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 미국말 41 : 봄seeing



다만 사물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 변화는 봄seeing을 통해서 온다

《앤소니 드 멜로/이현주 옮김-행복하기란 얼마나 쉬운가》(샨티,2012) 127쪽


 봄seeing을 통해서 온다

→ 보아야 온다

→ 바라보아야 온다

→ 볼 때에 온다

 …



  이 보기글에서는 ‘봄’이라는 낱말에 ‘seeing’이라는 영어를 붙입니다. 영어 ‘seeing’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봄, 보기, 시각(視覺), 시력”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어를 붙일 때에 한결 알아보기에 나을까요? 보기글에 붙인 영어를 찾아보면 ‘봄’이라고 나오는데, 굳이 이 영어를 붙여야 했을까요?


  따로 군말을 붙여야 한다면, ‘바라보기’나 ‘쳐다보기’처럼 쓰면 됩니다. 더군다나, 보기글 바로 앞에는 “보아야 한다”처럼 적어요. 그러니까, “보아야 한다”를 적은 뒤에 바로 나오는 ‘봄’은 ‘보다’를 가리키는 줄 쉽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보기글을 더 살피면, “봄을 통해서”라고 나옵니다. 바로 앞에서는 “보아야 한다”라고만 적었으니, 바로 앞도 “봄을 통하여야 한다”로 고쳐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보아야’라 적지 않고 “봄을 통해서”라고 적으면 뜻이나 느낌이 얼마나 달라질는지요? 이렇게 쓰는 말투도 한국말이라고 할 만할는지요?


  한 가지를 더 살펴봅니다. 한자말 ‘변화’는 ‘바뀜’이나 ‘달라짐’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 글월은 “바뀜은 봄을 통해서 온다”인 셈입니다. “바뀜은 보아야 온다”로 고쳐쓰더라도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한국말이 될 수 없는 말입니다. “바뀌려면 보아야 한다”나 “달라지려면 보아야 한다”로 다시 고쳐쓰든지, “바라보아야 바뀐다”나 “보아야 달라진다”로 새롭게 고쳐써야지 싶습니다. 4348.3.15.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다만 모든 것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 바라볼 때에 달라진다

다만 무엇이든 다르게 보아야 한다. 달라지려면 보아야 한다


‘사물(事物)’은 그대로 둘 만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나 ‘무엇이든’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변화(變化)는’은 ‘바뀌려면’이나 ‘달라지려면’으로 손질하고, “봄을 통(通)해서”는 “보아야”나 “바라보아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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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60) ‘-의’를 쓸 자리 (of와 の,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



  오늘날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쓰던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먼먼 옛날부터 쓰던 말이되, 따로 ‘틀에 가두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법(문법)’이 따로 없이 누구나 홀가분하게 제 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어 삶을 짓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한국말이지만, 이른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1800년대 끝무렵과 1900년대 첫무렵에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서양 말법(문법)’에 따라서 ‘한국말도 법(틀)을 세워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퍼졌습니다. 이리하여, 서양에서 서양말을 배우거나 일본에서 일본말과 서양말을 배운 지식인이 ‘한국 말법’을 처음으로 세웁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잘 살펴야 합니다. 여러 지식인이 훌륭한 뜻을 품고 세운 ‘새로운 한국 말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식인이 서양 말법을 배운 뒤, 이 서양 말법에 따라 새롭게 세운 한국 말법’일 뿐입니다.


  ‘한국 말법’을 처음 세운 분도, 오늘날 ‘한국 말법’을 새로 배워서 다시 세우려는 분도, 모두 ‘서양 말법’ 틀거리를 헤아리면서 ‘한국 말법’을 바라봅니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1800년대 끝무렵부터 2000년대를 넘어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말법’을 한국사람 삶이나 넋을 헤아리면서 바라보거나 세우거나 가꾸려고 하는 지식인은 아직 없다고 할 만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나라는 어떤가요? 아주 마땅한 소리인데, 서양에서는 처음부터 ‘제 나라(서양 나라) 삶과 넋에 맞추어서 제 나라 말법을 세웠’습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서양 말법을 배우거나 익혀서 제 나라(일본) 말법을 세웠으나, 이와 맞물려서 제 나라(일본) 삶과 넋을 헤아리면서 일본 말법을 차근차근 가다듬었고,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아직까지 서양 말법 틀거리로 한국 말법을 바라볼 뿐 아니라,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한국말에 스며든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에다가 ‘일본사람이 받아들여서 한자로 고쳐서 쓴 서양말’에다가 ‘일본사람이 서양말을 받아들이다가 들어온 번역 말투’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예전에 중국을 섬기던 지식인이 쓰던 ‘중국 말투’와 ‘중국 한자말’이 있고, 해방 언저리부터 한국으로 퍼진 ‘서양말’과 ‘서양 말투’와 ‘번역 말투’까지 뒤죽박죽 얽힙니다.


  토씨 ‘-의’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먼저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1800년대 끝무렵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람한테 한국말이나 한국 말법은 아직 한 번조차 제대로 선 적이 없는 줄 똑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국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이 땅에서 쓰던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국사람이 언제나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주고받던 한국말은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 한국사람이 아이를 사랑스레 낳아서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스레 물려주던 한국말은 어디에서 엿볼 만할까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은 ‘옛말(속담)’에 살짝 남습니다. 한국말다운 한국말은 ‘노래(민요)’와 ‘이야기(전래동화, 설화, 민담)’에 살포시 남습니다. 한국말다운 한국말은 학교 문턱을 넘지 않고 책·신문·방송에 젖어들지 않으면서 흙을 손으로 만지면서 삶을 짓는 사람들한테 살그마니 남습니다.


  예나 이제나 한국 지식인은 이 세 가지를 안 살핍니다. 옛말을 안 살피고, 노래와 이야기를 안 살피며, 숲사람(시골사람)을 안 살핍니다. 그러니, 1930년대에 나온 문세영 님 사전이든, 한글학회(조선어학회)에서 1957년에 마무리지은 사전이든, 2000년대에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사전이든, ‘-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한국말에서 ‘-의’는 무엇일까요? 흔히 ‘소유격(所有格)’으로 쓰는 토씨라 하는데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소유격 = 관형격”으로 풀이합니다. 이리하여, ‘관형격(冠形格)’이라는 한자말을 다시 찾아보면, “문장 안에서, 앞에 오는 체언이 뒤에 오는 체언의 관형어임을 보이는 격”이라 하며, ‘매김자리’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관형어’는 또 무엇일까요? ‘관형어’는 “체언 앞에서 체언의 뜻을 꾸며 주는 구실을 하는 문장 성분”이라고 합니다. 자, 이제 갈무리합니다. ‘소유격 = 관형격 = 관형어 = 앞말을 꾸미는 노릇’입니다.


  앞말을 꾸미려고 한다면 ‘-의’를 넣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뭇가지’라는 낱말을 살펴봅니다. ‘나무 + ㅅ + 가지’처럼 씁니다. ‘ㅅ(사이시옷)’이 사이에 깃들어 앞말과 뒷말을 이으면서 꾸미는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우리는 ‘나무의 가지’처럼 말하지 않아요. ‘나뭇가지’라 말합니다.


  더 살펴보면, 사이시옷마저 그리 잘 안 쓰는 않는 한국말입니다. ‘나무방망이’나 ‘나무숲’이나 ‘나무나라’나 ‘나무집’이나 ‘나무지기’나 ‘나무님’처럼 그냥 쓰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말법에서는 ‘나무꽃’ 아닌 ‘나뭇꽃’으로 적으라 할 테지만, ‘나뭇잎’처럼 적으면서도 ‘나무꽃’으로 적어요. ‘배춧잎’ 같은 낱말은 입에 이렇게 익어서 이처럼 쓰지만, ‘무잎’이나 ‘모과잎’이나 ‘느티잎’이나 ‘유채잎’처럼 수많은 다른 잎은 사이시옷 없이 그냥 쓰기 마련입니다.



[의] 표준국어대사전,2015

1. 그의 옷 / 영이의 얼굴 / 우리의 학교 / 사람의 자식 / 한강의 근원

2. 우리의 각오 / 국민의 단결 / 너의 부탁 / 나라의 발전

3. 다윈의 진화론 / 나의 작품 / 거문고의 가락

4. 승리의 길

5. 질서의 확립 / 자연의 관찰 / 인권의 존중 / 학문의 연구

6. 서울의 찬가 / 한국의 지도

7. 책의 저자 / 아파트의 주인 / 올림픽의 창시자

8. 금의 무게 / 물의 온도 / 국토의 면적

9. 꽃의 향기 / 예술의 아름다움

10. 축하의 잔치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11. 각하의 칭호 / 조국 통일의 위업

12. 나의 친구 / 선생님의 아들

13. 몸의 병 / 시골의 인심 / 옷의 때 / 하늘의 별 / 제주의 말

14. 여름의 바다 / 고대의 문화 / 정오의 뉴스

15. 100℃의 끓는 물 / 45kg의 몸무게 / 10년의 세월 / 한 잔의 술 / 10여 명의 사람

16. 국민의 대다수 / 가진 돈의 얼마를 내놓다

17. 불굴의 투쟁 / 불후의 명작

18. 철의 여인 / 무쇠의 주먹

19. 순금의 보석

20. 투쟁의 열매 / 건설의 역사

21. 구속에서의 탈출 / 저자와의 대화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한국말사전에서는 ‘-의’에 스물한 가지 쓰임새가 있다고 밝힙니다. 이 스물한 가지를 하나씩 살펴봅니다.


 그의 옷 → 그 사람 옷 / 그이 옷 / 그가 입은 옷

 영이의 얼굴 → 영이 얼굴

 우리의 학교 → 우리 학교

 사람의 자식 → 사람 자식 / 사람 아이

 한강의 근원 → 한강 물줄기 / 한강이 비롯한 물줄기


  ‘우리’라는 낱말 뒤에는 ‘-의’를 붙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냥 ‘우리’입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 한국말사전은 이를 어긋나게 적습니다. 그러면, “그의 옷”이라든지 “우리의 학교” 같은 말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 말법이 바로 서양 말법입니다. 서양 말법에서는 남성·여성·중성을 다루고, 너·나·우리 세 가지를 가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서양 말법 틀에 따라 한국말을 억지로 맞추려 하다가 “그의 무엇”이나 “그녀의 무엇” 같은 말투가 갑작스레 생기면서, ‘-의’를 꼭 끼워넣어야 하는 듯이 말합니다.


 우리의 각오 → 우리 각오 / 우리 다짐

 국민의 단결 → 국민 단결 / 똘똘 뭉친 사람들 / 하나되는 사람들

 너의 부탁 → 네 부탁

 나라의 발전 → 나라 발전 / 발돋움하는 나라


  서양말 관형격(소유격)에 맞추느라 ‘-의’ 쓰임새가 불거지는 한편, 일본말 ‘の’를 억지스레 한국말에 끼워맞추면서 ‘-의’ 쓰임새가 불거집니다. “국민의 단결”이 좋은 보기입니다. 이런 말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國民’이란 무엇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어서 쓴 한자말이 ‘國民’입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바로 ‘천황 폐하를 섬기는 아이로 만드는 학교’였으니까요. 그러나, 어른들은 학교 이름 하나는 바꾸었어도 다른 자리에서는 이 일본 한자말을 못 고치고 못 털며 못 바꿉니다. “국민의 단결”은 겉만 한글이지 속알은 “國民の團結”입니다. 한국사람은 일본말이 아닌 한국말을 쓸 노릇입니다.


  앞서 “그의 옷”과 마찬가지로 “너의 부탁” 같은 말투를 국립국어원이 함부로 씁니다. 한국말에는 ‘너의’가 없습니다. 한국말은 오직 ‘네’입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데, ‘네’는 ‘너 + ㅣ’입니다. ‘너 + ㅢ’가 아닙니다.


  “나라의 발전”도 일본말입니다. 겉만 한글일 뿐이에요. 일본사람은 이 말을 “國家の發展”처럼 적고, 일본사람이 쓴 책으로 배운 지식인은 이를 “국가의 발전”으로 옮깁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사전에 실린 보기글에는 ‘국가’를 ‘나라’로 옮기기는 했으나 말꼴은 그대로 남습니다. 이런 일본말(일본 한자말)을 못 털고 그대로 쓰니, 마치 ‘-의’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잘못 알고 맙니다.


 다윈의 진화론 → 다윈 진화론 / 다윈이 쓴 진화론

 나의 작품 → 내 작품

 거문고의 가락 → 거문고 가락


  한국사람은 ‘-의’가 없이 말합니다. 일본사람은 ‘の’를 쓰고, 미국사람은 ‘of’를 쓰겠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은 아무것도 안 써요. 이러한 말투가 바로 한국말입니다. 그렇지만, 국어학자는 서양말에 나오는 ‘of’를 반드시 한국말로도 옮겨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영어를 한국사람한테 가르치려 하는 이들도 ‘of’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사람은 ‘of’를 ‘の’로 옮기기로 합니다. 일본말에서는 ‘の’를 흔하게 쓰니까, 잘 어울린다고 여겼는데, 어느 모로 보면, 일본말에서도 ‘の’는 그리 쓸 일이 없습니다. 일본사람도 한자를 안 쓰고 ‘오롯이 일본말’로만 말을 하면 ‘の’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은 한자를 잔뜩 써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퍼뜨리려는 뜻에다가, 서양 학문을 일본 학문으로 새롭게 세우려는 뜻으로 ‘の’를 엄청나게 쓰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한국 지식인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일본을 거친 서양 문화와 사회와 사상’을 ‘-의’를 넣어서 풀려고 했어요.


  “다윈의 진화론”은 바로 ‘of’가 들어간 서양말을 일본사람이 ‘の’를 써서 풀려고 했던 말투를 엉터리처럼 잘못 받아들인 슬픈 말투입니다. 한국사람은 ‘-의’ 없이 “다윈 진화론”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중국을 섬기던 지식인은 “다윈式 진화론”처럼 말하지요. 이를테면, 일본 말투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람은 “야구 감독 김성근의 훈련법”이라 말하는 셈이고, 중국 말투를 섬기던 사람은 “야구 감독 김성근式 훈련법”이라 말하는 셈입니다. 한국말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한국말은 “야구 감독 김성근 훈련법”입니다. 병원 이름을 생각해 보셔요. “아무개 치과”나 “아무개 비뇨기과”처럼 씁니다. 한국에서는 병원 이름이나 가게 이름을 보면 ‘-의’를 넣지 않아요. 빵집 이름이든 옷집 이름이든 모두 마찬가지예요. 바로 이 대목을 읽어야 한국말을 깨닫습니다. 국어학자가 제아무리 서양 말법이나 일본 말법을 흉내내어 한국 말법을 엉망으로 세웠어도, 여느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한국말을 잘 씁니다. “아무개 분식집”이고 “아무개 양복점”입니다. “아무개 재단”이요 “아무개 기념관”입니다. “이원수 문학관”이나 “토지 문학관”이라 할 뿐, “이원수의 문학관”이나 “토지의 문학관”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품”이 아닌 “내 작품”입니다. ‘네’가 ‘너 + ㅣ’이듯, ‘나’는 ‘나 + ㅣ’입니다. 일본말에서는 ‘私の’가 있고, 이를 한국 지식인이 어설피 옮겨서 ‘나의’라는 엉터리 말투가 생겼습니다. 이리하여, 영어를 한국말로 옮기는 사람들은 으레 ‘my’를 ‘나의’로 옮겨요. 왜 이러한 줄 아는 사람은 드물 텐데, ‘일본에서 펴낸 영일사전’에서 ‘my’를 ‘私の’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한국말사전뿐 아니라 영어사전도 일본사전을 베껴서 냈습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옛 발자취입니다. 게다가 이 쓸쓸하고 씁쓸한 뿌리를 바로잡지 못한 탓에 오늘날에 영어를 이른 나이에 배우는 아이들은 ‘내’가 아닌 ‘나의’라는 엉터리 말투를 배우면서 길들고 말아요.


 승리의 길 → 이기는 길


  “승리의 길”도 겉만 한글인 일본말입니다. 일본사람이 아주 흔히 쓰던 말투입니다. “勝利の道”라고 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마구 쓰던 말마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일본말이자 일본 말투를 껍데기만 한글로 “승리의 도”나 “승리의 길”처럼 적는다고 하더라도 한국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배움의 도”라든지 “배움의 길”도 모두 일본말이거나 일본말투입니다. “사랑의 매”나 “문학의 길”이나 “시의 길”도 모두 일본말이거나 일본 말투예요.


  한국말로 하자면 “이기는 길”입니다. “배움길”이나 “문학길”입니다. “시가 걷는 길”이나 “시가 되는 길”이나 “시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 어린 매”나 “사랑 담은 매”나 “사랑 실은 매”나 “사랑스러운 매”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질서의 확립 → 질서 확립 / 질서 세우기

 자연의 관찰 → 자연 관찰 / 자연 보기 / 자연 살피기

 인권의 존중 → 인권 존중 / 인권 지키기 / 인권 살리기

 학문의 연구 → 학문 연구 / 학문 파헤치기 / 학문 파고들기


  다섯째에 나오는 말투는 모두 일본 말투입니다. 이쯤 되면,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다루는 사전이 아닌 ‘일본말’을 다루는 사전이라고 여겨도 될 만합니다. 일본사람이 일본 말투로 나타내는 ‘の’가 어느 자리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한국사람한테 알려주어서, 한국사람이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을 널리 쓰거나 익숙해지도록 이끄는 한국말사전이로구나 싶습니다.


  다섯째에 나오는 이 일본 말투를 가만히 보면, ‘-의’만 덜어도 됩니다. 가만히 돌아볼 노릇입니다. 한국사람은 이 일본 말투를 받아들여서 쓰더라도 모두 ‘-의’를 빼서 썼습니다. 요즈음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1980∼90년대까지 ‘애국 조회’를 학교마다 했습니다. ‘애국 조회’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자가 퍼뜨린 식민지 교육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애국 조회’에서 교장이나 교감이 학생한테 외치는 말마디는 거의 다 일본말이나 일본 말투였는데, 이런 말마디에 ‘-의’를 사이에 넣고 말하면, 귀로 듣기에 무척 거슬리거나 얄궂습니다.


  한국사람은 입으로 말을 할 적에 ‘-의’를 넣어서 쓰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아니, 아예 안 쓴다고 해야 맞습니다. 입으로 말할 적에는 ‘-의’를 안 쓰는데, ‘글로 적은 이야기’를 입으로 읽자니, 저절로 ‘-의’가 툭툭 불거집니다. 왜 글에서는 ‘-의’가 불거지는가 하면, 개화기 언저리부터 해방 뒤까지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일본에서 들어온 글’이기 일쑤였기에, 어설피 옮긴 일본 말투가 아주 널리 퍼졌습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보거나 깨달은 지식인이나 학자나 교사는 매우 드뭅니다. 책도 교과서도 신문도 일본말과 일본 말투로 글을 써서 엮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와 사회에서도 모조리 일본말과 일본 말투입니다. 이제는 이럭저럭 일본말이나 일본 말투를 꽤 걷어냈다고 하지만, 그대로 남은 일본말과 일본 말투가 아주 많고, 일본 한자말도 참으로 많이 남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런 말투로 말을 하느라 어느새 입으로도 ‘-의’를 익숙하게 쓰고, 귀로도 이럭저럭 길들고 맙니다. 게다가 요새는 일본 문학이나 인문학을 한국말로 많이 옮기는데, 한국말을 제대로 못 배우거나 안 배운 분들이 ‘-의’를 잔뜩 집어넣어서 번역을 해요. 어린이가 보는 그림책과 동화책에다가 어른이 보는 소설책을 보면 죄다 일본말과 일본 말투에다가 ‘-의’투성이입니다.


 서울의 찬가 → 서울 찬가 / 서울 노래 / 서울을 기리는 노래

 한국의 지도 → 한국 지도 / 한국을 그린 지도


  한국사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한국사람은 ‘찬가(讚歌)’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슬픈 노래”나 “기쁜 노래”나 “기리는 노래”를 부르지요. “사랑 노래”도 부르고 “꿈 노래”도 부릅니다. “자장노래”라든지 “일노래”라든지 “놀이노래”도 불러요.


 책의 저자 → 지은이 / 글쓴이 / 책을 쓴 사람

 아파트의 주인 → 아파트 주인

 올림픽의 창시자 → 올림픽 창시자 / 올림픽 만든 사람


  ‘저자(著者)’나 ‘주인(主人)’이나 ‘창시자(創始者)’는 모두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한자말입니다. 꼭 일본말이라 할 수 없으나, 일본사람은 이런 한자말을 입과 손에서 못 뗍니다. 이런 말결이 한국말로 퍼져서 한국사람 가운데에도 이런 한자말이 없으면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있어요.


  책을 쓴 사람은 ‘책을 쓴 사람’이면서 ‘글쓴이’나 ‘지은이’입니다. “아파트 주인”이나 “집 주인”입니다. “집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가방 임자 누구이니?” 하고 묻습니다. “가방의 임자”가 아닙니다. 올림픽을 만들든 세우든, 만들면 만든다 하고 세우면 세운다 합니다. 이런 자리에 ‘창시자’ 같은 한자말을 쓰기에, 자꾸 일본 말투대로 ‘の’를 가리키는 ‘-의’를 넣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맙니다.


 금의 무게를 재다 → 금은 무게가 얼마인지 재다

 물의 온도를 살피다 → 물은 온도가 어떠한지 살피다

 국토의 면적을 따지다 → (우리나라) 땅넓이를 따지다


  이제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스물한 가지에 이르는 ‘-의’는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쓰는 보기가 아닙니다.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쓰는 ‘の’가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이는가를 살피는 보기입니다. “금의 무게”가 아닌 “금 무게”입니다. “내 몸무게”를 재지, “나의 몸무게”를 재지 않습니다. “저 짐은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 보자” 하고 말하지, “저 짐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 보자”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옳고 바르면서 아름답게 제대로 쓰자면 ‘-의’를 모두 덜면 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고 사랑스레 가꾸려 한다면 ‘-의’를 모두 없애면 됩니다. 그냥 ‘-의’를 안 쓰면 됩니다. 한국말은 ‘of’나 ‘の’가 있어야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을 서양 말투나 일본 말투에 끼워맞출 까닭이 없습니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람이 즐겁게 쓰던 말투를 떠올리면 됩니다. 오늘부터 먼 앞날까지 이 나라 아이들이 기쁘게 물려받으면서 알뜰살뜰 가꿀 말투를 그리면 됩니다.


 꽃의 향기 → 꽃향기 / 꽃내음

 예술의 아름다움 → 예술이 아름다움 / 아름다운 예술

 축하의 잔치 → 축하 잔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 가을은 책 읽는 철이다

 각하의 칭호 → 각하라는 이름

 조국 통일의 위업 → 조국 통일이라는 큰일 / 조국 통일 같은 큰일

 나의 친구 → 내 친구

 선생님의 아들 → 선생님 아들

 몸의 병 → 병 / 몸에 난 병 / 몸에 생긴 병

 시골의 인심 → 시골 인심

 옷의 때 → 때 / 옷에 묻은 때

 하늘의 별 → 별 / 하늘에 뜬 별 / 하늘에 있는 별

 제주의 말 → 제주 말 / 제주에서 난 말

 여름의 바다 → 여름 바다

 고대의 문화 → 고대 문화 / 옛 문화

 정오의 뉴스 → 정오 뉴스 / 낮 뉴스 / 낮 소식

 100℃의 끓는 물 → 100℃로 끓는 물

 45kg의 몸무게 → 45kg 몸무게 / 45kg 나가는 몸무게

 10년의 세월 → 10년 세월 / 10년이라는 세월

 한 잔의 술 → 한 잔 술 / 술 한 잔

 10여 명의 사람 → 열 남짓 / 열 사람 남짓

 국민의 대다수 → 국민 대다수 / 거의 모든 사람

 가진 돈의 얼마를 내놓다 → 가진 돈에서 얼마를 내놓다

 불굴의 투쟁 → 꺾이지 않는 싸움 / 씩씩한 투쟁

 불후의 명작 → 잊히지 않는 명작 / 길이 남는 명작 / 훌륭한 작품

 철의 여인 → 철녀 / 굳센 여인 / 야무진 여인

 무쇠의 주먹 → 무쇠 주먹

 순금의 보석 → 순금 보석 / 순금으로 빚은 보석 / 순금을 섞은 보석

 투쟁의 열매 → 투쟁으로 이룬 열매 / 싸워서 얻은 열매

 건설의 역사 → 지어 온 역사 / 이뤄 온 발자국

 구속에서의 탈출 → 구속에서 탈출 / 굴레에서 벗어남

 저자와의 대화 → 지은이와 이야기 / 글쓴이와 이야기잔치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사전에 실은 보기글을 보면, 하나같이 ‘글월(문장)’이 아닌 짤막한 말마디입니다. 왜 이런 보기글을 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짤막한 말마디, 이를테면 ‘외침말(구호)’로 쓰던 일제강점기 군국주의·제국주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서양말을 흉내내던 일본사람이 스스로 일본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서양말에 일본말을 꿰어맞추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도 일본사람처럼 한국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도 한국말을 얼마든지 엉터리로 쓰거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의’를 붙잡는다면 한국말은 앞으로도 끝없이 망가질 테고, 한국말사전에서 ‘-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가다듬지 않는다면 한국말은 앞으로도 자꾸자꾸 무너지리라 느낍니다.



[의] 우리말 큰사전,1957

1. 나의 집 / 천하의 영웅 / 최대의 존경 / 평화의 세계 / 초로의 인생 / 현하의 웅변 / 금강의 명산 / 백두의 성지

2. 나의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 / 네가 사람의 사는 목적을 아느냐



  1957년에 나온 《우리말 큰사전》을 보면, 이 사전에 나온 보기글도 하나같이 일본말이나 일본 말투입니다. 한글학회조차 “우리 집”이 아닌 “나의 집”처럼 보기글을 넣는데, 이 보기글이 맨 앞에 나옵니다. “천하 영웅”도 아닌 “천하의 영웅”처럼 잘못 적고, “가없는 우러름”이 아닌 “최대의 존경”처럼 적는데다가, “평화 세계”가 아닌 “평화의 세계”처럼 적으니, 이러한 사전을 보는 한국사람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초로의 인생”이 아닌 “늘그막”입니다. “현하의 웅변” 같은 일본 말투를 오늘날에도 쓰는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나의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라든지 “네가 사람의 사는 목적을 아느냐” 같은 말투는, 최현배 님이 만든 말투입니다. 최현배 님이 서양 말법에 한국 말법을 짜맞추면서 억지로 만든 말투예요. 최현배 님은 훌륭한 일을 하셨으나, 서양 말법에 한국 말법을 짜맞춘 잘못은 무척 오랫동안 한국말을 갉아먹습니다. 이 슬픈 사슬과 굴레를 하루 빨리 씻거나 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

→ 내가 바라는 것이 이것이다

→ 나는 이것을 바란다

 네가 사람의 사는 목적을 아느냐

→ 네가 사람이 사는 뜻을 아느냐

→ 사람이 사는 뜻을 네가 아느냐


  사전에 담는 한국말은 아직 제대로 선 적이 없습니다. 한국말을 사전에 담으려고 한 학자와 지식인은 아직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옆에 놓고 한국말을 익히려는 한국사람은 아직 한국말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이 ‘of’와 ‘の’를 ‘-의’라는 꼴로 한국말에 심었는지 모르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의’라는 토씨를 한국말에 억지스레 심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스스로 서기’를 못 합니다. 한국 문화는 아직 ‘손수 삶을 지어 스스로 서기’로 나아가지 못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직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옳게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느끼며 제대로 쓸 수 있을 때에,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정치도 경제도 제대로 서서 제대로 흐를 수 있습니다. 4348.3.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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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3-15 20:40   좋아요 0 | URL
너무 고맙습니다. 다 빼야 할지 잘 가려 써야 할지 고민했는데 역시 다 빼야겠군요. 왜 이렇게 `~의`가 많이 쓰이는지 이제 알겠어요. 언제가 뵐 날 오겠지요. 그때까지 저도 한걸음 한걸음 기쁘게 내딛겠습니다. 답답한 곳을 늘 시원하게 뚫어주시네요. 든든한 길잡이 되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

숲노래 2015-03-16 04:08   좋아요 1 | URL
`-의`는 모두 덜면 됩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쓰는 분들이
이 대목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말·넋·삶 35 밤낮, ‘밤’과 ‘낮’



  한국말에서는 늘 ‘밤낮’으로 말합니다. ‘낮밤’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 이렇게 하루를 세 가지 때로 가르는 한편,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이렇게 다섯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하지만, ‘밤’과 ‘낮’ 이렇게 두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합니다.


  왜 ‘낮밤’이라 하지 않고 ‘밤낮’이라 할까요. 왜 낮이 앞에 오지 않고 밤이 앞에 올까요. 왜 밤이 뒤에 서지 않고 낮이 뒤에 설까요.


  밤은 낮을 이끕니다. 낮은 밤에서 태어납니다. 밤에서 낮이 비롯합니다. 낮은 밤을 따라서 찾아옵니다. 모든 씨앗은 밤에서 비롯하여 천천히 자라면서 태어납니다. 온갖 씨앗은 밤에서 깨어나서 씩씩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밤은 ‘흙 품’이면서 ‘어머니 품’입니다. 풀씨는 흙 품에 깃들고, 사람씨는 어머니 품에 깃듭니다. 다른 모든 벌레와 짐승과 목숨은 어미 품에 깃듭니다. 어미, 곧 어머니, 그러니까 가시내는 ‘밤’입니다. 밤은 모든 목숨을 품에 고요하게 품고 포근하게 보듬으면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숨결이 되도록 합니다. 이리하여, 밤이 있기에 낮이 있습니다. 밤에서 모든 목숨을 틔워서 낮으로 보내기에, 낮에 눈부신 무지개가 뜨고 노래와 웃음이 퍼져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아비, 곧 아버지, 그러니까 사내는 ‘낮’입니다. 낮은 어떤 목숨도 품에 안지 않습니다. 낮은 갖은 목숨이 저마다 싱그럽게 뛰놀면서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밤은 모두 고요히 품어서 새로운 꿈을 꾸도록 이끌고, 낮은 모두 신나게 뛰놀도록 너른 터를 내주면서 사랑을 짓도록 이끕니다.


  밤에 꿈을 꿉니다. 낮에 사랑을 짓습니다. 밤에 고요히 쉽니다. 낮에 신나게 일하거나 놀이를 누립니다. 이리하여, ‘밤낮’입니다. 밤이 있기에 낮이 있고, 낮이 있어서 밤이 있습니다. 밤이 낮을 부르고, 낮이 밤을 부릅니다. 밤이 낮을 낳기에, 낮은 다시 밤을 낳을 수 있습니다. 둘은 늘 함께 있고, 함께 태어나며, 함께 눈을 뜹니다.


  ‘보이드(void)’란 밤이 낮으로 되는 곳입니다. 밤이 낮으로 되는 곳은 밤과 낮이 함께 있으면서 함께 태어나고 함께 눈을 뜨는 곳입니다. 밤낮이 고요히 흐르면서도 신나게 춤추는 곳입니다. 밤낮이 포근하게 뛰놀면서도 새근새근 잠자는 곳입니다. 곧, ‘보이드’는 “밤낮이 있는 누리”이기에, ‘밤낮누리’입니다. 밤이면서 밤이 아니고, 낮이 아니면서 낮인 누리인 밤낮누리입니다. 밤이 낳는 낮이고, 낮에서 새로 깨어나는 밤인 밤낮누리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밝은 낮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밤낮누리’입니다.


  예부터 밤과 낮은 따로 ‘밝음’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밤과 낮은 어두움이나 밝음이 아닙니다. 그저 밤이고 낮입니다. 왜냐하면, 밤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뒤로 숨은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이라는 별하고 살그마니 등을 돌린 때입니다. 낮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고개를 방긋 내민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을 마주보려고 살짝 몸을 돌린 때입니다.


  밤에도 낮에도 해는 똑같이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해는 똑같이 비춥니다. 그래서 밤이라 하더라도 밝고, 낮이라 하더라도 어둡습니다. “밝은 밤·어두운 밤”이 있으며, “밝은 낮·어두운 낮”이 있습니다. 밤은 ‘어두움’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낮은 ‘밝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밤은 ‘어미 품’이요, 낮은 ‘아비 가슴’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아비 가슴이 아닌 어미 품으로 가야 합니다. 아비는 우리가 신나게 뛰놀면서 사랑을 짓는 마당을 여는 사람입니다. 어미는 우리가 새롭게 꿈을 꾸면서 삶을 일구는 밭을 여는 사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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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4. 스스로, 손수, 몸소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혼자 하지 못할 적에 ‘바보’라고 합니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하지 못할 적에도 ‘바보’라고 합니다. 손수 밥을 짓지 못한다거나, 손수 빨래를 못한다고 할 적에도 바보라고 할 만합니다. 바보는 왜 바보일까요? 아직 제대로 모르기에 바보라 할 텐데, 아직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아직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기에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못 하며, 제대로 못 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제대로 못 보니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니 남이 도와주거나 남이 맡아서 해야 합니다. 손수 하지 못한다면 삶을 손수 짓지 못합니다. 삶을 손수 짓지 못하니, 살림을 몸소 가꾸지 못해요. 기쁨과 즐거움을 몸소 누리지 못하지요.


  ‘스스로’ 어떤 일을 한다면,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내가 한다는 뜻입니다. ‘손수’ 어떤 일을 한다면, 하나하나 내가 지어서 가꾸려 한다는 뜻입니다. ‘몸소’ 어떤 일을 한다면, 마음에 담은 생각대로 차근차근 온몸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줄 수 없습니다. 밥을 먹건 똥을 누건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몸소 해야 합니다. 물을 마시건 바람을 마시건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몸소 물을 안 마시거나 바람을 안 마시면, 내 목숨은 끊어집니다. 내 삶길은 내가 몸소 걷습니다. 남이 내 삶길을 걸어 주지 않습니다. 내 몸을 스스로 움직여서 내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하고, 내가 손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며, 내가 몸소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나로 일어서는 길은 늘 이 세 가지입니다. ‘스스로·손수·몸소’입니다. 스스로 느껴서 바라봅니다. 손수 생각해서 짓습니다. 몸소 움직여서 삶을 누립니다. 보고, 하며, 됩니다. 하면서, 보고, 됩니다. 되도록, 보고, 합니다. 되게끔, 하면서, 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아름다운 님을 품으면서 제 길을 씩씩하게 걷습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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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59) ‘정말’과 ‘참말’


꿀벌들이 붕붕대는 소리가 정말로 시끄러웠거든 … 계곡도 보았지.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어 … 정말 그렇구나. 우리는 이제 행복해 … 이야기들이 생쥐 수프를 정말 맛나게 할 거야 … 이제 생쥐 수프는 정말로 맛이 좋을 거야

《아놀드 로벨/엄혜숙 옮김-생쥐 수프》(비룡소,1997) 15, 25, 30, 52, 60쪽


 정말로 시끄러웠거든 → 참 시끄러웠거든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어 → 매우 멋졌어

 정말 그렇구나 → 참으로 그렇구나

 정말 맛나게 → 아주 맛나게

 정말로 맛이 좋을 → 무척 맛이 좋을



  요즈음 나오는 어린이책을 보면 하나같이 ‘정(正)말’이라는 낱말을 매우 자주 씁니다. 그야말로 아주 쉽게 씁니다. 한국말로 올바르게 ‘참말’로 쓰거나 바로잡을 줄 아는 어른은 퍽 드뭅니다.


  한국말사전을 펼쳐 봅니다. ‘正말’을 “거짓이 없이 말 그대로임”으로 풀이합니다. ‘참말’은 “사실과 조금도 틀림이 없는 말”로 풀이합니다. 두 낱말이 말풀이가 다릅니다. 한자 ‘正’을 붙인 ‘정말’은 “거짓이 없이”라 하고, 한국말 ‘참말’은 “사실과 틀림이 없는”이라 합니다. 한자말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자말 ‘실제(實際)’눈 “사실의 경우나 형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 실제”인 셈이요, 한국말사전 말풀이는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서야 ‘참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참’이라는 한국말은 “사실이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아무래도 모두 뒤죽박죽입니다.


 정말 → 참말


  거짓이 아니기에 ‘참’입니다. 참이 아니기에 ‘거짓’입니다. 그렇지요. 참과 거짓은 서로 맞물립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正’이나 ‘사실’이나 ‘실제’ 같은 낱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런 낱말을 자꾸 쓰면 쓸수록 뒤죽박죽이 되면서 말뜻이 뒤엉킵니다. ‘正 + 말’ 꼴로 지은 엉터리 낱말은 말끔히 털어내면서 ‘참말·참말로’를 쓰면 됩니다. 이러면서 이야기 흐름에 맞추어 ‘참’이라든지 ‘매우·아주·몹시’를 넣으면 되고, ‘퍽·꽤·제법’을 넣을 수 있고, ‘대단히·엄청나게·더없이·그야말로’를 넣으면 됩니다. 4348.3.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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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이 붕붕대는 소리가 참 시끄러웠거든 … 골짜기도 보았지. 매우 멋졌어 … 참으로 그렇구나. 우리는 이제 기뻐 … 이야기가 생쥐 국물을 아주 맛나게 할 테야 … 이제 생쥐 국물은 무척 맛이 좋을 테야


‘계곡(溪谷)’은 ‘골짜기’로 다듬고, ‘광경(光景)’은 ‘모습’으로 다듬습니다. ‘행복(幸福)해’는 ‘기뻐’로 손질하고, ‘수프(soup)’는 ‘국’이나 ‘국물’이나 ‘찌개’로 손질하며, “할 거야”는 “할 테지”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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