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20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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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8



동무를 사귀려면 마음을 상냥하게 열면 돼

― 경계의 린네 20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25. 4500원



  타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6) 스무째 권을 즐겁게 읽습니다. 어느덧 스무째 권에 이른 《경계의 린네》를 읽으니, 이 만화책 주인공인 ‘로쿠도 린네’하고 ‘마미야 사쿠라’ 사이에 허물이 하나 사라지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로쿠도와 마미야, 또는 린네와 사쿠라는 오랫동안 ‘마음이 맞는 사이’로 가까이 지냈지만 둘은 ‘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제 스무째 권에 이르러 두 사람은 ‘봄소풍 같은 모임’에 함께 가는데, 마미야 사쿠라는 언제나처럼 로쿠도 린네하고 함께 먹을 도시락을 챙깁니다. 로쿠도 린네는 너무 가난한 살림이라 도시락은 엄두도 내지 못하기에, 늘 살가이 챙기고 마음을 써 주는 동무가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도시락도 도시락이지만, ‘마음을 쓰는 동무’가 반가우면서 고마워요. 무엇보다도 마미야 사쿠라라는 동무는 ‘맨눈’으로도 ‘떠도는 넋’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떠도는 넋’을 맨눈으로 보면서도 놀라지 않아요.



몇 년에 한 번 사신 청년단과 흑묘들은 윤회의 바퀴 청소에 동원된다. “어쩐지 무섭네요.” “그래, 이 작업은, 위험한 데다 일당도 없어.” (7쪽)


“로쿠도 린네 이놈!” “말도 없이 혼자만 한몫 챙기게 둘 수야 없지!” “흥, 교화하게 결계 테이프 같은 거나 붙여놓고!” “윽, 어떻게 돌파했지?” “2천 엔짜리 결계 해제약을 사용했지!” “아니, 그렇게 비싼 물건을?” (147∼148쪽)



  맨눈으로 떠도는 넋을 볼 줄 아는 마미야 사쿠라는 늘 로쿠도 린네 곁에 있어 주면서 여러모로 일을 거듭니다. ‘여느 사람’인 마미야 사쿠라는 ‘사신’ 노릇을 하는 로쿠도 린네하고는 다른 세계(차원)에서 살지만, 그래서 ‘사신이 낫을 휘둘러서 떠도는 넋을 성불해 주고 저승으로 보내는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따사로운 마음결로 둘레를 맑고 밝게 어루만지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바로 이 마음이 가장 너르면서 큰 마음이지 싶습니다. 이런 솜씨가 있거나 저런 재주가 있는 몸짓도 훌륭하다고 할 텐데, ‘훌륭한 솜씨나 재주’는 없더라도 동무나 이웃을 따사로운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은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껴요. 다시 말해서, 만화책 《경계의 린네》는 ‘두 가지 세계(차원)’에서 다른 삶을 타고나며 사는 두 사람이 ‘두 가지 실타래’를 엮는 줄거리를 들려준다고 할 만합니다.


  먼저 ‘린네’라는 아이는 ‘저승 세계(차원)’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이승 세계(차원)’에서 목숨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떠도는 넋’이 되지 않고 곱게 저승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이끄는 일을 합니다. ‘사쿠라’라는 아이는 ‘이승 세계’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저승 세계’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승 세계 사람들한테는 없는 ‘따스한 마음’을 늘 보여주면서 가르치거나 나누는 노릇을 한다고 할 만해요.



“서, 성가시지 않아?” “괜찮아. 있는 힘껏 여자친구 연기를 할 테니까.” (46쪽)


“마미야 사쿠라는, 천사처럼 상냥해.” ‘그렇구나. 거짓말이라도 기쁘네.’ “그 여자가 그렇게 상냥해?” “그럼. 먹을 것도 잘 주고, 가끔 돈도 꿔 주거든.” (70∼71쪽)



  상냥한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버이가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마음도 ‘상냥함’이리라 느낍니다. 아이가 어버이를 믿고 따르면서 날마다 새롭게 기쁨을 배우는 몸짓도 늘 ‘상냥함’이리라 느껴요. 마음이 맞는 두 동무가 서로 어깨를 겯고 노래하는 삶도 ‘상냥함’이 바탕이 될 테지요. 이웃이 서로 사촌처럼 지낸다고 하는 옛말처럼, 두 이웃이 오붓하게 어울리는 살림살이도 언제나 ‘상냥함’이 흐르는 모습이겠지요.


  내가 어버이 노릇을 하자면 나는 스스로 상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맑고 밝게 자라려면 어버이인 나는 아이들한테 상냥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동무를 사귀려 한다면 스스로 기쁘게 마음을 열면서 상냥하게 말을 걸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웃하고 함께 일을 하거나 두레를 이루자면 늘 상냥한 마음결로 일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구나. 로쿠도는 결국, 나보다 부적을 택한 거야. 뭘까? 이, 언짢은 기분은.’ (109쪽)


“이제 따라오지 마. 그 도시락도 어차피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은 못 듣겠어!” “필요없다고?” “필요해! 같이 먹고 싶어!” (126∼127쪽)



  만화책 《경계의 린네》 스무째 권에서 로쿠도 린네는 마미야 사쿠라가 싸서 준 도시락 가방을 함께 풀어서 함께 먹자고 말합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돗자리를 펴고 함께 앉습니다. 이때에 두 사람 둘레에 다른 동무랑 이웃이 찾아와서 함께 둘러앉아요. 마미야 사쿠라는 도시락을 쌀 적에 언제나 ‘두 사람 몫’이 아니라 ‘여러 사람 몫’을 싸지요. 마치 로쿠도 린네 둘레에 있는 다른 동무도 함께 배고픔을 달래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줄 안다는 듯이.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을 쓸 줄 아는 몸짓이 바로 ‘상냥함’이라 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이 상냥함은 ‘솜씨 좋은 저승 세계 사신’한테도 없는 마음이요, 이 상냥함은 ‘돈이 많거나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는 이승 세계 사람들’한테도 없는 마음이에요. 상냥한 숨결, 따스한 마음, 너른 생각, 기쁜 사랑,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만화책이 《경계의 린네》라고 하겠네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434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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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 돈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3
이시백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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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을 손질해서 새롭게 띄웁니다.


..


푸른책과 함께 살기 91


돈은 그저 돈이에요
―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이시백·제윤경·박성준·박권일·강신주·송승훈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2.3.24. 12000원


  책방에서는 책을 팔기도 하면서, 책에 담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기 마련입니다. 책방은 예나 이제나 책만 팔지 않습니다. 책과 얽힌 사람들 삶을 함께 보여줍니다. 커다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는 이들 커다란 책방과 얽힌 사람들 삶을 보여줍니다. 조그마한 마을에 깃든 조그마한 책방에서는 이들 조그마한 책방과 얽힌 사람들 삶을 보여줍니다.

  어느 책방이든 삶을 보여줍니다. 어느 책방에서든 삶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큰책방을 다니면서 큰책방 삶과 익숙해지고, 큰책방 삶을 시나브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작은책방을 다닐 때에는 작은책방 삶과 가까워지며, 작은책방 삶을 천천히 맞아들입니다.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달동네 이웃들 삶을 내 살결로 받아들입니다.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 이웃들 삶을 내 숨결로 맞아들여요.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찾는 삶이요, 누구나 스스로 일구는 삶입니다. 어떤 이는 이쪽 자리에 서고, 어떤 이는 저쪽 자리에 섭니다. 저마다 이웃하는 삶이 다르기에 저마다 생각하는 삶이 다릅니다. 저마다 누리는 삶이 다른 만큼, 저마다 깨닫거나 알아채는 삶이 달라요.


.. 우리 나라에서 농민들이 1년 내내 열심히 농사지어서 받는 돈이 쌀 한 가마니당 20만 원이에요. 이에 비해 앞으로 수입될 미국 쌀의 예상 가격은 10만 원이 채 안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마트에 두 개의 쌀이 동시에 진열되어 있을 때 어느 쌀을 사 먹겠습니까 ..  (25쪽)


  오늘날 학교에서는 ‘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학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학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마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어린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키우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낳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집안일’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닌 적 있다면 하나하나 느끼리라 보는데, 학교에서는 어느 하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교과서를 읽히고 시험을 치르며 점수를 따집니다. 학교에서는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른 삶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짝꿍을 살가이 품에 안거나 어깨동무하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착한 삶하고 멀어집니다. 학교를 많이 다닐수록 참다운 사랑하고 등집니다. 학교를 자꾸 다닐수록 고운 꿈하고 등돌립니다.


.. 우리는 점점 돈에 대해 헷갈리는 세상을 살다 보니까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 돈 많은 친구가 당연히 부럽죠 … 처음엔 제 아이도 그랬습니다. 누구는 얼마 받고 누구는 어떤 옷을 입고……. 그러다 용돈을 스스로 결정해서 쓰면서부터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제 아이는 나이키니 뭐니 하는 브랜드를 잘 몰라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냥 자기 필요에 따라 돈을 쓰면서 그 자체에 만족했거든요. 자기는 원하는 걸 계획을 세워서 가지니까 즐거운 거예요 … 원래 돈을 벌려는 이유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잖아요. 그렇다면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번 돈은 우리가 가장 행복해지는 방식으로 잘 쓰면 되겠죠 ..  (57, 61, 69쪽)


  학교에서는 흙이나 물이나 바람이나 햇볕이나 목숨을 가르치지도 않지만, 이 모두를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지만, 스스로 ‘밥이 되는 곡식이나 열매’를 거둘 줄 모르기도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스스로 옷을 지을 줄 모르지만, 스스로 ‘옷으로 지을 감’을 어떻게 얻거나 마련해야 하는가를 모르기도 합니다.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에서조차 ‘삶·사랑·꿈’ 어느 한 가지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쯤 되면 남녀가 끼리끼리 어울려 살섞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만, 살을 섞으려 할 뿐, 막상 사랑을 꽃피우거나 나누지 못합니다. 이제껏 겪거나 배우거나 받거나 나누지 못하던 사랑을 하루아침에 ‘열아홉 스물’이 됐대서 즐거이 누리지는 못하니까요.

  학교는 무언가 배우거나 가르치는 곳이라 하지만, 나로서는 학교에서는 어느 하나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좋을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좋을까요. 아이들은 맨 먼저 무엇을 배워야 좋을까요. 아이들한테 맨 먼저 무엇을 가르쳐야 좋을까요.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아이들은 무엇보다 ‘삶’을 배우고 ‘사랑’을 익히며 ‘꿈’을 키우는 길을 살펴야 하리라 느낍니다. 삶을 가르칠 때에 교사요, 사랑을 물려줄 때에 어버이가 되며, 꿈을 살피도록 이끌 때에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일’이든 ‘돈’이든 ‘몸’이든 무엇이든 이야기할 틀을 마련한다고 느낍니다.


.. 전쟁을 통해 ‘전쟁 상인’들이 버는 돈은 어디서 올까요? 자기 돈으로 전쟁을 할까요?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세금에서 나옵니다 … 우리가 대학에 가는 이유는 나중에 졸업해서 자기 노동력을 비싸게 팔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하면, 더 나은 조건 즉, 월급 더 받으려고 대학을 갑니다 … 서울대학교에 갔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 되었다고 좋은 상품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얘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95, 162, 171쪽)


  길담서원 청소년 인문학교실 셋째 권으로 나온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인문학책방이라 하는 길담서원에서 청소년과 함께 나누는 인문학교실을 연다고 합니다. 서울 아이들은 참 좋겠구나 싶고, 서울 아이들은 이만 한 책쉼터라도 없으면 안 되겠구나 싶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싸인 서울인 만큼, 서울 푸름이들이 푸른 넋과 꿈과 사랑을 오롯이 건사하자면, 어디에서든 숨통을 틀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더 빛나는 삶길을 이야기할 수 있든 없든, 아이들이 참답게 생각하고 스스로 슬기를 빛내는 마당이 있어야 합니다.

  길담서원 청소년 인문학교실 이야기가 첫째로 ‘일’이었고, 둘째로 ‘몸’이었으며, 셋째로 ‘돈’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도시 삶터에서 먼저 눈길이 갈 만한 이야기대로 다루는구나 싶습니다.

  문득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가 일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몸을 모르면 어떤 삶이 될까요? 돈을 모르면 어떤 살림이 될까요? 일이란 무엇이고, 몸이란 무엇이며, 돈이란 무엇일까요?

  기쁨을 찾는 일을 만나는 푸름이인가요? 사랑을 배우는 몸을 다스리는 푸름이인가요? 꿈을 가꾸는 돈을 마주하는 푸름이인가요? 우리 어른들은 푸름이한테 일과 몸과 돈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보여주는가요?


.. ‘로컬 푸드’라는 말 들어 보셨죠. 그렇게 되면 지역 경제도 살리면서 운반에 따르는 에너지 소비량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착한 기업’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아예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거죠. 천규석 선생이나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 같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소비 자체를 줄이지 않고서는 이 악순환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이죠 ..  (138쪽)


  돈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들한테 돈이란 무엇일까요. 어른들한테 돈이란 무엇일까요.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는 아이들한테 몹시 크게 다가올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아이들로서는 무척 궁금하게 여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무엇을 이야기거리로 삼든 삶과 사랑과 꿈을 찬찬히 들려줄 수 있다면 좋은 노릇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는 푸른 아이들 스스로 돈이 무엇이라고 느끼도록 돕는 이야기마당이면서 이야기책이 될까요.

  시골 논밭에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얻는 어른이라면, 이렇게 시골 논밭에서 땀흘려 얻는 먹을거리가 얼마나 즐겁고 좋은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하면 기쁘리라 생각해요.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쌀값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지만, 이보다는 ‘내 밥을 내가 마련하는 즐거움’을 돈으로 어떻게 따질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면 훨씬 기쁘리라 생각해요.

  전쟁 장사꾼이 죽음을 사고파는 일은 ‘군대’라는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요. 전쟁 장사꾼 몇몇만 나쁜 놈이 되지 않아요. 전쟁 장사꾼과 정치 권력자가 만든 군대라는 틀에 들어가 ‘나라사랑(애국)’을 한다고 외치는 젊은이가 많아요. 이들 젊은이 목소리는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를까요. 이 대목을 짚으면서 이 나라 푸름이가 몇 해 뒤 맞딱뜨려야 할 ‘군 입대’ 이야기를 다룰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리라 생각해요. ‘나라사랑’을 돈으로 따진다면, 군대와 무기와 전쟁을 돈으로 따진다면, 삶을 북돋우는 복지나 문화를 돈으로 따진다면, 아이들 스스로 아끼며 사랑할 나날을 돈으로 따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대목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아주 좋으리라 생각해요.

  청소년 인문학교실은 좋은 이야기마당이라고 느껴요. 학교에서는 인문학교실이든 이야기마당이든 아예 없잖아요. 학교에서 삶을 이야기하거나 사회를 돌아보는 일이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애써 마련한 인문학교실이라 한다면 더 단단히 조이고 더 슬기롭게 가다듬으면 기쁘겠어요. 지식을 물려주거나 지식을 굳히는 인문학교실이 되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인문학교실 얼거리로 거듭나면 반갑겠어요.

  아이한테든 어른한테든 돈이란 그저 돈입니다. 돈은 삶이 아니고, 돈은 사랑이 아니며, 돈은 모두가 되지 않을 뿐더러, 돈은 꿈이나 일이나 빛이 아니에요. 돈은 오직 돈입니다. 삶이기에 삶이고, 사랑이기에 사랑이며, 꿈이기에 꿈이에요. 4345.3.20.불/434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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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Box upon the Sea 바다로 떠나는 상자속에서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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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7



삶이라는 바다로 헤엄치는 ‘이야기 사진’

―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글

 박태희 옮김

 안목 펴냄, 2015.12.1. 7만 원

 http://blog.naver.com/anmocin



  겨울이 차츰 저뭅니다. 사흘거리로 춥다가 포근한 볕이 드리운다는 날씨는 바야흐로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되었습니다. 이제는 한 번 추위기 닥치면 한 달 내내 꽁꽁 얼어붙거나 달포 즈음 싱싱 찬바람이 부는 겨울입니다. 춥다가도 포근해져서 몸을 녹이던 옛날 겨울은 자취를 감추어요. 온도로 친다면 요즈음 겨울은 옛날에 댈 만하지 않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사흘 동안 꽁꽁 얼어도 나흘 동안 포근한 볕이 흐르기에 이럭저럭 견딜 만했지요. 오늘날에는 온도가 옛날보다 낮지 않더라도 포근한 볕이 좀처럼 들지 않으면서 꽁꽁 얼어붙기만 하니 여러모로 고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얼어붙는 날씨여도 아이들은 마당에서 개구지게 놉니다. 먼 옛날에도 아이들은 이 겨울에 코를 훌쩍이며 놀았겠지요. 오늘날에는 폭신한 장갑이나 옷이라도 있다지만, 옛날에는 장갑도 변변하게 없이 추운 겨울에 연을 날리거나 얼음을 지치면서 놀았어요. 게다가 얼음장 같은 물에 아기 기저귀를 빨기까지 했어요.


  노는 아이들은 지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놀이라서 그렇지요. 놀이가 아니라 ‘시험 과목’이라거나 ‘학과 공부’라면 한겨울에도 마당에서 손발이 얼면서 놀지 않아요. 놀이를 즐기기 때문에 손발이 얼어도 재미있고, 웃음이 나면서, 기쁘게 뛰거나 달립니다. 놀이를 하기에 지칠 일이 없고 고단할 일이 없어요. 놀이를 하면서 배고픔까지 몽땅 잊어요.





시장 한 구석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장소가 있었다. 허리 높이에 대략 가로 20센티, 세로 60센티 정도의 불판이 몇 군데 있었고 불판을 에워싼 남자들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먹고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 마시고 있었다. 한 남자는 불판에 구울 고기를 썰고 있었다. 고기와 술이 전부였다. 불가사의하게도 엄숙한 기운이 에워싸고 있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일군 사진하고 글을 엮은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안목,2015)를 읽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사진하고 글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다로 떠나는 상자”에서 길어올립니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는 배일 수 있고, 말 그대로 상자일 수 있으며, 우리 몸일 수 있습니다. 상자가 떠나는 곳은 ‘바다’인데, 이 바다는 말 그대로 물결이 치는 바다일 수 있고, 마을일 수 있으며, 우리 보금자리일 수 있어요. 아니면, 너른 우주나 숲일 수 있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이녁 사진에 ‘장치’를 걸지 않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이녁이 발을 딛는 이 땅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장치가 없이 사진을 찍어요. 바라본 대로 사진을 찍고, 마주한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사람을 마주하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살림을 짓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사랑을 일구는 대로 사진을 찍어요.


  오늘날에는 수많은 장치를 잔뜩 집어넣은 사진이 유행이라 할 만합니다. 이렇게 멋을 부린다거나 저렇게 솜씨를 부리는 사진이 ‘현대 사진 흐름’이라 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필립 퍼키스 님은 ‘현대 사진 흐름’이라는 물결에 올라타지 않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언제나 ‘필립 퍼키스라는 사람이 짓는 삶·살림·사랑’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난 그들을 자주 보러 간다. 때로 나의 상태가 열려 있고 행운이 내 곁에 머물 때면, 저 루앙들은 인간의 표상도 아니고 인간 자체도 아니며 둘 다거나 아무도 아닌 비존재가 된다. 그들은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



  나는 설날 언저리에 날마다 이불을 빨래합니다. 올해 설날에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마실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찻삯이 없어서 우리 시골집에 고요히 머물기로 했습니다. 굳이 설이라고 하는 때가 아니어도 언제나 스스럼없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찻삯을 마련하는 대로 느긋하게 마실을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긴 설 연휴에 날마다 이불을 한두 채씩 빨래하기로 했어요. 마침 올해 설을 둘러싸고 전남 고흥은 볕이 무척 고우면서 포근하고, 바람도 알맞습니다.


  아침 일찍 이불을 빨아서 마당에 널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마당으로 따라나오다가는 뒤꼍으로 올라갑니다. 뒤꼍에서 아침부터 낮을 지나 저녁해가 질 무렵까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됩니다. 손이며 낯이며 발이며 옷이며 흙을 잔뜩 묻히면서 흙놀이를 해요. 이리하여 저녁이면 아이들 옷을 몽땅 벗기면서 씻기고, 이 옷가지는 이튿날 이불하고 함께 빨래를 하지요.


  틈틈이 이불하고 옷가지를 뒤집어서 햇볕을 골고루 품도록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 놀이를 살그마니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한두 장씩 찍습니다. 아이들은 나한테 모델이 되려고 겨울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한테 사진에 찍히려고 마당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 나름대로 하루를 새롭게 누리려는 뜻으로 흙을 만지면서 새로운 꿈을 그립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작품’을 모은다거나 ‘예술’을 하지 않으며 ‘창작 행위’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 몸짓을 기쁨으로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다 같이 새롭게 누리는 이야기가 샘솟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로다는 뉴웍의 학교 도서관장으로 일했고 루는 필라델피아에서 회계일을 했다. 60대 중반이 되자 함께 살기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근사한 결혼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난 일 년에 한두 번 그들과 만났고 늘 함게 있는 시간을 즐겼다. 로다는 다소 짓궂었고 루는 늘 수많은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곤 했다.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사진으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모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 곳은 ‘모델이 될 만한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사진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글이 몇 줄씩 깃듭니다. 사진도 글도 ‘처음부터 뚜렷하게 자리가 잡혀서 어우러지는 얼거리’는 아닙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필립 퍼키스 님이 이녁 스스로 삶을 마주하는 마음결 그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을 뿐입니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다로 나가는 상자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다로 나들이하는 상자 같은 이야기요, 바다로 헤엄치는 상자 같은 이야기예요.


  그러고 보면, 어버이는 아이 앞에서 짐짓 꾸미면서 웃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뻐서 웃을 뿐이에요. 아이들은 어버이 앞에서 애써 웃음을 억지로 지어야 하지 않아요. 그저 즐거워서 웃을 뿐이지요.


  사진은 언제 찍을까요? 아주 놀라운 모습이 코앞에서 스쳐 지나가기에 ‘한때(찰나)’를 놓치지 않고 ‘남기려(기록)’는 뜻에서 사진을 찍을까요? 이처럼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찰나를 기록하는 예술’이 아니라 ‘이야기를 짓는 손길로 나누는 삶’을 ‘사랑스러운 눈빛을 반짝이면서 노래하는 마음결’이 되면서 한 장 두 장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어느 모습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어느 몸짓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다큐멘터리가 되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예술이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창조나 창작이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남이 안 찍은 소재나 주제를 찾아나서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남다르거나 돋보이는구나 싶은 어떤 모습을 담아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 그대로일 때에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 몸은 기능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듣질 않았다. 난 표류하고 있었고 무력했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완벽하고 안전하게 살아 있었다. 단순 그 자체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혓바닥에 올려진 얼음, 주변을 둘러보기 ; 난 기계 안에 있었다 : 빛, 벨소리,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 존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창문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저 한 형태로서의 삶이 있을 뿐.



  겨울에는 빨래를 일찍 걷습니다. 이를테면, 십이월에는 세 시 오십 분 즈음이면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네 시를 넘어가면 ‘잘 마른 옷가지’가 다시 눅눅해지거나 얼어붙습니다. 일월에는 세 시 즈음이면 얼른 빨래를 걷습니다. 한겨울인 일월에는 네 시에 가까워도 옷가지가 눅눅해지거나 얼어붙으려 합니다. 이월에는 네 시를 살짝 넘어도 괜찮습니다. 봄이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빨래는 조금 더 오래 해바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진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살피면서 찍는데, 조리개값이나 빛결이 아니라 ‘빨래 말리기’를 헤아리면서 빛과 그림자를 알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면, 철마다 다른 흙빛하고 흙내음을 느끼면서 ‘사진을 찍는 때’를 알 수 있고 ‘씨앗 심는 날’에 따라 ‘사진을 찍기에 걸맞는 때’를 알아챌 수 있다는 뜻이에요.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사진으로 담는 빛과 그림자란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무척 부드러이 풀어내어 보여주기도 합니다. 빛을 더 담거나 덜 담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손짓을 살그마니 보여줍니다. 그림자를 더 담거나 덜 담으려고 너무 힘쓰지 말라는 눈짓을 나긋나긋 보여주어요.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담을 수 있을 때에 ‘가장 알맞고 나으며 멋지고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입니다. ‘가장 좋은 때(빛이 가장 좋은 때)’는 없지 싶습니다. 모든 때가 저마다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이야기를 담으려 하지 않고 ‘빛만 좋은 때’를 살피려 한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니라 ‘빛놀이’에 머물 테지요. 빛을 갖고 얼마든지 재미나게 놀 수 있습니다만, 사진찍기는 ‘빛찍기(빛을 찍는 놀이)’가 아니라 ‘삶찍기(삶을 찍는 기쁨)’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진찍기는 ‘그림자찍기(그림자를 찍는 놀이)’가 아니라 ‘사랑찍기(사랑을 찍는 사람)’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표현기법에 너무 얽매이다가는 ‘표현기법 뽐내기’에 머물고 말아요. 표현기법이 아무리 훌륭하고, 초점을 안 흔들리게 맞추었고, 콘트라스트라든지 이것저것 기계질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없는 그림’만 멋들어지게 꾸몄다면, 이런 ‘이야기가 없는 그림’은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진’이 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폴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지만 자연주의자였다. 숲속에 땅을 파서 헌 항아리로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바위, 양치식물, 벌레와 고만고만한 화초들을 심었다. 그 ‘연못’ 조성을 위해 개구리 몇 마리와 작은 뱀, 올챙이도 잡아 넣었다. 폴에게 어떻게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관리하는지 물었다. “아무도 도망가지 않아. 왜냐면 여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게 있거든.” 난 늘 그 말을 기억했고 50년이 지난 후, 그가 ‘욕망의 끝’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에는 다섯 시가 저녁입니다. 아니, 이월인 겨울에는 다섯 시가 저녁입니다. 일월인 겨울은 네 시가 저녁이고, 십이월인 겨울은 네다섯 시 사이가 저녁이에요. 이월이 저물고 삼월이 가까운 겨울에는 바야흐로 대여섯 시가 저녁입니다. 달마다, 또 날마다 다른 저녁이면 나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부릅니다. 물을 살살 끓여 놓고 아이들을 조용히 부릅니다. 자, 이제 들어와서 손이랑 낯이랑 발을 씻고 밥을 먹어야지?


  밥을 짓거나 아이들을 씻기거나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는 내 손에 사진기가 아닌 부엌칼이나 수세미나 국자나 빨랫비누나 마른천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밥을 짓거나 아이들을 씻기거나 돌보면서 ‘두 눈과 두 손을 거친 마음결’로 ‘이야기를 오롯이 아로새기는 하루를 누립’니다. 메모리카드나 필름에는 ‘사진 한 장’조차 얹지 못합니다만, 내 마음속에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흐르고 이어질 ‘즐거운 오늘 이야기’가 살가이 얹혀요.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요? 나는 이 물음에 늘 ‘사진은 마음으로 찍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나누어요.’ 하고 대꾸합니다.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빚은 필립 퍼키스 님은 빙그레 웃는 낯으로 우리한테 ‘사진읽기·사진찍기’를 스스로 기쁜 손길로 짓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갈하게 꾸며서 태어난 고운 사진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내 나름대로 짓는 삶을 새롭게 돌아봅니다. 고운 사진책 한 권을 곁에 두면서, 살림하는 재미와 사랑하는 즐거움과 살아가는 기쁨을 차분히 되새깁니다. 434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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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신기한 사탕이다
미야니시 타츠야 글 그림, 계일 옮김 / 계수나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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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21



‘사탕 한 알’로 달래려 하지 마셔요

― 우와! 신기한 사탕이다

 미야니시 타츠야 글·그림

 계일 옮김

 계수나무 펴냄, 2009.12.25. 9500원



  아이들한테 사탕 한 알은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늘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사탕 한 알이면 ‘울던 아이도 울음 뚝’이고, ‘눈물이 가득하던 아이도 눈물 뚝’입니다. ‘싸우던 아이도 싸움 뚝’이 되도록 하고, ‘떼쓰던 아이도 떼 뚝’이 되도록 해요.


  사탕 한 알은 언제나 대단한 힘을 내지만, 때때로 얄궂은 힘도 냅니다. 이를테면, 사탕은 자꾸 사탕을 먹고 싶도록 이끕니다. 사탕 한 알이 울음이나 싸움이나 떼를 끝낼 수 있더라도, 사탕 맛을 본 아이는 자꾸 사탕을 먹고 싶습니다. 바야흐로 사탕을 더 먹고 자꾸 먹고 또 먹고 거듭 먹고 내처 먹고 한결같이 먹겠다면서 울거나 엉겨붙거나 떼를 쓸 수 있어요.


  어른들은 아이를 보며 섣불리 사탕으로 달래려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사탕 한 알로 달래려는 몸짓으로는 아무것도 달래지 못해요.



“여기에 있는 사탕을 먹으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단다. 자, 이 노란 사탕 하나 먹어 보지 않을래?” (3쪽)


“사탕을 다 먹고 나면 신기한 힘도 사라진단다. 이번엔 이 파란 사탕을 먹어 보렴!” (9쪽)




  미야니시 타츠야 님이 빚은 그림책 《우와! 신기한 사탕이다》(계수나무,2009)를 읽습니다. 숲에서 사는 꿀꿀이(돼지)가 어느 날 ‘숲 속 사탕가게’에서 ‘놀라운 사탕’을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힘이 없고 어린 꿀꿀이는 이제껏 동무나 이웃한테서 놀림을 제법 받은 듯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돼지 가운데 멧돼지도 아닌 집돼지라면 웬만한 숲짐승한테 여러모로 밀릴 테니까요.


  이런 집돼지인 꿀꿀이는 사탕가게에서 아주 놀라운 사탕을 맛봅니다. 범이 우는 소리가 나는 사탕을 맛보고, 늑대 모습으로 바뀌는 사탕을 맛보지요. 작은 사탕 한 알이지만, 이 사탕 한 알로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 재미를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놀라운 사탕’을 잔뜩 장만해서 주머니에 챙겨요. 그러고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장난’을 치기로 합니다.



꿀꿀이는 기뻐하며 숲 속으로 들어갔어요. 조금 뒤, “어디, 장난 좀 쳐 볼까?” 꿀꿀이는 빨간 사탕 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었어요. (16쪽)




  놀라운 사탕을 손에 쥔 꿀꿀이가 하는 일은 ‘놀이’가 아닌 ‘장난’입니다. 숲에 있는 동무나 이웃하고 재미를 나누려는 놀이를 할 생각을 품지 못해요. 숲에 있는 동무나 이웃을 골리거나 놀리려는 장난을 칠 생각을 해요.


  아무래도 여느 때에 받은 놀림을 돌려주겠노라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너희도 좀 놀림을 받고 깜짝 놀라 보렴 하면서 장난을 치겠노라 하는 생각이었을 테지요.


  가만히 따지면, 꿀꿀이가 그동안 받았을 놀림은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꿀꿀이가 다른 동무나 이웃을 놀려도 될 만하지 않아요. 네가 나를 놀렸으니 나도 너를 놀리면 될까요? 네가 나를 괴롭혔으니 나도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괴롭히면 될까요? 네가 내 뺨을 때렸으니 나도 나보다 여린 누군가를 붙잡고 뺨을 때리면 될까요?


  장난꾸러기가 된 꿀꿀이는 혼자서 신납니다. 이러다가 꿀꿀이는 숲에서 ‘참 늑대’를 만나요. 사탕을 먹고 ‘거짓 늑대’가 된 꿀꿀이는 ‘참 늑대’가 이끄는 대로 늑대 무리로 가야 하지요. ‘참 늑대’는 ‘거짓 늑대’인 꿀꿀이더러 그곳에서 뭐 하느냐고, 우리(늑대) 무리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데려가지요.


  늑대는 언제나 무리를 지어서 다녀요. 혼자 다니지 않지요. 꿀꿀이는 이 대목을 잘 모른 듯해요. 사탕을 먹고 늑대 모습이 된다 하더라도 숲에 있는 늑대는 놀라지 않겠지요. 왜 저놈이 저기에서 혼자 저러나 하고 여기겠지요. 그러니까, 거짓 늑대 노릇을 하는 꿀꿀이는 아주 큰일이 났습니다. 사탕이 다 녹으면 거짓 늑대로 꾸민 모습이 모두 사라질 텐데, 어떡해야 할까요.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게다가 입 안의 사탕이 다 녹으면서 꿀꿀이의 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크크크, 잡았다!” ‘아, 이젠 틀렸어!’ 그때 너구리 아저씨가 한 말이 떠올랐어요. ‘깜짝 놀랄 일이 생길 거야.’ (29쪽)




  그림책 《우와! 신기한 사탕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째, 놀라운 사탕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둘째, 놀라운 사탕으로 재미난 놀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셋째, 놀라운 사탕으로 신나게 장난을 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넷째, 놀라운 사탕으로 혼자 신나게 장난을 치다가 큰코 다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다섯째, 장난을 치더라도 가볍게 한 번만 칠 노릇이고, 동무나 이웃을 자꾸 놀래키면 스스로 덫에 갇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여섯째, 놀라운 뭔가로 장난을 치는 삶은 아무한테도 재미없기 때문에, 동무랑 이웃하고 다 함께 어깨를 겯고 재미난 삶을 짓는 길을 생각하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가끔 문득 한 알을 얻어서 먹는 사탕일 때에 맛있습니다. ‘사탕중독’이 된다면, 즐거운 맛을 누리는 살림이 아니라, ‘사탕이 없으면 마치 죽음과 같이 되는’ 어리석은 모습이에요.


  사탕에 매여서 ‘놀라운 뭔가’를 손에 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장난감도 그렇고 책이나 다른 여러 가지도 똑같습니다. 어른들도 이와 같아요. 술을 날마다 자주 마셔야 즐거울 수 있지 않아요. 가끔 문득 누리는 술 한 잔이 기쁨이 될 수 있어요. 동무하고 이웃을 불러서 도란도란 알맞게 누리는 조촐한 잔치가 될 때에 비로소 기쁨이라 할 만해요.


  놀라운 사탕으로 그야말로 놀라운 일을 겪은 꿀꿀이는 앞으로는 더 사탕으로 장난을 치자는 생각을 안 하겠지요? 사탕 한 알이 있으면 동무하고 반을 나누어 먹을 수 있겠지요? 남을 놀리거나 괴롭히는 데에서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줄 잘 느꼈을 테지요? 434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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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사계절 아동문고 58
하나가타 미쓰루 지음, 고향옥 옮김, 이선민 그림 / 사계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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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35



‘어머니·곁님·여자’ 없는 집에 세 남자

― 용과 함께

 하나가타 미쓰루 글

 이선민 그림

 고향옥 옮김

 사계절 펴냄, 2006.1.18. 7500원



  하나가타 미쓰루 님이 쓴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사계절,2006)를 읽으면 세 사내가 나옵니다. 먼저 초등학교 일학년인 사내 아이가 나오고, 중학교 일학년인 사내 아이가 나옵니다. 여기에 이 두 사내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가 나와요.


  한집에 세 사내만 있는데, 아버지는 바깥일을 하느라 바빠서 집에는 ‘돌봄이 아줌마’를 둡니다. 두 아이는 어머니 손길이나 따스한 눈길은 하나도 받지 못하면서 마치 세 사람이 ‘남남’이라도 되는 듯이 지내요. 세 사내는 서로 말을 섞는 일조차 없고, 얼굴을 마주보는 일조차 드문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 집은 반 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마마 보이였던 여섯 살짜리 남동생은 그 충격 때문에 맛이 가서…… 그러니까 문학적으로 말하면 슬픔이 너무 커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어두운 반 년 간을 거쳐 요즘에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11쪽)



  세 사내는 처음부터 남남처럼 지내지는 않았으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이끄는 중학교 일학년 사내 아이 목소리가 밝히듯이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기 앞서’까지는 집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웃음이 흐르며 노래가 감도는 나날이었으리라 생각해요. 어머니가 죽어서 이 집을 떠난 뒤로는 하루아침에 말도 수다도 이야기도 웃음도 노래도 모두 사라졌구나 싶어요.


  이 집안에서는 말도 수다도 이야기도 웃음도 노래도 사라진 뒤에 더 크게 사라진 한 가지가 있어요. 바로 막냇동생한테서 거의 모든 말이 사라진 대목입니다. 더욱이 이런 막냇동생을 두고 큰아이나 아버지는 제대로 눈길을 두지 못해요. 마음을 쓰지도 못하고, 선뜻 말을 걸지도 못합니다. 함께 나들이를 다니지도 못하고, 다 같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해요.



“저어, 네 애완동물 용…… 뭐였지? 으응, 포치였던가? 저어,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겠니……?” 스파게티를 입 속으로 밀어넣던 도키오가 얼굴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정반대로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형, 포치를 싫어하지 않았던 거야?” (24쪽)


“그때 말이야, 내가 기운이 쑥 빠져 있으니까 엄마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알을 사두 주셨어. ‘이건 그냥 알이 아냐. 용의 알이야.’ 하면서. 나는 날마다 소중하게 품어 주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알에서 진짜로 아기 용이 나왔어.” (30∼31쪽)



  아버지는 회사에 오래 머물면서 ‘곁님 잃은 슬픔하고 아픔’을 달랩니다. 형은 학교에서 노래패(밴드)를 하면서 ‘어머니 잃은 슬픔하고 아픔’을 다스립니다. 두 사람은 둘 나름대로 슬픔하고 아픔을 달래거나 다스릴 만한 길이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인 막냇동생은 슬픔하고 아픔을 달래거나 다스리는 길을 모릅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형이나 아버지는 이 아이를 달래 주거나 다스려 주지 않습니다. 따스히 품어 줄 겨를이 없을 만큼 두 사내도 슬픔하고 아픔이 커요. 어머니 품을 넉넉히 누려야 할 아이가 어머니 품을 더 누리지 못하는 허전함을 한집 사내들이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중학교 일학년밖에 안 되는 형이 동생을 잘 달래 줄 만큼 슬기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중학교 일학년인 형도 중학생이기 앞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하고 아픔이 크지요. 형도 어머니 사랑을 더 받고 싶었을 테지요.


  어버이요 어른이라 할 아버지는 이제껏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맡아 본 적이 없으니 돌봄이를 둡니다. 그렇지만 정작 스스로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생각해 본다면 ‘죽고 없는 곁님 빈자리’를 더 느낄 수밖에 없어서 괴로우니까 등을 돌리는지 몰라요.


  이리하여 어린 막냇동생은 혼자 웅크립니다. 혼자 꿈누리를 헤맵니다. 형한테도 아버지한테도 말을 걸지 않고, 오로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합니다.



내가 먼저 가자고 해 놓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뭣하지만, 형제끼리 단둘이 외출한 것은 난생 처음이어서 꽤나 거북했다. (42쪽)


나는 그제야 내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답지 못했는지도 몰라,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니까. (56∼57쪽)



  떠나고 없는 사람을 그리느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서로서로 모릅니다. 형은 동생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는 작은아이 마음을 모릅니다. 게다가 동생도 형이나 아버지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는 큰아이 마음마저 몰라요. 세 사내는 서로서로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지냅니다. 한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이입니다만, 밥과 잠을 빼고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사이예요. 따스함도 즐거움도 웃음도 노래도 없으니, 먹고 자기는 하지만, 집이 집다울 수 없는 흐름이요 얼거리입니다.


  막냇동생은 꿈속에서 어머니가 저한테 주었다는 ‘용 알’을 품어서 ‘새끼 용’이 태어나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용이 곁에서 늘 함께 있다고 여깁니다. 막냇동생은 용한테 ‘포치’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형은 이런 동생을 바보스럽게 여기지만, 시나브로 동생 마음을 느낍니다. 동생한테 한 걸음씩 다가서려 합니다. 동생도 저한테 다가서려는 형을 느끼고는, 동생 나름대로 형한테 한 걸음씩 다가서려 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큰아이한테도 작은아이한테도 다가서지 못합니다. 작은아이한테 ‘정신병(비정상)’이 생겼다고 여겨서 시설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아이하고 말을 섞거나 마음을 나눌 생각은 안 하는 채, 아버지다움이나 어버이다움이나 어른다움 모두 놓치거나 잊고 말아요.



아버지가 눈길을 돌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얘기는 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화를 내고 있다.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진작에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중요하다니…… 포치에 대해서보다 그런 것이 더 중요할까. (76쪽)


“그 얼굴은 뭐냐? 잠깐이라고 했잖아, 잠깐이라고……. 저 녀석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나에게서 눈길을 돌린다. ‘정상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정상이?’ 나는 나 자신에게 묻교 있다. “저 녀석은 충분히 정상이잖아요. 엄마가 죽은 충격 때문에 이상해진 건, 충분히 정상적인 반응이잖아요.” (88∼89쪽)



  ‘어머니·곁님·여자’ 없는 집에서 세 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머니가 없으니, 곁님이 없으니, 여자가 없으니, 그저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다가 나중에는 얼굴조차 안 보고 살아도 될까요? 조금씩 마음을 열 실마리를 스스로 찾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를 읽으면, 막냇동생은 ‘늘 곁에 있는 용’을 따라서 하늘로 뛰어오르려 합니다. 건물 옥상에서 ‘용이 부르는 손짓’을 따라서 참말로 하늘로 뛰어오르려 하지요.


  아버지는 이때까지 작은아이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채 ‘어른으로서 느끼는 슬픔하고 아픔’만 생각하느라 넋이 나갔는데, 이 모습을 보고는 머릿속이 와장창 무너집니다. 이제 보아야 하는 줄 알아차리지요. 이제 작은아이를 바라보아야 하는 줄 깨닫지요. 곁님이 없는 자리에 작은아이까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비로소 느끼지요. 떠나서 없는 사람만 생각하느라 막상 바로 옆에서 사랑을 바라면서 기다리는 아이를 안 쳐다보면 어떻게 되는가를 온몸으로 찌릿찌릿 배우지요.


  갑작스레 떠나고 만 사람을 그리는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떠난 사람만 있지 않아요. 곁에 있는 사람도 있어요. 아이들은 곁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기다려요. 아버지요 어버이인 자리에서는 ‘떠난 사람 생각’에만 얽매일 틈이 없습니다. 아버지요 어버이인 자리에서도 슬픔과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이 느낄 슬픔하고 아픔을 헤아릴 몫이 바로 아버지요 어버이인 사람한테 있습니다.


  마음이 다친 아이를 달랠 사람은 바로 어버이입니다. 마음이 아픈 아이를 어루만질 사람은 바로 어버이예요.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는 세 사내가 한집에서 어떻게 새로 일어서면서 씩씩하게 살림을 가꿀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을 수 없는 삶을 그리고, 아이도 자라며 어른도 함께 자라면서 생채기를 돌보는 삶을 그려요. 4349.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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