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37] 씨앗을 뿌리자
― 코스모스 꽃밭 되면

 


  마을 어르신들은 고샅이든 집이든 마당이든 풀빛이 없도록 애쓰십니다. 마을 빨래터에도 풀 한 포기 없도록 모조리 뽑으십니다. 참말 풀을 아주 삭삭 훑어서 없애십니다. 설과 한가위 찾아오면 마을마다 방송을 하면서 ‘도시에서 딸아들 찾아오니 큰청소 하자’고 부산을 떨어야 하지요. 왜 도시사람, 아니 도시로 떠난 딸아들 눈치를 보며 마을을 치워야 하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새마을운동 때문에 이런 버릇이 몸에 배셨지 싶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풀을 미워하면서 모조리 없애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요즈음 마을 어르신한테는 모시풀도 유채풀도 그저 잡풀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들빼기도 씀바귀도 번거로운 잡풀일 뿐입니다. 제비꽃이나 괭이밥을 알뜰히 건사할 일이 없습니다. 풀로 몸을 다스리지 않고, 다친 곳에 풀물이나 풀가루를 바르지 않습니다. 풀잎사귀를 알맞게 뜯어 나물밥이나 나물죽이나 나물무침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풀만 보았다 하면 농약을 뿌리고 기계로 모가지를 자릅니다. 남김없이 뿌리를 뽑으려 할 뿐입니다.


  가을이 지나며 차츰 시드는 코스모스인 터라, 꽃이 지는 코스모스는 마을마다 모가지를 뎅겅뎅겅 잘라서 없애기 바쁩니다. 꽃이 필 무렵에는 그대로 두지만, 꽃이 질 적에는 씨앗을 맺기까지 놓아 두지 않아요. 괜히 성가시다고 여기시는구나 싶고, 지는 꽃을 예쁘게 마주하지 못하시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가으내 흐드러지던 코스모스 풀포기를 우리 마을에서나 이웃 마을에서 도무지 찾아보지 못합니다. 이러다가 마을하고 퍽 떨어진 어느 큰길사에서 씨앗을 매단 코스모스 풀포기를 보았어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씨앗을 한 줌 건사했어요.


  그리고, 이 씨앗을 큰아이와 함께 우리 집 돌울타리를 따라 솔솔 뿌립니다. 이 작은 씨앗이 우리 집 돌울타리를 따라 마을 고샅 가장자리에서 잘 뿌리내려 이듬해에 예쁜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요. 아무렴, 잘 피어나겠지요. 아쉽게 어느 씨앗도 피어나지 못한다면, 다시 코스모스 씨앗을 건사해서 뿌려야지요. 유채 씨앗과 고들빼기 씨앗도, 민들레 씨앗과 박주가리 씨앗도, 살금살금 건사해서 돌울타리 따라 흙바닥 살짝 드러난 자리에 뿌립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온갖 꽃이 돌울타리 따라 조물조물 올라올 적에도 그저 목아지 뎅겅뎅겅 자르실는지, 슬쩍 농약을 뿌려 모두 태워 죽이실는지 모를 노릇입니다만, 시골은 시골답게 풀내음과 풀빛이 그득하면서 꽃내음과 꽃빛이 곱게 물들 적에 아름답다고 느껴요. 4346.12.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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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모임에서 친구에게 받은 선물꾸러미 속에, 비닐팩에 들어 있는
'나팔꽃씨'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출근길마다 아파트 담장아래
피어 있던 나팔꽃이 너무 예뻐서 매일매일 "안녕!" 인사를 나누고 다녔는데, 어느날 바스라질 듯
씨방이 터져 떨어져 주워 왔대요.^^ 그리고 코스모스씨앗 보았니? 물으니 그럼 봤지, 내가 코스모스꽃을 너무 좋아해 한때는 코스모스밭을 갖는게 소원이었단다~ㅎㅎ
이 이야기를 듣고, 새삼 나팔꽃씨앗을 들여다 보는데...왠지 문득, 이 나팔꽃씨앗을 벼리와 보라에게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즐거웠어요~ㅎㅎㅎ

숲노래 2013-12-23 11:04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흥에서 나팔꽃씨를 이래저래 주워 모으기는 했는데, 뿌린 적 있는지 알쏭달쏭하네요 @.@

벗님이 나팔꽃한테 인사를 하고 다니셨다니,
참말 예쁘며 멋진 하루를 누리셨겠어요!
 

[시골살이 일기 36] 밥상에 고구마풀
― 집안을 밝히는 푸른 빛

 


  지난 십일월 첫머리에 이웃 할매가 고구마 캐실 적에 일을 거들며 고구마를 조금 얻었어요. 그때 쥐가 쏠아서 이래저래 먹기 힘들 듯해서 버린다고 하는 고구마 가운데 서넛은 물을 담은 병에 놓아 줄기 오르는 모습을 보자 싶어 따로 챙겼습니다. 이레쯤 여러 병에서 고구마 잎사귀 푸르게 올랐는데, 꼭 하나만 남기고 모두 잎을 더 뻗지 못하고 속으로 썩었어요. 부엌 창가 자리는 저녁에 찬바람 새어 들어오니 추워서 이렇게 되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저녁에는 따순 곳으로 옮겼다가 낮에 창가 자리로 두어야 하나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하나 남은 고구마풀은 씩씩하게 한 자리에서 잎사귀를 내놓으며 한 달 남짓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밥상머리에 놓은 고구마풀은 밥을 차릴 적에 언제나 들여다봅니다.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서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밥상머리에 꽃그릇을 하나쯤 두는 까닭을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차린 밥을 기쁘게 웃으면서 누리도록 북돋우는 빛이 바로 꽃 한 송이한테서 우러나오는구나 싶어요. 시골에서는 문만 열면 바로 풀밭이요, 앙증맞은 풀꽃을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요. 십이월로 접어든 시골이라 하더라도, 동백꽃이 피고, 동백나무 둘레에도 밭둑과 길가에도 때이르게 피어나는 봄꽃이 있어요. 별꽃과 코딱지나물꽃은 벌써부터 작은 꽃망울 내놓고, 방가지똥도 이 추운 겨울에 노랗게 꽃을 피워 하얗게 씨앗을 맺어요.


  고흥은 날이 포근하니 겨울에도 겨울콩을 심습니다. 십이월을 지나 일월이 다가오는데에도 밭자락 군데군데 하얗게 콩꽃이 올라옵니다. 콩씨를 조그마한 꽃그릇에 심어서 밥상머리 한쪽에 놓아도 참 좋겠구나 싶기도 해요. 콩이 자라는 모습을 밥을 먹으면서 함께 누리고, 콩꽃이 피어 맑은 빛깔을 밥을 먹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도 부엌이나 밥상에 꽃그릇을 살그마니 올렸을까요. 굳이 집안에까지 꽃그릇을 마련해서 꽃을 보려고 하던 사람은 없었을까요. 마당 한쪽을 꽃밭으로 가꾸어 바라보기만 하면 넉넉하다 여기고, 애써 밥상이나 부엌에는 꽃그릇을 놓을 까닭이 없다고 여겼을까요.


  참말 집 둘레 어디나 풀밭이고 꽃밭인 셈이니, 꽃그릇을 굽는다든지 마련한다든지 안 해도 된다고 느끼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고구마 한 알이라든지 당근 꽁당이라든지 가만히 놓고 푸른 줄기 올라오고 푸른 잎 뻗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쏠쏠하게 즐거운 살림 되리라 느껴요. 아이들이 마당에서 겨울에도 흙놀이를 하더라도, 집안에서 새롭게 푸른 빛을 바라보는 살림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어요. 4346.12.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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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35] 20대가 없는 고흥
― 도시로 떠날 아이들 만나고

 


  아침에 읍내로 군내버스를 타고 간 뒤, 읍내에서 도양읍으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갑니다. 도양읍 버스역에서 도양읍을 살짝 한 바퀴 돌고 나서 녹동고등학교로 갔어요. 오늘은 아침에 한 시간 반 동안 녹동고 3학년 푸름이하고 ‘삶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푸름이는 대입시험을 마쳤으며, 고등학교를 마치면 곧 도시로 떠나 대학교를 다닌다고 해요.


  그런데, 입시에 시달리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을까요. 아이들은 처음부터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자기도 합니다. 1/4쯤은 잠을 부르고, 1/4쯤은 맨 뒤에 앉아서 등을 돌린 채 수다를 떱니다. 그렇지만 1/2이 되는 아이들이 저를 바라보면서 눈빛을 밝혀요. 그래서 자는 아이는 굳이 깨우지 않기로 했어요. 이야기보다 잠을 바라는 아이라면 잠을 자야 맞아요. 이야기보다 저희끼리 수다를 떨 아이들도 저희끼리 수다를 떨어야지요.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도시를 떠나 시골마을 고흥으로 온 까닭을 들려주고는, 아이들더러 “고흥에 무엇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어요. ‘영화관’이 없고 ‘백화점’이 없다고 말하더니, 누군가 ‘20대’가 없다고 말해요. 무엇이 없느냐고 물은 뒤 ‘고흥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어요. 그래, 너희 말대로 고흥에 20대가 없지. 그러면 왜 고흥에 20대가 없을까?


  녹동고등학교뿐 아니라 고흥고등학교에서도 고3 아이들은 입시를 마치고 모두 고흥을 떠나 서울로 가요. 고흥을 한 번 떠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도록 고흥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처음에는 명절날 맞추어 돌아오다가도 나중에는 아예 안 오기 일쑤예요. 그러니, 고흥은 남녘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줄어드는 시골입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내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눈빛을 맑게 밝히는 아이라면 가슴으로 아로새겨 주리라 믿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갖고도 한국말사전 만드는 일을 이 시골에서 하는 마흔 살 아저씨는, 고속도로와 골프장과 공장과 발전소와 군부대를 비롯한 위해시설뿐 아니라 극장도 백화점도 아파트숲도 없이 조용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 시골에서 뿌리내릴 생각이라고, 우리 집 아이들이 커서 나중에 이곳을 떠나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은 고향이 되도록 집숲을 일구어 나무와 풀과 꽃과 흙과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사랑하며 살아갈 생각이라고, 찬찬히 말했어요.


  예쁜 아이들아, 왜 고흥에 20대가 없는 줄 아니? 다들 대학교만 바라보고 회사원이나 공무원만 바라보면서 우리 삶터이자 고향인 이 시골에 어떤 빛과 꿈과 사랑이 있는 줄 하나도 살피지 않고 아끼지 않기 때문이란다. 숲을 바라보지 않고, 바다를 껴안지 않으며, 나무와 풀과 흙을 보듬지 않기 때문이란다. 4346.12.1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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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34] 대문을 열면
― 삶그림

 


  대문을 열면 언제나 아름다운 그림 하나 우리 앞에 드리웁니다. 대문 뼈대를 그림틀 삼아 바깥을 바라보며 늘 아이 좋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날마다 누리니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 이웃 할매와 할배 모두 아름다운 그림을 언제나 누리기에 일흔이나 여든 나이에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흙을 만지며 살아가실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큰아이가 대문 뼈대를 밟고 그네놀이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제 더는 대문 뼈대를 그네로 삼는 놀이는 못 하게 할밖에 없어 아이한테 미안하지만, 나중에 대문틀을 튼튼하게 마련할 수 있으면 그때에 놀면 돼요. 아무튼, 큰아이가 한참 그네놀이를 대문을 밟으며 할 적에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데, 대문 뼈대 밟고 오락가락하면서 바깥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적에, 꼭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다 감추었다 하는 느낌이 들어요. 새삼스럽다고 할까요, 새롭다고 할까요. 사랑스럽다고 할까요, 산뜻하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같은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국민학교 다닐 무렵인데, 학교에서 ‘어른인 교사’들은 무언가 가르치면서 으레 ‘그림 같은 집’이라는 말을 썼어요. 아주 멋있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 할 적에 ‘그림 같은’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림 같은 집이란 돈으로만 이룰 수 없으리라 느꼈어요. 이러면서 나는 나중에 반드시 그림 같은 집에서 살겠어, 하고 생각했어요. 대문을 열면 언제나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지는 집, 대문을 열지 않더라도 마당에서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누리는 집, 마당으로 내려서지 않고 대청마루에 앉더라도 아름다운 그림을 즐기는 집, 대청마루 아닌 방이나 부엌에서도 늘 그림이라 할 이야기를 한껏 가꾸는 집에서 살림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돈을 벌거나 모아서 그림 같은 집에서 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내 삶은 그림 같은 집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지겠다고 느꼈어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그림 같은 집을 누릴 수 있는가 하고 따지지 않았어요. 어디에서라도 우리 집은 늘 그림 같은 집이 되기를 빌었어요.


  이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들은 무슨 꿈을 꿀까 궁금합니다. 아이들 아버지는 그림 같은 집을 꿈꾸다가 참말 그림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데,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꿈을 그려 어떤 아름다운 빛을 이 지구별에서 이룰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살아가는 나날을 두근두근 설레면서 손꼽아 기다립니다. 4346.12.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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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33] 밖에서 먹은 것 내놓기
― 물맛과 바람맛 사뭇 달라

 


  시골에서 살아갈 밑돈을 도시에서 법니다. 도시를 가끔, 한두 달에 한 차례쯤 드나들며 이럭저럭 살림돈을 법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시골집을 나선 뒤, 시외버스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는데, 시골마을 나설 때부터 ‘이 좋은 바람을 한동안 못 마시네’ 하고 느껴요. 우리 집 맑은 물을 두 병 챙겨 길을 나서는데 ‘이 좋은 물을 알뜰히 아껴서 마셔야겠네’ 하고 다짐합니다.


  도시에서는 샘물을 페트병에 담아서 팔아요. 공장에서 척척 찍어내고, 짐차에 그득 실어 날랐다가, 가게에 척척 쌓아 형광등 불빛을 받아요. 도시사람 먹는 샘물이란 모두 깊은 시골마을 아주 조용하고 한갓지며 깨끗한 곳에서 흐르던 물일 텐데, 막상 이 조용하며 한갓지며 깨끗한 숨결 깃든 물을 도시로 보낼 적에는 가공식품처럼 다룹니다. 햇볕도 바람도 나무도 꽃도 마주하지 못하는 물이 되어요.


  시골물 다 마시면 페트병 물을 사다가 마셔요. 페트병 물도 시골물이지만 맛이 달라요. 석유화학물에서 뽑은 플라스틱병에 오랫동안 담겼거든요. 어마어마한 기계가 땅을 파헤쳐 뽑아올렸거든요. 아무리 깨끗하고 예쁜 시골물이라 하더라도, 플라스틱병에 담기기까지 고달프고, 플라스틱병에 담긴 뒤로도 고단해요. 페트병 시골물이 가게에 놓인 뒤에도 오랫동안 냉장고나 창고에 갇힌 채 시달려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병원을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물 때문이 아닌가 하고 느껴요. 물꼭지를 틀어서 마시는 물은 시골마을 여럿 물에 잠기게 하는 댐부터 이은 물인데, 흙바닥인 곳에서 흐르는 냇물 아닌, 시멘트 물관을 거쳐서 흐르다가 플라스틱이나 쇠로 만든 관을 거쳐 얻어요. 도시에서는 페트병이든 물꼭지이든, 또 정수기이든, 사랑스러우면서 반가운 물이라기보다 고단하면서 괴로운 물을 마시는 셈이에요.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물이 차분하거나 느긋하게 쉬지 못한 채 들볶이다가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셈이에요.


  도시로 일하러 마실을 갈 적에는 으레 물잔을 한동안 들여다봐요. 내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니, 부디 네 맑은 빛으로 돌아가렴, 내 몸으로 스며들면서 고운 네 넋 되찾으렴, 하고 마음속으로 빌어요.


  도시에서 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며칠쯤 배앓이를 합니다. 집 바깥인 도시에서 먹은 것을 여러 날에 걸쳐 배를 끙끙 앓으며 내놓습니다. 물은 물대로 물맛이 다르고, 마을과 집 둘레를 흐르는 바람은 바람대로 바람맛이 달라요. 몸과 마음을 살리는 물과 바람을 싱그럽게 새로 맞아들이면서 속비우기를 해요. 속비우기 여러 날 하며 다른 일은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데, 며칠 지나면 기운을 되찾아 다시 즐겁게 시골살이 누립니다. 4346.1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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