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한테 책 읽히는 누나


 어머니가 저한테 했듯이, 아버지가 저한테 하듯이,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 곁에 누워서 조그마한 책을 위로 척 올린다. 석 돌을 앞둔 첫째는 한글은커녕 알파벳 하나 모른다. 한글책인지 영어책인지 모르면서 영어 그림책을 어떻게 골라내어 펼쳐 들고는 제 동생한테 읽어 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쫑알쫑알 말마디를 쉴새없이 읊는다. 펼친 쪽에서 웬만큼 쫑알쫑알 했다 싶으면 가슴에 책을 대고 다음 쪽으로 넘겨 다시 쫑알쫑알 노래를 한다.

 요즈음 들어 집일에 너무 치이면서 첫째한테 그림책 읽히기를 거의 못하며 지나간다고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고, 아버지는 집일에 허덕이느라, 첫째랑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그림책을 읽지 못하는데, 첫째 아이는 제 갓난쟁이 동생한테 어여쁜 짓을 하는구나. (4344.7.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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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 씨앗


 복숭아를 달콤하게 먹고 나면 굵직한 씨앗이 나옵니다. 복숭아 씨앗은 딱딱한 껍데기에 싸여 안쪽에 곱게 깃듭니다. 이 씨앗이 보드라운 흙 품에 안겨 힘차게 뿌리를 내리면 복숭아 새싹이 돋고, 이 복숭아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서 복숭아나무로 큰다면, 사람들이 맛나게 즐기는 복숭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복숭아 씨앗부터 돌보아 어린나무로 키운 한 그루를 장만해서 복숭아나무를 심어 복숭아를 얻을 수 있겠지요. 누군가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돈을 번 다음 복숭아 열매를 저잣거리에서 장만할 수 있을 테고요. 어느 쪽이 되든 복숭아를 먹기는 똑같습니다. 스스로 복숭아나무를 돌보며 복숭아 열매를 얻든, 돈으로 저잣거리에서 복숭아 열매를 사든, 복숭아를 먹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복숭아 한 알을 먹는 매무새와 삶은 서로 다릅니다.

 손수 모판을 만들어 모를 심은 다음에 피를 뽑고 논둑 김을 맨 다음 낫으로 벼를 베어 낟알을 하나하나 떨군 다음 키질을 해서 돌을 고르고, 나중에 방아를 찧어 겨를 벗긴 다음 쌀을 조리로 일고 나서 잘 씻어서 쌀뜨물로 된장국을 끓이고 이 쌀로 밥을 지어 먹을 때에는, 그저 돈만 벌어 쌀을 사다 먹을 때하고 같을 수 없겠지요.

 어느 쪽이 가장 옳은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자가용을 몰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가용으로 씽씽 내달리지 않고서는 바쁜 일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몹시 바쁘고 힘들면서도 자가용을 몰지 않고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걷거나 버스나 전철을 탑니다.

 옳으니 그르니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꼭 따져야 한다면, 내 삶을 어떻게 빛내고 내 꿈을 어떻게 펼치며 내 하루를 어떻게 즐기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과 아이돌보기를 하느라 꼬박 보내느라 책을 한 번도 손에 쥐지 못합니다. 아니, 손에 책을 쥐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손에서 물기 마를 겨를이 없으니 이대로 휘몰아치면서 눈이 저절로 감겨 고스란히 곯아떨어질 판입니다. (4344.7.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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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만 원


 집에서 쓰는 셈틀이 갑자기 맛이 간다. 풀그림이 담겨 셈틀을 움직이는 저장장치가 더는 돌아가지 않는다. 어떻게 되살릴 길이 없고 손쓸 길이 없다. 자전거 수레 뒷자리에 셈틀을 싣는다. 아이는 수레 앞자리에 태운다. 읍내 셈틀집에 들고 가서 맡긴다. 읍내에 나가는 길에 수레가 꽉 찬 느낌이다. 수레 뒤쪽에 수박 한 통보다 더 무거운 셈틀이 버티니, 오르막을 오를 때에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하다. 그래도 빗길 오르막을 다 올랐고, 구름이 포근하게 감싸는 야트막한 음성 멧봉우리를 아이랑 함께 바라볼 수 있다. 숯고개 꼭대기에서 살짝 다리를 쉬면서 아이한테 저 멧자락이랑 구름을 보자며 이야기한다.

 이윽고 가게 일꾼한테는 낮밥 먹을 때가 되기에 다시금 발판을 밟는다. 이제는 뒤에서 수레를 밀어 주는 자전거가 된다. 오르막과 달리 내리막은 금세 휭 하고 내려온다. 곧 읍내에 닿고, 셈틀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는 셈틀을 꺼낸다. 셈틀을 맡기면서 다 고친 다음에는 짐차에 실어 가지고 와 달라고 이야기한다. 도무지 다시 들고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한창 저장장치를 만지작거리던 셈틀집 일꾼은 이 녀석을 되살리기 어렵겠다고 말한다. 되살리는 데에 보내도 다 되살리기는 힘들 텐데 30만 원이 든단다. 한숨을 내쉬며 망설인 끝에, 30만 원은 다음에 어찌저찌 살림돈을 조금 모으고 나서 들이기로 하고, 아이 어머니가 쓸 셈틀을 하나 새로 장만하는 길을 찾기로 한다. 새로 셈틀 하나 장만하는 데에 저장장치 1테라를 더 붙여 46만 원이 든단다.

 읍내 가게에서 가래떡을 산다. 저녁에는 굵은 가래떡을 잘게 썰어 감자떡볶이를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빗줄기가 그친다. 아까 지나온 숯고개 꼭대기에 다다를 무렵, 아이는 수레에서 새근새근 잠든다. (4344.7.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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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7-11 17:32   좋아요 0 | URL
왠만하면 물건을 고쳐서 사용하고 싶어도 요새는 참 희안하게도 새걸로 사게끔 하는 요상한 상황이 많습니다-_-; 기왕에 정도 들었고, 사용법도 익숙한 물건인데다가 어쩔수없이 수리시간이 걸리더라도 고칠수 있었으면 더 좋겠는데 말입니다.

숲노래 2011-07-11 21:08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쓰고 새로 버려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맞추어지잖아요. 버리고 새로 사야 경제성장률도 올라가고요......

카스피 2011-07-12 11:05   좋아요 0 | URL
뭐 저도 오래된 컴이 있지만,이젠 거기 맞는 부품도 안나와서 오히려 사는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25만원짜리 노트북을 이마트에서 행사했는데(내요이 좀 복잡하죠.원래는 55만원인데 우리 카드를 사용하면 30만원 상품권을 준다고 하더군요),살까 말까 망설이다 못샀읍니다.역시 돈이 문제에요 ㅜ.ㅜ

숲노래 2011-07-12 16:44   좋아요 0 | URL
더 좋기로는 타자기,
가장 좋기로는 손이지 싶어요...
컴퓨터는 참...

카스피 2011-07-12 17:15   좋아요 0 | URL
타지기도 예전에 써봤는데 이거 글자 하나 틀리면 수정하는 것이 넘넘 힘이 드는게 단점입니다ㅜ.ㅜ
 


 아줌마 자전거, 아저씨 자전거


 일본 사진쟁이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책 《ト-キョ-·アルキ》(新潮社,2009)를 읽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기에도 ‘애 둘을 태우는 아줌마 자전거’ 모습이 들어왔고, 어김없이 찍혔다. 아이 하나는 자전거 앞이나 뒤에 걸상을 붙여 앉힌 다음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마실을 다니는 아주머니가 한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꽤 있다. 이러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분 또한 제법 많다.

 그런데 한 가지는 없다. 아이를 둘씩 자전거에 태우며 저잣거리에 장보러 다니는 아주머니는 있지만, 아이를 하나라든지 둘을 자전거에 태우며 저잣거리에 장보러 다니는 아저씨는 없다(또는 아주 드물다). 아이를 둘씩 자전거에 태우며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데려오는 아주머니는 흔하게 만나지만, 아이를 하나라든지 둘을 자전거에 태워 어린이집을 드나드는 아저씨는 없다(아니면 아주 드물다).

 이제는 아주머니도 자가용을 많이 몬다.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저씨는 으레 자가용을 몬다. 아주머니는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며 장보기를 마치거나 어린이집에 들러 집으로 돌아오고도 집안일을 시원시원 해낼 뿐 아니라, 밥도 예쁘게 차린다. 아저씨 가운데 땀 뻘뻘 흘리며 자전거로 아이들을 태운 다음, 집에서 집안일을 거뜬히 치르면서 밥 또한 곱게 차리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아저씨들은 자전거를 몰아도 혼자 씽씽 내달리는 비싸구려 자전거에만 눈길을 두곤 한다. (4344.7.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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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종이


 두 군데 출판사 아는 분한테 전화를 걸어 신문종이 한 주치 모아서 보내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책짐을 싸는데 신문종이가 많이 들어 모자란다고, 시골에서는 신문종이 얻기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두 곳 두 분이 고맙게 신문종이를 한 상자씩 보내 주었다. 한 분은 골판종이까지 묶어서 보내 주었다. 오늘 두 번째 상자를 받아 끌르는데, 상자에 가득한 빳빳한 신문이 참으로 푸짐하게 보였다. 벌써 보름 넘게 집일과 아이키우기와 책짐싸기를 하느라 등허리가 휠 노릇이지만, 이 빳빳한 신문종이를 위아래로 대어 책을 싼다고 생각하니까 콧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책을 싸자면 힘들어서 책은 못 읽잖아? 하기는, 지난 보름 동안 하루에 한 쪽 읽기도 몹시 벅찼다. 어쩌면, 이렇게 고되며 힘에 부치는 나날일 때에,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읽을 만해야 참말 책다운 책이라 할는지 모른다. 첫째 아이 옷가지를 빨면서 아이를 씻기고, 다 마른 빨래를 걷고 새 빨래를 널고 나서 기지개를 켠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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