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대고 하는 말


 사람으로 살아가며 사람한테 삶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데 내가 하는 말이 한귀로 고스란히 흘러 나간다든지 아예 처음부터 튕겨진다고 할 때에는 벽을 대고 하는 말입니다. 맞은편은 맞은편대로 맞은편 하고픈 말을 쉬지 않고 쏟아부으면서 나한테 아무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에, 이 또한 벽을 대고 하는 말입니다. 쏟아붓기는 말도 이야기도 사랑도 아닙니다. 한쪽만 오래도록 말을 한대서 쏟아붓기이지는 않습니다. 깊이 사랑하면서 조곤조곤 속삭일 때에는 한 사람만 속삭여도 괜찮습니다. 따사로운 사랑으로 살가이 껴안을 때에는 한 사람만 말꽃을 피울 수 있어요.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풀어야 할 일일 때에는, 두 쪽은 두 쪽대로 제 이야기를 꺼낸 다음, 맞은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차분히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제 할 말을 마치고 나서 다른 볼일을 보러 간다며 홱 돌아선다면, 그예 벽을 대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웃음 띤 얼굴이라 하더라도 벽을 대고 하는 말이라면 조금도 따스하지 않고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4344.5.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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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작은 방


 병원 작은 방에는 텅 빈 냉장고하고 큼지막한 텔레비전이 있다. 휴지 한 장 이불 하나 따로 없을 뿐 아니라, 빨래비누나 대야조차 없다. 둘째를 낳은 대학병원에서 입원수속을 하는데, 간호사들은 우리한테 아무런 이야기 없이 무턱대고 4인실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준다. 병실이 어떻게 있다고 밝힌 다음 어디를 쓰겠는지 물어야 하지 않나? 이 사람들은 네 살 아이가 있는 집안 사람들이 4인실 방에서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다른 애 어머니와 견줄 수 없이 몸이 대단히 나쁠 뿐더러 여린 옆지기를 여느 4인실에 둘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쏭달쏭하다. 간호사 말을 끊고 불쑥 말한다. 여기 1인실은 없나요? 1인실이요? 있어요. 4인실은 얼마쯤 하나요? 4인실은 4만 원이요. 1인실은요? 1인실은 10만 원이요. 그러면 1인실로 해 주셔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희는 아이도 있고 애 어머니하고 함께 자야 하는데 1인실로 해야 해요.

 첫째를 낳던 병원을 떠올린다. 첫째를 낳던 인천 병원에도 이곳 충주 병원과 마찬가지로 텅 빈 냉장고하고 큼지막한 텔레비전이 있었다. 다만, 휴지는 있었는데, 인천 병원에서도 대야와 빨래비누와 이불은 없어서 집에서 모조리 들고 왔다. 인천에서는 집과 병원이 가까웠지만, 시골집에서는 자가용으로 40분은 달려야 하는 먼길이다. 자가용 없는 우리 식구는 여러 사람한테 도와주십사 이야기해서 겨우 이것저것 챙겼다.

 병원 작은 방에서 아이가 뛰어놀라 하기란 몹시 힘들다. 그래도 아이는 잘 뛰어놀아 주었다. 잘 견디어 주었다. 새벽 두 시 사십오 분부터 깨어서 낮에 두 시간 살짝 잠들었을 뿐, 졸리면서 잠을 안 자는 아이는 이 작은 병원 방에서 온힘을 짜내어 제 어머니 아버지하고 살아내 준다. 아이가 얼마나 심심해 할까 걱정스럽지만, 몸이 힘든 아버지는 제대로 돌봐 주지 못한다. 옆지기 몸이 썩 좋지는 않지만, 개인 병실로 옮긴 다음 몇 시간 지나서 아이 손을 붙잡고 바깥으로 나온다. 병원 앞 문방구에 들러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산다. 아이는 제 손바닥에 꼭 쥘 만한 작은 수첩 둘을 쥔다. 하나만 하면 안 되겠니? 응, 안 돼. 둘 다 할래? 응, 둘 다 할래. 하나에 400원짜리 작은 수첩을 둘 나란히 사 준다. 병원으로 돌아온 아이하고 한 시간 남짓 그림을 그리면서 논다. 그러나 한 시간 뒤에는 무슨 놀이를 해 줄까. 옆지기가 텔레비전 켜 주라 이야기한다. 드디어 텔레비전을 켜서 만화영화 나오는 곳을 찾는다. 만화영화이든 다른 뭐뭐이든 그닥 재미나지 않을 뿐더러 아이하고 신나게 볼 만하다고 느끼기 힘들다. 광고는 너무 시끄러우면서 쓰잘데없다. 한 시간 남짓 텔레비전을 보았나 싶은데 눈과 귀가 몹시 아프다.

 인천 병원에서도 그랬지만, 충주 병원에서도 책 있는 자리란 없다. 적어도 병의학을 다룬 책이라든지, 아이를 낳을 어머니나 아버지나 식구나 살붙이나 이웃이 읽ㅡ,,으면서 헤아릴 만한 책 하나조차 없다. 아니, 어린이 그림책이나 동화책마저 없다. 아이들이 갖고 놀 만한 놀잇감 또한 없다. 요사이에는 사람들이 아이를 잘 안 낳는다지만, 두셋 낳는 집안이 아예 없지 않을 뿐더러, 제법 있다. 둘째나 셋째를 낳으려고 병원에 오는 어머니들이 많다. 그렇지만, 첫째나 둘째가 병원에서 놀거나 읽을 거리는 아무것도 없다시피 할 뿐더러, 병원에서 함께 지내는 아버지 될 사람들이 ‘아이낳기’와 ‘살림하기’와 ‘집일하기’를 깨우치도록 돕는 책이란 한 가지도 없다. 애 아버지가 애 어머니한테 해 줄 국과 밥 몇 가지라도 하도록 도와주는 요리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사랑하면서 돌보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병원 의사나 간호사는 무슨 책을 읽을까. 그저 셈틀 앞에 앉아서 인터넷 바다를 누빌 뿐인가.

 병원 작은 방이든 긴 골마루이든 분만대기실이든 어디이든, 책이 놓이는 병원을 한국땅에서 꿈꾸고 싶다. 아름답거나 훌륭한 책이 놓이자면 아주아주 오래오래 걸릴 테지만, 적어도 후줄그레한 잡지 하나라도 놓일 책꽂이가 있는 병원 작은 방을 꿈꾼다. (4344.5.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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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마, 부채, 자전거, 숲


 아이가 치마를 위에 입고, 웃도리를 바지에 끼워 넣는다. 아이는 옷을 엉터리처럼 끼워 입으면서 위와 아래에 모두 치마를 둘렀다고 여긴다. 으레 이와 같이 노는 아이를 바라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웃음이 터져나온다. 웃음을 꾹 참으면서 얼른 사진기를 찾는다. 신나게 사진을 찍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는 어떠한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궁금하다. 나나 형이 어렸을 때에 둘은 저마다 달리 어처구니없는 짓을 곧잘 저질렀을 텐데,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아들이 저질렀을 어처구니없는 짓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다스리셨을까.

 아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아이는 날마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다. 아이는 저 스스로 좋은 길을 걸어가면서 자란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든 어처구니있는 짓이든, 아이한테는 어느 한 가지 재미나지 않은 일이 없으리라 본다. 이렇게도 뒹굴고 저렇게도 뒹굴면서 크지 않겠는가.

 날마다 저녁나절 겨우 재우고 나서 기운을 쏙 뺀 뒤 옆에 쓰러져서 함께 잔다. 둘째가 태어나면 둘째를 돌보느라 섣불리 쓰러질 수 없고, 둘째를 건사하면서 잠이 참으로 모자란 나날이 거듭 찾아올 테지. 새벽에 일어나 어제 하루 찍은 사진을 갈무리할 때마다 생각한다. 날마다 새롭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신나게 노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며 생각한다. 아이잖아. 아이니까 아이답게 놀잖아. 더 찬찬히 바라보고 한결 따스히 껴안으며 힘껏 기운내며 함께 살아갈 고운 목숨이자 길동무인 줄을 새삼스레 느껴야지.

 치마를 위에 두르고 부채를 둘 쥐며 자전거를 탄다고 깝죽대면서 텃밭 둘레에서 맴도는 아이를 한참 바라보면서 한참 사진을 찍은 하루가 지나갔다. (4344.5.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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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5-21 10:59   좋아요 0 | URL
저는 신발을 왼쪽과 오른쪽 바꿔 신는 걸 좋아했어요.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맞는 작은 고무신도 있나 보죠?
앙증맞고 귀여워요~^^

숲노래 2011-05-21 13:11   좋아요 0 | URL
더 작은 고무신도 있답니다~ ^^*
 



 단풍나무


 시골자락 묵은 밭에 단풍나무가 자란다. 단풍씨가 퍼져서 예까지 뿌리를 내렸는가 보다. 가까운 단풍나무가 7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을까. 바람이 단풍나무가 있는 데에서 이쪽으로 부니까, 단풍씨가 이리로 퍼졌겠구나. 퍽 여러 해 묵은 밭에서 자라는 단풍나무는 여러 해에 걸쳐 용케 살아남은 셈이다. 사람들 발길에 밟히거나 채이지 않았고, 밭갈이를 한다며 뽑히지 않았으며, 푸성귀를 심어 기른다며 꺾이지 않았다. 앞으로 이 묵은 밭이 묵은 밭 그대로 남는다면 이 단풍나무도 어린나무를 지나 어른나무가 되겠지. 머잖아 묵은 밭 한복판에 ‘뜬금없이’ 단풍나무 한 그루 우뚝 섰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어린 단풍나무는 몇 해 앞서 아주 자그마한 단풍씨 하나가 흙으로 떨어져 힘껏 뿌리를 내린 다음 힘차게 살아내어 이만큼 자랐다. (4344.5.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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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과 빨래와 햇살과


 먼지바람이 중국부터 불어온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먼지바람이 불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한둘이 아닙니다. 숱한 까닭 가운데 하나로, 한국에서 사고파는 수많은 물건을 중국에서 지은 공장에서 만듭니다. 얼마 앞서 삼천리자전거 한국 공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지만, 얼마 앞서까지는 한국 자전거회사에서 만드는 모든 자전거를 중국이나 대만에서 만들었습니다.

 한국땅에도 공장이 많으나 중국땅에는 공장이 훨씬 많습니다. 게다가 중국땅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을 한국에서 꽤나 많이 사들이거나 또다른 나라로 팔기 때문에, 중국에서 한국 쪽으로 부는 바람은 먼지바람이나 공해바람이 될밖에 없습니다.

 봄날 봄바람 같지 않은 거세거나 드센 바람이 붑니다. 그래도 이 바람은 숲나무 사이를 지나 멧골자락 작은 집 앞마당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건드려 나부껴 줍니다. 햇살하고 숲하고 바람을 쐬면서 빨래가 보송보송 마릅니다.

 집식구 빨래를 하는 아버지는 그저 비누질과 헹굼질을 할 뿐입니다. 비누질과 헹굼질을 마친 빨래는 숲과 바람과 햇살한테 맡깁니다. 숲과 바람과 햇살은 모든 빨래를 따사롭고 넉넉하게 보듬어 안습니다. (4344.5.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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