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1 이승에서 저승으로



  우리가 있는 이곳은 ‘이곳’이면서 ‘이승’입니다. ‘이 삶’입니다. 우리가 가는 저곳은 ‘저곳’이면서 ‘저승’입니다. ‘저 삶’입니다. 이 삶을 마치면 저 삶으로 가는데, 알아보기 좋도록 ‘삶’과 ‘죽음’으로 가르곤 합니다. 삶을 마치면 죽음이 되는 셈인데,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른 삶’입니다. 죽음은 다르면서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승·저승’ 두 가지 말을 씁니다.


  이곳이 있기에 저곳이 있습니다. 이곳이 없다면 저곳은 없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이곳’이라고 이 한 자리를 밝혀서 말하기 때문에, ‘이 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는 ‘저곳’입니다. 그리고, 이 한 자리가 ‘이곳’이 되기에, 이곳은 모든 것이 처음 태어나는 자리요, ‘바탕’이자 ‘뿌리’이고 ‘밑’입니다. 이곳에서 비롯하는 ‘저곳’이니, 저곳은 ‘다른 곳’이면서 ‘새로운 곳’이요 ‘나아가는 곳’입니다.


  왜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갈까요? ‘다른 이야기’를 누리려는 뜻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으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저곳이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에 얌전히 있으면 ‘우리 목숨’조차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이승)에서 비로소 걸음을 처음으로 내딛기에 저곳(저승)이 생기면서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첫발을 내디디니 ‘새 목숨’이 태어나서 ‘내’가 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는 까닭은 오직 하나, ‘이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누리려고 이 땅(이곳, 이승)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새롭게 지으려고 이곳(이승, 이 땅)에서 삶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쁘게 나누려고 이승(이 땅, 이곳)에서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바로 내가 ‘삶’이자 ‘목숨’이고 ‘숨결’이기에 ‘바람’이며 ‘넋’입니다. 바로 나는 삶·목숨·숨결·바람·넋을 한껏 누리면서 숱한 이야기를 지어서 갈무리한 뒤, ‘죽음’이자 ‘빛’이자 ‘어둠’이자 ‘씨앗’으로서 ‘온누리’가 됩니다. 첫걸음을 내딛어서 새걸음으로 나아갈 적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적에, 삶에서 죽음으로 옮길 적에, 바로 나는 죽음·빛·어둠·씨앗·온누리입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오듯이, 이승에서 저승이 나옵니다. 이러면서 둘은 늘 하나입니다. 이승 따로 저승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하나이면서 다른 하나이고 새로운 하나입니다.


  삶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듯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그저 새로운 길이기에 ‘낯설’ 뿐입니다. 낯설기에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돌고 돌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짓습니다.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엮습니다. 똑같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가꿉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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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20) -의 : 산의 딸


내 이름은 산딸기 / 나는 산의 딸이에요 / 산이 날 낳아 줬어요 / 내 이름은 산딸기 / 나는 산의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최승호-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3》(비룡소,2007) 64쪽


 산의 딸이에요

→ 산이 낳은 딸이에요

→ 산이 빚은 딸이에요

→ 산에서 자란 딸이에요

→ 멧마을 딸이에요

→ 멧골짝 딸이에요

 …



  나무에 맺힌 열매는 ‘나무 열매’입니다. ‘나무의 열매’가 아닙니다. ‘나무 열매’는 “나무에 맺힌 열매”이면서 “나무가 낳은 열매”입니다. 또는 “나무가 빚은 열매”나 “나무가 베푸는 열매”예요. 어떤 사람은 ‘-의’를 붙이면 이런 여러 가지를 모두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의’를 붙이면 ‘-의’를 붙인 뜻이나 느낌만 나타냅니다. 다른 뜻이나 느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보기글에 나오는 ‘산딸기’ 이야기에서도 “산의 딸”이 아닌 “산이 낳은 딸”로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그래야, 이 보기글에서 ‘산딸기’를 놓고 어떤 이야기를 어떤 뜻이나 느낌으로 나타내려 하는지 제대로 밝힐 수 있어요.


 산의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 산이 낳은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 산에 사는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 멧마을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 멧골짝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산딸기는 산이 낳은 딸일 수 있고, 산에 사는 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예부터 ‘멧딸기’라고 으레 말했으니, ‘멧딸기’로 손질하면서 “멧골짝 사랑스런 딸”이라든지 “멧마을 사랑스런 딸”처럼 적을 만해요. 이밖에 “멧자락 사랑스런 딸”이라든지 “멧바람 먹는 사랑스런 딸”이나 “멧숨 쉬는 사랑스런 딸”이나 “멧노래 부르는 사랑스런 딸”처럼 쓸 수 있어요. 4348.3.8.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내 이름은 멧딸기 / 나는 멧골짝 딸이에요 / 멧골이 날 낳아 줬어요 / 내 이름은 멧딸기 / 나는 멧골짝 사랑스런 딸이랍니다


‘산(山)딸기’는 그대로 둘 만하지만, ‘멧딸기’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부터 ‘멧토끼’나 ‘멧짐승’이라 말했고, ‘멧나물’이라 말했어요. 이 얼거리 그대로 멧골에서 돋는 딸기를 놓고는 ‘멧딸기’라 말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19) -의 : 누군가의 절박한 문제


누군가의 절박한 문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가 되죠

《신현림-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현자의숲,2012) 88쪽


 누군가의 절박한 문제 (x)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 (o)



  우리는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그냥 쓰려 한다면 잘 쓸 수 없지만, 내가 쓰려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차근차근 쓴다면 잘 쓸 수 있어요. 이 보기글을 살피면, 첫머리에는 “누군가‘의’ 절박한 문제”로 적지만, 곧바로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적습니다.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쓸 수 있는 말투가 아니라, 첫머리는 잘못 쓰고 뒤쪽은 옳게 잘 쓴 말투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잘 쓸 수 있는 말투인데 스스로 제대로 살피지 않은 탓에, 이 글 첫머리에 ‘-의’를 얄궂게 넣었어요. 4348.3.8.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누군가한테는 애타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한테는 배부른 소리가 되지요


“절박(切迫)한 문제(問題)”는 “애타는 일”이나 “애끓는 일”로 다듬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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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0 춤추는 물결



  물결은 언제 어디에서나 춤춥니다. 물결이 물결인 까닭은 춤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과학으로도 밝히는데, 물은 그릇에서 바닥에 쏟을 적에는 한곳에서 다른 한곳으로 흐릅니다. 이와 달리 물은 ‘갇힌 어느 한곳’에서는 위아래로 움직일 뿐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결’을 보여줄 뿐입니다.


  요즈음은 ‘물결’이라는 낱말보다 ‘파도(波濤)’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만, ‘파도’란 ‘물결’을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입니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를 보면 “파도 = 바다에 이는 물결”입니다. 게다가 ‘물결’에 뜻풀이를 달 적에 “(2) 파도처럼 움직이는 어떤 모양이나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적기도 해요. 아주 오락가락하는 뜻풀이요, 엉터리 뜻풀이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사전을 엮은 국어학자는 말뜻과 말결을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뜻풀이를 답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 ‘물결’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도 넋과 말과 삶을 제대로 모릅니다. 왜 그러할까요? ‘파도’라는 낱말을 쓸 적에는, ‘물이라고 하는 결’과 ‘물에 이는 결’을 헤아리거나 살피지 못합니다. 오직 ‘물결’이라고 쓸 때에만 비로소 ‘물 + 결’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해서 몸으로 느낍니다.


  물결이 칠 적에 물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안 갑니다. 숨을 쉬는 내 모습을 그려 보셔요. 숨을 쉴 적에 바람은 어디에 가지 않습니다. 내 몸도 어디에 가지 않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숨은 그대로 있습니다. ‘숨결’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몸을 이루는 살점은 ‘살결’입니다. 손가락으로 살을 눌렀다가 떼어 보셔요.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짐을 들 적에도, 일을 할 적에도, 물을 만질 적에도, 걸상에 앉거나 자리에 누울 적에도 ‘살’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언제나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데로 안 갑니다.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살이기에 ‘살결’을 느낍니다.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마음이 여러 모습으로 바뀔 뿐입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우리 겨레는 ‘마음결’을 말합니다. 마음결이 ‘한결’같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마음씨’를 곱게 갖추도록 애썼어요. 마음씨란 ‘마음에 심는 씨’입니다. 마음씨를 심어서 마음결이 한결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자면서 몸을 쉬고, 앞으로 할 새로운 일을 꿈으로 짓습니다. 그러면 ‘꿈결’은 무엇일까요. 꿈은 어디 먼 나라에서 나한테 찾아오지 않습니다. 모든 꿈은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내가 스스로 지은 꿈이 언제나 내 삶으로 드러납니다. ‘꿈결’을 가꾸는 내 넋을 깨달을 수 있으면, 내 ‘삶결’은 바로 꿈결 따라 바뀌는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해가 뜨고 집니다. 햇빛이 바뀝니다. 햇빛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이라면 ‘빛결’을 알아채서,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어, 언제 갈무리하면 알맞을는지를 압니다. 노래를 부를 적에도 그렇지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노랫가락을 다스릴 줄 압니다. 이른바 ‘노랫결’을 어루만질 수 있을 때에 노래를 아름답게 부릅니다.


  물결이 춤춥니다. 물결은 ‘요동(搖動)치’지 않습니다. 물결은 춤춥니다. 춤은 ‘틀에 박힌 몸짓’이 아닙니다. 언제나 다르고 언제나 새로우며 언제나 즐거운 춤사위입니다. 연예인이나 대중가수가 ‘똑같은 몸짓’을 보여주려고 몸을 괴롭히면서 억지스레 보여주는데, 수많은 연예인이나 대중가수는 ‘똑같은 몸짓’이 ‘춤사위’라도 되는듯이 억지를 부리니 뼈와 뼈마디가 모두 닳거나 낡아요. 이와 달리, 늘 새롭고 다르며 즐겁게 춤을 추는 사람은 여든이나 아흔 살이 되어도 홀가분하게 춤사위를 놀립니다. 그래서, ‘물결’은 ‘춤춘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언제나 한결같기에 물결은 춤춥니다.


  내 몸이 튼튼하려면, 내 살결을 살피고, 내 숨결을 가다듬으며, 내 마음결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이 아름다우려면, 내 꿈결을 새롭게 지으면서, 내 말결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서, 내 하루가 푸른 노랫결로 흐르도록 기운을 모두어야 합니다. 삶은 언제나 물결칩니다. 삶은 언제나 물결처럼 춤춥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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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198) 전투적 1


그는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고, 남로당계 간부들에게 뒤집어씌운 죄상의 조작을 정면으로 규탄하는 등 최후까지 전투적이었다

《하야시 다케히코(林建彦)/최현 옮김-남북한 현대사》(삼민사,1989) 70쪽


 최후까지 전투적이었다

→ 마지막까지 싸웠다

→ 끝까지 맞서 싸웠다

 …



  이 보기글을 국어사전 말풀이 그대로 적어 본다면, “최후까지 전투를 하는 것과 같았다”가 됩니다. 그런데 보기글만 읽어 보아도, 이 보기글에 나오는 사람은 ‘전투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전투를 하며 살았’다고 해야 옳구나 싶어요.


  일본책에 ‘전투적’으로 적혔기에 한국책으로 옮기면서 이 대목을 고스란히 살렸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처럼 “전투적이었다”고 적바림해야 더욱 힘내어 맞부딪쳤다는 느낌을 살릴 만하다고 여겼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까지 전투를 했다”고 적을 노릇이고, “끝까지 이를 악물고 싸웠다”고 적으면 넉넉합니다. “마지막까지 불꽃을 튀기며 맞섰다”고 적바림하거나, “끝까지 힘을 내어 맞섰다”고 적을 수도 있어요.


 전투적 자세 → 싸우려는 모습 / 싸우겠다는 매무새

 전투적인 태세 → 곧 싸울 듯한 모습 / 싸우려는 매무새


  한자말 ‘전투’를 쓰고 싶으면, “전투 자세”나 “전투 태세”로 적어 봅니다. 한자말 ‘전투’를 걸러내고 싶으면, “싸움이 벌어지다”나 “싸움을 치르다”나 “싸움에서 다쳤다”로 손질해 줍니다.


  한국말로는 ‘싸움’이고 한자말로는 ‘전투’입니다.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싸움’이며 한자말로 얘기를 주고받을 때에는 ‘전투’예요.


  내가 나누고픈 말을 헤아리고, 내가 내 이웃하고 주고받으려는 글을 돌아봅니다. 내가 사랑하고픈 삶을 곱씹고, 내가 아끼려는 삶터를 둘러봅니다. 4341.6.26.나무./4344.1.1.흙/4348.3.7.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는 한마디 핑계도 대지 않았고, 남로당계 간부들한테 뒤집어씌운 죄상을 똑바로 따지는 둥 마지막까지 이를 악물고 싸웠다


“한마디의 변명(辨明)도 하지 않았고”는 “한마디 핑계도 대지 않았고”나 “한마디도 둘러대지 않았고”로 손봅니다. “뒤집어씌운 죄상의 조작(造作)”은 “뒤집어씌운 죄상”으로 고치고, ‘정면(正面)으로’는 ‘똑바로’나 ‘막바로’로 고치며, “규탄(糾彈)하는 등(等)”은 “따지면서”나 “나무라면서”로 고칩니다. ‘최후(最後)’는 ‘마지막’이나 ‘끝’으로 손질합니다.



 전투적(戰鬪的) : 전투를 하는 것과 같은

   - 전투적 자세 / 전투적인 태세

 전투(戰鬪) :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하여 싸움

   - 전투가 벌어지다 / 전투를 치르다 /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611) 전투적 2


심지어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자기 물건 몇 가지 슬쩍했다고 저렇게 전투적으로 나오신다고 해도 내 기분은 변하지 않는다

《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최윤정 옮김-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웅진지식하우스,1997) 76쪽


 저렇게 전투적으로

→ 저렇게 악에 받쳐

→ 저렇게 악을 쓰고

→ 저렇게 싸울 듯이

→ 저렇게 앙앙거리며

→ 저렇게 잡아먹을 듯이

 …



  ‘분쟁(分爭)’이든 ‘투쟁(鬪爭)’이든 ‘전쟁(戰爭)’이든 ‘싸우는’ 일을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싸움’이나 ‘다툼’이라는 낱말은 들을 길이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한자말로 ‘戰’이나 ‘爭’을 붙인 낱말만 쓰이곤 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다투다’를 찾아보면 “(1) 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다 (2) 승부나 우열을 겨루다”로 풀이합니다. ‘싸우다’를 찾아보면 “(1) 말, 힘, 무기 따위를 가지고 서로 이기려고 다투다 (2) 경기 따위에서 우열을 가리다 (3) 시련, 어려움 따위를 이겨 내려고 애쓰다”로 풀이합니다.


  ‘다투다’를 풀이하면서 ‘싸우다’를 적고, ‘싸우다’를 풀이하면서 ‘다투다’를 적습니다. 이런 한국말사전 말풀이인 까닭에, 정작 ‘다투다’하고 ‘싸우다’가 어떠한 움직임이거나 모습인지를 제대로 읽기 힘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갖가지 ‘戰’이나 ‘爭’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니, 이래저래 어지럽고 어수선합니다.


  싸움이나 다툼이란 서로 치고받는 일이라든지 부딪힌다든지 맞선다든지 으르렁거린다든지 윽박지른다든지 때리거나 못살게 굴려고 애쓴다든지 하는 움직임이거나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보기글에 나오는 어머니가 딸아이한테 “전투적으로 나오신다”고 한다면, 어머니는 딸아이하고 싸울 듯이 윽박지르거나 큰소리를 친다거나 몽둥이나 빗자루를 휘두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또는 “악을 쓴다”고 하거나 “잡아먹을 듯이 소리친다”고 하거나 “성이 나서 방방 뛴다”고 할 만합니다.


 저렇게 무섭도록 나오신다고 해도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나오신다고 해도

 저렇게 윽박지르신다고 해도

 저렇게 벼락이라도 떨어뜨리듯 꾸짖는다고 해도

 저렇게 무섭도록 나무란다고 해도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사전대로 옳고 바르게 말풀이를 하기를 바랍니다. 한국말사전이 아직 옳고 바르게 말풀이를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저마다 옳고 바른 넋을 다스리면서 옳고 바르게 말을 하며 삶을 나누기를 빕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돌보듯 내가 사랑할 말을 찾아 돌봅니다. 내가 아끼려는 짝꿍을 보살피듯 내가 아끼려는 말을 찾아 보살핍니다. 고운 꿈과 밝은 터와 싱그러운 벗을 생각하면서 말과 글을 어루만집니다. 4344.1.1.흙/4348.3.7.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게다가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그분 살림 몇 가지를 슬쩍했다고 저렇게 악을 쓰며 나오신다고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甚至於)’는 ‘게다가’나 ‘더구나’나 ‘더욱이’로 다듬고, ‘자기(自己)’는 ‘어머니’나 ‘그분’으로 다듬습니다. ‘기분(氣分)’은 ‘마음’으로 손보고, ‘변(變)하지’는 ‘바뀌지’나 ‘달라지지’나 ‘나빠지지’로 손봅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708) 전투적 3


나름 전투적으로 살았고, 지금은 성취감도 느껴요

《신현림-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현자의숲,2012) 110쪽


 전투적으로 살았고

→ 싸우듯이 살았고

→ 싸우며 살았고

→ 씩씩하게 살았고

→ 당차게 살았고

 …



  사회와 다부지게 맞서 싸우면서 살았다면 “싸우며 살았다”고 하면 됩니다. 거친 물결을 견디거나 이기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면 “씩씩하게 살았다”고 할 만합니다. 당차고 야무지며 기운찹니다. 꿋꿋하며 힘차며 단단합니다. 이러한 기운과 숨결을 알맞게 드러낼 만한 낱말을 슬기롭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3.7.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나름대로 씩씩하게 살았고, 이제 뿌듯하기도 해요


‘나름’은 ‘나름대로’로 바로잡습니다. 외따로 쓸 수 없습니다. ‘지금(只今)은’은 ‘이제는’이나 ‘이제’로 손봅니다. “성취감(成就感)도 느껴요”는 겹말이니, “뿌듯하기도 해요”나 “뿌듯해요”나 “보람도 느껴요”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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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0. 낯선 말, 어려운 말, 새로운 말

― ‘바른 말’이 아닌, ‘마음을 살리는 말’



  노래하는 한대수 님이 1970년대에 선보인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살피면, “아, 나의 님 바람, 뭇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와 같은 노랫말이 흐릅니다. 이 노래에서 흐르는 ‘뭇느낌’이란 “온갖 느낌”이나 “수많은 느낌”을 가리킵니다. ‘뭇짐승’이나 ‘뭇별’이나 ‘뭇사람’ 같은 자리에서도 쓰는 ‘뭇’은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킵니다. 한자에서는 ‘萬’이라는 낱말을 붙여서 ‘숫자 10000’을 가리키는 한편,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키기도 해요. 한국말에서는 ‘뭇’이 이 같은 구실을 하고, ‘온’이라는 낱말도 이러한 구실을 합니다.


  ‘뭇느낌’이라 하면, 사람이 살고 죽으면서 겪는 온갖 느낌입니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좋고 싫고 서럽고 안타깝고 가엾고 벅차고 반가운 여러 느낌이 바로 ‘뭇느낌’이라 할 만해요. ‘뭇’을 붙여서 ‘뭇책(뭇 책)’이나 ‘뭇그림(뭇 그림)’이나 ‘뭇편지(뭇 편지)’나 ‘뭇말(뭇 말)’처럼 쓸 수 있습니다. 비슷한 뜻과 얼거리로 ‘온책(온 책)’이나 ‘온그림(온 그림)’이나 ‘온편지(온 편지)’나 ‘온말(온 말)’처럼 쓸 만합니다. 뜻은 같다(“모든”이나 “매우 많은”)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을 쓰는 사람이 담으려고 하는 느낌은 다릅니다. 새로운 느낌이 깃들 수 있고,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감돌 수 있어요. ‘뭇책’과 ‘온책’과 ‘온갖 책’과 ‘모든 책’과 ‘많은 책’은 말꼴로도 다르지만, 말느낌으로도 다를 테니까요.


  요즈음은 ‘뭇’이나 ‘온’ 같은 한국말을 알맞게 살려서 쓰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온갖’이나 ‘갖은’ 같은 한국말을 알뜰히 살펴서 쓰는 사람을 보기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낱말을 골고루 헤아려서 두루 쓰지 못하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이러한 낱말을 찬찬히 쓰지 못합니다. 어린이문학이나 인터넷이나 방송에서도 이러한 낱말을 넓게 보듬으며 쓰지 못하지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오히려 낯섭니다. 한국사람이지만 한국말을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울 것이 많고, 볼 것이 많으며, 할 것이 많도록 바쁘다 보니, 정작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두루 쓰는 길은 등돌리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들부터 한자를 몇 가지 외우거나 영어를 더 빨리 익히는 일에 바쁘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제대로 쓰는 길하고 멀어요. 어른들도 사회살이에 바쁘기에, 사회에서 쓰는 몇 가지 말만 늘 쓸 뿐, 생각을 밝히거나 짓는 ‘새로우면서 즐거운’ 말은 좀처럼 마음에 담지 못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오불관언’이나 ‘창해일속’이나 ‘고진감래’나 ‘엄동설한’ 같은 한자말을 알려주면서 배우라 시키곤 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알아야 똑똑하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사회에서 이러한 한자말을 쓰니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한자말이 쓰인 지는 고작 백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 해 앞서 이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고 살았으며, 그무렵에는 이 같은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지난날에는 한국사람이 어떤 한국말을 썼을까요. ‘딴청/못 본 척하다/콧방귀도 안 뀌다’나 ‘하찮다/보잘것없다/작다’나 ‘쓴맛 뒤에 단맛’이나 ‘겨울추위/모진 추위/강추위/눈 오고 추운 밤’ 같은 말을 썼어요. 누구나 아는 말을 쓰던 한겨레이고, 서로 쉽고 수수한 말을 나누던 이웃이며, 함께 즐길 곱고 착한 말을 주고받던 동무입니다.


  아이들한테는 모든 말이 낯설면서 새롭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나 어버이가 들려주거나 가르치는 말이 모두 낯설면서 새롭지요. 억지로 외워야 하는 말이 아니라, 삶을 그리거나 나타내는 말일 적에는 ‘처음에 낯설’다가 ‘이내 새로’워서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좋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어른이 쓰는 모든 말’을 받아들여요.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과 똑같이 사투리를 쓰고, 어른과 똑같이 거친 말이나 막말까지 쓸 수 있어요. 어른들이 늘 쓰는 말이 아이들이 늘 쓰는 말이 되니까요.


  말에는 잘잘못이 없습니다. 좋거나 나쁜 말은 없습니다. 틀리게 썼다면 스스럼없이 고치거나 바로잡으면 됩니다. 손질해야 하는 말이면 손질하면 됩니다. 아직 제대로 몰랐으면 이제부터 제대로 배워서 쓰면 됩니다. 말을 나누는 까닭은 서로 생각을 나누면서 삶을 기쁘게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슬기롭게 헤아린다면,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시사상식을 쌓도록 하는 말’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어 꿈을 가슴에 품도록 하는 말’을 들려주면서, 어른도 아이와 함께 생각을 기쁘게 짓는 말을 늘 쓸 수 있습니다.


  말만 깨끗하게 한대서 삶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번지르르한 말이나 겉치레 말이 되어요. 밥만 좋게 먹는대서 몸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밥뿐 아니라 넋과 삶과 일과 놀이와 말을 모두 좋게 다스릴 때에 몸이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말과 밥과 넋과 삶과 일과 놀이가 모두 깨끗하게 정갈하다면, 말은 저절로 깨끗하면서 정갈해요.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은 훌륭하지만, 이 훌륭한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도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쓰지 못하는 까닭은 ‘말 지식’만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삶으로 맞아들여서 넋을 새롭게 지을 때에 ‘훌륭하구나 싶은 말’이 저절로 흘러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날마다 똑같은 밥을 세 끼니 차리더라도, 늘 다르면서 새로운 몸짓으로 기쁘게 노래하면서 지을 때에 모든 끼니가 다르고 새로우면서 맛납니다. 기계처럼 밥과 국과 반찬을 차린다면, 가짓수나 모습은 달라 보이더라도, 하나도 새롭지 않으며 맛도 없기 마련이에요. 사랑을 실어 기쁘게 지은 밥이라면, 반찬이 한 가지뿐이고,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어도 끼니마다 새로우면서 기쁘지요.


  말 한 마디는 내 생각과 마음을 짓는 바탕입니다. 밥 한 그릇은 내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바탕입니다. 말과 넋과 삶은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동아리입니다. 이 얼거리를 잘 헤아리면, 누구나 내 몸에 맞고 내 마음을 살찌우는 말과 넋과 삶을 찾으리라 느껴요. ‘바른 말 쓰기’가 아니라, ‘마음을 살리는 말과 넋과 삶’으로 나아가는 길일 때에 즐겁고 기쁩니다.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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