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잭 창작비화 2 - 테즈카 오사무의 작업실에서
요시모토 코지 지음, 미야자키 마사루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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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4



‘만화 하느님’ 곁에 있는 수많은 ‘하느님’

― 블랙잭 창작 비화 2

 미야자키 마사루 글

 요시모토 코지 그림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4.25. 1만 원



  만화를 그린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를 그린 《블랙잭 창작 비화》(학산문화사,2014) 둘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숨을 거둔 지 스무 해 남짓 지났는데,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녁을 기리거나 그리는 사람이 참으로 많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동료와 후배가 그리운 목소리로 되새기면서 빚은 《블랙잭 창작 비화》는 얼마나 따끈따끈한 사랑이 깃들며 태어났는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여러분, 일에 목숨을 걸어 주세요!” ‘네?’ ‘목숨이요?’ (6쪽)


“롯폰기의 콘소메 수프가 먹고 싶어!” “지금 당장 만화에 대해 잘 아는 중국어 통역을 찾아 줘요!” “멜론!” “카이메이 잉크를 사 와요!” “안경이 없어요!” “햄 없나요?” “케이크가 없으면 못 그려!” “의치가 또 없어!” “슬리퍼가 없으면 그릴 수 없어요!” “초콜릿!!” (19∼20쪽)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을 보면, 첫머리부터 좀 그악스럽다 싶은 한 마디로 엽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은 도움이(어시스턴트)들한테 ‘그림(만화)’을 그릴 적에 목숨을 걸어 달라고 외칩니다. 도움이들은 가뜩이나 밤잠을 미루며 그림을 그리는데 그 말을 듣고 놀랄 뿐입니다. 잠도 못 자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데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이녁 목숨을 걸면서 만화를 그렸어요. 도움이는 며칠쯤 잠을 미루면서 그리고, 또 바탕그림을 그릴 원고가 넘어오기까지 살짝 쉴 겨를이 있지만, 테즈카 오사무 님은 쉴 겨를이 없습니다. 방송에서 만화영화가 나오거나 극장판 만화영화를 다 마무리짓고 다른 이들은 모두 쉬거나 뒤풀이를 가더라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늘 ‘다음 만화’를 그리고 밑틀(콘티)을 짜야 했어요.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에는 ‘목숨을 걸며 만화를 그리다’가 그만 머리가 펑 하고 터지면서 갑작스레 트집이나 핑곗거리를 찾는 테즈카 오사무 님 모습이 잔뜩 나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이녁 자서전에는 안 나왔지 싶은데, 한겨울 한밤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외친다든지, 그림을 잘못 그려서 종이를 덧대야 하기에 본드를 사오라고 시킨다든지, 가까운 편의점 말고 멀리 있는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을 사 달라든지, 초콜릿이나 케익을 노래한다든지, …… 어느 모로 보면 짓궂은 장난인데, 어느 모로 보면 이 ‘장난을 맞추어’ 주는 동안에는 펜을 손에서 놓으면서 쉴 겨를이 납니다. 이레나 열흘씩 만화가 곁에서 원고 마무리를 지켜보면서 기다리던 출판사 편집자도 이런 심부름을 하면서 한숨을 돌리거나 바람을 쐬기도 하고요.



테즈카 선생님은 작품에 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수고, 아이디어, 인재, 조직, 그리고 돈,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거예요! (35쪽)


계속 무리하면서 만화를 그리던, 테즈카 선생님의 안경이니, 이렇게 폭삭 삭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테즈카 선생님은 자신의 몸에, 가장 억지를 부리셨던 게 아닐까요? (44∼45쪽)



  1928년에 태어나 1989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예순을 갓 넘기고서 저승사람이 된 테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그렇지만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고 다음 작품을 떠올렸다고 해요. 다시 말하자면, 그무렵 테즈카 오사무 님 곁에서 도움이로 일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옛날 옛적을 돌아보노라면 ‘스스로 가장 억지를 부리며 만화를 그린’ 테즈카 오사무 님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른 사람은 잠을 자도록 해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잠을 거의 안 자면서 만화를 그렸으니까요.



저희가 잠든 사이에도 테즈카 선생님은 주무시지 않고 계속 그리고 계셨어요. 돌이켜 보면, 도우러 간 닷새 간, 결국 한 번도 테즈카 선생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171쪽)


그 다음 날이 졸업식이었는데, 아버지가 ‘테즈카 오사무를 만날 일은 흔치 않으니 다녀와!’라는 거야. 졸업식도 흔치 않은데 말이야. 아하핫! (186쪽)



  밤잠을 달게 자면서 만화를 그렸다면,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일흔이나 여든이나 아흔까지 살았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자꾸자꾸 새롭게 그리고 싶은 만화가 떠오르기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도 할 만해요. 한꺼번에 열 가지가 넘는 만화를 이어서 그리는 동안에도 이 작품들에 이어 새로운 작품을 떠올리지요. 마감이 닥치면 열 가지가 넘는 원고를 모두 책상에 올려놓고서 한꺼번에 한 쪽씩 재빠르게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쿄를 떠나서 다른 고장으로 가서 마감에 쫓기며 만화를 그릴 적에 그 고장에서 만화가를 꿈꾸는 고등학생을 불러서 도움이 노릇을 해 달라고 할 적에, 고등학생들 어버이는 ‘졸업식보다 테즈카 오사무를 만나러 가라’고 말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졸업식에 가지 못하더라도 며칠 동안 밤샘을 하면서 도움이 노릇을 하라고 아이들 어버이가 등을 떠민다고 할까요.


  이런 뒷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있었을까요? 앞으로 한국에서 이만 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나올 수 있을까요? 졸업식도 입학식도 대수롭지 않으니 ‘그분’을 만나러 가라고 아이 등을 떠밀 어버이는 몇이나 있을까요?



특이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지. 아니, 우연히 모인 게 아니고, 모은 거야. 난 테즈카 선생님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젊은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 (59쪽)


“당신이면 됩니다. 그런 당신이니 좋은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80쪽)



  만화 하나가 태어나려면 만화가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만화가 한 사람 곁에 수없이 많은 도움이가 있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처럼 한 주에 열 가지가 넘는 연재만화를 그린 만화가한테는 도움이가 스무 사람이나 서른 사람으로도 모자랍니다. 게다가 잡지 연재 만화뿐 아니라 만화영화까지 함께 그렸기 때문에, 한창 일꾼을 많이 둘 적에는 이백 사람이 넘게 도움이 구실을 했다고 해요. 한 사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만화 이야기를 받치려고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달라붙어서 땀을 흘린 셈입니다.


  그래서, ‘만화 하느님’ 곁에는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있었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흘리는 땀방울로 ‘만화 하느님’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야지 싶어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언제나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도움이를 북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테즈카 오사무 당신이니까 하지요’ 하는 생각이 으레 떠오른다고 하지만, 참으로 온몸에서 새롭게 기운이 솟는다고 해요. 참말 우리는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리니, 아니 새롭게 일어서면서 만화를 그리니, 이 만화가 곁에 수많은 사람이 즐겁게 찾아옵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밤잠을 미룹니다. 그러고 나서 다 함께 활짝 웃으면서 ‘다 함께 흘린 땀방울로 태어난 만화책과 만화영화’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4349.1.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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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 깨지고 까여도 출사는 계속된다, 박찬원의 열혈 사진 공부 이야기
박찬원 지음 / 고려원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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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6



‘죽고 까무라칠’ 다짐으로 사진을 배우는 할배

―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박찬원 글·사진

 고려원북스 펴냄, 2016.1.5. 15000원



  무엇이든 배운다고 할 적에는 ‘새로움’을 배웁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영어를 배우든, 사내가 부엌일이나 뜨개질을 배우든, 나이 마흔 줄에 자전거를 처음으로 배우든, 나이 쉰이나 예순에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따려고 배우든, 예순을 지나고 일흔이 되는 나이에 그림이나 사진을 배우든, 배우는 사람은 늘 ‘새로움’을 느끼려고 이 길을 걸어요.



“도대체 뭘 하는 거여? 아직도 찍을 게 남았어?” 나를 볼 때마다 한결같이 하는 단골 멘트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염전에 뭐 찍을 게 있다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것도 몇 년씩이나 출근 도장을 찍느냔 말이다. (14쪽)




  1944년에 태어난 박찬원 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신나게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열며 책을 내는 ‘늦깎이 사진가’입니다. 예순다섯 언저리에 처음으로 그림(물빛그림)하고 사진을 나란히 배우고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고려원북수,2016)라는 사진책까지 선보입니다. 느즈막하다 싶은 나이에 예술대학원까지 다녔으니, 대학원에서는 거의 쉰 살까지 벌어지는 젊은이하고 함께 배운 셈입니다. 딸아들이 아니라 손주하고 함께 사진을 배웠다고 할까요.


  이 사진책을 읽으며 문득 ‘수채화가 박정희 할머니(1923∼2014)’가 떠오릅니다. 할아버지 박찬원 님하고 할머니 박정희 님은 다른 삶길을 걸었지만, 두 분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새길을 걸었다’는 대목에서 비슷합니다. 박정희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마지막 숨을 쉬는 날까지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으셨어요.


  박찬원 님이 걸어온 길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분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기업을 이끄는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합니다. 그 일을 마친 뒤에는 대학교에서 석좌교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내로라하는 발자국을 남긴 셈인데, 이분이 그림이나 사진을 새로 배우려 한다면 ‘이제껏 쌓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해요.


  왜냐하면, 배움이란 ‘내려놓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은 자리에 ‘채움’을 하지요. 그저 내려놓아서 비우기만 해서는 ‘명상’은 될는지 모르나 ‘배움’은 되지 않아요. 새롭게 배우려 하기에 이제껏 머릿속이나 몸에 채운 것을 모조리 뱉어냅니다. 이름값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이를 내려놓아야 해요. 고집이 있다면 고집까지 꺾어야 하지요. 이름값이나 나이나 고집을 고스란히 붙잡는다면 아무것도 못 배워요. 그냥 ‘살아온 대로’ 앞으로 살아갈 테지요.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지도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내 표정 위로 혹평이 이어졌다. “패턴을 버리라고 했는데 똑같아요. 핀트가 안 맞는 건 사진이 아닙니다!” … 내게 화를 내준 교수가 고마웠다. 나이 많은 학생이란 이유로 마음에 안 들어도 완곡한 표현을 써 왔는데, 오늘은 정말 화가 많이 났던지, 아니면 작심하고 야단을 칠 각오를 했던 것 같다. (16쪽)



  박찬원 님은 대학원에서 사진을 배울 적에 어느 날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하고 나무라는 말을 듣습니다. 큰 꾸중을 들어요. 아무래도 옛날 버릇을 말끔히 털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버릇을 버리고 새로운 매무새가 되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우겠다면서 대학원까지 들어온 사람’이 낡은 틀을 단단히 붙잡은 채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치니까, 지도교수로서는 더는 봐줄 수 없었을 테지요. 아무리 할아버지 나이인 분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끔하게 나무랄 노릇입니다.


  배우는 자리에 서면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배우는 자리에서는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따로 없습니다. 배우는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배움이(학생)’입니다. 배우려고 한다면, 흔한 말로 ‘계급장·훈장·밥그릇·가방끈·은행계좌·얼굴값’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이제껏 배워서 익힌 지식’마저 모두 내다 버려야 합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교사가 굽신굽신하면서 높임말을 써 가며 가르쳐야 하지 않아요. 대통령도 배움자리에 서는 배움이가 되려 한다면 교사한테 높임말을 쓰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고개숙여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박찬원 님은 “패턴을 버리라고 했는데 똑같아요!” 같은 말을 들어요. 사진학과 지도교수는 ‘패턴’이라는 영어를 씁니다만, 이 영어는 한국말로 하자면 ‘버릇’입니다. 오랫동안 몸에 길든 몸짓이 바로 버릇입니다. ‘길든 몸짓’을 버리고 ‘새 몸짓’이 되어야 새롭게 사진을 찍을 텐데, 길든 몸짓 그대로 제자리걸음에 머무니까 ‘길든 사진’만 찍을밖에 없어요. ‘길든 사진’이란 ‘낡은 사진’이요 ‘틀에 박힌 사진’이며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흉내내는 사진’이에요.


  다만, 지도교수는 “핀트가 안 맞는 건 사진이 아닙니다!” 하고 외쳤습니다만, ‘초점(핀트)’이 어긋나도 사진은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초점이 안 맞아도 눈빛하고 이야기가 살아서 숨쉬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잘 맞아도 눈빛이 흐리거나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에서 우리가 깊이 바라보면서 헤아릴 대목은 바로 ‘눈빛’이요 ‘마음’이며 ‘생각’이고 ‘이야기’입니다. 삶을 사랑할 줄 아는 몸짓이 되어야 비로소 새롭게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어요.




물 위에서 익어가고 있는 소금 알들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래, 나비는 죽은 것이 아니라 먼 하늘로 여행을 가고 있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19쪽)


사진을 하면서 외모도 많이 달라졌다. 정확하게는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다. 외모가 프리 스타일로 변하니, 마음도 따라 편하고 자유롭다 … 내가 운동화를 신기 시작하자 딸이 스니커즈를 선물했다. 식사 자리에서 지도교수는 내 신발이 바뀐 것을 눈치채고 패션도 바꿔 보라고 조언했다. 평생 처음으로 청바지를 샀다. (32∼33쪽)



  박찬원 님은 ‘전문(프로) 사진가’로 살아 보겠노라는 꿈을 일흔 가까운 나이에 품고서 사진을 처음으로 배우면서 ‘소금밭(염전)’을 이녁 사진감(사진 주제)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금밭이라는 곳을 적어도 백 차례는 찾아가서 들여다보고 사진으로 찍어 보겠노라 하고 다짐을 했다고 해요.


  날마다 소금밭을 찾아가지는 못했어도 아흔 몇 차례째 소금밭에 찾아갔다고 하는데, 백 차례 가까이 소금밭 나들이를 할 무렵 ‘소금밭 이야기’로 사진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숫자로 100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소금밭에 들인 땀방울로 길어올린 사진을 지켜본 둘레 사람들이 ‘소금밭 이야기 사진잔치’를 열어도 넉넉하겠다고 말해 주었다고 해요.


  숫자 100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숫자 10이나 1000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 가지 주제로 열 장을 찍거나 백 장을 찍거나 천 장을 찍거나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만 장이나 십만 장쯤 찍어 보아야 사진을 알 수 있지는 않아요.


  사진을 알려면 처음부터 ‘사진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사진을 배워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때에 비로소 사진을 배워서 알지요.


  이리하여, 사진을 배워서 알려는 사람은 사진을 한 장 찍으면 ‘한 장 찍은 만큼 압’니다. 열 장을 찍으면 ‘열 장 찍은 만큼 알’아요. 백 장이나 천 장을 찍으면 ‘백 장 찍은 만큼’이나 ‘천 장 찍은 만큼’ 알기 마련이에요.




“왜 아마추어 때 찍은 사진이 더 좋은가요?”라고 물어보았다. “대학원에 들어와 찍은 사진들엔 힘이 들어가 있어요. 억지로 찍은 것 같아요.” (57쪽)


단체 관광을 가더라도 미술관을 갈 때는 혼자서 다닌다 … 작품 감상이란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77쪽)



  사진을 쉰 해쯤 찍은 분이 사진을 더 많이 잘 알지는 않습니다. 그저 ‘쉰 해 동안 사진을 찍은 경험이 있을’ 뿐입니다. 사진을 다섯 해쯤 찍은 분이 사진을 더 적게 알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섯 해 동안 사진을 찍은 경험이 있을’ 뿐이에요.


  대학교를 다녔기에 사진을 더 잘 알지 않습니다. 대학원을 다녔거나 유학을 다녔기에 사진을 더 깊거나 넓게 알지 않습니다. 그저 ‘대학교 사진’하고 ‘대학원 사진’하고 ‘유학 사진’을 마주하고 배웠을 뿐이지요. 그런 경험을 그동안 쌓았을 뿐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울 적에 ‘육아 강의’를 들어야 아이를 잘 낳거나 슬기롭게 키우지 않습니다. 모든 어버이는 저마다 다른 살림을 꾸리면서 다른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펴요. 이러한 얼거리처럼, 사진을 배워서 찍을 적에도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걸으면서 저마다 다른 눈길·눈빛·눈높이·눈매·눈짓·눈썰미에 따라서 사진을 받아들이고 찍습니다.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를 읽으면, “대학원에 들어와 찍은 사진들엔 힘이 들어가 있어요. 억지로 찍은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요. 힘이 들어간 사진은 ‘힘이 들어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억지로 찍은 사진은 ‘억지로 찍은’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담아 찍은 사진은 ‘사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해요. 웃고 노래하는 기쁨으로 찍은 사진은 ‘웃음·노래·기쁨’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나요.




사진을 하면 눈이 좋아진다 …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매일 출퇴근길에서 보던 나무, 꽃, 도로, 자동차, 건물인데 그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 벚꽃, 개나리, 철쭉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와 저녁에 지는 노을이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몰랐다. (120쪽)


사진을 하면서 얼굴이 두꺼워졌다. 욕을 먹어도 아무렇지가 않다. 욕을 하던 분들도 다음에 만나면 수그러든다. 사진을 하려면 우선 사람과 친해져야 하고 그들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끈기가 생긴 것이다. 염전은 다시 인간을 배우게 해 주었다. (145쪽)



  새롭게 배우는 길을 걷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사내(아버지) 자리에 서는 이들이 기저귀 갈기라든지 집안일을 잘 안 합니다만, 아이키우기나 집안일을 즐겁게 맞아들여서 새롭게 배우려 한다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동안 ‘새로움’에 눈뜰 수 있어요. 새로움에 눈을 뜨면, 집안일만 하는 분들, 이를테면 가정주부도 사진기를 손에 쥘 적에 ‘새로운 사진’을 찍어요.


  외국으로 나간다든지, 출사여행을 한다든지, 낯선 마을을 걷는다든지 해야 ‘새로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마음과 몸짓과 생각이 새로움으로 가득할 때에 비로소 ‘새로운 사진’을 찍어요. 마음과 몸짓과 생각이 새로움이 아닌 ‘낡은 버릇’이라면, 외국으로 나가거나 출사여행을 하거나 낯선 마을을 걷더라도 늘 똑같이 ‘낡은 버릇(똑같은 패턴)’대로 사진을 만들어 내고 말아요.


  그러니, 사진을 찍을 적에는 더 값진 장비가 있지 않아도 됩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는 렌즈를 골고루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는 대형필름이나 중형필름을 구태여 써야 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새로운 마음’이요 ‘새로운 눈길’이며 ‘새로운 생각’을 건사하거나 다스리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으려 하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렌즈 하나로도 얼마든지 사진을 잘 찍는 사진가가 있습니다. 낡고 작으며 값싼 사진기로도 얼마든지 사진을 즐겁게 찍는 사진가가 있어요. 사진은 마음으로 찍어서 마음에 새깁니다. 마음으로 먼저 찍지 않는다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먼저 새기지 않으면 ‘필름이나 메모리카드나 종이’에 새로운 숨결을 사진으로 새기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손주들 사진 찍어 주려고 사진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100일 사진은 직접 찍기로 했다. 간단한 조명을 설치하고 배경을 만들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217쪽)



  사진책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를 읽는 동안 ‘할아버지 사진가’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즐겁습니다. 박찬원 님은 할아버지 나이로 사진가 길을 걷겠다고 밝혔습니다. 모든 것을 가볍게 내려놓겠다고 하면서 사진을 배웁니다. 다만, 사진을 배우는 동안 아직 다 가벼이 내려놓지는 못한 탓에 ‘젊은(그렇지만 많이 젊다고는 할 수 없는) 교수’한테서 꾸지람을 듣기도 하는데, 이런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이면서 씩씩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죽기살기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사진을 배운다고 할까요.


  왜 그러한가 하면, 낡은 버릇을 ‘죽여야’ 새로운 몸짓이 ‘태어나’거든요. 사진을 새롭게 찍으려면 오래되어 낡은 틀을 스스로 ‘죽이’듯이 ‘깨서 부수어’야 해요.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박찬원 님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청바지를 장만하는 일’을 겪습니다. 흰머리를 ‘처음으로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흰머리를 까맣게 물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차려입고서, 흰머리를 그대로 나풀거리면서, 어깨에는 사진기를 걸고서 활짝 웃는 몸짓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길을 나섭니다.


  아마 이런 삶은 박찬원 님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 되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처음으로 느즈막하게 겪으면서 새로운 바람을 마셨으리라 느낍니다. 바야흐로 ‘남 눈치를 안 보는’ 몸짓이 된다고 할까요. 남 눈치가 아니라 ‘내 눈길을 생각하는’ 몸짓으로 거듭난다고 할까요.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가’를 따질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에 얹히는 빛과 그림과 그림자와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 눈부시게 피어나는가 하는 대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박찬원 님이 양복을 벗고 염색을 그만두면서 청바지와 운동화와 흰머리인 모습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면서, 시나브로 새로운 눈길로 씩씩하게 서는 사진길이 펼쳐집니다.



자기가 잘 찍었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크게 뽑아 걸어 놓으면 그것이 작품이다.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 일 년 동안 찍은 가족사진을 모아 탁상용 캘린더를 만들어도 좋다. 항상 흐뭇한 추억과 함께 할 수 있다. (153쪽)



  할아버지가 손주를 찍는 사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할아버지가 흰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골목을 걷고 소금밭을 걷고 숲을 걷고 시내를 걷고 시골길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은 얼마나 예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진감(사진 주제)은 남달라야 하지 않습니다. 남다른 것을 찾아내려 한다면 ‘남다른 것’은 되더라도 ‘새로운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늘 곁에 있는 가장 흔하고 수수한 것이어도 스스로 새로운 눈길이 될 적에 ‘새로운 사진’을 찍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진책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는 바로 이 대목을 즐겁게 건드려 줍니다.


  일흔 넘고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사진가로 거듭나려고 하는 몸짓은 ‘사진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버릇을 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거듭나서 신나게 새로운 삶·살림·사랑을 가꾸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뜻이지 싶습니다. ‘할아버지 사진가’가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사진과 사진책을 즐겁게 기다려 봅니다. 4349.1.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책 읽는 줄거움/사진비평)


(이 글에 넣은 사진은 박찬원 님한테서 받아서 올립니다. 사진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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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슬란 전기 4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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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3



‘종(노예)’이 아닌 ‘동무’가 되는 길

― 아르슬란 전기 4

 다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5500원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학산문화사,2015) 넷째 권에는 ‘아르슬란’이 노예제와 신분제를 더 깊이 느끼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전제군주라 할 사람을 죽였으나 노예들은 오히려 ‘주인님’을 죽였다면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거든요.


  왜 그러한가 하면, 종이 되어서 지내는 이들은 ‘시키는 일’만 하면 밥하고 잠자리를 마음껏 누립니다. 신분하고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종이 되더라도 ‘넉넉한 밥’하고 ‘느긋한 잠자리’라면 고맙습니다. 여기에다가 돈을 몇 푼 얹어 준다면 더욱 고맙지요. 게다가 전제군주 밑을 떠난다 한들 온누리는 온통 싸움터예요. 어디를 가더라도 목숨을 건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곳에서 종살이를 벗어나도 다른 곳에서 사로잡혀서 똑같이 종살이를 해야 하기 마련입니다.



“‘타인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라고 나르사스가 그랬지.” (34∼35쪽)


“나는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륜이나 나르사스를 버리고 내가 그대를 선택한들, 다음에는 그대를 버릴 날이 오지 않으리라 어찌 확신할 수 있나?” (49쪽)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에는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 싸움터가 나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죽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쉽게 죽고 죽입니다. 목숨을 건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냥 죽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면 칼부림이나 총부림은 드뭅니다. 그렇지만 회사나 공장을 다니면서 일삯(돈)을 벌지 못하면 목숨줄이 쉬 끊어진다고 할 만합니다. 집삯을 치르지 못하면 집에서 쫓겨나야 하지요. 밥값을 내지 못하면 배를 곯아야 해요. 아르슬란이라는 사람이 살던 지난날에는 전제군주가 있다면, 오늘날 사회에는 돈을 휘두르는 권력자가 있어요. 오롯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는다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미리 말씀드렸다 해도 전하께서 수긍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생각하였기에 일부러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75쪽)


“관대한 주인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 이만큼 편한 삶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명령만 따르면 집도 음식도 나오니까요. 5년 전의 저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77쪽)



  우리는 서로 동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믿고 아끼면서 보살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어깨를 겯고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살림을 짓는 동무로 지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싸움이나 전쟁이 아닌, 평화와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에서 아르슬란이 말하지만, ‘신분’을 따진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서로 동무가 되기 어렵습니다. 같은 신분이나 계급일 때에만 동무가 된다지만, 참말 같은 신분이나 계급일 때에 ‘동무 사이’로 지낼까요? 같은 계급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신분이란 무엇일까요? 서로 노예 신분이어야 동무로 지낼 만할까요? 서로 임금이나 신하쯤 되어야 동무로 지내는가요?



“정의란 태양이 아니라 별과도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전하. 별은 하늘에 수없이 많으며, 서로 빛을 상쇄하고 있지요.” (78쪽)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만약 내가 싫지 않다면 친구가 되어 줄 수 없겠느냐.” “저는 해방노예의 자식입니다. 친구라니, 전하와 저는 신분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신분을 따진다면 나는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어!” (182∼183쪽)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는 민주가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권력 꼭대기가 있기 때문이요, 대통령을 둘러싼 크고작은 숱한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건사하는 군대와 전쟁무기라고 하는 권력이 있어요.


  대통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동엽 님이 쓴 시에 나오는 ‘막걸리를 자전거 꽁무니에 매달고 시인한테 찾아가는 대통령’쯤이 있지 않고서야 민주나 평화란 까마득한 노릇입니다. 청와대에서만 사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는 민주나 평화란 아득한 노릇입니다.


  함께 밥을 먹을 때에 동무입니다.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살림일 때에 동무입니다. 모시는 사람도 다스리는 사람도 섬기는 사람도 거느리는 사람도 없이, 누구나 한손에 호미를 들고 한손에 부엌칼을 쥘 적에 비로소 평화와 평등과 민주가 자랄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9.1.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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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ey 2016-01-3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그리고 제 친구신청 좀 받아주세요.

숲노래 2016-01-31 07:23   좋아요 0 | URL
2권은 살짝 재미없었지만 3권 끝자락과 4권으로 접어드니
다시 재미가 살아났습니다 ^^;;

알라딘서재에서는
친구는
신청만 하시면 서로 친구가 되어요 ^^ 고맙습니다
 
나뭇잎 손님과 애벌레 미용사
이수애 글.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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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19



새봄에 새잎이 돋으니 걱정하지 마

― 나뭇잎 손님과 애벌레 미용사

 이수애 글·그림

 한울림어린이 펴냄, 2015.12.24. 12000원



  겨울에도 제법 포근한 고장에서 살기 앞서까지 ‘늘푸른나무’는 거의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소나무나 잣나무쯤은 겨울에도 푸른 잎을 매다는 줄 알았지만, 다른 나무는 생각해 보기 어려웠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겨울이 꽁꽁 얼어붙는 고장에서는 딱히 다른 늘푸른나무를 만나기 어려웠거든요.


  전남 고흥에서 살며 여러 가지 늘푸른나무를 만납니다. 맨 먼저 동백나무하고 후박나무를 만났고, 가시나무와 아왜나무를 만났어요. 유자나무를 만나고, 태산목 같은 나무도 만나고요. 이들 나무는 한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아요. 아니, 한겨울에도 잎을 푸르게 매단다고 해야 맞겠지요. 때때로 눈이 내리는 날씨가 찾아오면 이들 나무는 바르르 떨면서 눈송이를 잎에 얹는데, 햇볕이 나면서 눈이 녹으면 다시 기운을 내어 짙푸른 잎으로 바뀌어요.



“머리가 너무 둥글고 무거워요. 멋있고 화려한 양버즘나무 머리로 해 주세요.” “아하! 손님한테 잘 어울리겠네요.” 애벌레 미용사는 야금야금 나뭇잎을 갉아 대기 시작했어요. (6쪽)




  이수애 님이 빚은 그림책 《나뭇잎 손님과 애벌레 미용사》(한울림어린이,2015)를 읽으면서 나뭇잎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그림책은 ‘가을이 한껏 무르익은 어느 날 잎이 무척 커다랗게 자란’ 나뭇잎 손님이 숲속 머리집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잎사귀가 아주 커다랗게 자란 손님은 ‘너무 크다 싶은’ 머리(머리카락 구실을 하는 잎몸)를 좀 손질해 주기를 바랍니다. 숲속 머리집 일꾼인 애벌레는 나뭇잎 손님 잎몸을 야금야금 갉으면서 이모저모 예쁘게 가꾸어 준다고 해요.


  그런데 숲속 머리집에서 나뭇잎 머리를 손질해 주는 애벌레는 고단합니다. 나뭇잎 손님은 이도 저도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벌레 미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갉아서 잎몸을 줄이기’뿐인데, 잎몸은 자꾸자꾸 줄지만, 나뭇잎 손님으로서는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마음에 안 들어요.



애벌레 미용사는 한숨을 폭 내쉬었어요. 그러곤 다시 나뭇잎을 야금야금 갉아 대기 시작했지요. 머리는 밝은 노란색으로 물들이고요. (14쪽)



  애벌레 미용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망설입니다. 가슴을 졸이고, 어쩔 줄 모릅니다. 이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요. 애벌레 미용사는 나뭇잎 손님 머리를 알록달록 꾸며 주지요. 잎몸이 거의 다 사라졌지만 알록달록 새롭게 꾸민 모습을 본 나뭇잎 손님은 이를 마음에 들어 해요. 홀가분하면서 기쁜 몸짓으로 숲속 머리집을 나서지요.


  그렇지만 나뭇잎 손님한테는 또 괴로운 일이 닥칩니다. 아마 겨울을 재촉하는 비일 듯한데, 가을비가 쏟아지면서 ‘애써 손질한 머리’가 모두 망가져요. 나뭇잎 손님은 그저 울음을 터뜨릴밖에 없고, 울음을 터뜨리다가 졸음이 쏟아져서 얼른 나무로 돌아가서 겨울잠을 자기로 합니다. 깊고 깊은 겨울잠을, 고요하고 고요한 겨울잠을, 포근하면서 넉넉한 겨울잠을 달콤하게 자기로 해요.




나뭇잎 손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섰어요. 그런데 갑자기 톡톡톡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졌어요. “으악, 내 머리가 다 망가지겠어!” (26∼27쪽)



  《나뭇잎 손님과 애벌레 미용사》는 그림책이니까 나뭇잎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그리고, 애벌레가 미용사 구실을 하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우리 삶으로 돌아본다면, 나뭇잎은 한 해나 여러 해를 살다가 져요. 한 해만 사는 나뭇잎이라면 겨우내 흙으로 돌아갈 테고, 여러 해를 사는 나뭇잎이라면 겨울잠을 잔다고도 할 만하지요.


  그러면 늘푸른나무는 어떠할까요? 늘푸른나무는 잎을 언제 떨굴까요?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에서 자라는 늘푸른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면, 늘푸른나무는 겨울을 뺀 봄이랑 여름이랑 가을 언제나 잎을 떨굽니다. 딱히 어느 철에 더 많이 떨군다고 하기보다는 세 철 내내 조금씩 잎을 떨구면서 새 잎으로 바꾸어요. 다른 철보다 늦봄하고 첫여름에 잎을 많이 떨군다고도 할 만해요.



나뭇잎 손님은 너무너무 슬펐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지요. 나뭇잎 손님은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요. 따뜻한 바람이 불 무렵, 나뭇잎 손님은 긴 잠에서 깨어났어요. (30∼32쪽)




  추운 겨울은 추위로 모두 얼어붙게 합니다. 추위가 닥치면 누구나 오들오들 떨면서 몸을 웅크립니다. 풀은 겨우내 거의 모두 시들어 죽고, 나무도 겨우내 잔뜩 옹크려요. 다만, 나무는 겨우내 몸을 옹크려도 씩씩하게 겨울눈을 내놓습니다. 가장 추운 겨울에 나무는 새롭게 꿈을 꾸면서 겨울눈을 두 가지 내놓지요. 하나는 꽃눈이고 하나는 잎눈이에요. 봄을 기다리면서 터뜨릴 새 꽃송이하고 잎사귀는 겨울 바람을 마시면서 고요히 꿈을 꾸듯이 천천히 자랍니다.


  그림책 《나뭇잎 손님과 애벌레 미용사》는 겨우내 꿈을 꾸면서 새봄에 새롭게 깨어나는 나뭇잎을 가만히 보여줍니다. 이 그림책은 숲속 머리집에서 온갖 예쁜 모습으로 잎몸을 꾸미는 줄거리를 길게 다루지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자리에서 ‘새봄 새잎’을 상냥하게 보여주어요.


  걱정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까요. 커다란 잎몸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들 걱정할 까닭이 없다는 이야기를 속삭인다고 할까요. 새봄에 새롭게 돋으면서 그야말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테니까요. 그리고, 숲속 머리집 일꾼인 애벌레도 나뭇잎처럼 겨울잠을 잘 테지요. 겨울 들머리까지 힘껏 일하며 잎을 잔뜩 갉아먹은 애벌레는 이제 더는 잎을 갉을 수 없도록 자라서 기나긴 겨울잠을 자겠지요. 그러고는 새봄에 새잎이 돋을 즈음, 어여쁜 나비로 눈부시게 태어나서 나뭇잎한테 찾아갈 테고요. 나뭇잎한테 인사하고 함께 놀다가 어느 날 나뭇잎 뒤쪽에 앙증맞도록 작은 알을 깔 테고, 이 알은 다시 애벌레로 자라서 ‘숲속 나뭇잎 머리(잎몸) 손질’을 해 주는 몫을 맡을 테지요.


  어른인 나도, 어여쁜 아이들도, 날마다 즐겁고 고요히 밤잠을 자면서 새롭게 꿈을 꿉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와요. 하루를 기쁘게 누렸으니 즐겁게 잡니다. 아침마다 기지개를 한껏 켜면서 새롭게 노래를 부릅니다. 4349.1.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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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 (양장) - 일상과 그 너머에 대한 인문적 성찰
류대영 지음 / 생각비행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229



길을 잃은 아버지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책

―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

 류대영 글

 생각비행 펴냄, 2016.1.15. 2만 원



  한동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는다는 류대영 님은 이녁이 쓴 책을 이녁 아이들이 한 권도 안 읽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학자로서 쓴 글이고 책이니 이녁 아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 할 테지요.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나 딱히 없을 테니까요. 류대영 님이 그동안 쓴 글하고 책이라면 이녁 스스로 걸어가고 싶은 학문길을 살피면서 빚은 열매라고 느낍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생각비행,2016)라는 책은 누구보다 류대영 님네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쓴 글을 묶었다고 합니다. 학문도 논문도 아닌 ‘우리 아이들이 읽고서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만 따로 써서 이 책을 엮었다고 해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으면서 살았으며 이제껏 사람과 사회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제법 두툼한 책으로 여미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주고 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먹이고, 업어 주고,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사랑은 지금도 나를 살리고 있다. (24쪽)


학교 앞에 난 고속도로는 멀리서 학교로 오가는 일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그 길은 주변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29쪽)



  글이나 책을 쓰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글이나 책을 남길 만합니다. 땅을 지어서 흙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땅을 물려주면서 흙을 돌보는 손길을 물려줄 만합니다. 살림을 가꾸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살림을 가꾸는 숨결을 물려줄 만해요. 자동차를 좋아하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자동차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물려줄 테고, 바다를 좋아하는 어버이라면 아이하고 바다로 자주 나들이를 가면서 바다가 베푸는 넋을 물려줄 테지요.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를 읽으면, 류대영 님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가 흐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릅니다.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회가 캄캄하던 무렵 어리거나 젊은 류대영 님이 겪어야 한 이야기가 흐르고, 캄캄해서 앞이 보일 듯 말 듯하던 무렵에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등화관제’ 이야기를 읽다가, 나도 어릴 적에 으레 겪은 등화관제 훈련이 떠오릅니다. 등화관제 훈련을 시킬 적마다 민방위대원인지 새마을대원인지 온 마을을 돌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식구가 사는 집은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전쟁이 터지면 항구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목을 우리 아파트를 허물어서 막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길가에는 아파트가 남달리 많았는데, 이 아파트는 모두 ‘전쟁 대비 목적’으로 그곳에 세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유신시대 등화관제 때문에) 가로등을 포함해서 땅에서 모든 불빛이 사라지자, 놀랍게도 하늘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빛이 나타났다. 거대한 별바다였다. (56쪽)


나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로부터 왔다. 물질적으로 볼 때 내 몸은 우주의 구성성분과 같다. (66쪽)


영어 사전에 걸레처럼 되어서 책갈피를 넘기기도 힘들게 되었을 때쯤, 나는 영문학이 무엇인지 조그씩 그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나마 문학의 길을 꿈꾸며 시를 습작하기도 했다. (78쪽)



  신학을 배웠고, 신학을 가르치는 류대영 님이라 하는데,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라는 책은 종교를 거의 안 다룹니다. 하기는, 류대영 님이 걸어온 길은 ‘학문 닦기’입니다. ‘종교 섬기기’라고 하는 길이 아니니까요.


  엄청난 별바다를 보던 어릴 적 일을 그립니다. 이윽고 ‘우주와 내가 이어진 고리’를 헤아립니다. 한국말이 아닌 영어라는 새로운 말을 익히면서 맛본 ‘다른 나라 문학’에서 새로운 삶과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손전화 없이 살다가, 손전화가 없으면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 얼거리에서 ‘네 식구가 함께 쓰는 전화기’를 마련하고, 아이들이 커서 따로 지낼 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전화기’로 이어간다고 합니다.


  포항에서 커다란 공장이 설 적에 숲을 어떻게 밀어서 없애는가 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숲길을 거닐거나 멧자락을 오르내리면서 느낀 생각을 들려줍니다.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동무가 일찍 숨을 거둔 일을 겪으면서 사람과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새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하다면 수수하고, 투박하다면 투박한 이야기입니다. 류대영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수하고 투박한 이야기가 여러모로 맛깔스럽습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 류대영 님네 아이들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책을 재미있게 읽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어느 지식을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삶을 치르면서 어느 한 사람이 차근차근 거듭나거나 자라온 발자국을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창 젊은 발자국을 내딛는 류대영 님네 아이들은 이 책을 곁에 두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얻을 만하리라 봅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에 있는 책꽂이 길이를 모두 합치면 약 110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서울 시청 앞에서 천안 사거리까지의 도로 길이가 약 100킬로미터라고 하니. (104쪽)


상상력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낳는다. 상상력은 위대한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키고, 초월을 위한 종교와 사상을 만들며,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어낸다. (135쪽)



  미국에 있는 파이어스톤 도서관은 무척 크다고 합니다. 그곳에 깃들어 책이나 자료를 살피다 보면 흔히 길을 잃는다고 해요. 파이어스톤 도서관에 들어갈 적에는 ‘도서관 지도’를 꼭 손에 쥐고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도서관 지도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찾아다녀도 때때로 ‘어디로 돌아 나와야 하는가’를 잃는다고 합니다.


  도서관이 워낙 커서 모든 곳에 불을 밝히지 않는다지요. 사람들이 저마다 책을 살펴서 보는 자리에서 스스로 불을 켜도록 한대요. 그런데, 미국에 있는 의회도서관은 이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책이라는 모습으로 이룬 열매를 알뜰히 여겨서 건사한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이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새롭게 서려고 하는 길에 스스로 배우려고 하는 책을 넉넉히 찾을 만하겠지요.


  류대영 님은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자꾸 길을 잃으면서 학문을 닦습니다. 학문을 닦으면서 스스로 거듭납니다. 길을 잃고 또 잃지만 씩씩하게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지도에 없는 길을 느껴서 찾고, 지도와는 다른 도서관 얼거리를 느끼면서 ‘책하고는 다른 삶·사회·사람 얼거리’를 배웁니다. 사람이 이룬 문명과 문화가 어마어마하다 싶은 도서관에 가득가득 모이지만, 사람이 이룬 모든 문명과 문화가 이곳에 다 모이지는 않는다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신라 옛 유적이 있는 곳을 천천히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남은 문화재(유물)’는 거의 모두 권력자가 쓰던 것이라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살며 쓰던 살림살이는 오늘날까지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는 대목을 돌아보지요.



한국은 학자가 100권의 책을 내더라도 논문을 따로 쓰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상한 나라다. (207쪽)


나는 죽비로 머리통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 이발사는 세계적인 대기업을 다니며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순전히 봉사를 위해 이발 기술을 배웠고, 지금까지 이발 봉사를 하고 있었다. (249쪽)


농협이라는 조직은 말 그대로 농촌의 협동조합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하여 대형 마투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 농협이라면 깨끗하고 편리한 건물을 지어 놓고, 거기에 농민들이 와서 자기 물건을 팔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다. (291쪽)



  어느 모로 본다면, 길을 잃기에 길을 새로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또 어버이로서, 또 학자로서, 또 곁님(남편)으로서 빈틈없는 모습으로 살아온 나날이 아니라, 이렇게 부딪히고 저렇게 넘어지면서 늘 새롭게 배우려고 한 삶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류대영 님 나름대로 책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버이 한 사람은 이제까지 살며 이렇게 삶을 배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희 삶을 새롭게 부딪히고 부대끼고 어우러지면서 기쁘게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물려주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나도 두 아이 아버지로서 늘 새롭게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새롭게 거듭나고 배웁니다. 늘 길을 잃기에 늘 길을 새로 찾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꾸자꾸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걸음마를 익히듯이,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는 곧잘 어긋나기도 하고 어리숙하기도 한 나날을 보내면서 찬찬히 슬기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으로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르칠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이거나 어버이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어른이나 어버이로 살면서 아이들하고 사랑을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이하고 살며 ‘길을 잃는’ 수수한 어버이한테 길동무가 될 《파이어스톤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가 되리라 하고 느낍니다. 길을 잃는 수수한 어버이 누구나 ‘우리가 걸어온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한테 스스로’ 기쁘게 들려줄 수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리라 하고도 느낍니다. 4349.1.2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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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6-01-2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리뷰여요ㅎㅎ

숲노래 2016-01-29 13:2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따뜻한 하루 누리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