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91) 꽃빛


이점도가 만든 카네이션은 파스텔 레드 색상으로 기존에 없던 화색花色이다

《강현정·전성은-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메디치미디어,2015) 131쪽


 화색花色이다

→ 꽃빛이다

→ 꽃 빛깔이다

 …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화색(花色)’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꽃빛’이라는 낱말도 없습니다. 그래도, 한국말사전에는 ‘풀빛’이나 ‘물빛’ 같은 낱말은 실립니다.


  흙은 ‘흙빛’입니다. 나무는 ‘나무빛’입니다. 잎은 ‘잎빛’입니다. 하늘은 ‘하늘빛’이고, 구름은 ‘구름빛’입니다. 빛깔이 어떠한가를 나타내려 하면, 한국말에서는 ‘-빛’을 뒤에 붙입니다.


  사람 살갗이 어떤 빛깔인가 헤아리면 ‘살빛’입니다. 피는 ‘핏빛’이고, 머리카락은 ‘머리빛’이나 ‘머리카락빛’이라 합니다. 빛깔을 말하려 하기에 ‘빛’이라는 낱말을 쓰는 만큼, 하얀 빛깔 종이가 아니라, 알록달록 여러 빛깔을 종이에 입히면 ‘빛종이’라 할 수 있어요.


  꽃을 바라보면서 빛을 살피기도 하지만, 무늬나 결을 살피기도 합니다. 그래서 ‘꽃무늬’나 ‘꽃결’을 이야기할 만합니다. 이 가운데 ‘꽃무늬’는 한국말사전에 나옵니다. 바람결이나 물결이나 마음결을 말하듯이, ‘꽃결’은 꽃송이를 만지거나 볼 적에 느끼는 결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꽃빛’이 아닌 ‘화색’이라 하면서 ‘花色’이라는 한자를 덧붙이는데, 이렇게 적는들 쉬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입니다. 꽃이니 ‘꽃’이라 하고, 꽃을 보며 느끼는 빛깔이니 ‘꽃빛’이라고 해야 알맞습니다. 4348.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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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도가 만든 카네이션은 부드러운 빨강 빛깔로 아직까지 없던 꽃빛이다


“파스텔(pastel) 레드(red) 색상(色相)으로”는 “부드러운 빨강 빛깔로”나 “부드러운 빨강으로”로 손질하고, ‘기존(旣存)에’는 ‘아직’이나 ‘아직까지’나 ‘이제껏’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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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4 하나 둘 셋



  한국사람은 ‘셋’이라는 숫자를 무척 아낍니다. 둘이나 넷이나 하나가 아닌 ‘셋’을 그야말로 섬깁니다. ‘셋’이라는 숫자를 쓰자면, ‘하나’와 ‘둘’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셋’이라는 숫자를 사랑하는 한국사람은 ‘셋’만 외따로 쓰지 않습니다. ‘하나·둘·셋’을 나란히 씁니다.


  ‘하나·둘·셋’은 ‘처음·가운데·끝’입니다. ‘하나·둘·셋’은 ‘어제·오늘·모레’입니다. ‘하나·둘·셋’은 ‘너·나·우리’입니다. ‘하나·둘·셋’은 ‘이곳(여기)·저곳(저기)·그곳(거기)’입니다. ‘하나·둘·셋’은 ‘아이·철들기·어른’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둘·셋’은 ‘삶·바람(숨결)·죽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둘·셋’은 ‘어둠·해님(별님)·빛’입니다. 그예 ‘하나·둘·셋’은 ‘씨앗·나무(풀)·열매’이지요.


  모든 것은 두 갈래로 짝을 이룹니다. ‘짝꿍’이요 ‘짝지’입니다. 그런데, 두 갈래로 짝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이에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자면 ‘둘’이지만, 찬찬히 헤아리면 언제나 ‘셋’입니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갈래로 우리 길을 나눈다 할 테지만, ‘삶·죽음’ 둘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언제나 바람(숨결)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도 이와 같아요. 어둠과 빛 두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는 늘 ‘해님(별님)’이 나란히 있습니다.


  하나와 둘과 셋이라는 얼거리로 나아가는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다(하나)’와 ‘보다(둘)’와 ‘되다(셋)’라는 세 가지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이 세 낱말이 어느 곳에서나 반드시 깃드는, 가장 자주 쓰는 낱말입니다. 세 낱말이 없으면 한국말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세 낱말이 있어야 모든 한국말이 태어납니다.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가 만나서 두 씨앗이 만날 적에 새로운 목숨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어우러져야 새로운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얼핏 보면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 두 짝이지만, 이 사이에는 늘 ‘둘이 만나도록 잇는 숨결(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두 씨앗이 만나자면 ‘사랑’이라는 숨결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숨결은 이윽고 ‘아기’라는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두결(양자)’은 하나와 다른 하나만 있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결을 바라보는 님(관찰자)이 있어야 움직입니다만, 두결을 바라보는 님이 생각을 심어서 씨앗으로 날릴 ‘바람(숨결)’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면서 느껴야 하는 한 가지가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있기에 비로소 ‘두 가지 결’은 ‘새로운 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늘 ‘아침·낮·저녁’으로 하루를 갈랐습니다. 세 때 사이나 앞뒤로 ‘새벽·밤’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하루를 가르는 세 때는 ‘아침·낮·저녁’입니다. 이 또한 ‘하나·둘·셋’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대목이 있으니, 한국사람한테 ‘밥때’는 ‘아침·저녁’ 두 가지일 뿐입니다.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아침저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 = 아침밥’이기도 하고, ‘저녁 = 저녁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낮 = 낮밥’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과 ‘두결(양자)’이 서로 얽히는 수수께끼이자 실마리입니다.


  두결은 늘 두결이지만, 두결을 이루는 셋이라는 얼거리입니다. 그리고, 셋이라고 하는 얼거리는 언제나 셋이지만, ‘바람 타고 찾아온 씨앗(삶)’을 받으면 셋은 언제나 둘로 바뀝니다(삶짓기를 이룹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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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627) 무방 1


가정이 자녀를 교육하는 힘을 자꾸만 잃어가고 있는 요즈음이다. 가정이 제 구실을 하게 된다면야 학교에서는 공부만 가르쳐도 무방할 것이다

《성래운-스승은 없는가》(진문출판사,1977) 108쪽


 공부만 가르쳐도 무방할 것이다

→ 공부만 가르쳐도 괜찮다

→ 공부만 가르쳐도 된다

→ 공부만 가르쳐도 좋다

 …



  한자말 ‘무방(無妨)’은 “꺼리낄 것 없이 괜찮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한국말로 ‘괜찮다’를 쓰면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꺼리낄 것 없다”를 넣을 수 있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공부만 가르쳐도 괜찮다”나 “공부만 가르쳐도 좋다”로 고쳐쓸 만한데, “공부만 가르쳐도 나쁘지 않다”나 “공부만 가르쳐도 나쁠 일이 없다”나 “공부만 가르쳐도 말썽이 나지 않는다”처럼 고쳐써도 잘 어울립니다.


 남이 들어도 무방한 이야기

→ 남이 들어도 되는 이야기

→ 남이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

 내 방에서 공부하여도 무방하다

→ 내 방에서 공부하여도 된다

→ 내 방에서 공부하여도 괜찮다


  ‘괜찮다’나 ‘되다’라는 낱말을 넣으면 넉넉합니다. 굳이 ‘무방’이라는 한자말을 아이들한테 가르치거나 보여주어서 쓰라고 할 일이 없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즐겁고 아름답게 살려서 잘 쓰면 됩니다. 4336.2.12.물/4348.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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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마다 아이를 가르치는 힘을 자꾸만 잃는 요즈음이다. 집에 제구실을 한다면야 학교에서는 공부만 가르쳐도 괜찮다


‘가정(家庭)’은 ‘집’이나 ‘집안’으로 손보고, ‘교육(敎育)하는’은 ‘가르치는’이나 ‘기르는’이나 ‘키우는’으로 손봅니다. “잃어가고 있는”는 “잃는”으로 손질하고, “제 구실을 하게 된다면야”는 “제구실을 한다면야”로 손질하며, “-할 것이다”는 “-하다”로 손질합니다.



무방(無妨) : 꺼리낄 것 없이 괜찮음

   - 남이 들어도 무방한 이야기 / 내 방에서 공부하여도 무방하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58) 무방 2


그러면 마산을 민주화의 요람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군요

《김삼웅·장동석-한국 현대사의 민낯》(철수와영희,2015) 76쪽


 -라고 불러도 무방하겠군요

→ -라고 해도 되겠군요

→ -라고 해도 괜찮겠군요

→ -라고 해도 어울리겠군요

→ -라고 할 수 있겠군요

→ -라고 할 수 있군요

 …



  어른들이 ‘무방’이라는 낱말을 쓰면 아이들이 알아들을까요? 어른들은 왜 ‘무방’이라는 낱말을 쓸까요? 이런 한자말을 굳이 써야 할까요? 한국말로 알맞고 바르면서 슬기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요?


  ‘all right’은 영어입니다. ‘無妨’은 한자말입니다. ‘올라잇’과 ‘무방’은 외국말입니다. 한국말은 ‘괜찮다’입니다. 4348.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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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마산을 민주가 싹 튼 곳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민주화(-化)’는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화’를 덜어야 올바릅니다. ‘요람(搖籃)’은 ‘아기 침대’를 가리킵니다. ‘처음 태어난 곳’을 빗대는 낱말이니, “민주화의 요람이라고”를 “민주가 싹 튼 곳이라고”로 손질합니다. ‘불러도’는 ‘해도’로 바로잡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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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3 ‘처음’과 ‘시작’



  “준비(準備), 시작(始作)!” 하고 외치는 말투는 일본 말투입니다. 일본사람은 “요이(ようい) 땅!”이라 말하는데, 여기에서 ‘요이’만 한자말로 바꾼 말투가 “준비, 땅!”입니다. ‘땅’은 총소리를 가리키는 일본말이고, 총소리를 가리키는 한국말은 ‘탕’입니다. 그러니까, ‘준비’라는 낱말이나 ‘시작’이라는 낱말은 모두 일본사람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삶을 나타내거나 가리키거나 드러내거나 나누려고 주고받던 말마디입니다.


  한국사람은 어떤 낱말을 빌어서 삶을 나타내거나 가리키거나 드러내거나 나누었을까요? 한국사람은 “하나, 둘, 셋!” 하고 외쳤습니다. 또는 “자, 하자!”나 “자, 해 보자!” 하고 외쳤어요.


  한자말이면서 일본말이라 할 ‘시작’이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처음’이라는 소리입니다. 다시 한국말사전에서 ‘처음’을 찾아보면,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맨 앞”으로 풀이합니다.


  ‘처음’을 풀이한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맨 앞 = 처음’일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이 이야기가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어서 밝히지는 못하는 한국말사전입니다.


  ‘처음’이라는 낱말은 ‘첫무렵’이나 ‘첫머리’나 ‘첫걸음’처럼 차츰 쓰임새를 넓힙니다. ‘첫발’이라든지 ‘첫째’라든지 ‘첫물·첫밗·첫딸·첫손·첫손가락·첫이레’처럼 쓰기도 해요. ‘첫봄·첫여름’이나 ‘첫인사·첫말·첫사랑’처럼 쓰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한국말 ‘처음’은 “맨 앞”일 뿐 아니라 “우두머리”이기도 하고 “새로움”이기도 하며 “놀라움”이나 “훌륭함”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길(가능성)을 여는 몸짓”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갑’니다. 누구나 ‘처음으로 내딛’습니다. 처음으로 말 한 마디를 뱉어야 이야기를 이룹니다. 처음으로 씨앗 한 톨을 심어야 풀싹이 돋고 나무가 자랍니다. 우리 마음자리에 생각을 하나 드리울 때에 비로소 모든 삶을 이룹니다. “처음 = 맨 앞”이라고 풀이하는 오늘날 한국말사전은 ‘틀리지 않’으나 ‘옳거나 맞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 열다”로 밝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여는 얼거리를 보여주거나 밝히는 자리에서 쓰는 낱말인 ‘처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이제 시작해 볼까?”라든지 “언제 시작하지?”라든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같은 말을 곧잘 씁니다. 아무 자리에나 함부로 ‘시작’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집어넣습니다.


  일본 한자말이기에 안 써야 하지 않습니다. ‘시작’이라는 낱말을 슬기롭게 다룰 줄 안다면, 이 낱말은 얼마든지 쓸 만합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함부로 엉성하게 쓰기만 한다면, 이 낱말 때문에 우리 생각은 ‘처음부터 막힙’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시작’이라는 낱말을 처음 쓴 때는 지식인이 백 해쯤 앞서일 테고, 여느 사람은 고작 서른 해나 쉰 해밖에 안 됩니다. 이 대목을 놓친다면, 말넋이나 삶넋을 조금도 못 헤아립니다.


  우리는 예부터 “이제 해 볼까?”나 “언제 하지?”나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처럼 말했습니다. 자, 제대로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시작’이라는 일본 한자말이 깃들 때와, ‘오롯이 한국사람 말투’로 읊을 때에 느낌이나 뜻이나 생각이나 흐름이나 결이나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살펴야 합니다. ‘처음’을 여는 우리들은 늘 ‘하다(한다)’라는 낱말을 끌어들여서 씁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하다”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다”입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되다”입니다. 하고, 보니, 됩니다. 이 실타래를 엮는 징검돌 같은 낱말이 바로 ‘처음’입니다.


  처음으로 눈을 뜹니다. 처음으로 생각을 합니다. 처음으로 숨을 쉽니다. 처음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처음으로 씨앗을 심습니다. 처음으로 서로 마주봅니다. 처음으로 일어섭니다. 처음으로 웃습니다. 처음으로 노래합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사랑을 피워서 처음으로 삶을 짓습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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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2 휘파람·바람·파람



  예부터 한겨레는 바람을 잘 읽었습니다. 흔히 뱃사람만 바람을 잘 읽은 줄 잘못 여기는데, 뱃사람뿐 아니라 뭍사람이나 멧사람이나 들사람 누구나 바람을 잘 읽어야 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못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애써 빨래를 해서 옷가지나 이불을 널었다가 죄 소나기에 흠뻑 적시고 맙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구름을 읽습니다. 구름을 읽는 사람은 비를 읽고, 아침과 저녁을 읽습니다. 손목시계나 괘종시계가 있지 않아도, 바람을 읽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때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기에 이 지구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차립니다.


  바람을 읽지 못하면 옛사람은 아마 모두 죽었을 테지요. 이를테면, 모든 숲짐승과 풀벌레는 바람을 매우 잘 읽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바람을 못 읽으면 ‘내 몸내음’을 바람에 실려 퍼뜨리니, 큰 짐승이나 벌레가 나를 잡아먹고 말아요. 범이나 이리나 늑대한테서 살아남으려고 할 적에도 바람을 읽어야 합니다. 예부터 숲길이나 멧길을 다닐 적에는 맞바람으로 다녔지, 등바람으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바람이란 무엇일까요? 바람은 모든 냄새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물기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숨결과 기운을 실어 나릅니다. 그래서 바람을 읽는 사람은 숨결과 기운을 읽는 사람입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나한테 밥이 될 것을 읽을 뿐 아니라,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버섯도감을 펼쳐야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채지 않습니다. 바람을 읽을 적에, 코와 온몸으로 버섯 기운을 느껴서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챕니다.


  어떤 목숨이든 바람을 마실 적에 숨결을 잇습니다. 바람을 목으로 넘겨야 숨이 살지요. 들과 숲에서 흐르던 바람은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일 적에 내 숨결이 되고, 내 목숨을 이룹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람은 그냥 떠도는 기운일 뿐입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기에, 바람은 내 숨결이 되면서 내 목숨을 이루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보금자리를 닦기 마련입니다. 저마다 제 마음이 맞는 자리에 삶터를 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늘 새롭게 마실 만한 바람이 흐르는 곳에 제 보금자리나 삶자리나 일자리나 놀자리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은 어떤 바람을 마시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바람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빠르게 온몸을 돕니다. 바람 한 줄기는 빛과 같은 빠르기로, 또는 빛보다 더 빠르다 싶은 움직임으로 우리 몸을 휘돕니다. 우리 몸을 휘돈 바람은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바람이 들고 나는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는 사람들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이 아주 빠르게 들고 나기에 우리는 모두 살아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몸밖(살갗)을 휘감던 바람 가운데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인 바람이 우리 몸속(내장과 뼈와 살)을 휘돌면서 빠져나옵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산소도 이산화탄소도 아닙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을 어느 만큼 내 몸이 맞아들여서 삭일 수 있느냐에 따라 내가 낼 수 있는 힘이 달라집니다. 바람을 오롯이 맞아들여서 온몸을 활활 태울 수 있으면 엄청난 힘이 솟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맞아들이지 못해 온몸이 불타오르지 못한다면, 아파서 앓아눕는 모습이 되지요. 아파서 드러누운 사람은 누구나 숨을 제대로 못 쉬어요. 아픈 사람은 바람을 제대로 못 마십니다. 튼튼한 사람은 숨을 아주 빠르게 거칠게 신나게 재미나게 기쁘게 많이 들이마십니다. 우리는 ‘밥’이 아닌 ‘바람’으로 움직이는 몸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헤엄을 치고 일을 하며 연장을 다루고 손을 놀리고 생각을 짓습니다. 잘 모르겠다면 운동선수를 보셔요. 운동선수는 운동하는 사이에 밥을 먹지 않습니다. 땀을 많이 흘려 물을 마시기는 하지만, 운동선수는 바람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운동량이 달라집니다. 여느 일꾼도 이와 같아요. 숨(바람)을 어떻게 골라서 한꺼번에 힘을 모아 연장을 다루느냐에 따라 일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호미나 삽이나 괭이로 땅을 쫄 적에도 숨(바람)을 찬찬히 골라야 정갈하면서 수월하게 논밭을 갈 수 있습니다.


  휘감던 바람이 휘돌며 나올 적에 휘파람이 됩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고 할 만한데,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늘 파랗습니다. 바닷물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하늘처럼 파랗습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지만, 하늘을 이루는 기운이 바로 바람이기에, 바람빛은 파랑이라 할 만합니다. “파란 바람”을 마시는 몸이고, 우리 몸이 파란 바람을 마시다 보니, 우리 몸을 이루는 얼거리는 “파란 거미줄”과 같습니다. ‘파람’은 ‘휘파람’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한겨레 뱃사람은 ‘새·하늬·마·높’이라는 곳이름(방향 낱말)을 썼습니다. 한국말로는 새(동)와 하늬(서)와 마(남)와 높(북)입니다. 어느새 이 한국말은 자취를 감추고 마는데, 이 한국말이 자취를 감추도록 ‘동서남북’이라는 한자말만 쓰게끔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이 내모는 까닭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네 갈래 바람 가운데 마녘(남녘)에서 부는 바람은 ‘마파람’입니다. ‘마바람’이 아닙니다. 왜 남녘바람만 ‘파람’일까요? 오늘날 사람으로서는 아주 오래된 낱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알 수 없지만, 남녘바람이 어떤 기운인가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남녘바람이란, 그러니까 너른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와서 여름과 첫가을을 밝히면서 보듬는 바람입니다. 이 땅에 따스하고 넉넉한 기운을 북돋우는 바람이 ‘마파람’입니다.


  휘파람은 무엇일까요? “노래가 되는 바람”이 휘파람입니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여서 내뿜는 바람을 노래로 바꿀 적에 ‘휘파람’입니다. 우리 삶터는 마파람을 마시면서 싱그러운 숲으로 피어나고, 우리 몸은 휘파람을 불면서 새롭게 깨어납니다. “파란 바람”이 들과 숲을 푸르게 가꿉니다. “파란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푸르게 짓습니다.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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