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037) 낭만적 1


그래도 리젯은 낭만적인 꿈에 부풀었고, 뭔가 모험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장석봉 옮김-다시 야생으로》(지호,2004) 64쪽


 낭만적인 꿈에 부풀었고

→ 새로운 꿈에 부풀었고

→ 부푼 꿈이 가득했고

→ 풋풋한 꿈에 부풀었고

→ 애틋한 꿈에 부풀었고

→ 싱그러운 꿈에 부풀었고

→ 사랑스러운 꿈에 부풀었고

 …



  ‘낭만’이라는 낱말을 쓰는 분이 있으면 슬쩍 “그러게요, 그런데 ‘낭만’이 무엇을 가리키지요?” 하고 묻곤 합니다. ” 이때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낭만’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낱말을 쓰는 사람은 무척 많고, ‘낭만 + 적’ 꼴인 ‘낭만적’을 쓰는 분은 더더욱 많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낭만’을 찾아보면 퍽 갑갑합니다. 말풀이는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인데다가 “실현성이 적은” 무엇이라고 나옵니다. 이런 말풀이를 읽으면서 ‘낭만’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정서적이며’는 무엇이고 ‘이상적으로’는 또 무엇인가요.


  ‘정서적(情緖的)’이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무엇이라 합니다. ‘정서’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라 합니다. ‘이상적(理想的)’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이라 하는군요.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무엇을 일으키는 느낌”이 ‘낭만’인 셈입니다. 이러면서 ‘실현성(實現性)’이 적다고 했는데, ‘실현성’이란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라고 하니까, “이루기 힘들다”는 소리요, 한 마디로 갈무리해 보면, “사람들한테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무엇을 일으키지만 이루어지기 힘든 느낌”을 놓고 ‘낭만’이라 일컫는 셈입니다.


  이번에는 ‘낭만적’ 풀이를 봅니다.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이라고 나옵니다. ‘낭만’ 풀이에서는 “실현성이 적은”이라 했는데 ‘낭만적’ 풀이에서는 “현실적(現實的)이 아닌”이라 하는군요. ‘-적’을 붙인 낱말이니 말풀이에서도 ‘-적’을 붙여야 하는가 봅니다. ‘현실적’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는”을 가리킨답니다. 곧 “이 자리에 있거나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을 뜻하는 셈이고, “현실적이 아닌”이란 “이 자리에 없거나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을 가리킵니다. ‘환상적(幻想的)’이란 “생각 따위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고 헛된”이라 합니다. 말풀이에 ‘현실적인’이 다시 되풀이되는군요. ‘낭만적’ 말풀이는 겹말인 셈입니다. ‘공상적(空想的)’이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보는”이라 합니다. 이 말풀이에서도 ‘현실적’이 거듭 나옵니다. ‘낭만적’ 말풀이는 같은 풀이가 세 차례 거듭되는 아주 얄궂은 겹말인 꼴입니다. 게다가 ‘공상적’ 풀이에서는 “실현될 가망이 없는”이라는 대목마저 있습니다. 어쩜 한국말사전 말풀이는 이토록 엉망진창 겹말투성이일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을 그리는” 일이 ‘낭만적’이라는 소리인데, 말풀이는 얼렁뚱땅 엉터리로 적히고, 이래저래 겹말만 가득합니다.


  이런 말풀이를 읽으면서 낱말뜻을 옳게 헤아릴 만한 사람은 거의 없겠구나 싶습니다. 말풀이를 읽어도 말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람들은 처음부터 말뜻이나 말느낌이 어떠한가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꿈같다 . 꿈만 같다 . 꿈과 같다

 꿈결 같다 . 꿈나라 같다 . 꿈누리 같다


  이 보기글에서는 “꿈에 부풀었고”나 “부푼 꿈이 가득했고”처럼 적바림해 보아도 됩니다. 애써 ‘낭만적인’ 꿈이라 적지 않아도 됩니다. 말차례를 바꾸어 “부푼 꿈”이라 한 다음 “부푼 꿈이 가득했고”라든지 “부푼 꿈이 넘쳤고”나 “부푼 꿈으로 즐거웠고”나 “부푼 꿈이 감돌았고”나 “부푼 꿈으로 기뻤고”처럼 적바림할 수 있어요.


  또는 ‘풋풋한’이라든지 ‘애틋한’이라든지 ‘사랑스러운’이라든지 ‘아련히 그리운’이라든지 ‘고운’이라든지 ‘무지개 빛깔’ 같은 꾸밈말을 넣어 봅니다. “신나는 꿈에 부풀었고”처럼 적어 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낭만’과 ‘낭만적’이라는 낱말이 이 나라에 들어오기 앞서, 한국사람은 ‘꿈’이나 ‘꿈 같다’ 같은 말로 내 느낌과 넋과 마음을 담아내거나 나타내며 살았습니다. ‘꿈같다’처럼 한 낱말로 쓰지는 않으나, 가만히 보면 ‘꿈같다’처럼 한 낱말을 새롭게 일구어 내 느낌과 넋과 마음을 나타내면 잘 어울리리라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사랑스러운·애틋한·보드라운·좋은·살가운·풋풋한·기쁜·즐거운·반가운·고즈넉한·아름다운·아리따운·고운·예쁜’ 같은 말마디를 알맞게 골라서 붙일 수 있습니다. 때와 곳을 살펴서 이 같은 꾸밈말을 넣으면 됩니다.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라면, “낭만적인 목소리”가 아닌 “달콤한 목소리”이거나 “꾀꼬리 같은 목소리”이거나 “구수한 목소리”이거나 “보드라운 목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 무척 멋있어 보일지도

→ 몹시 아름다워 보일지도

→ 참으로 좋아 보일지도


  그러고 보니, 나날이 ‘멋’이나 ‘아름다움’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읊는 사람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나날이 ‘낭만’과 ‘낭만적’이라는 낱말로 이야기를 읊는 사람만 마주합니다. ‘꿈’이나 ‘꿈결’이나 ‘꿈누리’나 ‘꿈나라’ 같은 낱말로 내 넋과 얼을 드러내려는 사람 또한 마주하기 힘듭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꿈이 깃들지 못하니, 내 넋이나 말에 꿈결 같은 느낌이 묻어나지 못하리라 봅니다. 꿈이 없는 삶에 꿈을 잃은 말입니다. 꿈하고 동떨어진 삶에 꿈이랑 멀어지는 글입니다. 4341.1.14.달/4343.12.6.달/4348.3.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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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리젯은 새로운 꿈에 부풀었고, 뭔가 부딪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험(冒險)을 해 보고”는 그대로 둘 만하지만, “부딪혀 보고”로 손볼 수 있습니다.



낭만적(浪漫的) :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 낭만적 성향 / 순전히 문학도로서의 낭만적 성격과 호기심 /

     낭만적인 분위기 / 그는 낭만적인 목소리로 시를 낭독했다 /

     양 떼를 몰고 저 비단길을 오르는 것도 상당히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낭만(浪漫) :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 젊은 시절의 낭만 / 정열과 낭만이 넘치던 학창 시절 / 낭만에 젖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625) 낭만적 2


“그게 이 무사 유령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미련이야. 그것만 하면 성불할 수 있겠지.” “정말 그것만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여한은 없소.” “알겠어요.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야.”

《타카하시 류미코/서현아 옮김-경계의 린네 2》(학산문화사,2010) 17쪽


 낭만적이야

→ 멋있어

→ 아름다워

 …



  아득한 옛날에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땅을 일구던 수수한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나, 땅을 일구는 사람을 다스린다는 권력자는 으레 이웃 나라나 겨레를 넘보면서 쳐들어가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때에 억지로 싸움터로 끌려가서 칼을 휘두르거나 활을 쏘면서 애꿎게 죽어야 한 사람이 많았고, 이 싸움터에서 죽은 사내 한 사람이 끝끝내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유령으로 남았답니다. 이 유령은 ‘넋 혼인’을 해 주면 아쉬움을 털고 저승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야.” 하고 말합니다.


  사랑을 찾거나 바라면서 저승으로 못 가고 이승에서 떠도는 무사 유령입니다. 이녁 삶이란 슬프다 할 만하고 애틋하다 할 만합니다. 이렇게 슬프다 할 만하거나 애틋하다 할 만한 이야기는 으레 소설이라든지 영화에 나오며, 이렇게 소설이나 영화로 꾸며서 내놓은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든지 ‘멋있다’라든지 ‘애처로우면서 꿈 같다’고 여기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온삶을 바치니, 어느 모로 보자면 어리석지만 다르게 보자면 이 몸짓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고운 사랑을 바라며 온마음을 기울이니, 어느 구석으로 보자면 어리숙하지만, 다른 구석으로 살피자면 이 몸짓이 고스란히 곱습니다.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아름다워.”입니다.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고운 사랑이야.”입니다.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꿈결 같은 이야기야.”입니다. 4343.12.6.달/4348.3.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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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 무사 유령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아쉬움이야. 그것만 하면 곱게 저승에 갈 수 있겠지.” “참말 그것만 하면?” “그러면 더 앙금이 없소.” “알겠어요. 어쩐지 딱하기도 하고, 멋있어.”


‘미련(未練)’은 ‘아쉬움’으로 다듬습니다. ‘성불(成佛)’이란 부처가 되는 일을 뜻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곱게 저승으로 갈”로 손질합니다. ‘정(正)말’은 ‘참말’로 손보고, ‘더 이상(以上)’은 ‘더는’으로 손보며, ‘여한(餘恨)’은 ‘남은 아쉬움’이나 ‘아쉬움’이나 ‘앙금’으로 손봅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707) 낭만적 3


넝쿨 집이라고 하면 왠지 아주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 집’이나 ‘거기’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황선미-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 204쪽


 훨씬 낭만적이다

→ 훨씬 따스하다

→ 훨씬 포근하다

→ 훨씬 사랑스럽다

→ 훨씬 살갑다

→ 훨씬 좋다

→ 훨씬 낫다

→ 훨씬 듣기 좋다

 …



  즐겁게 지내는 집이라 하면 아무래도 즐거움이 환하게 드러나는 이름을 붙여야 즐겁습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보금자리라 하면 참으로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느낌이 살아날 만한 이름을 붙여야 기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서로 아끼며 돌보는 사이라면, 서로 아름답거나 살가운 이름을 부르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좋아하며 보살피는 이웃이라면, 함께 반가우면서 좋은 이름을 부르리라 생각해요. 4348.3.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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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 집이라고 하면 왠지 아주 새롭고 숨겨진 느낌이 든다. ‘그 집’이나 ‘거기’라고 할 때보다 훨씬 사랑스럽다


‘특별(特別)하고’는 ‘남다르고’나 ‘다르고’나 ‘새롭고’로 손보고, ‘비밀(秘密)스러운’은 ‘숨겨진’으로 손봅니다. “하는 것보다”는 “할 때보다”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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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57) 통하다通 83


해마다 바다에서 직접 잡는 해산물은 9500만 톤이나 되고, 양식을 통해 얻는 해산물도 4500만 톤이나 됩니다

《얀 리고/이충호 옮김-바다가 아파요》(두레아이들,2015) 13쪽


 양식을 통해

→ 양식을 해서

→ 양식으로

→ 길러서

 …



  낚아서 물고기를 얻는다면 ‘낚아’서 얻습니다. “낚시를 통하”거나 “고기잡이를 통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를 길러서 얻는다면 ‘길러’서 얻습니다. “기르기를 통하”거나 “양식을 통하”지 않습니다. 한자말 ‘양식’을 그대로 쓰려 한다면 “양식을 해서”나 “양식으로”로 고쳐쓰고, 이 한자말을 굳이 안 써도 된다면 “길러서”로 고쳐씁니다. 4348.3.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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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바다에서 낚거나 캐서 9500만 톤이나 얻고, 길러서 4500만 톤이나 얻습니다

고기와 조개와 바닷말을 해마다 바다에서 9500만 톤이나 낚거나 캐서 얻고, 4500만 톤이나 길러서 얻습니다


“직접(直接) 잡는”은 “바로 잡는”으로 손질해야 할 텐데, 고기를 낚는 일은 ‘잡다’가 아닌 ‘낚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해산물(海産物)’은 ‘바닷고기’나 ‘고기’나 ‘고기와 조개’나 ‘고기와 조개와 바닷말’로 손봅니다. ‘양식(養殖)’은 ‘기르는’ 일을 가리키니 “양식을 통해”는 “길러서”로 다듬습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60) 통하다通 84


할머닌 실수가 없는 분이야. 그런데도 모르셔. 우리끼리는 통하는데, 할머니는 아냐. 우리만큼은 아닌 것 같아

《황선미-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 204쪽


 우리끼리는 통하는데

→ 우리끼리는 되는데

→ 우리끼리는 이어지는데

→ 우리끼리는 아는데

 …



  끼리끼리 이어지는 사이가 있습니다. 끼리끼리 이어진다면, 서로 잘 안다고 할 만합니다. 이때에는 서로 어떤 일이나 말을 하든 잘 된다고도 할 만합니다. “마음이 맞다”나 “죽이 맞다”라고도 합니다. “한마음이 된다”거나 “같은 마음”이라고도 할 테지요. 이 보기글에서는 바로 앞에 ‘모르셔’라는 낱말을 썼으니, “우리끼리는 ‘아는데’”로 손보면 앞뒤가 잘 맞으리라 느낍니다. 4348.3.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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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닌 빈틈이 없는 분이야. 그런데도 모르셔. 우리끼리는 아는데, 할머니는 아냐. 우리만큼은 아닌 듯해


‘실수(失手)’는 ‘잘못’으로 바로잡을 낱말인데, 이 자리에서는 “빈틈이 없는”이나 “허술하지 않은”으로 손봅니다. “아닌 것 같아”는 “아닌 듯해”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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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3 ‘바보’와 ‘멍청이’



  바보와 멍청이는 다릅니다. 둘이 같은 뜻이라면, 굳이 두 가지 낱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둘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낱말로 씁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바보’를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합니다. ‘바보’라는 낱말을 풀이하면서 ‘멍청하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그리고, ‘멍청이’라는 낱말을 풀이하면서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바보’는 ‘어리석’으면서 ‘멍청하다’고 하는데, ‘멍청이’는 ‘어리석’으면서 ‘아둔하다’고 합니다. ‘아둔하다’는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고 합니다. ‘둔(鈍)하다’는 다시 “깨우침이 늦고 재주가 무디다”나 “작이 느리고 굼뜨다”를 뜻한다고 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익히거나 살피려고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어쩐지 바보스러워지거나 멍청해지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말풀이는 돌림풀이에다가 서로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썼는지 마음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로 한국말사전이 없던 때에, 국어학자도 없던 때에, 교육이나 학교나 학문도 없던 때에, 어떻게 ‘말’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물려주면서 오늘 이때까지 이을 수 있었는가를 돌아보고 헤아리며 생각해야 합니다.


  ‘바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멍청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생각이 흐르거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보’는 생각이 흐린 사람이 아닙니다. ‘바보’는 조금 어리석거나 못날 수는 있어도 생각이 흐린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에 푹 빠져서 다른 일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을 놓고도 ‘바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딸 바보”라고 하지요. “책만 보는 바보”라든지 “야구만 좋아하는 바보”라든지 “학문은 잘 하지만 집안일은 못 하는 바보”처럼 씁니다. 이런 자리에 ‘멍청이’라는 낱말을 넣어 보셔요. 도무지 안 어울립니다. “딸 바보”는 있어도 “딸 멍청이”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바보’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기에, 앞으로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직 제대로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던 탓에 제대로 모를 뿐인 사람이 ‘바보’입니다. 이와 달리, ‘멍청이’는 제대로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못 알아채는 사람을 가리켜요. 둘레에서 아무리 가르치거나 알려주어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내는 사람이 바로 ‘멍청이’입니다.


  ‘바보’는 스스로 애써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멍청이’는 생각과 머리가 흐리기 때문에 스스로 애써야 하는 줄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이’는 넋이나 얼이 빠진 채 있기 마련입니다. 넋이 빠진 채 있으니,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해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바보’는 “배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멍청이’는 “배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보’한테는 아직 가르칠 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보인 사람 스스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한데, 바보가 바보인 까닭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애쓰면 저도 바보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되는 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바보입니다. 그래서, 바보 곁에는 바보를 일깨울 동무나 이웃이 있어야 해요. ‘멍청이’인 사람은 이웃이나 동무가 아무리 많아도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어서 제대로 못 보는 눈이 흐린 사람”인 탓에 배울 길도 가르칠 길도 막힙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난 사람이라면, 나는 슬기로우면서 철든 ‘어른’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바보이거나 멍청이일 텐데, 내가 바보라면, 나도 슬기를 깨치고 셈이 트며 철이 들어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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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21] 까만조개



  껍데기가 새까만 조개를 한 꾸러미 얻습니다. 수세미로 껍데기를 박박 문지릅니다. 뻘물이 거의 빠졌다 싶어 커다란 냄비에 넣어 펄펄 끓입니다. 껍데기가 새까만 조개를 끓이니 국물이 파르스름합니다. 어쩜 이런 국물 빛깔이 나올까 늘 놀라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춥니다. 밥상에 국물과 조개를 올리니 아이들이 묻습니다. “까만 조개야?” “응, 까만 조개야. ‘홍합’이라고도 해.” 아이들은 ‘홍합’이라는 말은 못 알아듣습니다. 낱낱으로 뜯어 ‘홍·합’이라 말하니 비로소 알아듣지만, 아이들 눈으로 볼 적에 껍데기가 까만 빛깔이니 ‘까만조개(또는 깜조개)’라는 이름을 써야 제대로 알아보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은 조개를 두고 ‘조개’라 하기보다 ‘蛤’이라는 한자를 자꾸 쓰려 합니다. 커다란 조개라면 ‘큰조개’라 하면 될 텐데 굳이 ‘대합’이라 하고, 하얀 조개라면 ‘흰조개’라 하면 될 텐데 애써 ‘백합’이라 해요. 꽃과 같이 고운 무늬라 하면 ‘꽃조개’라 할 때에 쉬 알아들을 텐데 왜 ‘화합’이라 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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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579) -ㅁ으로서/-ㅁ으로써 3


사람의 눈이 눈동자를 열고 닫음으로써 빛의 감도를 조절하는 것과 같이, 뱀의 피트기관도 감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백남극,심재한-뱀》(지성사,1999) 35쪽


 눈동자를 열고 닫음으로써

→ 눈동자를 열고 닫으면서

→ 눈동자를 여닫으며

 …



  ‘-ㅁ으로서’나 ‘-ㅁ으로써’를 잘못 쓰는 사람이 부쩍 늘어납니다. “사람으로서 하는 말”처럼 쓰고, “이 연장으로써 나무를 깎는다”처럼 쓸 뿐, 이 보기글처럼 움직씨를 넣으면서 앞말을 받거나 잇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 같은 말투는 번역 말투입니다. 외국말을 한국말로 잘못 옮기면서 나타나는 말투예요. 오늘날에는 번역 말투가 워넉 널리 퍼진 탓에, 이러한 말투가 마치 한국 말투라도 되는듯이 쓰이지만, 알맞게 살피고 바르게 가다듬어서 슬기롭게 한국말을 쓸 수 있기를 빕니다. 4339.7.6.나무/4348.3.11.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사람 눈이 눈동자를 열고 닫으면서 빛을 맞추듯이, 뱀도 피트기관으로 빛을 맞출 수 있다


“사람의 눈”은 “사람 눈”으로 손보고, “빛의 감도(感度)를 조절(調節)하는 것과 같이”는 “빛을 맞추듯이”로 손봅니다. “뱀의 피트기관도”는 “뱀도 피트기관이”나 “뱀도 피트기관에서”로 손질하고, “감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可能)을 갖추고 있다”는 “빛을 맞출 수 있다”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18) -ㅁ으로서/-ㅁ으로써 4


부드러운 잎 속에 단단한 실 줄기를 함께 갖고 있음으로써 별꽃은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나가키 히데히로/최성현 옮김-풀들의 전략》(도솔오두막,2006) 23쪽


 줄기를 함께 갖고 있음으로써

→ 줄기를 함께 품기에

→ 줄기가 함께 있기에

→ 줄기가 함께 있어서

 …



  이 보기글 같은 번역 말투가 자꾸 퍼지는 까닭은, 한국사람이 영어를 아주 널리 배우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 말투(서양 말투, 번역 말투)를 한국말에 끼워맞추다가 그만 이런 말투가 퍼져요. 왜냐하면, 영어 글월을 하나 놓고, 이 글월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저절로 ‘번역 말투’가 나타나고, 이를 제대로 손질하거나 다듬지 않으니, ‘번역한 말을 제대로 손질한 한국말’을 배우지 못하고 맙니다. 영어에서 쓰는 말투대로 한국말을 잘못 쓴다고 할까요. 4339.9.15.쇠/4348.3.11.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부드러운 잎에 단단한 실 줄기가 함께 있기에 별꽃은 사람한테 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


“잎 속에”는 “잎에”로 다듬고,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는 “사람 발에 밟히면서도”나 “사람한테 밟히면서도”로 다듬으며,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는 “살아날 수 있다”로 다듬습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96) -ㅁ으로서/-ㅁ으로써 5


이러한 사상운동에 대항하여 체제의 지배자 측도 교육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국민대중의 의식과 태도를 자기의 체제에 붙들어 놓으려고 전력을 다한다

《야나기 히사오/임상희 옮김-교육사상사》(백산서당,1985) 19쪽


 교육통제를 강화함으로써

→ 교육통제를 단단히 하면서

→ 교육을 더 단단히 통제하면서

 …



  보기글에서는 “교육통제를 강화하면서”로 다듬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쓸 수 있다면 ‘강화(强化)’라는 한자말도 다듬어서 “교육통제를 단단히 하면서”로 쓸 수 있어요. 4340.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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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운동에 맞서서 체제 지배자 쪽도 교육을 더 단단히 통제하면서 사람들 생각과 몸짓을 저희 틀에 붙들어 놓으려고 온힘을 다한다


‘대항(對抗)하여’는 ‘맞서’로 다듬고, “체제의 지배자 측(側)”은 “체제 지배자 쪽은”으로 다듬으며, “교육통제를 강화(强化)함으로써”는 “교육을 더 단단히 통제하면서”로 다듬습니다. “국민(國民)대중(大衆)의 의식(意識)과 태도(態度)를”은 “사람들 생각과 몸짓을”로 손보고, “자기(自己)의 체제(體制)”는 “저희 틀”로 손보며, “전력(全力)을 다한다”는 “온힘을 다한다”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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