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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마음


 잘난 사람이 쓴 잘난 책을 읽으면 잘난 마음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느낀다. 못난 사람이 쓴 못난 책을 읽으면 못난 마음으로 어줍잖게 우쭐거리는 얼굴이 어떤 빛인가를 느낀다. 고운 사람이 쓴 고운 책을 읽으면 고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느낀다. 착한 사람이 쓴 착한 책을 읽으면 내 낯이 붉어지기보다 내가 걸어갈 착한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느낀다. 큰소리치는 겉치레 사람이 쓴 큰소리에 물든 겉치레 책을 읽으면 이런 겉치레와 큰소리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느낀다.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고 투박하게 엮은 책을 읽으면 내 삶이 어느 만큼 수수하거나 투박한가를 돌아보며 내가 가꿀 내 삶이 어떤 결일 때에 즐거울까 하고 곱새긴다.

 이름있는 아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더 잘나거나 더 못나지 않다. 이름없는 저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덜 여물지 않다. 이름있는 출판사 책보다는 뜻있는 출판사 책을 고를 때가 한결 아름답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뜻있는 출판사가 품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는 눈이 퍽 얕다. 스스로 뜻있게 살림을 꾸리지 않는다면 겉껍데기 뜻인지 속차림 뜻인지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부터 뜻있게 살아가고 있어야 뜻있는 출판사에서 땀으로 일군 뜻있는 책을 알아보며 기쁘게 장만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사람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옆지기와 짝을 짓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온누리를 살피고 책을 알아보며 고갱이를 받아먹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한껏 깊다면 한껏 깊은 책에 서린 넋을 읽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몹시 얕다면 몹시 얕은 책에 덧발라 놓은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간다.

 우리는 신영복 님 책을 읽을 노릇이 아니라 신영복 님 삶을 받아들일 노릇이다. 법정 스님 책을 찾아 읽으려고 아둥바둥거릴 노릇이 아니라 법정 스님 삶을 살펴 받아안을 노릇이다. 이 땅에는 신영복 님이나 법정 스님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한편, 이분들처럼 이름이 높지 않으면서 거룩하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도록 조용히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많다. 다만, 우리들은 이름을 스스로 낮추어 사람들 앞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당신 둘레 삶자리를 아름다이 여미는 몸짓을 제대로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용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찾자면 우리부터 조용하고 아름다이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자가용 제발 버리라고 그토록 외친 권정생 할아버지인데, 권정생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에 시외버스나 기차로 안동역에 내려서 걸어걸어 고개를 넘어간 이는 몇 사람이었을까. 당신하고 마음벗이었던 이오덕 할아버지를 빼고 꾸준하게 낮은걸음으로 찾아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북돋운 사람은 누가 있을까. 자가용을 단단히 붙잡을 뿐 아니라 크고 빠르고 비싼 차에다가 아파트 열쇠까지 주렁주렁 매달면서 권정생 할아버지 책, 이를테면 《몽실 언니》이든 《하느님의 눈물》이든 《우리들의 하느님》이든 떠받든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으랴. 덧없는 몸부림이고 돌아오지 않는 산울림이다.

 반 고흐 책을 읽으면 반 고흐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미우라 아야코 책을 읽으면 미우라 아야코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류영모를 읽으면 류영모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반 고흐와 미우라 아야코와 류영모를 지식조각으로 머리에 집어넣는다고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신영복 님 책이든 법정 스님 책이든 그토록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지만 이 나라에 아름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책을 읽는 마음이 처음부터 그릇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마음을 참되고 착하고 곱게 추스르지 않고, 너무 일찍 책을 장만해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쿠리 영감은 네 주제를 알라고 했다는데,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들 주제를 알고 당신들 주제를 빛낼 길을 걸으며 책을 삼키는 사람은 더없이 드물다. 책을 읽으려면 가난해야 하고, 가난해지면 내 이웃이 보이며, 내 이웃이 보인 다음에는 내가 서 있는 터전과 자연을 알아챈다. (4343.5.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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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5-03 20:57   좋아요 0 | URL
찬찬한 글, 찬찬히 읽고 싶어 별찜하고 갑니다.

숲노래 2010-05-04 14:4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빨래하는 마음


 이 옷을 누가 입는가 헤아리며 손빨래를 한다. 이 옷을 입는 사람이 사는 터전은 어떠해야 좋을까 곱씹으며 비빔질을 한다. 빨래할 때뿐 아니라 밥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밥을 누가 먹는가 생각한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어떻게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면 좋은가 돌아본다. 내가 쓰는 글은 누가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되뇌어 본다. 내 어줍잖은 글 하나를 읽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어떤 생각으로 펼쳐 나가면 좋은가를 가만히 톺아본다. 빨래하는 마음은 밥하는 마음이고, 밥하는 마음은 걸레질하는 마음이며, 걸레질하는 마음은 아이를 안고 동네마실을 하는 마음이요, 아기수레 아닌 어버이 품으로 아이를 보듬는 마음은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이다.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은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이고,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은 호미질 하는 마음이다. 호미질 하는 마음은 바느질 하는 마음이고, 바느질 하는 마음은 설거지를 하고 내 어버이 등과 허리를 부드러이 주무르는 마음이다. (4343.5.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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