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7 ‘짓다’와 ‘지우다’



  짓는 사람은 늘 손수 짓습니다. 지우는 사람은 언제나 남한테 맡깁니다. 짓기에 손수 가꿉니다. 지우기에 언제나 남한테 손을 벌립니다.


  삶은 짓습니다. 삶은 지우지 않습니다. 삶은 짓기에 늘 새롭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좀 잘못했거나 엉터리로 했다고 여겨서 ‘지우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지우려고 한대서 내가 걸어온 길이 사라지거나 없어질까요? 내가 일으킨 말썽이나 잘못을 지우려고 하면 참말 지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발자국이든 굳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껏 어떤 길을 걸어왔어도 이제부터 새 발걸음을 지으면 됩니다. 지운다고 없어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우려고 하면 자꾸 지울 생각에 파묻힙니다. 지우려고 하니까 외려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지저분해지고 맙니다.


  새로 지으려고 하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새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사람은 지난날 어떤 말썽이나 잘못을 일으킨 적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짓는 마음은 ‘감추거나 숨기거나 없애’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새로 깨어나려는 마음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삶을 새로 가꾸어서 돌보려는 마음입니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만 한 값을 치러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값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값을 치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앞에 놓고 이 아이를 꾸짖거나 윽박지르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얼차려를 줄 수 있습니다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따사롭게 타이르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안 바라볼 수도 있어요. 잘못을 저지르건 말건, 이 아이가 삶을 새로 짓도록 웃음과 노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간다고 해서 더 낫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다 다른 길입니다. 다 다른 길이되, 어느 길은 ‘주눅 드는 길’이고, 어느 길은 ‘가르치고 배우는 길’이며, 어느 길은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입니다.


  짓는 삶은 새롭습니다. 이제껏 없던 것을 지으니 새롭습니다. 지우는 삶은 낡습니다. 이제껏 있던 것을 그저 붙잡거나 매달리니 낡습니다. 짓는 삶은 늙거나 아프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깨어나니까 늙을 일도 아플 일도 없지만, 늙음이나 아픔이라는 말을 아예 떠올리거나 그리지 않습니다. 지우는 삶은 늙거나 아픕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면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하니까 늙거나 아플 일만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이 한곳에 고인 채 더 움직이지 않으니 늙거나 아픕니다. 지우는 삶은 언제나 늙음과 아픔만 떠올리거나 그립니다.


  새로운 일을 지으면 새롭습니다.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으려고 하면 지치거나 괴롭습니다. 새로운 일로 나아가서 기쁘게 맞이하면 참으로 새로우면서 기쁩니다. 새로움과 기쁨을 생각해서 넉넉히 맞아들이니 말 그대로 새롭고 기쁩니다. 이와 달리,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기만 하면, 이 틀에 박힌 대로 해내야 하니까 아무래도 몸이나 마음이 힘들면서 기운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 고단하면서 웃음도 없고 노래도 없어요.


  삶을 짓는 사람이 웃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삶짓기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삶을 지어야 삶짓기입니다. 웃음을 지어 웃음짓기입니다. 노래를 지어 노래짓기입니다. 글을 지어 글짓기입니다. 꿈을 지어 꿈짓기입니다. 사랑을 지어 사랑짓기입니다. 밥을 지어 밥짓기입니다. 집과 옷을 지으면 집짓기와 옷짓기입니다.


  우리는 먼먼 옛날부터 모든 삶을 손수 지었습니다. ‘삶짓기(현실 창조)’란 바로 내가 나답게 홀로서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기운찬 발걸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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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206 : 낙토樂土



이제야말로 나는 시가 내 생의 구원이 될 것이라는 예감에 오늘 하루도 즐거이 진흙밭을 낙토(樂土)로 여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기만 하다

《임동확-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실천문학사,2005) 159쪽


 낙토(樂土)

→ 즐거운 땅

→ 기쁨누리

→ 멋진 나라

→ 하늘나라

→ 아름다운 곳

 …



  한자말 ‘낙토’는 “즐거운 땅”을 가리킵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땅을 가리킨다고 뜻풀이를 하는데, ‘행복’이라는 한자말은 ‘기쁨’을 누려서 흐뭇한 마음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즐겁고 행복하게”는 “즐겁고 기쁘게”를 가리키는 셈이고, 뜻이 같은 낱말을 나란히 적은 셈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즐거운 땅”이나 “기쁜 터전”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기쁨누리’나 ‘기쁨나라’ 같은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써도 잘 어울립니다. ‘하늘나라’ 같은 낱말을 예부터 썼고, ‘하늘기쁨나라’라든지 ‘기쁜하늘나라’ 같은 낱말을 그야말로 기쁘게 써 볼 만합니다.


 황무지를 일구어 낙토로 꾸미다

→ 거친 땅을 일구어 좋은 땅으로 꾸미다

→ 거친 땅을 일구어 기름지게 꾸미다

 살기 좋은 낙토를 떠나

→ 살기 좋은 땅을 떠나

→ 살기 좋은 곳을 떠나


  한자말 ‘낙토’는 “살기 좋은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한국말사전에 나온 보기글 가운데 “살기 좋은 낙토”는 겹말입니다. 그냥 “살기 좋은 땅”이라고 적으면 됩니다. 우리는 ‘낙토’라는 낱말을 안 써도 될 뿐 아니라, 이런 낱말에 한자를 붙여서 써야 할 일도 없습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제야말로 나는 시가 내 삶을 수렁에서 건져 주리라는 느낌에 오늘 하루도 즐거이 진흙밭을 꿈누리로 여길 수 있는 느긋한 마음이어서 기쁘기만 하다


“내 생(生)의 구원(救援)이 될 것이라는”은 “내 삶을 살릴 수 있다는”이나 “내 삶을 수렁에서 견져 주리라는”으로 손보고, ‘예감(豫感)에’는 ‘느낌에’나 ‘미리 느껴’로 손봅니다. “여길 수 있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어서”는 “여길 수 있는 느긋한 마음이어서”나 “여길 수 있도록 느긋해서”로 손질하고, ‘행복(幸福)하기만’은 ‘즐겁기만’이나 ‘기쁘기만’으로 손질합니다.



낙토(樂土) : 늘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땅

   - 황무지를 일구어 낙토로 꾸미다 / 살기 좋은 낙토를 떠나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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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137) 분명 1


절망의 순간에도 꿈을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최기숙-어린이, 넌 누구니?》(보림,2006) 202쪽


 분명 멋진 일이지만

→ 틀림없이 멋진 일이지만

→ 참으로 멋진 일이지만

→ 대단히 멋진 일이지만

→ 아주 멋진 일이지만

 …



  한자말 ‘분명(分明)’은 “틀림없이 확실하게”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말로 ‘틀림없이’를 쓰면 됩니다. ‘분명’은 ‘흐릿함이 없이’나 ‘똑똑히’나 ‘뚜렷하게’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말 ‘흐릿하지 않게’나 ‘똑똑히’나 ‘뚜렷하게’ 같은 한국말을 쓰면 되지요.


  한자말 ‘확실(確實)하다’는 “틀림없이 그러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사전에서 ‘분명’을 풀이하는 말은 겹말입니다. “틀림없이 틀림없게”로 풀이한 꼴입니다. 이 대목을 더 헤아린다면, 한국사람은 ‘분명하게’나 ‘확실하게’ 두 가지 모두 쓸 까닭이 없는 셈이요, ‘틀림없이(틀림없게)’라는 한국말이 두 가지 한자말에 밀리거나 짓눌리는 셈입니다.


 얼굴을 분명하게 알아보다 → 얼굴을 또렷이 알아보다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다 → 말소리가 똑똑하게 들리다

 발음이 분명하다 → 발음이 좋다 / 알아듣기 좋다

 분명한 증거 → 뚜렷한 증거 / 틀림없는 증거

 삶의 목표가 분명치 않다 → 사는 뜻이 흐리멍덩하다


  “분명치 않다” 같은 말마디는 “뚜렷하지 않다”로 고쳐쓰면 되는데, 이 자리에서는 ‘흐릿하다’나 ‘흐리다’나 ‘흐리멍덩하다’나 ‘흐리터분하다’나 ‘하리타분하다’ 같은 말마디를 넣을 수 있어요. 흐린 모습을 가리키는 수많은 한국말을 알맞게 살려서 쓰면 됩니다.


 이 사건은 타살임이 분명하다 → 이 사건은 틀림없이 타살이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그 여자는 틀림없이 운다

 태도가 분명한 사람 → 매무새가 또렷한 사람


  한국말사전을 보면 ‘분명(奔命)’이라는 한자말도 나오는데, 이런 낱말은 쓸 일이 없습니다. 옛날에 임금과 얽힌 어떤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이기는 한데, 이제는 한국말사전에서 덜어내야지 싶습니다. 아니면 역사사전에 싣든지요. 그런데 이런 온갖 한자말을 굳이 역사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예부터 권력을 거머쥔 자리에 있는 이들은 한국말을 쓰지 않았는데, 오늘날 대통령이 쓰는 온갖 영어를 앞으로 먼 뒷날에 역사사전에 실으려 한다면, 아무래도 뜬금없는 일이 될 테니까요. 4339.8.22.불/4348.3.16.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끔찍히 힘든 때에도 꿈을 떠올리니 참으로 멋진 일이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절망(絶望)의 순간(瞬間)에도”는 “절망스런 때에도”나 “끔찍하고 힘든 때에도”나 “끔찍히 힘든 때에도”로 다듬습니다. “기억(記憶)한다는 것은”은 “떠올린다면”이나 “떠올리니”로 손보고, ‘결(決)코’는 ‘조금도’나 ‘썩’이나 ‘그리’로 손봅니다.



분명(分明)

[부]

: 틀림없이 확실하게

   - 전구에는 분명 불이 들어와 있지 않은데

[형]

1. 모습이나 소리 따위가 흐릿함이 없이 똑똑하고 뚜렷하다

   - 얼굴을 분명하게 알아보다 /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다 / 발음이 분명하다

2. 태도나 목표 따위가 흐릿하지 않고 확실하다

   - 분명한 증거 / 태도가 분명한 사람 / 삶의 목표가 분명치 않다

3. 어떤 사실이 틀림이 없이 확실하다

   - 이 사건은 타살임이 분명하다 /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奔命) :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바삐 움직임

   - 지난해 농사를 실패하였고 금년에는 분명으로 인하여 지쳤사오니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64) 분명 2


건물 앞에 거의 지워져 가는 글씨로 “열심 가게”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봐서 1층은 가게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로알드 달/김연수 옮김-창문닦이 삼총사》(시공주니어,1997) 10쪽


 가게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 가게로 쓰였구나 싶다

→ 가게로 쓰인 줄 알겠다

→ 틀림없이 가게로 쓰였다

→ 아마 가게로 쓰였겠지

 …



  잘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그러하겠구나 하고 여기기에 ‘틀림없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이 보기글에서도 ‘틀림없이’라는 낱말을 넣으면 됩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러하다고 여기지만, 내가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는 않았으니 ‘아마’라는 낱말을 넣을 수 있습니다. “가게로 쓰인 줄 알겠다”라든지 “가게로 쓰였구나 싶다”처럼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건물 앞에 거의 지워져 가는 글씨로 “씩씩 가게”라고 적힌 간판이 걸린 모습으로 봐서 1층은 아마 가게였구나 싶다


“열심(熱心) 가게”는 “바지런 가게”나 “부지런 가게”나 “씩씩 가게”나 “튼튼 가게”로 다듬고, “적혀 있는”은 “적힌”으로 다듬으며, “걸려 있는 것으로 봐서”는 “걸린 모습으로 봐서”로 다듬습니다. ‘사용(使用)되었던’은 ‘쓰였던’이나 ‘썼던’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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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66) ‘-의’를 쓸 자리 (‘나의’와 ‘내’)


주춤주춤 뒤로 돌아서는 현하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문현식-선생님과 함께 일기 쓰기》(철수와영희,2012) 191쪽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 내 잘못을 깨달았다

→ 내 바보스러운 잘못을 깨달았다

→ 내가 잘못했다고 깨달았다

→ 내가 잘못한 줄 깨달았다

 …



  아이가 말을 잘 쓰려면, 아이 곁에 있는 어른이 말을 잘 써야 합니다. 예부터 모든 말은 언제나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는 모름지기 저를 낳은 어버이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를 살펴서 물려받았어요. 예부터 고장과 고을과 마을마다 말이 달랐기에, 아이는 언제나 제 어버이가 쓰는 말을 하나하나 물려받아 ‘사투리를 어른과 똑같이’ 잘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투리를 잘 쓰는 어른이 드뭅니다. 고장마다 소릿값은 조금 남았으나, 말씨나 낱말에서는 사투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여느 어버이는 거의 모두 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 말투’를 익혔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방송과 신문과 책을 만나면서 ‘방송·신문·책 말투’를 받아들여요. 그래서 오늘날 아이들은 ‘어버이 말투’는 거의 못 물려받으면서 ‘교과서 말투’와 ‘방송·신문·책 말투’를 물려받아서 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어린이 누구나 ‘집에서 어버이가 쓰는 말’보다 ‘학교에서 교사가 쓰는 말’에 훨씬 크게 물든다고 할 만합니다. 집에서 어버이가 가르쳐서 물려줄 수 있는 말은 드물고,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쳐서 물려주는 말이 훨씬 큽니다.


 뒤로 돌아서는 현하의 뒷모습을

→ 뒤로 돌아서는 현하 모습을

→ 뒤로 돌아서는 현하를

→ 뒤돌아서는 현하 모습을

→ 뒤돌아서는 현하를

→ 현하가 뒤돌아서는 모습을

→ 현하가 뒤로 돌아서는 모습을


  이 보기글을 보면 두 군데에 ‘-의’가 나옵니다. 하나는 “나의 실수”이고, 둘은 “현하의 뒷모습”입니다. “나의 실수”는 “내 실수”나 “내 잘못”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의’는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이기 때문입니다. ‘sorry’를 ‘쏘리’로 적는다고 하더라도 한국말이 아닌 영어입니다. ‘私の’를 ‘나의’로 적는다고 하더라도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입니다. 이 일본말을 영어사전에서 “my = 나의”로 풀이하더라도,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일 뿐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은 이 대목을 슬기롭게 읽고 살펴 주어야 합니다. 교과서나 책에 적힌 글이라 하더라도 잘못 적힌 글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때에는 교과서나 책에 적힌 글을 어떻게 고치거나 바로잡아서, 한국말을 어떻게 배워야 제대로 잘 배우는가 하는 대목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몫을 해 주는 사람이 참다운 교사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교사는 어느 과목을 맡든 ‘말’로 가르칩니다. 교사는 언제나 ‘말’을 슬기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수학 교사이든 과학 교사이든 음악 교사이든 체육 교사이든 ‘말’을 올바로 다루지 못한다면 참다운 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어 교사라면 더더욱 말을 잘 다루어야 하고요.


  그러나, 교사 자리에 선 어른도 미처 못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교사가 되기까지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교육과정이 없을 수 있어요. 이런 교육과정을 거쳤어도 제대로 모르거나 못 배웠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학생 자리에 서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스스로 제대로 살펴서 배우면 됩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말을 잘 가르쳐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린이와 푸름이가 스스로 말을 잘 배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돼요.


  우리가 말을 배우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어버이와 어른한테서 배웁니다. 둘째, 나 스스로 배웁니다. ‘-의’를 잘못 쓰는 어버이와 어른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어린이와 푸름이는 이 대목을 둘레 어버이나 어른한테서 슬기롭게 배우기에는 많이 어렵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의’를 제대로 쓰는 길은 어린이와 푸름이 스스로 차근차근 살펴서 익히기를 바라요.


  으레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는 얼거리일 테지만, 어린이와 푸름이가 슬기롭고 똑똑하게 잘 배웠으면, 어린이와 푸름이가 어버이와 어른을 얼마든지 사랑스럽고 즐겁게 잘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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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춤주춤 뒤로 돌아서는 현하를 보면서 내 잘못했다고 깨달았다

현하가 주춤주춤 뒤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잘못을 깨달았다


“현하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瞬間)”은 “현하 뒷모습을 보는 때”나 “현하 뒷모습을 보면서”로 손볼 만한데, 글흐름을 살펴서 “현하가 뒤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로 손보아도 됩니다. ‘실수(失手)’는 ‘잘못’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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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6 ‘밭’과 ‘마당’



  어느 한 가지가 모인 곳을 ‘밭’이라 합니다. 배추밭이나 무밭이나 능금밭이나 포도밭처럼 ‘밭’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텃밭이라는 데에 온갖 푸성귀를 심거나 가꾸기도 하지만, 밭은 으레 어느 한 가지가 자라기에 너그러운 품입니다. 어느 한 가지가 튼튼하게 자라면서 다른 여러 가지도 이 밭에서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마당’은 밭과 달리 모든 것이 모여서 어우러지는 곳입니다. 마당은 놀이터이면서 일터입니다. 마당은 삶터이면서 사랑터입니다. 마당은 이야기터이면서 노래터요 춤터입니다.


  밭은 ‘터’가 아닙니다. 밭은 ‘바탕’입니다. 밭이 있기에 모든 목숨이 자랍니다. 밭이 있어서 모든 목숨이 새로운 숨결을 얻어서 씩씩하게 태어나거나 깨어날 수 있습니다.


  밭에는 씨앗이 깃듭니다. 씨앗을 심는 곳은 밭입니다. 씨앗은 마당에 심지 않습니다. 씨앗을 마당에 심었다가는 그만 밟혀서 죽거나, 눌려서 깨어나지 못해요. 왜냐하면, 마당은 온갖 것이 날뛰거나 춤추면서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밭에 씨앗을 심듯이, 어미는 제 몸과 마음에 씨앗을 심습니다. 마당에서 온갖 것이 어우러지듯이, 아비는 제 몸과 마음을 넓게 펼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어머니는 너른 사랑’이라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어머니는 고운 꿈’이라 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꿈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꿈으로 모든 길을 차근차근 아이(씨앗, 새로운 목숨)한테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제 품에 씨앗으로 심어서 키우는 아이한테 새로운 숨결을 빚어서 베푸는 동안, 앞으로 밤에서 낮으로 나아갈 적에 마음에 담을 꿈을 가르칩니다. 아이는 새로운 씨앗 하나에서 깨어나면서 맨 먼저 고요한 밤인 어머니 품에서 꿈을 물려받습니다.


  꿈을 물려받고 열 달을 자란 목숨이 밤에서 낮으로 나오면서 ‘아기’라는 몸을 입습니다. 이제 아기는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가슴으로 나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품에서 열 달을 자라면서 ‘갓난쟁이’로 웃고 우는 아기를 사랑으로 다스립니다. 다스리지요. 아기가 천천히 아이로 거듭나면서 스스로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달리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고 말을 짓도록 다스리지요. 아버지는 아이가 짓는 모든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지으려는 모든 꿈을 넉넉하게 맞아들입니다. 아이는 아버지 가슴에서 뛰놀면서 해맑게 자랍니다. 아이는 아버지 가슴에서 신나게 뛰고 달리면서 아름답게 자랍니다.


  밭에서 태어난 숨결은 마당에서 큽니다. 밭에서 키운 숨결은 마당에서 홀로섭니다. 밭에서는 홀로서지 못합니다. 밭에서는, 씨앗이 눈을 떠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마당에서는, 눈을 떠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 씨앗이 한껏 춤추고 노래하면서 모든 사랑을 짓고는 어깨동무하면서 누리도록 합니다.


  ‘보금자리’가 되려면 밭과 마당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부동산이나 재산이 되는 집이 아닌, 보금자리가 될 만한 곳에는 밭과 마당이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밭에 씨앗을 심습니다. 마당에서 뛰놉니다. 밭 한쪽에서 나무가 쑥쑥 오르면서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당 한쪽에 살림살이를 놓고 집안을 가꿉니다. 밭일은 어머니 몫입니다. 마당일은 아버지 몫입니다. 밭놀이는 어머니가 물려줍니다. 마당놀이는 아버지가 물려주지요.


  밭도 없고 마당도 없는 도시 사회에서는, 밭도 마당도 헤아리지 않는 아파트에서는, 사람이 사람다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조그마하든 커다랗든, 밭과 마당을 생각해서 우리 보금자리에 마련해야 합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고 어른이 어른답게 살려면, 우리 보금자리에는 ‘집’과 ‘밭’과 ‘마당’이 있어야 합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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