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27] 가을 더위
― 들사람 살찌우는 하늘

 


  여름이 저물 무렵 ‘가을이 없이 겨울이 다가오나’ 하고 느낄 만큼 바람이 선선했습니다. 그러나 선선한 바람은 이내 가시고 따스한 바람이 불더니, 어느덧 아침부터 저녁까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을 더위가 됩니다.


  도시는 어떤 햇볕일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서 가을걷이 마친 나락을 알뜰히 말려 줍니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비지땀을 흠뻑 쏟게 합니다. 덥다 싶도록 내리쬐는 햇볕이니, 가을부터 조용히 쉬며 겨울나기를 해야 할 풀이 새로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을에 더위일까, 가을 더위라는 이름이 맞을까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이 햇볕은 겨울을 앞두고 겨울맞이 집일과 들일을 바지런히 마치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들사람한테 내려주는 고운 선물이 아니랴 싶어요.


  햇볕에 기대어 논을 일구니 나락이 무르익습니다. 햇볕을 바라며 나락을 베어 길바닥에 말리니 나락이 바짝바짝 마릅니다. 빨래도 잘 마르고 이불도 잘 마릅니다. 들일을 쉬며 나무그늘에 앉으면 산들바람 시원하게 훅 지나갑니다.


  아마 먼먼 옛날부터 가을철에 후끈후끈 따사로운 볕이 드리웠겠지요. 들사람도 들짐승도 모두 즐거이 가을날 누리면서 겨울날 씩씩하게 맞아들이라면서, 가을볕 새삼스럽게 빛났겠지요. 4346.10.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살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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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26] 날마다 자라는 호박
― 대문으로 넘어온 넝쿨

 


  씨앗은 바람 따라 멀리까지 날아갑니다. 넝쿨은 울타리나 나무를 타고 이웃집으로 넘어갑니다. 내가 뿌리지 않은 씨앗이지만, 풀씨가 우리 집으로 깃듭니다. 내가 심지 않은 감나무라 하더라도, 이웃집 감나무가 우리 집 울타리 너머로 살며시 가지를 뻗을 수 있습니다. 울타리 밑에 심은 호박은 울타리를 따라 씩씩하게 자라는데, 이웃집 울타리 안쪽에서만 자라지 않아요. 넝쿨심 얼마나 좋은지, 햇볕 먹으며 줄기 죽죽 뻗어 십 미터 이십 미터 삼십 미터 사십 미터까지 거침없이 잇닿습니다.

  우리 집과 돌울타리로 맞닿은 이웃 밭자락에서 울타리 따라 자라던 호박넝쿨 하나, 지난해에도 그러께에도 올해에도 우리 집 가까이로 넘어옵니다. 지난해까지는 넝쿨 끄트머리를 잘라서 우리 집 대문 언저리에서 더 뻗지 않더니, 올해에는 우리 집 대문까지 야무지게 넘어옵니다.


  호박넝쿨이 대문 위쪽 감싸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옳거니, 아주 잘 되었네. 우리 식구들 먹을 호박도 얻고, 우리 집 대문도 무척 볼 만하게 되는걸. 대문은 파란 빛깔이지만, 마당은 온통 풀빛을 이루는 우리 풀집에 걸맞는 모습이 되는구나.


  대문을 드나들면서 호박이 날마다 자라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굵직하게 자라며 묵직한 호박알을 날마다 쓰다듬고, 곁에서 새로 알이 굵는 조그마한 호박알도 날마다 쓰다듬습니다. 너희는 어쩜 이렇게 알뜰히 맺니. 너희는 어쩜 이렇게 한꺼번에 안 맺고 하나씩 차근차근 맺으면서 우리 식구들 고운 밥이 꾸준히 되어 주니. 4346.9.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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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25] 배롱나무 곁에서
― 나무이름을 생각한다

 


  전라남도 시골마을에서 살기 앞서까지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거의 못 들었습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도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쓰는 분이 제법 있지만, 으레 ‘백일홍나무’나 ‘목백일홍’이라고 말합니다. 백 날 동안 꽃을 붉게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요, 이 백일홍이라는 꽃이 나무에서 피어나기에 ‘목백일홍’이라 해요. 그런데, 시골마을 어르신들 어느 누구도 이런 말은 안 써요. 하나같이 ‘배롱나무’라고만 하고 ‘배롱꽃’이라 합니다. 때로는 ‘간지럼나무’라고 이야기해요.


  똑같은 나무를 놓고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다르다 보니 처음에는 알쏭달쏭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나무를 가리키는가 하고 여겼는데, 한 해 두 해 지나며 생각하고 살피니, 다 같은 나무를 다 다른 이름으로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대학교에서 학문을 하는 분들은 어떤 이름으로 이 나무와 꽃을 가리킬까요. 서울이나 도시에서 신문·잡지·책·방송을 만드는 분들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글을 쓸까요. 초·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분은 어떤 이름으로 아이들한테 가르칠까요.


  예전에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따뜻한 마을에서만 자랐다고 하는 배롱나무라고 하지만, 요사이는 서울까지도 이 나무가 치고 올라간다 합니다. 예전에는 감나무가 충청도를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요새는 서울이나 인천 골목집에서도 감나무를 곧잘 키워요. 서울에서도 고운 꽃나무 구경하니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으나, 곰곰이 살피면 날씨가 엄청나게 무너졌다는 뜻이에요. 그나저나, 서울에서까지 배롱나무가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또 ‘간지럼나무’라는 이름은, 남녘에서 북녘으로 얼마나 제대로 퍼지는가 모르겠습니다. 따순 남녘 마을에서만 자라던 고운 꽃나무 가리키는 예쁜 이름을 북녘 마을에서도 살뜰히 아낄 수 있기를 빕니다. 4346.9.1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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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24] 풀춤과 풀노래
― 무얼 하면서 놀까

 


  아이들과 살아오며 이 아이들과 무얼 하면서 놀면 즐거울까 하고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을 가만히 비우고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면, 서로 즐겁게 놀 여러 가지가 어느새 떠올라요. 미리 생각해야 하지 않아요. 따로 찾아 놓아야 하지 않아요. 자전거를 타든, 두 다리로 걷든, 군내버스를 타든, 대청마루에 앉아 빗줄기를 즐기든, 그때그때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놀이가 됩니다. 숲 사이를 걸으면 숲놀이가 됩니다. 바닷물을 밟으며 뛰면 바다놀이가 됩니다. 들 한복판에 자전거를 세우고 걸으면 들놀이가 됩니다. 마당에서 꼬리잡기를 하면 마당놀이가 됩니다. 밥을 먹다가 아그작아그작 소리를 내며 까르르 웃으면 밥놀이가 됩니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모든 삶은 일이면서 놀이로구나 싶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일이요 놀이입니다. 아이를 안아도 일이 되면서 놀이가 됩니다. 아이 머리를 빗으로 빗겨 고무줄로 묶을 적에도 일이 되지만 놀이가 되어요. 아이 앞에 공책을 펼치고 한글을 또박또박 적어 보여준 뒤 따라서 적으라 할 적에도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차리는 밥이란 일이자 놀이입니다. 설거지 또한 일이자 놀이입니다. 빨래도 걸레질도 모두모두 일이 되고 놀이가 돼요.


  풀밭 앞에 선 큰아이가 문득 빙그르르 돕니다. 제자리돌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풀밭에서 추는 춤이나 풀밭 언저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아이한테 가르친 적 없습니다. 큰아이는 제 마음결에서 샘솟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입을 달싹입니다. 스스럼없이 춤이 나오고, 거리낌없이 노래가 흘러요.


  무얼 하면서 놀아야 할는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온 삶이 온통 놀이가 되는걸요. 무얼 하면서 일해야 할는지 근심하지 않습니다. 온 하루가 오롯이 일이 되어요.


  아이들은 언제나 놀면서 어버이 일을 지켜봅니다. 어른들은 늘 일하면서 아이들 놀이를 바라봅니다. 서로 마주하면서 서로 보여줍니다.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4346.9.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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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23] 놀이터와 일터
― 시골에서 농약 쓰는 까닭

 


  아이들이 흙땅에서 실컷 뛰고 구르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땀 송송 흘리면서 흙땅을 박차고 놉니다. 아이들은 흙땅에서 뒹굴기도 하고, 흙땅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손이며 발이며 얼굴이며 온통 흙투성이 되어 개구지게 놉니다.


  아이들은 고샅에서든 밭고랑에서든 들에서든 숲에서든 뛰어놀고 싶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온몸을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 뛰어놀 흙땅에 농약을 뿌렸다면? 아이들을 놀리지 못합니다. 농약을 뿌린 흙땅 자리에는 어른도 쪼그려앉아서 쉬지 못합니다. 농약냄새 코를 찌르면서 어지러울 뿐 아니라, 농약 기운이 몸에 스며들 수 있으니, 아이들이 이런 데에서 놀지 못하는데다가, 어른들도 이런 곳에서 쉬지 못해요.


  오늘날 시골에서는 젊은 일손 모자라서 농약을 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젊은 일손 모자라는 탓만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지 않으니 농약에 손을 뻗고, 논밭에서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일하거나 놀지 않으니 자꾸자꾸 농약에 기댑니다.

  시골에 집이 있어도 아이들이 흙땅에서 안 놀아요. 어린이집에 가거나 학교에 갑니다. 아이들은 면내나 읍내에서 놀려 하지, 마을이나 들판이나 바다나 숲에서 놀려 하지 않아요. 오늘날 아이들은 시골내기라 하더라도 시골하고 엇갈리거나 등집니다. 어른들 일하는 곳 곁에서 놀지 않는 아이들 되다 보니, 어른들은 시나브로 흙땅에 농약을 칩니다. 아이들이 밭둑이나 논둑 풀베기를 거들지 않다 보니, 어른들은 풀베기 할 자리에 농약을 뿌립니다.


  더 생각하면, 오늘날 시골에서 시골 어른들은 시골 아이들을 시골에 남겨 흙을 일구며 살도록 가르칠 뜻이 없습니다. 하루 빨리 시골 벗어나 도시에서 돈 잘 벌고 몸 안 쓰는 일거리 찾기를 바랍니다. 시골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한테 시골일 물려주지 않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린이도 푸름이도 젊은이도 시골일하고 등지거나 모르쇠로 자라다가 도시로 떠나요. 이러는 동안 시골 어른들은 모든 흙일을 농약과 화학비료에 기대어 합니다.


  시골에 젊은 일손 다시 늘어나도록 하자면, 농약과 화학비료에 기대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껴요.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되어 이녁 아이를 낳으면, 철 따라 손자 손녀 데리고 올 텐데, 손자 손녀 누구도 농약범벅이 된 흙땅에서 못 놀아요. 농약으로 더러워진 도랑물을 만질 수 없어요.


  아이들이 흙땅에서 놀다가 저희 밭둑이나 논둑에서 오줌을 눌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흙땅에서 놀다가 힘이 들면 밭둑이나 논둑에 드러누워 하늘바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밭 한쪽에 시원스러운 나무그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일하며 쉬기에 즐거운 들과 숲과 마당이라면, 아이들이 놀며 쉬기에 즐거운 들과 숲과 마당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 만한 데라면, 바로 어른들이 즐겁게 일할 만한 아름다운 삶자리입니다. 4346.9.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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