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는 헌책방


 엊저녁 서울 ㅎ동에 오래도록 자리하며 책삶과 책사랑을 나누어 온 헌책방 일꾼 한 분한테서 전화가 오다. ㅎ동 헌책방 일꾼은 이제 더는 헌책방 살림을 꾸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당신 헌책방에 건사한 책을 통째로 넘겨받을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며, 한번 알아보아 주면 좋겠다 하면서, 문을 닫기 앞서 밥 한 그릇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수많은 동네새책방이 일찌감치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수십 군데나 수백 군데가 아닌 수천 군데 동네새책방이 참으로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나 통계청에는 ‘한국에서 문닫은 동네새책방 숫자’를 해에 따라 표로 만들었을까. 이런 통계를 갖추었을까. 책을 읽자느니 책을 읽히자느니 하지만, 정작 책을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사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마음을 쓰는 공무원이나 책벌레나 평론가나 지식인이나 기자는 몇이나 있을까.

 헌책방 일꾼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러 서울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속이야기를 속시원히 나눌 만한 책손이 나날이 줄다가는 그예 자취를 감추는 오늘날이기에 헌책방 일꾼 한 사람은 책방살림 꾸리기 힘드셨겠지요. 밥동무이든 말동무이든 술동무이든 고작 하루밖에 안 될 테지만, 마지막 책동무이든 내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숱하게 많던 동네새책방들이 문을 닫던 때, 동네새책방을 고이 이어오던 그분들은 마지막 자리에서 누구하고 마지막 밥과 말과 술과 책을 나누었을까. 문을 닫는 헌책방이 있으면 문을 여는 헌책방이 있을 테고, 문을 닫는 가게만큼 문을 여는 가게가 있겠지.

 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서울에는 자가용도 많고, 서울에는 아파트도 많고, 서울에는 출판사도 많고, 서울에는 돈도 많은데, 서울에는 헌책방 하나 동네에서 예쁘장하게 살아숨쉬기란 참 버겁구나. 아, 그러고 보니, 서울에는 자전거도 많고, 비싼 자전거도 많으며, 자전거 동아리도 참 많구나.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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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봉오리


 노란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합니다. 인천에서 살아가던 때에도 골목마다 터질 듯 말 듯한 봄철 꽃망울을 어디에서나 만났습니다. 집에 거는 달력은 으레 한두 달 뒤이기 일쑤이지만, 골목을 거닐면서 봄이 오고 여름이 찾아오며 가을이나 겨울이 되는 줄 느꼈습니다. 멧기슭 따라 아이하고 천천히 거닐면서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는다고 느낍니다. 올 한 해 새로 찾아와 주는 봄볕을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맞아들입니다. 바람이 제법 쌀쌀해 아직 스산하구나 싶지만, 드디어 집안 물이 녹아 집에서 빨래를 합니다. 집에서 물을 쓰며 빨래하는 일이란 이처럼 고맙구나 하고 새삼 깨달으며 봄을 반깁니다. (4344.3.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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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30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1-03-30 00:49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꽃은 봉오리라고 하는군요 @.@ 고맙습니다~
 

[헌책방 사진 이야기] 9. 인천 마을로가는책집 2007.가을.


 예순 해 동안 헌책을 만지며 여든 나이까지 헌책방을 지키다가 조용히 일을 그만둔 할아버지 한 분 이야기를 다루는 신문글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헌책방 할아버지 한 사람이 숨을 거둔들 지역신문 끄트머리 궂긴 이야기에라도 실리는 일이란 없습니다. 두 군데 헌책방 일꾼은 신문기자가 책손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신문에 궂긴 이야기로 몇 줄 실린 적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헌책방 일꾼 이야기를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헌책방이란 밖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거나 팔려는 곳이 아니니까요. 책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들 조그마하면서 어여쁜 손길을 살포시 어루만지는 조용한 곳이 헌책방이니까요. 내 마음밭을 살찌울 책을 내 손으로 고른 다음, 헌책방 할아버지가 찬찬히 둘러보면서 당신 마지막 손길을 묻히며 내미는 책을 받아들어 돈 몇 푼 책값으로 치르고는 내 가방에 담아 집으로 돌아와 펼치면, 헌책방 할배 삶자국도 살짝 읽습니다. (4344.3.29.불.ㅎㄲㅅㄱ)


- 2007.가을. 인천 배다리 마을로가는책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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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과 함께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이 나라 지식인들은 러시아사람이 했던 일을 따라 “민중 속으로”를 외치며 일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외침은 되풀이됩니다. “민중한테 다가서야 한다”라느니 “현장 속으로 가야 한다”라느니.

 그러나, 나는 생각합니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이런 외침말은 너무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중이라 하는 여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다가 어느 날부터 반짝 하면서 여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다가 머리로만 지식조각을 움직여 여느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품는대서야 여느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느 사람과 내가 딴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여느 사람이어야 하고, 여느 사람이 나여야 합니다.

 “민중한테 내려가야 한다”느니 “민생을 읽어야 한다”느니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부질없습니다. 왜 ‘내려와야’ 하고 왜 ‘읽어야’ 하며 왜 ‘함께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내 삶이 바로 여느 사람 삶이라면 내려가든 올라가든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이 곧 여느 사람 삶이라면 내 삶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곧 여느 사람 삶을 읽는 일입니다. 내 삶이 언제나 여느 사람 삶일 때에는 하루하루 내 삶을 일구는 나날이 곧바로 여느 사람과 함께하는 나날입니다.

 밖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돌아갈밖에 없습니다. 밖에서 찾아온 사람들로서는 ‘여기(여느 사람들 살림터)’가 저희 보금자리나 마을이나 삶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외치고 싶다면, 진보를 외치고 싶다면, 무슨무슨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이나 뭔가를 외치고 싶다면, 그냥 여느 동네에서 조용히 살아가면서 내 하루를 알뜰살뜰 착하며 착다이 일구면 됩니다. 가난하거나 후미진 동네 골목 담벼락에 벽그림을 그린대서 동네가 나아질 까닭이 없습니다. 동네사람들 이야기를 녹음기에 담거나 사진 몇 장 찍는다고 다큐멘터리라든지 지역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지내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면 넉넉히 이루어지는 우리 마을 예쁜 삶입니다. (4344.3.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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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하고 영화 보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셈틀 앞에 앉으면 아이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일이 바쁘면 아이가 영화 노래를 부르더라도 안 된다고 끊을 수밖에 없지만, 아이한테 영화 보자면서 셈틀 화면 한쪽 창에 영화를 띄우면 나 또한 이 영화를 함께 보고야 만다. 아이가 볼 영화를 켤 때에는 내 일이란 조금도 할 수 없다. 아니,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일이라든지 마음을 움직여 글을 쓰는 일은 하지 못한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본 영화이더라도 다시금 영화에 빨려든다.

 아이 스스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빨려드는 영화일 때에만 아이 스스로 좋아한다. 한 번 보면서 재미없다고 여기는 영화는 보다가 자꾸 딴짓을 하거나 아버지 무릎을 떠나 방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논다. 볼 때마다 새롭게 좋은 영화는 자꾸자꾸 다시 보고 싶어 한다.

 아이는 그림책을 볼 때에도 스무 번 마흔 번 예순 번을 거듭 보면서 재미있는 그림책을 다시 본다. 백 번 이백 번 다시 넘길 만한 그림책이 아니라면 아이는 처음부터 따분하다고 느끼는구나 싶다. 그런데 아이만 따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인 나 또한 아이가 따분하다고 느끼는 그림책을 재미있다고 느낄 수 없다. 아이가 따분하다고 느끼는 그림책은 참말 따분하다고 느낄밖에 없는 아쉬운 구석이 곳곳에 드러난다.

 어린이책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참 마땅한 소리이다. 어린이 눈높이란 ‘어린이한테 발맞추어 유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어린이부터 즐겁거나 재미나거나 신나게 읽으며 언제라도 다시 보도록 이끄는’ 일이다. 그러나 푹 절거나 꽁꽁 사로잡히도록 해서는 안 되지. 꿈에서 내 자리로 돌아오고, 내 자리에서 꿈으로 나아가며, 다시 꿈에서 내 자리로 돌아오다가는, 거듭 내 자리에서 꿈으로 걸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느낀다. 꿈에서 삶을 보고 삶에서 꿈을 본다.

 쉰두 가지 이야기로 이어지는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아이하고 함께 본다. 누군가 고맙게 옛 만화영화 동영상을 올려놓기에 볼 수 있다. 열넷째 이야기하고 열다섯째 이야기를 보면, ‘네로’가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네로한테는 ‘종이 = 사치스러운 물건’이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싶으나 종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흙바닥이든 나무판자이든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림을 그린다. 네로 스스로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터전과 네로 스스로 마주하며 사귀는 사람을 사랑스레 느끼기에, 이 사랑스레 느끼는 결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네로가 그리는 사랑스러운 그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느끼는 사람은, 네로와 마찬가지로 착하며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네로처럼 착하며 사랑스럽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네로가 그린 놀랍도록 착하며 사랑스러운 그림을 들여다보면 가슴 한켠이 쿡 찔리는 듯 놀라워 하기는 한다.

 착한 마음을 이길 마음이란 없다. 왜냐하면 착한 마음이란 누구하고 싸울 마음이 아니요 누구하고 싸움박질을 해서 우악스레 밟거나 이기려는 마음이 아닐 뿐더러 누구를 아프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니까. 착한 마음은 언제나 착하기만 할 뿐이다. 칼도 총도 무기도 없으며, 거친 말도 욕지꺼리도 없다. 사랑스러운 마음 또한 오로지 따스한 사랑일 뿐, 차가운 미움이라든지 매몰찬 등돌림이라든지 무시무시한 등처먹기 따위란 깃들지 않는 마음이다.

 나는 착한 영화가 좋다. 나는 사랑스러운 책이 좋다. 나는 착하지 않은 영화는 싫다. 나는 사랑스럽지 않은 책은 따분하다. (4344.3.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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