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디와 폴리 : 할머니의 생신 잔치 폴디와 폴리
크리스티안 예레미스, 파비안 예레미스 지음, 유진아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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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22



다 같이 숨은그림찾기를 하며 놀지

― 폴디와 폴리, 할머니의 생신 잔치

 크리스티안 예레미스·파비안 예레미스

 유진하 옮김

 미운오리새끼 펴냄, 2015.11.20. 15000원



  숨바꼭질을 합니다. 마당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다. 숨바꼭질을 즐깁니다. 고샅에서도 즐기고 골짜기에서도 즐깁니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숨고, 옷장에 살짝 들어가서 숨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숨고, 이불로 문을 가로막으면서 숨습니다. 나무 뒤에 숨고, 자전거 뒤에 앉으면서 숨어요. 풀밭에 쪼그려앉고, 억새풀을 손에 쥐고 숨습니다. 숨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즐겁게 찾기놀이를 해요.


  추운 겨울에도 마당에서 얼마든지 숨바꼭질을 합니다. 이러다가 손발이 시리고 몸이 꽁꽁 얼면 집으로 들어가지요. 자,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하고 다른 놀이를 해 볼까? 여기에 멋진 ‘숨은그림찾기’ 그림책이 있거든.



오늘은 할머니의 90번째 생신이에요.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친척들이 생신 잔치를 하러 모두 모였어요. 탐험가 찰리 삼촌도, 한껏 멋을 부린 에스메랄다 숙모도 왔어요. 옆집에 사는 폴리도 직접 쓴 생일 카드를 들고 찾아왔지요. 할머니는 잔치에서 입을 옷들을 허둥지둥 찾기 시작했어요. (4쪽)




  크리스티안 예레미스 님하고 파비안 예레미스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폴디와 폴리 할머니의 생신 잔치》(미운오리새끼,2015)는 ‘펭귄 식구’가 잔뜩 나오는 숨은그림찾기 그림책입니다. 가로세로 길이가 26.7×34.2센티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그림책을 펼치면 두 쪽에 펭귄이 한가득 나옵니다. 아이들은 혼자서 이 그림책을 넘기며 숨은그림을 찾기도 하고, 둘이서 함께 숨은그림을 찾기도 하며, 때때로 어디에 숨었는지 못 찾겠다면서 함께 찾아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면서 하나도 모르는 척합니다. 숨은그림찾기는 더 빨리 찾아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다닥 찾아서 후다닥 넘기면 재미없어요. 이 그림 저 그림 꼼꼼하게 살피면서 찾는 재미인 숨은그림찾기입니다. 어디에 그림이 숨었나 하고 들여다보면서 그림을 넓고 깊이 살피도록 북돋우는 숨은그림찾기예요.


  몇 가지 그림을 숨기려고 구석구석 온갖 그림이 깃듭니다. 두 쪽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면서 새로운 숨은그림찾기가 이루어집니다.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펭귄입니다. 몸짓이랑 차림새가 다르고, 낯빛하고 손짓이 달라요. 그림을 꼼꼼하게 알뜰히 담은 《폴디와 폴리 할머니의 생신 잔치》이면서 할머니 펭귄이 아흔째로 맞이한 생일을 기리는 이야기가 흐르기에 한결 재미나게 들여다볼 만합니다. 기쁨을 나누는 이야기를 엿보고, 잔치를 벌이는 웃음 어린 놀이마당을 살펴요.



“이제 다락방에 가서 공작새 깃털이 달린 모자를 찾아보자.” 할머니가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어요. 폴리는 오들오들 떨며 말했어요. “다락방에는 유령이랑 박쥐가 우글거릴 텐데…….” 그러자 폴디가 깔깔대며 말했어요. “아니면 유령 박쥐가 있을지도 모르지!” (14쪽)




  가만히 돌아보면 어느 집이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셈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 알 수 있어도,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요.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열며 찬장을 들여다보면서 ‘뭔가 숨은 것’을 찾고 싶습니다. 어디 주전부리가 있는가 하고 살핍니다. 뭔가 남달리 재미난 것이 있을까 하고 찾아봅니다.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깜빡 잊었기에 두리번두리번 찾지요. 제때에 제대로 안 치우는 바람에 잃었구나 싶은 놀잇감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져요.


  다만, 집안에서 어디에 두었는지 잊거나 잃은 살림살이나 놀잇감을 찾는 일은 ‘오래 끌면 오래 끌’수록 안 재미있다고 할 만합니다. 이렇게 집안을 안 치우고서야 어떻게 살림을 하거나 노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잊거나 잃은 것’을 찾고 나면 한숨을 돌리면서 ‘이제부터 아무 데나 함부로 두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다시 잊거나 잃으면서 한참 온 집안을 뒤지지요.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이끄는 그림책은 이러한 우리 모습을 되새겨 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 보라구, 아무 데나 또 두니까 자꾸 잃지 하고 일깨운다고 할까요. 이것 좀 봐, 즐겁게 놀았으면 네 장난감을 네가 기쁘게 잘 추스리거나 챙기면서 건사해야지 하고 깨우친다고 할까요.


  그림책 《폴디와 폴리 할머니의 생신 잔치》를 펼치면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너끈히 흐릅니다. 숨은그림을 찾느라 한나절이 쉬 흐릅니다. 예전에 다 찾은 숨은그림이라 하더라도 아기자기하게 흐르는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재미있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숨긴 것’만 찾아보는 숨은그림찾기이지는 않아요. 올망졸망하게 깃든 그림을 들여다보며 재미있는 숨은그림찾기이고, 꼬물꼬물하게 춤추는 그림을 하나하나 짚으며 신나는 숨은그림찾기라 할 만합니다. 4349.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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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지음, 최세진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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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4



경제성장을 바라보다가 놓친 삶·살림·사랑

―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글

 최세진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5.11.20. 15000원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책,2013)을 쓰기도 한 질베르 리스트 님은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봄날의책,2015)을 선보입니다. 두 가지 책 모두 ‘환상’을 다룹니다. 문득 궁금해서 한자말 ‘환상’ 말풀이를 찾아봅니다.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헛된 생각”은 알겠으나 ‘공상’이라는 한자말이 다시 궁금해서 찾아보니,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알맹이가 없으며 이루어질 수 없을 만한 덧없는 생각을 가리켜 ‘환상’이라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발전’이나 ‘경제학’을 놓고 어떤 “덧없는 생각”이 흐른다는 이야기일까요? 발전이 끝없으리라는 생각은 왜 덧없고, 경제학이 과학(과학적)이라는 생각은 왜 부질없을까요?



다른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경제 ‘과학’ 분야도 학계나 행정부, 국제기구에서 명망 있는 일자리를 차지하려는 권력 싸움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소위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려는 경쟁이 그 절정을 이룬다. (37쪽)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이기는커녕 낭비를 부추길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경제적 부’가 생태를 빈곤화시키며 축적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49쪽)



  질베르 리스트 님은 이녁 책에서 ‘경제학’은 모든 바탕을 ‘지구자원을 캐내서 돈을 더 끌어모으는 길’을 다루기 때문에, 어느 경제학이든 ‘지구를 무너뜨리는 길’로 달릴 수밖에 없다고 밝힙니다. 지구자원을 더 캐낼 수 없을 때에는, 또 지구자원을 캐내는 1차산업에 몸을 바치는 일꾼이 없을 때에는, 발전도 경제학도 이루어질 수 없는 셈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발전이나 경제학 모두 쓰레기는 헤아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산업’하고 ‘경제성장율’을 헤아릴 뿐입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면서 비닐을 쓰고, 온갖 포장종이를 쓰기에, 이 모두가 ‘소비를 마친 뒤에 쓰레기’로 바뀌어도 딱히 걱정을 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아요. 비닐 쓰레기가 온누리를 뒤덮어도, 아파트를 허물어 나오는 시멘트 쓰레기를 곳곳에 파묻어도, 발전이나 경제학 이론에서는 이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이리하여 경제학은 “낭비를 부추긴다”고 여길 만해요. 쓰레기가 늘고, 지구자원이 사라지며, 환경이 무너지더라도, 생산과 소비가 끝없이 이어지면 모두 발전이나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이 붙거든요. 경제를 다루는 공무원과 학자 모두 성장율이라고 하는 숫자를 살필 뿐, 삶자리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둘러보지 않는다고 할 만해요. 돈이 더 되느냐 안 되느냐만 책상맡에서 살피는 경제학이라고 할 만하지요.



경제행위의 ‘합리성’은 19세기 유럽에서는 노동자 투쟁을 탄압하며 강요했고, 세계 대부분에 대해서는 식민화를 통해 강요했으며, (64쪽)


시장 제도에서는 ‘한몫 잡았다’고 허풍을 떠는 게 금지되어 있지 않다. ‘한몫 잡았다’는 말은 자신이 받은 것에 비해 상대방에게 적게 주었으며, 거래 당사자의 이익에 맞서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 이윤의 유혹에 빠진 시장 논리는 주는 기쁨을 모른다. (89쪽)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은 경제학이 말하는 ‘시장 제도’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모든 경제학은 ‘이윤 추구’로 나아가기 마련인데, ‘이윤 추구’란 ‘돈이 되도록 하기’이고 ‘돈이 되는 길 좇기’입니다. 돈이 되도록 하거나 돈을 모으려고 하면, ‘돈이 남한테 가기보다 나한테 오도록 해야’ 하고, ‘남은 이익을 덜 거두거나 못 거두도록 하면서, 바로 내가 더 많이 이익을 거두어야 합’니다. ‘시세 차익’이라고 하듯이, ‘더 남겨야’ 돈이 돼요. 그러니까, 질베르 리스트 님이 “시장 논리는 주는 기쁨을 모른다(89쪽)” 하고 말할 만합니다. 남한테서 더 가로채거나 가져와야 ‘돈이 되는(이익이 되는)’ 얼거리로 나아가는 경제학일 테니까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이라는 책에서 밝히지 않더라도, 경제발전에서는 수입보다 수출이 커야 한다 밝히지요. 즐거운 삶이나 아름다운 삶을 말하거나 살피거나 따지지 않아요. 수입도 수출도 없이 자급자족을 하는 사회나 삶은 이야기하지 않아요. ‘경제 행위’가 되려면, 남한테 뭔가를 내다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남한테 아무것도 안 팔고, 남한테서 아무것도 안 사면서 조용하게 살림을 꾸릴 적에는 어떤 경제학도 나타나지 않아요.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할 수 있을 때도 더 많은 것을 바라거나 더 축적하기를 바라지 않고, 수수하고 검소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 그들에게 삶의 목표는 소비가 아니다 … 노동보다는 서로 잡담을 나누거나 족장이나 노인들이 해주는 옛날이야기와 창조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거나 잔치 준비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개인적인 풍요는 언제나 질투와 폭력의 위협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109쪽)


우리는 전자제품, 전화기, 의약품 같은 것들 없이 지내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다. (178쪽)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은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밥이나 옷이나 집을 누구나 스스로 지었습니다. 게다가 즐겁게 지었어요. 전문가나 학자라는 사람은 따로 없었고, 누구나 ‘모든 것’을 다루고 살피고 알고 나누면서 살았어요. 사내랑 가시내를 따로 가르는 삶이나 살림이 아니라, 서로 아끼며 돕는 삶이나 살림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밥짓는 전문가나 옷짓는 전문가나 집짓는 전문가를 따로 두지 않던 지난날이에요. 공부만 하는 전문가라든지, 교육자 노릇을 하는 전문가라든지, 행정 서류를 도맡는 전문가가 굳이 없어도 되던 지난날입니다. 누구나 씨앗을 심고, 누구나 풀을 건사하며, 누구나 나무랑 숲을 아끼던 지난날이었다고 느껴요. 지난날에는 쓰레기가 나올 턱이 없으며, 지구자원을 파헤쳐서 망가뜨리는 일이 없지요. 권력자나 족장이 나서기 앞서까지는 싸움이나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전쟁무기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살림살이만 지었을 테고요.


  그런데, ‘남는 것’을 거두는 사회가 되면서, ‘남는 것’을 다스리거나 더 그러모으려는 권력자가 나타나고, 이 권력 흐름이 깊어지면서 더 큰 정치권력이 되려고 하는 몸짓이 불거져요.



GDP 지표는 실제로는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생존이 아니라, 그 ‘체제’ 자체의 생존에 훨씬 더 중요하다. 성장을 멈춘 기업, 다시 말해 더 이상 이윤을 축적하지 못하는 기업은 성장하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사회진화론의 원리에 의해 시장에서 곧 배제된다. (155쪽)


경제 ‘과학’이 처음으로 모습을 갖춰 가던 19세기 초에는 자연의 혜택이 무한하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자연의 혜택이나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혹은 재생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기 어려웠다. (210쪽)



  오늘날 우리는 운전만 하는 삶을 보내거나, 기계만 다루는 삶을 보내거나, 컴퓨터만 만지는 삶을 보내거나, 부엌일만 하는 삶을 보내거나, 아이들을 키우는 일만 하는 삶을 보내거나 하면서 지냅니다. 가게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쓰면서, 내 손에 쥐는 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지 않을 뿐더러, 돌아볼 겨를조차 없습니다.


  내가 짓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를 스스로 나누는 삶이 잊힙니다. 남이 짓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를 책이나 영화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삶으로 바뀝니다.


  오늘 우리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 만할까요? 아이들이 앞으로 자라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잘 벌도록 한다든지, 한두 가지 재주를 키워서 전문 직업인이 되도록 하는 길 말고, 스스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사랑을 보여주거나 가르칠 만할까요? 돈이 아니어도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키우는 꿈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더 비싼 자동차나 아파트나 옷이나 전자제품을 장만해야 하는 살림이 아니라,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평등한 살림살이를 북돋우는 꿈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이라는 책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새롭게 나아갈 길까지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이 외치는 숫자나 지표나 통계나 전망이나 이론에 감춰진 속내를 찬찬히 밝혀 줍니다. 경제성장이나 발전에 목을 매다가는 삶·살림·사랑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대목을 찬찬히 밝혀 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잊거나 잃었지만, 스스로 찾거나 살려야 할 삶·살림·사랑을 이제부터 새롭게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4349.2.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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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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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6



‘전문가가 엉망이라 해’도 난 그저 좋아

― 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4800원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5) 열둘째 권을 읽습니다. 열둘째 권은 겉그림이 살짝 껄끄러워서 큰아이한테 아예 안 보여줍니다. 나중에 훨씬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겉그림을 보도록 하겠지요. 속을 살피면 이런 겉그림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겉그림을 넣어야 했나 싶어요. 왜냐하면 이 만화에서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하고 너무 동떨어지니까요.



“니 마지막은 어딘데? 명성을 얻고 실컷 돈이라도 버는 기가?” “아니. 나는, 할배맨치로, 평생 연주할 수 있는 ‘즉흥곡’을 만들고 싶다.” (34∼35쪽)


“글쎄.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거죠.” (48쪽)



  《순백의 소리》 열둘째 권에서는 ‘악기를 켜는 사람’이 늘 되새겨야 할 대목을 몇 가지 들려줍니다. 첫째도 둘째도 막째도 언제나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기’입니다.


  이는 다른 자리에서도 늘 같아요.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밥을 짓건, 청소를 하건, 아이를 돌보건, 교사로 일하건, 대통령이나 군수로 일하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건 늘 매한가지예요. 내가 나를 깎아내리면 모든 것은 끝입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지요.


  처음부터 아이를 잘 돌보는 어버이란 없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비로소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되어 아이를 따사로이 보살필 수 있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악기 켜기가 서툴’어도 사랑스러운 노랫가락을 들려줄 수 있어요.



“네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교실 차려서 지도자가 되든가, 지역 행사에서 연주를 하든가, 길거리 공연을 하든가, 음악사무소에 음원을 보내든가! 자비로 CD를 만들어서 팔아 보기라도 했어?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려 보기나 했냐고!” (128쪽)


‘나는, 밑바닥이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다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181쪽)



  아주 수수하다 싶은 소리만 켤 수 있다는 어느 연주자는 한동안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면서 ‘처음부터 재능이 있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밝힙니다. 네, 궁금할 테지요. 재주나 솜씨가 있는 사람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아주 대단하거나 매우 아름답거나 무척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까요? 수수한 사람하고 아주 다른 모습을 볼까요?


  거꾸로 생각해서,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모습’이 무엇인지 몰라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가를 도무지 못 짚습니다.


  이리하여, 둘(재주꾼하고 수수한 사람)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없다 할 만해요.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재미나게 있어요. 둘이 바라보는 모습은 아주 다르지만, 둘이 바라보는 곳은 늘 같아요. 무엇인가 하면, ‘삶’을 바라봅니다. 네가 바라보는 삶이랑 내가 바라보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삶’이라는 대목에서는 언제나 같아요.



“정말, 지금 엉망이라서 듣기 싫을 기라.” “전문가가 엉망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난 몰라. 도쿄에 살 때 강 둔치에서 연주하던 생각이 나네. 난, 세츠의 소리가 참 좋아.” (141쪽)


“츠가루샤미센의 역사를 아는 것도, 반주를 하는 것도, 명인의 수를 듣고 아는 것도, ‘뿌리로 돌아가는’ 것, 자기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기 아입니꺼?” (174쪽)



  전문 연주가인 사람이 ‘지금 엉망’이라고 말한들, 수수한 청취자나 관객인 사람은 ‘늘 좋다’고 여깁니다.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면 빼어난 솜씨대로 좋고, 투박한 연주를 보여주면 투박한 연주대로 좋으며,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는 또 이렇게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대로 좋아요.


  나는 김현식이라고 하는 노래꾼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퍽 좋아합니다. 이녁이 맨 처음 새내기 노래꾼으로 나타났을 적에 들려준 달콤하면서 매우 보드라운 목소리도 좋아하지만, 죽음을 코앞에 앞두고 잔뜩 가라앉으면서 무거운 목소리도 좋아합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목소리가 따로 없어요. 모두 ‘노래하는 목소리’입니다. 악기 연주자로서도 언제나 ‘노래를 들려주는 손길’이지요.


  사랑으로 지은 밥이면 언제라도 맛있듯이, 사랑으로 켜는 노랫가락이라면 언제라도 즐겁습니다. 이 대목을 깨달아서 ‘뿌리로 돌아가기’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저마다 ‘연주가’이고 ‘작가’이며 ‘교사’이자 ‘요리사’이기도 한 줄을 기쁨으로 누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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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시선 35
손병걸 지음 / 애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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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8



아이는 빛노래로 아빠를 키우고

―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손병걸 글

 애지 펴냄, 2011.3.19. 9000원



  시를 쓰는 손병걸 님은 서른 살 즈음에 눈을 잃었다고 합니다. 서른 살 즈음까지는 언제나 ‘두 눈으로 몸소 본 것’만 믿고 살았다는데, 두 눈을 잃고 난 뒤로는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하는 하루가 되었다고 해요.


  두 눈으로 보다가 두 눈을 쓸 수 없으면, 그야말로 삶이 뒤바뀌지요. 두 손을 쓰다가 두 손을 쓸 수 없어도, 또 두 다리를 쓰다가 두 다리를 쓸 수 없어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삶은 뒤바뀌지 싶습니다.


  나는 두 눈으로 바라봅니다. 두 손을 쓰고 두 다리를 움직입니다. 빨래를 할 적에 빨래기계한테 맡기기도 하지만, 으레 두 손으로 복복 비비고 헹굽니다. 두 손으로 밥을 짓고, 두 다리로 자전거 발판을 구릅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읍내로 저잣마실을 나가면 가방 가득 먹을거리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이 졸립거나 힘들다 하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한 아이를 한팔로 안고, 다른 아이도 다른 한팔로 안으며 걷기도 해요. 그런데 이렇게 눈이며 손이며 다리이며 온몸이며 쓰다가, 그만 어느 한 곳이 다치면 아무것도 못 하기 일쑤예요.



저수지 둑길을 걷는데 /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 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 / 천 년의 잠을 깨는 것 같아서 / 화들짝 귀가 열렸다 (소리를 보다)


들숨 날숨 몰아쉬며 / 숨이 넘어가도록 / 땀을 쏟는 일이겠지 (하모니카 소리)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2011)를 읽으면서 가슴이 짠합니다. 손병걸 님은 처음 두 눈을 잃어야 하던 무렵, 그야말로 술로 하루를 보냈다고 털어놓아요. 하루 마시고 이틀 마셔도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겠지요. 한 주 마시고 두 주 마셔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겠지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처 마셔도 쓰라림도 아픔도 가시지 않았겠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눈으로 보아야만 믿던 삶이었는데, 이제 두 눈으로는 볼 수 없다면, 오직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껴야 하는 삶이라면, 그리고 두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삶이라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직접 보지 않으면 / 믿지 않고 살아왔다 //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 두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점자책을 펼치니 / 와르르 쏟아진다 /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빛의 경전)



  우리 집 아이들이 틈틈이 피아노를 치거나 피리를 불 적에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하고 마당에 서서 눈을 살며시 감고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밤에 뒤꼍에 올라 별잔치를 올려다보면서 저 별에서 이 지구로 흘러오는 빛살뿐 아니라 소리는 무엇일까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밥을 끓이면서 밥 끓는 소리를 듣고 밥 익는 냄새를 맡습니다. 밥상을 차리면서 이 밥을 맛나게 함께 먹을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우리 집에서 설거지하는 물’이 되어 주기까지 골짜기를 흐르던 물줄기를 헤아립니다. 빨래를 마치고 마당에 널면서 ‘옷가지를 보송보송 말려 주는 햇볕’에는 어떤 기운이 서렸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잊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도 숲은 / 묵묵히 자란다는 것을 / 모르고 있었다 / 왜, 저 빌딩들이 숲을 향해 /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지 (어느 숲)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손가락 끝에 박힌 눈)



  손병걸 님은 시를 쓰면서 이녁 아이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에는 두 눈을 잃은 아픔도 드러나지만, 두 눈을 잃고서 새롭게 뜬 ‘마음눈’ 이야기도 흐르고, 무엇보다도 손병걸 님 딸아이하고 얽힌 기쁜 사랑이 새삼스레 흘러요. 이제까지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했다고도 할 만한 새로운 사랑이지요.



아빠 식사해요 / 밥때만 되면 /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 고작, 초등학교 3학년 /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 이제 아홉 살짜리다 // 밥상에 앉으면 / 이건 김치, 빨개요 /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 아이의 입은 바쁘다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밥때만 되면 아빠를 챙기는 아홉 살 딸아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손병걸 님은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지요. 아홉 살 딸아이도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입이 바쁘’고, 이런 딸아이 사랑을 받으면서 숟가락을 드는 손병걸 님도 밥을 먹는지 사랑을 먹는지 눈물을 먹는지 웃음을 먹는지 모르도록 ‘입이 바쁘’겠지요.


  이 깜찍하고 상냥하며 착하고 어여쁜 딸아이 몸짓과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클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베푸는 딸아이 숨결과 넋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클까요.



먹먹한 사연이 끝나고 / 이어지는 출연자 소녀가장 / 사회자 : 올겨울 추위를 어떻게 해요? / 소녀 : 연탄불 구멍을 열면 돼요. (생방송)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모름지기 사랑은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볼 텐데, 두 눈을 감으면 한결 환하면서 고요하게 드러나지 싶어요.


  코앞에 잔칫밥을 차려야 사랑이지 않아요. 눈앞에 값진 선물을 늘어놓아야 사랑이지 않아요. 비싼 밥집에 찾아가서 밥술을 들어야 사랑이지 않을 테지요? 아홉 살 아이가 이것저것 알려주는 목소리에 맞추어, 김치요 된장찌개요 밥이요 반찬이요 물이요 하고 느끼는 손길로 받아들이는 수수한 밥 한 그릇에서 따사로운 사랑을 알아차리겠지요?


  두 눈을 잃은 손병걸 님이지만, 마음에 있는 눈을 새로우면서 크게 뜨는 삶을 짓는 손병걸 님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두 눈을 한동안 고요히 감으면서, 마음에 깃든 열 가지 눈동자뿐 아니라 스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그윽한 눈동자를 기쁨으로 새롭게 뜨는 손병걸 님 발걸음이리라 생각해요.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하루를 누리면서 이 보금자리를 돌아봅니다. 사랑은 우리 눈앞에 있다는 대목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먼발치가 아니라 우리 곁에, 저 먼 별나라가 아닌 우리 살림살이마다 고운 사랑이 흐른다는 대목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눈을 떠야지요.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떠야지요. 사랑으로 하루를 누리려는 눈을 번쩍 떠야지요.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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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클럽 난 책읽기가 좋아
티에리 르냉 지음, 한지선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34



값비싼 장난감으로는 동무를 못 사귄다

― 바비 클럽

 티에리 르냉 글

 한지선 그림

 최윤정 옮김

 비룡소 펴냄, 2005.1.13. 7000원



  아이들은 저한테 남보다 값지거나 비싸거나 좋은 것이 있을 적에 ‘자랑’을 하고 싶을까요? 아니면 저한테 있는 어떤 것을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눔’을 하고 싶을까요? 다른 동무들 앞에서 ‘내 것 뽐내기’를 하면 기쁘거나 즐거울까요? 아니면 여러 동무들하고 오순도순 도란도란 아기자기 신나게 놀 적에 기쁘거나 즐거울까요?


  티에리 르냉 님이 글을 쓰고, 한지선 님이 그림을 넣은 어린이문학 《바비 클럽》(비룡소,2005)을 가만히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내 어릴 적을 더듬으니, 사내는 사내대로 로봇 같은 장난감을 학교로 가져와서 동무들한테 보여주기를 즐겼고, 가시내는 가시내대로 인형 같은 장난감을 학교로 가져와서 동무들한테 선보이기를 즐겼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에 부잣집 아이는 거의 없었기에 ‘자랑’할 동무는 거의 없었고, 자랑하려고 뭔가를 가져왔다가는 주먹힘이 센 아이한테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어떤 장난감이든 집에서 가져오지 말라고 했어요.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니까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라는 얘기는 옳다고 느껴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쉬는 때라든지, 낮밥을 먹는 때에 장난감으로도 놀고 싶습니다. ‘하지 마’나 ‘갖고 오지 마’라 말하지만 말고, ‘한번 가져와서 다 같이 놀아 볼까?’라 말하면서 장난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즐거운가를 ‘가르칠’ 수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디에고가 히죽거린다. 축구공이 방금 바비 인형 캠핑카를 짓이겨 놓았다. 부서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저놈의 물건, 아마 200프랑은 나갈 것이다. (9쪽)


“선생님, 쟤가 그랬어요!” 상드라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잡아먹을 듯이 말했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증거가 없이 남을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교육 과정에 그런 게 있었다. (15쪽)



  어린이문학 《바비 클럽》을 보면 여러 아이가 나옵니다. 맨 먼저, 이 이야기를 이끄는 사내 아이가 나옵니다. 다음으로, 학교에서 권력을 흔드는 어머니를 둔 부잣집 가시내 아이가 나옵니다. 부잣집 아이를 둘러싼 ‘바비 클럽’이 되는 가시내 아이들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아랍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가시내 아이가 나와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버이 권력’에 맞추어 똑같이 움직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무서운 모습이에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고스란히 가르치거나 물려준 셈이거든요. 사회를 주름잡는 권력이나 이름값이 있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은 동무들 앞에서 똑같이 권력이나 이름값을 휘두르려고 해요.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 사이에서 ‘교육 과정에 나온 대로 하는 어설픈 중립’을 지킵니다.


  모든 말썽과 실마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풀어야 할까요? 어른인 교사는 팔짱을 끼기만 해야 할까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녁이 거느리거나 휘두르는 권력을 아이들이 똑같이 따라하는 모습이 즐거울까요? 권력도 돈도 이름값도 없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은 ‘권력도 돈도 이름값도 높은 어버이를 둔 아이’한테 억눌리거나 짓눌려야 할까요?



이 아랍 아이는 이번 학기에 전학왔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유명한 인형을 하나 들고 나타나서 바비 클럽 여자애들한테 다가갔다. “나, 너희들이랑 놀아도 돼?” 오렐리는 찬성하지 않았다. 걔네 식구들은 아랍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아랍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21쪽)



  내 어릴 적을 다시 돌아봅니다. 내 동무들을 살피면 ‘바비 인형’처럼 돈값이 꽤 센 인형을 학교로 몰래 가져와서 ‘와 예쁘네’라든지 ‘나도 한번 만져 볼게’ 같은 말이 나오게 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아이가 더 많았는가 하면, 두꺼운종이를 가위로 오리고 그림을 그린 ‘종이인형’을 손수 빚는 아이가 훨씬 많았어요.


  나는 사내입니다만, 나도 종이인형을 오렸어요. 내가 놀 종이인형이라기보다 다른 아이한테 줄 종이인형입니다. 처음에는 50원이나 100원을 받고 팔겠노라며 종이인형을 오리지만 아무도 안 사요. 그래서 나중에는 다 그냥 동무들한테 줍니다. 나한테서 종이인형을 한 번 두 번 받다 보니, 어느새 동무들은 나한테 종이인형을 그려 달라 하거나 오려 달라 합니다. 자꾸자꾸 종이인형을 그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솜씨가 늘어서 그저 재미로 종이인형을 오렸어요.



참을 수 없이 심술이 나서 아이들은 배가 아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장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상드라네 할머니를, 그 다음에는 이렇게 비싼 것을 사 줄 수 없는 자기들 할머니들을 원망했다. 그래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화는 곧바로 제밀라에게 미쳤다. 제밀라는 아랍 애니까. (40쪽)



  어린이문학 《바비 클럽》은 ‘바비 인형’을 둘러싸고 아이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생길 뿐 아니라 ‘따돌림’에다가 ‘인종 차별’까지 버젓이 일어나는 프랑스 사회를 그립니다. 여기에다가 ‘이 모든 말썽거리를 팔짱 끼고 구경하는 어른(교사) 모습’을 넌지시 나무라는 투로 보여줍니다. 이런 학교에서 주인공 사내 아이가 모든 말썽거리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멋진 생각을 보여줍니다. ‘바비 클럽’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부잣집 아이가 아랍 아이를 못살게 굴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적에 주인공 사내 아이가 꾀를 써요. 아랍 아이가 고빗사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올 구멍을 아무도 몰래 마련하면서, 부잣집 아이가 반 아이들과 교사 앞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는 셈이 되도록 꾀를 써요.


  이야기 마지막을 보면서 후유 하고 한숨을 쉽니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책에 나오듯이 아직 철이 없어서 동무를 괴롭히기도 하고, ‘부자인 어버이나 할머니’가 있느냐 없느냐로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이때에 어버이나 어른이 슬기롭지 않으면 아이들은 엉뚱한 길을 배워요.


  참말로 학교에서 ‘인형놀이 교육’이나 ‘장난감 교육’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난한 집 아이나 부잣집 아이나 모두 즐겁게 ‘종이인형 오리기’를 하면서, 모든 장난감이나 인형은 우리가 손수 지어서 즐길 수 있다는 대목을 가르치거나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틈틈이 새 종이인형을 오려서 우리 집 아이들한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꾸준히 새 종이인형을 다시 오리고, 나이가 드는 동안(한 살 두 살 더 먹는 동안) 아이들이 오리는 종이인형은 한결 거듭납니다. 두꺼운종이로 된 과자상자라든지 골판종이는 모두 종이인형을 오릴 밑종이가 돼요. 값비싸게 장만해야 하는 인형이나 장난감으로는 동무를 참답게 사귈 수 없다는 대목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무를 참답게 사귀는 길은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될 때입니다. 살가운 마음이 깃든 장난감으로, 또 살가운 마음이 흐르는 손길로 서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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