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29 그물



  고기를 낚으려고 그물을 짭니다. 그물을 촘촘히 짜야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촘촘히 짜듯이, 사람은 그물을 촘촘히 짜야 바닷물이나 냇물에 그물을 드리워서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짤 적에 아무렇게나 짜지 않습니다. 촘촘히 짜는 거미줄인 한편, 아름답게 짭니다. 왜 아름답게 짤까요? 빈틈이 나오지 않도록 짜려면 저절로 아름다운 무늬가 됩니다. 어느 한쪽도 허술하지 않도록 짜면서 튼튼하도록 짜려면 참말 아름다운 결이 되고, 금과 줄과 모습이 됩니다.


  사람이 짠 그물도 몹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그물이란 없습니다. 그저 촘촘하거나 그저 튼튼하기만 한 그물은 없습니다.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무늬나 결이라 하더라도, ‘그물빛’과 ‘그물결’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랑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지요. 한 땀씩 찬찬히 짠 그물을 바라보셔요. 이 그물을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셔요. 냇물고기와 바닷물고기가 이 그물에 걸려서 잡힐 만합니다. 고기가 비늘이나 몸을 다치지 않도록 거뜬히 낚을 만합니다. 고기를 낚으면서 물은 모두 새어나가도록 할 만합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습니다. 물을 낚지 않습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아서 올립니다. 물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거미줄은 오직 먹이를 잡습니다. 바람을 잡지 않습니다.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면서 춤을 추는 거미줄은 바람결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파란 빛깔이 되는데, 파란 빛깔로 춤추는 거미줄은 날벌레와 풀벌레가 ‘거미줄’인지 알아채지 못할 만하지요. 냇물이나 바닷물에 드리우는 그물도 거미줄과 같아요. 물과 하나가 되어 물결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그물입니다. 물고기는 그물을 거리끼거나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물도 바닷물이나 냇물에 깃든 수많은 돌이나 이끼나 플랑크톤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 그물 안팎을 가만히 드나들다가 그만 그물에 낚입니다.


  사람 몸은 그물과 같습니다. 사람 몸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겉보기로는 한 덩이로 된 살갗이요 뼈요 살점이요 피톨이라고 볼 만하지만, 깊이 파고들어서 살피면, 사람 몸은 아주 촘촘하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미줄이나 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신경망(神經網)’ 같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경망’이라는 한자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마음그물’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은 그물처럼 촘촘하면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짜여서,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짓는 모든 생각은 바로 이 ‘마음그물’에 깃듭니다. 우리가 짓는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가서 몸을 움직이는 말이 됩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받아들여서 고운 빛으로 바꾸어 주는 보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낚아서 맑은 바람으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숨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물을 이루는 벼리가 튼튼하기에 삶을 짓습니다. 몸과 마음을 이루는 그물은 벼리가 하나하나 모여서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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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56) 얄궂은 말투 101 : 삶 속에서


내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강현정·전성은-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메디치미디어,2015) 31쪽


 삶 속에서

→ 삶에서

→ 살면서

→ 이 삶에서

→ 이처럼 살면서

 …



  요즈음 들어서 부쩍 “삶 속”이라는 말투가 널리 퍼졌습니다. 삶을 말하려 하면 ‘삶’을 말하면 될 텐데, 이 낱말에 ‘속’을 군더더기로 잘못 붙이는 말투입니다. “삶 속에 흐르는 노래”이든 “삶 속에서 소중했던 시간”이든 “삶 속에 던지는 돌”이든 “삶 속의 과학”이든 “삶 속의 미술” 같은 말마디는 모두 올바르지 않습니다. “삶에 흐르는 노래”나 “살면서 소중했던 시간”이나 “삶에 던지는 돌”이나 “삶에 깃든 과학”이나 “삶에 스민 미술”처럼 고쳐쓰거나 바로잡아야 알맞습니다.


  “삶 속으로 녹아들” 수 없습니다. “삶으로 녹아들” 뿐입니다. “우리 삶 속에 남아 있는 문화”가 아니라 “우리 삶에 남은 문화”나 “우리 삶에 새긴 문화”라 해야 올발라요. “삶 속으로 들어가라” 같은 말도 엉뚱합니다. “삶으로 들어가라”나 “삶으로 파고들어라”라 해야 알맞아요. “삶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가 아니라 “삶에서 희망을 말한다”입니다. “삶 속에 묻힌 보물”이 아닌 “삶에 묻힌 보물”이에요.


  ‘속’을 잘못 쓰는 까닭은 번역 말투 때문입니다. 서양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그만 ‘속’을 잘못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in my life”를 “나의 삶 속에서”처럼 잘못 옮기지요. “내 삶에서”로 옮겨야 올바른데 말이에요. 그리고 일본말을 한국말로 옮길 적에 ‘中’을 ‘속’으로 잘못 옮기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한국말로 ‘삶’이라고만 쓰지만, 예전에는 한자말로 ‘인생(人生)’이라는 낱말을 흔히 썼고, “인생 속에서 찾는 의미”처럼 잘못 쓰기 일쑤였습니다. “인생에서 찾는 뜻”이나 “삶에서 찾는 뜻”으로 적어야 올발라요. 4348.3.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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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참으로 이루어야 할 뜻은 무엇일까

내 삶에서 참다이 찾아야 할 길은 무엇일까


‘진정(眞正)으로’는 ‘참으로’나 ‘참다이’로 손질하고, ‘추구(追求)해야’는 ‘이루어야’나 ‘찾아야’나 ‘좇아야’나 ‘바라야’로 손질합니다. ‘가치(價値)’는 ‘뜻’이나 ‘값어치’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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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8 ‘풀잎빛’과 ‘나뭇잎빛’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흙’을 보았고, ‘흙’을 생각했으며, ‘흙’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흙을 만지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으레 ‘토양(土壤)’을 말합니다. 시골에서 풀을 밟으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풀’을 보았고, ‘풀’을 생각했으며, ‘풀’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풀을 밟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흔히 ‘잡초(雜草)’나 ‘화초(花草)’를 말합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이 땅에서 삶을 지으며 조용히 살림을 가꾸고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본 사람은 홀가분하게 ‘흙내음·흙빛·흙집’을 말하고 바라보며 돌보면서 ‘풀내음·풀빛·풀밥’을 말하고 바라보면서 돌봅니다. 이와 달리, 이 땅에서 살기는 하되 손수 삶을 짓지 않거나 도시에서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다루는 사람은 ‘농업(農業)’을 말하는 한편, ‘초록(草綠)’과 ‘녹색(綠色)’을 말합니다.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쓰는 ‘숲말’은 ‘풀빛’입니다. 숲말을 쓰던 이 나라 한겨레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도 ‘풀빛’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 중국을 섬기면서 중국에서 받아들인 중국말은 ‘초록’이고,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다가서며 떡고물을 챙기다가 일본을 거쳐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지식인이 쓰는 일본말은 ‘녹색’이며, 해방 뒤 미국을 앞세운 서양 문화에 온마음을 사로잡힌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그린(green)’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은 자그마치 네 가지 말을 씁니다. 한국말(숲말) ‘풀빛’을 비롯해서, 중국말 ‘초록’과 일본말 ‘녹색’과 영어 ‘그린’을 함께 써요. 하나를 가리키는 낱말이 ‘네 나라 말’로 네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풀빛’이라고 하면, 이 풀빛은 “풀잎 빛깔”입니다. 풀잎 빛깔 가운데 “여름에 보는 풀잎 빛깔”이라고 할 만합니다. 여름에는 풀잎 빛깔이 거의 그대로 있어요. 잣대나 표준으로 삼는 ‘풀빛’은 수많은 풀잎 빛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리하여, ‘풀빛’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봄풀빛·여름풀빛·가을풀빛·겨울풀빛’이 다 다릅니다. 봄에는 갓 돋은 보들보들 여리면서 옅은 빛깔입니다. 여름에는 짙푸른 빛깔입니다. 가을에는 살그마니 누렇게 바래는 빛깔입니다. 겨울에는 샛노랗거나 싯누렇게 바래어 시든 빛깔입니다.


  봄에도 갓 돋은 싹이라면 ‘싹빛’이나 ‘풀싹빛’입니다. 그리고, 풀마다 빛깔이 다 다르니, ‘민들레잎빛’과 ‘씀바귀잎빛’과 ‘봄까지꽃잎빛’과 ‘별꽃나물잎빛’과 ‘돌나물잎빛’과 ‘갓잎빛’과 ‘배춧잎빛’과 ‘당근잎빛’처럼 다 다른 풀빛을 헤아릴 수 있어요. 이러한 풀잎빛도 철마다 다르니, ‘봄민들레잎빛’과 ‘여름민들레잎빛’처럼 갈라서 쓸 수 있지요.


  나뭇잎 빛깔도 ‘풀빛’으로 아울러서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뭇잎은 나무에 달린 잎사귀 빛깔인 만큼, 따로 ‘나뭇잎빛’처럼 쓸 수 있어요.


 풀빛 = 풀잎빛 + 나뭇잎빛


  다시 말하자면, ‘풀빛 → ㄱ. 풀잎빛 ㄴ. 나뭇잎빛’처럼 풀빛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뭇잎빛도 ‘봄나뭇잎빛·여름나뭇잎빛·가을나뭇잎빛·겨울나뭇잎’으로 더 나눌 수 있어요.


  모든 풀잎빛과 나뭇잎빛을 아울러서 ‘풀빛’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탕말이 되는 ‘풀빛’을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넓고 깊게 살피면,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풀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풀빛은 그저 한 가지 풀빛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풀빛이 잇달아 우리 곁으로 스며드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풀빛을 맞아들이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 숲말(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풀잎 빛깔이기에 풀빛인데, 이 낱말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초록(중국말)’이나 ‘녹색(일본말)’이나 ‘그린(영어)’ 같은 낱말을 함부로 섞어서 쓰면, 생각날개를 조금도 못 펼칩니다.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헤아릴 때에 비로소 온갖 풀빛이 마음껏 나래치면서 퍼집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풀 가운데 사람이 먹는 풀은 따로 ‘푸성귀·남새·나물’로 나누기도 합니다. 사람이 손수 심는 ‘남새’라는 풀은 ‘남새빛’이 되고, 들과 숲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서 돋는 ‘나물’이라는 풀은 ‘나물빛’이 되며, 남새와 나물을 아우르는 ‘푸성귀’라는 풀은 ‘푸성귀빛’이 되어요. 게다가 들나물은 ‘들나물빛’이고 멧나물은 ‘멧나물빛’입니다. 봄나물은 ‘봄나물빛’이 되고, 겨울나물은 ‘겨울나물빛’이 될 테지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리키는 ‘숲’을 바라보면서 ‘숲빛’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숲말을 쓰는 우리들은 숲빛을 바라봅니다. ‘봄숲빛’을 바라보고, ‘여름숲빛’을 바라보지요. 수많은 푸른 빛깔을 얼싸안을 수 있을 때에, 내 몸과 마음은 푸르게 흐르는 바람이 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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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20] 물뿅뿅이



  여덟 살 큰아이가 읍내 가게에서 ‘물게임기’를 보았습니다. 물게임기를 사 달라면서 나를 부릅니다. ‘물게임기’가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그거 있잖아요. 물 뿅뿅 쏘는 거.” 이렇게 말해도 도무지 모르겠어서, 아이가 이끄는 데로 가서 쳐다봅니다. 아, 그렇구나. 이것이로구나. 아이 말대로 ‘물게임기’는 물을 뿅뿅 쏘아서 조그마한 고리를 꽂는 놀잇감입니다. 네모난 물틀에 작은 고리가 헤엄치듯이 동동 떠다니는데, 단추를 눌러서 바람을 뿅뿅 넣으면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면서 고리가 춤을 추는데 작은 막대기에 꽂힐랑 말랑 흔들립니다. 이 놀잇감을 놓고 ‘물게임기’라 하는군요. 그러니까, 물을 뿅뿅 쏘아서 고리를 넣는 놀잇감이니 ‘물뿅뿅이’라든지 ‘물고리넣기’라고도 할 만합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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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55) 빵꾸/펑크


얘 펠리야, 너무 상심하지 마라. 우리 운전수는 자동차 타이어에 난 빵꾸를 잘 고치니까, 네 부리의 구멍도 금방 땜질해 줄 거다

《로알드 달/김연수 옮김-창문닦이 삼총사》(시공주니어,1997) 86쪽


 자동차 타이어에 난 빵꾸를

→ 자동차 바퀴에 난 구멍을



  ‘빵꾸’는 일본말입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펑크’로 고쳐쓰라 나오는데, ‘펑크’는 영어입니다. 이 말도 저 말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은 ‘구멍’입니다. 이 보기글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보기글 앞쪽에서는 일본말 ‘빵꾸’를 쓰더니, 곧이어 한국말 ‘구멍’을 씁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스며든 얄궂은 일본말 가운데 하나가 ‘빵꾸’입니다. 아직도 꽤 많은 한국사람은 이 일본말을 스스럼없이 씁니다. 게다가 이 일본말을 털거나 고쳐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국말이 ‘구멍’이 아닌 영어 ‘펑크’를 써야 하는 줄 잘못 압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미국이 이 나라로 들어왔기 때문일까요.


 펑크를 때우다 → 구멍을 때우다

 양말에 펑크가 나다 → 양말에 구멍이 나다

 일이 엉뚱한 데서 펑크가 났다 → 일이 엉뚱한 데서 틀어졌다

 저번 학기에도 펑크를 냈던 → 저번 학기에도 바닥을 친


  한국말을 다루는 슬기로운 한국말사전이라면, 일본말 ‘빵꾸’뿐 아니라 영어 ‘펑크’도 모두 털어내거나 씻어낼 수 있도록 말풀이를 새롭게 달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니면, 이런 외국말은 모두 한국말사전에서 빼야지요. 한국말은 ‘구멍’입니다. “모임에 펑크를 냈다”는 “모임에 바람을 맞혔다”나 “모임을 깼다”나 “모임에 빠졌다”로 고쳐쓰면 됩니다. “펑크를 냈던 과목”은 “바닥을 친 과목”이나 “낙제점을 받은 과목”이나 “바닥 점수를 받은 과목”이나 “떨어진 과목”으로 고쳐쓰면 돼요. 4348.3.5.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얘 펠리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 운전수는 자동차 바퀴에 난 구멍을 잘 고치니까, 네 부리에 난 구멍도 곧 땜질해 줄 테니


‘상심(傷心)하지’는 ‘애태우지’나 ‘걱정하지’로 손보고, ‘타이어(tire)’는 ‘바퀴’로 손봅니다. “부리의 구멍”은 “부리에 난 구멍”으로 손질하고, ‘금방(今方)’은 ‘곧’으로 손질하며, “땜질해 줄 거다”는 “땜질해 줄 테다”나 “땜질해 줄 테니”나 “땜질해 줄 테니까”로 손질합니다.



빵꾸(일 panku) : → 펑크

펑크(puncture)

1. 고무 튜브 따위에 구멍이 나서 터지는 일

   - 펑크를 때우다 / 타이어에 펑크가 나다

2. 의복이나 양말 따위가 해져서 구멍이 뚫리는 일

   - 양말에 펑크가 나다 / 신발 앞쪽에 펑크가 났다

3. 일이 중도에 틀어지거나 잘못되는 일

   - 일이 엉뚱한 데서 펑크가 났다 / 그가 오늘 모임에 펑크를 냈다

4. 낙제에 해당하는 학점을 받음을 이르는 말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펑크를 냈던 과목이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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