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잎

 봄철 봄비가 쏟아지면서 봄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거센 봄비가 그치며 거칠던 봄바람이 함께 잠든다. 이동안 봄철을 곱게 빛내던 멧자락 벚꽃잎은 거의 떨어진다. 거센 봄비와 거친 봄바람이 아니었다면 하늘하늘 부는 바람결에 따라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비가 내렸을 텐데. 그래도 벚꽃잎이 몇 남아서 우리 손바닥 텃밭에까지 조용히 떨어진다. 씨감자를 텃밭에 마저 심는 동안 하얀 꽃잎 몇몇 살포시 내려앉는다. (4344.5.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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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2


 책으로는 훌륭한 소리로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지만, 막상 집에서는 가부장 권력을 휘두르는 이는 ‘진보’인가 ‘남녀평등주의’인가 ‘평화운동’인가.

 자격증과 졸업증을 바랄 뿐 아니라, 이런 종이쪽이 없으면 벼랑으로 내몰기 때문에, 반성문이든 사상전향서이든 무어든 자꾸자꾸 글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른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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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1


 ‘사상전향서’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그러나, 이런 종이쪽을 썼대서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이런 종이쪽은 사람을 얽어매려는 쇠사슬이다. 주민등록증에 붉은 줄을 긋고는 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셈하고 마찬가지이다.

 반성문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종이쪽이자 모진 폭력이다. 그러나, 이 종이쪽을 써야 비로소 뉘우쳤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글은 그럴싸하게 쓰면서 삶은 엉터리라면 반성문이란 무슨 뜻인가? 기록? 자료?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한 사람 ‘성적’이나 ‘재주’를 보여주지 않듯이 반성문이란 어느 한 사람 삶을 뉘우친 자국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이 한 사람이 살아온 나날과 부대낀 나날이 온삶과 온사랑으로 ‘뉘우침글’이 된다.

 반성문 없이 옳고 바르게 살아갔으나 반성문을 안 썼으니까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리거나 떠들어도 되는지 궁금하다. 시인 신동엽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平山八吉’이라는 창씨개명을 놓고, 시인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친일시를 놓고, 따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반성문이란 삶으로 보여줄 노릇이지, 글로 적바림한대서 뉘우침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쪽이 아닌 온몸에 아로새긴 뉘우침글을 읽어야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을 수 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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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글과 읽는 글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쓰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녔거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적게 다니거나 못 다녔거나 책을 조금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라면 나중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겠거니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에도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알아듣거나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 깃든 마음을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밥을 먹고 국을 마십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이 밥그릇을 비우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른처럼 젓가락질이나 숟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대로 젓가락질을 하고, 아이는 아이 밥통만큼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요.

 아이한테 어른처럼 밥그릇을 비우라거나 젓가락질을 하라고 바라거나 시킬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사진기를 손에 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른한테 나무라듯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눈높이로 다가서야 하고,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밭에 걸맞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으니까, 이 글을 못 알아듣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못 느낀다 할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누가 이 글을 읽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이 사뭇 달리 읽히겠지요. 아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삶높이를 곱씹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 삶높이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돌이키면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떠벌이는 글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혼자 똑바로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나 언제나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걸림돌이란 너무 무섭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꽃이 참 예뻐요.”라든지 “밥이 참 맛나요.”라든지 “물이 참 맑아요.”라든지 “하늘이 참 파래요.”라든지 “바람이 참 따스해요.”라든지 “소리가 참 고와요.”라든지 “흙이 참 보드라와요.”라 할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마음밭이라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입니다. 꽃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어떤 이름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이기 마련이기에,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누군가 ‘개불알꽃’이라 하든 말든, 이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괭이불알꽃’이라든지 ‘소불알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누군가 ‘제비꽃’이라 하든 말든,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땅보라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듯 자그맣게 피어나는 보라빛 꽃송이인 만큼,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든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내 깜냥껏 슬기로이 곰삭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가 읽으며 깨달은 삶을 내 손으로 사랑하고 내 마음으로 아끼면서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1만 원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비손하면서 부디 아픔과 걱정을 잊으면서 웃고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빨래를 거들 테고, 누군가는 김치 한 접시를 갖다 줄 수 있겠지요.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대명종,2010) 29권을 읽으면, 205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대째 어시장 가게에서 일하는 ‘마사’라는 사람이 어린 날 당신 아버지한테 “아버지, 왜 같은 전갱인데 저렇게 분류를 하는 거야?” 하고 여쭙니다. 마사네 아버님은 “그건 말이다. 같은 전갱이라도 맛이 다르기 때문이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전갱이일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물고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다른 ‘전쟁이’이고요.

 이오덕 님이 쓴 책을 마흔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건호 님이 쓴 책을 스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남주 님이 쓴 시집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을 열다섯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화책이나 동시책을 서른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한 권만 읽어도 ‘아무개를 다 알았다’고 하겠지요. 누군가는 이오덕이든 송건호이든 리영희이든 김남주이든 권정생이든 이원수이든 다 똑같은 ‘책’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한 사람이 내놓은 책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깃들고, 같은 책 한 권일지라도 이 한 권에 깃든 꼭지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배었다고 느끼겠지요.

 누군가 글을 씁니다. 누군가 글을 읽습니다. 누군가 책을 만듭니다. 누군가 책을 삽니다. 오늘도 해는 뜨고 오늘도 달이 뜨며 오늘도 바람이 불고 오늘도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도 개구리는 알을 깨며 왁왁 울 테며, 오늘도 왜가리는 개구리 먹이를 찾아 이 논 저 논 누빌 테지요.

 아름다운 책은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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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일은 우스우니까


 집안일을 도맡지만, 이 한 가지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집안일 말고 집밖일을 도맡는다. 올해에는 손바닥만 한 참말 작은 텃밭을 알뜰살뜰 일굴 꿈을 꾼다. 여기에 내 일을 해 보고 싶어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한다. 이러는 동안 아이는 뒷전이 되며 심심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하고 틈틈이 함께 놀거나 아이하고 이곳저곳을 다니거나 한다.

 완다 가그 님이 쓰고 그린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라는 그림책을 보면서 한동안 속이 후련했다. 그렇지만 이 그림책은 그다지 사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이 그림책을 찬찬히 읽으며 집안일을 함께 맡으며 즐긴다거나 널리 헤아릴 만한 ‘한국 남자’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내 둘레에서 마주하는 ‘한국 남자’ 가운데 집안일을 안 우습게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 남자 가운데 스스로 집일을 맡거나 즐기면서 ‘집안일을 하는 보람과 기쁨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글로든 그림으로든 만화로든 사진으로든 춤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보여주는 사람을 만나기 대단히 힘들다. 그렇다고 한국 여자 가운데 스스로 집일을 맡거나 즐기면서 ‘집안일을 하는 웃음꽃과 이야기꽃과 삶꽃’을 글로나 그림으로나 만화로나 사진으로나 담아내는 사람을 만나기 또한 참 힘들다.

 집 바깥에서 일하거나 돌아다니면서 글·그림·사진 들을 이루거나 펼치는 사람들은 집안일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집안일을 할 겨를이 없이 집 바깥일로 몹시 바쁠 테니까. 언제나 집 바깥일에 둘러싸인 채 살아갈 테니, 집안일 이야기를 어디에서든 펼치지 않겠지. 그래도, 배우 김성녀 님이 쓴 손뜨개 이야기는 퍽 놀랐다. 배우로 일하면서도 손뜨개를 하며 즐겁다고 느끼니까.

 집안일은 날마다 되풀이하면서 늘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 생기며, 안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데다가 더 쌓이니까,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등허리가 휜다. 아니, 집 바깥으로 살짝 돌아다닐 엄두를 내기 힘들다. 집안에만 있는다 하더라도 집안일을 매조지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 나는 참말 우습다 이야기하는 집안일을 하느라 책방마실조차 제대로 못하는데다가 책읽기마저 거의 못하고, 더더구나 집안일을 한답시고 복닥이지만 집안일조차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 나는 바보이다. (4344.4.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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