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반 빛살


 자동차 없던 옛날에는 새벽 네 시 반 빛살을 새벽 네 시 반 빛살로 고스란히 받아들였겠지요. 자동차 드물던 지난날에는 새벽 다섯 시 반 빛살을 새벽 다섯 시 반 빛살이라며 그대로 맞아들였을 테고요.

 자동차 넘치는 오늘날 자동차 없거나 드물던 예전 삶자락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동차가 있건 없건 많건 적건, 새벽은 새벽입니다. 멧골 깊은 조그마한 집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바라보는 하늘은 조용히 동이 트는 하얀 빛깔입니다. 햇볕이 있어 푸나무가 자라고, 햇볕이 있기에 사람이 살아갑니다. 햇볕을 눈으로 느끼며 잠에서 깨고, 햇볕이 스러지면서 조용히 잠자리에 듭니다. 햇볕이 걸린 아침이나 낮에 잠을 잔다면 늦잠을 잔다 하지만, 햇살이 내리쬘 때랑 전기로 밝힌 등불이 비칠 때랑 사뭇 다릅니다. 밝은 낮 그늘진 데에서 누우면 눈이 안 아프지만, 전기로 밝힌 등불 둘레에 있으면 눈이 아픕니다. 햇볕은 내 눈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바람이 조용합니다. 아침나절 거세거나 매운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든 맵든, 이 바람은 내 몸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든 산들거리는 바람이든 내 몸을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전기로 돌리는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내뿜는 바람은 내 몸을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합니다. 몇 날 며칠이고 산들바람을 쐴 수 있으나, 몇 시간째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을 쐬면 몸이 망가집니다.

 숱한 작은 목숨이 얼크러진 흙을 밟으면 무릎이나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풀이 자라는 흙땅을 밟아도 무릎이나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공을 차는 선수들은 잔디를 깐 땅에서 신나게 뜁니다. 아스팔트 땅바닥에서는 공을 차지 않습니다. 아스팔트 땅바닥에서 뛸 수 없습니다. 아니, 아스팔트 땅바닥에서 신나게 뛰는 사람은 남보다 일찍 무릎이 다치거나 무너집니다. 제아무리 값비싸며 좋다 하는 신을 신었대도 아스팔트 바닥에서 오래 걷거나 달리거나 뛰면 무릎이 버티기 힘듭니다. 어느 사람이든 몸뚱이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도록 맞추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누구나 자연이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목숨이니까요.

 아이는 새벽 네 시 반 무렵 쉬가 마렵다고 깨더니 여태 잠들지 않습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어도 새벽녘 밝은 빛살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드러누울 수는 없었을까요.

 코피가 난 아이를 얌전히 자리에 눕혀 코를 닦고 머리를 주무릅니다. 아버지는 새벽 글쓰기를 하고 싶지만, 이내 일을 멈추고, 그림책 《펠레의 새 옷》(지양사,2002)을 들고 아이한테 갑니다. (4344.5.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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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60 : 책쉼터

 히로세 다카시 님이 1992년에 내놓은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프로메테우스출판사,2011)를 읽으면서 “그렇다면 핵무기는 대체 여태껏 무엇을 미연에 방지해 왔다는 것인가? 놀랍게도 ‘핵무기는 핵전쟁을 미연에 방지해 왔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이 믿기 힘든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믿고 있다. 핵무기가 없으면 당연히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160쪽).”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더없이 뻔하며 올바른 생각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토록 뻔하며 올바른 생각을 제대로 살피거나 찬찬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쪽에 핵무기가 있으면 저쪽에서 선뜻 공격하지 못한다지만, 이쪽도 저쪽도 핵무기가 없으면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쪽에 군대가 있으면 저쪽에서 섣불리 쳐들어오지 못한다지만, 이쪽도 저쪽도 군대가 없으면 전쟁이란 터지거나 생기거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핵무기가 있기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무기가 있으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이 있기 때문에, 또 명예라는 허울이 있고 돈이라는 껍데기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다툼과 싸움이 생깁니다.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이 모두 좋은 삶을 일구지는 않습니다만, 스스로 좋은 삶을 바라면서 좋은 책을 읽을 때에는 좋은 삶을 일굽니다. 좋은 책을 읽는다지만, 내 이름값을 높이거나 몸값을 높이려는 뜻에서, 이른바 ‘처세·경영’이나 ‘자기계발’을 하겠다면서 좋은 책을 읽는다면 좋은 삶을 일구지 못합니다. 그저 더 돈을 벌어들이거나 더 이름값을 높이거나 더 권력을 단단히 하려고 애쓰겠지요.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를 더 읽으며 “요즘의 미사일 경쟁은 규모의 우위에 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적을 순간적으로 격멸시키는 성능에 목적을 두는, 보다 잔인한 형태가 되었다(299쪽).”라는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전쟁이란 ‘내 나라를 사랑하며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이웃나라를 깡그리 죽여 없애는 짓’입니다. 군대란 ‘이웃나라 사람을 남김없이 죽이고 이웃나라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는 짓’을 재빨리 하도록 살인훈련을 하는 데입니다.

 미국이든 러시아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새 무기를 더 만들고 새 군대를 더 키우는 데에 돈과 힘과 겨를을 들인다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새 무기나 새 군대가 아닌, 착한 사람과 참다운 누리와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며 돌보는 데에 돈과 힘과 겨를을 들일 수 있기를 꿈꿉니다. 잘 팔리는 책만 잔뜩 쌓는 커다란 새책방보다는 마을사람 누구나 끌신을 신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실할 만한 작은 책쉼터가 온 나라 곳곳에 두루 자리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합니다.

 크고 북적거리는 책쉼터에서 다시금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나 자기계발 책만 들여다보는 삶이 아니라, 조그마하며 수수한 책쉼터에서 어른은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이나 《성의 패러독스》(숲속여우비,2011) 같은 책을 읽고, 아이는 《펠레의 새 옷》(지양사,2001)이나 《미스 럼피우스》(시공주니어,1998) 같은 그림책을 읽을 수 있으면 아주 기쁘겠습니다. 착한 삶을 사랑하며 착한 이웃하고 사랑을 나누는 어여쁜 작은 마을이 그립습니다. (4344.5.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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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꽃


 아직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과꽃은 아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터지려는 모과꽃이다. 나무가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잎이 참 어여쁜데다가 꽃까지 곱다. 모과는 맛이나 내음이 얼마나 좋은가. 모과 열매를 일컬어 못생겼다 하는 사람이 꽤 많은데, 생김새를 놓고 잘생겼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할 수 없다. 마음이 착해야 예쁜 사람이듯이, 속알이 여물어야 고운 열매라고 느낀다.

 모과는 이토록 고운 빛깔 꽃을 피우기에 그토록 속이 꽉 차며 야물딱진 열매를 맺는구나 하고 느낀다. 따뜻한 곳에서는 4월 끝무렵에 벌써 꽃을 피운 듯한데, 우리 멧골자락에서는 이제부터 꽃봉오리가 터진다. (4344.5.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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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둑


 보리둑 꽃은 퍽 작습니다. 오얏나무 꽃이나 복숭아나무 꽃하고 견주면 참 작습니다. 화살나무 꽃하고 비슷한 크기라 할 텐데, 화살나무 꽃은 풀빛이라서 보리둑 꽃봉오리하고 견주면 눈에 거의 안 뜨입니다. 보리둑 꽃하고 화살나무 꽃이 나란히 있으면, 사람들은 보리둑 꽃만 알아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리둑 꽃이랑 오얏나무 꽃이 나란히 있으면 으레 오얏나무 꽃을 알아보겠지요.

 보리둑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단풍나무 꽃봉오리가 벌어질 때하고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단풍나무 씨앗은 꽃보다 조금 클 뿐 퍽 작은데, 보리둑은 꽃봉오리가 터지니까 단풍꽃하고 대면 퍽 크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꽃 크기만큼 열매 크기가 달라질는지 모르겠습니다. 능금이나 배는 꽃 크기를 헤아리면 더욱 큰 열매가 맺힙니다만, 능금꽃이나 배꽃은 보리둑꽃보다 훨씬 커요. 훨씬 큰 꽃이니 훨씬 큰 열매를 맺을 테지요. 그런데 감꽃은 보리둑꽃보다 조금 더 크다 할 만하지만, 보리둑 열매는 자그맣고 감 열매는 제법 큽니다.

 더 생각해 보면, 보리둑 꽃은 흐드러지게 수없이 핍니다. 감꽃도 흐드러지게 핀다 할 테지만, 감꽃은 비바람에 쉬 떨어져요. 감꽃이 모두 감열매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감꽃이 알뜰히 여물지 못하고 제법 떨어지고, 또 차츰 여물던 감열매 또한 푸른 빛깔일 때에 꽤 떨어져야 다른 감알이 잘 여뭅니다.

 바알간 열매를 맺는 보리둑 꽃봉오리는 하얗습니다. 오얏 열매를 헤아리면, 오얏도 열매는 불그스름하거나 검붉다 할 만한데 꽃은 하얗습니다. 하얀 꽃에서 불그스름하거나 검붉은 열매가 맺히는구나 하고 또 한 번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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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씨


 우리 멧골자락 단풍나무 한 그루에서 벌써 씨가 맺는다. 어제와 그제는 이 단풍나무를 미처 못 보았으니, 요 며칠 사이에 씨가 맺지 않았나 생각한다. 5월을 갓 넘긴 이무렵, 단풍나무는 단풍꽃을 떨구면서 단풍씨를 맺는구나. 단풍나무는 참말 일찍 꽃과 씨를 내고 나서 겨우내 붉디붉은 단풍잎을 예쁘게 지키는구나.

 단풍씨는 단풍꽃처럼 사람들 눈에 거의 안 뜨이면서 아주 조용히 흙으로 떨어지겠지. 아스팔트가 깔린 도시에 심은 단풍나무는 꽃을 피운들 알아볼 사람이 없고, 씨를 떨군들 싹이 틀 자리가 없다. 오직 흙바닥 멧자락에서 살아가는 단풍나무일 때에만 꽃을 즐길 수 있고 씨가 살아날 수 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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