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614) 그것 6


그리고 공기처럼 눈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대지와 그것이 키워내는 모든 생명체 속에서 충만해야 한다

《김중배-새벽을 위한 증언》(한길사,1986) 155쪽


 대지와 그것이 키워내는 모든 생명체

→ 땅과 땅이 키워내는 모든 목숨붙이

→ 이 땅과 이 땅이 키워내는 모든 목숨붙이

→ 이 땅과 모든 목숨붙이

 …



  요즈음에는 “책과 그것에 담은 이야기”라든지 “버스와 그것에 탄 사람들”처럼 말할 사람도 나오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머니와 그녀가 낳은 아이들”이라든지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처럼 말할 사람도 나올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책과 책에 담은 이야기”요, “버스와 버스에 탄 사람들”이고, “어머니와 아이들”이며, “아버지와 친구들”입니다.


  ‘그것’이라는 낱말은 “거기에 있는 그것 좀 집어 주라”나 “네 옷에 묻은 그것은 무엇일까”나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는걸”이나 “그것들이 참 버릇이 없이 구네”처럼 씁니다. 이런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쓰는 모든 ‘그것’은 어설프게 잘못 쓰는 번역 말투입니다. 4339.9.5.불/4348.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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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람처럼 눈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땅과 이 땅이 키워내는 모든 목숨붙이와 함께 가득해야 한다


‘공기(空氣)’는 그대로 둘 수 있고, ‘바람’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대지(大地)’는 ‘땅’으로 손질하고, “생명체(生命體) 속에서 충만(充滿)해야”는 “목숨붙이와 함께 가득해야”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63) 그것 7

나는 새로운 것을 많이 쓰고 싶지만, 그것은 모두 인도라는 바탕 위에 씌어져야 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김태언 옮김-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녹색평론사,2006) 28쪽

 새로운 것을 많이 쓰고 싶지만, 그것은 모두
→ 새로운 글을 많이 쓰고 싶지만, 이 글은 모두
→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지만, 이는 모두
  …


  이 보기글을 보니, ‘이야기’나 ‘글’이라고 적어야 할 대목에 ‘것’과 ‘그것’을 넣습니다. 왜 이야기를 ‘이야기’라 하지 않고, 글을 ‘글’이라 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번역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할까요? 이야기나 글을 ‘것·그것’으로 쓴대서 글멋이 나거나 글맛이 살지 않습니다. 4339.12.22.쇠/4348.3.31.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지만, 이 얘기는 모두 인도라는 바탕에서 써야 한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글”로 손질합니다. “인도라는 바탕 위에 씌어져야”는 “인도라는 바탕에서 써야”나 “인도라는 바탕으로 써야”로 손보고, “할 것이다”는 “한다”로 손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709) 그것 8

또 아무것도 아닌 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철도 등에서도 비애에 찬 인생의 무대를 보았고 그것을 그렸다
《사사키 미쓰오,사사키 아야코/정선이 옮김-그림 속 풍경이 이곳에 있네》(예담,2001) 60쪽

 비애에 찬 인생의 무대를 보았고 그것을 그렸다
→ 슬픔에 찬 삶터를 보았고, 이를 그렸다
→ 슬픈 삶을 보았고, 이 모두를 그렸다
→ 슬픔을 보았고, 이를 낱낱이 그렸다
 …


  스스로 바라본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보기글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고 적어야 어울리고, “이 모두”나 “이”로 적을 수 있습니다. “이를 하나하나”나 “이를 남김없이”나 “이를 모조리”로 적어도 돼요.

  이 보기글과 비슷하게 “어제 책방에 가서 책을 한 권 찾았고 그것을 읽었다”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제 책방에 가서 책을 한 권 찾았고, 이 책을 장만해서 읽었다”처럼 말하겠지요. 4340.3.5.달/4348.3.31.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또 아무것도 아닌 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철도에서도 슬픔에 찬 삶을 보았고, 이 모두를 그렸다

“철도 등(等)에서도”는 “철도에서도”로 손보고, ‘비애(悲哀)’는 ‘슬픔’이나 ‘아픔’으로 손봅니다. “인생(人生)의 무대(舞臺)”는 “인생 무대”로 손질할 수 있는데, ‘한마당’이나 ‘삶’이나 ‘삶마당’이나 ‘삶터’로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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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460) 그것 1


그러나 오늘날 선의 개념은 루소 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알랭 리피에츠/허남혁·박지현-녹색 희망》(이후,2002) 19쪽


 루소 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 루소 시대와는 다르다

→ 루소가 살던 때와는 다르다

 …



  이 보기글에 나오는 ‘그것’은 ‘선의 개념’을 가리킵니다. 영어라면 ‘it’이라는 낱말을 써서 이처럼 글을 쓸 텐데, 이 보기글은 영어 말투를 한국말로 잘못 옮기면서 그만 ‘it’을 ‘그것’으로 적습니다.


  영어를 처음 배울 적에는 ‘애벌 옮김(직역)’을 하면서 이 보기글처럼 적을 수도 있습니다. 낱말을 하나씩 따로 떼어서 옮기며 처음 외국말을 배우는 사람한테는 이 보기글 같은 글월로 이야기를 해야 하리라 느껴요. 그러나, 번역이나 통역이 되려면, ‘애벌 옮김’을 가다듬어서 한국 말투로 고쳐 주어야지요. 한국말에서는 ‘그것’을 써서 앞말을 받지 않습니다. 한국말에서는 ‘그것’이 없이 그대로 씁니다. 4338.11.11.쇠/4348.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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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착함이 무엇인지는 루소 시대와는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은 루소가 살던 때와 착함을 다르게 본다


‘선(善)’은 “1.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음 2.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善’은 “착할 선”입니다. 한국말로는 ‘착하다·착함’입니다. “선(善)의 개념(槪念)” 같은 말투는 일본 말투입니다. “착함이란 무엇인가”라든지 “착함이 뜻하는 이야기”처럼 한국 말투로 풀어서 새롭게 쓸 수 있기를 빕니다. “루소 시대(時代)”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루소 때”나 “루소가 살던 때”로 손볼 만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550) 그것 2


스푸트니크 2호 인공위성 발사 당시 그것에 개를 탑재한다는 통신을 들은 미국의 일부 자비스런 시민 중에서는

《유치환-나의 창에 마지막 겨울 달빛이》(문학세계사,1979) 215쪽


 인공위성 발사 당시 그것에 개를 탑재한다는

→ 인공위성을 쏠 무렵 여기에 개를 태운다는

→ 인공위성을 쏠 즈음 그곳에 개를 태운다는

→ 인공위성을 쏠 적에 이곳에 개를 태운다는

→ 인공위성을 쏠 때에 거기에 개를 태운다는

 …



  한국말을 돌아봅니다. “된장찌개를 끓을 적에 그것에 고추장을 조금 넣으면 더 맛있어”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버스를 탈 때에 그것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을까”처럼 말하지 않아요. ‘그것’을 써야 알맞을 만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자리에서 어설피 불거지고 만 얄궂은 말투를 말끔히 털 수 있기를 빕니다. 4339.5.10.물/4348.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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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2호 인공위성을 쏠 무렵 여기에 개를 태운다는 얘기를 들은 마음 넓은 몇몇 미국사람 가운데에서는


“인공위성 발사(發射) 당시(當時)”는 “인공위성을 쏠 무렵”이나 “인공위성을 쏠 즈음”으로 다듬고, “개를 탑재(搭載)한다는”은 “개를 태운다는”으로 다듬으며, ‘통신(通信)’은 ‘얘기’로 다듬습니다. ‘일부(一部)’는 ‘몇몇’으로 손질하고, “자비(慈悲)스런 시민(市民) 중(中)에서는”은 “마음 넓은 사람 가운데에서는”으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552) 그것 3


그러면 사랑은 어디서 왔읍니까? 그것은 현장에서 왔읍니다. 강도를 만나 얻어터지고 털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쓰러져 있는 행인이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왔읍니다

《문익환-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학민사,1984) 257쪽


 그것은 현장에서 왔습니다

→ 바로 이곳에서 왔습니다

→ 바로 이 자리에서 왔습니다

→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



  이 보기글을 보면 뒤쪽에 “바로 그 현장”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앞쪽에서는 “그것은 현장에서”처럼 적고 맙니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스스로 알기는 하되,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셈입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왔습니다”가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왔습니다”로 적으면 됩니다. 그런데, ‘현장’이라는 한자말은 ‘이곳’이나 ‘바로 이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바로 현장에서 왔습니다”로 손질했어도 다시 한 번 손질해서 “바로 이곳에서 왔습니다”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뒤쪽에 나오는 “바로 그 현장”은 “바로 그곳”이나 “바로 그 자리”로 고쳐씁니다. 4339.5.16.불/4348.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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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랑은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이곳에서 왔습니다. 강도를 만나 얻어터지고 털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쓰러진 사람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왔습니다


“쓰러져 있는”은 “쓰러진”으로 손보고, ‘행인(行人)’은 ‘사람’으로 손봅니다. ‘현장(現場)’은 ‘이곳’이나 ‘바로 이 자리’나 ‘바로 그곳’이나 ‘그 자리’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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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손질 354 : 다른 대안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정말 없는 걸까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원마루 옮김-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 19쪽


 다른 대안은

→ 다른 길은

→ 다른 삶은

→ 다른 생각은

 …



  ‘대안’이라는 한자말은 ‘代案’이나 ‘對案’일 텐데, ‘대안’이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은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콕 집어서 느끼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냥 ‘대안’이라고 쓰리라 봅니다.


  ‘代案’은 “대신하는 안”이라고 해요. ‘대신(代身)하다’는 “어떤 대상의 자리나 구실을 바꾸어서 새로 맡다”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한자로 쓴 ‘대안’이라면 ‘바꾸는 안’이나 ‘새로운 안’이나 ‘새로 맡는 안’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對案’은 “어떤 일에 대처할 방안”이라고 해요. ‘대처(對處)하다’는 “어떤 정세나 사건에 대하여 알맞은 조치를 취하다”를 가리키고, ‘조치(措置)’는 “벌어지는 사태를 잘 살펴서 필요한 대책을 세워 행함”을 가리킨다고 ‘대책(對策)’은 “어떤 일에 대처할 계획이나 수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빙글빙글 도는 말풀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아무튼 이 한자로 쓴 ‘대안’이라면 ‘맞이할 방안’이나 ‘마주할 방안’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대안을 내놓다 → 새 생각을 내놓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 다른 길이 없으니

 대안을 세우다 → 새 생각을 세우다

 대안이 쉽게 떠오르지 → 다른 길이 쉽게 떠오르지


  어느 한자말을 쓰든 ‘대안’은 예전 길로는 갈 수 없다는 느낌을 나타냅니다. 예전 길은 그만두고 ‘다른’ 길이나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나타내지요. 이리하여, 우리가 생각할 대목은 바로 ‘다름’과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길’이나 ‘다른 생각’이나 ‘다른 길’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새롭게 바라보려 하기에 ‘대안 찾기’를 한다 말하고, 다르게 나아가려 하기에 ‘대안’을 놓고 생각을 모읍니다.


 새길 찾기 . 새꿈 찾기 . 새삶 찾기 . 새넋 찾기 . 새빛 찾기


  때와 곳에 따라 이야기가 다를 테니 어느 한 가지로 못박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그때 알맞게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쓰면 됩니다. ‘새-’를 앞가지로 삼아 우리 마음을 북돋울 낱말을 요모조모 생각해 보면 됩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렇다고 한숨쉬기 말고 다른 길은 참말 없을까


“체념(諦念)하는 것 말고”는 “두 손 들기 말고”나 “한숨쉬기 말고”로 손질하고, ‘정(正)말’은 ‘참말’로 손질하며, “없는 걸까”는 “없을까”로 손질합니다.



대안(代案) : 어떤 안(案)을 대신하는 안

   - 대안을 내놓다 / 대안을 제시하다 /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대안(對案)

1. 어떤 일에 대처할 방안

   - 대안을 마련하다 / 대안을 세우다 / 대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2. 책상이나 밥상 따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음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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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22] 무슨 밥 먹을까



  밥상을 차리는 어버이를 바라보는 아이가 “아버지, 오늘은 무슨 밥?” 하고 묻습니다. “오늘은 무슨 밥을 먹을까?” 하고 얘기하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풀밥’을 할 수 있고 ‘고기밥’을 할 수 있으며 ‘미역국밥’이라든지 ‘감자국밥’을 할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먹는 대로 밥이름을 붙입니다. 밥을 하니까 밥하기이고, 밥이름을 붙이며, 밥먹기를 누리고, 밥삶을 헤아립니다. 바깥에 나가거나 다른 집에 가면, 으레 ‘요리’와 ‘식사’라는 말을 듣는데, 아이들이 ‘요리·식사’라는 말마디를 들으면 으레 이러한 말을 쓰면서 “오늘은 무슨 요리?”나 “오늘은 무슨 식사?” 하고 묻겠지요.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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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66) ‘-의’를 쓸 자리 (‘나의’와 ‘우리’)


나의 사랑하는 딸 리사에게

《모디캐이 저스타인/전하림 옮김-거인을 깨운 캐롤린다》 5쪽


 나의 사랑하는 딸

→ 우리 사랑하는 딸

→ 사랑하는 딸

→ 내가 사랑하는 딸

→ 더없이 사랑하는 딸

→ 하늘처럼 사랑하는 딸

 …



  영어에서는 한식구가 서로서로 가리킬 적에 ‘my’를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한식구가 서로서로 가리킬 적에 ‘우리’를 씁니다. 영어에서 ‘our’를 쓸 때가 있을는지 모르나, 영어에서는 ‘my’를 써야 어울리고, 한국말에서는 ‘우리’ 말고 ‘내’나 ‘제’를 쓸 때도 있을 테지만, ‘우리’를 써야 어울립니다.


  한국말에서 ‘우리’를 쓰는 까닭은, ‘내’가 말할 적에 ‘내가 가리키려는 사람과 나를 아울러’서 쓰기 때문이고, ‘내 말을 듣는 사람과 나를 아울러’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 아내”와 “우리 남편”처럼 써야 올바릅니다. 형제가 둘일 적에도 “우리 언니”와 “우리 형”처럼 써야 올발라요.


  어버이가 아이를 가리킬 적에, 영어에서는 “my daughter”처럼 쓸 테지만, 한국말에서는 “우리 딸”처럼 씁니다. 아이가 어버이를 가리킬 적에, 영어에서는 “my mother”처럼 쓸 테지만, 한국말에서는 “우리 어머니”처럼 씁니다.


  한국말에서 ‘우리’라는 낱말을 쓰는 까닭은 ‘나와 어머니’나 ‘어버이와 아이’나 ‘너와 나’가 따로 있는 사람이면서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려 할 적에,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야기는 혼자 나누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있기에 이야기를 이룹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제 이야기했잖니?”처럼 말합니다. 너와 나를 한동아리로 묶는 뜻이 아니라, 너와 내가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는 뜻에서 ‘우리’를 씁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를 쓰는 까닭은, ‘너’와 ‘나’가 모여서 이루는 부부이기 때문에 ‘우리’를 써야 부부가 이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가리킬 적에 “우리 어머니”라고 하는 까닭도 나와 어머니 둘이 함께 있어야 나한테 비로소 어머니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가리킬 적에 “우리 딸”이라 하는 까닭도 아이를 하나 둔 어버이라 하더라도 어버이 한 사람과 아이 한 사람이 함께 있어야 어버이가 바라보기에 아이가 있고, 이 아이를 가리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달님

→ 사랑하는 달님

→ 사랑하는 우리 달님

→ 사랑하는 예쁜 달님

→ 사랑하는 멋진 달님


  사랑하는 짝꿍이나 짝님이 있을 적에도 한국말에서는 “내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랑”입니다. 이때에도 ‘너’와 ‘나’를 따로따로 또렷하게 느껴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를 씁니다. 서양에서는 너와 나를 따로따로 또렷하게 느낀다는 테두리에서 ‘내(my)’를 넣는 말투가 되지만, 한국말에서는 너와 나를 따로따로 또렷하게 느끼면서 서로서로 제대로 가리키는 자리에 ‘우리’라는 낱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처럼 쓰던 한국말이 서양말에 잘못 휩쓸리면서 흔들립니다. “내 아이”나 “내 달님”이나 “내 어머니”처럼 쓸 수 없는데, 자꾸 이처럼 잘못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이 말투가 왜 잘못일까요? 한국말에서 ‘내’를 쓰는 자리는 ‘나 혼자 가진 것(물건)’일 때입니다.


 이 책은 내 것이야

 내 책이야

 이 자전거는 내 것이야

 내 자전거야


  한국말에서 ‘내’를 쓰는 자리는 “내 것”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그러니, “내 아이”나 “내 어머니”라고 하면, 아이나 어머니를 마치 ‘물건(내 물건)’으로 가리키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한국말에서 한식구나 동무나 이웃을 가리키면서 ‘내’라는 말마디를 쓰면,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는 느낌이나 뜻이 되고 맙니다.


  요즈음은 한국말을 올바로 가르치거나 말하지 않으면서 너무 일찍부터 영어만 힘껏 가르치다 보니, 한국말에서 ‘우리’를 쓰는 까닭조차 제대로 알려주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고, 한국말을 영어처럼 가르치거나 배우기 일쑤입니다. “내 사랑”이나 “내 어머니”나 “내 아이”처럼 쓰는 말투는 모두 한국말을 영어처럼 바라보면서 잘못 가르치거나 엉뚱하게 배우거나 얄궂게 쓰는 모습입니다.


  한국말에서 쓰는 ‘우리’는 ‘집단주의 문화’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올바르지 않은 생각입니다. “우리 나라”라든지 “우리 마을”이라든지 “우리 모임” 같은 말마디에서는 여러모로 ‘집단주의 문화’를 말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한겨레는 옛날에 어떤 말을 썼을까요? “이 나라”나 “이 마을”이나 “이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이)’에 있는 나라요 마을이요 모임이라는 뜻에서 ‘이’를 씁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이 “우리 나라(우리나라)”와 “우리 말(우리말)”이라는 낱말을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이런 말마디는 일제강점기 언저리부터 나타났습니다. 이웃나라한테 짓밟히는 역사를 겪으면서 이 아픈 역사를 딛고 서야겠다는 뜻에서 ‘우리’라는 말마디를 빌어서 ‘제국주의 정치권력을 이겨내자’와 같은 마음을 나타내려 했어요.


  ‘우리’라는 말마디는 ‘내가 너를 바라보는 눈길’을 보여줍니다. ‘네가 여기에 나와 함께 있다고 느끼는 눈길’을 보여주는 ‘우리’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영어에서 쓰는 ‘my’는 치레(형식)나 말법일 뿐이지만, 한국말에서 쓰는 ‘우리’는 ‘내’가 ‘나’를 더욱 또렷하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말투입니다.


  “내 딸”처럼 쓰는 말투는 새로운 말투도 아니고, 새롭게 달라져야 할 한국말 모습도 아닙니다. 영어 말투를 한국 말투대로 끼워맞출 수 없듯이, 한국 말투를 영어 말투로 끼워맞출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같은 글월은 “우리 사랑하는 딸”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는, “사랑하는 딸”로 바로잡습니다. ‘우리’라는 말마디를 넣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넣으면 됩니다. 그리고, “더없이 사랑하는 딸”이나 “내가 사랑하는 딸”이나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딸”처럼 쓰면 돼요. 4348.3.30.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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