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글이란


 느낌글이란 내 느낌을 적는 글입니다. 생각글이란 내 생각을 적는 글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느낌글하고 생각글을 헷갈리거나 잘못 압니다. 내 느낌을 적지 않았으면서 느낌글인 줄 알고, 내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생각글이라고 여기고 맙니다.

 글을 읽건 영화를 보건 일을 하건 사랑을 나누건, 어떠한 삶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왜 이러할까?’나 ‘이러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돌아보면서 느낌을 적을 때에 느낌글입니다. ‘이러하다면 나는 어찌저찌 해야겠다’ 하고 생각을 밝히면 생각글인데, 내가 스스로 받아들여 몸으로 움직이는 삶을 적을 때에 비로소 참다이 생각글을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내가 자가용을 타고 돌아다니는 일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는 일은 똑같다’ 하고 이야기했을 때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올바로 적는 느낌글이라 할 때에는, ‘내가 자가용을 타는 일이 어떻게 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는 일하고 똑같다고 이야기를 하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할까? 참말 이러할까? 참말 이러하다면, 나는 자가용을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참으로 이러하다는데 나는 내 어버이나 동무나 둘레 사람들이 자가용을 탈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자가용을 타는 일이 우리 삶터하고 어떻게 잇닿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 하고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 느낌을 적을 때에 느낌글이 됩니다. 생각글이라 할 때에는, ‘자가용이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꼼꼼히 살피고 따진 다음, 환경영향평가를 비롯해 한국 자동차 보유대수와 공해비율과 석유재벌 얼거리를 모두 돌아보고 나서, 이 모두를 한 자리에 얽으며 펼치는 내 생각’이 담긴 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는 커다란 잘잘못뿐 아니라 나 스스로 제대로 못 느끼거나 못 깨우치거나 못 알아채면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잘잘못으로 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알아보면서 펼치는 내 생각’이 담겨야 비로소 생각글입니다.

 느낌글을 쓸 줄 모르면 책을 읽어도 내 느낌을 붙잡지 못합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떠한 책을 읽어도 좋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글을 쓰지 못하면 나한테 빛과 소금이 되는 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학교를 제아무리 오래 다니거나 훌륭한 스승을 만났더라도 참생각을 스스로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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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안 몬다


 너무 마땅하지만, 너무 마땅한 이야기를 헤아리지 않거나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몹시 많기 때문에 머리말을 붙인다. 자동차를 몰면서 일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들지 않는다. 짐을 짐차에 실어 나른다든지, 버스나 택시를 모는 사람은 이 이야기하고는 다른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안 몬다. 참 안 바쁜 사람이 자동차를 몬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몰 겨를이 없다. 참 바쁜 사람은 저마다 맡은 일을 치르거나 살림을 돌보거나 삶을 일구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에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바쁜 척하는 사람하고 무엇이 바쁜지를 모르는 채 휩쓸리는 사람하고 안 바쁜 사람이 자동차를 몬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몰면서 저마다 꾸리는 삶을 길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가 아니라 두 다리와 온몸으로 이 땅을 밟으면서 제 보금자리를 보살핀다. 참 바쁜 사람은 참으로 바쁘기 때문에 가장 눈여겨보면서 사랑해야 할 일을 한다. 사랑해야 할 일은 자동차 몰기가 아니다. 가장 눈여겨볼 일은 자동차 몰기가 될 수 없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하고 보내는 나날을 사랑해야 한다. 내 삶자락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일을 가장 눈여겨보아야 한다.

 책 하나를 읽는다 할 때에는 내가 가장 사랑할 책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 책 하나를 읽는 동안 내 가슴으로 깊이 아로새길 이야기를 느껴야 한다. 책 하나를 덮고 나서 이 책이 내 삶으로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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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62 : 알고 싶어 읽는 책


 내가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읽을 수 있고, 다 알면서 재미가 있다고 느껴 책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 아는데 애써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영화로 본다든지, 학교에서 강의나 수업을 들을 까닭이란 없어요. 내가 모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힘껏 책으로 읽습니다. 내가 배워야 할 이야기라서 학교를 찾아가 강의나 수업을 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개숙여 차근차근 새겨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과 글로 조그맣게 이루어진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밟은 숲을 밟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여느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디깊다 할 만한 숲속을 헤맸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나는 흙 위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은 곰이 다니는 길이었습니다(13쪽).”는 말처럼, 사람길이 아닌 곰길을 걷거나 다람쥐길을 걷습니다. 연어길에 함께 서거나 사슴길에서 다리를 쉬며 하룻밤을 묵습니다. 사진책 《숲으로》는 여느 사람들 여느 눈썰미와 여느 삶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그러나, 《숲으로》는 아주 남다르거나 아주 새로운 이야기이지는 않습니다. 이제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이 되었을 뿐,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터에서 다 다른 사랑을 나누면서 다 다른 삶을 일구던 곳 이야기를 밝힙니다. 더 좋은 삶이나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땅과 사랑과 삶을 바라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니다. 더 큰 도시로 찾아듭니다. 도시로 몰려들어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작은 도시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지내더라도 물질문명을 똑같이 즐깁니다. 입으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한국땅 원자력발전소를 근심하지만, 막상 몸으로는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쓸 뿐 아니라, 전기를 써서 만드는 수많은 물질문명을 안 쓰거나 덜 쓰는 길을 살피지 않아요.

 숲이 숲다웁도록 하는 이야기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도록 하는 슬기를 깨닫지 않습니다. 삶이 삶답도록 하는 깜냥을 빛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답도록 하는 땀방울을 흘리지 않습니다.

 이즈막에 새로 나온 《원전을 멈춰라》(이음,2011)는 벌써 스물한 해 앞서 《위험한 이야기》(푸른산,1990)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스물한 해 앞서 이 나라 사람은 “위험한 이야기”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이라서 더 잘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날보다 책으로 조금 더 읽을 뿐입니다. 위험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고 싶어 읽는다기보다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지니까 읽습니다.

 무언가를 알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머리에 앎조각으로 담겠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알아차리면서 내 삶을 새롭게 일구겠다는 뜻이어야 비로소 알려고 애쓴 일이요, 배움이며 가르침입니다.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알도록(살도록)’ 할 이야기를 먼저 스스로 ‘알려고(살려고)’ 애쓰는 교사가 몹시 드뭅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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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우는 어른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가 어른을 키울 수 없습니다. 때때로 아이가 어른을 깨우치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을 키우지 못합니다. 오직 어른이 아이를 키울 뿐입니다.

 아이는 이것을 먹고 싶거나 저것을 갖고 싶다 말할는지 모릅니다. 아니, 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한테 아이가 먹고 싶다 해서 다 먹이지 않고, 아이가 갖고 싶다 하기에 다 장만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이가 먹어야 할 밥을 장만해서 먹이고, 오로지 아이가 갖추며 즐겨야 할 것을 장만해서 건넵니다.

 아이가 어떤 책을 읽으려 할 때에는 어른이 먼저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어른이 먼저 읽지 않은 책을 아이한테 섣불리 쥐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어느 책을 읽기 앞서 다른 어른이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듭니다. 곧, 내가 되든 남이 되든 ‘어느 어른이든 먼저 책을 알아보고 읽어서 책 하나로 태어나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책을 써서 읽고 만들어야 비로소 아이가 책 하나 손에 쥡니다.

 아이는 자가용이든 자전거이든 스스로 타지 못합니다. 어른이 장만한 자가용에 타는 아이요, 어른이 태우는 자전거에 타거나 어른이 마련한 자전거에 혼자서 타는 아이입니다. 어른이 자가용을 타면 아이도 자가용을 탑니다. 길들거나 익숙해집니다. 어른이 자전거를 타면 아이도 자전거를 타요. 어른이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하면 아이도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합니다. 어른이 숲을 좋아해서 시골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숲을 좋아하면서 시골 아이로 자랍니다. 어른이 물질문명을 좋아해서 도시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물질문명에 젖어들면서 도시 아이로 큽니다.

 교사는 어른이 맡습니다. 교사를 어린이가 맡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쪽은 어린이요, 가르치는 쪽은 어른입니다. 어른은 아이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를 스스로 먼저 헤아릴 뿐 아니라 몸소 살아내고 나서야 아이한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머리에 든 지식으로 아이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지식이 아닌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살아내는 모습에 따라 교사가 가르치려는 이야기를 배웁니다. 교사가 살아내지 못하면서 지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가 하나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잘못 받아들이고야 맙니다.

 어른이 논밭을 일굴 때에 아이도 논밭을 일굽니다. 어른이 평화를 사랑할 때에 아이도 평화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 아이도 사랑을 나누려 합니다. 어른이 보리밥을 먹으면 아이도 보리밥을 먹습니다. 어른이 생활협동조합 회원이 되어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려 할 때에 아이도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는 길을 걷습니다.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시나브로 즐기기 마련입니다. 땀흘려 일하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땀흘려 일하는 보람을 몸으로 깨우치며 받아들입니다. 돈으로 일을 하고 돈벌이에 더 매달리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돈을 더 살피거나 섬기며 돈으로 무엇이든 하려고 나서기 마련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살아가면서 배웁니다. 어른은 교과서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교과서를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은 어른 삶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는 어른 삶을 바라보면서 저희 삶을 키웁니다. 어른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책 지식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손재주가 뛰어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따사롭거나 넉넉하거나 아름다이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을 참답거나 착하거나 슬기로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4344.6.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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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가용에 길든 아이
 ― 자동차 모는 어른 때문에 삶을 잃다



 어버이 되는 사람이 자가용에 길들면 아이 되는 사람 또한 자가용에 길든다. 교사 되는 사람이 학교라는 이름이 붙인 배움터에 자가용을 몰면서 오가면, 학생 되는 사람이 배움터라는 곳에서 자가용을 배운다.

 걸어다니는 어버이 곁에서 걸어다니는 아이가 태어난다. 걸어다니는 교사 곁에서 걸어다니는 학생이 자란다. 자전거를 타는 어버이 곁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큰다. 자전거를 타는 교사 둘레에서 자전거를 타는 학생이 싹튼다.

 자전거는 운동을 하거나 놀이를 하려고 타지 않는다. 내 살림집에서 볼일을 보러 먼길을 오갈 때에 타는 자전거이고, 짐을 실어 나를 때에 타는 자전거이며, 집식구와 함께 움직일 때에 타는 자전거이다. 자전거는 워낙 짐자전거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지, 자전거 달리기대회라든지 살빼기라든지 산타기라든지 따위에 쓰려고 만들지 않았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스스로 가방을 짊어지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스스로 손에 짐을 들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스스로 책을 찾아 읽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본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텃밭이나 논밭을 일굴 겨를이 없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내 보금자리 삶자락을 찬찬히 느끼면서 새소리와 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다.

 그저 바쁘기 때문에 자가용을 몬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바쁜가? 왜 바쁜가? 어떻게 바쁜가? 참말 바쁜가? 두 다리로 걸어서 볼일을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서 볼일을 보았을 때에는 얼마나 더 걸리는가? 내 몸으로 짐을 짊어지고 나르면 얼마나 힘드는가? 내 몸뚱이는 짐 얼마쯤을 들고 나르지 못할 만큼 아무 힘이 없다는 말인가?

 집 한 채 짓는 재료를 스스로 짊어지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집 한 채 짓는 재료 또한 얼마든지 스스로 짊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집 한 채를 하룻밤 사이에 뚝딱하고 지을 생각이 아니라면, 조금씩 천천히 짊어지며 나르면 된다. 커다란 집이 아니라 조그마한 살림집이라면 얼마든지 내 등짐이나 수레로 재료를 나를 수 있다. 집이란 며칠 만에 갑자기 올려세우는 벼락치기가 아니다. 집이란 적어도 오백 해쯤 한 자리에서 버티며 지낼 보금자리이다. 오백 해쯤을 지낼 집을 짓는데 며칠 만에 뚝딱하고 올려세울 수 없다.

 사람들은 바쁘기 때문에 자가용을 몰지 않는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려고 자가용을 몬다. 100킬로미터로 달릴 때하고 110킬로미터로 달릴 때하고 얼마나 다를까. 9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은 8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보다 더 빨리 간다고 하겠지. 그러면, 5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보다 더 빨리 간다는 120킬로미터로 달린 사람은, 더 빨리 간만큼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다움을 빛내는지 궁금하다. 고속철도와 새마을기차와 무궁화기차 가운데 시간을 더 아낀다는 더 빠른 기차는 내 삶을 얼마나 살찌우는지 궁금하다.

 시간을 더 아낀다는 더 빠른 기차를 타자면, 기차삯이 곱배기로 든다. 고속철도 기찻삯은 새마을기차보다 곱배기이고, 무궁화 기찻삯보다 세 곱쯤 된다. 자가용을 몰며 바쁜 일을 본다면, 자가용을 장만하는 돈과 다달이 내는 보함삯과 틈틈이 치르는 기름값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렇게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돈에 앞서, 자동차가 오갈 길을 닦는 데에 나라살림을 얼마나 쓰는가. 아스팔트 길을 1미터 닦는 데에 쓰는 나라살림은 1억 원이다. 게다가, 아스팔트를 까는 찻길이란 언제나 시골마을을 꿰뚫고 숲을 밀며 멧자락을 허물거나 구멍을 낸다. 돈은 돈대로 어마어마하게 들여 찻길을 닦고, 자연은 자연대로 어마어마하게 무너진다. 내가 타는 자가용이란 나라살림과 자연을 엉망진창으로 무너뜨리면서 내 주머니에서 돈을 더 터는 일이 된다.

 생각해 본다. 이웃마을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놓는 일은 팔짱을 끼어도 되고, 내 마을을 꿰뚫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만 반대하면 될까?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둘레로 고속도로가 날 때에는 괜찮고, 내 살림집 코앞으로 널따란 찻길이 뚫리는 일만 나쁜가? 고속도로는 ‘먼 앞날을 살아갈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훌륭한 국책사업’이라 할 만한가?

 이리하여, 나로서는 나라살림이나 자연이 얼마나 무너지는가를 안 느낄 테지만(거의 모든 사람이 안 느낀다),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느끼기 때문에,자가용 값과 보험삯과 기름값을 벌어들이려고 도시에서 더 피튀기며 싸우듯이 일을 해야 한다. 아니, 일이라기보다 돈벌이에 매여야 한다. 돈벌이에 더 매여야 하니까,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책을 읽을 겨를을 스스로 마련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 겨를뿐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하고 살가이 사귀면서 사람으로서 착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이야기할 틈이 없다. 집에서 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 집에서 아이하고 오붓하게 지낼 틈이 없다. 왜냐하면, 자가용을 굴리는 만큼 돈벌이에 더 품을 바쳐야 하니까, 집에서 집식구하고 살가이 지내는 틈은 더욱 줄여야 한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집에 돌아오더라도 돈벌이는 더 해야만 한다.

 이 모두 자가용을 타기 때문에 벌어진다. 게다가, 자가용을 타려고 하면 할수록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나라밖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자가용에 넣는 기름은 패권주의 나라 미국 재벌과 유럽 재벌이 거머쥔다. 이들 재벌이 석유 캐내는 권리를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중남미에서 군대를 보내 억지로 가로챈다. 중남미 볼리비아는 패권주의 미국이 오래도록 가로채던 석유 권리를 도로 찾으려고 혁명을 했다. 피를 흘리면서 싸웠다. 이란과 이라크는 석유 권리를 빼앗으려는 패권주의 나라 미국이 두 나라 사이에 불을 지르면서 두 나라 모두한테 전쟁무기를 판 까닭에 서로서로 피튀기며 싸우고 말았다. 이동안 패권주의 나라 미국은 석유 권리뿐 아니라 전쟁무기 팔아치우는 짭짤한 벌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미국 군대를 이끌어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이라크를 식민지로 삼고야 말았다.

 조그마한 나라 한국땅에서 쓰는 기름(석유)이란, 패권주의 나라 미국에서 움켜쥔 석유 재벌한테서 한국 재벌이 비싼값에 사들인 다음, 한국땅 여느 사람들한테 비싸게 팔려고 하는 기름이다. 이 작은 나라에 고속도로를 더 새로 깔고,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자동차회사가 수두룩하게 있는데다가, 자가용을 더 많이 팔아서 사람들이 자가용을 더 많이 타도록 하는 까닭이란, 미국 석유 재벌과 한국 재벌(한국 재벌은 석유 재벌이기도 하다)이 떼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가용을 타면 자가용 사고팔며 돈을 벌고, 바퀴를 사고팔며 돈을 벌며, 길을 닦고 늘리면서 돈을 버는데다가, 바로 기름을 사고팔며 엄청나게 돈을 번다.

 한국은 조그마한 나라이면서도 사람들이 제도권 입시교육 틀에 어린 나날부터 단단히 길들기 때문에, 마치 내 몸에 달린 두 다리는 언제 어떻게 쓰는지를 잊도록 가르친다. 예부터 〈원숭이 꽃신〉이라는 이야기가 내려왔지만, 〈원숭이 꽃신〉보다 더 모진 “자가용 중독”에 빠지고 만다.

 나는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 나는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는다. 나는 자동차를 모는 면허증을 따지 않았고, 앞으로도 자동차면허증은 딸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여태껏 언제나 두 다리로 살았고, 두 다리가 벅차면 자전거를 탔으며, 자전거로 힘들면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탔다. 더 힘들면 드물게 택시를 탔다.

 커다란 가방에 짐과 책과 아이 옷가지를 잔뜩 짊어지고, 한 팔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팔로는 다른 짐을 들며, 목에는 사진기를 걸고 두 다리로 살아간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숨쉬는 목숨이기 때문에 내 몸을 마음껏 부리면서 살아간다.

 나는 기계를 부릴 마음이 없다. 나는 내 몸을 부리면서 살아가고플 뿐이다. 나는 기계를 써야 할 때에는 기계를 쓰겠지만, 굳이 기계를 안 써도 되는데 내 몸에 있는 기운을 흘려버리거나 묵힐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 셈틀을 켜고 손전화에 밥을 주느라 전기를 쓴다. 그렇지만, 내 손으로 빨래를 하면 되는데 빨래기계를 써서 전기하고 물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쓸 수 없다. 빨래기계를 쓰면 일손을 덜지 않는다. 빨래기계 때문에 써야 하는 전기와 물이란 참으로 많고, 빨래기계는 열 해쯤 쓰면 이제 목숨을 다해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이 덩치 큰 쓰레기는 어떡해야 하나. 내 텃밭에 파묻어야 하는 빨래기계 쓰레기인가?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아주 마땅히 천기저귀를 쓴다. 종이기저귀는 ‘그냥 종이’기저귀조차 아닌 화학약품으로 만든 종이기저귀인데, 갓난쟁이 여린 살결에 어떻게 화학종이기저귀를 댈 수 있는가. 내가 갓난쟁이요 내 어버이가 나한테 화학종이기저귀를 댄다고 하면 내 어버이가 얼마나 싫고 미울까 헤아려 본다.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 앞에서 멈추는 일이 없다.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 앞에서 늘 빵빵거릴 뿐, 빠르기를 줄이지 않는다. 달리는 자동차에 짐을 실어 나른다고? 그래, 아마 ‘자동차를 탄 사람이 가진 짐’은 실어서 나를 테지. 그렇지만, 시골마을에서조차 ‘여느 시골마을 사람들이 짊어지는 짐’을 함께 날라 준다든지, 먼길을 태워 준다든지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기나 한지 궁금하다.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이 길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언제나 ‘걷는 사람이 걷던 길을 멈추어 비켜’ 주도록 밀어낸다. 그런데, 자동차는 길을 걷는 사람한테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간다.

 모심기를 할 때에 모판을 자동차에 실어서 날라야 한다고? 모판 하나가 얼마나 무겁기에 스스로 들어서 나르지 못할까? 모심기를 할 때에 일꾼이 몇인데 모판 백 장쯤 씩씩하게 못 나르는가? 모심기를 기계 아닌 손으로 하면서, 모판은 기계로 나르면 무엇을 하는 짓일까? 모판은 기계로 나르고 모는 손으로 심을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기계로 모를 심어야 한다. 두 다리를 논물에 풍덩 담그면서 손으로 모를 심는 뜻을 깨달으려면, 모판부터 한 장씩 가슴에 척 안고서 날라야 한다. 모판 한 장 들지 못하는 사람이 가을걷이를 낫질로 어떻게 벨 터이고, 가을걷이를 해서 푸대에 벼를 담았을 때에, 벼푸대를 어떻게 들어서 나를 수 있을까?

 바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젊을 때를 거쳐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저 바쁘기만 하다. 너무 바쁜 나머지 자가용을 씽씽 빵빵 달리고야 만다. 자가용을 달려 물 좋고 바람 시원하며 햇볕 따사로운 어딘가를 찾아갈 수 있겠지. 그런데 자가용으로 지나친 길자락에 피고 지는 작디작은 풀과 어린나무는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자가용을 달리면서 칡덩굴 냄새를 맡는 사람도 있다지만, 자가용을 몰면서 풀무치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자가용을 몰며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는 들어도 꾀꼬리나 종달새나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자가용을 안 몰 수 없다고들 일컫는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자가용을 안 몰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가용을 안 몰아야 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가용 없이 괴롭겠지. 도시에서는 새소리도 벌레소리도 없으니까. 도시에서는 바람에 뒤집어지는 나뭇잎이 사각사각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도시에서는 나비가 팔랑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이토록 메마른 도시에서는 자가용에 갇혀서 다른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다.

 자동차는 매연을 내뿜는다. 자동차 매연은 ‘다른 자동차에 탔다’고 해서 안 맡지 않는다. ‘내 자동차에 탔을 때’에조차 내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조금씩 함께 마신다. 자동차를 탔을 때에 멀미를 하거나 속이 메슥거리거나 머리가 띵한 까닭은, 내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비롯해 다른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들이마시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일하고 똑같다 할 만큼 매연을 들이마셔야 한다. 몸이 튼튼한 사람이라면, 자동차 안쪽으로 스며드는 매연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몸이 여린 사람이나 어린이나 푸름이라면, 자동차 안쪽으로 스며드는 매연은 몸에 몹시 나쁘다. 이 매연이 차츰차츰 쌓이면서 허파를 쿡쿡 찌르거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만다. 아기를 밴 사람은 감기약을 먹으면 안 될 뿐 아니라, 자동차 또한 타서는 안 된다. 아기를 밴 사람 가운데 몸이 여린 사람은 자가용이든 버스이든 탈 때에 어지럽다고 느끼는데,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금세 느끼기 때문이다. 금세 느껴 뱃속 아기한테 나쁜 줄을 몸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아기를 밴 사람과 갓난쟁이를 돌보는 사람을 자가용에 태우면서 움직이는 사람은 아기와 애 어머니한테 담배연기를 입에 쑤셔넣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구실을 하자면 책을 읽어야 한다. 어버이가 된 뒤로는 더 바쁘고 훨씬 빠듯하다지만, 어버이 구실을 하자면 책을 더 자주 매우 넓게 읽어야 한다. 시간죽이기라든지 문학취향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내 삶을 들여다보거나 내 삶을 깨닫는 책을 바지런히 찾아서 읽어야 한다. 예방접종이 화학조합 병원균을 사람 몸에 억지로 집어넣는 일인 줄 안다면, 아무 과자나 아이한테 함부로 먹이지 못할 테고, 자가용에 섣불리 아이를 태우며 돌아다닐 수 없다. 집에서 밥을 하면서 법랑냄비라든지 양은냄비를 함부로 쓸 수조차 없다. 법랑과 양은은 조금씩 벗겨지면서 아이 몸에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할 때에 화학세제를 안 쓰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떤 밥그릇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더욱이, 스탠냄비를 쓰더라도 반찬통을 플라스틱통으로 쓰면 도루묵이 된다. 이런저런 흐름을 깨닫자면 바지런히 책을 읽으며 배워야 한다.

 교사 되는 사람은 학생을 맡아 가르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교대나 사대를 마쳤대서 교사가 되지 않는다. 교과서를 잘 가르친대서 교사가 될 수 없다.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한 다음, 이런저런 일이 많기 때문에 책을 안 읽거나 못 읽는다면,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할 때까지 읽은 책’ 틀에서 바라보거나 생각할밖에 없다. 그런데,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할 때까지도 꽤나 바쁘고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한 뒤라면 더욱 책을 힘껏 읽으면서 여태껏 제대로 모르거나 하나도 모르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땀흘려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배우지 않는 교사라면 스스로 배울 학생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들한테 질서와 통제와 훈육과 교훈과 제도와 법규만을 길들일 뿐이다. 가르치며 배우는 어른으로 살아가자면, 누구보다 더 힘들여 배워야 한다. 교사 자리에 서는 사람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아이 어버이’한테까지 가르치는 몫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느 어버이보다 훨씬 땀흘리면서 배우지 않고서야 교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 모든 뿌리는 자가용에 있다. 이 모든 바탕은 자가용에 있고야 마는 오늘날 삶터이다. 권정생 할배가 쓴 글을 엮은 《죽을 먹어도》에 실린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를 읽은 사람은 꽤 많은 줄 알지만, 이 글을 읽고도 승용차(자가용)를 버렸다고 밝힌 사람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도록 뉘우쳤다는 사람마저 자가용을 아직 안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만 듣는다. 어쩔 수 없이 자가용을 써야 할 때가 있단다.

 그러나, 우리 삶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길들고 만 일이 있을 뿐이다. 길들고 물들고 젖어든 일만 있다.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어버이나 교사라면 아주 마땅히 자가용을 버려야 한다. 오토바이도 버리고 다 버려야 한다. 큰짐을 날라야 할 때에만 짐차를 쓰거나 빌려야 한다. 바쁘면 시골에서 살아가지 말고 도시로 가야 한다. 바쁘면 시골학교에 아이를 넣지 말고,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로 아이를 보낼 노릇이다. 자가용을 버리지 않으면서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라는 말이나 ‘나는 교사입니다’라는 말이나 ‘나도 사람입니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4344.6.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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