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67) -사死 1


그 가운데는 수명이 다해 자연사하는 새도 있을 것이고, 천적한테 공격을 당해 죽는 일도 있을 것이다

《권오준-우리가 아는 새들 우리가 모르는 새들》(겨레,2014) 66쪽


 자연사하는 새도

→ 늙어서 죽는 새도

→ 늙어 죽는 새도

→ 천천히 죽는 새도

→ 조용히 죽는 새도

 …



  한국말사전을 보면 ‘死’라는 낱말이 따로 올림말로 나옵니다. “= 죽음”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死’라는 외마디 한자말은 쓰지 말고 ‘죽음’이라는 한국말을 써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

→ 삶과 죽음이라는 갈림길

 사가 우리들의 사랑하는 이를 우리에게서 뺏어 갈 때

→ 죽음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우리한테서 뺏어 갈 때


  삶은 ‘삶’입니다. 죽음은 ‘죽음’입니다. 이를 굳이 ‘生’과 ‘死’라는 한자말로 써야 하지 않습니다. 딱히 영어로 써야 하지도 않습니다. 한국말로 알맞게 쓰면 됩니다.


  ‘자연사’ 같은 한자말도 따로 써야 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죽었다”고 하면 되고, ‘자연사’라는 낱말이 가리키는 대로 “늙어서 죽다”라 하면 되고, “조용히 죽다”나 “천천히 죽다”나 “늙어서 스스로 죽다”나 “목숨이 다해 스스로 죽다”처럼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늙어서 자연사하다”는 그야말로 겹말입니다. “늙어서 늙어서 죽다” 꼴이 되니까요. 4348.4.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 가운데는 목숨이 다해 스스로 죽는 새도 있고, 목숨앗이한테 죽는 일도 있다


‘수명(壽命)’은 ‘목숨’으로 다듬고, “있을 것이고”는 “있고”로 다듬습니다. ‘천적(天敵)’은 ‘목숨앗이’로 손질하고, “공격(攻擊) 당(當)해”는 “공격을 받아”나 “붙잡혀”나 “사로잡혀”나 “먹이가 되어”로 손질합니다.



사(死) = 죽음

   - 생과 사의 갈림길 / 사가 우리들의 사랑하는 이를 우리에게서 뺏어 갈 때

자연사(自然死) : 노쇠하여 자연히 죽음

   - 자연사일 가능성이 높다 / 늙어서 자연사하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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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5 삶은 춤노래



  삶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마당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틀에 박힌 춤이나 노래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기쁨을 가꾸어 누리는 춤이요, 손수 즐거움을 지어서 나누는 노래일 때에, ‘삶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마당’으로 됩니다. 기쁨이 없는 춤이나 즐거움이 사라진 노래라 한다면, 쳇바퀴처럼 똑같은 굴레에 갇혀서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춤과 노래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춤만 출 수 없고, 노래만 부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운차게 추는 춤이라도 노래가 함께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조용하게 부르는 노래라도 춤이 같이하기 마련입니다. 춤과 노래는 늘 함께 있습니다. 둘은 다르게 있는듯이 보이지만, 언제나 하나로 움직입니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춤꾼과 노래꾼이 연예인이나 대중가수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습니다. ‘뒷춤꾼(백댄서)’이라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게다가, ‘입벙긋 노래꾼(립싱크 가수)’마저 있습니다. 춤이면서 춤이 아니고 마는 오늘날 문명사회이고, 노래이면서 노래가 아니고 마는 오늘날 방송과 문화입니다. 이리하여, 제도권 입시지옥 학교에 갇힌 아이들이나 제도권 톱니바퀴 월급쟁이 회사에 갇힌 어른들 누구나, 춤이 아닌 춤과 노래가 아닌 노래에 빠져듭니다. 스스로 굴레에 갇힌 하루이니, 굴레에 가두는 춤과 노래에 젖어듭니다.


  삶을 손수 짓는 사람은 춤과 노래를 손수 짓습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흙을 만지면서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사람은, 일하거나 놀다가 언제나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섯 살 아이도 여든 살 할배도, 일하거나 놀다가 스스러 우러나오는 노래와 춤으로 한판 멋지게 어우러집니다. 이를 가리켜 ‘한마당’이요 ‘한놀이’이요 ‘한마당놀이’라고 합니다. ‘마당놀이’라고도 하고 ‘들놀이’라고도 합니다.


  장작으로 삼을 나무를 하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지게 가득 나무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왜냐하면, 제 삶을 제 손으로 지으니, 스스로 신이 나서 노래가 나와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텔레비전도 없었지요. 임금님이 부르라 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임금님 손길이 안 닿아요. 책도 글도 모르지만, 흙을 알고 풀과 나무를 알며, 하늘과 바람을 알고, 물과 벌레와 짐승을 모두 아는 ‘숲사람(시골사람)’은 스스로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사위를 잇습니다.


  절구를 빻든 베틀을 밟든 노래입니다. 다듬이질을 하든 밥을 짓든 노래입니다. 아이들도 소꿉놀이를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언제나 노래입니다. 삶일 때에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몸짓에서 노래와 춤이 함께 흐드러집니다.


  삶은 춤노래입니다. 춤노래는 삶입니다. 춤꾼이나 노래꾼이 된다면 삶이 아니라 굴레(제도권)입니다.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 모습은 삶과 동떨어집니다. 언제나 모두 아우르고, 늘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삶은 두레요 품앗이입니다. 삶은 웃음이요 이야기입니다. 기쁘게 춤추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기쁘게 가꾸는 삶이요, 즐겁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밥을 지어 아침저녁을 차리면서 엉덩이를 실룩거리거나 어깨를 들썩입니다. 콧노래가 흐릅니다. 다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수저를 듭니다. 이야기꽃이 핍니다. 바로 이때에 삶입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춤과 노래는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삶이듯이,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춤과 노래입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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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600) 나물꾼 (우리 이름 찾기)


가시도 억세지 않은 이런 엉겅퀴는 내 어릴 때도 나물꾼들이 반기던 나물이다

《문영이-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2014) 175쪽



  나물을 캐러 다니는 사람은 ‘나물꾼’입니다. 나물이 잘 자라도록 숲과 들을 지키고 보듬는 사람은 ‘나물지기’입니다. 나물을 즐기거나 잘 먹는 사람이라면 ‘나물쟁이’나 ‘나물보’라 할 만합니다. 나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나물님’이라 하고, 나물을 함께 즐기는 아름다운 이웃이나 살붙이도 ‘나물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떡을 찧거나 빵을 굽는 사람은 ‘떡꾼’이나 ‘빵꾼’이 됩니다. 옛날부터 널리 쓰는 말투를 살피면 이 같은 말을 쓸 만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떡을 좋아하는 사람은 ‘떡보’라 하지만, 빵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빵보’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아예 없지는 않으나, ‘빵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안 실립니다. 한국말사전을 가만히 살피면 ‘울보’는 나와도 ‘웃보’는 나오지 않아요. 잘 우는 아이를 울보라 하면, 잘 우는 아이는 웃보라 할 만한데, 사람은 누구나 잘 웃으니 굳이 ‘웃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안 올린 셈일는지 궁금합니다.


 꾼 . 지기 . 쟁이 . 장이 . 보 . 님 . 둥이 . 이웃 . 동무 . 사람


  생각을 가만히 기울이면, 한국말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 꽤 많습니다. 때와 곳에 맞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입니다. 영어나 서양말에서 쓰는 말투가 아니더라도, 한국말에서 “우리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 꽃님”이나 “우리 사랑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나물사랑꾼’이나 ‘떡사랑둥이’ 같은 이름을 쓸 수 있어요. ‘책사랑지기’라든지 ‘노래배움지기’라든지 ‘시골노래지기’처럼 여러 낱말을 골고루 섞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아닌 여느 어른이라면 ‘아이지기’나 ‘아이사랑지기’ 같은 이름을 스스로 붙여서 쓸 수 있고, ‘사랑님’이라든지 ‘꿈님’ 같은 이름을 낱으로 쓰거나 뒤에 붙일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꾼’부터 첫끈을 연 뒤, ‘글지기·글쟁이·글장이’가 될 수 있고, ‘글사랑지기·글노래쟁이·글꿈장이’처럼 쓸 수 있으며, ‘글숲님·글노래님·글사랑님’처럼 쓸 수 있습니다. 글읽기를 좋아하면 ‘글보’가 될 만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면 ‘책보’가 될 만해요. ‘글둥이·책둥이’라는 이름도 곱고, ‘글사랑둥이·책사랑둥이’ 같은 이름도 사랑스럽습니다.


  글이나 책을 함께 나누는 이웃한테는 ‘글이웃·글동무·글님·글이웃님·글사랑동무·글동무님’이나 ‘책이웃·책동무·책님·책이웃님·책사랑동무·책동무님’처럼 처럼 여러모로 아기자기하게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나물사람·책사람·떡사람·웃음사람·이야기사람’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글꽃·글숲·글나무·글바다·글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고, ‘글빛·글결·글노래’ 같은 이름을 붙여도 잘 어울립니다. 4348.4.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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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29) 여명의 1


내가 마치 솜사탕 한가운데의 막대 같고 하얀 구름들이 나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여명의 빛이 나타나면서 나는 하양과 붉음이 섞인 솜사탕이 되어 갔다

《신지아-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 377쪽


 여명의 빛이

→ 새벽빛이

→ 새벽녘 빛이

→ 새벽을 깨우는 빛이

→ 새벽을 밝히는 빛이

 …



  한국말 ‘새벽’은 “먼동이 트려 할 무렵”을 뜻하고, ‘먼동’은 “날이 밝아 올 무렵 동쪽”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에 실린 ‘여명’이라는 한자말은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명’은 ‘새벽빛’을 가리키는 한자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여명의 빛”처럼 적은 보기글은 겹말인 셈이에요.


 새벽 여명이 강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 새벽빛이 짙게 밝아 왔다

→ 새벽빛이 눈부시게 밝아 왔다

 우리 민족의 여명, 새벽이 분명 담겨 있습니다

→ 우리 겨레 새벽이 틀림없이 담겼습니다

→ 우리 겨레를 밝히는 새빛이 꼭 담겼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여명’을 찾아보면 두 가지 보기글이 나오는데, “새벽 여명”과 “민족의 여명, 새벽”처럼 씁니다. 두 가지 보기글은 모두 겹말입니다. 말뜻을 제대로 모르는 채 쓴 글이요, 말뜻을 엉망으로 흔드는 글인 셈입니다. 4348.4.2.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내가 마치 솜사탕 한가운데에 있는 막대 같고 하얀 구름이 나를 휘감은 듯 느꼈다. 이윽고, 새벽빛이 나타나면서 나는 하양과 붉음이 섞인 솜사탕이 되어 갔다


“한가운데의 막대”는 “한가운데에 있는 막대”로 다듬고,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휘감은 듯 느꼈다”로 다듬습니다.



여명(黎明)

1.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

   - 시간은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고 점점 새벽 여명이 강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2. 희망의 빛

   - 우리 민족의 여명, 새벽이 분명 담겨 있습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28) -의 : 젖의 맛


젖의 맛을 알고 빤다기보다는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신지아-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 338쪽


 젖의 맛을

→ 젖맛을

→ 젖이 어떤 맛인지를

→ 젖은 어떤 맛인가를

 …



  밥을 먹을 때에는 ‘밥맛’을 느낍니다. 물을 마실 때에는 ‘물맛’을 느껴요. 바람을 들이켤 때에는 ‘바람맛’을 느끼지요. 아기가 젖을 빨 때에는 어떤 맛을 느낄까요? ‘젖맛’입니다. 4348.4.2.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젖맛을 알고 빤다기보다는 무엇인가에 매달린다고 해야 할까


“매달리고 있었다고”는 “매달린다고”로 손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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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93) 존재 193 : 우려가 존재


저널리즘 콘텐츠를 정부가 통제하는 상황에 대해 당연히 우려가 존재한다

《로버트 맥체스니/전규찬 옮김-디지털 디스커넥트》(삼천리,2014) 356쪽


 우려가 존재한다

→ 걱정스럽다

→ 근심스럽다

→ 걱정이 된다

→ 근심이 된다

→ 걱정거리이다

→ 근심거리이다

 …



  ‘우려’라고 하는 한자말은 한국사람이 쓸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말은 ‘근심’이나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을 한자말로 바꾸거나 영어로 고쳐서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을 ‘근심’이나 ‘걱정’으로 바로잡아도, 이 보기글은 “걱정이 존재한다”나 “근심이 존재한다” 꼴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걱정이 있다”나 “근심이 있다”처럼 손질해야 할 테지요. 그러나 이렇게 손질해도 좀 어설픕니다. 그래서 “걱정스럽다”나 “근심스럽다”로 다시 손질하고, “걱정거리이다”나 “근심거리이다”처럼 적어 보기도 합니다. 4348.4.2.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언론 정보를 정부가 다스리려는 흐름은 마땅히 근심스럽다


“저널리즘(journalism) 콘텐츠(contents)”는 “언론 정보”로 다듬고, ‘통제(統制)하려는’은 ‘다스리려는’이나 ‘주무르려는’이나 ‘억누르려는’으로 다듬습니다. “상황(狀況)에 대(對)해”는 “흐름은”이나 “모습은”으로 손보고, ‘당연(當然)히’는 ‘마땅히’로 손보며, ‘우려(憂慮)’는 ‘근심’이나 ‘걱정’으로 손봅니다.


..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94) 존재 194 : 내 존재


에베레스트 안에 내 존재를 묻어두고 싶었다 …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시간을 쓰고 내 존재를 이끌어 가고 있는지 계속 질문이 이어졌다

《신지아-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 73, 221쪽


 내 존재를

→ 내 숨결을

→ 내 넋을

 내 존재를

→ 내 목숨을

→ 내 삶을

 …



  에베레스트라는 봉우리에 가서 가슴이 벅차면서 새로운 기운을 느꼈기에 그곳에 “내 목숨”이나 “내 몸”을 묻고 싶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몸을 묻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나 “내 넋”을 묻고 싶을 수 있어요.


  내가 스스로 나를 돌아보면서 “내 목숨”을 돌아봅니다. “내 숨결”을 돌아보고, “내 삶”을 돌아보지요. 4348.4.2.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에베레스트에 내 숨결을 묻어두고 싶었다 … 나는 무엇에 내 하루를 쓰고 내 삶을 이끌어 가는지 끝없이 묻고 또 물었다


“에베레스트 안에”는 “에베레스트에”로 다듬습니다. “무엇을 위(爲)해”는 “무엇 때문에”나 “무엇을 바라며”나 “무엇에”로 손질하고, “내 시간(時間)”은 “내 하루”로 손질하며, “이끌어 가고 있는지”는 “이끌어 가는지”로 손질합니다. ‘계속(繼續)’은 ‘자꾸’나 ‘끝없이’나 ‘잇달아’로 손봅니다. “질문(質問)이 이어졌다”는 앞에 나오는 ‘계속’과 겹말이 되니까, “물었다”로 손보거나 “묻고 또 물었다”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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