 정치 우두머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베풀도록 나무를 심어요. 풀씨 한 톨이 우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고, 저 우악스러운 문화 우두머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도록 풀씨를 심어요.



.. 그리운 사람 이리 많은 나는 행복한가 늙었는가 / 뒤늦은 누님과 누이 사이 / 온기와 쇠 사이 / 이어짐과 채워짐 사이 / 망년 중이므로 술에 취해 결국 상투적으로 / 옛날과 오늘 사이..  (쉰 살, 망년 중)



  진딧물을 사로잡은 개미가 내 앞에서 지나갑니다. 개미는 진딧물을 꽉 물고 어디론가 갑니다. 어디를 갈까요? 혼자 먹을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개미집으로 갈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이제 제비꽃을 잘 알아봅니다. 지난해까지 우리 집 제비꽃과 우리 마을 제비꽃을 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 보렴, 얘가 제비꽃이야.” 하고 알려주었거든요. 해마다 봄이 되면 “자 보렴, 이 아이는 봄까지꽃이야, 이 아이는 별꽃이야, 이 아이는 코딱지나물꽃이야, 이 아이는 냉이꽃이야, 이 아이는 갯기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갈퀴덩굴이야, 이 아이는 비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괭이밥이야 …….” 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이들은 즈믄 번쯤 들어도 잊습니다. 아이들한테 다시 즈믄 번쯤 노래해도 또 잊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노래하고 거듭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풀과 꽃과 나무를 마주하면서 가슴 가득 껴안기를 꿈꾸면서, 우리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길을 생각합니다. 4348.3.2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북거, 아북거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3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시공주니어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89



네 짝님 마음을 아니?

― 아북거 아북거

 로알드 달 글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7.11.14.



  사귀고 싶은 동무가 있으면 온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귀고 싶은 동무한테 다가서고 싶으면 그 동무가 좋아하거나 바라거나 꿈꾸는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귀고 싶은 동무더러 ‘무턱대고 나한테 따라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걷는 길을 생각해야 하고, 함께 노래하는 길을 살펴야 하며, 함께 사랑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함께 어울리는 동무가 있으면 따사롭게 마주해야 합니다. 함께 노는 동무더러 무턱대고 나를 따라오라 할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 재미난 놀이를 할 수 없고, 나 혼자만 맛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함께 즐길 놀이를 생각할 노릇이고, 함께 나눌 밥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두 나라가 서로 이웃이 되려고 하는 때를 헤아려 보셔요. 한쪽 나라가 다른 나라더러 ‘너희 나라는 나빠!’ 하고 외치면 두 나라가 이웃이 될 만할까요? 한쪽 나라가 다른 나라더러 ‘너희 나라는 나빠서 우리가 군대를 이끌고 짓밟아 주겠어!’ 하고 외치면 두 나라는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 문제는, 실버 부인이 열렬히 사랑을 쏟아붓는 상대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상대는 바로 알피하고 불리는 조그만 거북이었다 … 호피 씨는 거북이 되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거북이 된다는 것이, 매일 아침 실버 부인이 자기에게 다정다감한 말을 속삭이며 등을 어룸나져 주는 것을 뜻한다면 말이다 ..  (16∼17, 18쪽)



  로알드 달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아북거 아북거》(시공주니어,199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아북거 아북거》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웃집에는 호피 아저씨가 있고, 아랫집에는 실버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이웃으로 지냅니다. 사이좋은 이웃인데, 호퍼 아저씨는 실버 아주머니하고 ‘이웃으로만 지내기’보다 한집을 이루어서 살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호퍼 아저씨는 실버 아주머니하고 함께 한집에서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외국어인가요?” 실버 부인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거북들의 말이죠. 거북들은 무엇이든지 거꾸로 하는 동물들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말도 거꾸로 써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데 ‘쑥쑥’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있네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실버 부인이 물었다. “‘쑥쑥’이라는 말은 어느 언어에서나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단어랍니다.” ..  (32, 34쪽)



  두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한집 사람’이 될까요? 둘은 어떻게 해야 ‘이웃집 사람’에서 ‘한집 사람’으로 거듭날까요? 네,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한집 사람’이 될 테지요. 먼저 한 사람부터 다른 한 사람 마음을 읽고, 다른 한 사람 마음으로 따사롭게 다가설 수 있으면, 둘은 바야흐로 한집 사람으로 거듭날 테지요.


  이리하여, 실버 아주머니한테 마음이 끌린 호퍼 아저씨는 실버 아주머니가 아끼고 돌보는 거북이를 함게 아끼고 돌보는 길을 살핍니다. ‘내 뜻’을 바보스럽거나 우악스레 밀어붙이려 하지 않습니다. 호퍼 아저씨한테 마음이 있는 실버 아주머니가 따사롭게 마음을 열 수 있을 때까지 기쁘게 기다리면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실버 아주머니가 기쁘게 웃음짓는 일을 살피고, 실버 아주머니와 함께 호퍼 아저씨도 멋지고 신나게 웃음지을 만한 일을 꾀합니다.



.. “이게 모두 우리 알피 덕택이에요.” 실버 부인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히 고마운 녀석이죠. 우리 영원히 데리고 살도록 합시다.” ..  (78쪽)



  사랑은 아주 쉽습니다. 서로 한마음이 될 때에 사랑이 싹틉니다. 사랑은 아주 따사롭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즐겁게 돌볼 수 있는 마음이기에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은 아주 기뻐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한길을 노래하면서 걸어가니, 이 사랑이란 늘 노래잔치요 춤잔치이며 기쁨잔치입니다.


  ‘사랑’은 입맞춤이나 손잡기가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짓기입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한마음이 되어 한길을 기쁘게 노래하면서 걷는 마음살이입니다.


  사랑은 어른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른도 하고 아이도 합니다. 누구나 사랑이 됩니다. 마음을 따스하게 돌보고, 마음을 넉넉하게 가꿀 때에, 누구나 가슴에서 사랑이 태어납니다. 《아북거 아북거》는 아이들도 ‘사랑’이 무엇인지 환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이끄는 예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로알드 달 님은 “어린아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쑥쑥 크고 있지만 어머니들은 옷이 맞지 않을 때까지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59쪽).” 같은 이야기를 살짝 곁들입니다. 참말 이럴까요? 참말 이럴 수 있을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이 말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 몸이 자라는 흐름을 못 알아볼 수 없어요. ‘어머니는 아이가 자라는 결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기다립’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저 스스로 얼마나 자랐는가를 깨달으면서 기쁘게 웃음짓고 노래하는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이가 스스로 노래하고 웃을 적에 비로소 말하지요. ‘어머나, 네가 이렇게 컸구나’ 하고.


  《아북거 아북거》에 나오는 실버 아주머니는 이녁 거북이가 커졌다가 작아진 줄 몰랐을까요? 모를 턱이 없습니다. 모른 척을 했을 테지요. 거북이를 사이에 놓고 실버 아주머니한테 따스하게 다가오려는 호퍼 아저씨 마음을 읽고, 느긋하고 넉넉하게 기다렸으리라 느낍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믿고 다가오려는 따스한 숨결을 느끼면서, ‘아이 같은 호퍼 아저씨’가 스스로 기쁜 사랑을 채워서 다가오는 날까지 날마다 두근두근 기다렸으리라 느낍니다. 4348.3.2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양물감 2015-03-2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이도 이 책 좋아했어요.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해야겠어요

숲노래 2015-03-29 09:46   좋아요 0 | URL
번역을 조금 더 가다듬으면 아주 멋진 작품이었을 텐데
아무튼, 어린이한테도 `사랑`을 알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고우영 놀부전 - 新 고전열전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90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삶’

― 놀부전

 고우영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2008.12.26.



  고우영 님이 새롭게 빚은 만화책 《놀부전》(애니북스,2008)을 읽습니다. 우리는 흔히 ‘흥부전’으로만 알고, ‘흥부 이야기’만 생각하지만, 고우영 님은 흥부 이야기에 가려진 놀부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새로운 만화를 빚습니다.


  흥부 이야기는 무엇이고, 놀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흥부는 어떤 삶을 누렸고, 놀부는 어떤 삶을 누렸을까요? 흥부는 그저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을까요? 놀부는 마냥 마음씨가 모진 사람이었을까요? 흥부 이야기는 어떤 눈길로 바라본 이야기일까요? 놀부 이야기라면 우리는 어떤 눈길로 바라볼 만할까요?



- “이 봐. 엄마. 새 꽃을 꺾었지. 그리구 까마중 먹어 엄마. 있잖아, 접때 엄마 묻던 날, 엄마 줄려구 까마중 많이 땄었는데, 놀부 짜식이 깽깽거려서 내가 콱 먹어 버렸다. 화가 나서 그랬지 뭐.” (23쪽)

- ‘바보 같은 기집애. 어쩌자고 그 험한 산을 저 혼자서 다녔다는 거야! 바보 같은 기집애. 제, 그 작은 몸으로 엄마 무덤을 덮어서 비를 가리겠다는 거야? 바보 같은 기집애! 제까짓게 덜컥 감기에나 걸리지 별 수 있겠어?’ (43쪽)





  고우영 님이 빚은 만화책에는 놀부와 놀순이가 나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시골일을 하는 놀부와 놀순이가 나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사람들이 흔히 듣거나 아는 흥부 이야기에 ‘흥부가 하는 일’은 제대로 안 나옵니다. 흥부가 흙을 짓거나 가꾸는 이야기라든지, 흥부가 비탈밭을 일군다거나 기름진 논밭을 가꾸려고 힘쓰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비다리를 고친 흥부 이야기는 들을 수 있으나, 놀부와 흥부를 낳은 어버이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놀부와 흥부 사이에 다른 형제나 누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같은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는 어떤 삶을 지었을까요. 두 아이 어버이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왜 큰아들 놀부는 커다란 집과 너른 들을 건사하면서 살고, 작은아들 흥부는 보잘것없는 집에 땅뙈기도 없이 살까요. 우리는 이 수수께끼를 어느 만큼 헤아리거나 살피면서 두 사람 이야기를 들여다볼까요.



- “저희들이 할 테니까, 주인님은 좀 쉬십시오.” “그런 소리들 말게. 신성한 근로의 즐거움을 자네들만 독차지하려는 거냐?” “남들 보기에 뭣해서 그럽니다.” “게으름 피우는 것도 하늘에 죄 짓는 일이 된다네.” (84쪽)

- 땅문서가 건너가고, 흥부는 신이 났다. “너희들 어딜 가니?” “읍내에 갑니다.” “거긴 뭣하러?” “독립 기념으로 자축파티를 하러 갑니다.” (91쪽)




  우리는 흥부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익히 들은 흥부 이야기는 참말 흥부 이야기가 맞을까요? 우리는 놀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으레 들은 놀부 이야기는 참으로 놀부 이야기가 맞을까요?


  놀부와 흥부는 형과 동생이라 하는데, 두 사람은 왜 따로 지내면서 한 사람은 굶고 한 사람은 안 굶을까요. 한 사람은 왜 아이를 안 낳고 한 사람은 왜 아이를 자꾸 낳을까요.


  놀부와 흥부를 낳은 어버이는 두 아이를 가르치거나 기를 적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합니다. 흥부는 형 놀부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놀부는 동생 흥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둘은 서로 아낄 줄 모르는 사이일까요, 아니면 마음으로 깊이 아끼는 사이일까요? 우리가 읽거나 듣는 ‘흥부 이야기’에 가려진 깊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잊거나 잃은 ‘놀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놀부와 흥부라는 두 사람 발자취를 떠나,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지거나 어깨동무하는 사랑 이야기를 잊거나 잃지는 않았을까요?



- “하여간 비닐재배 그거 우리도 해 볼 만 하던데요?” “쏴랍! 쌰꺄!” “엄동설한에도 시금치, 파, 상치, 깻잎, 막 키워서 시장으로 반출시켜요.” “스키야! 원래 식물이란 햇볕을 받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따뜻한 계절에 자라야만 사람 몸에 이로운 거야!” “그러나, 비닐 재배, 저 사람들, 눈부신 흑자를 올리고 있던데요?” (134쪽)

- “우리야 배가 좀 고플 뿐이지, 자유가 있잖아! 이 보라구! 청풍 맑은 집 속에 아이들과 함께 편히 누워 있잖소?” “편해요?” “편하지! 마음이 편하니 몸도 편하고 몸이 편하니 말도 편하다.” “아이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마음이 편해요?” “말이 그렇다는 것 아닌가!” (157쪽)





  고우영 님이 빚은 《놀부전》에 나오는 놀부는 착하면서 듬직합니다. 그저 시골내기로서 착하면서 듬직합니다. 만화책 《놀부전》에 나오는 흥부는 약삭빠르면서 못 미덥습니다. 《놀부전》에 나오는 놀부는 온 집안을 두루 살피면서 깊이 마음을 쓸 줄 알고, 흥부는 집안일에는 젬병일 뿐 아니라 노닥거리기만 즐길 뿐입니다. 어버이가 힘껏 일군 땅이 넓다 보니 놀부는 이 땅을 잘 건사하려고 마음을 쓰는데, 흥부는 넉넉한 삶을 탱자탱자 보내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놀부는 차츰 걱정이 늘어납니다. 아버지를 걱정하고 어린 동생을 걱정합니다. 놀부는 착한 마음이지만 걱정이 늘고 느는 삶이 됩니다. 흥부는 바보스럽지만 걱정이 없습니다. 땅이고 돈이고 털어먹기 일쑤이지만 언제나 걱정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손에 흙을 안 묻힐 생각입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쓰면서 살 생각입니다. 흥부한테는 걱정이 없고, 걱정이 없는 만큼 이웃이나 동무나 형이나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없습니다.



- “아, 문 열어! 문!” “어떤 개망나니 같은 놈이 와서 무조건 문을 열라는 거야? 너는 예의도 범절도 없냐?” “아쭈 아쭈? 요놈 보게? 넌 아래위도 없냐?” “나라에는 왕이 주인이요, 집에서는 가장이 주인이다! 나는 이 집의 가장이므로 이곳의 주인이다. 너는 뭐냐?” (184쪽)

-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이렇게 알뜰히 지키며 가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큰아들은요, 오늘날 촌놈 농사꾼 바보 얼간이가 되어 초가집에서 푸성귀 먹고 삽니다.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사치와 낭비만 일삼던 둘째 놈은요, 형이 베풀어 준 도움 속에서 나태하게만 살더니 저런 갑부가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예? 아버지. 동생이 잘 사는 것이 배가 아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아픕니다만, 허나 제가 싫은 것은요, 어째서 일만 하던 개미는 초라해지고, 깽깽이 켜던 여치는 얼어죽지 않고 아방궁에 살게 됩니까?” (188쪽)




  걱정이 많던 놀부는 《놀부전》 끝자락에서 걱정을 비로소 털어냅니다. 마음속에 깊이 또아리를 틀었던 걱정과 시름을 말끔히 털어냅니다. 바야흐로 놀부는 시골에서 수수하게 삶을 사랑하는 투박한 시골내기로 나아갑니다. 흥부는 흥부대로 노닥거리는 재미로 죽 나아갑니다. 흥부한테는 ‘죽은 어버이와 누이’ 생각이 없고, ‘시골에서 흙을 파는 형’ 생각도 없습니다. 흥부는 제 꾀를 잘 살린 대로 어마어마한 돈을 누리고, 흥부네 아이들은 버릇없이 큽니다.


  ‘원작’과 대면 여러모로 비틀거나 고친 《놀부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새롭게 읽어서 새롭게 지은 이야기라고 해야 더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시골지기 놀부와 도시내기 흥부를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멋스럽게 빚은 만화책인 《놀부전》이라고 느낍니다.


  놀부는 늘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면서 ‘삶찾기’로 나아갑니다. 흥부는 늘 꾀와 꾀를 거듭하면서 ‘삶놀이’로 나아갑니다. 어느 쪽이 낫거나 나쁘거나 궂거나 좋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삶입니다. 4348.3.2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는 네가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어 - 우물쭈물 기웃대는 당신을 위한 마법의 주문
샬롯 리드 지음, 최고은 옮김 / 샨티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82



하늘을 마시는 우리 목숨

― 우주는 네가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어

 샬롯 리드 글·그림

 최고은 옮김

 샨티 펴냄, 2015.3.17.



  하늘을 마시는 목숨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마십니다. 사람은 ‘숨’을 쉰다고 하는데, 숨이란 언제나 하늘입니다. 하늘을 흐르는 바람입니다. 하늘을 마시고 바람을 마시기에 숨을 쉰다고 합니다. 하늘바람을 마시기에 목숨입니다.


  풀과 나무와 꽃도 하늘바람을 마십니다. 지구별에 있는 모든 목숨은 하늘바람을 마십니다. 하늘이 바람이고 바람이 하늘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감돌면서 새 기운을 나누어 주는 숨이 하늘이면서 바람입니다.


  하늘을 마시는 사람은 하늘님(하느님)입니다. 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바람님입니다. 하늘이요 바람으로 늘 새롭게 깨어나는 목숨이 바로 사람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든 꿈을 꿀 수 있고, 꿈으로 짓는 모든 일을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줄 알아차립니다.



-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보다 기적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신날 거야. (7쪽)

- 만약 네가 그 과정을 즐기지 않는다면, 목표를 이룬다 해도 무의미할 거야. (19쪽)

- 지혜로운 사람이란 절망의 바닥까지 여행한 뒤 세상에 줄 선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이야. (27쪽)

- 어느 누구도 현대의 삶이 바빠야 한다거나 스트레스가 많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삶의 속도는 네가 만들기 나름이야. (43쪽)





  꿈을 생각으로 짓는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꿈을 안 짓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이룹니다. 지을 꿈이 없으니 지을 삶이 없습니다. 지을 꿈이 있을 적에 스스로 길을 열어 삶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태어날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꿈이 태어날 자리가 열립니다.


  학교를 다니며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삶을 돌아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 깊숙이 파다 보면 모든 것의 근원에 사랑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50쪽)

- 진정한 자유를 맛보려면, 상황을 컨트롤하려고 하지 마! (63쪽)

- 두려움, 결핍 따위는 과거의 것으로 흘려보내. (77쪽)

- 학교에서는 배운 적 없는 방정식. 단순함 + 균형감 = 행복. (83쪽)




  샬롯 리드 님이 쓴 《우주는 네가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어》(샨티,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은 샬롯 리드 님이 스스로 겪은 모든 일을 바탕에 두면서 짤막하게 쓴 글과 단출하게 붙인 그림으로 엮습니다. 남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샬롯 리드 님이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입니다. 남이 알려준 슬기가 아니라, 샬롯 리드 님이 스스로 알아차린 슬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기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네가 나한테 기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회라는 곳은 사람이 서로 어우러지는 곳이라 하지만, 우리는 누구한테도 기댈 까닭이 없습니다. 참말, 사람은, 아무한테도 기대야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스스로 할 뿐이고, 오직 내가 스스로 지을 뿐이며, 오직 내가 스스로 깨달을 뿐입니다.



- 자기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렴. (91쪽)

- 직관력은 근육과 같아. 자주 쓰면 쓸수록 더욱 튼튼해지지. (103쪽)

- 원치 않는 걸 거절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어? (109쪽)

- 기억해, 넌 언제든 우주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어. (139쪽)




  너와 나는 서로서로 기댈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할 뿐입니다. ‘기대기’와 ‘어깨동무’는 다릅니다. 한 사람이 몹시 아파서 드러누워 지낸다 하더라도 ‘기대기’가 아닙니다. ‘어깨동무’를 합니다. 도움을 주거나 받는 일은 ‘기대기’가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는 어깨동무’입니다. 몸으로도 어깨를 겯고, 마음으로도 어깨를 겯어요. 내가 너보다 더 있어서 선물하는 몸짓이 아니고, 내가 너보다 덜 있어서 선물받는 몸짓이 아니라, 언제나 오롯이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몸짓입니다.


  우리는 ‘이웃돕기’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이웃사랑’입니다. 그래서 ‘불우이웃돕기’ 같은 몸짓으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말로는 하나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말은 처음부터 ‘도움 받는 사람’을 낮게 내리깔기 때문입니다. 서로 동무로 여기고 이웃으로 느껴서 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이웃돕기’를 하지 않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사랑을 나누려 하는 사람은 ‘이웃사랑’을 합니다. ‘사랑’과 ‘돕기’는 바탕도 몸짓도 넋도 모두 다릅니다.



- 영혼은 강아지와 같아서 자연에서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147쪽)

- 넌 이미 무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되고 싶은지 다 알고 있고, 네 문제에 대한 답도 알고 있어. 네가 영혼을 가진 이유가 그거 말고 달리 뭐가 있겠어? (153쪽)

- 사랑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야. (179쪽)

- 꿈은 정말 이루어져. (234쪽)




  《우주는 네가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어》를 쓴 샬롯 리드 님은 ‘우리를 도우려는 뜻’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직 샬롯 리드 님 스스로를 일으켜세워서 활짝 웃으려는 몸짓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바로 글쓴이 스스로 살리는 글과 그림이기에, 이 글과 그림은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으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너보다 더 많은 일을 겪었기에, 이 일을 바탕으로 너한테 가르쳐 주려고 한다면, 책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너보다 학교도 많이 다니고 책도 많이 읽었기에, 너보다 많이 쌓은 지식을 너한테 알려주려고 한다면,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책이 책다울 수 있으려면, 언제나 사랑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책을 책으로 여겨 기쁘게 가슴에 안으려면, 언제나 사랑이 가득하여 사랑을 주고받는 이야기꽃이 되어야 합니다. 《우주는 네가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어》를 읽는 이웃님이라면 아마 다 알리라 느껴요. 무엇을 아느냐 하면,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 알 테지요? 무엇을 알까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주 쉽고 홀가분한 말마디’입니다. 우리가 모를 수 없는 말마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와 힘들다는 핑계와 가난하다는 핑계로 이 말마디를 등지면서 지내기 일쑤입니다. ‘다 안다’고 하지만, 막상 어느 한 가지조차 ‘삶으로 누리지’ 않는 말마디라고 할까요. 차근차근 가슴으로 새기면, 모든 아름다운 말은 내 삶으로 태어납니다. 4348.3.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책 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슬비 2015-03-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주신 함께살기책 잘 받았습니다. ^-^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숲노래 2015-03-28 16:10   좋아요 0 | URL
아, 즐겁게 누리셔요~ 고맙습니다 ^^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88



‘영국 고전’을 굳이 읽혀야 한다면

―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케네스 그레이엄 글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2003.5.5.



  ‘영국 고전 동화(명작)’라고 하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시공주니어,2003)을 읽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동화를 놓고 이렇게 침이 마르고 닳도록 부추기는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책을 보면 앞뒤로 수많은 칭찬과 추천글이 실립니다. 그만큼 대단하니까 갖가지 칭찬과 추천글을 붙이는구나 싶으면서도, 이 책을 읽을 아이들한테 그 같은 칭찬과 추천글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책이건 칭찬과 추천을 못 받을 만한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 “난 강 옆에서, 강과 함께, 강 위에서, 강 속에서 살아. 나한테 강은 형이자 누이이자 숙모이자 친구이자 음식이고, 술이자 목욕탕이기도 해. 강이 내 세상이고, 다른 건 하나도 필요 없어. 강이 갖고 있지 않은 건 가질 필요도 없고, 강이 모르는 건 알 필요도 없어.” … “세상에, 붉은 태양이 떠올라서 까만 나무줄기를 비추는데, 그 눈길을 걸어오는 기분이라니! 고요한 길을 따라서 걸어오는데, 이따금 눈덩이들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가지가 뚝 부러지는 거야. 그러면 펄쩍 뛰어 숨을 곳을 찾게 되지.” ..  (20, 96쪽)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라는 책을 손에 집을 적에, 미국에서 ‘고전 동화(명작)’라고 손꼽는 《초원의 집》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초원의 집》처럼 시골살이나 숲살이 이야기를 알뜰살뜰 담은 책일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책이름부터 ‘버드나무’와 ‘바람’을 밝히니까요.


  그런데, 막상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펼치니, 버드나무 이야기도 없고 바람 이야기도 없습니다. 시골이나 숲이나 삶하고 얽힌 이야기가 하나도 흐르지 않습니다. 영국사람이 현대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누리는가 하는 대목은 나오지만, 이러한 현대문명을 누가 어떻게 손수 짓는가 하는 이야기마저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책 첫머리에 ‘강’을 노래하는 말마디가 몇 줄 나오기는 하되, 냇물이 어떠한 숨결이고 무늬이고 빛깔이고 냄새인지 같은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나한테 강은 형이자 누이이자 숙모이자 친구이자 음식이고, 술이자 목욕탕이기도 해(20쪽).” 같은 이야기가 끝입니다.


  미국에서 고전 동화로 손꼽는 《초원의 집》을 보면, 집을 어떻게 짓고, 밥을 어떻게 지으며, 옷을 어떻게 짓는가 같은 이야기가 아주 꼼꼼하면서 부드럽게 흐릅니다. 우물을 어떻게 파고, 새로운 집으로 떠날 적에 짐을 어떻게 꾸리며, 밥상은 어떻게 차리고, 설거지는 어떻게 하고, 씨앗은 어떻게 심고 …… 같은 이야기가 군더더기 없이 맑고 밝게 흐릅니다.


  이와 달리 영국 고전 동화라 하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보면, 온통 ‘소비’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쓰고 저것을 누리고 하는 이야기만 있을 뿐, 이것과 저것을 어떻게 지어서 누리는가 하는 이야기는 참말로 책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조차 안 나옵니다.



.. 모울이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얘기 들었니? 강마을에선 온통 그 얘기뿐이야. 토드가 오늘 새벽에 기차를 타고 시내에 가서 아주 커다랗고 비싼 자동차를 주문했대.” … “인간들은 늘 어딘가에 도착해서 한동안 머물고, 번창하고, 건물을 짓고는 또 떠나지.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야 … 인간들이 사라진 건 세찬 바람과 끈질긴 비가 세상을 뒤흔들던 때였어. 몇 년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 비가 내렸지. 우리 오소리들도 그 일에 한몫 거들었을지 누가 알겠니? 도시는 점점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어.” ..  (60, 102쪽)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보면, 사람 사이에서 온갖 모험을 하는 여러 들짐승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들짐승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고, 사람과 똑같은 집에서 살며, 사람과 똑같은 밥을 먹습니다. 두꺼비가 살코기를 접시에 담아서 먹습니다. 오소리와 족제비가 술을 마십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라는 책에 여러 들짐승을 ‘주인공’처럼 집어넣었지만, 이들 몸짓이나 삶이나 생각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과 겉모습만 사람이 아닌 들짐승으로 다루었을 뿐입니다. 아이들이 ‘짐승’이나 ‘벌레’를 좋아한다고 여겨, ‘주인공’과 ‘등장인물’을 짐승이나 벌레로 꾸몄을 뿐입니다.



.. “저,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아주머니는 세탁 일을 한다고 하셨죠? 바로 그거예요. 나는 보시다시피 기관사예요. 끔찍하게 옷을 더럽히는 직업이죠. 날마다 그렇게 많은 셔츠를 벗어 놓으니 제 아내가 빨래라면 진저리를 내는 것도 당연해요. 만약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가서 더러운 셔츠들을 빨아 주신다면, 이 기차에 태워 드리겠어요. 회사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이건 아주 특별한 경우니까요.” … 래트는 이렇게 말하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도시락 바구니를 꺼내어 음식을 간단히 챙겼다. 손님의 태생과 입맛을 생각해서 기다란 프랑스 빵 한 덩어리와 마늘 생그리어에서 꺼낸 소시지, 저장해 두었던 치즈 조금 ..  (199∼200, 229쪽)



  영국에서 영국 아이들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라는 책을 신나게 즐기는 일은 그 나라 삶입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한국 아이들이 이 책을 어떻게 즐길 만할까요? 현대문명과 도시문명을 찬양하듯이 그리는 이 작품에서 무슨 ‘자연’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자연 묘사’조차 한 줄로도 안 나오는 작품인데, 이 책에서 어떤 ‘자연 예찬’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해리 포터》를 쓴 사람도 어릴 적에 이 책을 신나게 읽었다고 하는 추천글을 붙이면, 이 책을 한국 아이들도 읽을 만한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이들한테 선물처럼 물려줄 ‘모험 이야기’는 기껏 ‘마차를 밀어낸 자동차’에 흠뻑 사로잡혀서 고속도로를 아주 거침없이 싱싱 달리는 짓거리일는지요? 시골길에서도 자동차를 마구 달려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처박는 몸짓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모험 이야기’일는지요?



.. 래트는 제비들을 질투하면서 물었다. “그럼 도대체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이렇게 초라하고 재미없는 마을에 무슨 볼일이 남아서?” 한 제비가 말했다. “때가 되면 또다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싱싱한 풀, 촉촉한 과수원, 따뜻한 날씨, 곤충이 사는 연못, 소가 풀을 뜯고, 건초를 만들고, 죄 없는 이브가 사는 집 주위에 늘어선 농장 들이 우리를 불러대는 소리가 말이야.” … 아이들이 떼를 쓰거나, 말을 듣지 않거나, 도저히 입을 다물지 않거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때에는 무서운 배저 아저씨가 와서 잡아갈 거라고만 하면 금세 잠잠해졌다. 비록 남들과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배저 아저씨에게 이것은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  (216, 320쪽)



  고전이나 명작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고전이나 명작을 읽히는 일이 썩 좋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고전이나 명작을 읽힐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도 읽고 어른들도 읽을 ‘이야기’라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아름다운 삶이 따사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을 그리지 않고 툭탁질을 다루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이모저모 ‘가르침(교훈)’은 있으리라 느낍니다. 욕심쟁이에다가 수다쟁이에다가 자랑쟁이인 두꺼비를 빗대어 아이들한테 어떤 교훈을 심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 때문에 꼭 이 책을 읽혀야 한다면, 따로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려 하지 말고, 어버이 누구나 아이를 곁에 앉히고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내려온 옛이야기 한 토막을 조곤조곤 입으로 들려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꼭 책을 거쳐서 ‘교훈 심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책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아이를 가르치거나 키울 수 있습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이 책을 쓴 분이 이녁 아이한테 들려주려고 쓴 책이라고 합니다. 많이 아픈 이녁 아이한테 ‘영국 문화’와 ‘영국 사회’와 ‘영국 현대문명’을 알기 쉽도록 풀어서 보여주려고 이러한 책을 썼다고 느낍니다. 몸이 아파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이녁 아이한테 여러모로 생각힘을 북돋우려고 이런 이야기를 쓸 만하리라 느낍니다. 그뿐입니다. 4348.3.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