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그리는 마음

 


  큰아이가 그림놀이를 하는데 작은아이가 자꾸 누나 곁에 달라붙으면서 ‘같이 놀자’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말이 아주 많이 더뎌 제 마음을 말로 제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나도 큰아이도 작은아이 ‘마음은 알’지만, 때때로 일부러 모르는 척하기도 합니다. 작은아이 스스로 말문 트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녁 열 시 가까운데 두 녀석 모두 잠들 낌새 없이 노닥거립니다. 이러다가 둘이 다투겠구나 싶어, 작은아이한테 종이 한 장 내밉니다. 여기에 네 마음껏 그리렴. 작은아이는 그림 그리는 시늉을 안 하고 죽죽 긋기만 합니다. 음, 그래, 너는 누나보다 훨씬 더 오래 아기로 지내고 싶구나.


  작은아이가 그저 죽죽 그은 종이를 바라보다가 이 종이를 이대로 두면 버려지리라 느낍니다. 색연필을 듭니다. 작은아이 얼굴을 그립니다. 아, 작은아이 얼굴 참 오랜만에 그렸네. 연필을 쥡니다. 큰아이 얼굴을 옆에 그립니다. 큰아이가 문득 말하네요. “나도 보라처럼 까만 걸로 그려 줘요. 나도 보라처럼 까만 얼굴 해 주세요.” 동생은 색연필로 그려 주고 왜 저는 가느다란 연필 금으로 그렸느냐며 투정을 부립니다.


  응? 벼리야, 연필로 그린 네 그림을 훨씬 찬찬히 예쁘게 그렸잖니? 1분쯤 큰아이 투정을 듣다가, 까만 색연필을 쥐고 큰아이 그림을 다시 하나 그립니다. 큰아이는 까만 색연필 그림을 보며 방그레 웃습니다. 그래, 너희 웃음 보자며 함께 살아가는데, 너희 바라는 대로 그리고 놀고 구르고 뛰어야지.


  아이들 그림을 그린 둘레로 이런 빛 저런 빛 입힙니다. 오늘은 바탕빛만 살짝살짝 입혀 봅니다.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투정 부린 말을 큰아이 그림 밑에 적습니다. 이제 그림 다 되었구나, 벽에 붙여야겠네. 아이들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고, 아이들 불러 손발 씻깁니다. 두 아이 잠자리에 눕히고 불을 끕니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한참 부르니 두 아이 모두 새근새근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두 차례 깨어 물을 마시고 무언가 허전한지 더 놀고파 하는 눈치입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늦은 밤에 일어나서 놀려고 하면 몸이 힘들어, 또 코피가 터지잖니, 오늘은 이만 자고 이듬날 즐겁게 일어나서 신나게 놀자, 알겠지? 4346.6.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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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6-19 04:52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이 그리신,
벼리의 얼굴이 참 예뻐요~ 보라도요~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

숲노래 2013-06-19 07:25   좋아요 0 | URL
예쁘니까 예쁘게 그릴밖에 없답니다 ^^;;;;
 

 

 

 

놀고 싶은 마음

 


  저녁에 잠들고 아침에 깨어나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내 지난날 돌이켜봅니다.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 다닐 적에 날마다 어떤 마음으로 깨어났는가 돌아봅니다. 국민학교 적에는 ‘오늘 무얼 하며 놀까’ 하는 마음이 하나요, ‘오늘 숙제 안 한 것 있나’ 하는 걱정이 둘이며, ‘나보다 일찍 학교에 오는 사람은 없겠지’ 하는 생각이 셋입니다. 놀거리를 맨 먼저 떠올리고, 날마다 윽박지르는 교사들 모습이 이내 뒤따르며, 국민학생이면서 새벽 여섯 시 반 즈음 집을 나서 일곱 시가 안 되어 학교에 닿아서는 문도 안 열린 학교 담을 넘어 아직 아무도 없는 교실에 조용히 앉아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즐거움을 헤아립니다.


  곧 깨어날 우리 집 두 아이를 생각합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아침에 깨어나면 무엇을 생각할까요. 아무래도 ‘오늘 무얼 하며 놀까’일 테지요. 오늘 놀거리를 떠올리고, 오늘 부를 노래, 오늘 즐길 여러 가지, 오늘 뛰고 달릴 이것저것 들을 헤아리겠지요.


  놀잇감이 있어야 놀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놀잇감이 됩니다. 아버지 등이나 팔이나 다리가 놀잇감이 되곤 합니다. 연필도 종이도 놀잇감이 됩니다. 빈 상자도 놀잇감이 됩니다. 작은 베개도 큰 베개도 놀잇감이 되어요. 스스럼없이 놀도록 홀가분하게 놓아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을 빛내어 놀이를 찾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도, 옆지기가 어릴 적에도, 내 이웃과 동무 모두 어릴 적에도, 저마다 스스로 놀이를 찾거나 빚거나 깨달으며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른이 가르쳐 주거나 언니 오빠가 알려준 놀이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신나며 재미나고 알차게 누리는 놀이란, 바로 스스로 찾거나 빚은 놀이라고 느껴요.


  놀고 싶은 마음을 북돋울 때에 어버이가 되고, 놀고 싶은 마음을 보듬을 때에 어른이 되며, 놀고 싶은 마음을 사랑할 때에 사람이 됩니다. 4346.6.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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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로 생각하는 마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많은 소리·빛·무늬·냄새·모습을 마주해야 합니다. 자동차는 쉴새없이 달리고, 공장과 기계는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모든 흐름은 시간에 따라 끊어지고, 달력과 월급명세서로 이어져요. 날과 달과 철이 아닌, 책과 신문과 교과서에 따라 짜맞추어요. 이런 틈바구니에서 생각을 어떻게 올바로 다스릴 수 있을까요. 틀에 박힌 굴레나 수렁이나 톱니바퀴가 곳곳에 있는데, 어떻게 이곳저곳에 안 휩쓸리거나 안 떠돌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길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바람을 마시는 도시사람이요, 바람이 흐르는 냄새를 맡지 않아도 바람을 먹는 도시사람이며, 바람이 드리우는 빛깔을 살피지 않아도 바람을 맞는 도시사람입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개구리와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 나뭇잎 지는 소리, 새싹 돋는 소리, 꽃이 피고 지며 씨앗 퍼뜨리는 소리 들을 한 가지도 제대로 듣거나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물을 먹거나 밥을 먹는 도시사람입니다. 해가 뜨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2교대를 하느니 3교대를 하느니 출퇴근을 하느니 똑같이 일하거나 움직이는 도시사람입니다. 어른은 회사에서 똑같이 움직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학교에서 똑같이 움직입니다. 비가 오든 말든 눈이 오든 말든 똑같이 움직입니다. 사월이든 유월이든 팔월이든 똑같이 움직입니다. 무지개를 생각하지 않고, 구름빛 헤아리지 않는 도시사람입니다. 텔레비전과 손전화로 날씨 정보를 살피지, 살갗과 마음으로 날씨를 읽지 않는 도시사람입니다.


  벼가 싹 틔우고 잎 돋으며 꽃 피어 열매 맺는 흐름을 모르고도 밥을 먹는 도시사람입니다. 냇물과 골짝물과 시냇물 모두 막고는, 시골마을 댐에 가두어 없앤 뒤에, 수도물 마시기는 하되 지난날 사라진 시골마을과 오늘날 댐에 갇힌 물이 어떠한 빛인가를 헤아리지 않는 도시사람입니다. 물 한 방울 어떻게 내 몸으로 스며들어 마시는가를 읽지 못하거나 않는 도시사람입니다.


  곧, 숨결을 모르거나 잊거나 안 느끼는 도시사람입니다. 도시사람은 무엇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나요. 도시사람은 올바르게 사랑하고 꿈꾸며 서로 아끼고 돌보는 길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는가요. 도시사람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올바른 빛을 어느 만큼 느끼거나 깨닫거나 생각하는가요.


  나무마다 다 다르게 붙는 이름을 곱씹지 않으면서도 종이를 쓰고 책을 손에 쥔다면, 도시사람은 어떤 종이와 어떤 책으로 어떤 삶을 일구는 셈일까요. 풀과 꽃마다 다 다르게 누리는 이름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자동차를 달리면, 도시사람은 또 시골사람은 어떤 눈빛으로 어떤 이웃을 바라보며 어떤 이야기를 빚는 셈일까요. 올바로 생각하는 마음일 때에 올바로 살아가는 하루가 된다고 느낍니다. 4346.6.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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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는 마음

 


  읍내마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군내버스에서 우리 앞자리에 아기 업은 어머니 한 분 앉습니다. 한눈에 동남아시아에서 이리로 시집오신 분인 줄 알아봅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어떤 곳에서 태어나 자라셨을까요. 그곳 도시에서 나고 자라셨을까요, 그곳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을까요. 한국은 동남아시아하고 견주면 추운 나라일 테지만, 고흥 시골마을은 그럭저럭 따스하다 할 만한 곳이 될까요.


  일곱 달짜리라 하는 아기는 어머니 등에 업혔으나 몸을 돌려 자꾸 뒤를 보려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만 한 나이에 저러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여섯 살 큰아이도 세 살 큰아이도 어머니 등에 업힌 채 버스를 타면, 참말 한손을 뻗어 무언가 쥐려 했구나 싶습니다. 게다가 아주 단단히 붙잡아 잘 놓지 않았어요. 갓난쟁이 아귀힘이란 어른 생각과 달리 무척 세지요. 이 아귀힘으로 어머니 품에 꼬옥 매달리고, 어머니 손도 힘껏 붙잡을 테지요.


  내 옆에 앉은 작은아이는 앉은키 아직 작으니 앞자리 아기가 보일락 말락 합니다. 그래도 냄새로 느꼈을는지 모르고, 손가락 보며 알아챘는지 모릅니다. 두 아이 손이 오락가락 이곳을 잡고 저곳을 만지며 할 적에 작은아이 손을 들어 앞자리 아기 손 위에 척 얹어 봅니다. 작은아이가 무척 좋아합니다. “아기 예뻐? 아기 손이야.” 그러고는 나도 작은아이 손 위에 내 손을 나란히 얹어, 세 손이 겹치게 해 봅니다.


  손과 손과 손이 모입니다. 일곱 달 갓난쟁이는 어떤 기운을 느낄까요. 앞자리 아기와 어머니는 먼저 내립니다. 예전에는 이 아주머니가 혼자 다니는 모습을 더러 보았는데, 일곱 달이라 했으니 그동안 아기를 배고 낳고 이렇게 다니시는군요. 시골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다니노라면, 우리 식구처럼 아이들 데리고 군내버스 타는 ‘한국사람(?)’이 매우 드물어요. 아이 있는 ‘한국사람(?)’은 거의 하나같이 자가용을 몰아요. 자가용을 안 몰고 군내버스 타고 돌아다니는 ‘한국사람(?)’ 보기란 아주 힘들어요.


  앞자리 어머니와 아기가 내리려 하니, 내 옆 작은아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서운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응, 이제 내렸어. 다음에 또 보면 되지.” 말없이 빙긋싱긋 웃으며 앞자리 아기 손을 만지며 좋아하던 작은아이야, 너는 네 손으로 어떤 숨결을 느꼈을까. 네가 느낀 숨결을 네 가슴은 어떻게 아로새기려나. 4346.5.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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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마음

 


  길을 걷는 사람은 생각합니다. 두 다리로 디디는 이 땅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두 다리가 이 땅을 디디지 못하니, 이 땅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두 다리로 이 땅을 디디며 걸을 때에 비로소 생각하는 마음을 엽니다. 두 다리로 이 땅을 디디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생각하는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마음을 열 때에 서로 사랑을 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열지 못할 때에 함께 사랑하는 길을 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음을 열 때에는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바라며 민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걸림돌을 마련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계급을 가르며 우상을 세웁니다. 오늘날에는 자동차를 만들어 사람들 생각을 가로막습니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앞만 바라보아야 하고, 때때로 옆이나 뒤를 거울로 흘끔흘끔 쳐다보아야 합니다. 이동안 생각을 틈이 없습니다. 자동차가 첨단에서 더 나아가면서, 자동차를 모는 동안 라디오를 듣거나 손전화를 쓰거나 텔레비전을 봅니다. 자동차를 타면서도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아예 어떠한 생각도 못하도록 여러 장치가 나옵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생각을 기울이다가는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한참 헤매야 하거나, 건널목에서 사람을 치거나 다른 자동차와 부딪히고 맙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생각할 겨를을 빼앗깁니다. 자동차를 안 타더라도 찻길 가까이 있으면 자동차 소리 때문에 귀가 찢어집니다. 자동차 소리뿐 아니라 자동차가 우악스럽게 내달리면서 ‘사람더러 비키라’고 빵빵대기에, 그만 생각을 잊거나 잃습니다. 찻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고속도로나 넓은 찻길이 둘레에 있으면,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고요히 몸을 다스리면서 생각을 기울이는 매무새를 건사하기 어렵습니다. 자동차 달리며 내는 소리가 집안으로 스며들거든요. 그렇다고 소리를 꽁꽁 막는 두꺼운 유리문이나 벽을 댄다면, 집 둘레 풀소리·나무소리·벌레소리·새소리·개구리소리·바람소리 들이 막힙니다. 생각을 열도록 북돋우는 숲소리까지 닫아걸어 막아서는 유리문과 벽입니다.


  두 다리로 걷지 않으면 생각을 빼앗깁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곁에 자동차가 넘치면 생각이 흔들립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면 두 다리로 걸어야 하며, 자동차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자동차가 찢는 소리 아닌 숲이 베푸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마음을 북돋아 사랑을 바라고 꿈을 키우며 믿음을 나누려 한다면, 조용한 보금자리와 마을과 삶터가 되게끔 힘을 쏟아야 합니다. 자동차 오가는 찻길 아닌 숲이 푸르게 빛나는 들판과 멧골이 되도록 슬기를 빛내야 합니다. 4346.5.1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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